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ne 15, 2012

Did they stop for the Han River Bridge? i see!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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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의 전차전 [ 1 ]
아하!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8/03 08:52
6·25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국군이 개전초기부터 일방적으로 밀린 이유는 한마디로 북한군과의 현격한 전력차이 때문이었습니다. 국군 제1, 6사단처럼 나름대로 분전을 벌이며 적을 막아내기도 하였지만 경원축선이 뚫리면서 개전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는 치욕을 겪었습니다. 이때 아군의 방어막을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워 돌파하였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한 국군의 초기 전력은 턱없이 부족하였고 결국 일선에서는 극심한 전차 공포증까지 나타났습니다.


[전차를 앞세워 서울 점령한 북한군]

북한군을 얕보고 자신만만하게 참전한 미군도 1950년 7월 5일 죽미령에서 벌어진 최초의 교전에서 머리에 혹이 나는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고 나서야 북한군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경험 많은 미군의 방어선을 유유자적하게 돌파한 북한군의 주력도 역시 전차였습니다. 그만큼 6·25전쟁 초기에 북한군의 T-34는 압도적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죽미령전투 (사진-연합뉴스)]

죽미령 다음에 미군이 방어선을 구축한 곳이 천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산에서 초전에 일방적으로 코피가 터진 스미스특임대(Task Force Smiths)의 참패가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천안에 방어선을 전개한 미 제24사단 34연대는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 제78전차대대 소속의 M-24 채피(Chafee) 경전차 8대로 구성된 로 전차소대가 1950년 7월 8일 천안에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안에 나타난 M-24 전차소대]

북한의 전차부대에 스미스특임대가 혼 줄이 났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제34연대 장병들은 그들의 전차가 모습을 보이자 환호를 지르며 이들을 맞이하였고, 전차소대원들은 보병부대의 뜨거운 환영에 의기양양해졌습니다. 그러나 전차소대원들은 앞으로 그들이 맞붙어 싸워야 할 북한군의 T-34 전차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T-34가 제2차 대전 당시에 활약한 훌륭한 소련제 전차라는 정도의 지식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2차 대전 당시에 독일군도 노획하여 사용하였을 만큼 T-34는 훌륭한 전차였습니다]

제2차 대전 당시에는 미국과 소련이 같은 편이어서 미군이 T-34와 싸운 경험이 없었으므로 앞으로 교전하여야 할 적 전차의 성능에 대해 전혀 알고 있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차라리 북한군이 독일제 판터(Panther)나 티거(Tiger)를 몰고 나왔다면 두려움을 가지고 전투에 나섰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전선에서 독일의 티거전차 1 : 1 직접 교전 시에 후퇴해도 군법으로 책임을 묻지 않을 정도로 강한 상대는 철저히 인정하였습니다.


[제2차 대전 당시 미군 주력전차인 M-4도 티거와 직접 교전을 삼가 하도록 하였습니다.( 독일의 티거와 미군의 주력이었던 M-4의 비교 모습 )]

어쨌든 초전에 스미스특임대가 북한군 기갑부대에 박살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차소대원들이나 전차소대를 증원받은 미 제34연대는 충분히 북한군을 격멸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만만하지만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사병들과는 달리 산전수전을 다 겪은 지휘관들은 앞으로의 상황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일화입니다.


[젊은 전차소대장은 적 전차를 이렇게 만들겠다고 자신하였습니다]

전선을 시찰하는 도중 전차소대를 보게 된 워커(Walton Walker) 미 제8군 사령관은 전차소대장에게 "귀관은 무엇을 하려 하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젊은 소대장은 "저는 돌격할 생각입니다." 라고 결연히 대답을 하였는데, 워커 사령관을 안내하던 딘(William F. Dean) 미 제24사단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차소대장이 죽음을 각오한 것 같은 결연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워커는 북한군 전차에 대한 정면 돌격이 무모한 시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천안 인근에서 전선을 시찰하던 워커(좌)와 딘]

패튼(George Patton Jr.)의 오른팔로 제20군단을 지휘하며 유럽평원을 휩쓸고 다닌 워커는 유럽의 기갑전에서 겪었던 실전을 일일이 예로 들면서 적 전차를 상대하는 요령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워커는 혈기왕성한 전차소대장에게 "지금 우리는 공격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유리한 장소에서 적을 지연시켜야 할 때다."라고 말하며 신중히 작전을 펼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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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다리 때문에 멈추었나? [ 2 ]
아하!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7/13 07:59

한강교량 폭파는 시기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후퇴 시 한강교량 같은 거대한 다리의 폭파는 철수하는 아군이 철수가 완료된 후 적의 추격 도하가 이루어지기 직전에 실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한강교량들이 폭파될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우선 무슨 이유에서인지 너무 성급하게 폭파가 이루어졌는데, 이후 관련 재판에서도 그 책임소재가 명확히 밝혀지지도 않았습니다.


[한강교량의 폭파는 시기부터 잘못된 작전이었습니다]

다리가 폭파되던 당시에 북한군 주력은 아직 서울 외곽에 있었고 오로지 2대의 북한군 전차만이 당시 서울의 북쪽 경계인 미아리를 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서울 방어를 위해 투입된 많은 아군부대들이 한강 북쪽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는데, 동부전선의 제6, 8사단과 옹진반도에서 퇴각한 독립 제17연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부대들이 이곳에 투입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서울 방어의 중핵인 의정부 지구에서 선전을 독려하는 최병덕 총참모장을 비롯한 군수뇌부]

비록 제7사단처럼 초전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부대들이 많아 서울의 함락이 예견될 정도로 상황은 암울하였지만 반면 경의축선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던 제1사단처럼 고군분투하던 부대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건재가 유지되었건 아니면 무너졌건 한강 이북에 있던 모든 국군 장병들은 침략자를 막아내기 위해서 그야말로 고군분투 중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후방의 한강다리 폭파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열악한 조건에서 싸우던 국군에게 한강교량 폭파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후퇴로가 없어졌다는 의미로만 해석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한창 전투와중에 한강다리들을 폭파함으로써 국군 지도부 스스로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의지가 없음을 증명하였고, 이 때문에 한강이북에 있던 부대들의 전투 의지 또한 급속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아군은 모든 중장비를 유기한 체 단위부대 별로 흩어져 한강을 건너게 되는데 바로 이때 전쟁 초기 아군의 전력이 가장 많이 감소되었습니다.


[나룻배를 이용하여 한강을 도하하여 후퇴하는 국군의 모습]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지원 나온 미 군사고문단의 처치(John H. Church) 준장은 미증원부대가 올 때까지 서울에서 적극 시가전을 펼칠 것을 권고하였지만 육군본부는 다리를 성급히 폭파함으로써 서울을 사수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증명하였습니다. 반면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 탈환 작전 당시에 전력이 열세였던 북한군은 서울을 요새화하여 무려 열흘 가까이나 방어해 내었습니다. 이처럼 서울은 적에게 점령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내어준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서울은 점령당한 것이 아니라 내어준 것에 가까웠습니다.]

다리 폭파직전에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전개한 부대는 서울을 방어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야반도주한 위정자들을 따라 함께 내려온 육군본부와 김포반도에 긴급 배치된 일부 부대들뿐이었습니다. 즉, 한강교량의 폭파는 어떠한 전후좌우 사정도 가리지 않고 국군 주력을 한강 이북에 그대로 둔 상태로 무턱대고 벌인 우발적인 사건과 다름 아니었습니다. 한강교량 폭파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었냐는 폭파 당일의 모습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한강교량 폭파에서 나타난 문제점은 위정자들의 보여준 무책임의 극치였습니다]

비록 방송에서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이야기하였지만 위정자들이 서울을 버리고 야밤에 줄행랑쳤다는 소문이 돌자 수많은 시민들이 한강교량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제하지도 않은 체, 다리를 폭파하여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서울 시민들이 폭사하거나 한강으로 떨어져 익사하였고 50여대의 차량도 함께 파괴되었습니다. 아무리 위급한 전시라도 이것은 결코 용납하기 힘든 작전이었습니다.


[개전 초 북한의 남침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이 최근 드러났습니다 ]

결국 한강교량의 폭파는 필요하였지만 시기와 방법이 완전히 잘못된 작전이었습니다. 한강교의 폭파로 잃은 것은 수도 서울의 조기함락, 국군의 조속한 붕괴 그리고 죄 없는 민초들의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희생을 대가로 얻은 것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은 미미하였습니다. 처음 언급하였던 것처럼 처음에는 북한군의 진격을 3일간 막은 이유로도 보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놀라운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습니다. ( 계속 )

http://koreanwar60.tistory.com/227

한강다리 때문에 멈추었나? [ 3 ]
아하!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7/19 13:58
단지 폭파만 놓고 본다면 한강교량 폭파가 부분적으로 실패한 작전입니다. 당시 한강의 교량은 광진구에 있던 광진교를 제외하고 용산과 노량진 사이에 있던 인도교와 3개의 철교였는데 6월 28일 폭파 당시에 이른바 A교와 B교로 불리는 두개의 철교는 폭파에 실패하였고 이들 다리는 이후 유엔군의 폭격에 의해 절단되었습니다. 따라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마음만 먹으면 한강을 즉시 도하할 수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유엔군의 폭격에 의해 한강교량 폭파가 완료되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주력이 한강을 도하하지 않고 3일간 진격을 멈추었던 사실을 미스터리로 만든 결정적 사유였습니다. 수많은 민초들의 희생과 아군의 붕괴를 스스로 재촉시켜 버리면서 감행된 한강다리 폭파가 만일 완전히 성공하였다면 어쩌면 한강교량 폭파는 북한군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한 필요충분조건이 되었을 것이고 또한 북한군의 서울 도심 지체가 굳이 미스터리로 남을 이유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파괴되지 않은 철교를 이용하여 한강을 도하하는 북한군 기갑부대
그들은 마음만 먹었다면 즉시 한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알아본 것처럼 한강교량의 폭파는 우선 완전 폭파에 실패하였을 뿐 아니라 시기와 방법 자체가 잘못되었고 그 결과는 물론 효과도 미미하다 못해 엄청난 손실만 불러왔습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6·25전쟁 중 가장 성공적인 교량 폭파작전은 북한군이 실시한 1950년 10월 19일 대동강 인도교와 철교의 폭파입니다. 그들은 후퇴와중에도 얼마 남지 않은 북한군을 대동강 이북으로 완전 철수시키고 유엔군 도달 바로 직전에 완벽하게 교량을 폭파하여 효과를 극대화하였습니다.



[북한군이 후퇴 시 폭파하였던 대동강철교]

그런데 ‘라주바예프 전쟁 보고서’처럼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발굴 된 자료에 따르면 북한군의 한강 도하와 관련한 경악할 만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는데, 그것은 6·25전쟁 초기상황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이 상당히 잘못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같은 사실을 놓고도 그동안 너무 간과하던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한강교량 폭파 전에 이미 한강을 도하하였던 북한군 제6사단의 행적에 대해서 오래 동안 잘못 알고 있던 사실도 있습니다.


[북한군 제6사단은 이미 개전 다음날부터 한강을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북한군 제6사단은 전쟁 개시 다음날인 6월 26일 오후에 선도 부대를 시작으로 다음날까지 개풍에서 한강하구를 건너 무주공산과 다름없던 김포로 대부분 도하를 완료하였습니다. 예전에는 북한군 제6사단의 극히 일부 선도부대만 김포반도로 진입한 것으로 파악하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6월 28일 한강교량 폭파 훨씬 이전에 이미 북한군 전체 제6사단은 한강도하를 완료한 상태였고 이들이 한강교량 이남을 아군보다 먼저 점령할 가능성이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룻배를 이용하여 한강철교 인근을 도하하는 북한군 한강하구를 이미 이런 식으로 도하하였습니다]

따라서 급편 된 김포지구전투사령부(김포사)가 6월 26일부터 7월 3일까지 김포반도 일대에서 벌인 방어전을 그동안은 작은 전투사례로 분류하였지만 실로 엄청난 의의가 있음이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북한군 제6사단은 6월 26일까지 영등포 점령하여 아군을 배후에서 포위하는 것이 목표였음이 밝혀졌는데 만일 김포사의 분전이 없었다면 충분히 달성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즉, 한강다리의 파괴 여부와 상관없이 아군주력의 퇴로는 완전히 차단될 가능성이 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그림처럼 일산근처에서 북한군 제6사단이 도하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은 이미 전쟁 다음날 한강하구를 통해 김포반도로 진입하였습니다.]

어쩌면 전쟁 초기의 서울 함락이라는 비극적인 사건과 북한군 주력의 서울 지체에 가려 지금까지 일찌감치 한강을 도하한 북한군 제6사단에 맞서 싸웠던 김포사의 영웅적인 방어전이 소홀하게 취급된 경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북한군 주력이 서울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 정확한 이유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 대한민국 미래를 결정지을 극적인 전투는 바로 김포반도 일대에서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단신으로 적진을 향해 돌격하다 산화한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참모장 최복수 중령]

개전 초기 무주공산과 다름없었던 김포반도를 사수하기 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병력을 끌어 모아 급편 된 임시부대였지만 김포사는 불리한 상황을 탓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김포비행장 탈환작전 당시에 참모장 최복수 중령은 단신으로 기관총을 거치한 지프차를 몰고 비행장을 질주하여 적을 유린하다 전사하였고 사령관 우병옥 중령은 패퇴의 책임을 통감하고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원미산에서 자결하였습니다.


[고귀한 희생을 망각하였던 사실이 미스터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처럼 6·25전쟁 개전 초에 보기 드물 정도로 최고 지휘관들이 목숨을 걸고 솔선수범하여 전선 맨 앞에서 싸움을 벌인 곳이 바로 김포반도였습니다. 그들의 용전분투가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전쟁 초기의 진정한 미스터리는 북한군이 서울에서 지체한 3일이 아니라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망각하고 있던 우리 자신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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