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9, 2012

uncovered documents of comfort women from US America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01297



▲ 최근 미국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발굴한 구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들을 들어보이는 정진성 교수(왼쪽)와 장태한 교수.
ⓒ 오마이뉴스 공희정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구 일본군 위안부(일명 '정신대')가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로, 혹은 취업사기에 속아서 끌려갔음을 입증하는 문서가 미국서 발견돼 이 분야 연구와 배상문제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또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기업들이 노무자들을 위해 한국과 중국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공급, 운영해온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자료도 함께 공개됐다.

한국인 성노예 문제를 연구해온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학 장태한 교수(인종학)와 서울대 여성연구소 정진성 교수(사회학) 등 한-미-일 연구팀은 3일 오후 2시 30분 서울 태평로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 연방정부 기록보존소(NARA)'에서 발굴한 자료를 공개했다.

이들은 또 지난해 일본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현지조사를 통해 수집한 '기업위안소' 관련 자료와 일본 후쿠오카 지역의 기업위안소 사진도 같이 공개했다.

"구 일본군 성노예 강제동원 입증 문건"


▲ 미 연방정부 기록 보관소에서 발굴한 'Kunming-REL-OP-3' 자료. 붉은 테를 두른 부분은 한국 여성들이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간 사실을 언급한 부분임.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1945년 8월 15일 종전 직후 미군에 생포된 일본군인, 한국군인, 징용자 그리고 10명의 한국인 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신상카드와 포로심문에 관한 자료들 속에서 발견된 것. 이들은 필리핀으로 끌려간 위안부들로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정 교수팀이 '미 연방정부 기록보존소'에서 발굴한 파일명 'Kunming-REG-OP-3'에 따르면, 구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정부가 강압적 또는 사기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쿤밍의 예난 군화중학교에 위치한 중국 군 본부에 25명의 한국인(여성 23명, 남성2명), 대만 남성 1명, 그리고 81명의 일본인(여성 4명, 남성 77명)이 전쟁포로로 잡혀 있었다. 한국인 포로와 일본인 포로의 태도와 증언은 다르며 대조적이다.

한국인 포로들은 모두 일본 부대로부터 도망 나왔으며, 중국 부대에 자발적으로 투항했다. 한국인들의 민족주의 정신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들은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했다.

황남석 부인을 제외한 나머지 22명의 한국인 여성들은 모두 성노예(위안부)였다. 그들은 강압(compulsion), 그리고 사기(misrepresentation)에 의해 성노예가 되었다. 1943년 7월 한국을 출발한 15명의 여성들은 싱가포르에 있는 일본 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하는 한국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왔다. 약 300여 명의 여성들이 비슷한 사기로 성노예로 모집되어 왔다."

정 교수팀은 이외에도 필리핀 루손섬의 포로수용소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포로명단 중 한국인 여성 42명의 신상카드도 찾아냈다. 정 교수는 "신상카드는 한국인, 대만인, 일본인 성노예 명단이 따로 작성됐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한국인 성노예 명단을 찾기 위해 118개의 상자와 20000여 신상카드를 조사했다"고 밝혔다.


▲ 한 한국인 위안부 여성의 신상카드. 정면, 측면 얼굴사진과 열손가락 지문, 그리고 기타 인적사항 등이 기록돼 있다.
신상카드에는 이들의 국적이 '한국(Korean)'으로 명시돼 있고 주소, 나이, 직업, 교육 정도 등이 기재돼 있으며, 직업은 대부분 웨이트리스(Waitress)나 엔터테이너(entertainer)로 돼 있다.

신상카드에 기재된 여성 중에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 중 가장 고학력자도 포함돼 있다. '소세란 오미나'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대구에서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가 끌려가 성 노예가 된 것으로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케이스다.

이밖에도 한 중국인 기자가 쓴 '비루마(버마)전선 종군기'라는 책에 포함된 '타타미'라는 일본군 연대장의 위안부 관련 '일기'도 공개됐다.


▲ 소화15년(1940년) 당시 일본기업의 '기업위안소' 운영을 입증해 주는 자료.
"1944년 4월 16일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호텔에 투숙한 후 연금되어 있던 영국 소녀를 불러 욕실에서 등을 밀게 했다. 결국 해상에서 반달동안의 성욕을 해결했다. 오후에는 꽃과 같은 미모의 프랑스 여자 애를 호텔에 불러 음주 시중을 시키고 밤에 그녀를 묵게 해 함께 밤을 새우다."

정 교수는 "일본군은 한국인과 대만인 이외에도 유럽인들까지 성노예로 끌어 들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라며 "지속적인 조사 활동을 통해 이를 입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기업들, '기업위안부'로 식민지 여성 동원

한편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기업들이 '기업위안소'를 운영해왔다는 사실을 입증할 자료도 공개됏다. 이 자료들은 1940년에 작성된 일본 육군성 정비국 전비과 문서와 대동아성 기획원 각의 결정문서, 당시 내무성에서 발간한 문서 등이다.

특히 이번에 공개된 자료 가운데는 1939~40년의 일본신문 자료, 일본시민단체가 소장하고 있던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1940년 육군성이 홋카이도(北海島)탄광주식회사 자료과장 앞으로 보낸 문서를 보면, "탄광 내 노무자들의 생산성 제고를 위해 조선과 중국의 창부를 유치할 것"이라는 귀절이 보인다.


▲ 태평양전쟁 당시 구 일본군이 화폐 대신 사용한 '금권'
정진성 교수는 "기업위안부들은 낮에는 노동을 했고 밤에는 '위안부'로 활동했으며, 노동자 1천 명당 20여명의 위안부가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대략 1만5000명~2만 명 정도가 '기업위안부'로 동원됐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본기업의 성노예 운영 사실 자체는 이미 공개된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사회적, 학문적 관심이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치우친 나머지 일본기업의 성노예 문제는 사실상 사각지대로 남아 왔다.

또 1942년, 1943년에 작성된 대동아성 기획원 문서에는 "노동자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화북지방에서 노동자들을 도입하되 이들을 위해 위안부를 수반해야 한다"는 각료회의 결정문이 들어있다.

정 교수는 "특히 대동아성의 문서에는 '세탁부 등의 명목으로 위안부들을 합법적으로 데려올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면서 "일본정부는 위안부를 동원하기 위해 앞장서 사기를 친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1939년 당시 일본의 오타루(小樽)지방의 한 신문에 실린 "기업에서 북해도청에 위안소 설치를 허가해 달라는 청원을 내 조만간 허가가 날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도 공개됐다.

"구 일본군 성노예 강제동원 체계적 연구 계기될 것"


▲ 일본기업들이 훗카이도 탄광지역에 운영하던 위안소들. 아직도 당시 건물이 남아 있다.
일본정부는 지금까지 구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인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 제3자인 미군의 기록에 의해 일본군 성노예의 '강압성'이 확인된 만큼 향후 이를 놓고 일본정부와 논란이 예상된다.

장태한 교수는 "미군 기록의 객관성과 공신력으로 볼 때 충분한 자료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며 "앞으로 기업위안부나 군 위안부에 대한 추가적인 자료확보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기업의 '기업위안소' 운영을 입증할 자료를 발굴한 것과 관련, 정진성 교수는 "일본 내에서는 지난 1992년 이후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이 문제가 논의돼 왔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별다른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었다"면서 "이번에 발굴한 자료를 기초로 위안부 문제 연구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특히 "앞으로 연구결과에 따라 당시 '기업위안부'로 일했던 피해 여성들이 일본기업들을 상대로 민·형사소송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위안부 자료발굴 1등공신은 미 연방정부 합동조사단"

장태한, 정진성 교수팀이 '미 연방정부 기록보존소(NARA)'에서 일본군 성 노예 강제 동원을 입증할 자료와 일본기업의 '기업위안소' 운영을 확인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IWG(Interagency Working Group)의 역할이 컸다.

IWG는 나치 및 그 동맹국들의 전범 기록 조사를 위해 미국 정부가 1999년 발족시킨 연방정부 합동조사단을 말한다.

IWG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국무부, 국방부, 법무부,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 국립문서보관소 등의 100여명의 정부 관료와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IWG의 단장은 NARA의 3인자인 부부소장이 맡는다.

IWG는 나치 전범자료 조사가 일단락됨에 따라 2000년 5월부터 일제 전범기록 조사에 착수, 관계 비밀문서의 비밀해체 작업을 벌이고 있다.

IWG는 같은 달 일제 전쟁범죄 전문가인 역사학자 린다 홈즈 여사를 IWG 역사위원에 임명, 일본 전범행위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내용에 대한 조사요원들의 이해를 돕도록 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미국 연방정부 기록보존소(NARA)는 한국의 정부기록보존소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독립적인 연방정부 기구다. 미국 문서뿐 아니라 미군이 외국에서 전쟁중에 입수한, 소위 '노획문서'도 함께 보관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군 관계 문서는 원칙적으로 메일랜드 주에 있는 제2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돼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은 물론 한국전쟁이나 한일 국교정상화 등 한국 현대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도 보관하고 있어 역사 연구에 있어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중요한 기관이다. / 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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