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ne 1, 2012

Norbert Weber 노르베르트 베버 in 1920



Siam To Korea 1931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1/4)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2/4)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3/4)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4/4)


http://www.yes24.com/24/goods/3537472?scode=032&OzSrank=2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Im Land der Morgenstille
1925년 성 베네딕도회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한국을 방문하여 제작한 풍물 다큐멘터리

주로 서울, 금강산, 원산과 연길 지역에서 찍은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 대한 매우 인상적인 기록영화 (35mm)
한일합방 100주년(2010년)을 앞두고 DVD로 공개되는 한일합방 직후, 당시 조선의 생생한 동영상
35밀리 필름, 1만5천 미터, 85년 전 한국의 방대한 영상기록
처형 직후(1911년) 안중근 의사의 가족과 청계동의 사진 최초 공개
6.25 전쟁 때 완전히 파괴된 금강산 장안사와 서울 동소문(1920년대 파괴)등의 동영상 공개

일제 초기 (1920년대) 식민주의와 강요된 근대화에 의해 사라질 위기에 처한 한국의 민속, 장례식, 공예, 농사, 베틀짜기 등을 애정과 존경의 마음으로 기록하다

이 기록 영화는 1925년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총아빠스(대수도원장)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 -1956) 신부가 한국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직접 촬영한 것이다. 그는 한국문화와 한국의 선교사업을 독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베버 신부의 저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1915년, 세이델 출판사)를 기반으로, 주로 서울과 금강산, 원산, 연길 지역에서 촬영했으며, 한국의 민속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수공업과 농업, 공예 기술, 풍습, 명절, 종교 예식 등을 영상으로 기록한 것이다. 또한 서울 특히 북한과 만주 지역의 한국 성 베네딕도회 선교원 독일 선교사들의 활동을 담았다. 베버 신부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그의 책과 영화를 통해, 최초로 한국을 독일에 소개했다. 베버 신부는 예술가였고 문학가였으며 겸손한 목자였다. 그는 "내가 그렇게 빨리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나라, 한국"이라고 고백했다.

" 1978년 독일에서 발견된 이 기록영화는 참으로 놀랄만한 가치가 있는 보물급 자료다." -김홍남,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전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 관장

한국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된 기록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1927년, 뮨헨 민속박물관과 남독 100여 개 극장서 상영

성 베네딕도회 성 오틸리엔 연합회 총아빠스인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는 1925년 한국을 방문하고 주로 서울, 금강산, 원산과 연길 지역에서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 대한 매우 인상적인 기록영화 (35mm)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를 만들었다. 베버 신부는 1927년 6월 3일 뮨헨 민속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이 영화를 상영했고, 좋은 평을 받았다. 그후 남독 여러 극장(100여 개)에서 상영했으며 , 나중에 유성 영화가 나온 후에도 계속 원본 그대로 무성영화로 상영되었다. 또한 각도 교육청에 사본을 하나씩 보내서 학교에서 빌려다 학생들에게 보여주게 했다. 물론 이 영화는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흥미 있는 주제들을 분명하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나다. 또한 일상생활의 모든 분야에 폭넓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 영화를 무엇보다도 포교 성 베네딕도회의 선교사업을 알리기 휘해 사용했으나, 이제는 한국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 1977년 독일 수도원 지하실 공사 때 우연히 발견...
2차 대전 중에 히틀러 정권 하에서 독일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나치에 점령되고 해체되었을 때, 한 수도자가 모든 귀중품을 안전하게 숨겨 놓았다. 전쟁 후, 그 귀중품들을 찾을 길이 없었으나, 1977년 수도원 지하실 공사 때 우연히 이 귀중품들을 숨겨둔 장소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이 영화도 빛을 보고 한국에 소개될 수 있었다.

*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 -1956) 신부; 베버 신부는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총아빠스로서, 1908년, 성 베네딕도회 한국진출을 결정하고 독일 신부 2명을 파견했다. 1911년에는 4개월 간 한국을 방문한 후,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책을 썼다. 1925년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라는 그의 책에 따라서 무성영화를 찍었다. 그는 영화촬영기를 가져와 필름 약 15000미터 분량에 이르는 방대한 영상기록을 남겼다. 그는 100년 넘게 박해를 견뎌낸 한국교회, 그 숭고하고 아름다운 기적의 역사에 깊은 존경을 품게 되었다. 또한 그는 아름다운 한국의 문화를 존경했고, 특히 효도 전통에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한국인들의 이런 내면화된 겸손이야말로 가톨릭이 뿌리내릴 수 있는 좋은 토양이라고 이해했다. 그는 말년을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조용히 보내다 1956년 세상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국과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함께 가져오게 되었다."
# 1925년 베버 신부가 한국에 왔을 때 구해 독일에 간직했던 겸제 정선의 화첩은 2006년 한국에 반환잵어 빛을 보게 되었다.

'한국 진출 100주년을 맞는 한국 성 베네딕도회 '
- 현재 5개 수도원에서 140여 명의 수사들이 선교 활동
올해(2009년)는 왜관 성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1909년)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모원은 독일 성 베네딕도회 성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선교 활동을 하는 베네딕도회이다. 성 베네딕도회는 베네딕도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하고 일하며' 살아가는 수도회로, 한국에 진출한 '첫 남자 수도회'였다. 그 동안은 많은 도전과 희망의 시기였으나, 한편으로는 1948년 공산주의가 침략하여 큰 시련을 안겨 준 시기이기도 하다. 성 베네딕도회는 1909년 한국에 처음 진출해 서울 혜화동에 수도원과 학교를 세웠다.(1909 -1927). 그러다가 성 베네딕도회가 신설된 원산대목구를 맡게 되면서 1927년 북한 함경남도 원산 인근 덕원으로 수도원을 옮겼고(1927-1949) 또한 간도 지역 연길에도 수도원을 세웠다(1928-1946). 이 두 지역에도 본당과 학교와 병원을 세웠으나 북한과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1949년 덕원, 1952년 연길 수도원이 폐쇄됐고 수도사들은 평양 인근의 감옥에 투옥됐다. 1954년 독일 정부의 요청으로 살아 남은 수도사들이 독일로 귀환했지만 그 때까지 모두 25명의 수도자들이 순교했다. 성 베네딕도회는 한국전쟁 이후 경북 왜관으로 피난해 수도원을 짓고(1952) 남한에서 새로 시작하게 됐고, 이 곳에서도 본당과 학교를 세웠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1949년엔 덕원, 1952년엔 연길 수도원이 폐쇄됐고, 1954년까지 모두 25명의 선교사가 순교했다.

현재 왜관 성 베네딕도회는 전국 5개 수도원에서 140여 명의 수사들이 수도생활을 하면서 본당, 학교, 피정의 집, 출판사, 미디어(베네딕도 미디어), 목공소, 양로원 등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 원본 영화평

김홍남/ -김홍남,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전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 관장
참으로 놀랄만한 일로, 보물급 자료... 20세기에 들어서 일제 강점, 민족상쟁을 겪고 개발도상의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이 크게 잃은 것은 유형과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특히 말과 글뿐 아니라 한국인의 민속을 말살하고 일본의 종교인 신도를 믿게 강요한 일제강점기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근세기의 흑백사진 한 장이라도 무척 소중한 자료인데, 1977년 독일 성 베네딕도 수도회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발견된 이 기록영화의 가치는 참으로 지대하다 하겠다.
이 영화는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한국에 와서 , 1925년에 서울과 원산, 연길 등지를 여행하며 촬영한 것으로, 그때까지 사라지지 않은 마을 단위의 의식주와 장례풍속, 일본식 마을학교와 운동회 모습 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천주교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서양 신부들이 펼친 선교사업의 실태를 소상히 전해주고 있다. 성찬을 위해 포도주가 필요해 포도 나무를 심고 가꾸는 장면들, 신부 수업을 위해 한문과 라틴어 시험을 보는 한국 젊은이들의 모습, 소달구지에 몸을 싣고 고난도 여행을 하는 서양신부와 귀국 하지 못하고 타계한 서양신부의 기념비 등을 고스란히 영상에 담았다. 그 시대로 봐서는 참으로 놀랄만한 일로, 보물급 자료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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