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ne 15, 2012

The victims of the bombing Han River Bridge 6.25 [handyman]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19357
"한강다리 폭파 책임자를 역사의 심판대에"
평화재향군인회, 제1회 한강다리 폭파 희생자 위령제 열어
07.06.28 19:52 ㅣ최종 업데이트 07.06.28 19:52 석희열 (shyeol)


▲ 저 강물은 진실을 알고 있을까 한국전쟁 발발 나흘째인 1950년 6월 28 새벽 2시30분, 이승만 정권이 북한군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함으로써 당시 다리를 건너고 있던 500~800명의 무고한 목숨이 희생됐다. 이날 폭파된 한강다리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8년 복구됐다.
ⓒ 석희열
# 1950년 6월 27일(한국전쟁 발발 3일째)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수도 서울이 위협받게 되자 이날 새벽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열차 편으로 대전으로 피난. 군은 서울을 사수하기로 하고 전력을 집중시켰으나 창동 방어선이 무너짐.

오전 11시. 육군 긴급회의에서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울 사수를 포기하고 육군본부 서울 철수와 함께 한강 다리를 폭파하기로 결정. 이후 육군본부는 철수를 시작하여 시흥에 있는 육군보병학교로 이동.

낮 12시~오후 3시30분. 한강 인도교, 경부선 철교, 경인선 철교 폭파 장치 완료.

밤 11시30분. 폭파 준비 명령 하달.

# 6월 28일 새벽 1시45분

서울 돈암동에 북한군 전차가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채병덕 총참모장은 최창식 공병감에게 한강다리를 폭파하도록 명령.

새벽 2시30분. 큰 폭음과 함께 한강다리 절단.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던 500~800명의 민간인 사망. 국군 5개 사단과 지원부대 퇴로 막힘.

오전 10시. 북한군 전차부대 한강대교 북단에 나타남.

# 9월 21일.

한강다리를 폭파했던 공병감 최창식 대령 사형. 이후 1964년 부인이 제기한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한강다리 폭파는 상관 명령에 따른 것으로 판단된다며 최 공병감에게 무죄 선고.


▲ 2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강대교 노들섬 둔치에서 평화재향군인회 주최로 열린 '제1회 한강 인도교 폭파 희생자 위령제'에는 유가족 등 50여 명이 참가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영혼들을 위로했다.
ⓒ 석희열
평화재향군인회는 28일 오후 한국전쟁 당시 폭파됐던 한강대교 노들섬 둔치에서 '제1회 한강 인도교 폭파 희생자 위령제'를 열고 희생자들의 넋을 달랬다.

김환영 평화재향군인회 사무처장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3일도 채 안 된 6월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를 따라 평화롭게 피난하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리가 폭파되어 무고하게 희생된 영혼을 달래기 위해 위령제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57년이 지나 처음 열리는 이 위령제에서 참가자들은 당시 한강다리 폭파 장면을 재연한 퍼포먼스에 이어 씻김굿과 추도사로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은 추도사를 통해 "살기에 바빠서 영령들 앞에 너무 늦게 와 죄스럽고 부끄럽다"며 "늦었지만 잠자는 역사의 어깨를 흔들어 깨워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영령들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사죄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윤호상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협의회' 협력특별위원장은 "이유도 모른 채 수 백명의 목숨이 희생된 그날을 우리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며 "억울한 넋을 달래기 위해 이승만 살인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의 진상을 낱낱이 밝혀 책임자를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추도사에 이어 참가자들의 분향과 묵념이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주최 쪽이 준비한 떡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57년 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추억했다.

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는 "국민을 이렇게 무참히 죽이다니, 이는 당시 정권이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세계 전쟁사에 유래가 없는 대학살극"이라며 "전쟁기간 동안 벌어진 이 무자비한 학살의 역사는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하며, 이런 차원에서 우리 현대사가 새로 쓰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위령제에는 유가족과 시민단체 대표 등 50여 명이 참가했다.
ⓒ 2012 OhmyNews







http://goyas.tistory.com/213
6.28 한강 다리 폭파 사건


1950. 6. 28, 폭파 절단된 한강 다리
… 이승만 정권은 의정부를 탈환했으며 국군이 북진중이니 서울 시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놓고 도망치면서, 그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니라 한강 다리마저 끊어버리고 갔다.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부통령 이시영을 비롯하여 정부 요인들 중에서 이승만과 약간 거리가 있었던 사람들, 대다수의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 핵심부의 도주를 전혀 알지 못했다. 부통령 이시영은 한강 다리가 폭파되기 이전에 간신히 기차편으로 빠져나왔지만,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건너던 1,500여 명의 무고한 피난민이 폭살당했다. …
- 한홍구, 대한민국史(01), 한겨레출판, 2003:179,180.

나는 아직도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 부르며 찬양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http://idealist.egloos.com/5302629


한강인도교 폭파 역사
by 아빠늑대 2010/06/28 22:03 Idealist.egloos.com/5302629 덧글수 : 85
오늘 6월 28일은 1950년 당시 참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6.25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에 하나가 폭파된 한강다리에 남아 있는 부분으로 피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남으로 내려오고 있는 사진이지요. 이 사진은 당시 한국 정부의 무능함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부각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강인도교가 폭파된 날이 바로 오늘 6월 28일이지요.


<6.25를 대표하는 사진 중에 하나. 그러나 한강 인도교는 아니고 대동강 철교임>

당시 한강인도교의 폭파 계획은 수립되어 있었습니다, 전쟁이 났는데 적이 대량으로 이동할 수 있는 교량을 폭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미 27일 서울 근교까지 들어온 북괴군 때문에 28일에 교량을 폭파한다는 계획은 있었고 공병부대 또한 그에 대한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죠. 문제는 그 시각이었습니다. 국군 수뇌부의 판단으로는 새벽 4시경에 폭파를 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는데, 그날 새벽 1시 45분경 북괴의 전차 두대가 돈암동 인근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이 전차는 주력 부대가 아니라 정찰 목적이었음에도 수뇌부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북괴의 주력이 이미 서울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고 판단해 버린 것이었죠. 그리고 그 즉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명령을 내려 다리를 폭파하라고 지시합니다. 헌데 문제는 이때는 피난민들과 후퇴하는 국군 부대가 다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는 것이었죠. 당연히 현장에서는 피난민들로 가득차 있는데 지금 폭파할 수 없지 않느냐는 보고를 했지만 똥줄타던 채병덕 장군은 그대로 폭파를 강행하라고 지시합니다.



<폭파된 한강 인도교>

그리고 2시 30분. 다리의 교각에 설치된 폭발물이 폭발하면서 다리는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피난하고 있던 민간인과 군인 800명 가량이 그대로 사라지고 맙니다. 모두들 잘 아시겠지만 웃기게도 이미 27일 새벽에 이승만은 대전으로 피신해 있었고, 그날 오후에 국방장관도 도망가고, 다리가 폭파되기 바로 전 채병덕 장군도 이미 서울을 빠져나갔지만 방송으로는 국군은 서울을 사수한다는 방송을 되풀이 하고 있었죠. (물론 안믿는 사람도 많았기에 탈출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었지만요)

<채병덕장군. 미군은 이런 사람을 어째 믿냐고 했는데 이승만은 "보기에는 좀 그래도 능력있다" 라며 철떡같이 믿었다죠? 하지만 역시나... 그가 한국전쟁에서 한 일은 거의 삽질>

문제는... 이게 단순히 민간인의 탈출만 막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시인 상황에서 전략적 판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민간인을 희생했다라고 한다면 그나마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당시 한강 이북에는 북괴군과 교전중인 주력 전투병력이 상당 수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강 이북에는 중화기를 비롯해 5개 사단, 4만 정도의 병력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이들이 한강다리의 폭파 소식을 듣고 전투를 포기하고 뿔뿔히 흩어져 버린 것이었죠. 그리고 중화기는 그대로 북괴군에 노획되고 맙니다.


웃기는건 이후 정부의 무능을 성토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쏱아져 나오자 이승만 정부와 채병덕 장군을 비롯한 군부는 엉뚱한 희생양을 만들어 냅니다. 바로 당시 한강을 폭파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이 문제에 책임을 물어 사형을 시켜버립니다. 그게 9월 21일이죠. 이러고서도 수복 이후에 정부가 한 일은 부역자 색출이나 하고 있었으니 손가락질을 안할 수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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