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y 4, 2012

the comfort women for Korean army in 1961

http://japanese.joins.com/article/j_article.php?aid=24331

http://ianfukangaeru.blogspot.jp/2012/05/blog-post_07.html
http://hazama.iza.ne.jp/blog/entry/2678656/


Professor claims "there was military comfort women in the Korean War "

http://ianfu.blogspot.jp/2007/08/korean-armys-comfort-women.html
Korean Army's "comfort women"
According to Asahi Shimbun, Korean Army procured many "comfort women" during the Korean War.

In an international symposium, Kim Kiok, Visiting Professor of Kyonnam University in Korea, reported that at least eight witness testified that they used war brothels. And 89 brothels in 4 areas were used 204,560 times, according to the official record of the Korean Army edited in 1956.

A Korean government official admitted that they employed prostitutes voluntarily during the war and that it was different from the forced comfort women of Japanese Army.



「韓国戦争中にも軍慰安婦存在」韓国教授が主張
2002年02月24日19時29分
[ⓒ 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comment0mixihatena0
日本軍の慰安婦制度を真似た慰安婦制度が、韓国戦争当時、韓国軍にもあったという主張が提起されたと朝日新聞が24日報道した。

韓国の慶南(キョンナム)大学の客員教授の金貴玉(キム・キオック、40)氏は、23日京都の立命館大学で開かれた国際シンポジウムでこのように発表したと同新聞は伝えた。

金教授は「1996年以後、5年間『直接慰安所を利用したことがある』、『軍にら致され、慰安婦になった』など男女8人の証言を聴取した」と明らかにした。

金教授はまた「韓国陸軍本部が1956年編さんした公文書『後方戦史』に『固定式慰安所-特殊慰安隊』と記録された部分を発見し、これには4カ所で89人の慰安婦が1952年に限って20万4560回の慰安活動をしたという統計資料が添付されていた」と同新聞は付け加えた。

一方、国防軍事編纂研究所の関係者は『当時、軍は売春婦と合意の下で場所を提供した。また慰安行為の対価は部隊運営費から支給されたと聞いている」とし「しかし、日本の植民地時代に日本軍が人権を無視し、一般庶民を強制に連れてきて運営した従軍慰安所とは違う」と説明している。

「한국 전쟁중에도 군위안부 존재」한국 교수가 주장 2002년02월24일19시29분 [? 중앙일보/중앙일보일본어판] comment0mixihatena0일본군의 위안부 제도를 흉내낸 위안부 제도가,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에도 있었다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아사히신문이 24일 보도했다.

한국의 게이(慶) 남(【굔나무】)대학의 객원교수의 돈 다카(貴) 옥(김·【기옷쿠】, 40)씨는, 23일 교토(京都)의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에서 이렇게 발표했다고 동(同)신문은 전했다.

돈교수는 「1996년이후, 5년간 『직접 위안소를 이용한 적이 있다』, 『군에 납치되어, 위안부가 되었다』등 남녀 8명의 증언을 청취했다」라고 밝혔다.

돈교수는 또 「한국 육군본부가 1956년 편찬한 공문서 『후방전사』에 『고정식 위안소-특수위안대』와 기록된 부분을 발견하고, 이것에는 4군데에서 89명의 위안부가 1952년에 한해서 20만4560회의 위안 활동을 했다고 하는 통계자료가 첨부되고 있었다」라고 동(同)신문은 덧붙였다.

한편, 국방군사편찬 연구소의 관계자는 『당시, 군은 매춘부와 합의 아래에서 장소를 제공했다. 또 위안 행위의 대가는 부대운영비로부터 지급되었다고 듣고 있다」로 해 「밖에 하고, 일본의 식민지시대에 일본군이 인권을 무시하고, 일반서민을 강제에 데리고 와서 운영한 종군 위안소와는 다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東亜日報 September 14th 1961. Seoul city started the registration of comfort women for the UN soldiers

1961年9月1日
東亜日報

Σ(`□´)y-~~ はっと、間違った・・・国連軍の為にソウル市役所が慰安婦の登録を開始するお知らせだった・・・Orz

政府の関与ですか?

http://bbs.enjoykorea.jp/tbbs/read.php?board_id=thistory&nid=1839518


http://www29.atwiki.jp/boutarou/pages/13.html
“UN Soldier Comfort Women Registration Starts on the 13th”
From the _3th, as planned, the Seoul Metropolitan Police transferred the authority to register comfort women for UN soldiers to the front-line offices of the city’s Social Bureau (UN Soldiers’ Comfort Women VD Control Section).
Officials said, however, that this registration applies to women living with even one foreigner, regardless of legal marital status, and to women working as comfort women for UN soldiers.


UN軍相対慰安婦13日から登録実施
ソウル市警では市社会局に「国連軍相手慰安婦性病管理士業界」計画によって三日から国連軍相手慰安婦の登録を官下一線署に伝達して実施している。
ところで今度の登録対象は▲法的婚姻関係がなくただ一人の外国人と同居している女性▲国連軍相手慰安婦などだと言う。

元ネタの出所を確認したいところですが、東亜日報とあるので、調査は可能でしょう。

さて、これは広義の強制?狭義の強制?
韓国の女性部は何故黙ってるの?

政府が直接関与していた"証拠"なのにね。

UN군 상대위안부 13일부터 등록 실시 서울 시경에서는 시사회국에 「국련군상대위안부 성병관리 사업계」계획에 의해 사흘로부터 국련군상대위안부의 등록을 관아래 한 선서에 전달해서 실시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이번의 등록 대상은 ▲법적 혼인 관계가 없고 단지 한사람의 외국인과 동거하고 있는 여성▲국련군상대위안부등이다라고 말한다.

원형의 출소를 확인하고 싶은 곳입니다만, 동아일보라고 있어서, 조사는 가능하지요.

그런데, 이것은 광의의 강제? 협의의 강제?
한국의 여성부는 왜 다물고 있니?

정부가 직접 관여하고 있었다” 증거”인데도.

http://ameblo.jp/nidanosuke/entry-10028525658.html




ところで、NAVERでは9月1日になっていますが、9月14日が正しいのでお間違いなく・・

Korean prostitutionKorean comfort women
驚 Korean Sex Slaves for Americans during-after the Korean War
An ad on Korean news paper Donga Ilbo, 1 Sep 1961.

http://zeroempty000.blogspot.jp/2007/03/korean-comfort-women-during-korean-war.html

http://blog.livedoor.jp/tonchamon/archives/51387798.html

"Comfort women for UN forces, registration starts on 13th"(at Seoul city hall)

Bruce Cumings: There was a relatively seamless transition in terms of the American military replacing the Japanese military and so no one had an interest in probing into stories of the more than 100,000 Korean women who were dragooned into sexual slavery by the Japanese army. Really some of the former comfort women feeling themselves completely ruined and unable to return to their families became prostitutes for the American military after world war two.
It was such a degraded situation under the American occupation in the Korean war that a friend of mine who served in the Korean war said on Friday night they would bring in a half ton truck full of 150 women and they would be in a movie house having sex. These undoubtedly included women who were comfort women for the Japanese army
http://www.wnyc.org/news/articles/31050
According to Ohmaynews.
The comfort women during the Korean war is different than the comfort women during the WWII because the comfort women during the Korean war were legal prostitutes.(which is exactly same as the comfort women during the WWII)

According to professor Kim Gi Ok, the comfort system during the Korean war was exact copy of the Japanese one.
Mrs Moon Am Gae was kidnapped and became comfort woman for a Korean military officer. Other women who were kidnapped same time became comfort women too.

North Korean women who were captured by S.Korean or American forces were enslaved to be comfort women.

Some military officers were taking Korean girl students with them for "special purpose" while they were retreating.

Most Americans don't know the historical fact, do they?
What? The Koreans are lying?


キタさんのブログ、慰安婦問題FA
http://blog.goo.ne.jp/kitaryunosuke/e/9fc97f61d345c0220414ce3812fce2f7

Korean pimps arrested for human trafficking. (7 March 2007)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703/h2007030709073021980.htm

Comfort women in the world
http://abirur.iza.ne.jp/blog/entry/130519/


ohmaynews の記事原文と邦訳(容量の関係で全記載できませんでした)

<後方戦死>に積まれた '特殊慰安台実績統計表'は 1952年度に 4ヶ牛どおり編成された慰安台 89人が年間 20万4560人の兵力を '慰安'したと記録している.慰安婦 1人が一日平均 6~7人の将兵を慰安したのだ.またチェ名臣·チァギュホン·ギムフィオなど予備役将軍たちも朝鮮戦争期間に経験した慰安婦制度に対して "現わしたくない恥ずかしい軍部の恥部だが事実だ"と証言している.

もちろん韓国軍慰安婦制度は句日本軍 '従軍慰安婦' 制度を真似った跡にもかかわらず二つの制度は本質的に違う.韓国軍慰安婦は慰安婦動員方式や規模などでも句日本軍従軍慰安婦と比較にならないが,なによりも後者は強制性を帯びている国家動員体制の一環で施行されたという点が違う.

しかしその同じ根本的な差にもかかわらず韓国軍慰安台は設置同期や運営方式面で日本軍従軍慰安婦制度を真似って似ている姿をしたことまた事実だ.言わば慰安所の前で列をなして慰安婦を待つ軍人たちと戦闘力損失を防止するために定期的に性病検診をする軍医の姿などは日本軍従軍慰安所の風景と違うところないのだ.

また軍票(日本軍) 代りにチケット(韓国軍) みたいな対価が支払いされた取り引き形式に運用された点も外形上に似ている姿だ.日本右翼はこれを立てて余分の慰安所制度を一種の公娼制のようなことで正当化したりする.しかし軍票は日本の主要銀行がいつでもお金で取り交わしてくれる一種の '有価証券'だった.また公娼制が国家が女性の性を統制した場合なら慰安所の場合は展示という状況で国家よりもっと力強い力を発揮する軍が管理 ·運営の主体という点で被害女性たちに対する人権染躪はもっと極甚になるしかなかった.

それなら果して軍隊慰安婦,これらは誰だろう.ところで既存の資料どこにも慰安婦正体に対する言及はない.ギムグィオック博士によれば,ただいくつかの文献では少なくない帰還日製余分の慰安婦たちが朝鮮戦争当時性(性) 売買業で流れて行ったという経験的陳述による推定だけあるだけだ.1996年から束草で越南民研究をしてから初めて韓国軍慰安婦問題に対して関心を持って関連者たちをインタビューして来た金博士の推定によれば慰安婦の正体と類型は何種類で分けられる.

金博士がまず注目したことは,たとえ小規模ではあるが日本ミリタリズムの '慰安婦' 募集形態を瓜二つな形態の慰安婦が存在したという事実だ.それはちょうど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と慰安婦の '不幸な出会い'だった.匿名を要請した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出身人士とのインタビューを通じて金博士が明らかにしたこの一番目類型は拉致と強姦によって '慰安婦'になった事例だ.

ムンアムゲ(69) さんは 1951年 5月頃原産前海にある島で他の女性同盟院 3人と一緒に集まっている途中当時原産前海の女道で諜報工作活動をした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ドルに拉致されてからなかでも一人(李何某下士官)に劫奪あった後強制で '慰安婦'になったケース.

門さんは結局 1953年 7月停電になるまで女道で以下士官の子供を生んで一緒に暮した.一緒に拉致された他の女性たちも昼には軍人たちのご飯と洗濯をして夜には '慰安婦'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んな事は隣近譲り渡しでもあった.

金博士によればムンさんを拉致した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催何某さんは "部隊内に慰安婦を連れていることは過ちだが,'私たち'が '日本軍'とは違わないか,私たちとは血が通わアンヌニャであり拉致した慰安婦問題に対する説明を濁ごした"と言うのだ.また他の類型は本隊と落ちて独立的に炊事生活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部隊員たちが '慰安婦'を雇ったケース.金博士は自分の論文でこれらの正体に対してこんなに明らかにしている

"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 1は余分の慰安婦たちは職業的に身を売る女性たちだったと一蹴した.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 2度ここに同意した.ところで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 1や 2行っていた原産先に進むに慰安婦で全女性は 'その島へ来て郡だって飯をたいて洗濯してくれてほしい元金新調することができる'と言う話にだまされて来たと工作員 2は行き違う証言を言った.戦争未亡人として生活苦に苦しみながら一種の 'だね労務者'になったことは彼の選択だったと言っても軍隊慰安婦になったことは断ることができない強制的な状況で起こった事だった.なおかつ拉致された女性たちに選択権や拒絶圏は与えられなかった."

1950 年当時医科大学生だった李何某(73) さんは拉致または強要によって軍隊慰安婦になる所だったまた他の女性の事例だ.6·25 当時ソウルに残ってから人民軍に協力したことから国軍に逮捕したこのさんは他の女医大生 3人と一緒に引き継ぎされた部隊の将校 4人に '割当'になった.このさんは幸いに自分を可愛想にここは一将校の助けで釈放されたが他の 3人はあの時以後二度と見られなかった.

拉致または強要によって事実上の軍 '慰安婦' 役を一事例は多くないが朝鮮戦争に参戦した予備役将軍たちの回顧録にも一部登場する.1951年 8月陸軍いわゆる(総合31期)に任官して 1984年 8月陸軍所長に予編したギムフィオ将軍の回顧録 <人間の香り>(2000年)がそれ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7635

한국군 '특수위안대'는 사실상의 공창
[창간 2주년 기념 발굴특종]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 ②
02.02.26 19:00 ㅣ최종 업데이트 02.02.28 11:05 김당 (dangk)

기자가 충남 논산의 육군 제2훈련소에 입소한 1980년 당시까지만 해도 논산훈련소 담장을 넘으면 이른바 '담요부대'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훈련병이었던 기자가 '담요부대'를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훈련소 조교나 기간병들은 자신들이 '담요부대'와 조우해 '격전'을 치른 '무용담'을 곧잘 얘기하곤 했다.

'담요부대'는 훈련소 담장 밖에서 담요 한 장을 '무기' 삼아 훈련병들을 상대하는 창녀들의 속칭. 이런 이동식 사창 형태의 담요 부대원 이야기는 미담이나 신화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군이 직접 위안부대를 설치해 운용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한국군의 한국전쟁 기간 '위안부' 운용 사실을 보도한 일본 <아사히신문> 2월24일자 기사.(굵은 선내)
지난 2월22일 <오마이뉴스>에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는 발굴기사의 첫 회분이 보도된 이후 독자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군의 어두운 치부를 공개하고 반성하자는 것. 둘째, 구(舊) 일본군 위안부(慰安婦) 제도와는 다른 공창(公娼)이므로 불법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공창이건 사창이건 군이 전시(戰時)에 사기진작을 위해 위안부를 이용한 것이 뭐가 잘못이냐는 것이다. 이 2회분 기사는 주로 그 두 번째 반응과 직결된 답변을 담고 있다.

이 발굴기획 기사의 첫 회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군이 1951년 무렵부터 1954년까지 '특수위안대'라는 이름으로 고정식 혹은 이동식 위안부 제도를 도입해 운용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사실은 육군본부가 1956년에 편찬한 공식기록인 <후방전사(後方戰史)>(인사편)와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뒷받침된다.

<후방전사>에 실린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는 1952년도에 4개 소대로 편성된 위안대 89명이 연간 20만4560명의 병력을 '위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안부 1명이 하루 평균 6∼7명의 장병을 위안한 것이다. 또 채명신·차규헌·김희오 등 예비역 장군들도 한국전쟁 기간에 경험한 위안부 제도에 대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군부의 치부이지만 사실이다"고 증언하고 있다.

물론 한국군 위안부 제도는 구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를 흉내낸 흔적에도 불구하고 두 제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국군 위안부는 위안부 동원방식이나 규모 등에서도 구 일본군 종군위안부와 비교가 안되지만, 무엇보다도 후자는 강제성을 띠고 있는 국가 동원체제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그 같은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위안대는 설치 동기나 운영 방식 면에서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를 흉내내 비슷한 모습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위안소 앞에서 줄을 지어 위안부를 기다리는 군인들과 전투력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하는 군의관의 모습 등은 일본군 종군위안소의 풍경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또 군표(일본군) 대신에 티켓(한국군) 같은 대가가 지불된 거래형식으로 운용된 점도 외형상으로 비슷한 모양새이다. 일본 우익은 이를 내세워 군 위안소 제도를 일종의 공창제와 같은 것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군표는 일본의 주요 은행들이 언제든지 돈으로 교환해주는 일종의 '유가증권'이었다. 또 공창제가 국가가 여성의 성을 통제한 경우라면 위안소의 경우는 전시라는 상황에서 국가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군이 관리·운영의 주체라는 점에서 피해 여성들에 대한 인권유린은 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 '특수위안대'는 사실상의 공창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당시 국군이 설치해 운영한 이 '특수위안대', 즉 고정식 위안소의 성격이 사실상의 공창이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군의 공식기록에는 "휴전에 따라 이러한 시설의 설치 목적이 해소됨에 이르러 공창 폐지의 조류에 순명(順命)하여 단기 4287년 3월 이를 일제히 폐쇄하였다"(<후방전사> 148∼149쪽)고 되어 있다. 군 스스로가 '특수위안대'를 공창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단기(檀紀)를 서기(西紀)로 환산하면, 위안소를 '일제히 폐쇄'한 시점은 1954년 3월이다. 그런데 1947년 11월11일 미 군정청이 공포한 공창폐지령(법률 제7호)이 발효된 시점은 1948년 2월부터이다.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위안소 설치 시점은 1951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군은 공창폐지령에도 불구하고 1951년부터 1954년까지 약 3년간 불법으로 공창을 설치·운영한 범법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결국 군이 '공창 폐지의 조류에 순명해 위안소를 폐쇄했다'는 기록은 얼핏 보면 사실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범법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한 것이다. 군은 정부의 공창폐지령에도 불구하고 사실상의 공창을 3년 동안이나 불법으로 운영했으면서도 '공창 폐지의 조류에 순명해 폐쇄'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 군 위안소를 설치·운영하는 범법 행위의 주체는 누구일까. 이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기록이나 증언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한국군의 '위안대' 운용 사실을 처음 제기한 김귀옥 박사(경남대 북한전문대학원 객원교수)는 <후방전사>와 예비역 장군들의 회고록 그리고 관련자의 증언 등을 토대로 이렇게 주장한다.


"'특수위안대', 즉 군 위안소는 육군에 의해 설치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시 한국군의 작전체계상 군 위안대의 설치 및 관리문제에 대해 위로는 유엔군의 최종 승인 하에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래로는 특수위안대 부대장의 책임 하에 총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엔군의 최종 승인 하에 운영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1950년 7월 한국 정부가 육·해·공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위임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후방전사>도 밝히고 있듯이, 위안소 운영은 전선이 아닌 후방에 국한되어 있었다. 또 위안대 설치는 작전지휘권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유엔군의 최종 승인하에 운영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당시 국방부와 육군의 수뇌부는 이와 같은 불법행위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국방부에 합동참모회의가 설치된 시점은 '특수위안대'를 폐쇄하기 불과 한 달 전인 1954년 2월이므로 합참은 위안부 설치·운영의 계선 상에서 제외된다).


▲ 정일권 전 육군 참모총장. 한국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흉내낸 '특수위안대'를 군에 설치한 불법행위의 핵심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위안소를 설치·운영한 시점의 역대 육군 참모총장은 △5대 정일권 중장(1950. 6∼1951. 6) △6대 이종찬 중장(1951. 6∼1952. 7) △7대 백선엽 대장(1952. 7∼1954. 2) △8대 정일권 대장(1954. 2∼1956. 6) 등이다. 1951년으로 추정되는 설치 시점으로 보면 정일권·이종찬 두 총장 중 한 사람이다.

1948년 창군 당시의 군 수뇌부 인맥이 대부분 일본군·관동군 출신이었지만, 두 총장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이다. 한국전쟁 시절에 위안부 제도를 목격한 김희오 장군(예비역 육군 소장)의 "과거 일본 군대 종군 경험이 있는 일부 연대 간부들이 부하 사기 앙양을 위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증언은 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김귀옥 박사도 "군 위안부 창설의 기획자가 분명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자이거나 그에 영향을 받은 자로 추정할 수 있다"고 밝힌다.

군 관계자들은 이종찬 총장이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 군의 정치적 중립을 역설한 '참 군인의 상징'으로 간주되어온 점에 비추어 일단 정일권 총장 쪽에 군 위안대 설치·운영 가능성의 비중을 크게 둔다. 한편 당시 국방부장관 중에서는 제2대 신성모 장관(1949. 3∼1951. 5)과 제3대 이기붕 장관(1951. 5∼1952. 3) 중 한 사람이 설치를 승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군 위안부, 이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과연 군 위안부, 이들은 누구일까. 그런데 기존의 자료 어디에도 위안부 정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김귀옥 박사에 따르면, 다만 몇몇 문헌에서는 적지 않은 귀환 일제 군 위안부들이 한국전쟁 당시 성(性) 매매업으로 흘러들어 갔으리라는 경험적 진술에 따른 추정만 있을 뿐이다. 1996년부터 속초에서 월남민 연구를 하면서부터 처음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련자들을 인터뷰해온 김 박사의 추정에 따르면 위안부의 정체와 유형은 몇 가지로 나뉜다.

김 박사가 우선 주목한 것은, 비록 소규모이긴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위안부' 모집 형태를 쏙 빼 닮은 형태의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북파공작원과 위안부의 '불행한 만남'이었다. 익명을 요청한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 박사가 밝힌 이 첫 번째 유형은 납치와 강간에 의해 '위안부'가 된 사례이다.

문아무개(69) 씨는 1951년 5월경 원산 앞 바다에 있는 섬에서 다른 여맹원 3명과 함께 모여 있다가 당시 원산 앞 바다의 여도에서 첩보공작활동을 하던 북파공작원들에게 납치당했다가 그중 한 명(이아무개 하사관)에게 겁탈 당한 후에 강제로 '위안부'가 된 케이스.

문 씨는 결국 1953년 7월 정전이 될 때까지 여도에서 이하사관의 아이를 낳고 같이 살았다. 함께 납치된 다른 여성들도 낮에는 군인들의 밥과 빨래를 하고 밤에는 '위안부'가 되어야 했다. 이런 일은 인근 양도에서도 있었다.

김 박사에 따르면 문씨를 납치한 북파공작원 최아무개 씨는 "부대 내에 위안부를 데리고 있는 것은 잘못이지만, '우리'가 '일본군'과는 다르지 않느냐, 우리와는 정이 통하지 않느냐며 납치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설명을 흐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본대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취사생활을 해야 했던 북파공작원 부대원들이 '위안부'를 고용한 케이스. 김박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들의 정체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북파공작원 1은 군 위안부들은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여성들이었다고 일축했다. 북파공작원 2도 이에 동의했다. 그런데 북파공작원 1이나 2가 있던 원산 앞 섬에 위안부로 온 여성은 '그 섬에 와 군인들 밥하고 빨래해주면 한 밑천 장만할 수 있다'는 얘기에 속아왔다고 공작원 2는 엇갈리는 증언을 했다. 전쟁 미망인으로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일종의 '군 노무자'가 된 것은 그의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군 위안부가 된 것은 거절할 수 없는 강제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더욱이 납치된 여성들에게 선택권이나 거절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 한국전쟁 기간에 한국군과 미군이 체포한 인민군 간호원 2명. 당시 체포된 북한 여성의 일부는 강간당하거나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
1950년 당시 의과대학생이었던 이아무개(73) 씨는 납치 또는 강요에 의해 군 위안부가 될 뻔했던 또 다른 여성의 사례이다. 6·25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인민군에게 협력한 것 때문에 국군에게 체포된 이 씨는 다른 여자 의대생 3명과 함께 인계된 부대의 장교 4명에게 '배정'되었다. 이 씨는 다행히 자신을 불쌍히 여긴 한 장교의 도움으로 풀려났으나 다른 3명은 그때 이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납치 또는 강요에 의해 사실상의 군 '위안부' 노릇을 한 사례는 많지 않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예비역 장군들의 회고록에도 일부 등장한다. 1951년 8월 육군 소위(종합31기)로 임관해 1984년 8월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김희오 장군의 회고록 <인간의 향기>(2000년)가 그것이다.

1951년 8월 임관하자마자 동부전선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에 배속되어 향로봉 전투에 참가했던 김희오 장군이 당시에 이끈 소대원들은 대부분 수도사단이 함경도에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흥남 철수작전시에 대동(帶同) 월남한 주로 함흥-원산지역 고교 출신의 현지 입대 청소년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국군은 남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부 여고생들도 '특수 목적'으로 대동 월남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 여성 납치해 '위안부'로 이용하기도

김희오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후 전선을 빠져 나온 수도사단은 1951년 11월~1952년 4월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동원되어 당시 남원에 위치한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예하 주력부대로 8사단 등과 합동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김 장군은 소대장 시절 토벌작전 도중에 지리산의 전투지역 지휘소에서 목격한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대장 천막 속에서 분명코 전투복을 착용한 소녀 한 명이 나와서 기지개를 펴고 체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임하사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니 대대장께서 북진 당시 함흥 여고생을 애첩으로 동반, 철수하여 작전기간 중 순천에 모셨다가 최근 OP로 동반하였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대대장실에서 세숫물 대령 지시가 있었는지 당번병이 반합으로 물을 데워 가져가고 있었다."



▲ 한국전쟁 직전에 당시 38선 이남인 옹진반도를 방문해 여학생들의 영접을 받은 유엔 현장시찰단. 1950년 10월∼12월 북한 지역을 점령한 미군과 한국군의 일부 장교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면서 일부 여학생들을 '특수목적'으로 대동 월남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장군은 당시 행군할 때 솜이불 침구와 여자 화장품 상자가 전투 소대원의 대열 속에서 배낭 위에 덤으로 얹혀 가는 슬픈 현실을 목도하고 분노했지만, 점령지에서의 강간과 납치는 사실 비일비재한 상황이었다. '군 위안부'가 될 뻔했던 앞서의 이아무개 씨와 국군 출신으로 인민군 해방전사가 된 비전향장기수 양정호 씨나 다른 국군 출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유엔군과 국군은 1950년 10월∼12월 북한 지역을 점령한 동안 상당수의 민간 여성들을 겁탈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김귀옥 박사는 이렇게 추정한다.


"특히 좌익 부역혐의가 있는 젊은 여성에 대한 강간은 실제 및 가상적에 대한 통제 및 순치 방식의 하나였다. 비공식적으로 1950년에도 군 위안부나 위안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군의 풍기 문란을 우려하여 1951년 이후 군 위안대를 공식 창설했고 일선 군부대에서도 비정기적으로 군 위안부를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처럼 민간인 강간과 납치에 의해 이미 '위안부' 생활을 경험한 여성들의 상당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사창으로 흘러들어 갔다가 다시 '군 위안부'라는 공창으로 편입되는 악순환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예비역 장군들이 기억하는 또 다른 유형은 사창가에서 사들여온 가난한 여성들에 관한 것이다. 이런 여성들에 대한 '위안'의 대가는 사단 휼병부나 연대 인사처에서 지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는 분명한 사실은 전시 하에 특별위안대를 이용하는 것 이외에도 전방의 부대들은 필요시 군 위안부를 채용할 수 있었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귀옥 박사는 군 당국이 밝힌 위안대 폐지 시점에 대해서도 다음과 문제를 제기한다.


"군부대가 공식 운영했던 공창으로서의 위안대는 1954년 3월에 소멸했는지 모르지만, 북파공작원의 증언에서는 사실상의 위안대가 존재하고 있다. 그 위안대는 사창의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군부대가 공식적인 '후생비'의 명목으로 지출하고 북파공작원에 대한 포상의 형태로 존재해왔던 것 같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부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김귀옥 박사는 "현재로선 한국전쟁 당시 공식·비공식적 위안부 규모를 알 길이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다만 전쟁 직전 사창의 규모를 능가할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고 말한다.


▲ 한국전쟁 기간 후방에서 진행된 '쥐잡기 작전'(공비토벌작전)에서 생포된 여성 게릴라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군 '위안부'로 동원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관련 기록에 따르면, 1947년 11월 미 군정청이 공창폐지령을 발표하기 직전인 1947년 10월20일 현재 공창의 규모는 2124명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공창폐지령이 발효된 후인 1948년 10월말이 되면 사창은 5만여 명으로 급증한다. 또한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성 매매를 하는 여성은 30여만 명으로 늘어난다. 공창이 폐지되면서 사창은 급증한 것이다.

일부 여성학자들은 이처럼 성 매매 여성이 늘어난 데는 생활고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 수천 명의 위안부들이 해방 이후 고국에 들어와 생계를 잇지 못해 창기로 전락'했던 데도 원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앞에서 예로 든 경우처럼, 민간 여성들이 납치와 강제의 형태로 위안부가 되었던 사례도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김 박사의 지적이다.

"만일 한 발 양보하여 군 위안부가 과거 공·사창 출신이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 전전(戰前) 5만여 명의 공·사창이 전후 30여만 명으로 늘어난 문제와 관련지어 볼 때 설명되지 않는다. 군 위안부가 어떻게 동원되었으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에 대해 확실히 규명할 수는 없더라도 아직도 한국전쟁 당시 군부 책임을 맡았던 자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정부 당국은 이 문제에 대해 진상을 규명할 책임이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8112


"베트남전 때도 '위안대' 운용 계획"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 ③ - 김귀옥 박사 인터뷰
02.03.04 11:07l최종 업데이트 02.03.05 17:46l김당(da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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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귀옥 박사는 "냉전·친일파가 그 원조인 우리나라 우익이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한 일본 우익을 반성시킬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1950년 6월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위안소를 설치하고 3∼4개 중대 규모로 위안대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라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이 '공공연한 비밀'은 2월22일 <오마이뉴스>에 처음 보도되기까지 지난 50년 동안 남자들의 군 시절 무용담이나 술자리에서나 운위될 뿐 한번도 공론화되지 못했다.

한국군의 어두운 과거를 담은 이 공공연한 비밀은 학계에서도 '금단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구(舊)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근대사 연구가 눈을 돌리게 된 것이 냉전체제가 붕괴된 이 10여 년 사이의 일임을 감안하면,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에 대한 뒤늦은 관심은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더욱이 오랜 분단 상황과 군부 독재정권 하에서 군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종종 '이적행위'로 간주되었다.

한국군의 이 부끄러운 치부를 처음 '공론의 장'으로 끌어낸 이는 여성 사회학자인 김귀옥 박사(경남대 북한전문대학원 객원교수·사회학)다. 김 박사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사람들의 역사적 경험과 정체성을 연구하기 위해 지난 1996년 월남인 정착촌(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 등)에 들어가 현지 조사활동을 벌이다가 한국전쟁 당시 군이 운영한 위안소와 위안부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처음 접했다.

이산(離散)과 폭력 같은 전쟁과 분단이 야기한 문제들을 사회학적으로 연구해온 김 박사는 지난 수년간 한국군 위안부라는 민감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들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오면서 그 동안 그 실체가 전혀 공개되지 않았던 북파공작원과 민간인 납치(납남)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월간 <말>지와 <민족 21> 등에 기고해 주목을 끈 바 있다.

젠더(gender) 관점의 평화 연구자로서 늘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는 김 박사를 만나 '한국군 위안부'라는 민감한 주제를 연구하게 된 저간의 사정을 들어보았다.



▲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중인 지난 2월20일 서울 세종로 미 대사관 앞에서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의 상징인 '평화의 비둘기'를 들고 1인 시위중인 김귀옥 박사.


"북파공작원들 '위안부'도 현지조달"

- 한국군이 위안대를 설치·운영한 사실을 언제 어떤 계기로 처음 알게 되었나.
"1996년 11월 속초에서 월남민 인터뷰를 하던 중에 이 문제를 처음 접했다. 1950년 10월 유엔군에 체포된 이 월남민은 당시 민간인인데도 인민군으로 분류되어 거제도(포로수용소)로 이송될 때까지 포로로서 미군부대를 따라다니며 취사와 빨래를 했다. 그런데 이 월남민에 따르면 당시 부대에는 이남 말씨를 쓰는 위안대 여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이는 점령지(이북)에서 끌고 온 여자들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즉 미군과 국군이 50년 10월 휴전선을 돌파할 때 이미 여자들을 끌고 갔다는 얘기였다."

- 그것은 한국군이 아니라 미군 부대가 위안대를 운용한 얘기 아닌가.
"바로 그 얘기가 출발이 되어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와 관련된 기록을 1956년 육군본부가 편찬한 <후방전사>에서 발견했다. 사람들의 입 소문이나 기억의 소산이 아니라 군이 '특수위안대'라는 이름으로 위안소를 설치해 운영했다는 확실한 근거 기록을 찾게 된 것이다."

- 관련 기록을 찾은 뒤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 문제에 접근했는가.
"그 뒤로 군 관계자들을 만날 때면 이 기록의 진위 문제나 위안부 운용이 어느 정도 보편적인 것이었는지를 물어 확인하고 예비역 장성들의 회고록에 관련 기록이 있는지를 검토했다. 또 다른 위안대의 형태는 북파공작원과 위안부 여성의 만남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북파공작원이었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가운데, 원산 앞바다의 섬에서 첩보·공작활동을 하면서 북한 지역에 침투해 여성들을 납치하면 십중팔구는 강간을 하거나 여자들은 섬으로 끌고 와 위안부 역할을 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것은 HID 첩보부대의 일부에 국한된 얘기 아닌가.
"내가 만난 북파공작원들은 원산 앞 바다 섬을 몇 개 전전했는데 이런 위안부들이 그 섬마다 다 있었다고 증언했다. 원래 게릴라부대는 보급품을 현지 조달하게 돼 있지만 이들은 북한 여성까지 현지에서 (보급품으로) 조달했다는 얘기다. 나는 이런 현상이 증언자의 부대에만 있었다고 보지 않는다."

-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도 청취했는가.
"구체적인 증언을 청취하지는 못했다. 그 중에는 1951년 당시 16살에 북파공작원들에게 납치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고 아이 둘까지 낳은 할머니(1936년생)를 수소문해 어렵게 찾았는데 '전쟁 때 아이 낳고 고생하며 산 것밖에 없다'며 더는 할 얘기가 없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당시 친구들과 4명이서 여맹(女盟) 회의를 하다가 한밤중에 북파공작원들에게 납치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임에도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갖고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일본에서 열린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심포지엄에 발표한 김귀옥 박사의 한국군 위안부 관련 논문을 보도한 <아사히신문> 2월24일자 기사.
- 군이 위안소를 설치·운영한 시대적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1950년 전쟁 중에 많은 여성들이 강간과 겁탈을 당했다. 그런데 51년 여름이 되면 전선이 교착된다. 그러니까 50년에는 앞서의 유엔군 민간인 포로가 말한 것처럼, 여자들이 비정규적인 형태로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낮에는 빨래하고 밤에는 군인을 위안하는 그런 형태로 운용되었는데 51년 여름 전선이 교착되자 군 스스로 위안부 제도를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 필요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50년에는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강간과 납치 그리고 강제된 위안부 생활이 가능했다면, 51년에는 전선이 고착되어 후방의 지루한 전쟁이 계속되면서 주기적으로 전선에서 후방으로 교체되는 장병들에게 뭔가 유인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 제도를 도입한 것은 일본군에 복무한 경력이 있는 한국군 수뇌부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경험한 것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는가.
"예비역 장군들의 증언에 따르면,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한국전쟁 당시 군의 골간이었던 일본군·관동군 출신 장교들에 의해서 군 위안대가 창설되었다는 추정이다. 이것은 51년 당시 육군본부 휼병부(恤兵部)를 누가 주도했는지를 파악하면 훨씬 더 진전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간·납치에 의한 위안부도 있었을 것 추정"

- 군 위안부 제도의 도입을 기획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드러나지 않는가.
"육군본부의 공식기록인 <후방전사>에는 위안부 제도를 도입한 주체가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장군들의 증언으로 볼 때 일본군·관동군 출신으로 추정하는 데 무리가 없다. 그리고 육군이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것은, 그 당시에 작전지휘권을 유엔군(미군) 사령관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위안소 설치·운영에 관한 건도 유엔군(미군) 사령관이 최종 승인했거나 적어도 묵인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 미군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가진 것과 후방지역에서 한국군이 위안소를 운영하는 것은 별개라고 보는데.
"왜 위안부 제도의 미군 승인 문제를 꺼내냐면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이 위안대를 운영하려고 계획을 했는데 미군의 반대로 무산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이 그렇게 증언을 했다. 월남전 때도 한국군이 사기 진작을 위해 위안부 운영을 계획했는데 미군이 동의하지 않아 운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전쟁 때도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미군의 승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위안부 설치·운영에 관한 보고는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 한국전쟁 당시 군은 위안소를 어떤 방식으로 운영했나.
"크게 보면 육군본부에서 관할한 고정식 위안소과 이동식 위안소 그리고 비정규적인 위안부의 세 가지 형태이다. <후방전사>에 보면 육군은 서울에 3곳, 강릉에 3곳, 그리고 속초·원주·춘천 등 총 9곳에 고정식 위안소를 설치해 위안부를 붙박이로 두고 운영했다. 그리고 필요시에, 이를테면 전방에서 준후방지역으로 빠져나온 부대가 위안부를 요청하면 위안부 여성들을 거기로 보냈다. 일종의 이동식이다. 제3의 형태는, 일부 장군들의 기억에 따르면, 각 사단이나 연대 단위에서 사창의 여자들을 데려와 위안부로 이용하고 사단 휼병부나 연대 인사처에서 돈을 지급하는 비정규적인 임시 위안소이다. 비정규는 부대 사정에 따라 자체적으로 위안부를 이용한 것이지만 정규 위안소와 공통점은 개인(군인)이 아닌 군(부대)이 비용을 지급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정규적인 형태로 운영한 위안부가 정규적으로 운용한 위안부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것이 하나의 가설이다."

- 한국전쟁 당시 고정식 위안소의 설치 장소는 어디이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서울에 세 군데가 있었는데 가장 규모가 큰 곳이 충무로 4가 148번지에 소재한 위안소였다. 대한극장 앞인데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광희동이다. 물론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 번지수의 건물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86∼88년 무렵에 철거가 되어 지금은 기종빌딩으로 바뀌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자리에 있었던 낡고 허름한 건물을 사람들이 '해병대아파트'라고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광희동 토박이 조사를 통해 확인해 보았지만, 사람들은 왜 해병대아파트라고 불렀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 그곳이 민간인의 출입을 금지한 '군 전용 위안소'라는 근거가 있는가.
"민간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군 전용 위안소'라는 것은 <후방전사>에도 나온다. 또 군의관이 성병 관련 정기검진을 했다. 그리고 그 성격을 공창으로 파악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후방전사>는 위안소 폐쇄 배경을 '공창이 없어지는 시대 조류에 따라서 없앤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공창이다, 또는 아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가(군)가 운영한 것을 육군이 인정한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김귀옥 박사가 <민족 21>(2001년 9월호)에 쓴 '속초 세 할머니가 겪은 6·25 전쟁'에 관한 글과 사진. 이산(離散)과 폭력 등 전쟁과 분단이 야기한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글을 발표해 주목을 끌고 있다.
- 그렇다면 군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위안소를 운영했으며 위안부들은 어디에서 충원했나.
"위안소를 설치한 시점은 51년 여름으로 추정되고 폐지 시점은 54년 3월로 명시되어 있다.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충원되어 왔는지는 언급이 없다. 따라서 이것을 밝히는 것이 큰 숙제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일부 예비역 장군들이 기억하듯이 '종3 여자'(사창)만으로 충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속초 같은 데도 전시(戰時)에 사창이 있었는데 사창 여자들과 위안소 여자들은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그 근거는 무엇인가.
"해방 이후 공창이나 유곽의 여성은 약 2천여 명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여성들이 48년 말에 2만여 명으로 늘어났다가 전쟁이 끝나고 50년대 중반이 되면 30여만 명으로 늘어난다. 이런 통계를 보면 당시 사창 여자들만으로 군 위안소를 충원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상당한 인원은 여염집 여자들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가난과 빈곤 때문에 흘러들어온 사람도 있지만 일부는 강간과 납치에 의한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내가 만난 한 여성은 자기가 군부대에 잡혀 있을 때 그 부대에 이미 그런 여성들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우익이 반성해야 일본 우익을 반성시킬 수 있다"

-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논문을 이번에 일본에서 열린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심포지움'(2월22∼25일)에서 발표하게 된 특별한 배경이 있는가.
"지난 2000년 학술단체협의회가 주최한 한국전쟁 관련 학술행사의 종합토론회에서 아직까지 현대사에서 풀어내지 못한 과제의 하나로 한국군이 운영한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처음 얘기했다. 그래서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몇몇 신문기자들이 내게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달라고 했는데 그 규모나 실태를 아직 조사중이어서 지금은 얘기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 그해 겨울에 북파공작원에 대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위안부 얘기가 약간 들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 연구자인 후지메 유키 교수(일본 오사카 외대)가 이 글을 보고는 제5회 동아시아 평화 인권 대회에서 이것을 주제로 글을 발표하면 좋겠다고 공개적으로 추천하는 바람에 고민 끝에 결국 글을 발표하기로 결심을 했다."

- 한국군 위안부라는 민감한 주제의 논문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발표할 경우 이 논문을 일본 우익이 악용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는데 그에 대한 소신이나 반론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
"물론 그에 대한 고민은 여러 번 했다. 당연히 걱정하게 되는 것은 구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아직 매듭짓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 우익들이 이를 악용할 가능성이다. 그래서 사실 이 문제를 96년에 처음 접했으면서도 공론화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생각은 확고하다. 일본 우익도 문제지만 우리나라 우익도 그에 못지 않게 문제라는 것이다. 지난해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에서 드러났지만, 냉전 친일파가 그 원조인 우리나라 우익이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한 일본 우익을 반성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이른바 국익을 앞세워 이를 미뤄둘 것이 아니라, 군이 작성한 공식문건이 있는 한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역사 청산을 제대로 함으로써 일본 우익의 관점을 바꿔내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사과도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이 글을 쓰고 발표한 배경이다."

- 왜곡된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한국군 위안부 문제 진상규명을 위해 정부와 군 그리고 민간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군은 국가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데 여자들이 그 까짓쯤이야,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국가 차원에서 위안부를 동원한 것은 아니라고 발뺌하는 일본 정부의 논리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군이 어두운 과거사를 밝히는 것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군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군이 적극적으로 나서 당시 자료를 공개하고, 진상을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제2의 김학순 할머니(일본군 위안부 증언자) 같은 분이 나와서 증언을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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