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14, 2012

Yangban ; Joseon noble class 両班 1

http://www1.korea-np.co.jp/sinboj/j-2004/06/0406j1016-00001.htm

〈朝鮮歴史民俗の旅〉 両班(1)
朝鮮王朝の時代は両班主導の時代であった。国の法律も制度も両班の利益を保障するものであった。もちろん最高主権者は国王であり、国王の批准、命令なくして国事は決められるものではない。しかし、朝鮮の国王は絶対的専制君主ではなく、その権限の多くは両班によって制約されていた。朝鮮王朝は両班官僚国家であった。

両班とはどういう人々であったのだろうか。両班を日本語に置きかえるなら士族ということばが適当と思われる。辞書には、「士族は華族の下、平民の上に位する」とあるが、朝鮮の両班のイメージは漠然としてはっきりしない。「封建社会における家門と身分の高い上流階級の人」「世襲的に文班、武班になれる資格を有する門閥」が両班である。

もともとは高麗に始まった。当時は、朝廷で行われる儀式などに参席する現職の官僚たちの総称であった。国王に向って右側に文官が、左側に武官が並ぶ習わしがあったことから、左右合わせて両班と呼んだ。

朝鮮王朝の両班には、都であるソウルおよびその周辺に代々住むものと、地方の農村部に住むものの二つがあった。前者を在京両班、後者を在地両班という。在京両班は、両班層の中でも名門に属する家系が多く、有能な科挙合格者を多く輩出した。政府の高位高官に就くのは主に彼らであった。これに対して在地両班は、地方の農村に長く住み着いて同族集団をなし、地域の行政にかかわっていた。

両班の生きがいといえば官吏であることだった。科挙に合格して官吏になり、官吏であることによって両班の身分が保障されていたからだ。家柄により推薦されて官吏になる道もなくはなかった。しかし、それはごくまれで、彼らは科挙という国家試験の関門を突破しなければならない。

一般の両班家庭では、5歳を前後して「千字文」「童蒙先習」を習わせ、15、16歳には四書五経をマスターさせていた。そしてさらに、十数年の間、官学か私学に身をゆだねて学問を磨き、いよいよ登竜門である科挙試験の日を待つのである。

当時の科挙試験の平均的合格年齢は35歳。試験科目は経学、詞章、策文の3科目。受験者は、膨大な四書五経と数百編の詞章を諳んじるほどに頭にたたき込んだ。

例えば、「周易」では2万4107文字、「礼記」では9万9010文字、「春秋左氏伝」に至っては、19万6845文字からなる。これらをまる暗記することはほとんど不可能に近かった。だが、この難関を乗り越えた者たちのみに、家門の栄誉と特権が与えられるのであるから、不退転の覚悟をもって勉学に励んだ。

科挙試験は、普通は3年に1度、ソウルの王宮で行われた。合格者は小科に240人、大科に33人。最終試験は殿試といい、国王参席のもとで行われたが、国王が国家懸案に対する質問を提示し、提示された問題に対して迅速、明快に自らの策を述べなければならない。

33人の殿試者はさらに甲科3人、乙科7人、丙科23人に振り分けられた。自他ともに認める当代最高のエリートたちである。合格発表されると、国王参席のもと合格証授与式が王宮で行われ、合格者全員がソウルの目抜き通りを駕籠に乗せられて歩いた。いま風にいえばオープンカーに乗ってのパレードである。街はこの国のエリートたちを一目見ようと人山人海をなした、と当時の記録は記している。

朝鮮王朝が両班に与える官職の数は限られていた。総数は、中央、地方をあわせておよそ5千人程度。このうち3300が武官、1700が文官である。文治主義の朝鮮王朝では武官より文官が上位にあった。その文官の官職は、地方官1000に対して中央官は700。その数少ない中央の文官職を目ざして両班たちはしのぎをけずっていた。

官吏の一日の始まりは早かった。官庁への出勤は、夏時に卯時(午前5~7時)、冬に辰時(7~9時)である。出勤するとまず口座簿(出勤簿)に捺印する。出勤日数は年間300日。欠勤すると官吏評価で問題となった。

官庁の仕事は国王参席の朝賀に始まる。朝賀には、毎月の1日と15日に開かれる祝賀朝賀と、5日、11日、21日、25日に行われる朝参があったが、全員が官服に身を包んで国王を謁見した。議政府と六曹などの最高位の官僚たちは、毎朝、宮殿に国王を訪ねて挨拶を述べ、必要に応じて国事を報告し教示を頂いた。 

官吏の一日は多忙であった。六曹の場合、判書(大臣)の責任のもと、堂上官は政策を担当し以下のものがそれを実務的に支えた。例えば文官の官吏を掌握する吏曹の場合、官吏の任命を担当する文宣使、爵位の授与を担当する告訓使、職務遂行状況の把握を担当する告工使をおいていたが、その各セクションに正郎1人、左郎1人をあたらせていた。

仕事は部署によって異なるが、最も忙しいのは要職である吏曹であったらしい。ソウルをはじめ各道、府、県からおびただしい書類が届けられていた。嘆願書、告発書のほか、だれそれを抜擢してどこそこの地位に就かせてほしい、といった要請書まであった。それらをぬかりなくチェックするのである。(朴禮緒、朝鮮大学校文学歴史学部非常勤講師)

[朝鮮新報 2004.10.16]

<조선 역사민속의 여행>양반 (1)조선 왕조의 시대는 양반 주도의 시대이었다. 나라의 법률도 제도도 양반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물론 최고주권자는 국왕이며, 국왕의 비준, 명령 없이 국사는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조선의 국왕은 절대적 전제군주가 아니고, 그 권한의 대부분은 양반에 의해 제약되고 있었다. 조선 왕조는 양반 관료국가이었다.

양반과는 어떠한 사람들이었던 것일까? 양반을 일본어에 바꿔 놓는다면 무사가족이라고 하는 말이 적절하다라고 생각된다. 사전에는, 「무사가족은 화족 아래, 평민 위에 장소를 차지한다」라고 있지만, 조선의 양반의 이미지는 막연하게 명확치 않다. 「봉건 사회에 있어서의 가문과 신분이 높은 상류계급의 사람」 「세습적으로 문장반, 무반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하는 문벌」이 양반이다.

원래는 고려(高麗)에 시작되었다. 당시는, 조정에서 행하여지는 의식등에 參자리 하는 현직의 관료들의 총칭이었다. 국왕에게 향해서 오른쪽에 문관이, 왼쪽에 무관이 나란히 서는 풍습이 있었던 것부터, 좌우 맞추어 양반이라고 불렀다.

조선 왕조의 양반에는, 수도인 서울 및 그 주변에 대대 사는 것과, 지방의 농촌부에 살지만 둘이 있었다. 전자를 동경에 있는 양반, 후자를 존재땅양반이라고 한다. 동경에 있는 양반은, 양반층 안(속)에서도 명문에 속하는 가계가 많아, 유능한 과거합격자를 많이 배출했다. 정부의 고위고관에 취임하는 것은 주로 그들이었다. 이것에 대하여 존재땅양반은, 지방의 농촌에 길게(오래) 정착해서 동족집단을 없음, 지역의 행정에 관계되어 있었다.

양반의 사는 보람이라고 하면 관리인 것이었다. 과거에 합격해서 관리가 되고, 관리인 것에 의해 양반의 신분이 보장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벌에 의해 추천되어서 관리가 되는 길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드물어서, 그들은 과거라고 하는 국가시험의 관문을 돌파 해야 하다.

일반의 양반 가정에서는, 5세를 전후해서 「천자문」 「아동어리석음처習」을 배우게 해, 15, 16세에는 4서 오경을 마스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십몇년 동안, 관학인가 사립학교에 몸을 내맡겨서 학문을 갈고 닦고, 드디어 등용문인 과거시험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당시의 과거시험의 평균적 합격 연령은 35세. 시험 과목은 경학, 사장, 책문장의 3과목. 수험자는, 방대한 4서 오경과 몇백편의 사장을 암기할 만큼에 머리에 힘껏 때려 박았다.

예를 들면, 「주 오사무(易)」에서는 2만4107문자, 「예기」에서는 9만9010문자, 「순주(春秋) 히다리(左)씨 연고」에 이르러는, 19만6845문자 로 이루어진다. 이들을 만 암기하는 것은 대부분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난관을 극복한 사람들만에, 가문의 영예와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불퇴전의 각오를 가져서 면학에 힘썼다.

과거시험은, 보통은 3년에 1도, 서울의 왕궁에서 행하여졌다. 합격자는 소과에 240명, 대과에 33명. 최종시험은 님試와 좋은, 국왕參자리의 밑에서 행하여졌지만, 국왕이 국가현안에 대한 질문을 제시하고, 제시된 문제에 대하여 신속, 명쾌하게 자기의 책을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33명의 님試사람은 더욱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에게 가를 수 있었다. 자타 모두 인정하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합격 발표되면, 국왕參자리의 밑 합격증 수역식이 왕궁에서 행하여져, 합격자 전원이 서울의 번화가를 가마에 태워져서 걸었다. 지금 바람에 말하면 오픈카를 타서의 퍼레이드다. 거리는 이 나라의 엘리트들을 한번 보자고 인산인해를 한,이라고 당시의 기록은 적고 있다.

조선 왕조가 양반에 주는 관직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총수는, 중앙, 지방을 합쳐서 약 5000명정도. 이 중 3300이 무관, 1700이 문관이다. 문치주의의 조선 왕조에서는 무관보다 문관이 상위에 있었다. 그 문관의 관직은, 지방관 1000에 대하여 중앙관은 700. 그 얼마 안된 중앙의 문관직장을 목표로 해서 양반들은 칼날과 칼등 사이의 조금 볼록한 부분을 깎고 있었다.

관리의 하루의 시작은 빨랐다. 관청에의 출근은, 여름 때에 묘 때(오전5∼7시), 겨울에 용 때(7∼9시)이다. 출근하면 우선 계좌부(출근부)에 날인한다. 출근일수는 년간 300일. 결근하면 관리평가로 문제가 되었다.

관청의 일은 국왕參자리의 아침 축하에 시작된다. 아침 축하에는, 매월의 1일과 15일에 열리는 축하 아침 축하와, 5일, 11일, 21일, 25일에 행하여지는 아침 參이 있었지만, 전원이 관복에 몸을 감싸서 국왕을 알현했다. 의정부와 6 소(曹)등의 최고위의 관료들은, 매일 아침, 궁전에 국왕을 방문해서 인사를 말하고, 필요에 따라 국사를 보고해 교시를 주셨다.  

관리의 하루는 다망했다. 6 소(曹)의 경우, 판서 (각료)의 책임의 밑, 당상관은 정책을 담당해 이하의 물건이 그것을 실무적으로 유지했다. 예를 들면 문관의 관리를 장악하는 관리 소(曹)의 경우, 관리의 임명을 담당하는 문장宣使, 작위의 수여를 담당하는 고훈使, 직무수행 상황의 파악을 담당하는 고 다쿠미(工)使를 두고 있었지만, 그 각섹션에 마사로(正郎) 1명, 히다리(左) 낭 1명을 맞게 하고 있었다.

일은 부서에 의해 다르지만, 가장 바쁜 것은 요직인 관리 소(曹)이었을 모양이다. 서울을 비롯해 각길, 부(府), 현(縣)에서 엄청난 서류가 보내지고 있었다. 탄원서, 고발서의 이외, 아무개를 발탁해서 어디어디의 지위에 오르게 해주었으면 싶은,이라고 한 요청서까지 있었다. 그것들을 질퍽거려 없고 체크하는 것이다. (박(朴)禮끈(서), 조선 대학교문학역사학부 비상근강사)

[조선 신보200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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