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0, 2012

옛날에변진(边鎭)에창기(娼妓) Kisaeng pictures

http://blog.ohmynews.com/feminif/415507



▲고대 사대부를 위한 기쁨조 기녀(妓女)들(출처: 상하이문예출판사)

창기 (娼妓)



http://lakecity.tistory.com/tag/%EC%96%B4%EC%9A%B0%EB%8F%99





キーセンの彼女は、イギリスが中国に輸出した阿片を吸っています
기생의 그녀는, 영국이 중국에 수출한 아편을 빨고 있습니다
Kisaeng; the hetaera smokes opium which British exported to China


the Ryanban,noble man who puts on the colored jacket feels up her crotch.
양반의 귀인이 기생의 다리 가랑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両班の貴人がキーセンの股をまさぐっています

조선시대의 섹스스캔들, 감동과 어우동 | 역사 이야기 2009/03/22 04:34
Posted by 황금비늘

고 장자연 씨의 유서에 적힌 성상납 문제로 온통 시끄럽다.
개인적으로 별로 관심이 없는데도 방송에서 하도 떠들어대니 조금은 볼 수 밖에 없을 정도다.
(기자들은 기사거리 넘쳐나서 신났을 듯..;)

고 장자연 씨 사건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조선시대의 양대 섹스스캔들'이라는 조금은 선정적인 주제로 글이 쓰고 싶어졌다.


1.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종지도(三從之道)


드라마 '천추태후'의 왕욱과 황보설

드라마 천추태후를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보수적인 옛 시대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 종종 등장한다.

고려 태조 왕건의 부인 신정왕후 황보(皇甫)씨가 낳은 대종(戴宗) 왕욱(王旭)은
태조와 정덕왕후 유씨가 낳은 배다른 누이 선의왕후와 결혼하여
성종(6대), 천추태후(헌애왕후)와 헌정왕후를 낳는다.
이 중 헌애왕후(황보수)와 헌정왕후(황보설)는 사촌오빠인 경종(5대)과 결혼하고
헌애왕후는 경종과의 사이에서 경종이 죽기 1년 전 유일한 왕자 송(誦, 훗날 목종(7대))을 낳는다.
경종이 죽은 헌애왕후는 외가친척인 김치양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았다.
헌정왕후는 이복숙부 안종(安宗) 왕욱(王郁)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는데, 이 아이가 훗날 현종(8대)이 된다.

정신없이 복잡하지만 재미있지 않은가?
자매가 사촌과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자 외가친척, 삼촌과 정을 통하는 이런 상황은
현대 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 몰라도,
근친혼이 하나의 풍습이었던 고려시대에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근친혼 뿐만 아니라 위에서 알수 있 듯 고려시대에는 남편을 잃은 여인들의 재가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고려전통의 정조 관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유교적 잣대와는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유학을 고려의 통치이념으로 삼으려던 그녀들의 오빠 성종은 이런 상황을 용납할 수 없던 것 같다.
그는 김치양에게 곤장을 친 후 귀양 보내었으며, 안종 왕욱 또한 경상도 사천으로 귀양 보내졌다.

자유로웠던 여성의 지위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이 세워진 후에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이는 유교가 여성에게 강요했던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종지도三從之道)에 여실히 드러나있다.

칠거지악(七去之惡): 남편의 일방적인 의사표시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잘못
1)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음 (不順父母)
2) 아들이 없음 (無子)
3) 음탕함 (不貞)
4) 질투함 (嫉妬)
5) 나쁜 병이 있음 (惡疾)
6) 말이 많음 (多言)
7) 도둑질을 함 (竊盜)

삼종지도(三從之道): 여자가 지켜야할 세 가지 법도
女子有三從之道: 여자는 세 가지의 좇아야 할 길이 있는데,
在家從父: 집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適人從夫: 시집을 가면 지아비에게 순종하며,
夫死從子: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의 뜻을 따라야 한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여성은 성은 물론 정신과 노동력까지 완벽하게 노예에 가까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여성 억압은 남성들에 의해 구조적으로 또한 집요하게 자행되어왔던 것이다.
이를 벗어나는 또는 벗어나려는 여성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의 모든 여성들이 이런 억압에 종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여성은 억압에 순응하면서 살아갔지만,
일부는 저항하고 또 일부는 오히려 남성을 지배하며 살아갔다.

여기서는 이들 중에서 성(性)적으로 남성을 지배했던 두 여성, 감동과 어우동에 대하여 적어보려한다.


2. 조선시대의 섹스스캔들 - 감동과 어우동


단원 김홍도의 춘화
김홍도와 신윤복은 바람의 화원에서처럼 생동감 있는 풍속화나 인물화만 그린 것이 아니다.
그들의 춘화는 생각보다 훨씬 더 하드코어적이다...-_-; 하드코어한 춘화는 아래 링크에서...
http://blog.empas.com/hspark2050/32052770

감동(甘同)은 조선 세종 때 남자 30 여명과 간통한 죄로 처벌 받은 여자이다.
아버지는 검한성(檢漢城)을 지낸 유귀수(兪龜壽)였고, 남편은 평양현감을 지낸 최중기(崔仲基)였다.
남편 최중기가 무안군수로 부임할 때 감동을 데리고 갔는데, 감동이 병이 생겨 서울로 올라왔다.
이 때 김여달이란 인물이 집으로 가는 감동을 순찰한다고 위협해 강간했던 일이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김여달은 대담하게도 남편이 없는 그녀의 집을 드나들면서 통정을 했고,
감동은 이미 버린 몸이라 생각하고 스스로를 창기(娼妓)라 칭하고 여러 남자들과 통정하였다고 한다.
(감동이 서울로 올라온 이유와 김여달에 의한 강간 시기, 간통한 자의 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감동이 공식적으로 밝힌 남자들의 숫자는 39 명이었으며,
그 외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이 양반이었지만 수공업기술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분에 상관없이 애정행각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에는 총제 정효문, 상호군 이효량, 해주판관 오안로, 전 도사 이곡 등 고관들의 이름도 보였고,
사직, 부사직, 판관, 찰방, 현감 등의 벼슬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정효문은 감동이 숙부 정탁의 첩이 되었을 때 통정을 하여
권격은 감동이 고모부 이효례와 관계가 있는 것을 알고도 통정을 하여 조선을 경악시켰다.
사헌부에서는 감동에게 교형, 정효문에게 참형에 처하게 하고
그외 관련자에게는 곤장과 자자(이마에 먹물로 죄를 새기는 것)을 청했지만,
감동은 최종적으로 관비로 변방으로 보내는 형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감동을 강간했던 김여달은 물론 나머지 사람들도 장형이나 파직 정도의 가벼운 처벌만이 내려졌다.
그 중에는 다시 벼슬에 오른 사람도 있다.

법에 의거하자면 사대부 집 출신의 여자와 간통을 한 남자들 역시 중벌에 처해져야 하는데,
이 시대에는 여자가 강간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 후의 행실이 정숙하지 못할 때는 남자에게 죄를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감동을 강간·폭행·위협·공갈한 김여달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주 극형 또는 중형을 청하는 일이 있었다.



혜원 신윤복의 춘화

김여달에게 강간당한 후 스스로 버린 몸이라 생각하고 창기로 살아갔던 감동에 비해
어우동은 스스로 억압에 저항하고, 오히려 남성을 지배했다는 점이 다르다.

정3품인 승무원 지사 박윤창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어우동은 자색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종친인 정4품 태강수 이동과 혼인한 그녀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었지만,
틀에 박힌 삶을 거부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대부분 양반과 정을 통한 감동과 달리 그녀는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조선의 대표적 지배 이데올로기인 신분제와 성차별 따윈 가볍게 무시해주는 센스를 발휘한 것이다.

그녀가 남편 외에 처음으로 정을 통한 대상은 그릇을 만드는 천한 신분의 은장(銀匠)이었다.
"남편이 나가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은장이 옆에 앉아서 그릇을 만드는 솜씨를 칭찬하다
내실로 끌어들여 마음껏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들어오면 몰래 숨기곤 했다."라고 하니
참 대담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애정행각은 곧 발각되었고 남편 이동은 어우동을 쫓아낸다.

어우동은 친정에 들어갔다가 집을 얻어 나간후 본격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한다.
그 곳으로 수많은 남자를 끌어들였고 그들을 지배한다.
그 중 하나가 전남편 이동과 가까운 친척뻘인 방산수 이난이다.
아무리 처첩제도가 공인된 조선시대에도 친척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난이 어우동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매력적이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어우동이 이난을 좋아한 것은 "그가 젊고 호탕하며 시를 지을 줄 알기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시기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시를 지을 줄 알았다는 점을 보면,
그녀도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그녀가 육체이상의 매력을 지녔음을 뜻한다.

수산수 이기 또한 이동의 친척으로 그녀와 정을 통하기도 했으며,
이시애의 난을 정벌한 공로로 1등 공신에 책봉된 어유소, 전 의금부도사 김휘, 우부승지 노공필,
절충장군 김세적, 전 부평부사 김칭, 전 좌랑 정숙지 등 많은 벼슬아치들이 그녀와 정을 통했다.
이중 어유소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에서 정을 통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예의의 나라 조선에서 감히 조상을 모시는 곳에서 간통이라니, 조선이 발칵 뒤집힐 만도 했다.

어우동의 애정행각이 어떻게 해서 발각되었는 지는 분명하게 알려져있지 않지만,
일단 한번 밝혀진 후 조선사회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격론끝에 그녀는 성종 11년 10월 사형에 처해졌지만,
그녀와 정을 통한 남성들은 성종 13년 이난과 이기가 유배에서 풀려난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어우동의 사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현재 사형제 존치론자들이 주장하는 범죄예방효과로써의 사형제를
그시절 어우동의 사형을 주장했던 신하들이 그대로 얘기했다는 것이다.
세종시절 감동을 사형시키지 않아 어우동의 사건이 재발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과연 그랬을까?
어우동이 사형에 처한 후, 조선 후기에는 표면적으로 섹스스캔들이 감소했다.
허나 조선후기의 화가인 김홍도와 신윤복의 노골적인 춘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그야말로 표면적인 감소가 아니었을까?

사형제 존치론의 범죄예방효과가 조선시대에도 이미 논의되었다고 하니,
그놈의 사형제 존치론... 참 지긋지긋하다.

게다가 그녀는 사형확정 당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형확정 18시간만에 집행된 위대하신 박정희 정권의 인혁당 사건이 생각나는 것은 나뿐인가...





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1/20091211005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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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46] 기생조합의 탄생
1909. 8. 29.~1910. 8. 29.
전봉관 KAIST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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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내부 상의사(尙衣司: 궁중의 의복을 담당하던 관청)와 약방에 소속되던 기생은 이번 새 관제에 빼어버린 고로 회사를 조직하고 기생들을 모집하되 기부(妓夫: 기둥서방)는 모두 쫓아 보내고 회사에서 관할하기로 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22일)

대한제국의 몰락은 기생의 생계도 위협했다. 조선시대 기생은 주로 관아의 기안(妓案)에 올라 있는 관기를 의미했다. 내의원 의녀, 상의원 침선비(針線婢)까지 기생에 포함되었다. 궁중이나 관아의 연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 주된 임무였던 기생은 성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창기(娼妓)와 엄격히 구분되었다. 전국 관아에 소속돼 있던 관기는 갑오개혁(1894년) 때 신분제 철폐로 천민의 신분을 벗고 각자의 삶을 찾아 나섰다. 이어 궁중의 관기도 1907년 일본 주도로 관제가 개편되면서 100여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해고되었다. 이듬해에는 그나마도 30명으로 줄어들었다.


▲ 권번 산하 기생학교(기생들이 사군자를 배우는 모습)
'각 궁사에 거행하는 관기가 80명인데, 50명은 해산하고 30명만 두기로 궁내부에서 의논하는 중인데, 기생들이 각기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분경이 대단하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25일)

관기가 해체되고 기생이 자영업자가 됨에 따라 창기와의 구분도 희미해졌다. 원래 기생은 가곡과 가사 같은 상류 계급의 노래를 불렀고, 삼패(노래 잘하는 창기)가 부르는 잡가와 판소리 같은 평민의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1906년 삼패가 기생의 전유물이던 홍우산(紅雨傘)을 사용할 수 있도록 경시청의 허가를 얻자, 기생은 홍우산에다 '기(妓)'자를 써서 다닐 만큼 자부심이 강했다. 그러나 관아에서 쫓겨난 기생은 자영업자로 살아남기 위해 대중이 선호하는 잡가와 판소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생과 삼패가 한 무대에서 공연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기생과 창기의 구분이 희미해진 후, 기생은 얼굴이 곱고 자태가 아리따운 '화초기생'과 소리·춤·서화 등에 능한 '소리기생'으로 구분되었다.

1908년 9월 공포된 '기생 단속령'과 '창기 단속령'은 기생이나 창기 영업을 하려면 경시청에 신고해 인가를 얻도록 했다. 관아에서 쫓겨나 자영업자로 전락한 기생들은 영업과 권익 보호를 위해 조합을 결성했다. 1909년 활동을 시작한 최초의 기생조합인 '한성기생조합'은 문천군 기근 구제를 위한 자선 연주회, 경성고아원 후원을 위한 자선 연주회 등 각종 자선 행사를 열기도 했다.

기생조합은 1914년 권번(券番)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명칭이 변경된 이후 기생들의 자율 조직으로서의 성격이 퇴색하고 기업화되었다. 한성권번, 대정권번, 조선권번 등은 1920년대 이후 주식회사로 확대되었다. 기생의 충원도 권번이 부모에게 200원 내외의 전차금(前借金)을 지불하고 10세 전후의 여아를 데려와 권번 산하 기생학교(기생들이 사군자를 배우는 모습)에서 교육시키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권번은 조선물산공진회 등 각종 관제 행사에 기생을 동원하는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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