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anuary 10, 2012

Sake city Masan 주도마산 (酒都馬山) 1

http://www.u-story.kr/105


잊혀진 마산의 소주공장을 찾아서(1)
2010/01/12 07:30 in 감춰진 도시이야기


● 주도마산 (酒都馬山)
마산은 술의 도시, 주도 마산으로 왕년에 유명한 도시였다.
대략 연세가 50을 넘긴 어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마산은 개항이후 전국 생산량 1위를 차지한 청주주조장들로 유명했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서 청주공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짐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게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래서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에서 탐방시 의문을 남긴 여러 건물들을 찾아서 과거 술공장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고자 한다.
순서는 소주, 청주 그리고 막걸리, 맥주 순서로 소개할 계획이다.


(좌측 창포동성아파트자리가 야마무라주조, 우측 창포한백자리가 소화주류)


(1960년대 전경: 해안가에 큰 굴뚝이 있는 건물과 뒤편에 낮은 굴뚝이 있는 공장 전경)

당시의 생산량은 청주 1천석, 소주 1만석, 미린주 150석, 포도주 30석, 기타 위스키, 브랜드 등을 생산키로 했다. 1935년 야마무라(山邑) 주조계에서 독립하여 자본금을 150만엔(円)으로 증자했다.
새로이 발족한 이 회사는 합성주인 이연주(理硏酒) 一新과 소주 明月과 양주 등을 생산하고, 청주 양조는 야마무라(山邑) 마산공장에 넘겨 주었다. 당시 사장은 마쯔무라 (松村茂三郞)라는 일본인이었다.

이후에 설립된 소주공장은 1937년 1월 1일 중앙동3가 2-4번지에서 자본금 3만원으로 설립한 합자회사 마산중앙조선소주로 소주를 전문적으로 생산 판매하였으며, 사장은 산근재길(山根才吉)이라는 일본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장이다.
이 공장은 소화주류에 비해 소규모 공장이였다. 마산중앙조선소주공장은 해방이후 탁응조(卓應朝)가 불하를 받아서, (합)마산중앙소주로 상호를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60년대에 문을 닫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청주 및 소주공장은 한국인들에게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재래식으로 생산하는 막걸리 공장만 허용해 주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세원확보를 위해 1928년부터 개인의 자유 양조를 금지하고, 양조를 허가제로 하여 면허를 발급하였다.
주로 한국인 업자들에 의해 경영되던 탁주, 약주 양조업은 일본인이 독점했던 청주업계에 비해서 규모는 매우 영세했다.
일제 강점시기의 마산의 소주공장은 거의 소화주류에 의한 일사 독점체제로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 해방이후 소주공장
해방과 함께 적산공장들은 미군정청에 의해 접수되었다.
미 군정청은 이들 적산공장을 과거 일본인 공장에 종사했던 종업원이나 주류제조에 경험이 있는 자나 그밖에 관리 운영할 능력이 있는 한국인을 선정하여 관리 운영을 맡겼다.
이를 맡은 관리인들은 먼저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상호만 바꿔서 기존을 시설을 이용하여 가동하였다.

새로이 출발한 공장들을 1946년 세무당국으로부터 주류제조면허를 받아서 나름대로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 후의 극심한 식량난으로 양조시설 역시 빈약해서 제대로 생산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기득한 관리권을 다른 제3자에게 넘겨 버리는 공장도 생겨났다. 이들 공장들도 1951년 이후에 연고자들에게 모두 불하되었다.

한편 해방과 함께 적산공장의 불하에 의해 탄생된 소화주류와 야마무라 주조 외에도 1951년 강남소주(장군동 5가7, 대표 김행윤)가 장군동에서, 1961년 마산양조공업사(장군동 5가1-3,대표 남병주)에서 소주와 약주를 함께 생산하였다.
1961년에 有元, 舞鶴, 마산, 江南 4개의 소주공장에서 소주를 제조하고 있었으나 소주 수요가 늘어나면서 1970년에는 무학, 강남, 백광 삼천리, 永進등 5개 공장으로 늘어 났다.
후발업체인 백광소주(부림동 104-8,대표 문삼찬)가 1969년에, 삼천리와 영진소주는 구순기에 의해 회원동과 오동동에 설립되었다.


부림동 백광소주공장 1973년전경(좌측철길 하단 기와집)


백광소주공장터 현재모습 (원래의 공장부지는 새길이 나면서 분리됨)


백광소주는 당시 유명했던 백광청주와 동일상호로, 공장과 사장은 다른 동명이사로 백광청주의 유명세를 활용하기 위해 상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천리소주와 영진소주는 구순기가 같이 경영한 공장으로 공장소재지만 달리하고 있다.

영진소주, 삼천리 소주공장터의 현재전경(오동동 4거리 아래편)


(이승기 마산영화자료관장의 말에 의하면 오동동에서 삼천리 소주를 취급했다는 얘기로 보아 상호만 달리하고 소주생산은 같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야마무라 주조는 해방이후 연고자인 한범석이 맡아 있다가 이병각(삼성 창업자 이병철의 형)에게 넘어갔다. 상호도 무학주정으로 개칭하고 소화주류와 경쟁관계에 들어섰다.
이후 1952년에 이병각은 최재형에게 운영권을 인계하고, 서울의 삼강유업을 인수하여 상경하였다.
원래 청주를 생산한 공장이었으나, 한국동란 중 양조 원료인 미곡의 절대적 부족으로 소주를 생산하게 됨에 따라 소화주류와 경쟁구도가 되어 심각한 대립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1960년에 동양주정(소화주류의 상호변경)과 합병을 통해 유원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60년대 초반에는 소주 백매(白梅)를 생산하였다.
1965년부터 유원산업은 주정회사만 운영을 하다가 우여곡절을 겪는 속에 마산항 서항지구매립사업이 완공되어 공장앞 바다는 육지로 변했고 공장주변이 주택지 등으로 변모하자 80년대 후반 함안군의 칠서 지방공단에 이전하여 주정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현재 확인해 본 바로는 공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70년대 당시만 해도 유원산업은 마산에서 가장 큰 그룹형태의 회사였었다. 유원연료산업에서 유원연탄을 만들기도 하였고, 부산의 대선주조도 인수하고, 경우상호신용금고와 유원개발에서 부곡골프장 건립공사를 하기도 하여 70년대 마산을 주름잡았던 기업인데 지금은 명맥을 찾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야마무라(산읍)주조, 해방후 유원산업




● 소화주류는 해방과 함께 김종신(4대총선 자유당 국회의원)이 관리를 하였다.
1949년 김종신은 동양주류주식회사로 개칭하고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였다. 이후 무학주정과의 경쟁과 경영난 속에 1952년 김상용에게 법인을 넘기면서 상호를 동양주정주식회사로 다시 개칭하였다.
김상용은 당시 대동제모 사장을 역임한 능력있는 경영인이었으나, 이후 경영권이 김봉재(당시 국회의원으로 김상용과는 동서지간), 지달순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인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되었다.




소화주류(1929)

1960. 3. 24일 무학과의 출혈경쟁으로 회사형편이 어렵고, 탈세조사를 받던중 무학 최재형에게 공장을 넘기게 되었다. 이후 동양주정의 운영권은 1959년 민주당에서 변절하여 자유당으로 간 국회의원 허윤수에게 정치자금 수수 댓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960년 무학주정에 인수되어 유원산업에 포함되었다가, 1965년. 現 무학그룹 최위승회장이 다시 인수하여 무학양조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신포동 13번지에서 희석식 소주인 「무학」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5년 1월부터 시행된 양곡관리법 시행으로 소주의 원료 대체가 불가피하게 됨에 따라 전국의 수많은 증류식소주 업체들이 희석식소주로 전환하여 생산하였다.
그 후 필요이상으로 난립상태였던 소주제조장을 국세청은 1973년 7월부터 본격적인 통합작업에 착수하였다.
각도에 1사씩 전국 10개 업체만 존속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무학주조는 경남지역 36개회사를 통폐합, 무학주조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신창동으로 이전하였다.

신창동 무학주조 공장은 원래 일본인이 경영한 淸水라는 청주공장이 있던 자리인데 해방과 함께 대동주조로 상호를 변경한 뒤, 73년 무학이 경남소주공장을 독점하면서 무학주조 공장으로 사용되었다.
1984년 무학공장이 봉암동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공장부지는 무학아파트가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73년 신창동 무학주조공장)


(84년 봉암동 이전후 현재 무학빌라가 들어서 있다.)

뿐만 아니라 창포동부지와 신포동의 공장부지에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소주공장과 아파트,
대체로 공장이 이전한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은
도심내 주거지부족현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뭔가 허전한 마음, 별 개념없이 지나쳐 온 것 같다

우리는 땅이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하게 지나쳐 왔다.
가급적 보존하는것이 우선이지만, 차선으로 기록이라도 제대로 남겨야 할 것이다. 한일함섬이 있던 자리도 기록관하나 없이 깡그리 아파트만 지어서, 후회막급하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지역에서 기록에 남길만한 공공시설이나 중요 산업시설에는
반드시 기록표지석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땅은, 어느 시기에, 어떠한 용도로, 어떤 사람들이 사용 했노라고 -----



60년대 생산한 무학소주


60년대 무학소주 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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