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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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동래기생, 口音 명인 유금선 이야기 3

by 엉슝맘 on 2010-12-15 in 세상사는 이야기

마지막
동래기생, 구음 명인 유금선 이야기 3


‘채 맞은 생짜’… 화초머리…
누가 화초머리를
얹어주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물어보지도 않았다. 열일곱 살이었다.



“동래기생
치마폭엔 묻히고 만다”


파라솔을
든 젊은 날의 유금선
사진
출처는 제자분들 카페입니다.
http://cafe.daum.net/tttreer/8pdD/68?docid=1GtPY|8pdD|68|20091209121245


권번은
본디 우리말이 아니다.
1910년,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관기(官妓)제도가 철폐되자
매인 데가 사라진 동래기생들이 생존을 위해 ‘동래기생조합’을
만들었고
이태 후 ‘동래예기조합’으로 명칭만 바꾸었다가 1920년에 다시 ‘동래권번(券番)’으로 이름을 고치게 됐다.
그 배경에는 일본이 있다.
전국에 산재했던 기생이나 창기조합의 명칭을 모두 일본식으로
강제로 바꾸게 해 10년 새 세 번이나 개명한 것이다.
‘권번’이란 교방(敎坊,
조선시대 관청에 딸려 있던 기생양성소)의 일본식 발음이다.


알다시피 동래는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아 1960~70년대에 웨딩마치를 울린 대다수 부부들의 추억이 잠긴 곳.
거슬러
일제 강점기에는 유독 온천을 좋아하는 일인들에 의해 개발돼
함경도의 백천온천, 황해도의 신천온천과 더불어 3대 온천장으로 꼽히던 땅이었다.
이북에 있는 두 지역은 모습이 어찌 변했는지 알 수 없으나
동래는 어귀만 들어서도 모든 간판이 자신이 곧 ‘온천’임을 몸으로 알려준다.
골목골목마다 ‘온천’이란 글자를 상호에 얹은 간판이 즐비한 것이다.

복천동
‘새미’들이 그러하듯 동래의 역사로 흘러온 온천이 수영강으로 모여들고
수영강은 다시 바다로 이어진다. 물 인심 후한 지역은 사람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일본과 가깝다는 지리적 여건도 그렇지만 일인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침탈을 노골화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유곽을 세운 곳이 부산이요
온천장이었던 것도 그런 방증이다.
일본인들이
동래에 세운 것은 ‘오키야권번(置屋券番)’이었다.
게이샤들을 공동으로 관리하며 번창하는 온천장 손님들을 끌어모으고
조직적으로 성매매까지 하며
동래기생의 생업을 넘보았다.
일본인들이 벌인 공창(公娼)제도는 묵과할 일이 아니었다.

동래권번은 더욱 철저히 가무음곡(歌舞音曲)의 기예만
보여주었다.
예기로서의 품위와 긍지를 잃지 않음으로써 일제에 대항한 것이다.
동래기생의 그런 기질은 다 그 뜨거운 물과 땅에서 오지 않았을까.
일제 강점기 조상님 호적을 남에게 내어주느니 싸그리 불질렀던 영모단이나
동래장터 만세운동, 동래고보 동맹휴학이 그랬듯 동래는 굽히기를 거부하는
부산 기질의 본산이다.

“평양기생
치마폭은 벗어나도 동래기생 치마폭에는 묻히고 만다”는 옛 말마따나
전국 한량들이 알아주던 동래기생들도 시대의 변화는 묻을 수 없었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김동년(金東年) 박난전(朴蘭田) 변비봉(邊飛峰) 같은
동래기생의 우두머리들이 주축이 돼 출범한 동래기생조합(東萊妓生組合, 이후
권번)은
광복 때까지 줄기차게 강요된 왜색 아래서도 우리 전통 가무와 음률의 맥을 보듬고 지켜냈다.


원옥화,
김강남월, 안향년, 유금선

권번에서
요정으로,
요정에서 나루토(鳴戶旅館)나 아라이(荒井旅館)로 중심점이 기울던
시대의 행간에 유금선이 있었다.
권번 앞줄에 언제나 붙어 있던 명패는
그의 인기를 말해주었다.
그 시절 영업부장들은 회사보다 권번에 출근하는 날이 더 많았다.
앞줄에 붙은 명패의 주인들을 먼저 모셔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부르는 자리가 많은 기생일수록 몸값도 비쌌다.

동래라는
지명이 생긴 이래 이때만큼 호황이었던 적은 없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여관이요, 요정이었다.
게이샤보다는 예기(藝技)의 수준이 장인을
능가하는 동래기생을 찾는 일인들도 많았다.
“왜놈 순사 앞에서는 서 있어도 동래기생 앞에서는 무릎 꿇고 만다”고도 했다.
수요보다 공급이
모자랐다.

당시
온천장을 주름잡던 4인방이 있었다.
동무로 서로 아끼던 원옥화, 김강남월, 안향년 그리고 유금선이다.
4명이 조를 짜서 움직이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으로 찾는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함께 앉았다가 틈을 봐 한 명이 옆 요정으로 가면
잠시 후 또 한 명이 다른 여관으로 갔다
돌아오는, 하룻밤 2~3번의 술청은 그들을 금방 부자로 만들었다.
봄이면 ‘불상추놀이(남자들의 야외 계모임)’,
가을이면 ‘단풍놀이’로 낮을
보내고 밤이면 요정을 뛰는 ‘주연(酒宴) 속 청춘’들이었다.

기생
한 명이 받는 행하(行下)는 한 시간에 1원50전이지만
이들을 부르기 위해 한다하는 한량들은 물 쓰듯 돈을 썼다.
선(先) 화대로 최하
100시간에서 300시간을 불러야 4인방을 부를 수 있었다.
요릿집에서 받는 큰상 값이 5원에서 10원 안짝이었다.
‘방귀깨나 뀌는’ 한량이
아니고는 용색조차 구경하기 어려운, 잘나가는 4인방이었던 것.

한산모시 숙고사 항라… 옷장을 열면, 같은 옷 두 번 입고 나설 수 없어
한 철에
갈아입을 한복이 열댓 벌 준비돼 있던 화려한 시절이었다.



애기권번 시절 친구 김 강남월(오른쪽)과 함께


“나는
춤추러 일어날 짬이 없었는기라,
춤 반주 할라모 구음을 해얄 끼고 또 별도로 소리를 해야 했거든.
내가 소리를 안 하모 흥이 안 산께네 손님들이
내 없으모 안된다 아이가.

나는 고마(그만) 딱 붙박이로 앉아 있어라 하는 기라.
강남월이도 소리는 참 잘했는데…. 가(걔)는 열한살 때 빅터에 취입도 했다
아이가.”


첫눈에
불에 덴 것 같던 사랑

그렇게
불나방처럼 깃 비비던 열아홉살,
한 남자를 만났다. 키가 훌쩍 큰, 일본서 설계를 공부하고 온 부잣집 청년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를 만난 것도 봄날이었다. 친구들 소개였다.
첫눈에, 가슴이 불에 덴 것만 같았다.
무슨 말에 무슨 인사를 했는지 꽃을 보았는지 그를 보았는지
화르륵,
제 몸이 곧 타버릴 잉걸인 성싶었다.

그 사람이 금선의 머리를 얹어준 이고 자신이 죽던 날까지 그녀를 놓지 않았던
이다.
권번이
있던 명륜동에서 온천장까지 2km 거리를 화려한 기생들을 태우고 달리던 인력거가 사라지고
전화기가 그 부재를 메울 몇 년이 흐른 사이, 광복이
됐고 그가 청혼을 했다.

아홉 살 연상이던 그는 이미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
꽃 같은 내 사랑을 지키자니 자신의 가정이 걸림돌이었고,

“천지빽가리(엄청 많은 수효)로 컴컴한 사나(사내)들” 곁에 두고 보자니 가슴이 타들어갔다.
스물다섯살에 식을 올렸다. 제대로 격식을 갖춘
혼례였다.

그에게
시집간 날로 기방생활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첩’으로 붙잡아놓은 금선에게 미안한 마음을 몸으로 보여주려 작정했던지,
살면서 그가 낱낱이
보여주었던 애정행각은 기억의 갈피마다 접혀 있다.
방직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라 일본 출장이 잦았고 집을 비우는 만큼 금선의 선물은 늘어갔다.
고가의 패물은 세관의 눈을 피하려 했음인지 전대처럼 허리에 둘러차고 왔다.
옷을 사올 적에는 모자에 구두 핸드백, 스타킹까지 일습을 빼놓지
않았더랬다.

어느
날인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물건을 들고 나타났는데 그게 바로 브래지어였다.
“내 크기를 어찌 알아서?” 물었더니 와코 백화점 점원에게
“요만하다”고 두 손을 들어 보여주었다고 한다.
임신이 안 돼 후사가 없는 그를 위해 조선 땅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요크셔테리어 한 쌍을
일본에서 사들고 온 일도 있다. 전쟁 후라 물자가 귀했다.
키우라고 거저 줘도 “사람 먹을 양식도 없는 판에 개는 무슨” 손사래 치기 십상인,
그 시절의 개 사육은 오로지 식용이 목적이었다.


천지빽가리 컴컴한 사내들
중 단 한번 청혼

“강아지를
알라(아이)로 생각했제.
부산에는 수의사가 없어서 그 아가 아프모 서울까지 병 고치러 데꼬(데리고) 댕다. 그
작(때)에는 쥔 양반이 돈을
겁나게 벌어서 수유리 대지극장 옆에도 집이 세 채나 있었다 아이가.”

‘닭살스러운’
행각은 오래 갔다. 사랑이 깊음도 병이라.
질투로 골이 진 적도 많았다.
신명이 많아 소리로 신을 풀고 살아야 사는 것 같았던 그녀였기에
권번
쪽과 아예 끊고 살려고 하니 병이 날 지경이었다.

소리가 너무나 하고팠다. 혼자 놀기 적적한 서른도 청춘…,
‘옛 친구 그립소’ 노랠 삼자 명창
장판개의 아들 장영찬을 독선생으로 불러주었다.
장영찬은 그 아버지를 닮아 춘향가 중 사랑가와 심청전을 유달리 잘 뽑는, 호남형의 명창이었다.

6개월 남짓이었을 게다. 젊은 명창과 아내의 만남이 불안해서 수업은 그 길로 끝이 났다.

남편의
권유로 부산 광복동에서 ‘수평다방’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찻집도 해보았다.
겉으로는 금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지만 소리청일랑 영영 잊어버리라는
속내였다.
그래서 서둘러 주선하는 것도 남편이었고 종당에는 못하게 하는 이도 언제나 남편이었다.
설계를 전공한 사람이라 인테리어며 전기배선이며
인근에서 제일 모던한 업장으로 꾸며놓고서는 1년 만에 가게를 다른 사람 손에 넘겨야 했다.


(구음
명인 유금선의 소리와 청춘, 그리고 사랑, 내일 또 올립니다^^ 뚜 비 꼰띠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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