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February 21, 2012

news of Damjing 曇徴の消息

http://bigai.world.coocan.jp/msand/miwa/koreadoncho.html

曇徴の消息
 今回の訪韓で僧曇徴は韓国の国定教科書に出ている有名な人だと断定していた。帰国後日本の本を調べはじめて、太宰府観世音寺をめぐって驚くべき論議がされていることがわかった。調べた資料は市販されているものばかりだが、今年になって出たものが多く話題になっているようだ。残念ながら僧曇徴については完全に不明のままだが,碾磑を追って古代の権力闘争を眺めることになりそうだ。

以下は韓国:中学校『国史』国定教科書の記述。

「 文化伝播

 三国時代には、文物交流ど交易が活発に行なわれた。三国は大陸から中国文化を受け入れ、独自の文化を作り上げ、その発達した三国文化は日本へ伝えられ、日本の古代文化の発達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百済は日本と政治的に緊密な関係を維持したため、三国の中で、もっとも日本文化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阿直記と王仁は日本に渡って漢文、論語、千字文を伝え、段陽爾と高安茂などは漢学と儒学を日本に伝え、政治思想と忠孝思想を広めた。聖王(在位523-554年)のときには仏教を伝え、そのほかに天文・地理・易法などの科学技術も伝えた。

 高句麗も、多くの文化を日本へ伝えた。憎侶の慧慈は日本の聖徳太子の先生となり曇徴は紙、墨、硯を作る技術を教え、法隆寺の金堂壁画も彼の作品だといわれている。日本の高松塚古墳壁画は、高句麗の影響を受けたものである。新羅は船を造る技術、堤防と城郭を積む技術を伝えたし、伽耶は土器を作る技術を日本に伝えた。このように三国は発達した文化を日本に伝え、日本古代の飛鳥文化の発達に影響を与えた。」

 以上韓国:中学校『国史』より引用 

 ところが以上の韓国:中学校『国史』国定教科書の記述は明らかに間違いで、僧曇徴が法隆寺にいた話もその出所が不明。聖徳太子の存在自体不確かで架空の人物かもとは驚き。この時代は日本国内が複雑な権力争いの中にあり,高句麗から向えた僧の没年さえ不明。最近の研究によると法隆寺の建立時期自体不確か。もしかすると九州の太宰府から現在の地へ移設し、朝廷が仏教を大事にしていることを示すための方策であったともいう。移設に際し用途不明の碾磑は残されたため,現在に伝わった。太宰府に残された碾磑の意味を考えるのが私の使命だが今のところ何もいうことがない。ただ是非注目してほしいことは以下の点だ。当時は高句麗が非常に高度の文化をもっていたことの唯一の証拠物件が僧曇徴の碾磑であることは確かなこと。668年には高句麗滅亡したからそれ以前ということも確か。またわが国にはこのような巨大な石臼を作る技術はなかったことも確か。観世音寺碾磑を実測調査したとき、1.5メートルのステンレス製直尺でその平面度を確認し、驚嘆したのは私だけだった。

 以下は井沢元彦,藤岡信勝:真実の日韓関係史-Noといえる教科書(祥伝社,1998,5)の著者らの座談記:「井沢:それと一つ、これは歪曲などという次元のものではなくて、まったくデタラメといっていいと思いますが、法隆寺金堂の壁画は曇徴という高句麗出身の僧侶によって描かれたとあります。これは高校の教科書も同じです。ここまでくると荒唐無稽を通りこして、まったく鼻白んでしまいます。曇徴という僧は『日本書紀』によると610年に来日し、日本に絵の具や紙の製法を伝えたとされる人です。また『聖徳太子伝暦』という文献には一時期法隆寺に住したという記録はありますが、『伝暦』自体が一級史料ではないので確定的なことではなく、ほかにも壁画の作者と結びつく根拠はまったくありません。もちろん曇徴が描いたとされる他の作品もありません。だいたい610年の時点で一人前の年齢に達していたと思われる人物が、600年代終わりと推定される再建法隆寺の金堂壁画を手がける可能性はほとんどない。もちろん金堂壁画が朝鮮半島から渡って来た人の手になる可能性は充分あります。インドのアジャンタ石窟の壁画との類似性から、中国僧、インド僧の可能性も指摘されています。したがって朝鮮人が作者であるというのも有力な可能性の一っですが、曇徴が作者というのは、まず考えられない。仏僧と絵師は違いますしね。これが歴史小説ならいいんですが、国定教科書なんです。

藤岡:こういうのは日本側もしっかり指摘すべきだと思いますね。だいたいこの教科書を使う生徒がかわいそうです。」

以上すべて原文通りコピーしました。

関連資料:

1. 李鍾恒著:韓半島からきた倭国-古代加耶族が建てた九州王朝(新泉社,1990,3)

 倭は大和政権ではなく,もともと韓半島に根をおく加耶族と同類に属する民族である。女王国耶馬台国も根が半島にある国であった。唐の『旧唐書』によれば日本列島の王朝の交代は648-703年の間に起こった。    

2. 朴炳植:天皇家の秘密と新開日本書紀-日本原記(情報センター出版局,1987,6)

 日本語のルーツは古代朝鮮語だとする韓国の学者による日本書紀の解説

3. 田村圓澄著:古代を考える-大宰府(吉川弘文館,1987) 大宰府を中心に詳しい。大和朝廷との関係には触れていない。

私の文献も引用されている。「また天平の石臼と称される一組の碾磑がある。610年に高麗王が献じた二人の僧のうちの曇徴がはじめて碾磑を造ったといわれ(『日本書紀』推古天皇条),これがその実物とされる。付会の説であろうが,形状と唐代の碾磑との関連から創建期のものとしても矛盾しないようである。(三輪茂雄ほか「太宰府・観世音寺の碾磑にっいて」『古代学研究』108)。三輪茂薙氏は構造的に小麦製粉には不適とされ、その用途を伽藍造営に塗料として使用された朱の生産用の可能性を指摘されている。これまで研究の対象とされることが少なかったが、創建期の遺品らしいばかりでなく、製粉技術の発展を探るうえで注目される。」

4. 米田良三著:法隆寺は移設された(新泉社,1998,5):法隆寺は大宰府から移設したことを建築家が専門的に証拠を挙げて詳しく証明している。

흐림보람의 소식이번의 방한에서 승흐림보람은 한국의 국정교과서에 나가고 있는 유명한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귀국후 일본의 책을 조사해 처음으로, 다자이후(太宰府) 칸제온지(觀世音寺)를 둘러싸서 놀랍게도 논의가 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조사한 자료는 시판되고 있는 것만이지만, 금년이 되어서 나온 것이 많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유감스럽지만 승흐림보람에 대해서는 완전히 불분명했던 채이지만, ⊙⊙을 쫓아서 고대인 권력투쟁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이하는 한국:중학교 『국사』국정교과서의 기술.

「문화전파

 3국시대에는, 문물교류ど교역이 활발하게 행하여졌다. 3국은 대륙으로부터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고,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 내고, 그 발달한 3국문화는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고대 문화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백제(百濟)는 일본과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 3국 안(속)에서, 가장 일본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阿나오키(直記)와 오(王) 히토시(仁)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한문, 논어, 천자문을 전하고, 단양爾와 다카야스(高安) 시게루(茂)등은 한학과 유학을 일본에 알리고, 정치사상과 충효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성왕(재위523-554년)의 때에는 불교를 전하고, 그 것 이외에 천문·지리·역법등의 과학기술도 전했다.

 고구려(高句麗)도, 많은 문화를 일본에 전했다. 憎侶의 게이(慧)慈는 일본의 성덕태자의 선생님이 되어 흐림보람은 종이, 먹, 벼루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고, 호류사(法隆寺)의 금당벽화도 그의 작품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일본의 다카마쓰즈카(高松塚) 고분벽화는, 고구려(高句麗)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신라(新羅)는 배를 만드는 기술, 제방과 성곽을 싣는 기술을 전하고, 말벗(시중)耶는 토기를 만드는 기술을 일본에 알렸다. 이렇게 3국은 발달한 문화를 일본에 알리고, 일본 고대의 아스카(飛鳥)문화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

 이상 한국:중학교 『국사』보다 인용

 그런데 이상의 한국:중학교 『국사』국정교과서의 기술은 분명히 틀림으로, 승흐림보람이 호류사(法隆寺)에 있었던 이야기도 그 출소가 불명. 성덕태자의 존재 자체 불확실해서 가공인 인물일지도라고는 놀라. 이 시대는 일본국내가 복잡한 권력다툼 안(속)에 있어, 고구려(高句麗)에서 향 얻은 승의 죽은 해마저 불명.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호류사(法隆寺)의 건립 시기 자체 불정확. 어쩌면 규슈(九州)의 다자이후(太宰府)에서 현재의 땅에 이설하고, 조정이 불교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을 내보이기 위한 방책이었다라고도 한다. 이설에 즈음해 용도불명의 ⊙⊙은 남겨졌기 때문, 현재에 전해졌다. 다자이후(太宰府)에 남겨진 ⊙⊙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지만 현재 아무 것도 말하는 적이 없다. 단지 부디 주목해주었으면 싶은 것은 이하의 점이다. 당시는 고구려(高句麗)가 대단히 고도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의 유일한 증거물건이 승흐림보람의 ⊙⊙인 것은 확실한 것. 668년에는 고구려(高句麗) 멸망했기 때문에 그 이전 말하는 것도 아키라(確)인가? 또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거대한 맷돌을 만드는 기술은 없었던 것도 아키라(確)인가? 칸제온지(觀世音寺)⊙⊙을 실측 조사했을 때, 1.5미터의 스테인리스제 직접 척으로 그 평면도를 확인하고, 경탄한 것은 나만이었다.

 이하는 이자와(井澤) 모토히코(元彦), 후지오카(藤岡) 노부까쑤(信勝): 진실한 일한 관계사-No라고 말할 수 있는 교과서(쇼(祥) 덴(傳)사, 1998, 5)의 저자들의 좌담기: 「이자와(井澤): 그것과 하나, 이것은 왜곡등이라고 하는 차원의 물건이 아니고, 완전히 엉터리이다고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호류사(法隆寺) 금당의 벽화는 흐림보람이라고 하는 고구려(高句麗) 출신의 승려에 의해 그려졌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교의 교과서도 같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황당 무계를 앞지르고, 완전히 질린 표정를 해버립니다. 흐림보람이라고 하는 승은 『일본서 기』에 의하면 610년에 방일하고, 일본에 그림 물감이나 종이의 제조법을 알렸다로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또 『성덕태자연고달력』이라고 하는 문헌에는 한 때 호류사(法隆寺)에 주거 밑이라고 하는 기록은 있습니다만, 『연고달력』자체가 일급사료에서는 없으므로 확정적인 것이 아니고, 이외에도 벽화의 작자와 결부되는 근거는 완전히 없습니다. 물론 흐림보람이 그렸다로 여겨지는 다른 작품도 없습니다. 대체로 610년의 시점으로 제구실을 할 연령에 달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인물이, 600년대 끝이라고 추정되는 재건 호류사(法隆寺)의 금당벽화를 손수 다룰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금당벽화가 한반도(朝鮮半島)에서 건너온 사람의 손에 의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인도의 아잔타(adjust) 석굴의 벽화와의 유사성으로부터, 중국 승, 인도 승의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인이 작자다라고 하는 것도 유력한 가능성의 1입니다만, 흐림보람이 작자라고 하는 것은, 우선 생각될 수 없다. 프랑스승과 그림장이는 다르고. 이것이 역사소설이라면 좋습니다만, 국정교과서입니다.

후지오카(藤岡): 이러한 것은 일본측도 확실히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하네요. 대체로 이 교과서를 사용하는 학생이 불쌍합니다. 」

이상 모두 원문대로 복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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