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20, 2012

6,000 Koreans slaughtered in the Great Kanto Earthquake?

http://koreanworld3.web.fc2.com/enjoylogs2/2007-01/20070131-185658.html


LOL! 6,000 Korean people were massacred in the Great Kanto Earthquake?


■ a survey by the Department of Justice in Japan

korean dead people,233
serious injuries,15
minor injuries,27

Japanese dead who were killed by being mistaken as Korean,58
(mochi,they were alomost red communists terrorists)
seriously injured,13
minor injuries,18

Chinese dead who were killed been mistaken as Korean,3
serious injuries,5



■ an investigation by Interior Ministry security bureau in Japan

korean dead,231
Japanese dead who were killed by being mistaken as Korean,59


the above studies were investigated by another institutions, but error of Korean dead were two.
Error of Japanese dead was one.
It is a good idea to say the exact investigation.


As a result of investigating by Chosun Governor's Office,
the dead or missing in the Great Kanto Earthquake entire (including in slaughter) ,Korean dead were 832.

※ In other words, (200 died in the massacre)+(600 missing or dead in the earthquake)
for one Korean survivor, gifted the solatium of 200 yen, the local government had visited to the survivor.
Solatium total amount was 166000 yen.



大爆笑!関東大震災で朝鮮-人6000人が虐殺?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 | HOT! テーマトーク
No.489216 投稿者: masairyu4 作成日: 2007-01-31 18:56:58 閲覧数:105 推薦ポイント:2 / 0

■日本の司法省の調査書

韓国人の死者233名
重傷15名
軽傷27名

韓国人と間違えられて殺された日本人死者58名
重傷13名
軽傷18名

韓国人と間違えられて殺された中国人死者3名
重傷5名


■日本の内務省警保局の調査

韓国人の死者231名
韓国人と間違えられて殺された日本人死者59名


別の機関による調査ですが、韓国人死者の誤差は2名。
日本人死者の誤差は1名です。
正確な調査と言って良いでしょう。


またChosun総督府が調査した結果、韓国人の関東大震災全体の死者(虐殺も含む)&行方不明者は832名でした。
※つまり(虐殺で死んだ人200人)+(地震で死んだ人&行方不明者600人)という事です。
韓国人の遺族には1人200円の見舞金を贈り、地方官が遺族を慰問しました。見舞金総額は16万6千円です。


■金承学の調査
※金承学=当時、上海にあった独立運動機関誌「独立新聞」の社長

韓国人の死者6415人

何故、上海でこんな数字を掴めたのでしょうか?
コーリャン粥の奪い合いをしていた乞食同然の独立運動家に!

出鱈目な数字です。

韓国や在日は「金承学の調査」の6000人を今でも、そのまま主張しています。
北Chosunは更に×3をして20000人と主張しています。

また、実際に起こった200人の虐殺の原因も「デマ」だけが原因のように思われていますが、それは違います。


戦前の日本における韓国人の姿

■韓国人詩人の金素雲の自伝より抜粋

日本人所有の家を借りたら、家賃は全く払わないのが、戦前の同胞の間では常識化していた風習だった。
「日本は国まで盗んだじゃないか!家賃が何だ!」
こちらにはこうした理屈があったが、騙された日本人は恨みが貯まるのは当たり前だった。
家賃を貰う事が出来ない上に、半年分の家賃に相当する金を「立ち退き料」という名目で払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こんな時に、その仲介をするのが叔父の仕事だった。
(同胞が集団居住する町には、こんなブローカーが必ず数人いた)
1、2年只で住んで、「立退き料」を奪って家を空けてやる事もあった。 
引っ越した次の日に大家から「立退き料」を奪って、また引っ越していく・・・そんな場合もあった。
その「立退き料」の半分が叔父のようなブローカーの収入になる。
もちろん、これは50年前の昔話だが、こうした事が日本人が「韓国人」を敬遠し、蔑視する後遺症の種になった事は事実である。
http://www.geocities.co.jp/HeartLand-Kaede/3250/noriasa/mondai2.htm

■その当時の新聞記事(一部です)

『蛇を吊し煙で燻べ家主をいやがらせて立退料四万円余をせしめた/鮮-人連の組織的恐喝』 大阪朝日 1926/11/14
『「借りた以上はおれのもの」/替玉を住せて立退料を/被害各方面に及ぶか(武庫郡精道村)』 神戸又新日報 1931/12/3
『僅か一ヶ月に四軒から立退料/ペテン師鮮-人の凄腕/悪運つき芦屋署へ検挙』 神戸又新日報 1932/12/17
『悪鮮-人の借家戦法/目指すは立退料/囮を使って巧みに家主泣かせ/同時に二組検挙さる』 神戸新聞 1932/8/31
『貸家へ無断で住み家具一切を薪に/立退料をうけ高架下を追はれた乱暴な韓国人十名(須磨)』 神戸又新日報 1930/10/22
『立退料目あてに借家を渡り歩く/内地人を手先に使った家主泣かせの鮮-人』 大阪毎日 1928/10/4
『家賃を払はぬ鮮-人に明渡し判決(飾磨郡津田村)』 神戸又新日報 1927/12/6
『封印を破って勝手に住み込む/家賃払はぬため明渡しを執行された男(飴行商)』 神戸又新日報 1929/8/23
『家賃を払はぬ鮮-人追ひ出されて暴行/大挙して空家に押入る(林田)』 大阪毎日 1930/2/26
『家主泣かせの「糞小路」の鮮-人長屋/家賃を払はず立退きにも応ぜぬ/市で善後策を協議(林田)』 大阪毎日 1934/7/26
『立退料目あてに借家を渡り歩く/内地人を手先に使った家主泣かせの鮮-人』 大阪毎日 1928/10/4
『貸家へ無断で住み家具一切を薪に/立退料をうけ高架下を追はれた乱暴な韓国人十名(須磨)』 神戸又新日報 1930/10/22
『風采と巧言で偽り/鮮-人の借家荒し/立退料取りの常習/湊川署に元兇検挙さる』 神戸新聞 1931/6/6
『家主泣かす悪鮮-人の群/替玉使って家を借り、立退料を恐喝』 神戸新聞 1932/2/27
『立退料ばかり二千余円/鮮-人を手先に使ふ/うるさい借家人(林田)』 神戸又新日報 1932/3/20
『悪辣な鮮-人の家主泣かせ/新進会長が仲に入って立退料六千円を取る』 福岡日日 1926/12/2
『「借りた以上はおれのもの」/替玉を住せて立退料を/被害各方面に及ぶか(武庫郡精道村)』 神戸又新日報 1931/12/3

平時でさえ、この有様です!

こんな非常識な民族が震災のような混乱時にどんな行動を起こすか・・・。それは戦後の混乱時の「三国人(韓国人)」が証明しています。

戦後の混乱時の韓国人の姿

■ハーバード大学教授エドワード・ワーグナー(Chosun史)の言葉

戦後の日本で韓国人は常に刺激的な勢力だった。
人数は激減したが、韓国人は依然として騒々しかった。 
感情的であった。
無駄な疲労の原因になるような集団だった。
彼らは絶対に敗戦国民の日本人に加担しなかった。
逆に戦勝国民の仲間入りをしようとした。
韓国人は「日本の法律は我々には適用されない!」と考えていた。
だからアメリカ占領軍(GHQ)の指令も日本の法律と同じように殆ど無視して行動した。
韓国人の行動は日本国内に非常な混乱を発生させた。
占領当初の数ヶ月、在日韓国人炭鉱労働者の頑強な反抗のせいで、日本の重要産業の石炭産業の再建は損害を被った。
経済的領域での韓国人の様々な活動は、日本経済再建の努力を頻繁に妨害した。
1948年の神戸の緊急事態宣言は日本の教育改革を韓国人が妨害した結果だった。
占領当局(GHQ)が決定した韓国人帰国政策を日本政府が実施しようとすると、これも妨害した。
(中略)
こうした韓国人の犯罪性が日本人と韓国人の関係に与えた悪影響は依然として甚大だ。
韓国人の略奪行為が殆ど日本人の庶民の日常生活の重要な地域で行われた事も原因だ。
更に韓国人は日本に不法に入国しようとした。 
不法入国の時、伝染病も持ち込んだという事情もあり、日本人の不安を増幅した。
「“韓国人は悪だ”という心理が時間の経過で日本人の心から薄れていく」と予想する事は全く出来ない。

これが「混乱時における韓国人の行動」です。 

関東大震災は死者10万人以上の未曾有の大災害です。
その大災害で秩序を乱す行動をする非常識な民族がいたら・・・。
そして、それを取り締まる警察機関も機能していなかったら・・・。

むしろ間違って殺された60人の日本人が可哀相です。 

ちなみに当時はまだ韓国人の日本への渡航が許されていません。
つまり、殺された人はほぼ全て「不法入国者」である事も記しておきます。

대폭소! 관동 대지진으로 조선-사람 6000명이 학살? 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 | HOT! 테마 토크No. 489216투고자: masairyu4작성일:2007-01-3118:56:58열람수:105추천 포인트:2/0

■일본의 사법성의 조사서

한국인의 사망자 233명 중상 15명 경상 27명

한국인과 잘못할 수 있어서 죽음을 당한 일본인사망자 58명 중상 13명 경상 18명

한국인과 잘못할 수 있어서 죽음을 당한 중국인사망자 3명 중상 5명


■일본의 내무성警다모쓰(保)국의 조사

한국인의 사망자 231명 한국인과 잘못할 수 있어서 죽음을 당한 일본인사망자 59명


별도의 기관에 의한 조사입니다만, 한국인사망자의 오차는 2명.
일본인사망자의 오차는 1명입니다.
정확한 조사라고 말해도 좋지요.


또 Chosun총독부가 조사한 결과, 한국인의 관동 대지진 전체의 사망자(학살도 포함한다) &행방불명자는 832명이었습니다.
※ 즉 (학살로 죽은 사람 200명)+ (지진으로 죽은 사람&행방불명자 600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의 유족에게는 1명 200엔의 위문금을 보내고, 지방관이 유족을 위문했습니다. 위문금총액은 16만6000엔입니다.


■돈 쇼(承)학의 조사※돈 쇼(承)학=당시, 상해에 있었던 독립 운동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한국인의 사망자 6415명

왜, 상해에서 이런 숫자를 잡을 수 있었습니까?
수수 죽의 서로 빼앗음을 하고 있었던 걸식 동연의 독립 운동가에게!

엉터리인 숫자입니다.

한국이나 재일은 「돈 쇼(承)학의 조사」의 6000명을 지금도, 그대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북Chosun은 게다가 ×3을 해서 20000명과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실제로 일어난 200명의 학살의 원인도 「헛소문」만이 원인과 같이 생각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틀립니다.


전전의 일본에 있어서의 한국인의 모습

■한국인시인의 김소운의 자전보다 발췌

일본인소유의 집을 빌리면, 집세는 완전히 지불하지 않는 것이, 전전의 동포의 사이에는 상식화하고 있었던 풍습이었다.
「일본은 나라까지 훔쳤지 않은가! 집세가 무엇이다! 」 이쪽에는 이러한 이론이 있었지만, 속은 일본인은 원한이 괴는 것은 당연했다.
집세를 받을 수 없는 위로, 반년 분의 집세에 상당하는 돈을 「퇴거료」라고 하는 명목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때에, 그 중개를 하는 것이 백부의 일이었다.
(동포가 집단거주하는 도시에는, 이런 브로커가 반드시 몇명 있었다) 1, 2년 공짜로 살고, 「퇴거료」를 빼앗아서 집을 비울 것도 있었다.  
이사한 다음 날에 대가에게서 「퇴거료」를 빼앗고,또 이사해 간다… 그런 경우도 있었다.
그 「퇴거료」의 반이 백부와 같은 브로커의 수입이 된다.
물론, 이것은 50년전의 옛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것이 일본인이 「한국인」을 경원하고, 업신여기는 후유증의 종(씨앗)이 된 것은 사실이다.
http://www. geocities. co. jp/HeartLand-Kaede/3250/noriasa/mondai 2.htm

■ 그 당시의 신문기사(일부입니다)

『蛇오吊시煙데燻베家主오이야가라세테立退料四万円余오세시메타/鮮-人連노組織的恐喝』大阪朝日1926/11/14『「借리타以上하오레노모노」/替玉오住세테立退料오/被害各方面니及부카(武庫郡精道村)』神戶又新日報1931/12/3『僅가一月니四軒가라立退料/페텐師鮮-人노凄腕/惡運쯔키芦屋署헤檢擧』神戶又新日報1932/12/17『惡鮮-人노借家戰法/目指스하立退料/⊙오使데巧미니家主泣가세/同時니二組檢擧사루』神戶新聞1932/8/31『貸家헤無斷데住미家具一切오薪니/立退料오우케高架下오追하레타亂暴나韓國人十名(須磨)』神戶又新日報1930/10/22『立退料目아테니借家오渡리步구/內地人오手先니使다家主泣가세노鮮-人』大阪每日1928/10/4『家賃오拂하누鮮-人니明渡시判決(飾磨郡津田村)』神戶又新日報1927/12/6『封印오破데勝手니住미⊙무/家賃拂하누타메明渡시오執行사레타男(飴行商)』神戶又新日報1929/8/23『家賃오拂하누鮮-人追히出사레테暴行/大擧시테空家니押入루(林田)』大阪每日1930/2/26『家主泣가세노「糞小路」노鮮-人長屋/家賃오拂하즈立退기니모應제누/市데善後策오協議(林田)』大阪每日1934/7/26『立退料目아테니借家오渡리步구/內地人오手先니使다家主泣가세노鮮-人』大阪每日1928/10/4『貸家헤無斷데住미家具一切오薪니/立退料오우케高架下오追하레타亂暴나韓國人十名(須磨)』神戶又新日報1930/10/22『風采도巧言데僞리/鮮-人노借家荒시/立退料取리노常習/湊川署니元兇檢擧사루』神戶新聞1931/6/6『家主泣가스惡鮮-人노群/替玉使데家오借리、立退料오恐喝』神戶新聞1932/2/27『立退料바카리二千余円/鮮-人오手先니使후/우루사이借家人(林田)』神戶又新日報1932/3/20『惡辣나鮮-人노家主泣가세/新進會長가仲니入데立退料六千円오取루』福岡日日1926/12/2『「借리타以上하오레노모노」/替玉오住세테立退料오/被害各方面니及부카(武庫郡精道村)』神戶又新日報1931/12/3

평시로마저, 이 모양입니다!

이런 비상식인 민족이 지진 재해와 같은 혼란시에 어떤 행동을 일으킬 것인가 ···. 그것은 전후의 혼란시의 「삼국인(한국인)」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전후의 혼란시의 한국인의 모습

■하버드 대학교수 에드워드·바그너(Chosun사)의 말

전후의 일본에서 한국인은 항상 자극적인 세력이었다.
인원수는 격감했지만, 한국인은 여전히 요란스러웠다.  
감정적이었다.
쓸데없는 피로의 원인이 되는 것 같은 집단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패전 국민의 일본인에게 가담하지 않았다.
반대로 전승 국민의 한패가 됨을 하자로 했다.
한국인은 「일본의 법률은 우리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국 점령군 (GHQ)의 지령도 일본의 법률과 같이 대부분 무시해서 행동했다.
한국인의 행동은 일본국내에 대단한 혼란을 발생시켰다.
점령 당초의 몇개월, 재일 한국인탄광노동자가 완강한 반항 때문에, 일본의 중요산업의 석탄산업의 재건은 손해를 썼다.
경제적 영역에서의 한국인이 각양각색인 활동은, 일본경제재건의 노력을 빈번하게 방해했다.
1948년의 고베(神戶)의 긴급사태선언은 일본의 교육 개혁을 한국인이 방해한 결과이었다.
점령 당국(GHQ)이 결정한 한국인귀국 정책을 일본정부가 실시하자로 하면, 이것도 방해했다.
(중략) 이러한 한국인의 범죄성이 일본인과 한국인의 관계에 준 악영향은 여전히 막대하다.
한국인의 약탈 행위가 대부분 일본인의 서민의 일상생활이 중요한 지역에서 실시된 것도 원인이다.
더욱 한국인은 일본에 불법이게 입국하자로 했다.  
불법입국의 때, 전염병도 가져왔다고 하는 사정도 있어, 일본인의 불안을 증폭했다.
「“한국인은 악이다”이라고 하는 심리가 시간의 경과에서 일본인의 마음속으로부터 엷어져 간다」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완전히 할 수 없다.

이것이 「혼란시에 있어서의 한국인의 행동」입니다.  

관동 대지진은 사망자 10만명이상이 사상 처음인 대재해입니다.
그 대재해로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을 하는 비상식인 민족이 있으면 ···.
그리고, 그것을 단속하는 경찰기관도 기능하지 않고 있으면 ···.

오히려 틀려서 죽음을 당한 60명의 일본인이 불쌍합니다.  

덧붙이자면 당시는 아직 한국인의 일본에의 해외 출국이 용서되고 있지 않습니다.
즉, 죽음을 당한 사람은 거의 모두 「불법 입국자」인 것도 기록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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