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31, 2012

Vietnamese massacre by the Korean army,their metis Lai Dai Han

(男來大韓、Lai Dai Han)
Vietnamese massacre by the Korean army estimated at 300,000 victims, the serious background of  metis, Lai Dai Han

it is able to be adduced that the most famous slaughter residents massacre in Vietnam war was The My Lai Massacre by U.S. troops in 16 March 1968, but has been said that the most brutal was South Korea soldiers.

it is elicitable to refer the kind of the many testimonies if you would ask in South Korea and Vietnam.
in the Korean army,"fierce tiger Division;The Capital Division Tiger",and "blue dragon;The 2nd Marine Division" were said that most brutal.
in the strategy of "searching the enemy and killing " ,Korean army had slaughter babies regardless of age or sex.
the Vietnam veterans have said "When I met South Korean soldiers, it was good as i met death".

the Korean army was the fear for women in particular.because of Korean soldiers killed after raped women brutally.
It is said that Vietnamese massacre by South Korean military personnel estimated more than 300,000 victims .
In the Vietnam War, the Korean army gone through such brutality rape and cruel massacre against the local people. There was also the recreation facilities for Korean military, however they could not be satisfied.
South Korea did not do the deal at all,they left half-breed of more than five thousand to seven thousand  (Raitahan children) to local, while the United States took the responsibility policies that accepted the domestic half-breed  during the war.
there is  a cynical reality of that Korea itself makes a fuss with the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beside they deny the settlement of the past.


라이따이한(베트남어: Lai Đại Hàn/ 大韓)
The term Lai Dai Han (or sometimes Lai Daihan/Lai Tai Han) (lai Đại Hàn in Vietnamese : pronounced [laːi ɗâˀi hâːn]; Korean: 라이따이한) is a Vietnamese term for a mixed ancestry person born to a South Korean father and a Vietnamese mother (which include the victims of rapes by Korean soldiers) during the Vietnam War. The term, and awareness of this legacy, was publicised in Korea in the 1990s and 2000s as Korea increasingly had investment and business contacts with Vietnam.
from wikipedia


The My Lai Massacre (Vietnamese: thảm sát Mỹ Lai [tʰɐ̃ːm ʂɐ̌ːt mǐˀ lɐːj], [mǐˀlɐːj] ( listen); /ˌmiːˈlaɪ/, /ˌmiːˈleɪ/, or /ˌmaɪˈlaɪ/)[1] was the Vietnam War mass murder of between 347 and 504 unarmed civilians in South Vietnam on March 16, 1968, by United States Army soldiers of "Charlie" Company of 1st Battalion, 20th Infantry Regiment, 11th Brigade of the Americal Division. Victims included women, men, children, and infants. Some of the women were gang-raped and their bodies were later found to be mutilated[2] and many women were allegedly raped prior to the killings.[3] While 26 U.S. soldiers were initially charged with criminal offenses for their actions at Mỹ Lai, only Second Lieutenant William Calley, a platoon leader in Charlie Company, was convicted. Found guilty of killing 22 villagers, he was originally given a life sentence, but only served three and a half years under house arrest.
미라이 학살( - 虐殺, 베트남어: thảm sát Mỹ Lai)

은 베트남 전쟁 중인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미라이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이다. 347명에서 504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더욱이 몇몇 희생자는 성폭행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시체 중 일부는 절단된 채 발견되었다.[1] 이 사건에는 미군 26명이 가담하였으나 입대한 지 4개월 2주밖에 되지 않은 윌리엄 켈리 중위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퐁니•퐁넛 양민 학살 사건、フォンニィ・フォンニャット良民虐殺事件、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
The Phong Nhị and Phong Nhất massacre [1](Korean: 퐁니·퐁넛 양민학살 사건, Vietnamese: Thảm sát Phong Nhất và Phong Nhị) was a massacre conducted by the 2nd Marine Brigade of the South Korean Marines on 12 February 1968 of unarmed citizens in Phong Nhi and Phong Nhat village, Dien Ban District of Quang Nam Province in South Vietnam.[6][7]
퐁니・퐁넛 양민학살 사건(베트남어: Thảm sát Phong Nhất và Phong Nhị, 영어: 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 성 디엔반 현 퐁니, 퐁넛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에 의해 학살당하여 70여 명(69 ~ 79명 추정)이 죽은 전쟁범죄이다.[1] 이 사건은 2000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가 진상조사를 벌이면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게 되었다.[2] 2004년 6월, 대한민국의 시민단체는 성금을 모아 관련 희생자에 대한 추모비를 세웠다.[3]


The Hà Mỹ Massacre was a massacre conducted by the South Korean Marines on 25 February 1968 of unarmed citizens in Ha My village, Quang Nam in South Vietnam.[2][4] The victims were 135 women, children and elders from the thirty households.[3][5] After the massacre, the ROK Marines bulldozed a shallow grave and buried the victims' bodies en masse.[3]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은 1968년 2월 25일 대한민국 해병대 소속의 청룡 부대가 베트남 꽝남 성 디엔반 현에 위치한 하미 마을에서 민간인 135명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가매장한 사건이다.[1]

2000년 12월,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하미 마을에 3만 달러를 기부하여 하미 마을에 위령비를 세웠다.[2][3] 그러나, 위령비 건립 과정에서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학살의 경과를 적은 비문을 지워줄 것을 요청하였고, 마을 주민들은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비문을 지울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결국 위령비는 비문을 연꽃 문양이 그려진 대리석을 덧씌운 상태로 제막되었다.[4]

The Gò Dài Massacre, known in Vietnam as the Bình An Massacre[3] was a massacre conducted by the ROK Capital Division of the South Korean Army on 26 February 1966 of unarmed citizens in Gò Dài hamlet, in Bình An commune, Tây Sơn District (today Tây Vinh District) of Binh Dinh Province in South Vietnam.[1] The Capital Division troops killed 380 villagers within an hour.[1][2]
고자이 양민학살 사건은 1966년 2월 26일 베트남 빈딘 성 의 떠이선현 고자이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맹호 부대에 의해 대량학살 당하여 380명이 죽은 사건이다.[1][

The Bình An / Tây Vinh massacre (Korean: 타이빈 양민 학살 사건) was a series of massacres conducted by the ROK Capital Division of the South Korean Army between February 12, 1966 and March 17, 1966 of 1,200 unarmed citizens in Bình An village, today Tây Vinh village, Tay Son District of Binh Dinh Province in South Vietnam.[1][2] During the operation, the Capital Division assaulted 15 hamlets in Tay Vinh village. In the one hamlet, the ROK soldiers rounded up and shot 68 villagers.[3] Only 3 villagers survived.[3] The Capital Division conducted a similar massacre in Binh An village on 26 February 1966.[1

they had killed residents like as in village of 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 in South Vietnam Quang Nam province, Ha my massacre,Go dai massacre,the Binh An/Tay Vinh massacre,using up chemical weapons in every villages.

수도기계화보병사단(首都機械化步兵師團, Capital Mechanized Infantry Division) 또는 맹호부대(猛虎部隊, Tiger Division)는 대한민국 육군 7기동군단 예하의 기계화 보병 사단이다.

http://www.nsleloi.co.jp/new_page_1.htm
猛虎師団



http://www.rokmc211.com/17

맹호부대 (수도사단) The Capital Division (Tiger)

수도사단은 비둘기부대 파월에 뒤이어 1965년 6월14일과 6월26일 2차에 걸친 월남공화국 수상의 전투부대지원 요청에 의거,
65년 8월13일 제 52회 임시국회 제 11차 본회의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 역사상 최초로 전투 부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국내에서 4주간에 걸친 교육훈련을 마치고 1965년 10월12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결단 및 환송식을 거행, 1965년10월 22일
맹호부대가 최초로 월남 퀴논에 상륙하였다.
맹호사단은 1965년 11월15일부로 미101공수여단 및 미해병 7연대로부터 1,200평방km의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고 거점을
확보하였다.
1965년 10월29일 풍손부락에서 최초로 서전을 장식한 이래 중대수색작전, 대대규모 및 연대규모의 작전을 실시하던중1966.
3. 23 ~ 3. 26일간에 "고보이" 지역에서 1연대와 기갑 연대를 투입,최초의 사단규모작전인 맹호5호작전을 실시하였다.
맹호 5호작전이 끝나자 10여년간 이 지역을 지배하여 오던 베트콩을 소탕하고사단전술 책임지역을 1,400평방 킬로미터로
확장시켰다.

맹호의 용맹을 알린 9중대의 "둑코전투"
맹호9중대는 캄보디아 국경부근인 둑코지구에서 8월 9일 야간에 증강된 월맹군 1개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6시간의 격전끝에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격퇴시켜 대승하였으며 전술적인 면에서 중대 전술기지 개념의 우수성을 입증하였다.
(맹호9중대의 중대방어전투 역시 한국군의 우수성과, 미국군이 비웃던 한국군 중대전술작전의 우수성을 증명한 대승이었다.)
세계전사에 새 모습을 드러낸 한국군 고유의 중대 전술기지 운용개념을 확고히 입증한 "둑코전투" 승리는 이후 청룡부대의
"짜빈동대첩" 이 있기까지 월남전사상 최고의 대승으로서 한국군의 용맹성을 세계만방에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월남에 주둔하고 있는 자유우방의 각나라 군부대 전술,전략 전문가와 지휘관들이 한국육군 맹호부대를 직접 방문하여
중대단위 전술기지 운용과 대민사업 활동사항 등을 답습해 가서 교훈을 삼아「무서운 한국군」이란 대명사가 되었고
밀림(정글)의 왕자로서 맹호의 위용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월남 중동부 해안 Qui Nhon 에 위치한 수도사단 맹호부대는 한국군 전투부대의 핵심부대로서 이곳에 침투하고 있는 월맹군
제 18연대를 중심으로한 지방 VC부대들을 섬멸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그간 많은 작전중 둑코(Duc Co) 전투, 맹호 6 호 작전,
오작교 작전, 맹호 12 호 작전, 혜산진 9호 작전, 비호 23호 작전, 창군기념작전, 월계작전, An Khe Pass 작전등은 맹호
부대가
남긴 혁혁한 작전으로 상승 한국군의 기백을 널리 과시한 것이다.

맹호파월일지
파 월 : 1965. 10. 16 부산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월남 퀴논에 상륙
참전기간 : 1965. 10. 22 - 1973. 3. 7
참전군인 : 114,902명 (장교 7,652명, 사병 107,340명)
희 생 : 전사 2,111명 (장교 186명, 사병 1,925명)
부상 4,474명(장교 246명, 사병 4,228명)
전 투 : 175,107회 (대부대 전투 521회,소부대전투 14,586회)
대민사업 : 퀴논 지역에 문화센터, 학교건물, 공원 팔각정을 건축하는 등 많은 대민지원사업을 벌였으며, 1972. 4. 18부터 5.
15까지 약 한달동안 파월 한국군이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안케패스전투"를 비롯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79년 12.12사태때, 진압군측 최고지휘관 이건영3군사령관의 육사동기생인 최영구중장 예하사단으로서, 신 군부의
반란진압을 위해 수도서울로 출동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중, 지휘부가 무력화되며 진압출동이 와해되었다.
명실공히 한국육군을 대표하는 최정예부대인 맹호와, 백마의 12.12 군사반란 당시의 행적을 통해 "좋은지휘관이 좋은부대를
만든다" 는 말을 새삼 느끼게한다.
현재 맹호부대는 대한민국 육군의 가장 강력한 정예부대로서 국민들의 신뢰와, 사랑을 한몸에 받고있는 최강의
"기계화부대"이다.
만일 남북간의 전쟁이 발발한다면 인민군의 최우선적 관심과 공격목표는 "맹호"일 것이 틀림없고, 우리의 맹호는 반드시 한
입에 적의 목줄기를 물어뜯어 "조국통일"의 선봉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대체 한국군은 어찌이리 용맹한가? 백마의 병사들은 자신의 목숨조차도 아깝지 않단말인가?, 나는 이것을 단순한
"군인정신"이라 인정할 수 없다! (호지명)



http://www.stevenh.co.kr/783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

2008/09/26 00:00 in 전쟁영화 감상究/밀리터리 군사전력



육군 최초의 창설부대, 38선 최초 돌파부대, 최초 해외파병부대, 최초 기계화부대, 전투서열 0순위 부대 ...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수기사, 맹호사단)는 경기도 가평 현리에 주둔하며 중부전선 방어를 담당하고 있다.
이 부대는 1946년 1월 15일 한국군 최초로 창설된 제1여단과 1948년 12월 10일 창설된 기갑여단을 모태로 1949년 6월 20일 서울 용산 삼각지에서 '수도경비사령부'로 창설되었으며 보병 제1연대, 보병 제17연대, 기갑연대, 포병단으로 구성되었었다. 1949년 9월 옹진지구에서 첫 전투를 치루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1950년 7월 5일 부대명칭이 '수도사단'으로 바뀌었다.
수도사단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의정부방어전투, 안동지구전투, 경주지구방어전투, 원산·함흥·청진·길주·혜산진의 수복작전,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전투 등에 참전하고 영남 및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 등을 수행한다. 1953년 9월에는 용맹성과 감투정신을 상징하는 맹호를 부대 표지(標識)로 제정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동해안 1군단에 배속되어 있던 1950년 10월 1일 수도사단 18연대는 제3보병사단과 더불어 38선을 돌파하였고 원산탈환작전을 거쳐 압록강변의 혜산진까지 진격한다. <일명 '백골부대'로 불린 '18연대'는 1950년 12월 제3보병사단으로 배속된다>
1965년 8월 한국군 최초의 해외파병부대로 베트남전쟁에 파병되어 10월 22일 베트남 중부 퀴논에 상륙하여 1973년 3월까지 참전하게 된다. 베트남전쟁 이후 1973년 3월 21일 한국군 최초의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베트남전쟁 파병 전 훈련과정에서 133대대 강재구 소령이 부하가 실수한 수류탄과 함께 산화한다.

★참전기간 : 1965. 9. 25 - 1973. 3. 7

★참전군인 : 114,902명 (장교 7,652명, 사병 107,340명)

★희생 : 전사 2,111명(장교 186명, 사병 1,925명) 부상 4,474명(장교 246명, 사병 4,228명)

★전투 : 175,107회 (대부대 전투 521회,소부대전투 14,586회)

▶ 군입대전 준비물, 군인겨울용품, 군용핫팻, 물집방지패드, 군인용품 판매점 정보 [AD]

▶ 군인화장품, 남성케어화장품, 계절별 군인용품, 부대직배송, 군인화장품 쇼핑몰 정보 [AD]


# 대한민국 육군 (ROK Army)



Blue Dragon(Korean:青竜、Hanja:青龙)
第二海兵師團, 영어: The 2nd Marine Division)
해병대 제2사단 또는 제2해병사단(第二海兵師團, 영어: The 2nd Marine Division)은 경기도 김포시에 사단 사령부를 두고 인천, 김포, 강화도 부속도서에 주둔하고 있는 대한민국 해병대의 사단이다. 이 사단의 상징이자 별명은 청룡(靑龍)이다.

1965년 9월 20일 창설되어, 1965년 10월 9일부터 1972년 2월 24일까지 여단으로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1981년 4월 16일 사단으로 증편하였다. 1987년 해병대 사령부가 재창설됨과 동시에 해군 제2해병사단에서 해병대 제2사단으로 공식 개명되었다.from wikipedia


http://blog.daum.net/ja0006/13862115








신화를 만드는 한국해병”: 청룡해병여단은 베트남 전장의 전설이 되다

[저자: James Durand 미해병 중령]




이봉출 해병준장이 한국해병 제2여단을 이끌고 베트남 캄란만에 상륙한 때는 1965년 10월 9일이었다.
한국군 최초의 전투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취재하기 위하여 몰려든 기자들에게 한국전 참전 경력을 가진
이봉출 준장은 이렇게 선언했다:

“여기서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이다: 전투이다”

이어서 이준장은 청룡부대를 구성하고 있는 제2여단 해병과 해군 및 육군병력들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
“언제, 어디서나” 즉각 싸울 준비가 되어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로부터 6년간 약 37,00명의 한국해병들은 이봉출장군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병력의 10%에 불과한 청룡부대는 숫자상 10%를 훨씬 상회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한국해병 스스로의 존재감을 떨쳐 보여 주었다.

베트남 전역으로 작전영역을 넓혀 가는 과정에서, 한국해병은 독자적 작전과 미해병과의 연합작전을 통하여, 한국전에서 보여준 한국해병의 희생의 정신과 용맹의 전통을 베트남에 와서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베트남전에서의 성공으로 해병대는 한국군내에서 새로운 임무와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한국 해병대의 황금기가 시작되는 첫 장을 열게 되었다.

청룡부대는 베트남에 파병된 최초의 한국군 부대는 아니었다.
베트남전에 대한 국제적 지원요청에 부응하여, 1964년 9월 13일 한국정부는 10명의 태권도 사범과
이동외과병원을 베트남에 파견했었다.

또한 가을 몬순 우기철의 심각한 홍수범람은 베트남 정부로 하여금 한국정부에 평화정착과
재건사업의 일환으로 공병부대의 파견을 요청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1965년 2월 2,400명 규모의 한국 군사지원단이 비엔호아에 도착했다.

비둘기부대로 불리는 군사지원단은 육군 및 해병공병중대, 이들을 지원하는 경비대대, 수송중대 및
지휘부 및 연락요원과 탱크수송선으로 편성되었다.
비둘기부대의 첫 한해 동안 공병대는 학교 4곳, 교량 3곳, 의무시설 2곳, 촌락 사무실 2곳 등을 건립했다.
이외에도 공병대는 다수의 재건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1965년 봄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군 보병전투사단의 베트남 파병을 선언했다.
이때 한국 해병대는, 김성은 전사령관이 국방장관직에 있음에 비추어, 베트남 파병부대 편성 시
해병대의 역할이 있을 것임을 예감하였다. 해병대 사령부는 해병대가 기여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은
5,800명 규모의 여단급 병력임을 상부에 권고하면서,

해병 제1상륙사단으로 하여금 1개 여단을 편성하여 베트남 파병준비에 들어가도록 지시해두었다.
국방부는 육군도 수개의 연대급 전투단을 해병여단의 편제와 유사하게 재편성하도록 지시하였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작전 시 김성은 장관이 지휘하던 해병대대의 한 중대장이었던
이봉출준장이 한국군 최초 베트남 파병부대의 초대 지휘관이 되었다.

제2해병여단은 제2해병연대의 3개 보병대대와 이를 지원하는 복합포병대대(105mm와 155mm),
중화기 중대, 항공분견대와 지휘부, 의무 및 경비중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육군은 해병여단에 155mm 포병대대와 공병중대를 지원하였고, 해군은 관례에 따라, 의사, 위생병 및
함상포격지휘장교 등을 보냈다.

해병대는 해병 제1상륙사단이 국가적 소명에 가장 먼저 응답하게 됨으로써,
다섯 명의 해병대 사령관이 내걸었던 “전투태세완비” 복무강령을 이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1965년 10월 캄란만에 상륙한 한국해병대는
미제101공정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받게 되면서,
당시 미군보급기지창으로서 비중이 급격히 커지고 있던
캄란항을 지키는 책임도 함께 인수하였다.

이때는 몬순 우기철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청룡부대는
새로운 환경이 주는 도전에 신속하게 적응해야만 했다.
폭우와 진흙탕 속에서,
청룡부대는 벌집처럼 엮어진 지하땅굴을 이용하여
“치고 빠지는” 전술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도주하는 적들을
추적해 나갔다.

청룡부대는 소규모 순찰대 운용에 주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연합군측으로부터 습득한 새로운 전술을
즉시 받아들여 통합 운용하여 나갔다.
와싱턴 작전기간 중 제2여단은 판랑 지역으로 공수되어
캄란공군기지를 위협하던 게릴라부대를 깨끗이 소탕하였다.

다시 캄란으로 복귀한 제2여단은 그간 불란서군이나
월남군이 끝내 실패하였던 작전임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Ca Tau산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11월 4일 Ca Tau산을 기어 오른 제2여단은 18년 동안 장악해온 견고한 진지에서 싸움을 걸어오는
적들을 하나씩 남김없이 소탕해 나갔다. 약 9시간의 전투 끝에 한국해병은 그 산을 확보하였다.

4일 후 제2여단은 여단규모로는 처음인 번개작전을 개시하였다.
청룡부대원들은 신속히 기동하면서 그간 연합군 시설을 정기적으로 공격해온 베트콩 게릴라들이
은거하고 있는 지역을 완전히 소탕하고 남부베트남의 간선도로인 1번 도로를 확보하였다.

한국해병들은 나트랑 공군기지를 내려다 보는 고지를 점령하고, 적들로부터 상당수의 중화기를
노획하였으며, 이로서 미공군 기지에 대한 위협은 제거되었다.
한국해병대의 참전 초기 활약의 결과로, 베트콩 사령관은 한국군부대와의 직접적 조우는 피하고,
한국군이 공격해오면 퇴각할 것을 예하 조직에 하달하였다.


10월이 되면서, 투이호아로 이동하여왔다.
그간 월맹정규군과 베트콩 비정규군은 풍부한 쌀이 생산되는 이 지역을 겨냥하고 있었다.
한국해병대는 월남 육군 제47연대와 함께 미해병대와 미육군 항공대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적으로부터 가을추수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청룡1호 작전을 전개하였다.

1966년 1월 16일까지 청룡부대는 Tuy Hoa지역에서 적을 소탕하고 월맹군 95연대를 격퇴하여
1번 국도를 확보하고 바다로부터 적이 침투하는 접근로를 봉쇄하였다.
청룡 1호 작전에 이어 청룡부대는 Tuy Hoa 지역에서 민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다수의 재건사업을 통하여 지역주민들로부터 신뢰를 얻게 되었다

1966년 11월 12일부터 제2여단은 해풍작전을 벌여,
해안지대에서 산속으로 도망친 다음 산속에서 은신하면서 공격하는 게릴라들을 추적하였다.
이 해풍작전에서 이인호대위?한국해군사관학교와 미해병대 기초교육과정을 이수한 보병장교-의
영웅적 행동은 한국군의 용감성에 대한 상징으로 떠오르게 된다.

8월 11일 청룡부대 제3대대 해병들은 포획한 2명의 여자 베트콩을 대대 정보장교인 이대위에게 데려왔다.
심문과정에서 여자베트콩은 그들의 본거지 위치를 자백했고,
자백한 여자베트콩은 이대위와 6명의 순찰대원을 어느 동굴 입구로 안내했다.

이대위와 부하들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자, 동굴 속에 숨어있던 게릴라 1명이 수류탄을 던져 올렸고,
이 대위는 이 수류탄을 바로 집어서 적들 쪽으로 다시 던졌다.
이 때 두 번째 수류탄이 날아왔다. 이 대위는 부하들에게 즉각 뒤로 물러설 것을 지시하며,
두 번째 수류탄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폭발하였다.

이 대위는 수류탄 파편을 온몸으로 받아 부하들을 날아오는 파편들로부터 보호하였으나
자신은 현장에서 산화하였다.
이 대위의 이야기는 한국 주요신문의 톱기사로 일제히 보도되었으며,
신문들은 사설에서 이대위의 덕목을 칭송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젊은 청년장교의 장렬한 희생에 깊이 감동한 박대통령은 이 대위의 가족에게
자필로 작성한 위로의 서신을 전달하고, 한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하였다.
미국 존슨 대통령은 그 해 가을 한국 방문 시 이대위의 미망인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전달하였다.


그 해 8월과 9월 제2여단은 반탄강 반도로 재배치되어 추라이 방어사령부산하 전술책임지역을 맡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해병대와 미국해병대가 1954년 3월 이후 처음으로 연합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또한 이것은 양국 해병부대 사령관간의 오랜만의 해후이기도 하였다.

미제3수륙양용사단장인 루이스 왈트 중장과 이봉출 준장은 버지니아 콴티코 소재 미해병학교의
동급생이었다. 청룡부대가 미제3수륙양용사단의 지휘를 받지는 않았으나 한미 영국해병은
기지방어에 있어 상호 조율하여 작전을 수행하였다.

추라이 도착직후부터 제2여단은 베트콩부대와 비정규 게릴라들로부터 촌락, 도로 및 수로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아오기 위하여 일련의 작전을 시행하였다.
단독작전이나 소규모 부대작전은 수많은 용감무쌍한 실전사례들로 특징 지워진다.
그러나 지덕철 해군중사와 비견할 만한 사례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강구작전 중이던 1967년 2월 1일 청룡 제2중대 제3소대는 어느 마을로 진입하던 중
베트콩의 매복에 걸렸다. 베트콩들은 한국해병들을 에워쌌고, 청룡의 피해는 커져만 갔다.
중대 위생하사관인 지중사는 부상한 해병들에게 달려갔다.
그 와중에 그는 적의 소총에 피격되었으나 자신의 부상에는 개의치 않고 세 사람의 부상병을 치료했다.

20명의 베트콩들이 한국군 쪽으로 접근하자 지중사는 소총사격으로 접근하는 적들 중 상당수를 쓰러트렸다.
구급헬기가 부상병 이송 차 도착했을 때 지중사는 헬기 탑승을 거부하고,
자신이 치료하던 해병부터 먼저 이송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부상당한 해병을 실은 헬기가 후방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숨을 거두었다.
전장에서 스스로 자신을 먼저 버린 그 용기를 인정받아, 지중사는 진급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가 받은 태극무공훈장은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해군이 받은 유일한 태극무공훈장이 되었다.





2월14일 이른 새벽에 약 2,400여명의 월맹 정규군이 청룡제3대대 11중대를 공격해 왔다.
당시 정경진 11중대장과 중대원은 짜빈동 외곽의 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월맹정규군이 11중대 3소대
방어망을 돌파했을 때 한국군은 야전삽, 곡괭이와 맨주먹으로 싸웠다.

신원배 소위는 화기분대를 지휘하여 방어선 100미터 후방에 위치한 적의 박격포 분대를 타격하였다.
기관총을 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신소위와 오성환하사는 월맹군을 사살하였으며,
소대원을 재규합하여 방어망을 복구하였다. 월맹군이 마지막으로 중대기지 진입을 시도하였을 때
한국해병대는 적들을 정통으로 타격하여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

패주하는 월맹군은 243구의 시체를 남겼으며 그 중 100구의 시체는 한국군 방어망 내에서 발견되었다.
11중대는 15명의 해병을 잃었다. 짜빈동 전투에서 패한 월맹군은 다음 공격목표로 삼았던 쾅나이 시와
추라이 미해병기지에 대한 공격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정부는 베트남 참전기간 중 짜빈동 전투 승리에 가장 많은 훈장을 수여하였다.
박대통령은 짜빈동 전투에 참여한 사병 전원에게 일계급 특진시켰다.
이러한 부대단위 진급은 한국전 이후 처음이었다.
정경진 중대장과 신원배 소위는 각각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는 한번의 전투에서 두 사람에게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또한 11중대는 한국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각각 부대 표창장을 받았다.
외신기자들에 대한 브리핑직후 “신화를 만드는 해병”이란 문구가 미디어에 등장하면서,
청룡여단은 한국전에서 얻은 “귀신 잡는 해병”과 “무적의 해병”의 유산을 계속 이어 가게 되었다.


짜빈동 전투가 끝난 후 수개월 동안 청룡여단은 일련의 적군 소탕작전을 계속해 나갔다.
한국해병대는 미해병대, 미육군 그리고 월남육군과 공조하여 가면서,
얼기설기 얽힌 복잡한 해안지형과 산악 속 자연동굴을 게릴라 전투기지로 삼아 교묘하게 활동하는
적들을 사냥하였다.

청룡여단의 소총수들은 한국전이래 사용해왔던 제2차대전형 MI Grand소총을 반납하고 M16을 지급받았다
신형무기는 지급받았지만, 작전은 만만치 않았고 그 진척도를 평가하는 것은 더욱 난감할 따름이었다.
용두2호 작전을 수행하던 1967년 7월 1일은 예외였다.
한국해병대는 월맹군 제2사단 지휘부 위치를 포착했고 무기와 탄약 그리고 350톤의 식량을 노획하였다.
그 해 늦은 여름 한국해병 제5대대가 베트남에 도착하면서, 청룡의 심장박동은 4개 보병대대로 강화되었다.


1967년 하반기 청룡 제2여단은 호이안 외곽지역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청룡은 베트남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청룡여단은 1968년 구정공세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 호이안으로 이동을 완료하고,
곧이어 시작된 월맹군 제3사단의 대규모공세를 한달 간의 혈투 끝에 격퇴시켰다.

구정공세 전투에 뒤이어, 한국해병대는 쾅남성 전역에서 1968년 6회, 1969년 12회에 달하는
일련의 작전을 수행하였다. 한국해병은 외곽지역의 촌락에서 베트콩을 몰아내기 위하여
공세적인 순찰을 반복적으로 시행하였다. 동시에 한국군은 민사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장교와 하사관을 선발하여 월남어 통역으로 훈련시킨 다음 각 중대 별로 1인씩 내려 보냈다.

한국군은 부대단위 별로 촌락과 학교와의 연결고리를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노인들을 대접하고 존경심을 표시하면서, 농번기 모심기를 지원하고, 태권도 시범을 보이는 방법으로,
한국해병대는 월남사람들의 지원과 신뢰를 얻기 위해 애를 썼다.




1969년 여름 해병여단은 미해병대와 월남육군과 함께 월맹군 지뢰, 부비트랩 그리고 땅굴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Go Noi 섬에서 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연합군의 11개 보병대대 병력은 화씨 115도의 폭염, 뱀 그리고 질병을 견뎌가면서
베트콩의 지하 기반시설을 제거하기 위하여 5개월 동안 작전지역을 휩쓸었다.

1969년 9월 12일 한미 양국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이래 처음으로 합동 수륙양용공격작전을 전개하였다.
Defiant Stand로 불린 이 작전은 베트남 전쟁의 마지막 특수상륙작전이었다.

한국해병대가 베트남에서 보여준 성과는 이후 한국에서 해병대의 지위와 역할을 크게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해병 제5여단은 1966년 11월 창설되어, 곧 바로 김포반도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간 김포반도를 방어해온 제1해병예비여단은 포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무기와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해병 제2대대, 해병제3연대를 “99부대”로 명명하고,
대통령의 진해해군사령부 방문 기간 중 요인 경호임무를 부여하였다.
1967년 한국해병대는 사령부와 해병대학을 설치하고, 모든 훈련과 교육과정을 해병대사령부산하로
통합시켰다. 그 해 한국해병대사령관은 4성 장군으로 승격되었다


언론의 호의적 보도는 해병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우수한 청년들이 육, 해, 공, 해병대중 가장 규모가 작은 해병대로 몰려들었다.
사상 처음으로 해군사관학교 졸업생들은 직업군인으로서 해병대를 선택하기 시작하였다.
해병대 체육팀은, 다른 군과 대학팀들과 맞붙어서, 사격, 축구, 야구 및 태권도에서
전국 선수권을 석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병대 생활의 기본은 변함이 없었다.

모든 장교와 중견하사관들은 베트남에서 1년간 복무해야 되었다. 많은 해병들이 재파를 원했다.
사병들은 의무복무연한을 채우기 위하여 3년간 근무하기도 하였다.
군기는 절대적이었고, 훈련은 기본과정에 주안점을 두었다.
베트남에서의 경험에 기초하여, 무술연마 정도가 전투 준비태세 측정단위로 추가되었다.


1971년 11월 박대통령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청룡부대가 가장 먼저 철수하는 부대가 되었다.
그 해 12월 수개 해병대대가 최초로 베트남을 떠났고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해병대대는
1972년 2월 22일 베트남을 떠났다.

6년 5개월간 37, 304명의 해병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그 중 1,075명이 전사하고 2,884명이 부상을 입었다.
청룡부대가 입은 사상자비율은 여타 한국군 부대의 그 것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해병제2여단은 1972년 3월 12일 해체되었다.

인명의 피해와 사이공정부의 몰락을 보면서,
한국해병들은 자신들의 베트남 참전을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면서 발전을 지속해온 한국 성장과정의 일부라는
보다 큰 시각에서 대국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베트남 전장에서 체득한 실전경험에 힘입어 한국해병대는
한반도를 방어할 수 있는 역량을 크게 진전시킬 수 있었다.
베트남전쟁은 모국이 직면하고 있는 공산주의 세력의
위험성을 각인시켜주었고, 동시에 한국의 군사적 힘을
우방과 적군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확인시켜주었다.

한국의 베트남 참전은
한국의 산업과 경제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베트남에서 해외사업 추진경험을 쌓은 한국기업들은 오늘날
수출주도 한국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청룡부대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지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들이 베트남에서 보여준 활약상은
한국의 새 세대 해병들에게 커다란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
'이인호'소령의 동상이 서있는 해군사관학교 정문에서는
매년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린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밟아 해군사관학교로 온 다음 해병대로 가서 복무 중이다.
신원배 중장은 해병대에 몇 안 남은 마지막 월남참전군인으로 그 역시 조만간 퇴역할 예정이다.
태극무공훈장수훈자가 해병 제2여단의 핏줄을 이어받은 해병 제2사단을 지휘하고 있다.

오늘날의 청룡부대원들은 그들의 선배들이 월남전장에서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의 헌신으로
강화도와 김포반도를 방어하고 있다.


(저자소개: Durand중령은 미국 해병대 정보 및 대외관계 담당 장교이다. 그는 5년간 한국에서 근무했고
한국해군대학 졸업생이기도 하다)

(한국어번역: 베트벳 id 투이호아 / spark1196@gmail.com">spark1196@gmail.com )






韓国軍によるベトナム人大虐殺は推定で30万人、混血児(ライタハン)の深刻な背景

ベトナム戦争で有名な住民虐殺は昭和43年(1968年)3月16日の米軍ソンミ村虐殺事件が挙げられますが最も残虐だったのは韓国兵だったと言われています。
南ベトナムクアンナム省フォンニィ・フォンニャット村の虐殺、ハミの虐殺、ゴダイの虐殺、タイヴィン虐殺をはじめ村々で化学兵器まで使用して住民を殺戮しました

この種の証言はベトナムでも韓国でも何人かに尋ねてみれば数多く聞き出せるといいます。
韓国軍の「フィアス・タイガー(猛虎師団)」「ブルー・ドラゴン(青竜師団)」が最も残忍無比だったと言われ"索敵殺害" - "殺しつくせ、焼きつくせ、破壊しつくせ"という作戦の中で老若男女問わず赤ん坊まで殺戮しました。
ベトナムの退役軍人の人は次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
「韓国兵に会ったら、死に出会ったも同然だった」。

韓国軍はとりわけ女性にとって恐怖の的でした。韓国兵は残忍なやり方で女性をレイプしてから殺すのです。
韓国軍人によるベトナム人大虐殺は推定で30万人を超すと言われています。
韓国軍はベトナム戦争で、現地人を相手に残虐なレイプや虐殺などの蛮行を重ねました。 韓国軍向けの慰安施設もあったのですが、それで満足出来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
現地に五千から七千以上の混血児(ライタハン)を残しました、アメリカは戦中の責任をとり混血児を国内に受け入れる政策をしたのに対し韓国はまったく対処をしませんでした。
日本軍従軍慰安婦と騒ぎ立てる韓国自身が過去の清算を否定する皮肉な現実があるのです。

参考文献

講談社文庫「コリアン世界の旅」野村進(著)
ニューズウィーク日本版2000年4月12日号「私の村は地獄になった」
草思社「親日派のための弁明」金完燮(著)
新時代社「朝鮮 新たな危機の内幕」D・W・W・コンデ(著)岡倉古志郎(訳)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인대 학살은 추정으로 30만명, 혼혈아(【라이타한】)이 심각한 배경

베트남전쟁으로 유명한 주민학살은 쇼와(昭和)43년(1968년) 3월16일의 미군【손미】촌 학살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만 가장 잔학했던 것은 한국병이었다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남【베토나무쿠안나무】성【폰니】·【폰낫토】촌의 학살, 하미의 학살, 【고다이】의 학살, 【다이뷘】학살을 비롯해 마을들에서 화학 병기까지 사용해서 주민을 살륙했습니다

이 종류의 증언은 베트남에서도 한국에서도 몇사람인가에게 물어 보면 많이 캐 물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군의 「【피아스】·타이거(맹호사단)」 「블루·드래곤(파랑용사단)」이 가장 잔인무비이었다라고 말해져” 적을 색출함 살해”-” 죽여 최선을 다할 수 있고, 전부 태워버려라, 다 파괴해라”이라고 하는 작전 안(속)에서 남녀 노소 막론하고 갓난아기까지 살륙했습니다.
베트남의 퇴역군인의 사람은 다음과 같이 함께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한국병을 만나면, 죽음을 만나나 서로 같았다」.

한국군은 특히 여성에 있어서 공포가 과녁이었습니다. 한국병은 잔인한 방식으로 여성을 강간하고나서 죽이는 것입니다.
한국 군인에 의한 베트남인대 학살은 추정으로 30만명을 넘는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한국군은 베트남전쟁으로, 현지인을 상대에게 잔학한 강간(rape)이나 학살등의 만행을 거듭했습니다. 한국군에 적합한 위안 시설도 있었던 것입니다만, 그래서 만족할 수 없었습니까?
현지에 5000로부터 7000이상의 혼혈아(【라이타한】)을 남겼습니다, 미국은 전시의 책임을 져 혼혈아를 국내에 받아들이는 정책을 한 것에 대해 한국은 완전히 대처를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종군 위안부와 소란피우는 한국 자신이 과거의 청산을 부정하는 얄궂은 현실이 있습니다.


http://sfin.egloos.com/4538404


현재는 수기사(수도 기계화 사단)으로 잘 알려진 맹호부대의 사단 마크 입니다.

베트남 현지에서 제작 된 것으로 호랑이의 얼굴이 상당히 박력있게 표현 된 탓에 외국의 군장 수집가들에게도 상당히 인기있는 품목 입니다.
http://www.vnweblogs.com/post/13176/273519

Crimes of KOREAN SOLDIERS,memoir of Kim Jin Sun

TỘI ÁC DÃ MAN CỦA LÍNH HÀN QUỐC
Chung | xuanlinh39 | January 08, 2011,22:58

Hồi Ký của Kim Jin Sun
Hwang Sang Cheol
29 tháng 7, 2010

(sachhiem.net)



LTS: Tiếp theo tập hồi ký của Kim Jin Sun, (bấm vào chữ để xem bài) chúng tôi nhận được bản tiếng Anh của bài tiếng Hàn do tướng về hưu Kim Ki Tae viết. Ông kể lại những vụ thảm sát dân lành ở Việt Nam trong thời chiến của thế kỷ 20, lúc quân Đại Hàn đi theo gót chân của quân "đồng minh" với Hoa kỳ cùng nhau kéo vào miền Nam Việt Nam để "tiêu diệt Việt Cộng". Như thế là nội chiến hay sao?
Quân đội ngoại quốc là chủ chốt trong cuộc chiến Việt Nam. Đây là sự thật không ai có thể chối bỏ. Đây là những sự thật mà nhiều người không muốn biết có lẽ vì quá mức có thể tin được. Ngày nay có nhiều người nhắc đến chữ "Sự Thật", nhưng lại không muốn nhớ đến nhiều sự thật làm cho những điều họ muốn nói trở nên kém quan trọng.
Xin bạn đọc thân hữu giúp gửi cho bản tiếng Việt nếu đã có sẵn để chúng tôi khỏi mất thêm thời gian dịch cho bà con Việt Nam đọc. Cám ơn nhiều. (SH)
Bổ túc ngày 02 tháng 8, 2010: Tòa sọan nhận được sự đáp ứng, xin thay mặt độc giả gửi lời cảm ơn dịch giả Nguyễn Trí Cảm. Những bức hình đều là tài liệu giải mật để minh họa bức tranh thật của cuộc chiến, nhưng không nhất thiết cùng địa điểm mà tác giả đề cập trong bài. (SH)

Một đại tá về hưu, Kim Ki Tae, kể về việc các binh lính Đại Hàn giết hại thường dân Việt Nam một cách có hệ thống trong thời kỳ Chiến Tranh Việt Nam.
Hwang Sang Cheol/ rphóng viên của tạp chí The Hankyoreh21
Yoon Yong Ah dịch từ tiếng Hàn sang Anh ngữ - Nguyễn Trí Cảm Việt ngữ
Nguồn http://tw.myblog.yahoo.com/jw!Xm47dpuEA0b9oUG3.NW4mJk-/article?mid=604
Ai giết ai ?
Binh lính Đại Hàn giết quá nhiều người Việt Nam, nhưng chẳng có người lính Đại Hàn nào thú nhận là có sự tham dự của họ trong những cuộc chém giết này.
Có phải mọi chứng cứ của các nạn nhân thường dân Việt Nam của việc thảm sát là không đúng sự thật ?
Và bài tường thuật trong tám tháng của tạp chí Hankyoreh21 không gì khác hơn là sự phóng đại ?
Và không một cựu chiến binh can đảm nào sẽ kể lại câu chuyện thật của những gì đã xảy ra ?
Chúng tôi xin hân hạnh giới thiệu Kim Ki Tae, một đại tá đã về hưu 65 tuổi, người từng là đại úy lính thủy quân lục chiến nằm ở tuyến đầu trong một năm, trong cuộc Chiến tranh Viêt Nam .
Ông chia sẽ với chúng ta tất cả kinh nghiệm của mình trong suốt thời gian quân ngũ ở nơi đấy. Ông tiết lộ các câu chuyện tàn ác của lính Đại Hàn là sự thật

Ngay cả chúng tôi, ngay chính người tường thuật về sự tàn ác, không khỏi nghi ngờ sự thật này.
"Có phải quân lính Đại Hàn thật sự giết hại những thường dân vô tội Việt Nam một cách có hệ thống?"
"Có khả năng quân lính Đại Hàn bắn những người phụ nữ không vũ trang và con cái của họ không?"
Kim Ki Tae, một cựu chiến binh của cuộc chiến Việt Nam, đã thảo luận tất cả vấn đề này với thái độ điềm tĩnh và chân thành. "Tôi nhận được lệnh giết những thường dân Việt Nam và cũng chính tay tôi bắn họ trong thời kỳ Chiến tranh Việt Nam"
Chúng tôi gặp ông ta trong một buổi tổ chức họp mặt kỷ niệm năm thứ 25, ngày chấm dứt cuộc Chiến tranh Việt Nam.
Tạp chí The Hankyoreh21 sẵn sàng chia sẻ với thế giới những chứng cứ chân thật của ông Kim.
Một hố bom ở Việt Nam. Kim nhớ đến hố bom được tạo ra từ chiến đấu cơ ném bom F 4 của Mỹ để lại.
Một hố bom khổng lồ rộng khoảng 7 đến 8 m và sâu khoảng 3 hay 4 m. Ông ta cho rằng quả bom được làm ra (có trọng kượng) khoảng 500 cân Anh (227 kg).
Tiếng nổ của bom phải xé toạc màng nhĩ và quét sạch mọi thứ trong vòng bán kính 5 dặm (# 8 km). Ông ta nói rằng ông không thể nào quên việc gì đã xảy ra trong hố bom ấy.


Khi trời mưa, trong hố bom........
Vào lúc 2 giờ chiều ngày 14 tháng Mười một năm 1966, Kim đang đứng trong cánh đồng lúa, gần một ngọn đồi phía tây Sơn Tịnh, Quãng Ngãi, miền Trung Việt Nam. Vào thời điểm này, Kim Ki Tae 31 tuổi, là đại úy của Đại đội 7, Tiểu đoàn 2 của Đơn vị Rồng Xanh, gặp phải phiền phức. Một trong những người chỉ huy trung đội yêu cầu anh ta canh chừng những người Việt Nam đang bị bắt giữ. Kim thấy 29 người đàn ông Việt Nam, có lẽ vào khoảng 20-30 tuổi. Tất cả tay của họ bị trói lại với nhau bằng dây thừng. Kim cảm nhận tất cả bọn họ đều sợ chết khiếp. Những thanh niên Việt Nam bị bắt trong cuộc lùng sục các hầm hố sáng hôm đó. Dù rằng cuộc lục soát đã kỹ càng, đơn vị của Kim đã thất bại trong việc phát hiện quân lính (Việt Cộng) trong những hầm hố nơi mà họ phát hiện ra những thanh niên Việt Nam. Người của Kim đang thực hiện cuộc hành quân cuối cùng trong giai đầu của kế hoạch Mắt Rồng (Yong Anh).
Đại đội của Kim cách xa Quốc lộ 1, con đường nối liền Hà Nội và TP. Hồ Chí Minh khoảng 7-8 §° . Mỗi khi hoàn tất công tác , Kim dự định trước tiên là đưa những người Việt Nam bị bắt sang trại tập trung, nhưng Đại đội 7 nhận được lệnh khẩn cấp đi giải cứu Đại đội 6, Đại đội này đang bị du kích tấn công. Họ không có thời gian để đưa những người bị bắt đến trại tập trung. Kim mô tả tình huống một cách đơn giản bằng cách nói "Không có cách nào khác!" Tất cả lính tráng của ông ta đang ở trong tình huống cam go. Cuộc hành quân truy lùng sáu ngày trong rừng nhiệt đới đã biến quân phục của họ tả tơi và làm cho họ giận dữ, Kim ra lệnh ngắn gọn. ""Mang những người Việt Nam đi chỗ khác." 29 người đàn ông Việt Nam với tay bị trói, những người không có ý niệm về số phận của mình sẽ ra sao, bị tống xuống hố bom. Tiếng súng của lính Đại Hàn vang lên "bang, bang, bang", và tiếng nổ của lựu đạn ném tay xé toạc không gian. Kim có thể nghe tiếng rên rĩ của những người bị thương và mùi của máu. Kim ra lệnh lần nữa "Dứt điểm toàn bộ". Lệnh của Kim bắt lính tráng lục soát những thây người chết và bắn họ thêm lần nữa để cho chắc không ai còn sống sót.


Trong các chiến trường của cuộc Chiến tranh Việt Nam, Đại úy Đại đội trưởng nắm giữ cấp bậc cao nhất và có thể có toàn quyền ra những quyết định quan trọng. "Lời nói hay cái nhìn của tôi có thể làm cho nhiều người được tự do hay có thể giết họ trong cuộc Chiến tranh Việt Nam. Nếu tôi nói "thả những người bị bắt ra; họ sống sót, nhưng nếu tôi nói ‘"Này mấy ông, mấy ông giữ làm cái quái gì những người bị bắt," lính của tôi sẽ mang họ ra nơi khác để bắn bỏ. Kim nói: "Tôi nghĩ những người bị bắt, bị giết chết trong hố bom có thể là những nông dân."
Kim dở bàn đồ tác chiến của kế hoạch Mắt Rồng (Yong Anh) trong cuốn sách, "Lịch sử Chiến tranh của Quân đội Đại Hàn Trong Thời kỳ Chiến tranh Việt Nam" và chia sẻ chi tiết nhiều câu chuyện về những trải nghiệm của ông ta ở đó. Kế hoạch Mắt Rồng (Yong Anh) là một "cuộc hành quân quét sạch" du kích Việt Cộng do Tiểu đoàn 1,2 và 3 của Đơn vị Rồng xanh tiến hành từ ngày 9-27 tháng Mười một năm 1966. Kim kể cho chúng tôi nghe về những trải nghiệm của ông trong giai đoạn đầu của kế hoạch ... do Tiểu đoàn 2 ( 9-14 tháng 11) thực hiện.
Bắt Đầu Quét Sạch
"Trước cuộc hành quân, Viên chỉ huy Lee Myoung Bok và tôi khảo sát địa điểm hành quân từ máy bay trực thăng. Nhìn xuống khu vực bên dưới, tôi nghĩ rằng nó có vẻ như một vùng đất bình yên nhất trên thế giới. Các ngọn núi được cây cối um tùm che phủ, và các bác nông dân đang lao động với lũ bò trên những cánh đồng lúa của họ. " Nơi đây sẽ bị chiến tranh tàn phá khủng khiếp trong 19 ngày tiếp đến. Dựa theo cuốn "Lịch sử Chiến tranh của Quân đội Đại Hàn Trong Thời kỳ Chiến tranh Việt Nam" , nó tiết lộ rằng cuộc giao tranh của kế hoạch ..là hết sức ác liệt vì không thể tiên đoán được sức mạnh kháng cự của địch quân. Vì thế viên Chỉ huy Lee Bong Chul quyết định kéo dài cuộc hành quân mà lúc đầu là kế hoạch 4 ngày và hai giai đoạn đến vô hạn định.
Đó là vào ngày 10 tháng Mười Một năm 1966, ngày thứ hai của kế hoạch Mắt Rồng (Yong Anh), và 4 ngày trước cuộc thảm sát trong hố bom do đại đội của Kim thực hiện. Đại đội 7 đến làng An Tuyet 3, mục tiêu tấn công 13 trên bản đồ tác chiến. Lính của Kim không gặp sự kháng cự nào khi đi ngang qua đó. Tại làng An Tuyet 1, mục tiêu tấn công 14, Kim nói, có một chút ít kháng cự nhưng không có gì nghiêm trọng. Trong cả hai cuốn sách "Lịch sử Chiến tranh của Quân đội Đại Hàn Trong Thời kỳ Chiến tranh Việt Nam" và "Lịch sử Chiến tranh của Thủy Quân Lục Chiến Ở Việt Nam" bạn sẽ không tìm thấy bất kỳ sự đề cập nào về trận chiến của Đại đội 7. Kim cũng nói thêm rằng ông và lính của ông khó thật sự gọi là bị dân làng hay du kích Việt cộng nằm trong làng bắn. Ngay cả lính của ông không bị thương ở làng An Tuyet. Kim nói, dù rằng không có giao tranh, việc "quét sạch" ngôi làng vẫn diễn ra.
"Quét sạch" là gì" Kim nói, "quét sạch" là đốt trụi tất cả các ngôi nhà trong làng và bắn những người thoát chạy ra khỏi đám cháy. Xóa sạch hoàn toàn một ngôi làng ."
Ngôi làng kế tiếp mà Kim xâm nhập chỉ là một ngôi làng nhỏ, gồm khoảng chừng 30 - 40 căn nhà lợp tranh. Theo sau Trung đội 2 và 3, những người chỉ huy của Đại đội 7 vào làng. Kim chỉ có thể nhìn thấy những căn nhà đang bốc cháy, trẻ con, đàn bà, và những người già bị tàn sát với những cái đầu vỡ nát từng mảnh và những cánh tay bị bức rời ra khỏi cơ thể của họ. Kim cũng thấy một đống xác chết người Việt Nam. Ông đi dọc theo con đường hẹp, ra xa khỏi những ngôi nhà đang bốc cháy, và bước đi cũng chẳbg thể dễ dàng gì nếu như không phải bước qua những đống xác chết của quá nhiều xác người trên đường. Ông ta hét to với những người sĩ quan chỉ huy đang tiến tới gần trong tuyệt vọng. "Đừng giết nữa, đừng giết nữa!"
Kim nói ông ta không thể đếm chính xác số xác chết, nhưng có thể khẳng định mình đã chứng kiến số lượng người chết khủng khiếp của những ngôi làng trên đường. Ông nói thêm rằng, không có cách nào khác để tiến tới trước mà không phải bước qua xác họ. Giả định rằng ông ta không thể nhớ lại chính xác ngày tháng. Kim bắt đầu kể câu chuyện về một người phụ nữ Việt Nam ở An Tuyet (1). (Câu chuyện này về một người phụ nữ Việt Nam có thể là bằng chứng thuyết phục để củng cố thếm chứng cứ của các nạn nhân Việt Nam). Sau khi tập trung dân làng lại một chỗ ở An Tuyet, Kim phát hiện ra một người phụ nữ xinh đẹp, tuổi khoảng 20-25, mặc quần áo tuyền đen. Một trong những người lính của Kim hỏi người phụ nữ chồng của chị ta ở đâu. Người phụ nữ trả lời rằng bà ta không biết. Ngay sau đó, người lính của Kim hét lên, "Đồ chó cái! Đại úy, mụ này phải là vợ của Việt Cộng."
Ký ức của Kim về người Phụ nữ Việt Nam
Cô ta mặc bộ đồ bên trong màu trắng, được sản xuất ở Pháp. Bởi vì bộ quần áo trong đắt tiền ấy, lính của Kim viện dẫn rằng cô ta là vợ của một cán bộ chỉ huy Việt Cộng. Sau đó, người lính lấy súng dộng vào trán người phụ nữ. Kim hồi tưởng lại tình huống, "Máu chảy dầm dề từ trán của bà ta. Tôi cảm thấy ân hận cho bà ấy. Tôi ra lệnh lính cứu thương chăm sóc cho bà ấy." Vì do không có thuốc gây tê, người lính cứu thương bắt đầu khâu vết thương chỉ bằng kim và chỉ thông thường. Trong thời gian chăm sóc vết thương, người phụ nữ không hề rên rĩ, mà chỉ đứng với đôi môi cắn chặt lại vào nhau. "Quan sát người phụ nữ, tôi nghĩ " người phụ nữ oán hận chúng tôi đến mức nào, ngay cả không hề than van" Người phụ nữ gây ấn tượng cho tôi đến mức tôi vẫn còn nhớ việc xảy ra này".
Trong cả hai cuốn sách "Lịch sử Chiến tranh của Quân đội Đại Hàn Trong Thời kỳ Chiến tranh Việt Nam" và "Lịch sử Chiến tranh của Thủy Quân Lục Chiến Ở Việt Nam" chỉ rõ rằng Đại đội 7 tấn công mục tiêu 13 và 14, tiến hành cuộc hành quân đánh chặn cho Đại đội 5, và chuyển quân qua làng Vinh Loc 2 vào buổi trưa. Sau đó họ có một cuộc giao chiến ác liệt với Việt Cộng vào đêm đó.
Kim kể thêm một câu chuyện. Ông ta nhớ lại đại đội của mình tấn công một ngôi làng khác ở mạn phía tây trước cuộc hành quân đánh chặn. Khi đại đội của Kim tiến tới một ngôi làng nào đó không rõ, ông đã thấy một nhóm người Việt Nam ngồi dưới đất, bị lính của ông ta vây quanh. Bởi vì theo lệnh trước đó của Kim, cấm không được giết người thêm nữa, những người lính không giết họ và chỉ tập trung dân làng ngay tại con đường dẫn vào làng. Những người lính đang đợi Kim. Có vẻ như có khoảng 40-50 người bị gom lại. Một số lính của Kim hỏi dân làng tên của họ và cho họ một ít kẹo và thuốc lá. Hầu hết những người này là phụ nữ, trẻ con, và người già. Trước khi rời khỏi làng, Kim ra lệnh cho trung đội võ trang đi theo không được giết họ. Khi ông ta đang đi qua làng, ông ta nghe một tràng súng nổ vang. Kim hét với trung đội "Các anh làm cái quái gì vậy?". Ngay đó, những người lính nói "Thưa ngài, chẳng có gì đặc biệt cả". Sau đó có tiếng lựu đạn nổ xoáy vào màng nhĩ . Kim lại hỏi "cái quái gì nữa vậy?". "Chẳng có gì cả, thưa ngài." Kim nghe tiếng rên rĩ và kêu khóc của người bị thương, Kim nghĩ rằng sự việc đã quá muộn rồi. Kim thay đổi lệnh. "Làm cho gọn sạch vào!"
Ông ta chứng kiến một người Việt Nam chạy trốn vào ruộng mía, và người của ông ta rượt theo để bắn người chạy trốn. "Một khi đã bắn một thường dân vô tội, chúng tôi không thể không giết tất cả bọn họ". Bởi vì một người còn sống sót có thể làm nhân chứng về những việc làm sai quấy của chúng tôi, tôi phải ra lệnh như vậy với tư cách là một đại úy, "Dứt điểm toàn bộ." Điều đó có nghĩa là bắn tất cả bọn họ thêm lần nữa để bảo đảm rằng không ai còn sống sót. Bởi vì tôi chưa bao giờ nghe bất kỳ bằng chứng hay báo cáo nào về những cuộc giết chóc của chúng tôi. Tôi đoán rằng tất cả dân trong làng ắc là đã bị giết hết cả.
Chiến tranh có thể biện minh cho tất cả hành động sai trái trong cuộc chiến ?
Câu chuyện của Kim thật sự có ý nghĩa. Nhiều cựu chiến binh trong cuộc Chiến tranh Việt Nam mà tạp chí Hankyoreh21 gặp, viện dẫn rằng không có các cuộc giết chóc có hệ thống do các binh sĩ Đại Hàn trong cuộc Chiến tranh Việt Nam, "Chỉ khi chúng tôi bị du kích Việt Cộng bắn, và khi chúng tôi thấy dân chúng chạy trốn trong các cuộc hành quân của chúng tôi thì chúng tôi mới bắn họ."
Kim tiết lộ rằng có nhiều khả năng là có một hệ thống giết chóc. Ông ta nói, "Bất cứ khi nào chúng tôi vào thám sát các làng mạc, chúng tôi luôn luôn tập trung dân làng lại một chỗ. Sự quyết định giết họ hay không hoàn toàn tùy thuộc vào viên đại úy. Bất cứ khi nào binh lính của chúng tôi bị thương hay bị chết, để trả thù, chúng tôi phải giết số dân làng bị tập trung lại. Không phải chỉ có lệnh trực tiếp của viên đại úy, mà cũng còn của binh sĩ nếu họ nghĩ rằng viên đại úy không thể xử lý dân làng, binh lính bắn dân làng. Họ cũng không bao giờ quên bắn thêm lần nữa để cho chắc ăn." Kim nói rằng câu chuyện của ông ta là câu chuyện của sự thật, nhưng ông ta cũng thêm vào rằng điều đó (giết dân làng) là điều phổ biến hơn là để cho những người Việt Nam bị bắt được thả tự do. Kim nhớ lại một người lính mới không thể bóp cò súng vào một người bị nghi là Việt Cộng trước kia, nhưng giờ đã quen giết người. "Sau khi cậu ta cho những đứa trẻ con Việt Nam 5 -6 tuổi kẹo và thuốc lá, hắn bắn bọn trẻ vào giữa ngực, và sau đó đá chúng ra xa. Tôi ngạc nhiên với hắn và hỏi tại sao hắn lại giết bọn trẻ con vô tội như thế. Cậu ta trả lời "À, bởi vì chúng có thể là trẻ con của Việt Cộng, tôi phải ngăn ngừa sự trả thù trong tương lai của chúng! Một khi lính tráng giết người và chôn những xác chết, mọi người bắt đầu nghĩ rằng giết người trong chiến tranh là điều tự nhiên."

Trong thời gian chiến tranh, giá trị của cuộc sống con người là gì? Người ta nói rằng những người chưa từng trải nghiệm qua một cuộc chiến, không thể tưởng tượng ra sự thật của chiến tranh. Điều này có cho phép chúng ta biện minh cho những hành vi sai trái của binh lính Đại Hàn trong cuộc Chiến tranh Việt Nam, nhân danh chiến tranh? Hay chỉ vì nó là quá khứ, chúng ta có thể che giấu tất cả các việc làm sai trái đầy hổ thẹn dưới cái tên lịch sử?
SG, 8-2010
Nguyễn Trí Cảm phỏng dịch

Sau | Trước | góp ý (1) | Trackbacks (0) | Bản in

góp ý
đề nghị
nguyễn văn Hiên | 08/10/2012

Tôi là người yêu nước, căm thù giặc giã man đã giết hại đồng bào ta trong chiến tranh. nhiều lần lên mạng tìm những bài viết về tội ác của chúng. Đọc xong bài viết này tôi càng thấm thía và thương cảm cho những người đã bị chết oan uổng bởi tội ác của chúng gây ra. nhất là với trẻ em, người già và phụ nữ. Tôi mong các nhà báo, nhà văn, những nhân chứng, hãy xưu tầm nhiều câu chuyện lịch sử về tội ác của chúng cho thế hệ sau này thấm thía vì được sống trong hòa bình. Cảm ơn tác giả nhiều.

Truth Commission Should Be Truthful

Truth Commission Should Be Truthful
http://www.tomcoyner.com/truth_commission_should_be_truth.htm
By Michael Breen
Korea Times
Nov. 16, 2006

(Coyner's Comment: Once again, Mike Breen should be commended for getting this kind of issue out for discussion. I, too, have my own personal tale regarding this sordid matter.

While I was still in Peace Corps, I proposed marriage to the same nice lady who is (unbelievably) still my wife. Right after making the marital offer, I took off on a trip to the Philippines with a Peace Corps buddy who was still uncommitted. In the typical playful banter of the Filipinos, we two young men were often teased as to our availability. My buddy was in one of the better locations of the world to proclaim that he was "still negotiable," whereas I was pretty happy about just popping the question and getting a positive answer.

When the Filipinos discovered that I was marrying a Korean, a couple of times they recoiled in horror, asking why would I want to do that ? I soon learned that the Korean jailers were infamous for their sadistic treatment of Filipino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the Philippines. And at least as late as the mid 1970's, that horrible image of Koreans remained with many Filipinos. As much as they detested the Japanese, many Filipinos hated the Koreans even more for their sadism and unnecessary cruelty.

Mike's explanation for the Korean behavior is what I guessed some 30 years ago. It's interesting to read some validation of my old assumption.)

At my father's funeral in England some time ago, I fell into conversation with his closest friend. They had worked together in a local bank. After some words of condolence, he asked if I was still living in Korea. ``Yes, I am,'' I said. By that time, I had been in Seoul for 18 years. It was more familiar to me than England. ``What do you think of the Koreans?'' he asked. I waxed lyrical about the Irish of the East. After a minute, I knew I had lost my audience. ``Maybe they have changed from my time,'' he said.

Then he told me his story. He had met his Koreans in the 1940s, when he was a prisoner of war under the Japanese. Like thousands of other young British and allied soldiers in World War II, he had been captured in Southeast Asia. The Japanese were unspeakably cruel to those they defeated. I worked in London once with a man who had, as a POW, witnessed guards executing a lineup of Australians with a bayonet up the rectum. Many of the Japanese guards in those camps were from Korea, which, you will know, was part of Japan then.

In fact, my father's friend told me, the Koreans were the worst. ``Horrible people,'' he said. I've never had the heart to tell my Korean friends this story because it is hurtful. But also because I know they would have no idea what this man might be talking about. But they should. The government of President Roh Moo-hyun is trying to clear up the pain from this period and needs serious help with its moral compass. Take, for example, the outrageous reversal this week by a Korean government panel of the rulings by allied tribunals after World War II on Korean war criminals.

The Truth Commission on Forced Mobilization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sic) announced on Monday that 83 of the 148 Koreans convicted of war crimes were victims of Japan and should not be blamed. A ruling on three more is pending, and families have requested a review of the 23 Koreans who were executed. I accept that war crimes tribunals are biased. The victor catches the losers in his net. And that net had holes. Just as some got away -- like the monsters of Unit 731 in China, who did gruesome medical experiments on prisoners but were let go by the Americans in exchange for their biological warfare research findings -- so perhaps some were unjustly accused.

But not all were found guilty. War tribunals in Japan tried 25 Class A criminals (for ``crimes against peace,'' ie, starting a war) and 300,000 in the Class B (war crimes) and Class C (crimes against humanity) categories. Around 5,600 were prosecuted in numerous trials elsewhere in Asia, and 4,400 were convicted. Of these, around 1,000 were executed, including the 23 Koreans. The 83 Koreans in question were Class B and Class C war criminals who received sentences from one and half years to life.

They were not tried as soldiers or POW camp guards who had done their jobs. They were tried for over-zealousness, for decisions and actions over and above the call of duty. They were the thugs, the brutes, the monsters, the most horrible of the ``horrible people'' my father's friend knew. By what authority does the Truth Commission have to remove their individual responsibility with its class act defense of nationality? Such skewed morality led to the crimes against the lowest class-- ``prisoners'' -- in the first place. People who committed crimes against humanity are not innocent by virtue of being Korean any more than Japanese who brutalized Koreans are innocent by virtue of being Japanese.

If the Truth Commission wants to get its moral bearings straight and live up to its name, it should examine the broader assumptions with which it is approaching its mission to resolve the pain of the past. In doing so, it should recognize that the idea that Koreans were all unhappy citizens of imperialism bar a few collaborators is a myth. Koreans were Japanese citizens, and it did not occur to many to support the allies against their own country. Ask anyone who lived in that period, and they will tell you that the political correctness of the post-colonial generation is distorted.

They will also tell you that from 1937-42, Koreans in the Japanese army were volunteers -- who included King Kojong's son, an army general -- and that large-scale forced conscription only started in 1944. The Commission should know that those rounding up comfort women were Koreans and those torturing people in police stations were mostly Koreans. Koreans, in other words, were more ``horrible'' to Koreans in many cases than the Japanese were. The solution to this dilemma is to accept the notion of individual responsibility. I asked my father's friend why he thought the Koreans camp guards were so nasty. ``When the camp commander was angry about something, he'd berate his officers,'' he explained. ``The officers would take their frustration out on the Japanese privates, and they would take theirs out on the Korean privates. The Koreans would then take their anger out on the only people beneath them -- that was us.''

So, Truth Commissioners, who's the victim, my father's friend or the camp guard? Ultimately, we can say with distance that both were. But there is a process to get there. First, the criminal must acknowledge his crimes, and only then can he be forgiven. The Truth Commission has no right to intervene in this process and forgive Korean war criminals. That is for their victims to do. How many of their stories has the Commission examined?

As it goes about addressing issues from the Japanese period, modern Korea owes it to the primary victims -- in this case, the prisoners brutalized by those convicted war criminals -- to tread with sensitivity on their graves.

Michael Breen is the president of the public relations agency, Insight Communications Consultants, and author of "The Koreans."

assage parlor gave more than rubdowns, prosecutor says


http://cliffviewpilot.com/bergen/1070-massage-parlor-gave-more-than-rubdowns-prosecutor-saaysw

Massage parlor gave more than rubdowns, prosecutor says
FRIDAY, 26 FEBRUARY 2010 23:33 JERRY DEMARCO

ONLY ON CLIFFVIEW PILOT: Detectives busted a massage parlor in Palisades Park that they said was giving more than rubdowns, seizing more than $375,000 in alleged proceeds.

The vice squad busted into Eve Spa at 7 West Washington Place after an undercover investigator posing as a customer was solicited for sex, Bergen County Prosecutor John L. Molinelli told CLIFFVIEW PILOT.

Arrested and charged with prostitution-related crimes were the business’s owner, Fenyu Xu, 53, and masseuse Han Zi, 38, both of Palisades Park.

Xu also was charged with money laundering in connection with the $377,000 seized. He’s being held on $250,000 bail in the Bergen County Jail. Zi, meanwhile, was released without bail.

The operation had been advertising online since at least January, Molinelli told CLIFFVIEW PILOT Friday nightg. So investigators went in and, after obtaining a consent to search, found the cash, he told the web site.

Wednesday, May 30, 2012

Haidong Gumdo documentary

Haidong Gumdo documentary



本剣道
朝鮮コピー産業 健在
95suprausa 15 時間前
so basically my point was that koreans think that those metal sticks that was imported from korea in old times, was identical to the swords the japanese developed themselves. and same with MA. so even though many things came to japan from or through korea, it has changed over 1100 years into something unique to japan. koreans often have the idea that japan took their culture and everything and says it's japanese, which is obviously ridiculous. i do not disagree with your comment though.
Devoti aznpwnsalot さんへの返信 (コメントを表示) 16 時間前
regarding kendo and aikido: my point exactly. also it came from japan.
many people migrated between korea and japan in old times. such as the first scribes most likely came from korea teaching chinese symbols to the japanese. also the emperor system was adopted from the chinese, likely through korea. also the first swords were imported from korea. however the japanese quickly made it their own, and it evolved into a rather unique culture, was my point. so from 900 onwards is almost all japanese.
Devoti aznpwnsalot さんへの返信 (コメントを表示) 16 時間前
err... i can to a certain degree read japanese, but i can't read chinese. and google translate is shit when it comes to languages not related to english...
Devoti aznpwnsalot さんへの返信 (コメントを表示) 16 時間前
Allow me to show you actual records
a登州入高丽渤海航线:从山东登州(今蓬莱)出发,渡过渤海,沿­辽东半岛东岸航抵鸭绿江口,再分南北两路。
北路溯鸭绿江而上到吉林临江镇后,转陆行而达渤海王城上京龙泉府­。大祚荣被册封的第13年遣使入贡,因陆路被契丹所阻,就走这条­路。它成为中原与东北地区往来的重要航线,登州港口经常停泊渤海­卖马的船只。
南路是从鸭绿江口到朝鲜的唐恩浦,再沿朝鲜半岛西岸南航穿济州海­峡经对马岛、一歧岛去日本;或航至釜山后再转向航过对马岛、一歧­岛而达日本九州。这条航线逐岛航行,虽航期较长,然安全平稳,是­当时中国、新罗海船赴日传统航线。
b文登通难波(今日本大阪)航线:从山东登州文登县莫玡〔yá牙­〕口起航,东南行,横渡黄海,直达朝鲜半岛西南端的百济,再经济­州岛、对马岛、一歧岛、值嘉岛而达筑紫(北九州)的大津浦(福冈­)再东行到达难波,这也是隋炀帝派文林郎裴世清出使日本的路线,­也是从扬州通新罗至日本的航线。
As you can see, they mostly touch on ports, they do not pass through
aznpwnsalot Devoti さんへの返信 (コメントを表示) 19 時間前
Uh. No, you're arguing two different things. I would like to point out that the actual kendo, aikido did not exist in korea pre 1900s.
As for japan learning from chinese through korea, that's also a misnomer. There were two sea routes at the time. both of them were through korea. However, both of these involved boarding on ports and leaving on the same boat. Nothing ever needed to pass through korea itself.
aznpwnsalot Devoti さんへの返信 (コメントを表示) 19 時間前
Haidong gumdo is just a big scam...
cepomwa 1 日前
thanks,ill be sure to look into it
MRBONKERS1000 Devoti さんへの返信 (コメントを表示) 2 日前
you can also check when the different martial arts were founded, e.g. aikido/hapkido, kendo/kumdo. of course there's a lot that is originally korean, but it usually stays within korea. japan imitated china in the old times, the closest landmass to japan is korea, so everything came through korea. then the japanese changed it to suit themselves. as an island, japan has evolved comparably secluded, hence many very unique traits. only in modern times has koreans tried to claim it for their own.
Devoti MRBONKERS1000 さんへの返信 (コメントを表示) 2 日前
ugh, oh, well, here you go:james mcclain, william wayne farris, arne kalland.
these are non-japanese historians who explains the evolution of japanese society. you can start reading a little of their books. when you know how japanese society evolved, you'd see how ridiculous it is to claim it's korean culture. you can also just google the shit, what were the first swords that came to japan, compared to the ones they made themselves. look at the difference in old japanese and korean clothes etc.
Devoti MRBONKERS1000 さんへの返信 (コメントを表示) 2 日前

and whats the evidince that proves all this? is there an actual expert to clear all this shit up?
MRBONKERS1000 Devoti さんへの返信 (コメントを表示) 2 日前
it's because many koreans claim things and culture unique to japan is korean, and that the japanese took it and claims it is japanese. then they take things such as japanese clothes, weapons and martial arts, change it a little, then claim it was korean all along... and better. therefore, naturally, people don't like korean martial arts.
Devoti MRBONKERS1000 さんへの返信 (コメントを表示) 3 日前
every time i try and look somthing up about this kinda thing,it always shows so many dislikes...whats with all the haters?!?!?!?!
MRBONKERS1000 3 日前

Perfect Food (Korea)

Perfect Food (Korea)





Why do Koreans always steal or insist originlity of other countres' culuture things like this, not showing their original things? What a passion! Meanwhile other asian countries don't act in such shameful ways. There is a big difference between Korea and other asian countries in moral.
noelfleur 1 週間前

btw if you guys should teach foreigners that you have no writing system of your own, and borrowed everything from the chinese. kanji is totally chinese, and even hiragana and katakana is modified chinese characters.
own up. don't pretend like you ahve your own writing system. put CHINESE CHARACTERS AND DERIVATIVES in your japanese writing books.
Key Arthur noelfleur さんへの返信 3 日前


(sakuramochi)
hi, Key, according to the Chinese character,the investor was not today's ruler of Han ethnic, ancient Chinese was different ethnics. read historian Chen Shou 陳寿 233-297)wrote the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although most of japanese are respect to Chinese people.

a lot of modernistic Chinese words were made by japan at cultural enlightenment era.Democracy 民主, freedom 自由, right 権利,majesty 尊厳, Chinese law or chemical textbooks are fulled with japanese languages.

you can use English with alphabet,but it was made from Egyptian Coptic or
Phoenician, and developed to Greek alphabet and Latin.
OK, from your logic is good, you should pay patent fee to Syrian or Ethiopian for using english alphabet. learn and study more in your high school before put your easy comment on youtube.

you owe the chinese your entire nation's GDP if you are talking about paying.
Key Arthur sakura0jp0aikidodesu さんへの返信 12 時間前

(sakuramochi)
i am sorry i could not understand your meaning.China GDP was $5.93 Trillion US dollars in 2010,world's No.2 economy now.however China claims to japan that china is undeveloped country,requiring ODA, then japan provides US$ 6000 million in 2012. japan has provided to China amount $8 Trillion US dollars since 1972, china has not refunded US$40000 million for cost of building of Beijing airport. pay back money to japan ASAP.

20 billion won compensation to the bereaved family of Ulsan Bodo League massacre

http://www.ytn.co.kr/_ln/0103_200902102030216879

"蔚山保導連盟事件の遺族に200億賠償


"울산 보도연맹 사건 유족에 200억 배상"
기사나도한마디
2009-02-10 20:30


[앵커멘트]

법원이 59년 전에 일어난 울산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법원은 그동안 사건의 진상이 가려져 소멸 시효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는데, 1심 판결대로라면 배상액은 200억 원에 달할 전망입니다.

김도원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좌·우익의 이념 대립이 심각했던 해방 직후.

당시 정부는 좌익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 전향자들을 가입시켰습니다.

곧 이어 6·25 전쟁이 일어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과 좌익 혐의자 등을 북한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잡아들입니다.

울산 지역에서도 수백 명이 구금됐고, 재판도 없이 집단 총살됐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2007년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리고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407명, 총 희생자 규모는 최소 87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유족들은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법원은 유족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국가는 사건 발생 후 50여 년이 지나 소멸 시효가 끝났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유족들이 그동안 희생자들의 사망여부나 장소, 학살 지시자 등을 모르는 상황에서 배상을 요구할 수 없었으므로 소멸시효가 지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홍준호, 서울중앙지법 공보판사]
"희생자 명부를 은폐하고 진상 조사를 미뤄 온 국가가 유족들에 대하여 소멸 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에 비춰 허용될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입니다."

법원은 희생자에게 2,000만 원, 배우자에게 1,000만 원 등 유족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지연 이자 등을 감안하면 유족들에게 지급될 배상금 총액은 200억 원에 달할 전망입니다.

그러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경우 소멸시효가 지난 것으로 보고, 대법원이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한 적이 있어 상급심에서도 1심 판결이 유지될지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YTN 김도원[dohwon@ytn.co.kr]입니다.

Korea Bodo League massacre in 1950

CAUTION!!!!

The Bodo League massacre (Hangul: 보도연맹 사건; Hanja: 保導聯盟事件) was a massacre and war crime against communists and suspected sympathizers that occurred in the summer of 1950 during the Korean War. Estimates of the death toll vary. According to Prof. Kim Dong-Choon, Commissioner of the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at least 100,000 people were executed on suspicion of supporting communism.[2] Historians believe up to 200,000 were killed by South Korean military and South Korean Police.[3] South Korean civilian organizations believe there might have been up to 1,200,000 victims.[1] The massacres were wrongly blamed on the communists for decades.[4]
from Wikipedia

한국 보도연맹 사건 part1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915890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테마가 있는 뉴스
Why뉴스[생생영상] 화제뉴스美 CIA, 동굴 속 '김일성 방공호' 공개
자유연애 꽃핀 경성..두 여인의 사랑…뮤지컬 '콩칠팔 새삼륙'

음악으로 표현한 가족의 이야기, 아트해프닝
◇ 억울한 죽음의 진상, 늦지도 유해하지도 않다

1949년 12월, 경북 문경에서 공비토벌을 한다고 나선 국군이 문경 석달마을 주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마을 주민 127 명 가운데 8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숨진 사람의 70%가 어린이와 노약자였다. 물론 군은 공비들이 죽였다고 사건을 조작해 발표했다.

유족들은 10년 뒤인 1960년 진상규명을 요구하다 반국가행위로 체포돼 처벌 받았다. 다시 40년을 기다려 지난 2000년 봄에 헌법소원을 내고 2008년 7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유족들이 2000년부터 법에 호소했으니 그 때부터 소멸시효를 따져 3년이 되는 2003년에 법으로 따져 처리할 시효가 끝났다. 5년이나 늦었으니 재판이고 뭐고 따질 게 없다'고 소송을 기각했다.

그런데 일주일 전인 지난 8일 대법원의 판결은 이를 뒤집었다.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사건 내용을 조사해 발표한 것이 2007년 6월이므로 소멸시효는 이때부터 3년을 따져 2010년 6월에 끝나는 게 맞다. 그러니 2008년에 제기한 유족들의 소송은 시효가 끝나 사라진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 고등법원은 재판을 시작하라."

대법원은 지난 6월에도 6.25 당시 양민학살이 자행된 <국민보도연맹>사건 역시 "국가진실화해위원회가 진상을 조사해 발표한 2007년 11월부터 소멸시효가 시작된다"고 판결했다. 국민이 피해자이고 국가는 가해자인데 가해자가 처형자 명부 등을 3급 비밀로 지정해 진상을 은폐하고 진상을 캐묻는 유가족을 처벌까지 했는데, 피해자 국민에게 왜 뒤늦게 이제 와서 따지느냐 늦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판결 내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13일 아침 휴대폰 트윗에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등장했다. 과거 취재했던 사건이어서 사무실에 올라와 컴퓨터를 켜고 해당 트윗을 다시 찾았더니... <귀하가 접속하려는 정보는 불법, 유해 내용이 제공되어 있어 해당 정보에 대한 접속이 차단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다른 경로로 찾았더니 이번에는 영어로 'Sorry, that page doesn't exist!'란 공지만 뜨고 내용을 찾을 수 없다. 밑에 시행처를 보니 사이버경찰청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라고 적혀 있다. 이 트윗에 실린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유해정보로 보는 걸까? 아니면 트윗을 올린 당사자를 유해한 인물로 규정하고 따로 통제를 하며 걸러내는 걸까?

보도연맹 사건은 국가기구가 공식 조사해 진상을 밝힌 바 있고 경찰청장도 지난해 추도사에서 공권력의 잘못을 깊이 성찰하며 사과한다고 했으니 아마 후자일 것이라 생각한다.

◇ 국민보도연맹 - 계도하고 보호한다는 명부가 살생부로

국민보도연맹은 1948년 국가보안법이 제정됨에 따라 남한 사회에서 좌익사상을 척결하기로 하고, 이듬해인 1949년 6월부터 좌익성향을 갖고 있거나 좌익활동을 한 경력이 있는 국민을 계도해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직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이란 조직체제를 그대로 본떠 만든 것.

보도연맹원 강령은 '대한민국 정부를 절대 지지한다', '북한 김일성 정권을 반대한다',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한다' ..... 등이다. 국가적 반공 사업이니 기관에서는 실적을 올리려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가입하라 권유했다. 지역마다 모집 할당량도 생겨나 가입하면 보리쌀을 나눠주는 곳도 있었다. 모내기나 추수철에 보도연맹원 집부터 일손을 도와준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국가가 인정하는 '증' 하나라도 갖고 있으면 더 안전할까봐, 밀가루 배급받을 때 도움이 된다고 하니 좌익.우익이 뭔지도 모르는 시골 농군들이 도장 찍고 지장 찍으며 가입했다. 아이들도 열 몇 살 정도면 받아준다고 해서 손 붙잡고 데려가 가입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가입한 사람이 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6.25 직후 정부는 그 명부를 근거로 공산당에 합세할 위험이 큰 사람들이니 처리해버리고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보도연맹 소집령을 내려 연맹원들을 모았다. 보도연맹원들은 반공주민들이어서 먼저 피신시키기로 했다고 속이고 모으기도 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을 집단 수감한 뒤 곧바로 위험한 좌익분자라며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발발한 뒤 7월, 8월이 집중적으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저질러진 시기이다. 한강에서 남쪽으로 후퇴해 내려가면서 저질러졌기 때문에 △경기.충청은 7월, 경상도는 8월이 많다. △충북 청원군 옥녀봉, 괴산군 감물면 공동묘지와 솔티재 등에서 사망자 265명 확인, 그러나 추정은 1,000명. △충북 충주 호암동 싸리고개에서는 183명 희생 확인. △충남대전 지역은 산내 골령골에서 1,400 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 △경남 울산은 1950년 8월, 대운산 골짜기 등에서 천 명 가까이 희생. 피해자 유족들은 4.19 직후 학살현장을 찾아 헤매다 발견해 두골 825구를 수습해 합동묘를 조성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정권은 합동묘를 파헤치고 묘비도 없앤 뒤 유가족들은 연좌제로 처벌했다.

창고에 가두고 불을 지른 뒤 겨우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총격을 가해 학살하기도 했고, 구덩이를 파고 몰아넣은 뒤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메워버린 곳도 있다. 15년 전 취재팀을 꾸려 일부 지역의 진상을 보도하자 '아버지가 끌려간 뒤 돌아오지 않아 40년 넘게 찾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아닌 삶을 살아왔는데 방송 내용을 듣다보니 그 골짜기가 바로 아버지가 묻혀 계신 곳 같다'며 지금이라도 찾아가 보겠다는 유족도 있었다.

◇ 국민의 생명과 존엄은 국가의 존재이유이자 구성요소

희생자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도 파악되지 않는다. 과거사를 규명하기 위한 위원회의 활동은 피해 유족의 신청을 받아 진상 파악에 나선 것이기 때문에 제한적이다. 그저 아직도 최소한 5천명이라 일컫지만 그 몇 배가 진실일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용서와 화해를 하고자 해도 무엇을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지 알아야 용서하고 화해할 것 아닌가.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이다.

국민의 존엄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구성 요소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법한 절차와 과정없이 국민의 인명이 희생되어선 안 된다. 앞으로 진행될 보도연맹 사건 유족들의 피해보상 및 배상 소송뿐만 아니라 수시로 벌어지는 시위진압이나 철거 진압, 노동현장에서의 분규... 그 모든 현장에서 국민의 생명과 존엄은 국가 존재의 이유임을 공권력은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