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6, 2012

which figure is true Empress Myeong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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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는 아마 이렇게 생겼을 것

- 최근 명성황후 사진 진위 논란을 보며 / 이돈수(미술사학자, 한국해연구소장)


1. 들어가는 말

지난 이틀 동안 명성황후 관련 사진의 논란으로 언론계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역시 이 사진이 어떻게 명성황후로 소개될 수 있는지 기사를 보고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물론 사진첩에 왕비라는 표기가 되어 있어 외국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속단을 하기는 쉽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우리 역사 속에 한 획을 그은,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조사해온 우리의 황후였음을 감안할 때 좀더 정확한 고증이 이루어 지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개인적으로 수집가로서 베일에 싸인 명성황후의 사진을 10년 이상 추적해왔다. (서양고지도와 사진 등 수집 경력은 20년이 넘는다.) 일부 학자들은 명성황후의 사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번에 자료를 공개한 영국인 테리 베닛은 사진 수집에 있어 경쟁자이자 사진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동료이며 친구이다. 명성황후 기사가 소개되기 며칠 전에도 서로 메일을 주고 받았고 문제의 사진이 언론에 소개된 뒤에도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한 바 있다.

이 사진이 명성황후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사진에 나타난 표기와 대원군과 같은 배경에서 촬영된 사진이란 점을 근거로 이 사진 속의 인물이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높고 충분히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는 몇가지 오류가 있었다.

현재 각 언론들도 들떴던 분위기를 접고 이제는 명성황후가 아니라는 방향으로 의견을 규합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이 사진이 어디에서 나왔더라’가 아니라 좀더 사진의 본질에 가까이 접근해 볼 필요성도 있다. 그 동안 모아놨던 자료를 바탕으로 설명해 본다.


2. 테리 베닛 씨의 사진, 작가는 불분명하나 1891년부터 존재한 사진

미술사적 분석은 작품과 그 것을 둘러 싼 여러 자료 및 그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토대로 한다. 그 출발은 작품이고 작품은 작가와 제작연대가 분명하거나 추측 가능해야 한다. 문제의 사진은 누가 언제 찍었을까?

처음 언론에 소개 될 때 이 사진은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직전인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중국을 거쳐 한국을 방문했던 무명의 독일인이 찍은 사진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발간된 1891년 국립박물관 보고서(Report of National Museum)에 ‘궁궐에서 시중드는 여인(Korean serving woman in the palace)’으로 같은 사진이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진은 최소한 1891년 이전의 사진이라는 것이 확실하다.(사진 01)

1893년 독일어판 “코레아”란 책자에서도 궁녀 ‘Palast dame’로 소개되고 있고, 1894년 7월 영국 화보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에 똑같은 사진이 ‘조선 왕의 시종 (Attendant On The King of Korea)’ 으로 실렸다. (사진 02)

또 1894년 10월 독일의 화보신문 Illustrirte Zeitung도 뒷 배경을 생략한 같은 사진을 ‘궁정의 여자 가수 (Sängerin im königlichen Palast)’라는 제목으로 실었다.(사진 03)

1895년의 화보신문에는 ‘서울 궁정의 여인 (A palace woman, Seoul)’으로 이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04) 이러한 모든 정황으로 봤을 때 이 사진이 명성황후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3. 사진의 구성에 대한 의문과 사진 특징

이 사진은 그 당시 외국인들 사이에서 유통되었던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또 이번에 공개된 4장의 사진은 그 배열 자체가 어색해 보인다. 당시의 사진 원본을 많이 접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잘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사진 05)

본 앨범에서는 왼쪽 위 ‘고종과 순종’ 그 아래 ‘대원군’ 사진이 한 쌍을 이루고 나머지 오른쪽 위, 아래의 사진이 다른 한 쌍을 이룬다. 특이한 점은 왼쪽 의 위 아래 두 사진은 오른쪽의 사진에 비해 명암이 강하다는 것이다. 또 왼쪽의 사진들은 사진의 가장자리에 흰 테두리가 있다. 이런 가장자리의 흰 테두리는 그 당시 사진들의 원본 형태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던 형태이다.

이를 두고 볼 때 이 사진들은 원판에서 인화된 사진이 아니라 다시 인쇄한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즉 원본의 사진을 다시 한번 촬영하여 인화한 사진이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 원본이 가지는 미묘한 색의 차이나 섬세함이 많이 줄어들고, 선명한 명암이 특징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 사진들도 그렇다.

이들 사진 가운데 왼쪽 아래, 위 사진들의 원본을 포함한 17 장으로 이루어진 사진첩을 소장하고 있다. 그 중 본인의 소장원본에는 흰색 테두리선이 없다. 또 사진의 명암 대비 역시 공개 된 사진 보다 떨어지나 세부묘사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 난다. (사진 06, 07)

당시 사진이 유통될 때는 보통 두꺼운 흰색이나 베이지색에 가까운 하드보드지 위에 접착된 형식으로 유통되거나 그냥 얇은 낱장의 형태로 유통됐다. 이 사진첩의 경우, 낱장으로 유통되던 것을 개인이 편집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이 부착된 하늘색 바탕의 종이는 그 당시 유행하던 앨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종이였다. 그러면 이 사진들을 어디서 구입했고 그 작가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오래 전부터 그 당시 사진 유통에 대해 연구해오고 있지만 자료의 부족 등으로 쉽게 풀리지 않는 점들이 많다. 그러나 이 사진의 문제의 발단은 명성황후의 사진의 진위의 문제일 것이므로 소장의 경로보다는 이점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 접근 하겠다.






4. 지금까지 논란의 대상이었던 명성황후 사진과 테리 베닛의 사진 분석.

(1) 지금 까지 논란이 되었던 명성황후 사진과 그림(삽화).

1994년 작가 이수광씨가 교과서에 실린 명성황후의 사진이 허구라는 지적을하면서 명성황후의 논란은 시작됐다. 그리고 2004년 10월 8일 한국일보에 필자가 직접 제공한 1894년도‘드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 11월호에 실린 명성황후 특집 기사는 이 사진이 명성황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사진09)





이제까지 명성황후로 알려진 이미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바로 위와 같은 사진과 이를 재구성한 일러스트이다. 특히 일러스트의 경우 위의 사진처럼 전신이 들어간 경우와 위 여인과 흡사한 형태의 두상만을 표현한 것 두 가지가 있다. (그림 08)

재미난 점은 당시 서구에서 발간된 출판물에서 전신상의 경우 궁녀로 소개되는 데 반해 두상을 형상화 한 삽화에서는 왕비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왜 똑 같은 여인을 두고 전신상에서는 궁녀로 또 두상에서는 왕비로 묘사 되었을까.

이는 최근 캐나다에서 발굴된 고종, 대원군 그리고 명성황후을 담은 1894년 9월 10일자로 발행된 석판화의 영향이 크다고 추정된다. 일본에서 발간된 이 석판화에서는 좌측의 여인을 명성황후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림10)

당시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유럽 저널리즘의 관심이 극에 달했음에 반해 명성황후의 사진을 구할수 없는 상황이라 일본에서 만든 이 삽화가 인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두상만을 나타내며 왕비라고 소개한 삽화는 1895년 ‘일루스트라숑(L'illustration)’ 11월 신문과 1898년 파리에서 출간한 “라 꼬레 (La Coree, independante, russe, ou japonaise) ”의 책, 그리고 1895년 11월 스페인의 화보신문인 ‘라일루스라시온 에스파뇰라 이 아메리카’에도 각각 실렸다. (그림 11, 12)

명성황후가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최초의 자료는 1894년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왜 우리는 1894년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당시 한국과 관련된 서양인의 묘사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조선 왕조를 지배하는 왕좌의 배후에 있는 세력이고, 당시 조선의 변혁을 좌우하는 인물”로서 명성황후라는 점이다.

미국인인 카펜터는 1894년 ‘드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을 통하여 명성황후의 막강한 권력을 서방에 알렸고, 일본은 1894년 여자로서의 명성황후를 고종, 대원군과 함께 병행하여 이미지화 한 석판화를 통해 그녀의 권력을 형상화했다. 즉 석판화에 나타난 명성황후는 권력자의 아이콘이였고, 삽화 속의 명성황후가 실제의 인물과 얼마나 닮았는가는 별개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럼 왜 이 사진이 문제의 중심에 등장하는가? 아마도 이 사진이 외국인들에게 우리 궁정의 여인의 원형적인 모습으로 가장 관심 끄는 사진이었을 것이 아니었을까. 이 사진이 다양한 형태로 서구에서 유통된 사실과 국내 거주 외국인이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는 점은 한국의 궁정여인의 원형적 모습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2) 테리 베닛 씨의 사진

위 사진에 반해 위의 사진 보다 3년 전에 유통되었던 테리 베닛 씨의 사진은 우리 궁중의 여인을 대표할 만한 사진으로 원형화되지 못했다. 명성황후 시해 직후 그녀의 사진이 절박하게 필요한 서양의 언론인과 한국관련 서적을 출판한 저자들에게도 주목 받지 못한 사진이다. 또 이 사진을 제외한 어떠한 자료에서도 이 사진을 명성황후로 기술한 예는 없다.

이 사진이 명성황후로서 추측하게 하는 것은 ‘Die Ermordete K¨onigin(시해된 왕비)’라는 무명의 독일인의 필사이다. 그러므로 이 독인일의 신원과 그것을 뒷받침 해 줄만한 또 다른 단서가 제공되지 않는 한 이것이 문제의 발단은 될 수 없다. 그 당시의 저널리스트들이 이 사진을 명성황후로 생각했었다면, 그 제목을 다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5. 컬렉터로서 찾아왔던 명성황후의 사진의 모습.

(1) 명성황후의 인상

필자가 한국일보에 제공한 자료에서 묘사한 명성황후의 모습은 이사벨라 비숍의 묘사와 비슷하지만 좀 더 세밀하다.

“중간 키에,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곧았다. 얼굴은 길고, 이마는 높고, 코는 길고 가늘고 귀족적이며, 입과 아래턱에는 결단력과 개성이 드러난다. 광대뼈는 튀어나왔고, 귀는 작고, 얼굴빛은 기름진 저지크림 색을 띠었고, 눈썹은 아치 모양이고, 아몬드 형의 눈은 지적이고 예리해 보였다.”

(2) 의복의 문제

같은 자료에 의하면 그녀의 옷차림은 화려했으나 사치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왕비는 옷이 많아서 자주 갈아입는다. 어떤 날은 금박을 수놓은 진홍빛 능라를 입고, 어떤 날은 자주색 옷을 입는다.”

“보석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길고 가는 손은 모양이 예쁜데, 다이아몬드로 빛난 적이 없다. 유일하게 끼는 반지는 묵직한 금가락지인데, 항상 손가락 하나에 쌍으로 끼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명성황후의 차림은 1910년에 촬영된 엄비와 순종비의 사진 속 여인과 그 모습이 비슷할 것이라 상상된다. 명성황후의 사진 촬영이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여러 서양인들이 회고했다. 만약 그녀가 사진을 촬영하였다면, 아주 잘 갖추어진 모습으로 촬영에 임했을 것이다.

또 분명 권력을 상징할만한 왕비가 다는 사조룡보 흉배와 같은 상징물이 틀림없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가 권좌에 앉아 있을 때의 그녀의 모습은 화려했을 것이고 사진 역시 이러한 화려함을 잘 보여줄 것이라 믿는다. 필자의 입장에선 지금까지 논쟁이된 사진과 테리 베닛 씨의 사진은 이러한 측면에서 명성황후의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3) 머리의 장식

머리 장식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문제가 되어온 사진 보다 테리 베닛 씨가 제시한 사진의 장식이 황실여성의 머리 장식에 더 가깝다. 일본 개조사에서 1930년대 발행한 일본지리대계의 조선편에 나오는 궁중의 옛의복을 소개한 사진에서 보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 논쟁이 되어온 사진이 상궁의 전형적인 머리 장식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사진 역시 명성황후의 진위 문제에선 제외 되어야 한다.




이에 더해 명성황후의 머리 장식이 엄비나 순종비의 머리장식과 비슷한 유형이거나 대례복을 착용한 경우에는 이보다 더 화려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명성황후의 사진이 발견된다면 쉽게 사진 속 주인공이 명성황후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금까지의 명성황후의 사진은 논쟁과 같은 일을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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