Friday, January 31, 2014

Chaehongsa 採紅使,the official courtesan recruiters

採紅使(チェホンサ=채홍사)

http://blog.goo.ne.jp/dive-gurukun/e/0382593311a7d2b1b6fc34308441d294
<207> チャングム考察⑪ 採紅使
2006年05月29日 | チャングム
第30話では、チャングムの新たな師匠、医女のチャンドクの生い立ちが彼女の告白で明らかにされた。

彼女が淡々と語った内容は『医女 長徳の誓い』が制作できるほどの壮絶なものだった。

彼女は両班の子女であったが、彼女の母親が都から来た「採紅使(チェホンサ)」なる役人に拉致される。

この「採紅使」は正確には「採紅駿使」と言って国中から美女並びに駿馬を宮中に運上する為の役人だ。

悪名名高き「燕山君(ヨンサングン)」の代、1504年「甲子士禍」を引き起こす側近の任仕洪(イム・サホン)が特別に創設任命したそうだ。

女性と馬を同列に扱っているだけあって、その美女狩り(?)は既婚の妻妾まで一切かまわずの強奪だった。

都では宰相クラスの奥方から族類(縁戚関係)の妻女まで手当たり次第だった暴君の為、奸臣、任仕洪は地方にこのような役人を放ったようだ。

実際、暴政に耐えかねた臣下が1506年に燕山君の弟「晋城大君(チンソンデグン→後の中宗)」を擁立して起こしたクーデター「中宗反正」の首謀者の一人、朴元宗(パク・ウォンジョン)は自分の姉(第9代、成宗(ソンジュン)王の兄、「月山大君(ウォルサンデグン)」の後妻・・・つまり燕山君の伯母となる)が燕山君に犯されている。

彼女は自害。

朴元宗自身も燕山君の気分で左遷させられたり復職をしたりと振り回されていたが、この事件で粛清の意が固まったと思われる。

1505年クーデターの前年には「採青使」と言う新たな官位ができた。

紅→青の変化でもお気づきだろう、8歳~12歳の容色優れた女の子を集める役人だ。

宮中を中心とした風俗紊乱振りがうかがえる。


チャンドクの母親は自決し、父親もまた妻を奪還する事叶わず自害する。

不敬罪を問われ財産は全て没収、残されたチャンドクは使用人であった私奴婢に育てられる。

仇を討つため医女となり、「採紅使」だった男を追って宮中に入るが、だぶん「中宗反正」の際、流刑された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が、その流刑地、済州島(チェジュド)まで後を追ったのだった。

思ったことを口にし、さすがのチャングムさえ辟易しているチャンドクだが、秘した深い悲しみを知ると改めてその偉大さを感じる。

医術の道で男のウンベクと女のチャンドクは共にチャングムの良き理解者、支援者となるが、男社会の中の理想論を説くウンベクに対し、チャンドクの反骨精神に溢れた行動は何度もチャングムを救っていく。



※この辺りの史実についてはここを読んで頂けるとありがたいです。



http://www.kjclub.com/jp/exchange/theme/read.php?uid=10807&fid=10807&thread=1000000&idx=1&page=1&tname=exc_board_11&number=7482
で、清が朝鮮に課した朝貢の内容を見てみましょ。
おなじみ『清史稿』&『李朝実録』

「每年進貢一次其方物黃金百兩白金千兩水牛角二百對貂皮百張鹿皮百張茶千包水獺皮四百張青黍皮三百張胡椒十斗腰刀二十六口順刀二十口蘇木二百觔大紙千卷小紙千五百卷五爪龍蓆四領花蓆四十領白苧布二百疋綿綢二千疋細蔴布四百疋細布萬疋布四千疋米萬包」

「歳幣以黄金一百両白銀一千両水牛角弓面二百副豹皮一百張鹿皮一百張茶千包水㺚皮四百張青黍皮三百張胡椒十斗好腰刀二十六把蘇木二百斤好大紙一千巻順刀十把好小紙一千五百巻五爪龍席四領各様花席四十領白苧布二百匹各色綿紬二千匹各色細麻布四百匹各色細布一万匹布一千四百匹米一万包為定式。」

アレ?美女二千人とか三千人ってどこ?
毎年金百両、銀千両、水牛の角二百対(四〇〇本)、テンの毛皮百枚、鹿の毛皮百枚、お茶千袋、獺の毛皮四〇〇枚・・・・・胡椒だの刀だの紙だの布だの・・・米一万袋。
美女もなければブスすらない。そりゃダレさんと愉快な仲間達も公的な史料など見つけられるはずもございません。初めからそんな条項ないのだから。( ´H`)y-~~

ちなみに、清代にも貢女はありましたけど、6人+侍女10人。しかも結婚は破談。( ´H`)y-~~

http://blog.daum.net/dnjsejvnfrla/7099569

줄거리
Che Honsa movie in 1965



홍사는 전국의 미녀들을 찾아내는 직업이다. 폭군 연산에게 진상할 미녀들을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던 채홍사들의 횡포는 날이 살수록 심해졌다. 결국 인샘은 흉흉해지고 반정군이 봉기하게 된다. 대궐을 점령한 반정군들은 폭군 연산을 교동 밖으로 추방한다.



http://amn.kr/sub_read.html?uid=7588&section=sc4


송해, 박근혜는 앞으로 한을 풀러 살아온 사람...
박정희의 '한 맺힌 분을 풀어드려야 한다'며 지지

서울의소리 ㅣ 기사입력 2012/12/16 [10:27]
송해 "박근혜는 국가 위해, 한 풀려 살아온 사람" 지지

방송인 송해씨가 15일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에 대해
지지선언을 하면서 "조상(박정희)께 바칠 효도의 의미가 있다면,
한 맺힌 분을 풀어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송씨는 이날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 광장에서
"이 세상 지구 상 어디를 돌아봐도 우리 박 후보만큼 불행한 분도 없다.
양친을 흉탄에 잃어버리고 40년 세월을 동행하는 사람 없이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앞으로 한을 풀려 살아온 사람"이라고
박 후보를 소개하며 이같이 밝혔다.

[CBS 윤지나 기자]



송해씨... 정신차리세요...

아비의 한을 풀기 위해 나왔다면,,,
김재규 무덤에 가서 풀어야지 왜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가 말이지요...
송해씨 민주사회에 살면서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면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경의라도 표하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신나갔나요?
놀이터에 놀러만 다니더니 이번 선거가 놀이인줄 아시니요?
과거 이승만 정권하에서 연예인들이 정치깡패들의 노리개로 살아야 했던 시절...
임화수의 노리개 되어 "눈물의 곡절" 소리를 들어야 했었던 고 김희갑선생...
박정희 술판에 불려다녀야 했던 어린 연예인들...
그들의 고통을 기억한다면 어찌 그런 말을 감히 할수 있단말이요?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하였다면 당신은 철면피요...
이걸 모르고 말했다면 보고나서 그 발언을 당장 철회하시요...


유신 독재시절 박정희 여자 200여명!
http://amn.kr/sub_read.html?uid=6669&section=sc1&section2=

그중 한분의 사연입니다.
아기있는 신혼 여배우를 성 노리개 삼다 강제 이혼시켜...

서울의소리 ㅣ 기사입력 2012/09/18 [23:10]
1960년대 후반까지 영화 두 편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 한국 영화의 톱스타로서 앞날이 촉망되던 미모의 영화배우(서울 명문대 출신)가 있었다.

당시 결혼 1년 만에 첫아들까지 얻는 등 행복한 신혼생활로 동료 선후배 배우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어느 날 난데없이 청와대의 채홍사(採紅使, 연산군 때 전국의 창기 중 미인을 뽑아 왕에게 바치던 벼슬아치) 한 분이 신부 혼자 있는 신혼집에 나타난 것이다. "각하(박정희)께서 모셔오라는 명령이십니다. 잠깐 청와대에 다녀오시게 화장하시고 15분 이내로 떠나실 준비를 하세요" 하는 게 아닌가!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워낙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에 응했던 연예인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내게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체념과 함께 사랑하는 남편과 갓난 아들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 그러면서 "이제 갓난애의 엄마로서 신혼 유부녀입니다. 홀로 있는 연예인들이 많은데 저는 좀 빼 줄 수 없을까요?" 하고 애원했다.

당시 많은 연예인들이 각하의 부르심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였던 것과는 달리 이 여인은 현 남편과 만날 때 까지 연애 한 번 못 해 본 순진한 여성이었으니 각하의 부름은 상상도 못 했던 충격 바로 그것이었다. 허나 각하가 어떤 사람이라고 그런 말이 통했겠는가.

"잠간 다녀온다는데 웬 말이 그렇게 많아요?"하고 위압적인 자세를 취한 채홍사의 자세를 보고 더 반항했다가는 자신도 또 영화제작 스텝인 남편도 당장 영화계에서 매장될 것을 안 여인은 순순히 따라나설 밖에 없었다.

▲박정희가 여자를 불러다 성 노예로 삼았던 궁정동 안가 © MBC드라마 제 5공화국 화면

안내된 곳은 청와대가 아닌 그 옆의 다른 장소(후에 알고보니 궁정동 안가)로 그 다음 날 새벽까지 각하의 '성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눈이 퉁퉁 부어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뜬눈으로 밤을 샌 듯 샐쭉해진 얼굴에 눈물이 글썽, 역시 울고 있는 부인의 설명을 듣고 부드럽게 위로해 줬다. "옆집에서 검은 차가 당신을 태우고 갔다기에 다른 연예인들처럼 우리에게도 차례가 온 것을 알았다"며 부인을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

그런데 1회용으로 끝나던 다른 연예인들과는 달리 이 여인에게는 1주에 한 번씩 계속 채홍사가 찾아 왔다.

한 달이 지났다. 그간 체념 속에서 살아 온 남편은 이날 따라 울상을 하면서 "여보, 놀라지 마, 나 오늘 무시무시한 곳에 끌려갔다 왔어, 최단 시일 내에 당신과 헤어져야 두 사람 모두 심신이 편할 거라는 협박이야, 아무래도 우리 갈라서야 하나봐. 어쩌지?" 하며 울먹였다.

부부는 밤새도록 뿌리칠 수 없는 운명을 원망하며 울고 또 울었다. 둘이 모두 사는 길은 빠른 시일 내에 이혼하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 주는 길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 밖에는 다른 길이 안 보였다.

그러고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남편은 바로 그 뒷날부터 자취를 감추었고 방안에서는 남편이 쓴 쪽지 한 장이 발견됐다. "여보,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밖에 기다리고 있어, 따라가야 해. 날 찾지 마. 그게 당신도 사는 길이야. 우리 아이를 잘 길러 줘. 먼 훗날 다시 만나, 사랑해 여보."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각하는 한 밤 중에 여인과 몸을 섞고 나더니 '내가 부자 미국인을 소개할 테니 당장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 살라'고 명령했다. 여인은 무슨 후환이 있을지 두려워 목을 앞뒤로 흔들었지만 내심은 각하의 속박에서 해방된다는 희망 섞인 기쁨도 자리했다.

신랑은 뜻밖에도 60이 넘은 미국계 할아버지로 신부 될 여인의 아름다움에 마냥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노인은 결혼 후 미국에서 6년 만에 많은 재산과 아들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40여 년 전에 이토록 기구한 운명을 지녔던 할머니(현재 77)가 순간이나마 행복했던 신혼시절을 회상하며 현재 미국 하늘 아래 전 남편의 아들, 미국인 남편의 아들 등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후 전 남편과는 자신이 재혼한 탓도 있어서 완전히 소식이 두절 되었다고 한다.

최근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유과학문화기구)가 전 세계 독재자들의 '인권유린보고문'을 발행했다는 소식이다.

그 중에는 김정일이 미인을 납치 후 자기 종신 첩으로 썼던 사건도 포함돼 있다.

▲ 연예인과 악수하는 박정희

필자가 궁금한 것은 박정희가 일회용품 내지 소모품으로 쓰던 2백여 명의 여성(김재규 변호인 이동일 변호사가 확인한 채홍사 한 명의 수첩에 기록된 것만 2백여 명임)에 관련된 내용은 왜 포함돼 있지 않느냐는 것, [잊혀진 특보] 유신 독재시절 '박정희 여자 ' 200여명! 이 점에서는 단연 박씨의 악행이 김정일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말이다.

한국의 역대 어느 임금도 유부녀를 자기 노리개로 빼앗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천인이 공노할 일이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면 한국 국민의 의식 수준이 대통령 될 자와 되어서는 안 될 자를 가릴 수 있는 정도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인지...

the throne succession conflicts in Korean initial era and playing "Tuho"

투호놀이(投壺--)

Tuho (투호) or Touhu (Chinese: 投壺) is a traditional Chinese and Korean game that requires players to throw sticks into a large, sometimes ornate, canister. The game is a traditional diversion on Korean New Year's Day and Chuseok. Modern versions are often played with a simple canister and rubber-tipped arrows. The arrows used are usually between 50 and 60 cm long, and are thrown at the arrow vase from around ten paces away. :wiki


한국어: 임하투호(林下投壺) '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소장
English: "Playing a tuho game under the forest" (transliteration: Imha tuho) from Hyewon pungsokdo by 19th-century Korean painter, Hyewon. Original stored at Gansong Art Museum in Seoul, South Korea
날짜
한국어: 조선시대, 1805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
English: In the late Joseon period, presumed after 1805




http://www.ritsumei.ac.jp/acd/cg/lt/rb/619/619PDF/hiraki.pdf
二〇四
朝鮮時代初期における王位継承争いと「投壺」
はじめに
「投壺」は、高句麗、百済などが、早くから中国文化の影響を受けるなかで伝播されていた儀礼であるが、その後高麗時代には、ほとんど行われなくなっていたように思われる。
ところが、朝鮮王朝時代にはいって、最初の王位継承争いが終わった第三代の太宗時代に、突如として「投壺」が復活して催されるようになった。朝鮮時代初期の王権と官僚との関係について考察を進めていくなかで気づいた事象の一側面であるが、その実態について考察を進めるあいだに、朝鮮王朝時代にはいり、刑法として中国の明律が導入されて施行されるようになって以後、国王や国家に対する反逆罪を犯した者にたいする刑罰に、連坐・縁坐制が徹底して適用されたところから、初期の王位継承争いをめぐって、多数の支配階層の官僚及びその家族、親族がこの明律を適用されて重い刑罰を科された事実があり、その悲惨な法制によって生まれた王族と官僚間との信頼関係を修復するために、国王が考案した方法の一として、酒宴などと共に、この「投壺」が行わ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点に着目して考察を試みたものが本小報告である。 
すでに、世祖の宗親・功臣親和策について考察し、世祖が酒席を設けて盛んに宗親と官僚たちとの親睦をはかっていたことについて論究され

平 木   實

てはいるが、「投壺」については、言及されていないので、本報告はそれを補完する意義があると考える。
一、太宗の王位簒奪経緯
世祖(在位一四五六.一四六八)の王位簒奪事件について説明する前に、まず王朝初期に起きた王位継承争いについて簡略にみてみる。
太祖李成桂(在位一三九二.一三九八)には、芳雨、芳果、芳毅、芳幹、芳遠、芳衍、芳蕃、芳碩の八人の王子がいた。芳雨から芳衍までの六人は、王妃韓氏の所出であり、芳蕃と芳碩は継妃康氏の所出であった。『朝鮮王朝実録』の記録によれば、太祖元年八月、家臣の裵克廉、趙浚、鄭道傳などが、王位後継者となる「世子」を確定することを要請した。その際、三人は、年功と功労を配慮して決定してもらいたいと要請した。つまり、長子の芳遠を予測していたものと思われる。国王は継妃の康氏の意向が芳蕃にあるのを重んじて、芳蕃を建てようとしたが、芳蕃の性格が狂奔であるという理由から、功臣などがそれに難色を示した。そこで功臣たちは、ひそかに話し合い、国王はどうしても康氏が生んだ子を立てようとするであろうから、末子なら差し支えないだろうとした。そこで国王は、ついに末子の芳碩を立てることにした。

しかし『大東野乗』所収の『東閣実記』によれば、太祖は後継者の決定にさいし、裵克廉などを召し出して諮ったところ、裵克廉などは、平時であれば嫡子を、乱世であれば功労を先に考えて決定すべきであると答えたので、それを密かに聞いていた康氏の泣き声が外にまで聞こえてきたという。それでその話し合いは中断した。後日、太祖は再度裵克廉などを召し出して諮ったが、その時、裵克廉などは、同じ話を持ち出してはならないとして退席した。しかし康氏は必ず自分の子を立てようとするから、芳蕃は狂暴であり、末子ならば稍可能であると話し合い、結


局芳碩を世子に立てていただきたいと要請した。
鄭道傳、南誾等は、芳碩側について諸王子を疎み、除去しようとはかり、密かに太祖に、王子をすべて地方の王に封じる中国の例に従って王

子たちを各道に封じることを要請した。
ところが、卜者の安植が、「腹違いの王子のなかにも天命を受ける者が一、二ではない」といったので、鄭道傳は、「ただちに之を除けばなにを患らおうか」といったために、義安君(太祖の弟)和がそれを知って五男

の太宗に告げた。
一三九八年の秋八月、太祖が病に臥したので、鄭道傳などは、王の居所を移転することを議論すると偽って、諸王子たちを招き入れ、乱を起こすことに同調する者を内部に留めて謀議をこらさせたが、このことが太宗に漏れた。時に太宗は、諸兄とともに勤政門外にいたのであるが、このときから血なまぐさい継承争いがはじまったのである。太宗が鄭道傳などを探したところ、李稷とともに南誾の妾の家にいるのを発見したので、火矢を放って放火したところ、鄭道傳は隣家の判奉常閔富の家に逃げ込んだ。閔富が、白髪で腹の出た者が入ってきたと叫んだので、兵士たちが入っていくと、鄭道傳が、剣を持ってはい出してきたので、捕らえて太宗の前につきだしたところ、鄭道傳が「もしも自分を生かしてくれれば全力を尽くして補佐いたしましょう。」といった。太宗は、「お
朝鮮時代初期における王位継承争いと「投壺」
前は、すでに王氏を見捨て、さらにまた李氏を見捨てようとするのか」といって、その場で切り捨てた。さらにその子の游と泳も殺害された。こうして建国のさいに最も貢献した鄭道傳は、処罰されたのである。南誾は、こっそりと逃亡して弥勒院の圃幕のなかに隠れているところを追

撃した兵士によって殺害された。
いっぽう、芳碩の党は、軍を出そうとして奉元良に城に登らせ、偵察させたところ、光化門から南山まで武装した騎兵が充満していたので、恐れおののいて敢えて出ようとはしなかった。人々は、それを神助といった。太宗は、入直したすべての兵士に出てくるようにと命じたので、兵士たちがあいしたがって城外に出てきたために、勤政門の南側は、無人になった。
翌朝の明けがた、太祖は、清涼亭に居所を移した。そこで趙浚などが百官を率いてはいり、鄭道傳、南誾らの罪について上啓して、再度世子を封じることを要請すると、太祖は、芳碩に、「お前は、楽になった」と述べたので、芳碩は、拝辞し、賢嬪が泣きすがるのを振り切って出て行った。芳蕃も出してくれるよう要請したので、太祖が「汝が去ることは妨げない」といったので、西門から出て行った。その時、太宗が「汝が私の言うことを聴かなかったためにこういうことになってしまった。さらば さらば」といって送り出したが、芳蕃は、都堂から追撃した兵士によって中途で殺害された。恭靖王(芳果)は、この日、祈祷のために昭格殿に齋宿していたが、変を聞いて徒歩で城外に出て、禿音の村家に隠れていた。翌日、太宗が使いを出して帰るよう要請したので、帰ったとこ

ろ、太祖がこの恭靖王に伝位したのである
これが第二代の国王定宗(在位一三九八.一四〇〇)であり、太祖七年九月の出来事である。
ついで定宗二年正月に、太祖の四男の芳幹が蜂起したが、敗れて流配
二〇五


朝鮮初期王室世系表
され、芳遠が世子に封じられた。しかし定宗は、在位僅か二年で芳遠に王位を譲った。これが第三代の国王となった太宗(一四〇〇.一四一八)である。この太宗代に、朝鮮王朝時代にはいり、はじめて「投壺」の儀礼が行われたことに注目したい。つまり最初の王位継承争いで、もっとも中心的な役割をはたして活動したのが、この太宗(芳遠)であったからであり、またもっとも建国の功臣たちを処刑した人物でもあったからである。
二、世宗の王位継承
太宗は、はじめ長子の.シを立てて世子と定めていた。しかし性格に問題があり、廃しようとしたが、吏曹判書の黄喜、李禝らはそれを不可と
二〇六
.トウ
した。ところが柳廷顕が廃位に賛成したので、第三子のを世子に立てた。これが第四代の世宗(在位一四一八.一四五〇)である。
世宗は英邁な国王として様々な文化事業を展開したことについては、周知の事実であるが、王位を譲った太宗が、上王として軍事権を掌握していた時期に、都總制沈.が「兵曹判書朴習、姜尚仁などが、号令が二所から出るのは一所から出るにしかず」と言っているという話を聞いて激怒し、上記の三名および吏曹参議李灌、領議政沈温など一〇余名を殺
.ユ
害した。世宗には男子が一八人いたが、世子嗣ヒャン(キョウ)、(ジュウ)、.ヨング(ヨウ)、.ク(キュウ)、.ヨ(ヨ)、瑜ュ(ユ)、琳リム(リン)、.ヨム(エン)の八人は王妃沈氏の子である。ちなみに本稿でとりあげる朝鮮時代初期の王室世系表を図示すれば次のようになる。

三、世祖の王位継承

世宗が崩御すると長子の嗣が王位を継承した。これが文宗(一四五〇.一四五二)であるが、わずか在位二年で崩御したために、世子弘.(コウイ)が一二歳の幼沖で王位を継承した。これが第六代の端宗(一四五二.一四五五)である。しかし叔父たちの権勢に圧倒される環境に置かれ続けた。文宗は、死に臨み、領議政皇甫仁、左議政南智、右議政金宗瑞に命じて、端宗の補佐をさせることにしたのであるが、南智が病気を理由に辞退したので、左賛成鄭笨が左議政についた。そのほか世宗の付託を受けて、集賢殿学士の成三問、朴彭年、河緯池、申叔舟、李.、柳誠源なども補佐することになっていたが、次男の.(世祖)が王位簒奪に走り、端宗にたいして自ら絞首させ、金宗瑞、皇甫仁などの多数の官僚を殺害したあと、三男の安平大君.も謀叛を企てているとして江華島に流配した。その後安平大君は、側近官僚の強力な主張によって死を賜った。また弟の錦城大君瑜をも殺害した。このように、王位を簒奪するために周到な準備を進めて反対派の官僚を徹底的に弾圧し、端宗三年六月に端宗に譲位せざるを得ないようにしたのち、王位についたのが第七代の世祖(在位一四五六.一四六八)である。この世祖の王位簒奪にたいして、今度は、端宗に忠義を尽くしていた官僚たちが憤激して立ち上がり、端宗復位運動を起こしたのであるが、それが発覚して、謀叛を企てたというところから、連坐・縁坐して刑罰に処せられた官僚が、七〇余人にも達するという大事件に発展した。この大事件が一段落した後に、「投壺」を開催する機会がしばしば設けられるようになった。それまでこの「投壺」は、開催されても王族と宗親たちの間だけで催されるのが通例であった。ここで注目すべき事は、それまで主として王族と宗親たちとの間だけで行われていたこの「投壺」の場に、官僚たちも参加させるようにしたこと
朝鮮時代初期における王位継承争いと「投壺」
である。王位簒奪という行為によって、多数の官僚が殺害され、その家族、親族が連坐法によって刑に処せられたこの王位簒奪をめぐる大事件は、両班支配階層全体に大きな波紋をひき起し、その後「投壺」が盛んになっていったと考える。
『経国大典』巻五、刑典【用律】条に、「『大明律』を用いる」とあり、国家を危機に陥れるような謀反を企てた場合、『大明律』の刑律が適用されることになっていたことについては、上述したが、『経国大典』には、
ある
凡そ謀反、大逆、但いは共謀者は、首従を分かたず、皆陵遅死に処
す。父子年一六以上、皆絞り、十五以下及び母女妻妾祖孫兄弟姉妹

若子の妻妾は、功臣の家の奴と為す。
と定められていて、処刑された者の妻妾などの婦女子は、功臣に給付されることになっていた。従って端宗の王位復位に参画した官僚たちの婦女子の処罰も、この連坐制の規定が適用された。
端宗の王位復位運動の結果、乱臣に縁坐・連坐して、刑に処せられた官僚家族の婦女子は、次のように、各官僚に賜与されており、その氏名

が記録されている。
桂陽君.:李小童妻千非、李公.妻同伊、沈上佐妻彌飛乙介・女繼今翼.君:李湛妻召史、朴耆年妻無作只、李午女平同、李裕基妹孝全領議政鄭麟趾:朴彭年妻玉今、金承珪妻内隱非・女内隱今・妾女閑今
左議政韓確:趙淸老母德敬・妻老非、崔得池妻莫德、李賢老妾女李生右議政李思哲:李賢老妻召史、閔甫昌妻豆多非、金有德妻今音伊・女玉時雲城府院君朴從愚:成三問妻次山・女孝玉、李承老妹者斤阿只左賛成尹師路:皇甫欽妻石乙今、朴.妻.德・女孝非
.
二〇七
右賛成鄭昌孫:李裕基妻雪非・女加仇之 末非 莫今、成三顧妻四今及一.女子坡平君尹巖:李承胤妻加隱非、池和妻莫今前判中樞院事李季甸:李徽妻列非、許慥妻安非・女義德右.賛姜孟卿:李滋源妻維那・妹、李.妻加知判中樞院事李澄石:李潤源妾粉非、李耕.妻孝生花川君權恭:朴引年妻内隱非、鄭孝康妻寶背右.賛黄守身:元矩妻召史、高德稱妻甫今・女信今禮曹判書朴仲孫:李諧妻終今・女佛德、佛非、金有德妹莫莊兵曹判書申叔舟:崔汚妹善非、趙完圭妻召史・女要文中樞院事權蹲:李石貞妻召史、權自愼妻於屯・女仇德吏曹判書權.:友直妻五臺、金玄錫妻英今中樞院事朴薑:尹令孫妻塔伊・女孝道、李反敬妾莫生大司崔恒:金文起女終山、崔得池妾地莊非兵曹.判洪達孫:成三省妻命守、鄭孝康妾孝道・女山非判内侍府事田.:成孟瞻妻現非、崔斯友妾玉今.林君李興商:沈愼妻石貞・女金正・銀正、成勝妻未致都節制使楊汀:李義英妻孝生、趙克低妻現伊吏曹.判具致低:朴詢妻玉德、朴憲妻敬非前藝文提學尹士昀:宋昌妻召央知、皇甫錫妻召都節制使柳洙:李末生妻關雎・女敬非、金文起妻奉非同知中樞院事奉石柱:朴大年妻貞守、宋石同妻召史蹲同知中樞院事康袞:金承珪女叔熙、權着母甫音未禮曹.判洪允成:朴季愚妻小非、金承璧妻孝義左承旨韓明.:柳誠源妻未致・女白代、李命敏妻孟非右承旨曺錫文:.善寶妻福中・女德非僉知中樞院事柳河:李昊妻介叱知・女木今
二〇八
吏曹.議元孝然:尹處恭女叔非、鄭元碩妻萬今端川郡守崔濡:崔致池妻未致、崔閏石妻奉非刑曹.議.孝源:.善寶妹召史、李裕基女小斤召史兵曹.議韓終孫:趙蕃妻召史・女義貞、.義軒妻卜非左副承旨尹子雲:元矩妹心伊、趙完圭女加伊右副承旨韓繼美:尹渭妻召史、鄭冠妻信敬慶尚道觀察使曺孝門:李義山女召史莫今兼判通禮門事李克培:李禎祥妻三非・女現非・貞非、崔得池妻磨杯判宗簿寺事權愷:尹涇妻召史、成三聘妻義貞上護軍柳.:奉汝諧母小非、妻丁順判軍器監事金.:閔甫興妻石非、李潤源妻大非知兵曹事權.:大丁妻者斤、河緯地妻貴今・女木今成均司成鄭守忠:李保仁妻勿才、女玉石上護軍柳泗:趙完圭妹精正、崔斯友母召史禮賓寺尹權攀:植培女貴非・貴莊・貴今・小斤非、兪應孚妻若非大護軍安慶孫:閔伸妻禹非、女山非大護軍洪純老:李智英母石乙今、妻終非、女銀非大護軍趙得琳:宋寧妻召史、權着妾卜加伊大護軍李克堪:金堪妾貴德・女小非、李穰妻月非直藝文館柳子滉:仲銀妹貴德・女貴非、張貴男妹末非大護軍林自蕃:鄭.妻順非、李石貞妾末生・女甘勿前護軍金處義:大丁母.隱伊、金堪妻召史、女卜今・末今・阿只司僕少尹韓瑞龜:崔.母召史、妻占勿阿只・女夫.非典農少尹宋益孫:崔致池妻德非、女白伊軍器副正薛繼祖:李承老妻孝貞・女叔和、李午妻少叱知司宰副正權擎:李義山妻.軍、女阿乙今軍器副正洪順孫:鄭冠母召史、張貴男妹鶴非兼軍器副正郭連城:許慥母花山、妹小斤召史護軍崔閏:權着妻季非、女順非前副司直李蒙哥:趙順生妻加叱非、金善之妻.隱伊・女加也之都承旨朴元亨:李石貞女甘.、崔.妹莫非

以上のように、王位簒奪に協力した六四名の臣下に対して、一七三名に達する婦女子が与えられている。上記の処罰をみると、大明律に定められた功臣というのは、事件の解決に功労のあった人士のすべてを含むようで、武官の大護軍、護軍をはじめ、軍器副正、典農少尹、直芸文館などの官吏までを指していたことがわかる。縁坐・連坐した婦女子は、身分を賤民に格下げされて、個人の所有物として下賜されたわけである。すくなくとも王位継承争いに関わった人士の大多数は、高麗末以来の名門出身、或いは、太祖が建国する際に、功労のあった臣下たちの婦女子であったと考えられるから、同じ支配階層社会に与えた衝撃は、大きなものがあったと考える。ここに、王位を簒奪した世祖が、王権の下で、行政を担当する支配階層の信頼を取り戻すために設けたのが、宴席であり、その宴席の場で同時に催すようにしたのが、「投壺」であったと考える。それは、「投壺」儀礼自体に、精神的修養を強調する意味が強調されていたからであると思われる。
四、朝鮮時代以前の「投壺」の概略
「投壺」は、古く中国で生まれたものであること、また中国でも盛んに酒席などで娯楽の一つとして楽しまれていたことについては様々な文献に記載されている。つまり、短く細い矢(室内で行うばあい、矢の長さは、
朝鮮時代初期における王位継承争いと「投壺」
堂上では、二尺八寸、庭上では、三尺八寸)を壺(朝鮮時代は、青銅製)に投げ入れて、その命中率を競う競技で、『禮記』投壺第四十には、堂上で行う「投壺」の作法について詳細に記述されている。
「投壺」を儀礼とみるか、遊戯とみるか、或いは競技とみるかについては議論が分かれるところであるが、朝鮮時代の場合は、初期には精神修養の意味で行われたのに対し、時代が下るにつれて賭博性を持つようになっていった一面が見られ、時代によって解釈が変転している。この投壺は日本にも早い時期に伝播していた模様で、正倉院の御物のなかに投壺と投壺矢が所蔵されている。また平安時代には、『源氏物語』や『枕草子』にも登場する娯楽として注目されている面もあり、東アジアの広い範囲にかけて古くから普及していたものと考えられる。


二〇九
投壺(青銅器製)韓国・湖巖美術館蔵


二一〇

俗重騎射、兼愛墳史.其秀異者、頗解屬文、又解陰陽五行、用宋元
嘉.、以建寅月為.首、亦解醫藥卜筮占相之術、有  投壺樗蒲等雜戲、然尤尚奕棊、僧尼寺塔甚多、而無道士、(『周書』列伝 巻四九 列伝第四一 異域 上 百済条)
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亦有中國人、其飲食衣服、與高麗略同。若朝拜祭祀、其冠兩廂加翅、戎事則不。拜謁之禮、以兩手據地為禮。婦人不加粉黛、女辮髮垂後、已出嫁、則分為兩道、盤於頭上。衣似袍而袖微大。兵有弓箭刀。俗重騎射、兼愛墳史、而秀異者頗解屬文、能吏事。又知醫藥、蓍龜、與相術、陰陽五行法。有僧尼、多寺塔、而無道士。有鼓角、箜篌、箏.、.笛之樂、  
投壺、.蒲、弄珠、握槊等雜戲.尤尚奕。
(『北史』列伝 巻九四 列伝第八二 百済)

・・・有僧尼、多寺塔、而無道士。有鼓角、箜篌、箏
.、.笛之樂、  投壺、圍棊、.蒲、握槊、弄珠之戲.尤尚奕。

この「投壺」が、中国から百済や高句麗にも早くから伝播していたことについては、中国の『周書』、『北史』、『隋書』、『新唐書』に記載されている。その原文を示せばつぎのようである。
(『隋書』第八一巻 
列伝 

王服五采、以白羅製冠、革帶皆金釦、大臣青羅冠、次絳羅、珥兩鳥羽、金銀雜釦、衫.袖大口、白韋帶、黄革履.庶人衣褐、戴弁、女子首巾幗、俗喜.、  
投壺、蹴鞠.食用.、豆、.、.、罍、洗.居依山谷、以草茨屋、惟王宮、官府、佛廬以瓦.窶民盛冬作長坑、.火以取煖、其治、峭法以繩下、故少犯.叛者叢炬灼體、乃斬之、籍入其家、降、敗、殺人及剽劫者斬、盜者十倍取償、殺牛馬者沒為奴婢、故道不.遺、婚娶不用幣、有受者恥之、服父母喪三年、兄弟踰月除、俗多淫祠、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國左有大穴曰神隧、
四六 
百済)

.十月、王皆自祭、人喜學、至窮里廝家、亦相矜勉、衢側悉構嚴屋、號局堂、子弟未婚者曹處、誦經習射、(『新唐書』列伝巻二二〇 列伝 一四五 東夷伝 高句麗)
上記の資料などから、百済、高句麗には、早くから「投壺」が他の遊戯具などとともに伝播していた。新羅に関しては記録がなく、判然としない。正倉院に所蔵されている「投壺」は、唐から搬入されたとされているので、新羅とは関係がないと思われるが、高句麗や百済で行われていた「投壺」が新羅で全く行われなかったとは考えにくい。しかし『三国史記』の新羅に関する記事には、「投壺」に関する記録を残していない。
ついで記録にあらわれるのは高麗時代の睿宗十一年(一一一六)一二月の記録である。

壬午、御清博閣、命内侍良倍令池昌洽、講禮記中庸・  
投壺二篇、謂
邦文閣学士等曰、投壺、古禮也、廃已久也、宋帝所賜、其器極為精
備、将試之、卿等、可纂定投壺儀并図、以進。
(『高麗史』巻一四 世家一四、睿宗一一年一二月壬午・二三日条)
「投壺」が廃止されて久しいにもかかわらず、国王は『禮記』の投壺に関する記述について講じさせている。それは宋に派遣された使節が宋の皇帝から投壺の器具を賜与されてきたので試してみようとしたところから再び始まったことを示している。
しかし『高麗史』には、「投壺」に関する記録はこれ以外にどこにも見当たらず、その後の高麗時代に引き続き「投壺」が行われたかどうかについては定かではない。
朝鮮時代初期における王位継承争いと「投壺」
五、朝鮮時代における「投壺」の展開状況
ついで朝鮮王朝にはいってからはどうであったのだろうか。最初に記録にあらわれるのは、太宗一七年のことである。なぜ太宗が「投壺」を始めるようになったかという理由を示す記録は見当たらないが、朝鮮王朝にはいっていらい、ほかの国王が行わなかった「投壺」を太宗が始めて行うようになったのは、王位継承争いによって失われた宗親間の信頼関係を取り戻そうとした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
なかでも本小考と特に関連するのは、『禮記』投壺条の末尾に記述されたつぎの内容である。つまり、魯の国で、「投壺」の際に、先輩が若い人々を戒めていったとされる記述である。
・・・(中略)昔、魯の国では、投壺の際に先輩が若い人々を戒めて言った。「誇ることなかれ、驕ることなかれ、かってに立ち上がるなかれ、離れた人に言葉をかけるなかれ。かってに立ったり、言葉を

かけたりしたら、罰杯を命ずる
王族と臣僚との信頼関係を築き、王位継承をめぐって血なまぐさい政争が二度と起こらないように、臣僚たちに、「驕ることのないように。かってに立ち上がることのないように。かってに立ったら罰杯を命じる。」という言辞を強調し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る。
太宗代には、太宗一七年六月に二回、および同一七年六月に一回の計三回にわたって、「投壺」が行われているが、その際は、王族、宗親だけを同席させて、王宮内の廣延樓で酒宴を設け、「投壺」を行わせている。この時には、賞品などを賜与している気配はない。

つぎに世宗代にはいると、宗親が「投壺」をするのを国王が見学し、
二一一
共に楽しむという事例が多い。その開催場所は、慶會樓に変更されてお

り、国王が賞品を提供し、勝利者に賞品が多く与えられている。
それに加えて、「投壺」に対する解釈が変化してきている一面がある。

国王は、世子が王宮の奥深いところで暮らしているので、人に接する機会がなく、人に接すると顔色が変わるという有様であるから、宗親が「投壺」・射侯を行う際に、同席させて人に接することを学ばせようとしたのであるが、官僚のなかには世子は学問をすべき時であって、雑事を学ぶ必要はないと反対する者がいた。つまり当時の官僚たちのなかには、「投壺」を雑戯と考えている者もいたことがうかがえる。世宗は、その時、「投壺は古人が心の正邪を見るためにおこなったものである」として、射

侯は世子にはみせないが、「投壺」には同席させることにしている。その
五年後に世宗は、郷飲酒の禮は、長幼の序を明らかにし、矢を放って徳
を示すものであり、「投壺」の儀礼は、心を修養するものであるにもかか
わらず、単に豪.の士の遊戯と思いこんでいる面があること、またどう
すれば弓矢をもって礼儀として符合させ、主人と客がお互いに尊敬しあ

う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とも述べている。
世宗は、「投壺」を世子教育の一環としても必要であると考えていたの
で、春・秋に弓術を、夏に「投壺」を、冬に撃毬をおこなう際に、世子
も諸勲盟と同席して世務を論じさせれば、見識が高まるのではないかと
考えていた。これによれば「投壺」は夏に催す行事であると一般的に考

えられていたことも判明する。
高麗時代の睿宗代における解釈、及び朝鮮時代の世宗代の解釈にも精
神修養の面から意義があると主張される根拠は、前記した『禮記』投壺
条にみえる「魯の弟子に令する辞に曰く、おごることなかれ、おごるこ
となかれ、背き立つことなかれ、越えていうことなかれ、背きたち越え
ていえば、常爵あらんと。薛の弟子に令する辞に曰く、おごることなか
二一二
れ、おごることなかれ、そむきたつことなかれ、越えていうことなかれ、かくのごとき者は浮せんと。」という言辞であろうと考える。太宗代から世祖代にかけては、この言辞を宗親や官僚たちに植えつけるために、「投壺」を頻繁に行った形跡が濃厚である。
つまり、世祖代になると、王位を簒奪した後、反対派の勢力である王族と官僚と、それに関連して連坐・縁坐した家族、親族に対する処罰が一段落した段階で(世祖二年九月)、多数の官僚を殺害するに及んだあまりにも凄惨な事件であったところから生まれた王族と宗親、両班官僚との信頼関係を取り戻すために、この「投壺」を活用したと考えられる。
世祖三年二月、世祖は、都鎮撫(都摠管=五衛都摠府で軍務を総括した最高の官職、正二品職)、及び宰枢に命じて投壺をおこなうことを命じた⑯。
これまでは、王族、宗親のみで構成していた「投壺」に文官の最高官僚と軍事機構を総括する官僚を参加させたのである。
その五ヶ月後の七月二日、世祖は慶會楼に赴き酒宴を設けた。宗親の二品以上、議政府・六曹の参判以上と延昌尉安孟.(世宗の次女と婚姻、世祖元年に原従功臣に封じられる)及び河城尉鄭顕祖(領議政鄭麟趾の子、世祖の長女と婚姻)判中枢院事李澄石(世祖の王位簒奪を補佐、佐翼功臣)と鶏林君李興商(世祖を補佐、靖難功臣)、漢城府尹李純之(天文学者、世祖三年禮曹参判)・洪元用、藝文館提學金末(儒学者)、京畿観察使李承孫(世祖の佐翼原従功臣)などのほか、宣伝官、部将、鎮撫、司僕官なども同席して左右に分かれ、或る者は射侯を、或る者は「投壺」をおこなった。そのとき、世子、宗親、宰枢たちが国王に献杯しているところから、国王もそれを見学していたことは明らかである。さらに鐘を打ち鳴らして、

王宮内の軍士たちを慶會楼の池の畔に集めて酒宴をはった。
こうして世祖は、王位簒奪のさいに協力した官僚たちの慰労をはかるために、酒宴を設けて「投壺」の参加者の範囲を大幅に拡大し、官僚や兵士たちとの信頼関係の確立をはかった。世祖が在位一四年間の間に「投壺」儀礼をおこなった記録は、四回あり、三年一〇月と四年七月におこ


なったさいには、宗親と宰枢に範囲を限定している。
しかしその後の残り一〇年間の在位期間中には一度も実施していない。三年七月と一〇月に実施したさいには、鄭麟趾、姜孟卿、申叔舟、申碩祖、洪允成、曹錫文、権摯、鄭軾などに鹿皮を一枚ずつ与えて賭けさ

せているので、この時から賭博性を帯びはじめていたことも判明する。
ところで、世祖のこのときの発言で注目されるのは、鄭麟趾などに対する発言である。
「漢の高祖は功臣を保全できず、前年に韓信を殺害し、彭越を殺害している。これは彼の失敗である。」と述べたのにたいし、鄭麟趾は、「漢の高祖がよく進言を聞き入れ、人材をうまく用いたことが漢の王業の興隆した所以であります。」と答えて、鄭麟趾はすかさず、「国王は、臣僚の進言を尊重すべき」ことを提言している。それに対し、世祖は、「その通り。昔からいうではないか。尋ねることを好めば豊かになり、自分の意志だけを用いるならば小さくなる。自ら師を得ることのできる者は王業を遂行でき、他の人間は自分に及ばないと思う者は、滅ぶであろうという意味であるが、君道の体制というものは、この言に過ぎるものはない。」と述べ、官僚たちを信頼してその進言をよく聞き入れる意向を表明することによって、信頼関係の確立に努めていたふしがみえる。国王が、国家の運営は、国王と官僚の信頼関係に基礎を置く相互依存関係にあることを承認したことがよく分かる一例である。
ところで、「投壺」が実施された特異な例として、明国の使者がきた際に、「投壺」を楽しんだ記録があることである。したがって明国では、この当時、「投壺」儀礼が官僚を中心に、流行していたので、中国から往来する使節を接待する儀礼、娯楽としてこの「投壺」が盛んに行われた形
朝鮮時代初期における王位継承争いと「投壺」
跡も濃厚である。したがって、太宗、世宗、世祖が盛んに「投壺」儀礼
を実施するようになったのは、王族と官僚との信頼関係を修復する意味
と共に、中国で盛行している「投壺」儀礼を行っても社会的に批判にさ

らされる行事ではない面があったからでもあろう。
六、成宗代における投壺儀礼の新たな展開
ついで成宗代(在位一四六九.一四九四)には、まず「投壺」をおこな
う意義について確認をしたあと、それまでよりもさらに参加者の範囲を
拡大して実施した形跡が濃厚である。
「投壺」をおこなう意義としては、やはり世宗代に確認がなされた「『投
壺』は、戯玩ではなく、精神を修養するための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
.
をその意義として定着させている。
その後でまず老宰相たちが会した場で試すことを命じている。ついで
投壺儀を耆英宴のさいに行うことも決定し、そのさいの「投壺」の規定
についても定めている。
○禮曹啓、耆英宴時、投壺儀、其日、耆英諸宰、行相會禮畢執事者、

【.贍寺員。】設豐於堂.、在西近南、司射【訓.院六品員。】置壺於堂中。【以二矢半量置。】又設中於壺之西東、向盛算於中。【算之多少、視座上之人、.人四矢、亦四算。】執事者二人、【訓.院參外員。】奉矢、【..各四矢。】立於拾投者之左。司射告矢具、又請拾投手、執八算而起、樂作。【奏樂章、以節投壺。】左右各執四矢、更迭而投。有入者、司射、坐而釋一算卒投。【樂止。】司射、執算曰、左右卒投、請數。【二算爲純、一算爲奇。】數訖、以奇算告曰、某賢於某若干、純。【奇則曰奇、鈞則曰左右鈞。】又司射、命執事者、行罰爵、執事者、洗.陞酌、坐而置於豐上。
二一三
不勝者跪取.、勝者亦跪。不勝者飮訖、司射、請立馬。【立馬於釋算之前。】初.一成訖、衆.以次卒投、並如上儀、如是至三番而止。【取算、以立馬、謂之一成、.番釋算、立馬同。】三番訖、司射、以一馬從二馬、

【若勝、.得二馬、劣.得一馬、撤取劣.之一、以足勝.之二、爲三。】又命執事者酌酒、請多馬者曰、三馬.備、請慶多馬。飮訖、【凡得三馬
.
者、皆飮。】司射、請徹馬、坐定、行無算爵。
そして一三年三月一一日には、政丞などに命じて「投壺」を行わせている。そのさいにも古人は投壺によって心を正す修行をしていたことが強調されて、月山大君を始め、宰相たちが「投壺」を行った。当時は、「投壺」意外に楽しめる遊戯が多くなかった時代で、「投壺」を一度始めると長時間にわたって楽しんだことが伺える。また国王も児馬一頭や弓を賞品に与
.
えている。
同年五月には、大規模に「投壺」を行っている。端午であるからとい
う理由で実施しているところから、この成宗代の「投壺」には、太宗代
と世祖代に意図されたような両班官僚たちとの信頼関係を修復するとい
う目的よりも、端午という祝日に娯楽的な競技として出席者たちで楽し
.
むという方向に転換していった形跡が見られる。ついで成宗十七年九月に実施された例をみると、国王が王宮の後苑で經筵堂上、弘文館員に酒席を設け、音楽を入れて楽しんでおり、さらに承旨、入直している兵曹、都摠府堂上、衛將徃.、永安道觀察使成俊までが呼び出され、弓矢で射侯をする者と「投壺」をする者とに分かれて酔わない者がないほど歓を極めて終わったという。同年九月にも実施しているが、その時には、さらに参加者の規模が拡大されていて、宗親一品以上、議政府、六曹.判以上、儀賓府、漢城府、承政院、弘文館、藝文館、入直諸將などを呼び入れて実施している。
二一四
この頃から、国王と宗親や官僚たちとの親睦を深めるために、宴席とともにこの「投壺」を実施するという行事に定着し始めている。そこでつぎに成宗代に実施された「投壺」のさいに参加するようになった人士はどのような官僚たちであったかについて『成宗實録』に記載されている記事を列記してみる。
成宗一七年九月三日
3 21

.場所:後苑
.参加者:経筵堂上、弘文館官員、承旨、入直兵曹、都摠府堂上官、永安道観察使
.賞品:鹿皮各一枚
成宗一七年九月一二日
21

.場所:後苑.参加者:宗親一品以上、議政府・六曹の参判、儀賓府・漢城府・
承政院・弘文館・藝文館官員及び入直将帥 
成宗一八年一月一八日
321

.場所:不明.参加者:宗親一品以上、領敦寧以上、儀賓、承旨、入直将帥.賞品:勝者に弓一帳。
成宗一八年三月一五日
1 .場所:北所

2 .参加者:経筵官


4

.賞品:堂上官 胡椒各七斗、堂下官 各三斗
成宗一八年七月二一日
21

.場所:不明.参加者:経筵官堂上、弘文館、藝文館、政丞、宰相、承旨

3


3 21

321

21

3 21

1

3 .時間:朝から晩まで。
成宗一八年七月二二日
1
2 .場所:忠勲府.参加者:経筵官、藝文館の官員、左承旨安処良、右承旨韓堰.賞品:大鹿皮二枚、衫児鹿皮二枚、弓五帳、胡椒二〇斗、油席三枚
成宗一八年五月一五日
.場所:北所
.参加者:宗親一品以上、領敦寧以上、議政府・六曹の参判以上、漢城府の堂上官、入直兵曹・都摠府・承政院・弘文館・藝文館の官員
.賞品:鹿皮、角弓、胡椒など
成宗一八年八月二九日
.場所:後苑.参加者:宗親、儀賓など.賞品:胡椒二〇碩
成宗一九年三月二五日
.場所:後苑.参加者:宗親
成宗一九年五月五日
.場所:西所
.参加者:一品以上の宗親、領敦寧以上、議政府・六曹の参判以上、漢城府堂上、儀賓府・承政院・弘文館の官員
.宗親と宰枢は心ゆくまで楽しみ飲むようにと命じ、日暮れまで
続く。
成宗一九年七月三〇日
.場所:後苑
朝鮮時代初期における王位継承争いと「投壺」
32

.参加者:領敦寧以上、六曹判書、入直兵曹・都摠府諸将、注書、史官.賞品:児馬一五頭を賭けの賞品として内賜し、勝者に一頭ずつ
支給。
成宗二〇年五月五日

3 21

.場所:耀金門内
.参加者:二品以上の宗親、議政府・儀賓府・六曹・漢城府・承政院・弘文館・藝文館の官員、都摠府諸将.賞品:国王は一日中楽しく遊び、早く帰る者なきようにと指示、
玉石の大盃を出すのでそれで飲み、飲めない者は銀製の小盃で飲むようにと指示。
成宗二〇年八月二四日
21

.場所:北所
.参加者:宗親一品、領敦寧以上、議政府・曹参判以上・忠勲
6
府・漢城府・儀賓府・承政院・弘文館・藝文館・都摠府諸将
成宗二一年九月九日
321

.場所:訓練院 .耆老宴.参加者:訓練院官員、経筵官
4 .賞品:別造弓三帳、豹皮・白鹿皮各二枚。黒漆篭一、爐口一部、
胡椒一〇斗
成宗二一年九月九日
321

.場所:北所.参加者:入直諸将、承政院.賞品:虎皮二枚、別造弓二帳、馬粧二部、蓑衣一部、胡椒一〇
二一五
斗を賭けさせる。
むすび
成宗代における上記の記録をたどると、まず「投壺」の開催回数が、一年に二.三回程度開催されており、それまでの国王の開催回数よりも次第に多くなってきている。ついで開催場所は、後苑、または北所、西所などで開催されていること、参加者をみると、宗親は一品以上であったものが、後になると二品以上の者も含まれるケースが生じている。官僚は初期から、正三品職の堂上官以上の官職のある重要な官司の官僚で、やはり堂上職以上の者が参加するのが原則のようになっていたが、しだいにそれらの官司の堂上官以下の官員にも範囲が拡大されていったようである。賞品としては、勝者にたいし授与されるのが原則であったが、その賞品も次第に豪華になり、鹿皮、胡椒、虎皮などの高級品が与えられるようになっていった。しかもこの頃から賭博性を帯びるような形で国王が与えていったので、後世になって、庶民の間でも賭け事の一つとして楽しま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王宮内で、このように行われていた「投壺」は、当然儒者たちの間にも広まる性格を持っていたようで、『禮記』に記載されていることが論理的根拠となり、しかもその精神修養的な面を強調しながら、「投壺」を行うことの正当性が主張されて、儒者たちの間にも広まっていったのであろう。李退渓の『陶山書院』にも「投壺」の道具などが残存しているのもその一例ではないかと考える。国王と官僚とのあいだの信頼関係が大きく損なわれた結果、国王は、「投壺」という儀礼をとおして官僚との信頼関係の修復に努めようとした行為ではなかったかと考える。
二一六

① 『朝鮮初期政治史研究』崔承熙著、二〇〇二.韓国知識産業社刊、三〇九.三一〇頁。それ以外に、韓国で遊戯史として論究された先行研究としては、次のような論考がある。
1「投壺遊戯に関する史的考察、及び遊戯法」一、及び(續)、文榮鉉、韓国体育学会、「韓国体育学会誌」、第一一巻、一九七五. 2「退渓哲学における投壺のもつ意義」李振洙、韓国体育学会、「韓国体育学会誌」三四巻、一九九五. 3「韓国古代民俗遊戯に関する研究」趙成煥、梨花女子大学校韓国文化研究院、「韓国文化研究院論叢」第五一輯、一九八六.一二. 4「韓国中世民俗遊戯に関する研究」趙成煥、梨花女子大学校韓国文化研究院、「韓国文化研究論叢」第五三輯、一九八八.八. 5「朝鮮前期宮中遊戯の研究」趙成煥、梨花女子大学校韓国文化研究院、「韓国文化研究論叢」第五五輯、一九八九.八.
② 『太祖実録』太祖元年八月己巳、二〇日条に「○己巳立幼.芳碩爲王世子。初功臣裵克廉、趙浚、鄭道傳請建世子、欲以年以功爲請、上重康氏意在芳蕃。芳蕃狂率無.、功臣等難之、私相謂曰、若必欲立康氏出、季子差可。」及是、上問誰可爲世子者、未有以立長立功切言者。克廉曰、季子爲可。上遂決意立之。」

③ 『大東野乗』所収の李廷馨、『東閣雑記』に、「○太祖神懿王后誕六男。恭靖王居第二。太宗居第五。神德王后康氏。生芳蕃芳碩。及公主適李澄。太祖嘗召裴克廉趙浚等于.殿。議立世子。克廉等曰。時平立嫡。世亂先有功。康氏潛聽之。哭聲聞于外。遂罷出。他日又召克廉等議。無復有以嫡以功爲言者。克廉浚退而議曰。康氏必欲立己出。芳蕃狂悖。其季稍可。遂請封芳碩爲世子。」

④ 同上書、同条に、「鄭道傳南誾等。附芳碩。忌諸王子。謀欲去之。密啓請依中朝諸皇子封王之例。分遣王子於各道。 」

⑤ 同上書、同条に、(『東閣雑記』上に、「卜者安植曰。世子異母兄。有天命者非一。道傳曰。.當除之。何患乎。義安君和知之。密告太宗。」

⑥ 同上書、同条に、「戊寅秋。太祖寢疾。道傳等託議移御事。召諸王子入來。欲因以作亂。令其黨在.謀之。前參贊李茂。亦其黨也。盡以其謀。潛



泄於太宗。時太宗與諸兄。恒宿於勤政門外。・・・(中略)、太宗率武士。覘道傳等。李稷方會于南誾妾家。明燈歡笑。伴從皆睡。使李叔蕃故發矢落于屋瓦上。因縱火焚之。道傳走匿于其隣判奉常閔富家。富呼曰。有.腹者。入我家矣。軍人入搜之。道傳匍匐杖劍而出。執詣太宗前。道傳仰曰。若活我當盡力輔佐。太宗曰。爾.負王氏。又欲負李氏耶。立斬之。其子游泳亦被殺。南誾潛逃隱于彌勒院圃幕。追兵殺之。」
⑦ 同上書、同条に、「芳碩之黨欲出軍。令軍士奉元良。登城覘之。則自光化門至南山。鐵騎彌滿。彼懼不敢出。人以爲神助。太宗使人傳語入直諸軍。令出來。相率縋城而出。勤政門以南一空。黎明太祖移御于淸涼亭。浚等率百官。啓道傳誾等之罪。且請改封世子。太祖謂芳碩曰。於汝便矣。芳碩拜辭。賢嬪攀衣號哭。芳碩拂衣而出。又請出芳蕃。太祖曰。世子已矣。汝出去何妨。興安君李濟在傍。猶拔劍睥睨。公主謂濟曰吾夫妻若歸靖安君第。則得生矣。芳蕃出西門。太宗執手曰。汝不聽吾言。以至於此。好去好去。都堂追殺于中路。初散騎常侍卞仲良。附芳碩上疏。請罷諸王子兵權。離間骨肉。至是執詣軍前。仲良曰。吾自近日。歸心於王子矣。太宗曰。彼口亦肉也。斬之。恭靖王。是日以祈祷事。齋宿于昭格殿。聞変徒.踰城。匿于禿音村家。翌日使人請之。乃還。太祖伝位于恭靖王。 」

⑧ 『大明律』巻第十八 刑律 盗賊 【謀反大逆】条に、「凡謀反、大逆、但共謀者、不分首縦、皆陵遅処死、父子年十六以上、皆絞、十五以下及母女妻妾祖孫兄弟姉妹若子之妻妾、給付功臣之家為奴、財産並入官、」と定められており、また謀叛条には、「凡謀叛、但共謀者、不分首縦、皆斬、妻妾子女、給付功臣之家、為奴、財産並入官」と定められている。

⑨ 『世祖実録』巻五、世祖二年九月七日甲戌条に、「○傳旨義禁府曰、亂臣縁坐婦女内」とあり、その氏名が連記されている。

⑩ 『禮記』第四十、投壺条に、「魯令弟子辭曰、毋.、毋敖、毋.立、毋踰言、.立踰言有常爵、薛令弟子辭曰、毋.、毋敖、毋.立、毋踰言、若是者浮、」

⑪ 太宗が上王の定宗を奉迎して酒宴を張り、投壺をおこない、世子、および宗親が同席している。1 「上奉迎上王于廣延樓、置酒投壺、世子、宗親侍宴。上曰、吾爲上王.、諸君毋得.花。以李宏之死未久也。」(『太宗実録』巻三三、太宗一七年六月二二日丙午条。)2 .「○御廣延樓置酒、
花.

朝鮮時代初期における王位継承争いと「投壺」
仍觀投壺戲、世子、宗親咸侍。」(『太宗実録』巻三三、太宗一七年六月二六日条。3 「○御廣延樓、觀投壺.、因置酒、世子、宗親侍宴。」(『太宗実録』巻三四.太宗一七年七月二一日甲戌条。)

⑫ 『世宗實録』世宗一三年六月一六日戊申条に、「○御慶會樓、觀宗親投壺、賜物有差」とあり、同年六月一八日条に、「○御慶會樓、觀宗親投壺。」、同年六月二一日癸丑条に、「○御慶會樓、觀宗親投壺、賜物有差。」同一四年八月一五日辛丑条に、「○御慶會樓下、觀讓寧大君以下諸宗親投壺、仍設宴、夜分乃罷。」とみえる。


⑬ 『世宗實録』世宗一三年六月二四日条に、「○傳旨書筵賓客: 世子長於深宮、無所見聞、接人則顔色赧然、擧止羞澁。自今若宗親投壺 射侯、則令世子入侍、習見接人進退之儀何如、鄭招・尹淮等以爲、上之所爲、非禮不動、可令世子入侍觀感。申檣・鄭麟趾以爲、世子今方學問、未可習見雜事。上曰、  
投壺古人所以觀心術之邪正者、與焉可也、射侯則不令見之。」とある。

⑭ 『世宗實録』世宗一八年四月九日乙巳条に、「○御勤政殿、以領議政府事.喜、知中樞院事李孟.、吏曹判書權蹈爲讀卷官、右副承旨金.、集賢殿副提學安止・兪孝通、集賢殿直提學崔萬理・金.爲對讀官、重試文臣在東、初試擧子在西。乃出策題、王若曰、帝王爲治之道雖同、而爲政之方非一、要皆厚倫成俗、制寇安民而已。若稽唐、虞、命契而敷五敎、命禹而征三苗。當是時、黎民於變、比屋可封、而有苗梗化、干羽之舞、七旬乃格。舜之文德、豈班師而始敷歟。三代迭興、文質損益、代各有治、其詳有可言者歟。可行於今日者、何事歟。大小宗之法、所以尊祖宗之義也。鄕飮酒之禮、所以明長幼之序也。射以觀德、
投壺、以治心。周家之治、煥乎



有文、後世莫及者、用此道也。自周以前、亦有行之者歟。其所以致雍熙泰
和之治者、何道歟。薄伐..、詩人美之。會戎于潛、《春秋》譏之、聖人
待夷狄之道可見也已。庸、蜀、羌、.與會於孟津。淮夷、西戎、雜處於東
郊、何歟。降及後世、曰漢、曰晋、以迄于宋、化民之政、御戎之策、孰得
而孰失歟。恭惟我太祖受天景命、太宗嗣受鴻業、文昭武烈、無讓古昔。予
以諒德、纉承丕基、夙夜憂勤。罔敢或遑、凡所施爲、仰惟前代時若。何以
使人知尊祖敬宗而宗、子之法立。何以使人知長幼之序、而鄕飮之禮行。射

者、六藝之一、而視爲武士之事、若之何、則射義復明。  
投壺、治身之具、
二一七
而徒爲豪.之.、若之何、則擁矢合禮、而賓主交敬歟。我國南隣島夷、北連野人、制禦之方、撫綏之策、固當熟慮、而審處之。.者野人願居塞.、島夷來處海濱、若許其請、則有違《春秋》謹嚴之義、拒而不納、則有虧王者無外之仁、將何而可。子大夫博通古今、於此數者、講之熟矣。其各悉心以對、予將大用焉。仍幸慕華館、試武挙。」
⑮ 『世祖實録』世祖一三年一一月三〇日壬辰条に、「○上引見宗宰等曰、今世子年已長學已足、其所以養世子、靡所不至。然居常與處、唯婦寺而已、不接士大夫、則無以別君子小人、無以知稼穡之艱難。自我先王、冬則.毬、夏則投壺、春秋則弓射。今當冬月、正.毬時也予欲世子與諸勳盟.毬、因論世務、則豈無小益、僉曰、允當。」

⑯ 『世祖實録』世祖三年二月六日条に、「○御慶會樓下、試武擧初重試。命都鎭撫及宰樞、射侯投壺。」

⑰ 『世祖實録』世祖三年七月六日癸亥条に、「○御慶會樓下設宴、宗親二品以上、議政府、六曹.判以上、延昌尉^安孟.、河城尉鄭顯祖、判中樞院事李澄石、.林君李興商、漢城府尹李純之・洪元用、藝文提學金末京畿觀察使李承孫、宣傳官部將鎭撫司僕官等入侍。分左右、或射侯、或投壺。世子及宗宰以次進酒、命.鍾聚闕.軍士於慶會樓池邊賜酒。」

⑱ 『世祖實録』世祖四年七月一九日甲辰条に、「○御慶會樓下觀射、讓寧大


君禔、孝寧大君補、臨瀛大君.、.寧君.、益寧君.、延昌尉安孟.、雲城府院君朴從愚、鈴川府院君尹師路、河東府院君鄭麟趾、左賛成申叔舟、右賛成.守身、判中樞院事李仁孫、左.賛朴仲孫、右.賛成奉祖、吏曹判書韓明.、兵曹判書洪達孫、都節制使楊汀、承旨等侍、或投壺射的。」
⑲ 『世祖実録』世祖三年一〇月二二日条に、「○御慶會樓下觀射, 宗親及領議政鄭麟趾、左議政鄭昌孫、右議政姜孟卿、左賛成申叔舟、右賛成.守身、坡平君尹 巖、鈴川君尹師路、左.賛朴仲孫、右.賛成奉祖、知中樞院事楊汀・洪允成、兵曹判書洪達孫、京畿觀察使辛碩祖、承旨等及訓.觀
二一八
使梁誠之侍食。…(中略)命宰樞分左右投壺、較勝負。賭帑賜麟趾、孟卿、叔舟、碩祖、允成、錫文、摯、軾、鹿皮各一張、上謂麟趾等曰、漢高祖不能保全功臣、前年殺韓信、今年殺彭越、此其失處也。昌孫起啓、此眞大失也。麟趾曰、漢高祖能納言善用人、此漢業所以興也。上曰、然古不云乎、好問則裕、自用則小。能自得師者王、謂人莫己若者亡。君道之體不過此語。上親習陣於後苑、以兼司僕、.禁衛爲左右隊、宰樞承旨乘司僕馬侍衛。上駐馬進酒。」
⑳ 同上書、同条に、「○迎接都監副使權引啓、明使云、我等欲投壺、速將壺矢來。命.藏靑銅壺二事、具箭四十八枚送之。」とみえる。
. 『成宗實録』成宗九年一〇月二七日条に、「○御經筵。講訖、上曰、古有投壼之禮、今何不行歟、知事洪應對曰、古有司馬.公『投壼譜』。上曰、投壼非.玩之事、要治心耳。」。また同上書、同年一一月二日条に、「○傳于承政院曰、投壼、非戲事也。其於老宰臣會處、試爲之。」
. 『成宗實録』成宗十年七月二十九日条。
. 『成宗實録』成宗一三年三月一一日条に、「○御後苑、觀文臣射。分左右、…(中略)又謂吉甫等曰、爾等、則射侯矣。欲令政丞等投壺。謂政丞等曰、古人以投壺爲正心工夫。月山大君.、及鄭昌孫、韓明.、鄭顯祖、洪應、洪常、任光載、李約東等、爲.投壺、日暮乃罷矣、成俊居首、賜兒馬一匹、其餘勝邊、各賜弓一帳。」
. 『成宗實録』成宗一三年五月四日条に、「○傳曰、明日乃端午也。邇來久不見宰相、明日欲接見。但以年險、未果耳、其召領敦寧以上及政府、入直都摠府、兵曹諸將、承政院、弘文館餽之。或射侯、或投壺、各以相敵者爲.。」。
(二〇一〇.一〇.二八.脱稿)(本学非常勤講師・元天理大学教授)

http://news.xinhuanet.com/society/2007-04/25/xinsrc_0820404250851546133022.jpg

蘭州:美女們身著漢服 湖邊玩“投壺”遊戲(圖)
2007年04月25日 08:53:04  來源:西部商報


【字號 大 中 小】 【我要打印】 【我要糾錯】
【Email推薦: 】
核心提示:4月19日是農歷三月初三,這一天是漢族傳統的“上巳女兒節”。4月22日蘭州一群美麗女子身穿漢服在湖邊玩起了“投壺”遊戲補過“上巳女兒節”。



身著漢服“投壺”現場

“80後”年輕人,憑著對漢民族服飾文化的熱情,前兩天,她們身穿自制的漢民族服飾出現在小西湖公園,向蘭州市民展示了漢、唐服飾文化。

現場目擊

自制漢唐服飾 周末亮相公園

“三月三日天氣新,長安水邊多麗人。”這一切于4月22(農歷三月初六)日上午10時30分在小西湖公園湖水邊重演了:一群美麗的女子,身穿漢民族服飾,補過“上巳女兒節”(農歷三月初三)。遊人好奇的目光投向了這群身著“奇裝異服”的女孩子,親眼目睹了發生在現實生活中的傳統女兒節禮儀和“投壺”遊戲(古代宴飲時的一種遊戲)。

這群年輕女孩先是向圍觀人群行“古禮”,並向大家介紹女兒接禮儀的來歷和意義 ;隨後,參與禮儀的年輕女孩與活動主禮人致禮、回禮後,儀式正式開始。 參與者在草坪中鋪上一塊白布正坐等待,主禮人將事先準備好的清水倒入容器內,添加香草,用柳樹枝沾取,灑向每位參與者。傳說這樣可以消災祛病,洗滌垢穢、被除不祥。

活動的發起者“紅魔女”(網名)向記者說:對于喜好漢服文化的他們來說,上巳節是一個美麗、浪漫的節日,這比“三八婦女節”更令人向往。

記者調查

高度關注北京奧運會服飾

2007年1月1日,“甘肅漢服家園網”全面改版,立志成為甘肅漢民族文化的網絡家園。他們先後組織並策劃了中國近代史首次使用漢民族服飾的家庭“冠禮”,並在2006年冬至組織了首次身著傳統漢民族服飾的傳統冬至節活動,2006年設計推出了“中國式學位服”,都引起了強烈的社會反響……然而另外一個話題更加引起她們的關注——作為東道主的中國運動員穿什麼服裝在奧運會開幕式上亮相?

西裝?中山裝?漢服?唐裝?

“世界給中國16天??中國還世界5000年”,這是漢服申請奧運禮服的口號。漢民族服飾是中華民族5000年燦爛文化最能代表中華民族展示的服裝,“甘肅漢服家園網”版主李曉向記者表達了蘭州漢民族服飾愛好者的心願。

相關鏈接

“上巳節”,農歷三月初三日,漢族傳統節日,漢代定為節日。這天是漢族水邊飲宴、郊外遊春的節日。該日民間有流杯、流卵、流棗、乞子和戴柳圈、探春、踏青以及歌會等活動。並有青年男女們對歌、碰蛋、拋繡球等談情說愛的傳統,這天青年男女可自由交往。 (施斌)


http://www.asahi-net.or.jp/~rp9h-tkhs/dg_touko.htm

投壺(とうこ)
概要  つぼうちとも呼ばれる。投扇興のルーツと言われる二人対戦の遊び。
中国・朝鮮の投壺

周の時代には既にあり、四書五経の一つ「礼記(らいき)」には、紀元前500年頃に遊ばれたことが記載されている。 三国、晋の時代にも投壺の記録があり、宋代には司馬光が「投壺格」「投壺新格」「投壺儀節」を著した。明代にも書籍が出されたようだが、 現在ではほとんど見られない。
朝鮮半島にも百済、高句麗の時代には伝わっていたと考えられる。現在、韓国では公園や寺社などが道具を出して遊ばせていることがある。 旧1000ウォン札には投壺が描かれている。

日本の投壺

奈良時代に日本に伝来したといわれ、正倉院の宝物の一つとして収蔵されており、正倉院展に出展されることがある。 信西が12世紀中頃に編纂したと言われる「本朝世紀」には、天皇が正倉院の投壺具についてこれは何かと聞いたので信西が投壺と答えたことが記載されている。「和名類聚抄」に”つぼうち”と表記があるほか、江戸時代中期まで記録がなく、ほとんど遊ばれなかったと考えられる。
茶道家の大枝流芳が随筆「雅遊漫禄」(18世紀半ば頃刊行)の中で投壺について書いている。 医師で儒学者の田中江南が投壺の復興を試み、「投壺指南」「投壺説」など複数の本を出し、江戸や京都で教えたりした。 一時期流行ったという記録もあるが、大きな流行ではなくすぐに廃れたと考えられる。 医師の都賀大陸、儒学者の皆川淇園や田辺楽斎、落合正暢が投壺に関する本を出している。

遊び方

中央に壺を置き投者は向き合って座り、矢を持って投げる。  矢の落ちた位置で点数が決まり、勝敗を競った。
遊び方(「礼記」による)

1.道具は矢と壷を用いる。壷の大きさは。矢は室、堂、庭によって長さが異なり、室は2尺(約60cm)、堂は2尺8寸(約84cm)、庭は3尺6寸(約1m8cm)である。 2.対戦者2人は壷を中央に置いて向かい合う。対戦者と壷の間は矢2本半空ける。
3.審判は8本または12本の算(点数の単位)の合計により判定される。 4.勝者に賞品を贈る。

投壺の役と点数

販売状況 国内では入手不可。韓国で販売している。当会斡旋可。
投壺の道具








中国の漢の遺跡・石に描かれた投壺



「雅遊漫録」挿絵



「和漢三才図絵」挿絵



「投壺式」挿絵



市販の「投壺」






http://www.tosenkyo.net/rekishi-touko.htm

投壺について

「投壺(とうこ)」は奈良時代に中国から伝来した遊戯で、「つぼうち」「つぼなげ」とも称されました。もっとも「読んで字の如く」というわけではありませんで、「壺を投げる」のではなく「矢を壺に投げ入れる」遊びです。
ごく簡単に紹介すると、2人の競技者が何本かずつの矢を持ち、一定の距離の所に置いた壺に交互に矢を投げ入れて、入れた矢の本数と形で勝敗を決める遊戯です。天明・寛政(1781~1800)の頃に流行しました。
ただし、その「形」がものすごく複雑で、たくさん決められています。

中国では周の時代から行なわれ、『礼記』にその礼式が記述されており、上流階層の宴席などでの遊びでした。日本には7世紀までに伝えられ、唐の時代の中国製の壺や矢が東大寺の正倉院に現存しています。「源氏物語」や「枕草子」に投壺に関する記述があると聞いたことがあるのですが、残念ながらまだ確認できていません。
また、浅草の春の大会「雅の会・投壺と投扇興の集い」では、現代の日本では唯一、投壺の実演を見せて頂くことができます。



ほか、京都の霊鑑寺にも投壺の道具(作者不詳 江戸時代後期)が保存されています。こちらは伝法院で披露される物よりかなり小型(口径9.0 胴径14.0 高25.0)です。
また同じく京都の宝鏡寺にも投壺が伝えられており、今年(2001年春)の人形展を見学に行ったら、等身大の平安女性の人形数体が投壺で遊んでいる光景が展示されていました(写真撮影禁止だったのが残念です)。

ちなみに正倉院の投壺具は、口径7.4cm、高さ31cm、重さ5.474kgだそうです。矢の長さは74cm前後で、「主客4本ずつの矢を持って行った」と記録に残っています。
その他、仙台市の博物館では、常設展で投壺を展示しているようです。「武士や裕福な家の子どもたちが遊んだ室内のゲームに挑戦してみませんか。」ということで、つまり、実際に遊べるのかもしれません。
常設展観覧料として、一般400円、高校生200円、小・中学生100円が必要です。30名以上の団体は各2割引です。
(余談ですが、インターネットで検索する時は、「投壺」と「投壷」の両方で調べてみるといいです)

ところで、韓国のガイドブック(「ブルーワールド・ガイド 韓国」)の表紙の裏の写真に、投壺に興じている人の写真がある、という情報を友人から聞きました。
そこで、韓国の投壺(トゥホ)について調べようと思ってインターネットで検索してみたら、「'98韓国新正月旅行記」というページの3枚目の一番下に、ある宮殿の広場で(つまり屋外で!)投壺が行なわれている様子が紹介されていました。何しろ屋外ですから正座などはしておらず、立ったまま投げ入れています。それだけ庶民的だとも言えましょう。
このページの作者のPaizaさんから、その写真の掲載の許可を頂けましたので、ここに紹介させて頂きます。






このページの他にも、「投壺」で検索すると韓国に関連した所がたくさんヒットします。日本の投扇興がお正月遊びとして生き残っているのと同様に、日本では廃れてしまった投壺が韓国ではお正月の伝統的な遊びとして今に伝えられているというのは驚きです。
日本に投壺が伝えられたのは中国からということでしたが、朝鮮半島にいつ頃から伝わったのかはまだよくわかりません。

なお、上記のPaizaさんのホームページはこちらです。
「Paizaの世界の旅情報」http://www2s.biglobe.ne.jp/~paiza/index.html

(2009年4月15日追記)
公開中の映画「レッドクリフPart.2」の中に、投壺のシーンが出てきます。


(2009年5月15日追記)
5月14日にBS朝日で放送された韓国ドラマ「張禧嬪(チャンヒビン)」第74話の最後の方で、王妃や王子などが側近に囲まれながら野外で投壺をしていました。
宮殿の庭に筒状の壺の様なものを置き、矢を順番に投げ入れてました。失敗すると、罰として顔に紙製の花びらをはっていました。日本の羽つきの墨塗りと違い、宮廷の遊びは罰も花びらとは優雅なものです。ドラマは17世紀の李朝が舞台となっています。





http://big5.cri.cn/gate/big5/gb.cri.cn/9223/2006/04/24/1266@1015725.htm



【漢民族傳統禮儀】雅歌投壺、射之細也——“投壺之禮”操作方案(圖)

國際線上 www.crionline.cn 2006-04-24 16:08:10

【 發表評論 】 【 查看留言 】 【 查看本頻道留言 】 【有錯你來糾】 【 論壇 】

  柯列葩布,匪罕匪綢,雖就置猶弗然,矧逈絕之所投,惟茲巧之妙麗,亦希世之寡儔,調心術于混冥,適容體于便安,紛縱奇于施捨,顯必中以微觀,悅與坐之耳目,樂眾心而不倦,環瑋百變,惡可窮讚。

——三國 魏 邯鄲淳《投壺賦》 代題記


投壺之禮示意圖

天漢民族文化網-百度漢服吧聯合設計,國際線上文化頻道獨家推出!

  第一部分:筵席邊的射禮——投壺





  投壺是從先秦延續至清末的漢民族傳統禮儀和宴飲遊戲,投壺禮來源於射禮。由於庭院不夠寬闊,不足以張侯置鵠;或者由於賓客眾多,不足以備弓比耦;或者有的賓客的確不會射箭,故而以投壺代替彎弓,以樂嘉賓,以習禮儀。宋呂大臨在《禮記傳》中雲:“投壺,射之細也。燕飲有射以樂賓,以習容而講藝也。”

  不管什麼原因,投壺脫胎于射禮是公認的,兩者在形態、意趣、方法、規則等方面有諸多相似之處,可以說,投壺是一種以矢代箭、以壺代侯的小型的射禮,是一種“筵席邊的射禮”。

  為什麼要行投壺禮?不如問,問什麼要行射禮?禮射是漢民族特有的民族禮儀,講究道德引導、立德正己與君子之爭,投壺之義即含禮射之義。

一個大膽設想:“射禮”搬上奧運會如何?

漢民族傳統禮儀“射禮”操作方案(附圖解)

立德正己、禮樂相和——“射禮”首次復興實踐活動圖片報道

  投壺的發展簡史

  《左傳·昭公十二年》載:“晉侯以齊侯宴,中行穆子相,投壺。”這是投壺比較早的記載。《禮記》出現了一篇《投壺》,詳細記載了先秦投壺的規則和方法。投壺活動在漢魏時期仍是王公大臣的娛樂活動,在河南南陽漢畫館中珍藏的一塊刻有投壺場景的畫像石常被提及,畫像中部一壺一酒樽,壺內有兩矢,樽內有勺,在鼓樂聲中,賓主二人正抱矢投壺。投入壺中的為勝,投不中者為輸,對輸者要進行罰酒,由旁邊的司射裁判。如圖:



東漢以前,投壺“禮”的意味較濃,魏晉南北朝開始向技藝多樣化發展,增強了娛樂性。宋代大儒司馬光對投壺有悖于古禮而娛樂化的趨勢頗為不滿。宋神宗熙寧五年,他著述了《投壺新格》一卷,根據古禮之義對投壺做了全面的總結。他說:“投壺可以治心,可以修身,可以為國,可以觀人。何以言之?夫投壺者不使之過,亦不使之不及,所以為中也。不使之偏波流散,所以為正也。中正,道之根底也。”他還對投壺的名稱和計分規則,以“禮”的眼光,做了修改。在投壺方式上,司馬光定有“有初”(第一箭入壺者)、“連中”(第二箭連中)、“貫耳”(投入壺耳者)、“散箭”(第一箭不入壺,第二箭起投入者)、“全壺”(箭箭都中者)、“有終”(未箭入壺者)、“驍箭”(投入壺中之箭反躍出來,接著又投入中者)等。

  明代,隨著社會發展日益繁盛,投壺進入新的發展階段。如明《投壺奏矢》稱,當時的投法有140種之多。到了清朝,投壺日趨衰落。但直到清朝末年宮中也還在流傳。現在,北京中山公園內還有一個“投壺亭”,還保存了六隻古代銅質投壺。

  組圖:各種投壺實物和投壺活動


明宣德掐絲琺瑯纏枝蓮紋投壺


《投壺新格》投壺方式




古畫中的投壺

  
南韓民間節日時的投壺


台南藝術大學投壺

  
“投壺之禮”和“投壺之戲”

  投壺自產生時起就具有兩種屬性,一為禮儀,一為遊戲。早期的投壺,“禮”的成為為主,而隨著歷史的發展,投壺遊戲性的一面日益加重,規則也不斷變化。

  投壺,既具有與射禮相同的禮義,如立德正己、君子之爭、發而不中、反求諸己等,又具有投壺獨特的禮義和價值。投壺是一種主人在宴會上娛樂嘉賓的遊戲,同時又有防止宴飲歡樂過於放縱的作用。賓主禮讓,安心寧神,既有遊戲之樂,又保證了歡宴娛樂的分寸。投壺顯然可以愉悅身心,矯正怠情。魏邯鄲淳《投壺賦》曰:“調心術于混冥,適容體于便安。”“悅與坐之耳目,樂眾心而不倦。”晉傅玄《投壺賦序》曰:“投壺者,所以矯懈而正心也。”

  第二部分:投壺之禮操作方案

  投壺之禮與射禮具有類似的復興價值,在此不再贅述。復興投壺,並不只是為了追求一種古典禮儀和遊戲的復原。追求人與人的相互禮讓與虔敬,提倡以君子之風相處相爭,同時起到愉悅身心、豐富禮宴娛樂的作用,這正是我們提倡重溫投壺的原因所在。

  我們把投壺之禮分為標準型、簡易型和表演型3種。三者的區別為:

標準型:以《禮記》等經典禮儀典籍的記載為依據,結合現實條件,適當調整,使其成為日常可習可行的民族禮儀與娛樂活動。

簡易型:儘量簡化,使投壺簡便易行,相應地,使用一些代用品為投壺工具。簡易型投壺主要是一種宴飲娛樂活動。

表演型:忠實復原經典禮儀典籍的記載,禮器使用、禮儀程式均需嚴謹、規範。

  本方案主要提供標準型和簡易型投壺的做法,表演型投壺,實踐者可根據典籍記載自行研習。

  (一)標準型投壺

  1 投壺之禮的準備

  投壺是在宴飲時所行禮儀,行禮者皆著漢服禮服。

  ①參禮者

主人1人:投壺禮的主持者

賓1人:投壺禮的參與者

司射1人:投壺禮的具體指揮者

樂工1人:演奏音樂

  ②禮器的準備

  投壺兩尊:金屬制、陶瓷制等均可。先秦投壺無耳,壺中盛以紅小豆,使箭矢投入後不至於彈出。標準尺寸為壺頸長七寸,口徑二寸半,壺高一尺二寸,容鬥五升,壺腹五寸。(皆周代度制,一寸合2.31釐米)
矢:若干。古禮要求以柘木製,此處不拘泥,以竹、木等均可,削成矢狀,矢長二十釐米,首端銳尾端鈍。製作時可參考:



  矢需準備至少八支以上。

壺與矢是投壺最重要的禮器,製作時宜儘量精美。

算:若干。竹木製,計算成績之用。以竹木片。

酒爵1對:賓主飲酒用。   

  2 投壺之禮的程式

  ①賓主就位

賓主于各自席位上。投壺之禮開始。

  ②三請三讓

主人奉矢到賓面前。主人請曰:“某有枉矢哨壺,請樂賓。”賓曰: “子有旨酒嘉殽,又重以樂,敢辭。” 主人曰:“枉矢哨壺,不足辭也,敢以請。”賓曰:“某賜旨酒嘉殽,又重以樂,敢固辭。”

主人曰:“枉矢哨壺,不足辭也,敢固以請。” 賓對曰:“某固辭不得命,敢不敬從?”

賓向主人行拜禮,接受主人奉上的四隻矢。主人答拜。

賓主相互行揖禮,于賓主席上正坐,面對壺所在的席之方位,做好投壺準備。

  ③進壺

司射把兩尊壺放到賓主席對面的席子上(壺離主賓席位的距離為二矢半),分別正對賓與主人。返回司射席位。向賓主宣佈比賽規則:“投壺之禮,需將箭矢的端首擲入壺內才算投中;要依次投矢,搶先連投者投入亦不予計分;投中獲勝者罰不勝者飲酒”

再令樂工奏《狸首》。比賽開始。《狸首》,詩經名篇,瑟曲,已失傳。今可用琴曲《鹿鳴》替代。投壺動作應與節奏相和。

  ④投壺

賓主依次投壺,將八隻矢投完。為一局。

  ⑤釋算

即計算成績。司射在賓主投壺過程中同時計算成績,有投入的,就將一枚“算”放到一側的地上,賓投中放于右,主投中放于左。

賓主投完,司射說:“左右都已投完,下面宣佈成績。”

報數時,單數稱奇,雙數稱純。一算為一奇,二算為一純,三算為三奇,四算為二純……誰人勝了,司射報曰“某賢于某×純(奇)”,平局便稱為“均”。

  ⑥酌酒

司射說:“請勝者為不勝者酌酒。”此時,勝者向敗者罰酒。

勝者為敗者酒爵中斟滿酒,奉上,敗者接過,說“賜灌”。勝者答:“敬養”。敗者將罰酒飲下。

  ⑦復始

第二輪投壺開始,方法同上,直至賓主盡歡。

  (二)簡易型投壺

  投壺起源於儒家射禮,因射禮不易操作及諸侯不工射藝,於是採用一種較為簡單的方式來代替。但若按照《禮記》規定,應該說仍然是比較繁瑣的。作為一種日常宴飲的娛樂活動,投壺簡便易行即可,歡愉而有分寸,仍然不失為一種高雅的宴飲娛樂。事實上,即便在投壺還比較盛行的年代,真正按照《禮記》的規定進行投壺的也為數不多。

  簡易型投壺是在標準型投壺的基礎上做較大簡化,可使用一些代用品。

  投壺,可下載投壺的圖片請陶瓷店製作,低廉的只需要幾十元。沒條件的,用家中現有的瓷瓶、水瓶等也可以代替。矢,兩支輪流使用即可,竹制,長度在20釐米左右,頭端裹上棉布以增強命中率。更簡單的辦法則是用筷子做矢。算,以竹籤。還可以牙籤、石子或其他器物代替。有條件時彈《鹿鳴》,無條件時可代以CD音樂。

  具體程式為:





①開始:賓主相揖後就位。

②投壺:賓主于席上依次投壺。

③釋算:計算成績。

④罰酒:勝者向敗者罰酒。

⑤復始:進行下一輪。



The Administration and Maintenance of Royal Tomb Ritual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HAN Hyung-Ju

http://kuir.jm.kansai-u.ac.jp/dspace/bitstream/10112/5911/1/02-1_HAN%20Hyung-Ju.pdf

朝鮮初期における王陵祭祀の整備と運営*
ハン・ヒョンジュ
(翻訳:金子祐樹)
The Administration and Maintenance of Royal Tomb Ritual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HAN Hyung-Ju
 朝鮮王陵の研究は,風水地理学と美術史学などにおいて行われてきたが,国家儀礼からのアプローチはほとんどなかった。そこで本稿では祭礼を対象に,朝鮮時代初期における王陵祭祀の制度的整備と儀式,宗廟との差別性,そして陵幸の政治的意味などに注目し,国家儀礼における王陵の位置づけについて考察した。 朝鮮王陵は,太祖の即位後,追尊された四代王と王妃,そして神懿王后の齊陵が造営され,祭祀が施行されることに始まり,陵祭の整備は,実母である神懿王后韓氏の齊日に太宗が行幸したことを受けて行われたが,太宗代における太祖の死亡を機に本格化した。厚陵と獻陵が造営された世宗代には,祭祀の細部項目と拜陵儀が修正・補完され,その内容は世宗の死後『世宗実録』五礼の凶礼条と吉礼条に収録され,部分的な修正を経て『国朝五礼儀』に収録された。 王陵祭祀は,四孟月の時祭と朔望,俗節など多様であるが,これは当時の宗廟および原廟である文昭殿において施行されたものと同じであった。これは高麗時代からの伝統と思われるが,中国にも類例が見られる。しかし高麗の陵祭が国家祀典の大祀に組み込まれていたのに対し,朝鮮のそれは「俗祭」という大中小祀とは異なる体系に属しており,また大祀に属する「宗廟」祭祀とも区別されていた。また陵祭が凶礼であった中国とは異なり,王陵にかかわる儀式を凶礼と吉例に区分して組み込んだという独自性も見られる。  太祖~成宗にかけての100年間における国王の親祭は,宗廟に対しては41回に過ぎなかった反面,王陵や原廟(文昭殿)に対しては毎年2 ~ 5 回行われた。原廟はその後,壬辰倭乱(秀吉の朝鮮侵略)の際に破壊されて復旧されず,王陵における四時祭も仁祖代に廃止された。王陵祭祀はその後,俗節祭(.日を除く)を中心に運営された。 朝鮮時代において,王が祭祀に直接参加した例は意外に多くなく,宗廟の場合でもおおよそ2~3年に一回程度であったが,王陵の親祭は,毎年数回にわたって行われた。累代の先王が集る昏殿よりも,肉身が安置された個々の陵に親近感を覚えたことや,
*本稿は,2010年7 月2 日に高麗大学校で開催されたフォーラム「陵墓からみた東アジア諸国の位相―朝鮮王陵とその周縁―」にて著者が行なった報告をまとめ,韓国の学術誌『歴史民俗学』33号に掲載された論文に基づいていることを明記しておく。
俗祭であり儀式が簡略であったことなどがその背景にあろう。いっぽう荘厳な儀仗を備えた陵幸は,都城を出て民に自分たちの「王」を知らしめる重要な政治行為であった。
キーワード: 王陵(royal tomb),健元陵(Geonwolleung tomb),凶礼(funeral ceremony),吉礼(celebrations),拝陵儀(rituals for paying respects at tombs),陵幸(official visits to royal tombs)
はじめに
 朝鮮王朝時代,王(妃)が死去すると,遺体は地に埋められ,陵が造成された。そして,三年喪が過ぎると,その魂は国家の祠堂である宗廟に奉安される。両者はどちらも国家の最高統治者である王(妃)を対象として儒教的な「孝」を実践する象徴であるという共通点を持つ。しかし,王陵と宗廟は死者の肉体と精神が分離され別々に奉じられる場所であり,後者が祭礼の対象に限定される一方,前者は喪礼と祭礼のどちらも行なわれるという点に根本的な違いがある。 朝鮮時代の国家理念である儒教の実践の場として,最高権力者を対象としたその象徴的存在が,今尚ほぼ完全に残っているという事実は,宗廟と王陵に対する関心を小さからぬものとしている。とくに,1995年の宗廟に続き,2009年に王陵が世界文化遺産として認定されたことで世間の関心がいっそう高まった。ところで,学界の関心はというと,両者でそれぞれ異なって表出した。宗廟の研究が1990年代以降,歴史学界を筆頭に建築学・音楽史の分野で着々と成果を出してきたのに対し,王陵研究の実情は全く異なっている。 目下,朝鮮時代の王陵に関する研究は,建築物の築造様式,風水学的な立地,および王陵周辺に置かれた石造の造景物に対する美術史的解釈など,ハードウェア的なアプローチが大半である1)。歴史学分野では王陵全体および一部の陵に関する築造・管理・遷葬といった概括的なアプローチや,18世紀後半に正祖が挙行した陵幸の政治史的意味を扱った論考がある2)。一方,国家儀礼という観点からの検討は,王
1)金永彬「風水思想から見た朝鮮王陵園墓の造成技法に関する研究(上)(下)」(『韓国伝統文化研究』4 ,暁星女大韓国伝統文化研究所,1988・1989)。金元龍「李朝王陵の石人彫刻―李朝彫刻様式の変遷―」(『アジア研究』2-2,高麗大学校アジア問題研究所,1959年)。洪慶振「朝鮮前期における王陵および石造物の様式変遷に関する研究」
(慶煕大学校碩士学位論文)。裵允秀「朝鮮時代における王陵の石獣についての研究」(梨花女子大学校碩士論文,1983) 。チャン・ギョンヒ「朝鮮後期における山陵都監の匠人研究―王陵の丁字閣と石儀物の製作過程を中心に
―」(『歴史民俗学』25,韓国歴史民俗学会,2007)。キム・ウンソン「朝鮮後期王陵における石人彫刻研究」(『美術史学研究(旧:考古美術)』249,韓国美術史学会,2006)。チャン・ウンミ,パク・キョン「朝鮮時代における王陵の空間的分布特性」(『韓国GIS学会誌』14-3,韓国GIS学会,2006)。クォン・ヨンオク「朝鮮王朝王陵の文人石像の服飾形態に関する研究」(『服飾』4 ,韓国服飾学会,1981)
2)金九鎮「朝鮮初期の王陵制度―世宗大王の旧英陵遺蹟を中心に―」(『白山学報』25,白山学会,1979)。韓永愚『正祖の華城行次,その8 日間』(ヒョヨン出版社,1998)。鄭崇教「正祖代における乙卯園幸の財政運営と整理穀の整備」(『韓国学報』82,一志社,1996)。金文植「18世紀後半における正祖の陵幸の意義」(『韓国学報』23,一志社,
陵が造られる段階までの喪礼の過程を説明した李範稷の論文が唯一であり3),しかも長期的・持続的な性格の祭礼を題材としての研究は皆無であった。このように,従来の研究が正祖代(18世紀後半)における陵幸の政治的意義に集中しているのは,王陵研究に先立って理解されるべき国家儀礼の研究成果が不足しているという現状による。 そこで本稿では,15世紀において王陵で施行された国家儀礼,なかでも祭礼に着目して検討を行なう。まず,朝鮮時代の王陵祭祀が制度的に整理される過程を概観する。次に,王陵祭礼の内容を祭儀の検討および祭期が変化する様相を中心に明らかにしたい。最後に,講武〔朝鮮時代の王によって催された,軍事教練を兼ねる狩猟大会〕と関連づけられた陵幸の政治史的意味と宗廟および文昭殿の相関性も検討する。 朝鮮時代の国家運営は,儒教的な「礼治」としてよく説明される。この「礼治」は人間の基本感情の一つである「孝」に基づくものであり,先王を祀る宗廟・王陵での正しい儀礼を通じて第一義に表現された。このことから,王陵儀礼の内容やその運営方式を検証するという作業を行なうことで,朝鮮時代の「礼治」の性格を究明する一定の手掛かりの提供が可能となるだろう。また王陵に対する新たな儀礼的・政治的アプローチは,今後,同分野における研究の多様化に一助となるところがあるものと期待する。
1 .王陵祭祀の成立
 太祖李成桂は,建国直後,自身の四代祖を王に追贈,彼等の墓を王陵とし,その地位を高めた。彼は,即位(1392年)の翌月に李方遠〔五男。後の第3 代国王,太宗〕を東北面〔咸鏡道〕に送り,先祖4 代の墓に即位を告げて,桓祖〔父〕のものを定陵,桓祖妃〔母〕のものを和陵,度祖〔祖父〕のを義陵,度祖妃〔祖母〕のを純陵,翼祖〔曾祖父〕のを智陵,翼祖妃〔曾祖母〕のを淑陵,穆祖〔高祖父〕のを徳陵,穆祖妃〔高祖母〕のを安陵とした4)。この際,定陵・和陵・義陵・純陵は咸州,智陵は安邊,淑陵は文州,徳陵と安陵は孔州に,それぞれ分置されている。これにともない,太祖の最初の妻,神懿王后韓氏の陵である斉陵もつくられた5)。そして,各陵に陵直として権務2 名と複数の守陵戸を定め,斎宮を建てさせることで6),建国して間も無い時期に9 つの陵を備えることとなる。これらの陵への祭祀は翌年の正月から,四孟月〔1 , 4 , 7 ,10月〕と臘日〔冬至後3 度目の戌の日〕に宗室と大臣を遣わして挙行させ,朔望日と俗節には都巡問使がこれを行なうよう定めた7)。
1997) ,同「1779年の正祖の陵幸と南漢山城」(『韓国実学研究』8 ,韓国実学学会,2004)。イ・ヒジュン「17, 8
世紀におけるソウル周辺の王陵の築造・管理および遷陵論議」(『ソウル学研究』17,ソウル学研究所,2001)。シ
ン・ビョンジュ「文化:王陵に見たる幸せな王,不幸な王」(『ソンビ文化』12,南ソウル大学校南冥学研究院,2007)
3)李範稷「朝鮮時代における王陵の造成およびその文献」(『韓国思想と文化』36,2007)
4)『太祖実録』巻1 ,元年8 月丁己
5)『太祖実録』巻4 , 2 年9 月庚申
6)『太祖実録』巻2 ,元年10月丙子
7)『太祖実録』巻2 ,元年12月丁未
 太祖5(1396)年8月,王妃の姜氏が死去した8)。そこで聚賢坊に王妃陵を設け9),王妃の尊号を神徳王后,陵号を貞陵と定めた10)。太祖は,在位中のみならず譲位以後も,貞陵によく行幸した11)。そして貞陵社の塔殿で7日間仏事を催し12),貞陵で精勤法席を設ける13)など,継妃の姜氏への追慕を絶やさなかった。逆に,前妻韓氏への追慕作業は特に行なっていない。 太祖のこうした行動は,韓氏を生母とする定宗や太宗の反発を生んだ。太宗6年,太祖が死亡する前まで,定宗〔次男。第2 代国王〕と太宗(世子であったときの2 回を含む)は,15回も斉陵に参拝している。ところで祭祀への参加は,上王である定宗の方が多く,太宗は斉陵の施設を充実させたり管理に没頭する傾向をみせている。斉陵の碑を新たに建てて権近に碑文を書かせたのも14),それまで無かった石室を築造して15)石欄や石人を作ったのも16),碑亭を建てた17)のも全て太宗であり,外形的造成を次々と行なうことに力を費やした。同時に,斉陵の管理にも尽力し,特に太宗3 (1403)年4 月に1 万人以上の人員を動員して一人当たり3 升ずつマツケムシ〔マツカレハの幼虫〕を捕まえて埋めさせたという事実18) は,彼がいかに斉陵への追慕に傾倒していたかを示す端的な例である。 それとは反対に,貞陵については関心が無いどころか,規模の縮小を行なうほどであった。彼が即位時に宗廟・文昭殿とともに貞陵で祭祀を行なって以降,太宗はただの一度も貞陵祭祀に参与しなかった。逆に同王6(1406)年には,貞陵の兆域が広すぎるとして百歩以内に縮小し,残りは家を建てることを許したため,権勢家が競って土地を独占しようとする事態を招いた19)。さらに,太祖が死去すると,その翌年に貞陵を都城の外,沙乙閑の麓に遷葬した20)。世宗〔第4 代国王〕代には,貞陵の祭祀を族親〔喪に服す義務を有する親族〕に主管させるようにし21),これによって国行祭祀から排除した。 一方,太宗代には,王陵祭祀の対象が拡大し,前王朝の王が含まれるようになった。太宗元(1401)年,門下府郎舍から,高麗太祖が東民〔東国つまり朝鮮の民〕に功績があるため,その陵である顕陵に属戸と柴地を定めてその属戸の賦役を免除し,樵牧を禁止するよう請われたものの,当時,王は返答しなかった22)。しかし太宗6(1406)年には高麗太宗と恵王・成王・顕王・文王・忠敬王・忠烈王・恭愍王
8)『太祖実録』巻10,5 年8 月戊戌
9)『太祖実録』巻10,5 年8 月戊申10)『太祖実録』巻10,5 年9 月癸未11)『太祖実録』巻11,太祖6 年正月戊辰。6 年2 月壬寅。6 年4 月辛卯。巻12,太祖6 年10月甲辰。巻13,太祖7 年正
月庚午。太祖7 年4 月丁丑。『定宗実録』巻4 ,定宗2 年4 月癸丑。巻6 ,定宗2 年10月乙卯12)『定宗実録』巻4 , 2 年4 月癸丑13)『定宗実録』巻6 , 2 年10月乙卯14)『太宗実録』巻7 , 4 年2 月癸丑15)『太宗実録』巻14,7 年10月戊子16)『太宗実録』巻15,8 年3 月癸未17)『太宗実録』巻19,10年3 月甲申18)『太宗実録』巻5 , 3 年4 月丁卯19)『太宗実録』巻11,6 年4 月丁卯20)『太宗実録』巻17,9 年2 月丙申21)『世宗実録』巻1 ,即位年8 月丁酉22)『太宗実録』巻1 ,元年正月甲戌
の8 陵に対し,新たな指針を設けた。太祖陵である顕陵には3 戸,他の7 陵には2 戸の守護人を設け,それぞれの戸に田一結を与え,樵採と火焚を禁止するよう措置したのである23)。さらに同王16年には,中国において歴代帝王の陵寝を奉祀した制度にならい,前朝8 陵の祭祀を仲春と仲秋の2 度行なうが,守陵は全て2戸として他の役務を免除し,常に樵採を禁じるよう具体化した24)。合わせて,恭譲君を王と見なして25)陵号を与えたが26),そののち世宗3 年には恭譲王の娘に陵戸1 戸を支給して祭祀を享受できるよう措置した27)。こうした前朝9 陵への祭祀制度の整備は,『世宗実録』五礼で高麗始祖廟への祭祀について太祖の神位〔位牌のこと〕に顕宗と恭愍王の神位を附祭せしめ28),『経国大典』や『国朝五礼儀』において太祖の神位に顕宗・文宗・忠敬王(元宗)の神位を附祭するよう定めた事実29)とも結びついており,当時の高麗継承意識や歴代国王の評価を垣間見ることができる。 太宗8 (1408)年5 月,太祖崩御。翌月に埋葬地を楊州の倹巌に定め30) ,諸道の軍丁6,000人を徴発,
7月末日に造営を始めた31)。太祖の健元陵は石室で造成される。死者の冥福を祈るための寺である願刹として建立された開慶寺には奴婢150口・田地300結を定屬させることとなり32),同じく守護軍は100戸と定められた33)。また,周囲に松を植える34)など,諸般の処置がなされた。太祖の棺は死後4 ヶ月経って葬られたが35),翌年7 月26日には喪が明けて神主が宗廟に安置され〔これを.廟という〕36),翌月,健元陵の祭祀で喪服を脱ぐときが来たこと〔免喪という〕を告げることで37), 3 年喪が終えられた。 太宗10(1410)年以後,健元陵への祭祀が本格的に整備されるのと並行して関連事項の整理も始められる。太宗14(1414)年,健元陵・文昭殿・宗廟・社稷祭の蔬菜は典祀寺で供給し,国賓への接待には礼賓寺から供給されたものを使うようにし38),草木が繁茂すると突然の野火に対処しにくいため,陵の禁火地以外での耕墾が民に許された39)。それにともない,同王17(1417)年11月には,『大明律』失火條を根拠として,失火した者を杖80・徒2 年に処するよう規定された40)。
23)『太宗実録』巻11,6 年3 月甲寅24)『太宗実録』巻31,16年6 月丁亥25)『太宗実録』巻32,16年8 月甲子26)『太宗実録』巻32,16年9 月丁己27)『世宗実録』巻11,3 年正月丙子28)『世宗実録』卷130,五礼,吉礼序例,神

Kisaeng in Joseon era


http://toriton.blog2.fc2.com/blog-entry-1804.html

慰安婦の歴史を展示
「戦争と女性の人権博物館」開館
聯合ニュース 2012/05/01 15:29
http://japanese.yonhapnews.co.kr/headline/2012/05/01/0200000000AJP20120501001500882.HTML
旧日本軍の従軍慰安婦たちが歩んできた
抑圧の歴史を紹介する「戦争と女性の人権博物館」が、
5日にソウル市麻浦区に開館する。
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が1日に伝えた。

 元慰安婦の経験や記憶が刻み込まれた
さまざまな史料を展示するほか、
20年間余り続いてきた元慰安婦の名誉回復に向けた
活動を紹介する。
また、各国の紛争で女性の人権が侵害されている実態を
示す資料も展示する。

 博物館は、慰安婦の歴史を風化させないための
史料館が必要だとする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などの
意見で、建設が進められてきた。

 2003年12月に元慰安婦17人が建設費を寄付し、
翌年に建立委員会が発足。
当初はソウル市西大門区の独立公園内に建設する計画
だったが、独立有功者団体などが公園の特性に合わない
と反対したため、麻浦区の用地を買い入れ、
今年1月に着工した。

>元慰安婦の経験や記憶が刻み込まれた
 さまざまな史料

では、
「養父に売られた」
「夫に売られた」
「知り合いの宋(日本名は松本)に
 工場で働けば儲かると騙された」
「赤い靴とワンピースをあげると
 誘われてついて行った」
等々、正直な記憶が刻まれることを望みます。
http://www010.upp.so-net.ne.jp/japancia/kiji/kimugakukousatu.html

ついでに、国内の
女性の人権が侵害されている実態も展示したら?

★‘企業型組織暴力’
 未成年者コンパニオン数百人置いて
 恐喝・性暴行
 京郷新聞 2012-05-02 22:14
 http://www.excite-webtl.jp/world/korean/web/?wb_url=http%3A%2F%2Fnews.naver.com%2Fmain%2Fhome.nhn&wb_lp=KOJA&wb_dis=2&wb_submit=+%E7%BF%BB+%E8%A8%B3+
 企業型で未成年者を雇用して居酒屋など歓楽街に
女性コンパニオンで斡旋してこれらから
奉仕料を恐喝してきた暴力組織が警察に捕まった。
組織員中一部は未成年者らを常習性暴行した疑惑
も受けている。

コンパニオンで雇用された未成年者の中には
中学生も含まれていて、
100人余りは学校を正常に通う女子学生らと
明らかになった。

仁川(インチョン)南部警察署は‘主眼ポドヨナッパ’
親分キオッ氏(31)等9人を暴力および犯罪団体構成・
恐喝などの疑惑で拘束して、23人を同じ嫌疑で
不拘束立件したと2日明らかにした。
また、未成年者らに酒の接待をさせるようにした
風俗店主人120人も調査中だ。

キオッ氏などは昨年5月組織を結成した後
インターネット等を通して未成年者250人を雇用して
遊興酒屋にコンパニオンとして斡旋し、彼女達から
お金を恐喝してきた疑惑だ。
キオッ氏などは10~20人単位で組をつくって管理しながら
時間当り個人奉仕料で受けた2万5000ウォンの中から
1万ウォンを恐喝してきたことが確認された。

警察は
「組織員1人が1組を管理しながら、未成年者らから
 月1000万ウォン余りをむしり取ったことが把握された」
と明らかにした。

一部組織員は未成年者を性暴行した疑惑もあると
警察は明らかにした。
雇用された未成年者は満14~16才で、
中学生も一部含まれていると調査された。

100人余りは在学中の学生たちで、平日には学校に通い
週末に組織員らの連絡を受けてコンパニオンとして
仕事をしてき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

主眼報道連合売る仁川(インチョン)の代表的な歓楽街の
朱安洞‘2030通り’とソク岩カフェ路地などを舞台に
活動して行動綱領および統率体系を作って組織を
運営してきたと調査された。

これらは風俗店業者が話を聞かなければ
組織員を客として送り、ケチをつけて営業を邪魔して
組織員を従業員に雇用するように強要した。
また他の風俗店事業主を脅迫してコンパニオン斡旋を
邪魔することもした。

警察関係者は
「性暴行被害者が多いものと推定されるが
 女子学生が報復が恐ろしくて
 陳述を敬遠している状況」と話した。

韓国や日本のサヨク学者は、
例えば広島大学の崔 吉城 名誉教授のように
在日韓国系経済紙の東洋経済日報に寄せた随筆

★<随筆>◇朝鮮時代の妓生
 2011/10/28
 http://www.toyo-keizai.co.jp/news/essay/2011/post_4632.php
 妓生には売春は含まれていない。
伝統的に妓生は外国からの使者や貴賓を歓待するために漢詩、音楽や文学など教養を持つ存在であった。
黄真伊はその代表的な例であろう。
妓生は美と芸だけではなく、性的魅力がであった。
多くの日本人は「妓生観光」のように妓生=娼婦と思うのはなぜであろうか。
もちろん芸者が女性の性的な魅力を重んじたのは事実である。妓生制度が確立された李王朝時代では、性的統制の厳しい時代に春画においても間接的な表現が多い。

 朝鮮時代に宮中と民間の歌舞を担当した妓生は掌楽院の教坊において学習をしたが、日本植民地期になると植民地政府は公衆衛生上の理由などで朝鮮内の妓生と遊女に対し統制取り締まり、売春業を統制して監督し始めた。
1913年、茶洞妓生組合に転換されて最初の券番が設立された。そして妓籍を持った券番妓生となった。
ソウルでは漢城券番、大東券番、漢南券番、朝鮮券番,平壌では箕城券番などが有名であった。

 妓生は妓生学校で楽器と歌舞を学び、歌曲、時調、琴、洋琴、長鼓、立唱、坐唱、呈才, 僧舞、剣舞、三味線、書画、算術、日本語、習字、絵を習って、専門芸能人として養成され、公演芸術家でもあり、観光広報モデルであり、伝統的服装や新しい流行スタイルを作り出すファッションリーダーでもあった。

 日本人は明治から海外へ性産業としてシンガポール、ボルネオ、朝鮮、樺太などに進出した(カラユキさん)。

 それが時代の変化とともに、特に日中戦争後の1930~40年代の戦争期には軍隊相手の遊郭などで
売春業が盛んになっていく。
------------------------------------------------
という論調のように妓生は娼婦ではない。
朝鮮には公娼制度が無かったのに、日帝が持ち込んだ。
という主張をする。
相変わらずの「全て日帝のせい」である・・・

彼らの根拠は、妓生は不特定多数の相手に売春などしない。
外国からの使者や貴賓を歓待する際に、客が望めば相手をする
つまり、性接待はメインではないと言う。

中国の『妓女』の歴史を見ると
http://ja.wikipedia.org/wiki/%E5%A6%93%E5%A5%B3
「中国における遊女もしくは芸妓のこと。
 娼妓、娼女という呼称もある。
 歌や舞、数々の技芸で人々を喜ばせ、 時には宴席の接待を取り持つこともあった。」

 
とあり、これは日本側の勝手な書き込みでは無く中国のWebサイトでも同様の説明が有る。

トンデモ学者になると
「朝鮮には公娼も私娼もいなかった。
 日本の植民地政策で売春制度を流入した。」
などと学生に教えているが
朝鮮の官妓だけが、芸や知性だけを売り物にする
”国営の芸能集団”とは、無理がある。
TOPクラスの妓生と、末端の妓生とは役割が異なる。
 
 
 
 

●歪められた朝鮮総督府
 黄 文雄/光文社
◆<妓生と妓生庁>

さて「妓生」の起源は、はるか新羅、高麗時代から
すでに存在していたといわれる。
李朝時代から妓生庁という官庁に官妓が置かれ、
学校まで作って歌舞など諸芸を教えていた。
朝鮮半島の妓女は、『朝鮮開化史』(博文館)によれば、
三階級に分けられていた。
一牌(イルパイ)、ニ牌(イーパイ)、三牌(サンパイ)
という分類である。
一牌は、官妓といわれ、通称妓生で、平安道は官妓の
名産地といわれたそうだ。
二牌は、官妓の落ちこぼれかそれに準ずるもの、
三牌については、恒屋氏は、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三牌ハ通常ノ私窩子ニシテ大抵汚穢極マル者ナリ(略)・・・、
 淫ヲ売リタルニ初マリ高麗ノ中世淫風ノ盛ンナル時ニ
 発達シタル者ナリ」

李クの『ソンホサソル』によれば、妓生の出身は、
揚水尺からくるものという。
揚水尺とは韃靼系の流浪民で、三国時代から咸鏡道をへて、
朝鮮半島各地に流入してきた少数民族だとされている。
しかし、それが妓生の源流だというのは、
ただの推測にすぎない。
李氏の説はかならずしも正確ではない。                

妓生は世襲制で、高麗末期から李朝初期にかけて
全盛期であったともいわれる。
雪梅(ソルメ)のような大臣をやり込める名妓まで出ていた。
李朝太宗の時代になると、酒色に溺れる淫らな風俗を
是正するために、一度、妓生制度改革を試みたが、
成功しなかった。
もちろん、妓生は一牌、二牌、三牌に分けられ、
一牌の官妓には、「薬房妓生」、「針房妓生」、「教坊妓生」
あるいは「玉堂妓生」と官女に近い地位で、官位ま
で持ったものもいたが、
地方の官妓は、もっぱら官吏の接待で、
性奴隷のような境遇にあった。

朝鮮半島はソウル以外は、典型的な村社会だから、
江戸の吉原のような遊廓はなかった。
「三牌」の集落は、売春宿になっていた。
道楽好きな両班の連中が通うのは、妓生の宿であった。
『春香伝』の「華房」とは「妓生房」のことである。

高宗の父大院君は、第二子熙が、二十五代の哲宗の継承者
として指名される前に、党禍から脱出するために、
よく市井の無頼漢と群れをなして、酒を飲み、
娼妓遊びをしたとも書かれている。(略)

 
国営コンパニオン制度のようなモノしか取り上げられていないが李氏朝鮮時代に何度も襲った飢饉で一般庶民の間で、女性の売買が行われなかったとは無理がある。

韓国の麗水国際博覧会会場前の風俗街のように
http://news.livedoor.com/article/detail/6205231/
 この地区がほかの集娼村と違うのは、店ではなく普通の家で売春が行われる点だ。
 古い建物が密着するようにして建ち、人ひとりが通れるほどの細い路地が 迷路のように入り組む。
 売春婦たちは今にも崩れそうなほど古いこの建物で暮らしながら、売春もここで行うのだという。

と、いうように店舗を構えない自宅売春もおそらく日韓併合前から通常的に行われていた事は
想像できる・・・

女性人権団体が、自国の歴史を認めて根本的解決をしようとしなければ「全て日帝が悪い」などと責任転嫁しているようではいつまで経っても、今回のような「未成年女子学生2500人を斡旋する」組織犯罪は次から次へと起こるだろう。
根本原因は、貧富の格差であり、貧困の世襲・・・
妓生が、没落両班の子女だけでなく奴婢身分で、妓生の娘は妓生という世襲にあるように苦界から抜け出せないシステムに有る。

 
少女たちが女衒たちの犠牲にならないようにこんな哀しい目をして「売春婦デモ」に参加しなくても、安心して生活できる貧困対策彼女達を「韓国の恥」と蔑んで、現実を見ない社会環境を改善していく事こそが早急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優先課題だとは思わないのだろうか・・・

朝鮮の妓生制度を語る時
何故か、「軍妓」や「辺妓」の存在は語られない。
「軍妓」=兵士を慰安する、軍に付属する妓女「辺妓」=国境などの偏狭に駐在する軍隊用の妓女
李朝時代に毎年、宗主国に貢女や宦官を献上していた史実も有名です。
「戦争と女性の人権博物館」には
日韓併合以前の、慰安制度の資料も展示すべきである。
異民族との接触が頻繁に有り、古代朝鮮からの征服民族が被征服民族に対しての奴隷制度や
人間を家畜の如く去勢する宦官制度なども資料として残すべきである。

★中国対日観:
 「宦官を導入しなかった」ことで尊敬の念
 http://news.searchina.ne.jp/disp.cgi?y=2009&d=0223&f=national_0223_017.shtml

Wednesday, January 29, 2014

Monday, January 27, 2014

Yi Gok,korean poemer in Goryeo era

李穀 【りこく】
이곡(李穀, 1298년 ~ 1351년)

1件の用語解説(李穀で検索)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の解説
りこく【李穀 (R)I Kok】 1298‐1351

朝鮮,高麗末期の文臣,学者。字は仲父,号は稼亭。韓山の人。高麗と元の科挙にいずれも及第し,当時の困難な外交関係に功労があった。《編年綱目》《三朝実録》の編纂に参与し,《稼亭集》20巻が伝わる。他に開城演福寺の蒙古鐘の銘文が有名。《竹夫人伝》は,唐・宋古文家の伝奇文に倣い,竹を擬人化して婦人の節義の尊さを説いた作品で,当時新興の朱子学者層の清新な理念が表現されている。諡号(しごう)は文孝。李穡(りしよく)はその子である。


http://world.kbs.co.kr/japanese//program/program_koreanstory_detail.htm??lang=j&current_page=10&No=30258
韓国偉人伝トップページ > 番組 > ネットコンテンツ  > 韓国偉人伝
文益漸2011-09-22
文益漸
朝夕が急に冷え込み始めた今日この頃、思い出される人物がいます。
綿花の種を持ち帰り、人々が温かく冬を過ごせるようにしてくれた人物、文益漸(ムン・イクチョム)です。
冬でも薄い麻の服しかなかった高麗時代、文益漸のおかげで韓半島でも暖かい木綿の服が着ら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

高麗末期の1329年、都から落郷した貴族の次男として生まれた文益漸は、12歳の時に大学者李穀(イ・ゴク)の門下生となります。
元の国の科挙試験に合格するほど優れた学問の持ち主だった李穀は、元の皇帝に建議して80年間続いていた 「貢女制」(高麗の女性たちを元に差し出すという悪習)を廃止させた人物です。
そういう師の下で、文益漸は人のために役立つ人物、人間が人間らしく暮らせる社会を作ることが貴族・ソンビの道だと悟ります。

文益漸は1360年に科挙に合格、政府の役職に就き、1363年、書状官(外国に出かける使臣に従う役)として元に行くことになりました。
この時期の高麗は、恭愍(コンミン)王による国権回復政策と親元派の粛清により、元との関係が極度に悪化していました。
そのため、使臣として派遣されれば、そのまま抑留されたり、場合によっては命まで奪われることもありました。
文益漸も42日間拘留されてから、綿花の栽培が多い雲南地方に配流されてしまい、3年間の抑留生活を送ることになります。


ようやく祖国への帰還が認められた文益漸の荷物の中には祖国への特別なお土産が入っていました。
李穀の影響で早くから元の農業書を学んでいた文益漸は、農業と織物に特別に関心を抱き、綿花の存在を知っていました。
当時、綿花の種は禁制品で、元が他国への持ち出しを禁じていました。
そこで文益漸は筆の筒の中に綿花の種を隠し、密かに祖国に持ち帰ったのです。
祖国に戻った文益漸は妻の父である鄭天益(ジョン・チョンイク)とともに綿花の栽培を始めます。
3年後にようやく花が咲き、4年後には村全体に綿花の種を分け与えてや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
その次には、今度は綿花から糸を取り出し、布に織るための機械が必要になりましたが、幸い、中国の僧侶の助けによりついに最初の木綿の服が作られました。

鄭天益による綿花の栽培と、綿布の生産は、まさに高麗末期から朝鮮初期にかけての産業革命だといえます。





http://hwalove.tistory.com/entry/%E5%80%9F%E9%A6%AC%E8%AA%AA%EC%B0%A8%EB%A7%88%EC%84%A4-%EF%A7%A1%E7%A9%80%EC%9D%B4%EA%B3%A1
借馬說(차마설)-李穀(이곡)

빌린 말을 논하는 글
余家貧無馬(여가빈무마) : 나는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기 때문에
或借而乘之(혹차이승지) : 간혹 남의 말을 빌려서 타곤 한다.
得駑且瘦者(득노차수자) : 그런데 노둔하고 야윈 말을 얻었을 경우에는
事雖急(사수급) : 일이 아무리 급해도
不敢加策(부감가책) : 감히 채찍을 대지 못한 채
兢兢然若將蹶躓(긍긍연약장궐지) : 전전긍긍하니 금방이라도 쓰러지고 넘어질 것아서
値溝塹則下(치구참즉하) : 개천이나 도랑이라도 만나면 또 말에서 내리곤 한다.
故鮮有悔(고선유회) : 그래서 후회하는 일이 거의 없다.
得蹄高耳銳駿且駛者(득제고이예준차사자) :
반면에 발굽이 높고 귀가 쫑긋하며 잘 달리는 준마를 얻었을 경우에는
陽陽然肆志(양양연사지) : 의기양양하여
着鞭縱靶(착편종파) : 방자하게 채찍을 갈기기도 하고 고삐를 놓기도 하면서
平視陵谷(평시릉곡) : 언덕과 골짜기를 모두 평지로 간주한 채
甚可快也(심가쾌야) : 매우 유쾌하게 질주하곤 한다.
然或未免危墜之患(연혹미면위추지환) :
그러나 간혹 위험하게 말에서 떨어지는 환란을 면하지 못한다.
噫(희) : 아,
人情之移易一至此邪(인정지이역일지차사) :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달라지고 뒤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借物以備一朝之用(차물이비일조지용) : 남의 물건을 빌려서 잠깐 동안 쓸 때에도
尙猶如此(상유여차) : 오히려 이와 같은데
况其眞有者乎(황기진유자호) : 하물며 진짜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우야 어떻겠는가
然人之所有(연인지소유) :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孰爲不借者(숙위부차자) : 무엇이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겠는가.
君借力於民以尊富(군차력어민이존부) :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존귀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요,
臣借勢於君以寵貴(신차세어군이총귀) :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서 총애를 받고 귀한 신분이 되는 것이다.
子之於父(자지어부) : 그리고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婦之於夫(부지어부) :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婢僕之於主(비복지어주) : 비복(婢僕)은 주인에게서
其所借亦深且多(기소차역심차다) : 각각 빌리는 것이 또한 심하고도 많은데
率以爲己有(솔이위기유) :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而終莫之省(이종막지성) : 끝내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는다.
豈非惑也(개비혹야) : 이 어찌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
苟或須臾之頃(구혹수유지경) : 그러다가 혹 잠깐 사이에
還其所借(환기소차) : 그동안 빌렸던 것을 돌려주는 일이 생기게 되면
則萬邦之君爲獨夫(즉만방지군위독부) : 만방(萬邦)의 임금도 독부(獨夫)가 되고
百乘之家爲孤臣(백승지가위고신) : 백승(百乘)의 대부(大夫)도 고신(孤臣)이 되는 법인데
况微者邪(황미자사) : 더군다나 미천한 자의 경우야 어떠하겠는가.
孟子曰(맹자왈) :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久假而不歸(구가이부귀) : “오래도록 차용하고서 반환하지 않았으니
烏知其非有也(오지기비유야) :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라고 하였다.
余於此有感焉(여어차유감언) : 내가 이 말을 접하고서 느껴지는 바가 있기에
作借馬說以廣其意云(작차마설이광기의운) : 차마설을 지어서 그 뜻을 부연해 보았다.


http://kkumai.tistory.com/201

목은


李穡字穎叔號牧隱元朝授翰林知製誥恭愍朝門下侍中文章伎術爲縉紳領袖入本朝封韓山伯謚文靖이색자영숙호목은원조수한림지제고공민조문하시중문장기술위진신영수입본조봉한산백익문정

이색,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원나라에 가서 한림지제고(翰林知製誥)를 지냈으며,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냄. 문장과 기술이 뛰어났으며, 진신(縉紳)의 영수(領袖)임. 조선조에 들어와 한산백(韓山伯)을 봉함. 시호는 문정(文靖).

1328년(충숙왕15)~1399년(태조5).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41년 진사가 되고, 1348년 원(元)나라에 가서 성리학을 연구했다. 귀국 후 명륜당에서 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 등과 학문을 강론, 이에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출사를 종용했으나,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묻을 뿐이라고 하며 끝내 사양하였다. 다음 해 피서차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 갑자기 죽음으로써 후세에까지 의문을 남기고 있다. 문하에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했다. 저서로 『목은집(牧隱集)』이 있다.

원이 고려를 간접하기 시작한 이후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갔다. 재야에서 개혁의 시기를 엿보던 이들이 공민왕 때부터 점차 정치 무대에 등장한다. 이들에게는 ‘신진사대부’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는데, 그들은 성리학을 이해하고 이를 현실에서 실행하려 한 유학자들이었다.

수많은 유학자들은 과거를 위해 원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원의 과거에 합격하면 원에서 벼슬을 할 수도 있었고, 원의 벼슬은 고려에서도 그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원의 유학자들이 주자학을 과거에 적용하면서 주자학이 공부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의 지식인들은 원의 유학자들과 사귀면서 자연스럽게 주자학을 배우게 되었다. 충선왕이 원의 수도 연경에 세운 만권당에는 당시 유명한 원의 학자들이 드나들었고, 이제현(李齊賢)과 같은 학자들은 이들과 사귀면서 주자학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현의 제자 격인 아버지 이곡(李穀)의 뒤를 이어 이색(李穡)이 원의 과거에 합격할 무렵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도가 한층 넓어지고, 이를 추구하는 사람도 늘어났을 때였다.


이색(李穡, 1328-1396)은 원에서 한림원에 등용되는 등의 탄탄대로의 길을 가다, 귀국 후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적극 참여한다. 성균관을 다시 짓고, 성균관 초대 학장[대사성]으로 성리학풍의 진작과 신진 사대부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아래 교관들인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 등이 모두 성리학을 공부한 이들이었다. 또한 권근, 정도전과 같은 학자들을 배출하여 조선 초기의 정치와 학문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했을 때,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창왕을 옹립하여 이성계 일파를 견제했다. 하지만 이성계가 세력을 잡자 장단(長湍)에 유배되었다.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 유배되었다가 태조 원년에 풀려났다.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했으며,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그 생을 마감한다.

조선의 건국을 놓고 의견 대립을 하면서, 고려 왕조를 유지하는 길을 선택하여 비극적 최후를 맞지만 이색은 한 시대의 스승으로 후대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스승 이제현이 택한 노선을 발전시키고, 아버지 이곡이 이루고자 한 바를 이어서, 이색은 성리학의 목표인 ‘경세치민(經世治民, 세상을 경영하여 백성을 구제한다)’을 향해 평생 정진하는 삶을 살았다. 스스로 저술하고 창작한 성과가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제자를 길러내 사상과 문학에서의 새로운 기풍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가 남긴 시조 ‘白雪이 자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는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갔던 한 지식인의 방황과 고려를 향한 절의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http://kuiwon.wordpress.com/category/korean-eras-%E9%9F%93%E5%9C%8B%E6%99%82%E4%BB%A3-%ED%95%9C%EA%B5%AD%EC%8B%9C%EB%8C%80/goryeo-dynasty-%E9%AB%98%E9%BA%97-%EA%B3%A0%EB%A0%A4-918-1392/yi-gok-%E6%9D%8E%E7%A9%80-%EC%9D%B4%EA%B3%A1/

Yi Gok (李穀, 이곡, 1298-1351) was a literati bureaucrat during the Goryeo Dynasty (高麗, 고려, 918-1392). He was of the Hansan Yi Clan (韓山李氏, 한산이씨); his courtesy name (字, 자) was Jungbo (仲父 , 중보); his pen name (號, 호) was Gajeong (稼亭, 가정); and his posthumous name (諡, 시) was Munhyo (文孝, 문효). He passed the civil examinations (科擧, 과거) in Yuan Dynasty China (元, 원, 1271-1368).

In the poem below, Yi Gok writes about the Mid-Autumn Festival, or Jungchujeol (仲秋節, 중추절). It is more commonly known as Chuseok (秋夕, 추석) or Hangawi (한가위). Today, Chuseok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traditional Korean holidays. Families head back to their hometowns and carry out ancestral rites.

中秋翫月 중추완월

Teasing the Moon on the Mid-Autumn Festival

客路相逢喜可知 객로상봉희가지
况當佳節共吟詩 황당가절홍음시
他鄕異縣各千里 타향이현각천리
古月今人此一時 고월금인차일시
徹夜秋光淸欲滴 철야추광청욕적
明朝世事浩難期 명조세사호난기
無端頃刻冰輪側 무단경각빙륜칙
仰面貪看豈敢辭 앙면탐간기감사

On the travelers’ road, people can know the joy of a meeting.
Moreover, on this beautiful occasion, together they recite poetry.
Another’s village and a different prefecture, each is a thousand Li away.
The ancient moon and today’s people, these are at all one time.
All night, the autumn light is like a clear water drop.
Tomorrow morning, the world’s affairs will be as if extensively difficult duties.
Without any aims, in an instant, next to the icy moon,
How does one dare to refuse to look up to greedily stare at it?

Definitions:

Guest • road • one another • to meet • joyous • to be able • to know
Moreover • properly • beautiful • day • together • to recite • poetry
Other • village • different • prefecture • each • thousand • Li
Ancient • moon • today • people • this • one • time
to pierce • night • autumn • light • to be clear • to become • water drop
tomorrow • morning • world • affairs • to be extensive • to be difficult • promises
To not have • end • in a moment • time • ice • wheel • adjacent
To look upward • face • to be greedy • to look • how • to dare • to refuse

Notes:

冰輪(빙륜) – Literally, “ice wheel.” Refers to the moon.

Goryeo Dynasty (高麗 고려 918-1392)

Another voice lost, Korean 'comfort woman' dies By Ashley Fantz and Paul Armstrong, CNN

Hwang Kum Ju 黄錦周
黄錦周(ファン・クムジュ、황금주、1927年 -




http://ma2ka-hiroimono.tumblr.com/post/30588879671/ittm-135-2012-08-30


http://edition.cnn.com/2014/01/26/world/asia/comfort-woman-dies/

Another voice lost, Korean 'comfort woman' dies
By Ashley Fantz and Paul Armstrong, CNN
January 27, 2014 -- Updated 0323 GMT (1123 HKT)
Watch this video
Korean 'Comfort women' demand justice
STORY HIGHLIGHTS
Hwang Keum-ja died in South Korea, one of the dwindling number of "comfort women"
Japan forced 200,000 women into sex slavery to service WWII Japanese soldiers
Japan has formally apologized for atrocities against "comfort women"
(CNN) -- Another voice that could have told about the horrors of being a "comfort woman" -- a sex slave used by Japanese soldiers during World War II -- has fallen silent, according to South Korean authorities.
Hwang Keum-ja, 89, died of lung and respiratory disease at a hospital in Seoul Sunday.
Cho Yoon-sun, South Korea's Minister of Gender and Equality and Family, said she had been attempting to meet each of her country's surviving comfort women individually, but had not yet visited Hwang.
"My heart is aching as she died before I was able to meet her," she said in a statement, praising Hwang for her efforts to support others despite the hardships she faced, and vowing that her government would deliver greater support to other comfort women.
Japan forced about 200,000 women into sex slavery, luring them to "comfort stations" set up throughout East Asia by the Japanese military from 1932 until the end of the war, according to nonprofit advocacy group Washington Coalition for Comfort Women Issues. Mostly Korean, the women were lied to and told they would get jobs if they went to the brothels, the center says.
CNN has widely reported on the stories of the women. Many have said they were kidnapped. For resisting sex, some say, they were raped and beaten.
Read: Forgotten faces - Japan's 'comfort women'
'Comfort women' statue unveiled 'Comfort women' comments cause outrage 2012: Ignoring Japan's comfort women Justice for 'comfort women'
Hwang Keum-ja was forced to work at a glass factory at 13 and then sent to China to work as a sex slave at 16, South Korea's state news agency Yonhap reported. After Korea was freed from Japanese occupation in 1945, she went home and lived the rest of her life alone, the agency said. She worked as a garbage collector, but didn't make enough, so she had to rely on government subsidies.
It's unclear how, but she was able to make three donations to a scholarship fund totaling more than $92,000, which helped earn her an award for her generosity in 2011 in Korea, Yonhap said. Hwang's dying wish was that all her assets be donated to charity.
She had one adopted son, according to the ministry.
Japan's government has formally apologized on numerous occasions for the atrocities against comfort women. The country helped establish the Asian Women's Fund in 1995, which is supported by government funds and provides assistance to former comfort women.
But Japan has resisted direct payments to the victims, prompting activists and former comfort women to say leaders are avoiding officially acknowledging what happened.
In 2013, the mayor of Osaka, Japan, stirred fierce controversy when he told reporters that "anyone would understand" the role of "comfort women" when soldiers were risking their lives and deserved a "rest." Toru Hashimoto said the use of the women was "necessary."
Though he acknowledged the issue was a "tragic result of war," Hashimoto insisted that soldiers using the women wasn't unique to Japan.
Hashimoto also revealed that he told a U.S. military commander during a trip to a base on the island of Okinawa that U.S. personnel should "utilize more" the adult entertainment business in Japan.
South Korea has urged Japan to resolve the issue directly with victims, noting that time is running out because most of them are elderly and dying.
Hwang's death brings the total number of living South Korean victims of the comfort women sex slavery circuit in South Korea down to 55, 5 of whom live abroad.
Read: 60 years later, pain still fresh for 'comfort women'
CNN's KJ Kwon contributed to this report.

135: エキゾチックショートヘア(宮城県):2012/08/30(木) 11:28:05.01 ID:bZ1tutqX0
»123
この人は軽い方
従軍慰安婦・黄錦周さんの場合

1912年・・・扶餘に生まれる。(①)
1922年・・・再び生まれる。(②)
1926or1936or1941年・・・14歳のとき、いわゆる「少女供出」で満州に連行され、皇軍兵士のセックスのはけ口にされた(⑨)
1927年・・・三度生まれる。(③)
1924年・・・生活が貧しく12歳の時100円で売られてソウルの金持ちの家で小間使いとなる。(④)
1929or1939or1944年・・・17歳のとき、日本人の村の指導者の妻が、未婚の朝鮮人少女全員に
日本軍の工場に働きに行くように命じた。(⑧)
1930or1940or1945年・・・満18歳になった時のある日、男がやって来て村から娘を出すように伝達をした。
ソウルの工場か何かで働くのだろうと思っていた。(⑤)
1931or1941or1946年・・・19歳で学校を卒業する25日前に日本軍に引っ張りだされ仕方なく慰安所に行った。
日本人に便所と言われた(⑥)
1932or1942or1947年・・・工場で3年働いた後、一人の日本兵が自分のテントについてこいと要求した。
着物を脱げと言われ抵抗するも銃剣を突きつけられスカートと下着を裂かれて
気絶してしまう。目が覚めると辺り一面血だらけだった。ちなみにこの時まで処女だった。(⑧)
1938年・・・威鏡南道ハムン郡で女中をしていた時にその家の娘の身代わりとなって満州に 連行され慰安婦となる(④)
1939年・・・威興の女学校在学中の17歳の時1939年に国民徴用令で動員され軍需工場に行くと思っていたが
着いた所は吉林の慰安所だった(⑦)
1941年・・・村の班長(日本人)に 「日本の軍需工場に行けば、お金がもうかる。 一家に一人は行かなくては」と
脅かされ、 奉公先の娘たちにかわって1941年、二十歳で国を離れましたが、ついた所は慰安所だった。
※年号が複数ある物は誕生日から年を推定した物
138: エキゾチックショートヘア(宮城県):2012/08/30(木) 11:29:20.13 ID:bZ1tutqX0
»135
黄錦周さん参考資料(一部元ソース消滅)
①元日本軍「慰安婦」の証言を聞く集会 1997年12月5日(金)福岡市
http://www1.jca.apc.org/aml/9711/6904.html
②朝日新聞 平成 七年七月二十四日夕刊
③伊藤孝司氏編著 「証言 従軍慰安婦女子勤労挺身隊」
④高木健一著『従軍慰安婦と戦後補償』
⑤[日韓社会科教育交流団韓国を訪問]1997.夏期
http://www2.nkansai.ne.jp/users/peace/heiwanews%EF%BC%95.htm#1
⑥TBS「ここが変だよ日本人」
⑦平成7年朝日新聞インタビュー
⑧国連・経済社会理事会 クマラスワミ報告 1996年1月4日
http://www.jca.ax.apc.org/JWRC/center/library/cwara.HTM#testify
⑨「黄錦周さんの証言を聞く会]2001.07.17東京大学にて
http://www1.jca.apc.org/aml/200108/23174.html
96: コドコド(神奈川県):2012/08/30(木) 11:14:19.63 ID:1yKgyUaC0
まてよ・・・なんか色々数字が合わないぞ?
>15歳の時小学校から帰ったら
尋常小学校(6年間)から高等小学校(2年間)と思われるが
1900年(明治33年)の改正小学校令では、「満6歳の翌月から満14歳」
>85が15の時
1942年
>から4年間
1946年
どう考えても明らかに日本と関係ありません本当にありがとうg
115: スミロドン(関東・東海):2012/08/30(木) 11:21:43.92 ID:r4NgU6PdO
»96
それを言うと『昔の話だから正確な年齢は忘れたニダ』とか訂正してきそうww
(via 15歳で連れて行かれた韓国元慰安婦「私以上の証拠がどこにある」 : ネトウヨにゅーす。)
(rulebookから)

http://sikoken.blog.shinobi.jp/%E6%85%B0%E5%AE%89%E5%A9%A6%E8%A8%BC%E8%A8%80/%E9%BB%84%E9%8C%A6%E5%91%A8-%E3%83%95%E3%82%A1%E3%83%B3%E3%83%BB%E3%82%AF%E3%83%A0%E3%82%B8%E3%83%A5-

黄錦周(ファン・クムジュ)
1990/03/14 (Wed)
◆◆◆ 黄錦周(ファン・クムジュ) ◆◆◆
【生い立ち・慰安婦になった経緯等】

1922年、忠清南道扶餘に生まれる。1941年20歳の時、日本人の班長に「日本の軍需工場に行けば金が儲かる、一家で少なくとも1人は行かなくてはならない」と言われて奉公先の娘たちに代わって志願し、以降、吉林の慰安所で慰安婦を強いられる。(「証言 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軍慰安婦たち」より)

2000.12月、女性国際戦犯法廷で証言を行う。


【慰安所までの移動時の公権力・軍の関与等】

集合場所の駅で日本の軍人に引渡され、軍用列車にて満州の吉林に行く。(「証言 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軍慰安婦たち」より)


【考察】

下記資料の通り、連行された年でさえ14歳~20歳と、数え年と言うものを考慮してもフォローするのは不可能。

1992年の「従軍慰安婦と戦後補償」では「ソウルの金持ちの家で小間使いをして以来、ずっと、色々な家で子守、女中をしてきました」はずが、1993年の「証言 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軍慰安婦たち」では、夜学に通って休学していた情報が加わり、しかも、養父である崔(チェ)という人の妾の家と本妻の家の二つでのみで女中していたことになっています。
さらに、最初、崔(チェ)さんの妾の家で女中をしていましたが、妾と折り合いが合わずに本妻の家に変えてもらいます。そこで、単に本妻の家に連れて行ってくれただけの人に、最初に養女になった時と同額の100円を渡して借金が200円になるというおかしな状況を披露しています。
おそらく売られた数を減らしたかったのでしょう。しかし、中途半端に取り繕った為に矛盾が生じています。

また、夜学は休学中だったはずが、2001年のTBSのTV放送では、「学校を卒業する25日前に日本軍に引っ張りだされ」と発言して、休学していなかったどころか卒業間際だったことに変更になっています。

自らの過去を願望を交えて変更し、全ての不幸を日本軍のせいにして「虚構の過去」が築きあげられていく過程をまざまざと見せ付けられているようです。


なお、1997.3.11の産経新聞では以下の通り証言の食い違いが指摘されています。
生まれた年 慰安婦にされた年
朝日新聞の記事(1995.7.24夕刊) 1922年 17歳(1938年か1939年)
伊藤孝司氏編著 「証言 従軍慰安婦女子勤労挺身隊」(風媒社、1992.8) 1927年 シンガポール陥落の年
(1942年)
------------- 以下、2007.4.22追加 ------------
上記、産経新聞には記載されていませんが「証言 従軍慰安婦女子勤労挺身隊」の記述によると同女が慰安婦をしていた期間は以下の通り約「15ヵ月」になり、「1942年4月」に騙されて慰安婦になったという記述と全く一致していません。(※3年4ヶ月にならなければおかしい))

吉林省(約8ヶ月) → サハリン(2、3ヶ月) → 吉林省(3、4ヶ月) → 終戦



また、下記資料の「写真記録 破られた沈黙」(以下「写真」)と「証言 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軍慰安婦たち」(以下「証言」)を比べると以下の通り内容が異なっています。

<生まれた年>
○「写真」・・・1927年8月15日
○「証言」・・・1922年8月15日
→ 5年も生年が変更されるなどありえないでしょう。

<父が留学した大学>
○「写真」・・・明治大学
○「証言」・・・「日本に留学」としか記述されていない
→ 具体的な大学名を出すとウソがばれるからやめたのでしょうか。

<日本で父がしていた仕事>
○「写真」・・・大学卒業後、日本で司法の代書をしていた
○「証言」・・・靴磨きや新聞配達をしながら苦学。留学が終わろうとする頃、病気になり故郷に戻って伯父の司法書士事務所で仕事の手伝い
→ 大学を卒業して働いていたのが、卒業前に故郷に戻ってきて、しかも、日本でしていた仕事を朝鮮で行っていたことに変更されています。

<金持ちの養女となった歳>
○「写真」・・・12歳(明記されていませんが、計算すると1939年頃)
○「証言」・・・13歳(1934年)
→ 12歳と13歳の違いは、満年齢と数え年の違いでしょうが、生年に合わせて1934年のことになっています。

<工場に行くことになった歳>
○「写真」・・・1942年4月
○「証言」・・・1941年陰暦2月・20歳
→ 何故か1年だけ、慰安婦になった年が早まっています。

<吉林省から移動した場所>
○「写真」・・・「サハリンだったと思います」
○「証言」・・・「どこだったかわかりません」
→ 全く不明になっています。

<慰安婦生活をした期間>
○「写真」
・・・吉林省(約8ヶ月)  → サハリン(2、3ヶ月)  → 吉林省(3、4ヶ月)  → 終戦
○「証言」
・・・吉林省(期間不明) → 不明地(8、9ヶ月) → 吉林省(しばらくして) → 終戦
→ 慰安婦になった年も変更になったのですから、当然のことながら一致しません。「証言」では吉林省にいた期間が明記されていません。ヘタに細かく書くと矛盾がばれてしまいますから、賢いやり方と言えます。

------------- 以上、2007.4.22追加 ------------


【信憑性】

証言の信憑性は全くありません。
「吉林の慰安所で働かされた」と言う証言は一貫していますので、吉林で働いていたというのは本当でしょう。


【資料等】
年月 資料名等 著者 出版社
内 容 等
1992.4 元兵士たちの証言 従軍慰安婦 西野留美子 明石書店
十七歳のときです。工場で働けるといわれ、トラックに乗せられました。汽車に乗ったら、どうもようすがおかしいのです。両方の扉は塞がれ、外が見えないようにと窓は油紙みたいなもので全部おおわれていました。着いたところが、満州の吉林でした。着くと、おおきなトラックがきて、十五名、二十名と分けられ、運ばれていきました。
西も東もわからないところに連れていかれ、カーテンで仕切られた部屋に入れられました。最初に入ってきたのは、将校でした。将校は、顔の美しい女だけをどこかへ連れていきました。
私はいなか育ちで日本語もよくわからず、着物を脱げといわれていることがわからないので黙っていると、その将校は日本刀で私の服を切って裸にしました。
「助けて!助けて!」と懇願しました。
「天皇陛下の命令だ!軍隊の命令だ!私の命令だ!命令をきかないと殺されるぞ」
わびてわびて・・・・・・そのうちにこわくて気絶してしまいました。その私を、自分の宿舎に連れていっておもうままにしました。この後は話せません・・・・・・。
私は処女でしたから、初めてのことで、犯されて気が遠くなっていると、将校は部下に、「もとの部屋に連れていけ」と命じました。
そのうちに私は、淋病、梅毒にかかり、六〇六号の注射を打たれました。妊娠したことも、自分ではわかりません。六〇六号は劇薬なので、妊娠していても流産してしまいます。性病にかかると痛くて、そのうえ顔や全身が腫れます。そうすると、そういう女たちを別の部屋に隔離してしばらくそこで治療します。少しよくなると、また、兵隊の相手をさせるのです。三回ぐらいそれを繰り返していた女は、そのうちにいなくなりました。行方不明です。死んだり、病気になったり、前線に連れていかれて女がいなくなると、また新しい娘たちが補充されてきました。
一日に五十人から六十人の兵隊の相手をして、休みの日には、七十人から八十人の相手をして、あげくのはてに性病になり、血や膿がでるようになりました。痛くてどうにもならないというと、私たちは犬畜生でもないのに、男の性器をなめろというのです。いやだというと、顔をひっぱたき、強制的に口に入れました。私は犬ではない!人間の娘です!
そのうちに、部隊が移動することになり、サハリンに連れて行かれました。荷物みたいにです。それから二、三ヵ月たって、また、吉林に帰ってきました。身も心も傷つき、ずたずたになり三年がたちました。
ある日、人の声がしないのでおかしいと思って外をみると、兵隊たちは誰もいません。水でもなんでもいいから飲みたいと思い、外に出ていくと、一人の兵隊がいました。
「きのう天皇陛下が敗戦を宣言したから、みんな逃げていったのだ。おまえたちも早く逃げないと殺される」
逃げ遅れた兵隊は、そういうとどこかへ去っていきました。(P.120~122)

(※2007.7.12追加)
1992.7 従軍慰安婦と戦後補償 高木健一 三一書房
一九二二年、忠清南道扶餘で生まれました。生家は貧しく、十二歳の時、一○○円で売られ、ソウルの金持ちの家で小間使いをして以来、ずっと、色々な家で子守、女中をしてきました。数えで十七歳の時、女中をしていた咸鏡北道ハムン郡の金持ちの家に、工場供出の員数割り当てがきて、その家には十九歳と十五歳の娘がいたのですが、私が工場に行くことになったのです(P.47)
1992.8 <証言>従軍慰安婦・女子勤労挺身隊 伊藤孝司 風媒社
一九二七年八月一五日生まれ~(中略)~
私は五歳の時に、ソウル(当時は「京城」)の知り合いのおばさんに引き取られていましたが、一二歳の時に、お父さんの薬を買うために、一〇〇円のお金をもらって、ソウルのあるお金持ちの家の養子になりました。
養父の家族は咸興(ハムン)にいました。だけど、養父はソウルで商売をしていて、そこに妾がいたんです。私はこちらの家に行きました。ここで二年間いましたが、あまりにも苦労をしたので、養父に別の所で働きたいと言ったんです。
それで、咸興の本妻の家に移る事になりました。そこには娘三人と息子二人がいました。娘は一九歳・一五歳・八歳でした。
ここでは学校に行かせてくれ、食べ物・着る物・寝る所は、そこの子どもたちとほとんど一緒でしたが、掃除・洗濯・炊事とお手伝いさんのように働いたんです。この咸興に三年間いました。
この家にも面(村)長から、工場の「募集」の話が来ました。これを断ると日本人に殴られたり、いろんな事をされたんです。だから、この家からも誰か一人は行かなくてはならなかったんです。
一番上の娘は日本の大学に合格していたし、私は養子だったので「自分が行く」って言ったんです。
面長も日本人の指示で「募集」をやっていたから、私がどこへ連れて行かれるのか、知らなかったと思います。もし、私たちが「慰安婦」にさせられるという事がわかっていても、拒否はできなかったでしょう。
私だけでなく、集められた誰もが工場に働きに行くものと思っていました。みんな田舎の娘ばかりだったんで、工場へ金を稼ぎに行くというのが嬉しかったんです。私は清潔な白いチョゴリ(朝鮮の上着)と黒のチマ(朝鮮のスカート)を着て行きました。これはシンガポールが「陥落」した年(一九四二年)の四月の事でした。(P.117~118)

私が連れて行かれて一ヵ月ちょっとした時に、私より少し年上だった女の人は、将校と激しい喧嘩をしたんです。殴られて何度も食らいついていき、失神しても気がついたらまた反抗したんです。そして、「兵隊の相手はしない」と言ったら、その裸の女は性器を拳銃で撃たれて殺されたんです。
「慰安所」の中での出来事だったので、みんなが見に行くと「あんまり言う事を聞かないとこうなるぞ」と、見せしめに女たちの前で撃ったんです。こんなひどい事を日本人がしたのを知ってますか。(P.124)

この吉林省には8ヶ月くらいいてから、船に乗せられて違うう所へ連れて行かれました。私はそこはサハリン(当時は樺太)だったと思います。~(中略)~ここに二、三ヵ月いました。
それから、吉林省に戻ったんです。~(中略)~
そこで三、四ヵ月して解放(日本敗戦)になったのです。(P.124~126)
1993.7 写真記録 破られた沈黙 -アジアの「従軍慰安婦」たち 伊藤孝司 風媒社
私は忠清南道扶餘で生まれました。お父さんは明治大学を卒業して、日本で司法の代書を仕事にしていました。~(中略)~
私は5歳の時に、ソウル(当時は「京城」、以下同じ)の知り合いのおばさんに引き取られていましあ。12歳の時に、お父さんの薬を買うために100円のお金をもらって、ソウルの金持ちの家の養子になりました。
養父の家族は咸興はいました。だけど、養父は商売をしていたソウルに妾がいたのです。私はそこに2年間いましたが、あまりにも苦労したので咸興の本妻の家に移ることになりました。そこには娘3人と息子2人がいました。娘は19歳・15歳・8歳でした。
この家にも、面(村)長から工場の「募集」話が来ました。これを断ると日本人に殴られたりいろんなことをされたのです。だから、この家からも誰か1人は行かなくてはならなかったのです。一番上の娘は日本の大学に合格していたし、私は養子だったので「私が行く」って言ったのです。
私だけでなく、集められた誰もが工場に働きに行くものと思っていました。みんな田舎の娘ばかりだったので、工場へ金を稼ぎに行くというのが嬉しかったのです。私は清潔な白いチョゴリ(朝鮮の上着)と、黒のチマ(スカートのような民族衣装)を着て行きました。これはシンガポールが「陥落」した年(1942年)の4月のことでした。(P.9~10)

この吉林省には8ヶ月くらいいて、船に乗せられて別のところへ連れて行かれました。私はそこはサハリン(当時は樺太)だったと思います。トラックに数時間ゆられて日本軍の部隊に着きました。陸軍と違う色の軍服を着た部隊だったので海軍だと思います。吉林省よりも寒くて雪も多かったです。ここに2~3ヶ月間いて吉林省に戻りました。
それから3~4ヶ月すると解放(日本敗戦)になったのです。(P.16)

(※2007.4.22追加)
1993.10 証言 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軍慰安婦たち 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挺身隊研究会編集 明石書店
私は一九二二年、陰暦の八月十五日に扶餘で生まれました。私が長女で、妹が一人、弟が一人いました。経済的には豊か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が、父はソウルで中学を卒業した後、日本に留学しました。父よりも二十歳年上の伯父が水原で司法書士をしながら父の学費を援助しましたが、それだけでは足りなかったので、父は靴磨きや新聞配達などをして苦学したそうです。ところが留学も終わろうとする頃、父は病気になりました。故郷に戻り水原の伯父の司法書士事務所で仕事の手伝いをしましたが、病気は悪くなる一方でした。~(中略)~
私は崔さんに父のことを話しました。その人は、父親は大事にしなさいと言いながら百円をくれました。その代償に、私は崔さんの養女となり、ソウルにいる崔さんの妾の家で手伝いをす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中略)~私が十三歳の時(1934年)のことでした。(P.104)

崔さんの妾は意地悪でしょっちゅう殴るので、私はひどく苦労しました。二年間そこで暮らしましたが、養父である崔さんにそのことを訴えると、咸興の本妻の家に移してくれました。咸興の家に私を連れて行ってくれた人が本妻から百円受け取って行きました。私の借金は二百円になったわけです。(P.104~105)

夜学の二年生を修了して1年ほど休学していたときのことです。私が住んでいた村の班長は日本人でしたが、~(中略)~その夫人が村を歩き回って「日本の軍需工場に三年の契約で仕事をしに行けばお金が儲かる、一家で少なくとも一人は行かなくてはならない」と暗に脅迫しました。~(中略)~養母が困っているのを見て、私は自分が行くと養母に告げました。~(中略)~二十歳になった年(1941年)の陰暦二月のことでした。(P.105~106)

駅で五十代の朝鮮人男性が私たちの一行を引率し、日本の軍人に引渡しました。軍人は私たちを軍用列車に乗せました。軍用列車の他の車両には軍人が乗っていました。一つの車両に私たちの一行と他の女たちも合わせて五十人ほど乗っていました。他の車両にも女たちがいたようでしたが、よくはわかりませんでした。(P.106)

汽車から降りるとなにやら放送する声が聞こえました。何の放送かと尋ねると、吉林駅だということでした。(P.107)

ある日、移動する部隊があるので一緒に行きたい者はついて行ってもいいと言われました。~(中略)~トラックに乗って出発したのですが、吐き気がひどく外を見ることもできなかったので、どこをどのように行ったのかわかりません。船にも乗ったような気がします。軍人たちは私たちを慰安所に降ろしました。慰安所の建物は吉林の慰安所と似ていました。どこだったのかはわかりませんが、爆撃がひどくて夜は灯火することもできませんでした。~(中略)~八、九ヵ月ほどしたある日、軍人たちが吉林の方に後退する気配を察した私は、ひとり死にものぐるいで軍人たちの中に混ざってそこを出ました。そうしてもといた部隊に戻ったのです。満州に戻ってしばらくした頃、解放を迎えました。 (P.113)
1996.1.4 国連・経済社会理事会 クマラスワミ報告 ***** ****
17歳のとき、日本人の村の指導者の妻が、未婚の朝鮮人少女全員に日本軍の工場に働きに行くように命じました。そのとき私は労働者として徴用されたのだと思いました。
1995.7.24 朝日新聞「元従軍慰安婦 黄錦周の世界 1」 ***** ****
この年さあ、日本が中国と戦争を始めたのは。大騒ぎで軍人だ、補給部隊だって集めて。私は十六になった秋から、若い娘の動員も始まるんさ。三年契約で軍需工場で働くってんで。~(中略)~
近所の若い娘たちはどんどん動員されてくだろ、私が十七になると、もう私たち四人しかいない。日本人の班長が、会うたびに「どうするのか」てきくし。
義母は食事ものどに通らなくなって。私を出すか、クムジャを出すか。~(中略)~
私は聞いちゃいられない。部屋に入って、「私が行きます」っていったんさ。私が行かなきゃ。もしクムジャが行ったら居ても立ってもいられないからね。
1995.7.25 朝日新聞「元従軍慰安婦 黄錦周の世界 2」 ***** ****
多い日で十五人ぐらい、クリスマスは二十人近かったね。

(※管理人注:日本にクリスマスの慣習が根付いたのは戦後)
1997.夏 日韓社会科教育交流団韓国を訪問 ***** ****
満18歳になった時のある日、男がやって来て村から娘を出すように伝達をしました。
1997.12.5 元日本軍「慰安婦」の証言を聞く集会(福岡) ***** ****
1922年扶餘生まれ。父の発病後家運が傾き、13歳のとき家をでて、奉公に出ました。村の班長(日本人)に「日本の軍需工場に行けば、お金がもうかる。一家に一人は行かなくては」と脅かされ、奉公先の娘たちにかわって、1941年、二十歳で国を離れましたが、ついた所は慰安所でした。敗戦のときは、軍隊に置き去りにされ、やっとの思いで逃げ帰りました。
戦後、苦しい生活と性病の後遺症に悩まされ、悔しい思いをだいて生きてきました。
2001.5.17 TBS「ここが変だよ日本人」 ***** ****
私は19歳で学校を卒業する25日前に日本軍に引っ張りだされ仕方なく慰安所に行ったんだ!
2001.7.17 黄錦周さんの証言を聞く会 東京大学にて ***** ****
14歳のとき、いわゆる「少女供出」で満州に連行され、皇軍兵士のセックスのはけ口にされたつらい体験を語りました。
2006.6 証言 未来への記憶 アジア「慰安婦」証言集Ⅰ 西野瑠美子・金富子編集 明石書店
(※管理人注:同書の内容は「証言 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軍慰安婦たち」を転載したもので内容は同じ)


keptic201 • 16 hours ago
RIP. Sorry that you were a victim of the worst that humanity has to offer. You didn't deserve it. Nobody does.
426 1 •Reply•Share ›
Avatar
Tsimbi skeptic201 • 16 hours ago
We really live in a protected society and a protected time compared to what much of the world has seen over the ages. As bad as we think it sometimes is here in the US, one simply has to go abroad or visit a history book to see the reality. The inhumanity of humans can be appalling.
229 1 •Reply•Share ›
Avatar
Aunt Rosy Tsimbi • 15 hours ago
You see the big pic. clearly.
Good for you.... unforgettably you are in the minority.
Be wonderful more people can see what you see.
69 1 •Reply•Share ›
Avatar
some guy Aunt Rosy • 12 hours ago
thank god nothing like that happens here in the states and that theres no such thing as human trafficking ... oh yea there is . its not a distant sort of event and some children that are missing are probably moved around and are forced to be "sex slaves"
21 1 •Reply•Share ›
Avatar
Book of Mormon some guy • 10 hours ago
if u dont think rape ever happens in war (in the past and present) you are naive.
7 •Reply•Share ›
Avatar
Annitte Book of Mormon • 10 hours ago
Rape happens. However creating brothels of children as a policy of the government to service soldiers isn't quite as common.
34 •Reply•Share ›
Avatar
Book of Mormon Annitte • 10 hours ago
16 is not a child.

stop trying to make it sound like they were raping babies
6 22 •Reply•Share ›
Avatar
Just Me Book of Mormon • 9 hours ago
Organised forced sexual relations is rape, whether you're over or under 16 is not the issue. The point is all this was organised at official levels, not just a rogue army commander "looking after" his men. These women didn't have a choice.
43 •Reply•Share ›
Avatar
Harry Hirsch Just Me • 9 hours ago
so?
2 10 •Reply•Share ›
Avatar
Brett Book of Mormon • 8 hours ago
First line of the third paragraph should read "forced 200,000 women and children into sexual slavery". Middle schools were raided and girls sent abroad as sexual slaves... Fact
20 •Reply•Share ›
Avatar
popseal Book of Mormon • 9 hours ago
At the "rape of Nanking" living Chinese babies were tossed into the air and used for bayonet practice by the Japanese soldiers.
26 1 •Reply•Share ›
Avatar
Simsim popseal • 3 hours ago
I can understand you have the Japanese and that you would want to demonize them. But what you've posted sounds like the fertile imagination of someone who has an agenda.
•Reply•Share ›
Avatar
Pendy1 Book of Mormon • 5 hours ago
"16 is not a child."
Not to a Mormon. Just another "sister wife".
11 •Reply•Share ›
Avatar
Meg Hinley Book of Mormon • 5 hours ago
16 is not old enough to be without a parent or make adult decisions. So yes, 16 is a child, you hypocrite who obviously has no daughters.
9 •Reply•Share ›
Avatar
hohopig Book of Mormon • 7 hours ago
So you think that they are adult? Heck .. even if they are adult, they do NOT deserve such a fate.
8 •Reply•Share ›
Avatar
ricotorpe Book of Mormon • 7 hours ago
Stop splitting hairs that aren't there. What is your point? Any idea?
6 •Reply•Share ›
Avatar
Sonia Book of Mormon • 4 hours ago
16 is a child! In Korea in the 40s 16 was a child! If you had a 16 year old daughter forced into sex slavery, you'd know she was a child! I hope her son was a source of solace to her.
3 •Reply•Share ›
Avatar
Porscha Stuttgart Book of Mormon • 4 hours ago
Holy Book of Mormon! Why are you being on the defensive about it! I don't get it!
3 •Reply•Share ›
Avatar
Kat Anon Book of Mormon • 6 hours ago
12 is.
•Reply•Share ›
Avatar
Harry Hirsch Book of Mormon • 9 hours ago
google India!
1 •Reply•Share ›
Avatar
Aunt Rosy some guy • 12 hours ago
I'm not talking about either / or.
maybe you are.
the living is still pretty awesome here in the U.S.... compare to many other parts of th world.
6 •Reply•Share ›
Avatar
my2cents Aunt Rosy • 11 hours ago
Travel and see the world. The US is far from a rose-garden.
7 3 •Reply•Share ›
Avatar
Aunt Rosy my2cents • 10 hours ago
rose garden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The U.S is pretty rosy in the eye of those immigrants (both legal and illegal) who come year after year.rosy.
I come from a big military family, grew up oversea.
My sister in law's family are originally from China.
I don't want to live in China.
I live part of year in AZ. 60 miles from the border of Mexico.
I don't want to live there either.
My old friends are originally from Pakistan. No Thank You.
The past two years husband and I went to India several times. Nope.
My half brother lives in Denmark. I visit.
don't want to live there.
Cousin lives / works in Singapore. been there several times. Great for visit. don't want o live there.
spent some time in Germany when mom in law lived there.Nope
Lived in the U.K back in the 90'.
enjoyed it while there. still visit from time to time. from here.
22 2 •Reply•Share ›
Avatar
Tarzan Lee Aunt Rosy • 7 hours ago
How about Taiwan? Great democracy, friendly people, nice food...
2 •Reply•Share ›
Avatar
Aunt Rosy Tarzan Lee • 7 hours ago
My father worked for the state department. we lived in Taipei during the Vietnam war. it was a life time ago. Taipei is very different today compare to 40 yrs. ago. I remember eating at the night markets... loved the food vendors.
The older I get (I'm a boomer) the less I can tolerate long distance flying. Told my old husband I'll just probably die in bed ... much easier for all concerned.
2 1 •Reply•Share ›
Avatar
Tarzan Lee Aunt Rosy • 7 hours ago
That was Shilin night market you mentioned. Come on, guess you are still young at heart. Come be my guest.
4 •Reply•Share ›
Avatar
Aunt Rosy Tarzan Lee • 7 hours ago
Hahaha... I will always be young at heart! You're right.
I can't remember the name of the night markets since we went to several over time. I liked all of them... home cooking and all.
Thank you for your invitation. That's very kind of you.
I appreciate it very much.
3 •Reply•Share ›
Avatar
delikadesa Aunt Rosy • 8 hours ago
rose garden....coz its neighboring mexico...try north..canada....
2 •Reply•Share ›
Avatar
Aunt Rosy delikadesa • 7 hours ago
too cold
2 •Reply•Share ›
Avatar
Harry Hirsch Aunt Rosy • 9 hours ago
No China,. No Mexico..of course....but whats wrong with Denmark, Singapore or Germany?
3 1 •Reply•Share ›
Avatar
Aunt Rosy Harry Hirsch • 9 hours ago
Denmark and Germany are too cold for me.
From L.A, it's 14 hr. to Tokyo then another 6 hr. to Singapore. Way too long to travel back and forth. Singapore is also one of the most expansive places to live in the world.
2 •Reply•Share ›
Avatar
Tim Aunt Rosy • 8 hours ago
And over-litigated, urbanized and non-remarkable.
1 •Reply•Share ›
Avatar
Aunt Rosy Tim • 7 hours ago
tight space. high population density.
2 •Reply•Share ›
Avatar
WebWhip my2cents • 10 hours ago
That's interesting. Where have you been that compared more favorably and what was your opinion of those places?
•Reply•Share ›
Avatar
Patricia Pelton Tsimbi • 15 hours ago
I appreciate your comments but disagree. The recent hostage situation in Ohio was more or less on par with their experience. My personal experience is that this happens all the time in the US. Just because you haven't seen it doesn't mean it does not happen. We are not protected by any means.
23 17 •Reply•Share ›
Avatar
James Patricia Pelton • 15 hours ago
Does it really make sense to compare state sponsored sex-slavery for 200,000 women to a criminal who kidnaps and keeps as sex-slaves, 3 victims?

In reality, we are protected, by many means. I think your imagination is running away with itself.
100 •Reply•Share ›
Avatar
St8toutSEDC James • 15 hours ago
No, but human trafficking is a billion dollar industry and the 2nd most profitable form iof organized crime. Women, children and men are trafficked on US soil... Every single day. Passports taken and forced to work for free. ( Free labor or forced into sex industry) We are talking millions of victims. People have to stop being so naive.
35 1 •Reply•Share ›
Avatar
wjshelton St8toutSEDC • 12 hours ago
True, but in the US, it is neither state sanction nor state enforced, which was the case with the "Comfort Women". Both are horrible, but there is a difference when one is state sponsored on a large scale and the other is organized criminal activity.
20 •Reply•Share ›
Avatar
Larrt St8toutSEDC • 11 hours ago
I think this discussion is way over your head!
5 •Reply•Share ›
Avatar
Brian Munch St8toutSEDC • 9 hours ago
the key difference is it isnt state sponsored here..people are actively trying to stop it rather than organize and promote it
2 •Reply•Share ›
Avatar
James St8toutSEDC • 5 hours ago
Again, you're talking about organized crime. I know that human trafficking is a huge problem, although the scope at which you say it's occurring in America might be exaggerated.

That's a much better example than the Cleveland one, but it's still something being done secretly, against the law, rather than being openly sanctioned by a major world power.
1 •Reply•Share ›
Avatar
Rich_De James • 8 hours ago
Every major city in the US has AMPs - Asian massage parlors. Tulsa, Seattle, Houston, NYC, Miami, St. Louis, LA, etc., etc. The women who work there are immigrants who are forced into servitude to pay debts for expenses to bring them over, and they aren't providing massages.

Simply google asian massage parlor and any city you name and you will find this is true.
1 •Reply•Share ›
Avatar
James Rich_De • 5 hours ago
I don't think the two of you are getting the argument here, and I don't feel like re-writing it for the 4th time. Read everyone else's responses and you might figure it out for yourself.
•Reply•Share ›
Avatar
Rich_De James • 4 hours ago
I fully understand your argument, but you need to think about how many cities in the US have over 300,000 people, how many AMPs are in each of those cities, and how many women are in each of those AMPs. The numbers blow up quickly. According to a 1999 CIA paper, approx 50,000 women and children are trafficked annually in the US. So in four years, you've got your 200K.

And your argument based on a state sanctioned policy doesn't really hold up because that policy was 70 years ago during major world upheaval and a foreign government that has greatly changed since then. That's something you have to figure out for yourself, I guess.
•Reply•Share ›
Avatar
kasey413 Patricia Pelton • 14 hours ago
Patricia, really, you need a reality check. Although I feel for the women in Ohio, there is a huge difference between some nutcase kidnapping 3 women and the state sponsored kidnapping and rape of 200,000 women. You should give that a bit of thought.
40 •Reply•Share ›
Avatar
CASTEC kasey413 • 11 hours ago
exactly because the sex slave women had nobody to seek to help them, the govt was part of it!!
8 •Reply•Share ›
Avatar
Harry Hirsch CASTEC • 9 hours ago
really? of course ..it was war ..all was the govts decision!
1 1 •Reply•Share ›
Avatar
hencheryjohn CASTEC • 8 hours ago
What were they going to do?...Call the Police?
•Reply•Share ›
Avatar
Busted hencheryjohn • 4 hours ago
I am the police ... What is your problem dude?
1 •Reply•Share ›
Avatar
Cory Stereo Patricia Pelton • 14 hours ago
"My personal experience is that this happens all the time in the US. Just because you haven't seen it doesn't mean it does not happen."

This has got to be the most idi0tic thing I've read in some time.
14 3 •Reply•Share ›
Avatar
Bob Smith Cory Stereo • 13 hours ago
It is quite commonly reported that there are more people living under slavery in the world today than at any point in history, including when slavery was legal. And yes, some of those slaves are here in the United States. It just happens to be done under the radar. Brothels, for instance, where Asian and Hispanic women are trafficed from one place to the next exist in every big city in the US.
9 •Reply•Share ›
Avatar
Annitte Bob Smith • 10 hours ago
Different from it being the practice and policy of the government.. If a sex slave in the US goes to the police there is help. When a person is a sex slave of government that is a different thing.
1 •Reply•Share ›
Avatar
WenPap Bob Smith • 11 hours ago
Did you forget to mention white and black women ??
1 •Reply•Share ›
Avatar
hencheryjohn Cory Stereo • 12 hours ago
How So?
•Reply•Share ›
Avatar
sherri56 Patricia Pelton • 12 hours ago
Just wanted to pass along something. We think that these stories are all over the media. That it would be impossible for anyone to not have heard of them (ex. the Ohio captives) but I have a friend, who has a smartphone and internet etc. and had not heard of the Ohio story, until months later when I mentioned it. Did not know anything about it. So there are people who go around, live their lives, never listen to any news, never read a paper or news story online. It amazed me because this person is under 40, connected and yet had not heard of it happening.
1 •Reply•Share ›
Avatar
Bill Patricia Pelton • 11 hours ago
Not on an official and industrial level.

Get real.
•Reply•Share ›
Avatar
Larrt Patricia Pelton • 11 hours ago
You have no idea what you are comparing!
•Reply•Share ›
Avatar
cptdondo Tsimbi • 7 hours ago
Well, at the same time the US government was taking Americans of Japanese descent and forcibly removing them into concentration camps in remote and inhospitable parts of the US. The only difference is that they weren't raped as a matter of policy, but their lives were destroyed, their possessions taken, and they were held in inhuman conditions, surrounded by guard towers and barbed wire.

Go back in your own history. (Yes, I am an American, but one who understands the brutality of human history is not limited to "other than us", whoever "us" happens to be.)
1 •Reply•Share ›
Avatar
James Ball Tsimbi • 14 hours ago
So you're just going to pretend slavery didn't happen in this country? Or segregation? It doesn't get any more appalling and inhumane than that
1 2 •Reply•Share ›
Avatar
NotAmerican Tsimbi • 13 minutes ago
Things like this still exist. Not so long ago in Bosnia and nowdays in parts of Africa, Asia....
•Reply•Share ›
Avatar
mountainlady Tsimbi • 3 hours ago
Particularly in the casual attitude toward women mistreated in war as "just the way it is" and as "soldiers have their needs". Disgusting. Until the official Japanese position is one of grief, regret and a pledge that this will never happen again....anything they offer is useless.
•Reply•Share ›
Avatar
fan skeptic201 • 13 hours ago
Google Justice Pal, it will make your blood boil! He was the only international judge who found all Japanese war criminals not guilty during the tribunal. The Japanese built a memorial for him inside the Yasukuni shrine where Japanese war criminals are enshrined. This is ridiculous!
18 •Reply•Share ›
Avatar
Usmc8408 skeptic201 • 13 hours ago
Relax people, 'Skeptic' wasn't saying it's the worst thing to ever happen, he/she said is was part of the worst of things humanity does to "itself." In a list of the worst, this would be one. So chillax with the rebuttals and comparisons, my peeps! :)
3 •Reply•Share ›
Avatar
NotAmerican skeptic201 • 16 minutes ago
Many Japanese would disagree with you.

There is a genre of soldier rapist porn in Japan = japanese actors in
WW2 uniforms raping and torturing (presumably) non-japanese civilian
women (presumably japanese actresses). Aparently many Japanese are still
fascinated, excited and fantasise about such horrible practices. As far
as I know it is not banned. Quite revolting.
•Reply•Share ›
Avatar
Busted skeptic201 • 4 hours ago
Prostitution is a crime nonetheless.
•Reply•Share ›
Avatar
sports_medic • 15 hours ago
Germans were required to confront the crimes against humanity committed under Nazi Germany. Germans were forced to tour the camps and strict laws were put in place to hinder the rebirth of the Nazi party in Germany. Those responsible for war crimes are hunted down even several decades later.

We did not do the same in Japan. We did not conduct robust war crime trials like we did in Germany. We allowed the emperor to remain on the throne. Senior leaders were not held accountable and several of them still occupy high positions. These leaders lay wreaths to honor those who committed atrocities. Japanese textbooks gloss over their crimes against humanity, instead, blaming U.S. policy for making their actions inevitable and chastise the U.S. for how we ended the war. In Japan, there is no shame for what they did. Japan only feels shame that they lost the war.
74 •Reply•Share ›
Avatar
prin12 sports_medic • 10 hours ago
you can say its all in the past and japan has "formally apologized". But its not the past that is the problem but japans current attitude to history. An apology is something that is genuine. You don't say sorry, then deny what you did was wrong. This is the way of japanese politicians whom continue white wash their country's war atrocities, paying tributes to war criminals and claim that the use of comfort women were "necessary". This is not something that can be resolved with meager compensation. Until japan honestly faces up to its past, it will not get the respect from their neighbors they are seeking..
14 1 •Reply•Share ›
Avatar
NotAmerican prin12 • 19 minutes ago
There is a ganre of soldier rapist porn in Japan = japanese actors in WW2 uniforms raping and torturing (presumably) non-japanese civilian women (presumably japanese actresses). Aparently many Japanese are still fascinated, excited and fantasise about such horrible practices. As far as I know it is not banned. Quite revolting.
•Reply•Share ›
Avatar
WenPap sports_medic • 11 hours ago
Thats because in Japan it was " just women " that the crimes were committed against....In Germany men were also involved....
6 6 •Reply•Share ›
Avatar
Dark Night WenPap • 11 hours ago
Thousands of men were also used as medical experiments, while others were sent to slave labor in Russia, China, Indonesia, etc. Young men were recruited and sent to war by the same oppressors that ransacked their motherland. So I have no idea what you mean by "just women"
2 1 •Reply•Share ›
Avatar
Annitte Dark Night • 10 hours ago
I suspect they were referring to the Comfort women.
2 •Reply•Share ›
Avatar
Dark Night Annitte • 10 hours ago
I was referring to WenPap's comment listed above.
Quote "Thats because in Japan it was " just women " that the crimes were committed against....In Germany men were also involved..." end quote.
So is this guy saying that the Germans also had Comfort women, and Comfort men?
2 •Reply•Share ›
Avatar
Harry Hirsch Dark Night • 9 hours ago
but you have right? some 19 years old Chinese kid like you with a big mouth
1 •Reply•Share ›
Avatar
Dark Night Harry Hirsch • 8 hours ago


You should study your country history.
In those day, Korean could become commander of Japanese imperial military.
And, Most of policeman in korean peninsula were Korean man.
Officer of local goverment were also Korean.
How did we abduct Korean women ?
Then, did Korean man join to abduct Korean women ?
Of course, NO.
In fact, Japanese and "Korean" goverment admit that there are no witness.
Nobady saw that Japanese military abdducted Korean women.
Basically, Most of comfort women were Japanese women.
1 4 •Reply•Share ›
Avatar
justme55 2600zero • 8 hours ago
Do YOU know your history correctly? Is what is written in your history books the truth??
2 •Reply•Share ›
Avatar
2600zero justme55 • 7 hours ago
I understand that you doubt me.
but I don't tell the story based on a book.
I wrote the story based on many books and goverment documents.
Although there are few books in English, George Akita and Brandon Palmer who are American describe Korean's situation in those day.
Their book is neutral.
1 •Reply•Share ›
Avatar
justme55 2600zero • 7 hours ago
I question any books under the control of a government. Thanks for the information.
1 •Reply•Share ›
Avatar
Kang 2600zero • 9 hours ago
Wow~~~~ you are really logical person~~ I'm impressed!
I agree that lots Korean could be a commander, officer or policeman in Korean.
However, the head of Korea was Japanese, and they used the Korean people to rule Korean people efficiently. For exemple, they got a promotion when Korean did something good for Japan and Japanese. I admitted that this was the sad history for Korean but the force of Japan made Korean miserable.
However, Japan doesn't make any excuses for Korea and many countries, I think that this is really shame, isn't it~??
1 •Reply•Share ›
Avatar
sdk88 • 13 hours ago
You'll get a job if you go to the brothel? So they went? What did they think took place there? Gee, sounds wholesome, what a great opportunity!
2 5 •Reply•Share ›
Avatar
Fresh Sprinkles • 14 hours ago
So are we going to still be talking about this 70 years from now?
2 5 •Reply•Share ›
Avatar
Guest Fresh Sprinkles • 12 hours ago
"We" meaning women? If so, the answer is yes.
1 •Reply•Share ›
Avatar
Guest • 15 hours ago
We should look the other way because Japan is now our top ally in Asia and we all hate China.
2 5 •Reply•Share ›
Avatar
coolbreeez Guest • 15 hours ago
I'm wondering if you would've felt that way if it was your mother, grandmother, or even your sister that this had happened to?
9 1 •Reply•Share ›
Avatar
Jailin Rose coolbreeez • 14 hours ago
sounds like this hit a bit too close to home . . . sorry your mother was a ho
3 •Reply•Share ›
Avatar
Istenno Jailin Rose • 14 hours ago
no one truly loves you.
4 •Reply•Share ›
Avatar
Jailin Rose Istenno • 5 hours ago
Not since the comfort woman lady died . . . she loved me long time
•Reply•Share ›
Avatar
FoodStampChristian Guest • 15 hours ago
Because china has money and nukes and America is bankrupt?
3 •Reply•Share ›
Avatar
Liberal Bias Guest • 15 hours ago
Sarcastic? Unfortunately that's just how foreign policy goes these days.
1 •Reply•Share ›
Avatar
nick Guest • 15 hours ago
It's best not to be ally with people that are hated by the entire region, just look at all the problem Israel gotten us.
2 2 •Reply•Share ›
Avatar
jaareshiah • 10 hours ago
Over the past 100 years, there has been a steady moral degradation. Personal pleasure has replaced genuine love. And there was the rationalization that Korean women should serve as "comfort women" for the interests of Japanese soldiers before and during World War II, for "risking their lives and deserved a ' rest' ". It doesn't matter of the psychological and emotional damage done, as long it is in the interest of nationalism.

This selfish sexual arrangement causes such a measure of mental and emotional turmoil within a woman, having been repeatedly raped to satisfy the sexual lust of the Japanese soldiers, that many never recover, unable to effectively function as a woman or even as a person. Some dive into deep depression, substance abuse, paranoia or commit suicide. Their dignity has been lost. They are traumatized. At times, death seems to be more favorable than living with the pain.

Jesus identified that our time period, called the "last days", would especially be lacking love, agape love, love that seeks the interests of others ahead of itself. At Matthew 24:12, Jesus said that "because of the increasing of lawlessness, the love of the greater number will cool off."

This has come to pass, whereby even governments have been the promoter of this atrocity in order to fuel their soldiers selfish sexual desire and of course, nationalistic interests. That is why the Bible describes all human governments as a composite "wild beast" that does wicked things to their "prey", tearing them apart at will.(Rev 13:1, 2)

My wife was raped by her uncle when she was five, but her mother did not believe her. She was later sexually assaulted at 15 by a US military officer and then at 16 was raped by her father, who was a sergeant in the US army when he was drunk.(nearly 1/3 of women fighting the U.S. war in Iraq were raped by fellow soldiers) Right after our marriage, some 35 years ago, she began to show signs of emotional turmoil, crying in the middle of the night, that accelerated until she reached her later 30s.

At that time, she began showing signs of mental illness that eventually put her into 4 mental health hospitals in a 6 year period. Then some 3 1/2 years ago, at the age of 54, she suffered a complete paralyzation of her left side of her body, with me as her husband becoming a 24/7 caregiver.

All of this is a direct result, at least for her, of what rape can do. It can cause mental, emotional and physical damage of such magnitude, damage that only our Maker, Jehovah God, can repair, giving back a woman her dignity.(see Rev 21:3-5) Only He can remove the painful memories, and give her a perfect body on a paradise earth.(see Isa 65:17)
see more
1 2 •Reply•Share ›
Avatar
Alexishere jaareshiah • 10 hours ago
Unfortunately, not even "your maker" can remove the painful memories. As for her dignity, she never lost it :-) Make sure to tell her that every day.
1 •Reply•Share ›
Avatar
cotton jaareshiah • 10 hours ago
You bring up so many real issues and you seem to know the topic very well, but you are taking on such a defeatist attitude!! Thinking so negatively will not only hurt your own feelings but also anybody you talk with (including women who come to you or who you talk with about this topic).

Not that it isn't a massive problem whose severity needs to be brought to light and dealt with, but as Alexishere states, "As for her dignity, she never lost it." She can still be strong and proud -- as long as she allows herself to be! I hope she can learn to see that as well. ^_^
•Reply•Share ›
Avatar
Hannibal Lecter jaareshiah • 10 hours ago
no
•Reply•Share ›
Avatar
Guest • 13 hours ago
...
1 2 •Reply•Share ›
Avatar
Incredulous45 Guest • 13 hours ago
With many faults, just like the rest of the world.
•Reply•Share ›
Avatar
shironekojp • 12 hours ago
Why do CNN spread the lies of Comfort Women all the time? They are nothing more than prostitutes who applied for the job ads. Don't you know World War is ended in 1945. Why do attack against us even now? Are you crazy?
2 8 •Reply•Share ›
Avatar
lucyalways shironekojp • 9 hours ago
Why can't you face the truth and history. You are really the same with your past with your ambitious leader ABe.If you really want Indignation, you should know what is right history and then move on!
2 •Reply•Share ›
Avatar
hokkaidoboy • 12 hours ago
There's no concluding evidence on comfort women. However, the government of Japan has apologized over it after years of international pressure. But I ask again, what about the crime of communist China?
2 9 •Reply•Share ›
Avatar
Patrick Valdez hokkaidoboy • 12 hours ago
We're not talking about China, are we?
10 •Reply•Share ›
Avatar
lucyalways hokkaidoboy • 9 hours ago
Japan is always avoiding history!where is their logic?
2 •Reply•Share ›
Avatar
Chopper1 hokkaidoboy • 8 hours ago
What crime? The only crime is the bukkake you committed on your sister and her teenage friends butbtonyou nhips maybe it is not seen as crime?
1 •Reply•Share ›
Avatar
snakebite8 hokkaidoboy • 12 hours ago
Shhhh we owe them money.
•Reply•Share ›
Avatar
DM snakebite8 • 12 hours ago
A LOT of money.
Buy LOCAL. Support your own country.
1 •Reply•Share ›
Avatar
Jailin Rose • 14 hours ago
Me love her long time
1 3 •Reply•Share ›
Avatar
2600zero • 10 hours ago
Japan forced about 200,000 women into sex slavery?
Don't make me laugh!!
In those day, Korean could become commander of Japanese imperial military.
And, Most of policeman in korean peninsula were Korean man.
Officer of local goverment were also Korean.
How did we abduct Korean women ?
Then, did Korean man join to abduct Korean women ?
Of course, NO.
In fact, Japanese and "Korean" goverment admit that there are no witness.
2 11 •Reply•Share ›
Avatar
najania 2600zero • 10 hours ago
Can you read the article and understand what you are reading? There are reams of testimony by the surviving comfort women themselves as to how they were duped or forced into sexual slavery. And as Hosaka Masayasu, a Japanese historian of the Showa era, has pointed out, the Imperial Army and Japanese gov't destroyed any and all incriminating documents they could get their hands on before the arrival of the Occupation Forces, so claims about lack of documentary evidence are badly compromised, to say the least.
6 •Reply•Share ›
Avatar
2600zero najania • 9 hours ago
You don't trust Japanese goverment investigation also Korean historian investigation ?
Korean historians also admit there were no abduction by Japanese army.
Nobody including her family and neighbor saw that Japanese abducted Korean.
In the fist time, comfort women said in press that I was sold by "my parents".
This is very sad story. But Japanese women were also same conditions because Japan was poor.
1 1 •Reply•Share ›
Avatar
cotton 2600zero • 9 hours ago
look. it happened, and constant denial only brings Japan more negative attention globally.

every country makes bad mistakes sometimes. many of Japan's just happen to stem from the WWII era (same with the USA, to be honest; we did a LOT of awful things in WWII and post-WWII!). it's important to accept these issues for the sake of learning from them. we learn, we change, and through this we are able to improve global relations.
4 •Reply•Share ›
Avatar
2600zero cotton • 9 hours ago
I appreciate and understand your opinions.
Of course, We have already regreted and apologized to many asian nations, may times. But, we can't apologize that we didn't do thing.
Can you apologize that you didn't do thing ?
1 1 •Reply•Share ›
Avatar
cotton 2600zero • 6 hours ago
That's true. I think it's a little silly, too, since the people that caused problems in the first place are mostly dead or at least no longer a part of politics...

but I think it's kind of unavoidable because when you become a government official you are not representing just yourself but the whole history of your government. It would definitely be preferable if both sides could look forward and stop letting things in the past from preventing the development of a mutually amicable relationship.

I think within Korea, the image of Japan is steadily increasing. Many young people study abroad in Japan, and though they do suffer hardships or are singled out for being Korean, I think they in general are able to see through the barrier put up by both sides. There's still some clear stigma, and there are people who still dislike Japan even if they go there, but I think that is changing.

In Japan, too, I think the situation is changing for the better -- but it's more gradual. I have one Japanese friend who learned through studying abroad that this is just silly. He used to dislike Koreans a lot, but when studying abroad in the USA he met a lot of Korean people who were also studying abroad, and through that companionship he realized there was nothing inherently wrong with them. But still, I hear a lot of Japanese people, mostly elderly but some young people as well, who really dislike Koreans just as a rule.

And situations like the repeated visiting of Yasukuni Shrine (which is not exactly the fault of the Prime Minister, since he's pretty much obligated to go) just make this growth more difficult.

I don't know enough about it, so I can't say for sure; I just hope that the situation is able to improve mutually.
see more
1 •Reply•Share ›
Avatar
Kohyu Nishimura • 13 hours ago
Show me a clear evidence of sex-slavery.
Any propaganda will be defeated by the historical facts, as we all humankind had been watching the history.
2 12 •Reply•Share ›
Avatar
rebbebupkis Kohyu Nishimura • 12 hours ago
Again, read the Rape of Nanking. You're like a Holocaust denier (i.e., misinformed and in serious denial).
9 •Reply•Share ›
Avatar
T. Storm Kohyu Nishimura • 13 hours ago
Go read an Asian WWII history book.... It won't take you long to find the FACTS about it (Not your opinion).
7 •Reply•Share ›
Avatar
Phong Mach Kohyu Nishimura • 13 hours ago
You are an ignaramous.
4 •Reply•Share ›
Avatar
Guest Kohyu Nishimura • 12 hours ago
Do us all a favor and look up the definition of slavery. Slavery does not require a systematic nationwide "business." It is the act of subjugating another for labor without reward or freedom. It's not complicated. The commenter "rebbebupkis" is correct, you are like a Holocaust denier.
2 •Reply•Share ›
Avatar
Fresh Sprinkles • 14 hours ago
They lost the war, get over it. There is nothing more to do but get over it.
1 4 •Reply•Share ›
Avatar
Jailin Rose • 15 hours ago
Me love her long time :-(
1 4 •Reply•Share ›
Avatar
DM Jailin Rose • 15 hours ago
Not funny. Not necessary. These women were victims and your attempt at humour is completely lost on me. Why?
7 1 •Reply•Share ›
Avatar
Jailin Rose DM • 14 hours ago
She got started in 1940. If that's not a long time to love her, IDK what is. That's why I put a sadface up.
•Reply•Share ›
Avatar
DM Jailin Rose • 14 hours ago
Good thing you explained yourself. Many would think you were using an actual bigoted statement reflecting how media used to portray these women as if they were happy to be there. Wouldn't want you adding insult to injury.
•Reply•Share ›
Avatar
Jailin Rose DM • 5 hours ago
Nope, sadface
•Reply•Share ›
Avatar
FoodStampChristian • 15 hours ago
It looks like the Japanese Nazi invaded almost all Asian countries and the Pearl Harbor. Japan rocks!
1 4 •Reply•Share ›
Avatar
cebo • 12 hours ago
90 is like 378 in ho0ker years. What an amazingly long life.
1 5 •Reply•Share ›
Avatar
Jailin Rose • 15 hours ago
She love you long time
1 5 •Reply•Share ›
Avatar
Evolve123 Jailin Rose • 9 hours ago
Damn I didn't see that someone already said this before I said it... Sorry
1 •Reply•Share ›
Avatar
Pressure cooker • 16 hours ago
If she was pretty,I bet she got lots of tips.
1 6 •Reply•Share ›
Avatar
Aunt Rosy Pressure cooker • 16 hours ago
slave labor. no tips.
3 •Reply•Share ›
Avatar
unbeguiled • 6 hours ago
Two things seem pretty obvious .... she was a welfare cheat and most likely did not give up the worlds oldest profession ..... a real female role model????? .... "She worked as a garbage collector, but didn't make enough, so she had to rely on government subsidies. It's unclear how, but she was able to make three donations to a scholarship fund totaling more than $92,000"
1 8 •Reply•Share ›
Avatar
respectfully_disagree unbeguiled • 5 hours ago
You don't have a shred of evidence for that claim. Until you do, show some respect. This woman endured real hardship and pain at the hands of a cruel enemy. Cruelty that many of us will have the good fortune never to endure. Those two things don't seem obvious at all. unless you are privy to more information than the rest of us.
5 1 •Reply•Share ›
Avatar
reddfrog respectfully_disagree • 5 hours ago
unbeguiled thinks that being crude and disrespectful is cool. Too much Hollywood.
2 •Reply•Share ›
Avatar
Tinwoods reddfrog • 3 hours ago
It's absurd enough how often trolls blame "Hollywood" for all of the world's ills, but your claim here takes the cake,
•Reply•Share ›
Avatar
Liverpoolfc10 • 10 hours ago
It was a long time ago, the fighters were risking their lives... a little rape is fine given the circumstance. Get over it Korea..
1 16 •Reply•Share ›
Avatar
wrle Liverpoolfc10 • 9 hours ago
says the japanese.
5 •Reply•Share ›
Avatar
Sunandan K Liverpoolfc10 • 9 hours ago
Was your mommy or grand mum around back then?
3 •Reply•Share ›
Avatar
Liverpoolfc10 Sunandan K • 7 hours ago
My gran was, if she was fighting in the war and she needed to ride some bloke to distress i'm sure theyd understand
1 •Reply•Share ›
Avatar
Sunandan K Liverpoolfc10 • 7 hours ago
Am sure your Gran must have helped quite a few blokes release their stress. Good for you.
•Reply•Share ›
Avatar
Chopper1 Liverpoolfc10 • 8 hours ago
How's having sex with that corgis going over thre in Liverpool?
•Reply•Share ›
Avatar
rebbebupkis Liverpoolfc10 • 9 hours ago
Yes, Mr. Stalin.
•Reply•Share ›
Avatar
onaturalia • 16 hours ago
The US has pimps too. They pimp wherever there is a demand. I'm not sure what you can do about this. Paying off the victims isn't really a solution.
8 •Reply•Share ›
Avatar
Lucilletheguitar onaturalia • 16 hours ago
The government was the pimp in this case. They shouldn't have been forcing women of another country into being sex slaves.
18 •Reply•Share ›
Avatar
onaturalia Lucilletheguitar • 16 hours ago
Yes. It was a crime against humanity. I don't know why Korean's were involved. I guess the Korean's could not protect themselves.
3 •Reply•Share ›
Avatar
ss9221 onaturalia • 16 hours ago
just curious, what prompted you to "balance" out any analysis about Japan by saying what goes on here?
5 •Reply•Share ›
Avatar
onaturalia ss9221 • 16 hours ago
Because I see the same thing happening here. Young females being forced into prostitution because people can make money off them. This is all about money. It isn't about helping the war effort.
1 5 •Reply•Share ›
Avatar
ss9221 onaturalia • 16 hours ago
is our military doing that? have they set up joy divisions on a wide scale of 200k women?
8 •Reply•Share ›
Avatar
darrell01 • 10 hours ago
It was different times. Soldiers were stressed. They didn't have internet to entertain them.
7 •Reply•Share ›
Avatar
Aunt Rosy darrell01 • 9 hours ago
did you know Japaneses soldiers back then were some of the first Meth addicts/ Their military provided it to them so they needed less food / sleep and had more energy to fight.
2 •Reply•Share ›
Avatar
Haruko Minamoto • 3 hours ago
Nobody bother to question why there were no comfort women in other parts of Asia that Japanese occupied during WWII. If you want to know what "comfort women" are, watch the movie "Empire of the Sun."

This article's version is sensationalized propaganda.
6 •Reply•Share ›
Avatar
VNN Haruko Minamoto • 2 hours ago
above comment show the world how successful that Japanese government white wash the history and brainwash they people. This is dangerous sign to the world that the Japanese right wings are become majority. US must control tight your little brother to avoid them to be mad.
3 •Reply•Share ›
Avatar
maomao00118621 Haruko Minamoto • 25 minutes ago
there were comfort women all over asia under japanese occupation during ww2.Either you are brainwashed or trying to spread lies
1 •Reply•Share ›
Avatar
Alien Haruko Minamoto • an hour ago
Ah, 'Japanese' troll.
1 •Reply•Share ›
Avatar
VQuakr81 Haruko Minamoto • 2 hours ago
There were comfort women in other parts of Asia, dummy.
1 •Reply•Share ›
Avatar
Blade Haruko Minamoto • an hour ago
Can you be my comfort woman?
•Reply•Share ›
Avatar
Porscha Stuttgart • 4 hours ago
Who would have expected this from the Japanese? The most courteous, respect-filled and seemingly most peaceful people, to be around, on earth!
4 •Reply•Share ›
Avatar
Tinwoods Porscha Stuttgart • 3 hours ago
Are you not familiar with this little event of the 20-Century called World War 2?
3 •Reply•Share ›
Avatar
Pete Pumber • 2 hours ago
Did she die of STD?
3 •Reply•Share ›
Avatar
Mobileman Pete Pumber • an hour ago
yea one you gave her
•Reply•Share ›
Avatar
Blade Mobileman • an hour ago
i had an STD 3 times and got rid of it twice ....
1 •Reply•Share ›
Avatar
Pressure cooker • 16 hours ago
Did she ever say how many she handled ?
3 •Reply•Share ›
Avatar
Aunt Rosy Pressure cooker • 16 hours ago
why do you want to know?
3 •Reply•Share ›
Avatar
水果 • 2 hours ago
The shameless Japanese guy wants to eat bullets.
2 •Reply•Share ›
Avatar
socali • 6 hours ago
Nevermind Japan or Korea, when China starts invading other countries, they will implement the comfort woman program worse than the Japanese.
2 •Reply•Share ›
Avatar
DieEver socali • 4 hours ago
LOL...
•Reply•Share ›
Avatar
reddfrog socali • 5 hours ago
I don't think the Chinese like Filipino women.
•Reply•Share ›
Avatar
maomao00118621 socali • 6 hours ago
fear monger
•Reply•Share ›
Avatar
Bill Clinton • 8 hours ago
Because they were Japanese men with their 1/2" peters wouldn't you have to be raped 12 times to equal once in the USA.
2 •Reply•Share ›
Avatar
reddfrog Bill Clinton • 5 hours ago
If it's a fat white guy, their big belly won't allow intercourse. The flab gets in the way.
•Reply•Share ›
Avatar
SemiahmooWR reddfrog • 3 hours ago
If it's a Chinese guy, they prefer prepubescent girls because they feel more powerful.
•Reply•Share ›
Avatar
Joereah Turner • 14 hours ago
God, please help us!
2 •Reply•Share ›
Avatar
countertrans • 15 hours ago
do you think giving comfort women to soldiers prevented rape? was that the thinking?
2 •Reply•Share ›
Avatar
MOM • 11 hours ago
This is just something that needed to be and it was humane to render comfort to the solders but should be under volunteer bases only . should not be raped ever .
1 •Reply•Share ›
Avatar
Grace MOM • 10 hours ago
Yes, the natural use of the woman. The term is in the bible. Look it up
1 •Reply•Share ›
Avatar
justme55 Grace • 8 hours ago
You better try reading more of the Bible. That is incorrect. Rape is not permitted.

Deuteronomy 22:25–27 (ESV)
25 “But if in the open country a man meets a young woman who is betrothed, and the man seizes her and lies with her, then only the man who lay with her shall die. 26 But you shall do nothing to the young woman; she has committed no offense punishable by death.
•Reply•Share ›
Avatar
TammyOfKS • 11 minutes ago
Had it been American soldiers, it would have been comfort children.
•Reply•Share ›
Avatar
FredUp • 5 hours ago
Japan’s abhorrent practice of enslaving women to provide sex for its troops in World War II has a little-known sequel: After its surrender, with approval from the U.S. occupation authorities, Japan set up a “comfort women” system for American GIs.
“Sadly, we police had to set up sexual comfort stations for the US occupation troops,” recounts the official history of the Ibaraki Prefectural Police Department. “The strategy was to create a breakwater to protect regular Japanese women and girls from being raped by GIs.” BBC
•Reply•Share ›
Avatar
HarpoMarx • 8 hours ago
Totally agree
•Reply•Share ›
Avatar
Kuri Matsumoto • 9 hours ago
See!
www.youtube.com/watch?v=ggQaYD...
•Reply•Share ›
Avatar
Redd Menace • 11 hours ago
If she was in a Seoul hospital, it seems she may have had time to tell her story if she wanted to.
•Reply•Share ›
Avatar
LeeMT • 14 hours ago
Can anyone tell me, what do Chinese call their fine dinner plates?
•Reply•Share ›
Avatar
Ajay LeeMT • 14 hours ago
Amrika.
1 2 •Reply•Share ›
Avatar
Peter LeeMT • 14 hours ago
The same thing they call their fine dinner forks.
•Reply•Share ›
Avatar
FoodStampChristian LeeMT • 14 hours ago
china.
•Reply•Share ›
Avatar
jakkfrost • 15 hours ago
Genetically-modified purple tomatoes heading for shops real news

•Reply•Share ›
Avatar
countertrans • 15 hours ago
when will we learn that war is unnecessary and dangerous. Even now there are people who are planning to go for war with Iran, North korea, Syria etc. a countries defences should be limited to protecting their own land, aircraft carriers, long range bombers, long range missiles, wmd, are just things that are waiting to unleash catastrophic disasters to human.
•Reply•Share ›
Avatar
Joseph countertrans • 14 hours ago
If you want to believe that war is unnecessary, keep on believing that. . .and in a couple of generations your descendants will probably be speaking Arabic, or Chinese.

If we hadn't thought war was necessary in the 1940's we'd be speaking German now and live in a world which was judenfrei.

If we hadn't thought war was necessary in the 1860's, African Americans would still be chattel property in much of the US.

We live in a world filled with bad people, who want to do bad things to us. We have to be prepared for war to defend ourselves and stand up to protect others.
•Reply•Share ›
Avatar
seavegas • 15 hours ago
I stubbed my toe.
•Reply•Share ›
Avatar
Reuven • 16 hours ago
China need to be careful. Japan has a long one for them too.
•Reply•Share ›
Avatar
FoodStampChristian Reuven • 16 hours ago −
America is bankrupt as well.
•Reply•Share ›


http://14819219.at.webry.info/201009/article_17.html
なるほど(納得、参考になった、ヘー) ブログ気持玉 1 / トラックバック 0 / コメント 0
『慰安婦 個人列伝』

division(division) / 作成時間 : 2010-09-11 14:36

名前:黄錦周 

生年月日 1922年扶餅生まれ(明石書店出版物)
1927年扶餅生まれ(朝日新聞)

略歴 (黄錦周婆さんの証言だけ)

1934年=父が病気になり薬代の借金の為に、ハムフン市の崔さんの家の女中になる (明石書店:証言・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慰安婦達)

1935年=14歳の時、いわゆる少女供出命令で満州に連行され、皇軍兵士の玩具にされた。 (2001年7月17日 東京大学での講演)

1936年=酷い扱いを受け、崔さんの妻の本家に移動する。借金は増えたが、学校に通わせてもらう (明石書店:証言・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慰安婦達)

1938年=日本人の村の指導者の妻が、未婚の朝鮮人女性全員を集め、日本の工場に働きに行くように命じた。私は労働者として徴用されたと思った。 (国連 経済社会理事会 クワマスワミ報告)

1938年=ハンフン市の女学校在学中に国民徴用令で動員された。軍需工場に行くと思ったが、着いた所は満州の吉林市の慰安所だった。 (1995年 朝日新聞)

1939年=ある日突然男達が村にやってきて、村から娘を供出すると言いました。 (1997年8月 日韓社会科教育交流団での講演)

1940年=女学校を卒業する25日前に、婚約者の家の庭で強制連行された。 (TBS:ここが変だよ日本人)

1941年=村の班長に強制的に命令されて、崔さんの家の娘の代わりに志願した。(明石書店:証言・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慰安婦達)


苦しい慰安婦の時代の証言

1995年7月24日 朝日新聞夕刊 
「最初の一年は将校専属の慰安婦で、昼間は病気や怪我の兵士の看病もした。三年目から部隊内の慰安所で兵士達の相手をした。特にクリスマスには相手が多かった。」

証言・強制連行された慰安婦達 明石書店
「満州の吉林に強制連行された。食事も軍人達と一緒に食べた。その後トラックと船で移動し、より厳しい環境になった。ここでは主に海軍の軍人を相手にした」

TBSテレビ ここが変だよ日本人 
「証拠がないだって!私が証拠だよ!これ以上の証拠を出せと言うんだ!」


検証してみよう。

黄錦周婆さんを検証してみよう。

1・生年月日が2つあるようだ。
2・7回も日本軍警に強制連行されたようだ
3・満州の吉林で海軍軍人相手に慰安婦をしていたようだ。
4・日本軍にはクリスマス休暇があったようだ
5・慰安婦の立場でありながら、女学校に在学していたようだ。
6・最高の証拠は上記の証言をする自分だそうだ。

韓国人は恥ずかしくないですか?

---------------------------------------
mokmok (mokmok) 2010-09-11 14:38
薬物中毒かもしれないね

division (division) 2010-09-11 14:39
mokmok>普通の韓国人だと思いますが。^^ 韓国人は反論して下さい。

개⑩(·∀·) (kechoding) 2010-09-11 14:40
(´・ω・) ここで何やら言ってしまえば、 韓国内で殺害されることもできるから、 言えない。

division (division) 2010-09-11 14:41
kechoding>そんな状況だから・・・この人は今でも良い生活を享受しています。

meiji (mhs2020) 2010-09-11 14:43
韓国人たちは精神に問題がいる 老人分をあまり苦しめるのではないか^^...

division (division) 2010-09-11 14:43
meiji>このような人物を・・・国連の理事会で証言させるのだから・・・度胸は素晴らしいですね。^^

division (division) 2010-09-11 14:46
反日韓国人の反論は無いのですか? 

division (division) 2010-09-11 14:57
反論がないようなので 韓国人は黄錦周婆さんは嘘吐きと認めると認定します。^^

HONDA_CVIC (lumiere_AT) 2010-09-11 15:22
日本人は冷静で、科学的に思考できる国民が多い。しかし、戦後の贖罪意識の植え込みのせいで、「日本以外のアジア人」、「老人」、「女性」、「戦時中の日本」、「被害者(を名乗る人)」・・・・というキーワードが揃うと、論理的な思考が鈍ってしまい、このような矛盾だらけの嘘でも何となく受け入れてしまう。これは日本人の大きな弱点。日本を狙う外国は巧みにそこを突いてくる。

■■■■■■■■■■■■■■■■■■■■

【参考:集団移入朝鮮人労務者数】 (日韓国交正常化交渉資料)

『自由募集: 1939.9~1942.2 148549人』
『官あっせん: 1949.2~1944.8 約32万人』 
『国民徴用: 1949.9~1945.4月頃 約20万人』

朝鮮半島の国民徴用令は、1944年8月8日、適用を免除されていた朝鮮人にも実施するとした閣議決定がなされ、1944年9月より実施されました。


『(´・ω・) ここで何やら言ってしまえば、 韓国内で殺害されることもできるから、 言えない。』と言う韓国の人の発言がありました。もちろん殺害ということは無いでしょうが、他のサイトなどに「親日的発言をした」と広まったりする事はあるようです。
従って、うかつなことは言えないこともあるのでしょう。
そう言えば、以前、「竹島」についての時にも同じことを言っていた韓国の人がいました。

『頑張れ 李栄薫教授』でも紹介しましたが、韓国では「親日的発言」というのは一般の人でも結構大変なことのようです。



http://blog.goo.ne.jp/andoro-n/e/57a5090bbd12f8602c5825ad0ead9cae

元慰安婦:黄錦周さんの証言(元慰安婦たちはこう言っている)
2007-09-08 18:14:40 | 歴史
元慰安婦たちはこう言っている(その1)

最近読いくつかんだ本から元慰安婦の体験を紹介します。

(1)黄錦周さん=弱った慰安婦は埋められ殺された

『この恨みを日本にぶつけたい-黄錦周さん

1922年忠道南道扶余県で生まれました。生家は貧しく12才の時100円で売られソウルの金持ちの家で小間使いをして以来、ずっといろいろな家で子守・女中をしてきました。数えで17才の時、女中をしていた咸鏡北道ハムン郡の金持ちの家に、工場供出の員数割り当てが来て、その家には19才と15才の娘がいたのですが、私が工場に行くことになったのです。

 ハムンの家には10代の娘が40人位集められていました。乗せられた列車の窓は全部黒紙がはられ、どこを走っているのかまったくわからなくしており、軍人達が車内を見張っていました。次の日の夕方、満州のどこかでおろされ、15人ほどでトラックにつまれて、数時間行ったところで降ろされました。吉林省のどこかでした。

 そこで「ナガキハルコ」と呼ばれ、20畳ほどの畳を敷いた部屋に通され、軍の命令で「服を脱げ」と言われたのです。私はパジを脱がないよう必死で押さえていたら、刀で下着を切られました。慰安所といった建物は特になく、毎日いろんな兵舎に連れて行かれ、兵隊の寝台で相手をさせられました。ドアの外には兵隊達が並んでいました。最初の10日間は「新品」ということで将校達の相手をさせられました。洗濯、食堂の手伝い、針仕事、土掘りの仕事までさせられ、休みはまったくありませんでした。なのにお金も軍票も何も貰っていません。十字のマークの軍人が私たちを管理していました。

 1日何人の相手をさせられたのか判りません。気絶してしまうこともありました。生理の時許してくれと言ってもダメでした。私は何とか休みたいと体中にわざと生理の血を塗りまくって、兵隊の気をそごうとしました。兵士達は気に入らないと殴る・蹴るの暴力をはたらきました。私も数百回、数千回殴られたかしれません。病気で弱った慰安婦は掘った穴に入れられ手榴弾で殺され、埋められたと聞きます。

1945年の7月末期、部隊内が騒がしくなったんです。私は危険を感じ荷物をまとめて様子を窺っていましたが、8月15日突然「早く出ろ」と言われ、数名で逃げたのですが、途中で一人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汽車で清津という所へ行き、さらに船で羅津に行き、そこから2ヶ月歩いて12月の始めやっとソウルにつきました。』
出典:『従軍慰安婦と戦後補償』高木健一、三一書房、1992年(p47~p48全文)

ジャンル:
社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