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23, 2012
慶会楼 gyeonghoeru
경복궁 경회루
(景福宮慶會樓)
경회루(慶會樓)
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 시대에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대한민국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어 있다.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6670&pageFlag=
한성부 각 동에 쓰레기 집하장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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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명기록물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근거
「칙령」,「위생청결법」,「청소법」
배경
고종 31년(1894) 6월 관제개혁에 따라 의정부 8개 아문 중에 내무아문의 위생국과 경무청 총무국에서 위생업무를 관장하는 관제를 마련하였다. 갑오경장 당시 내무아문에 위생국을 두어 전염병 예방 사무와 의무 및 약제 등 사무를 전담케 하고, 경무청 총무국에서는 전염병 예방, 소독 검역, 종두, 식물, 음수, 의약, 가축, 도장, 묘지, 기타 유관 위생사무 일체의 집행 및 감독 등 실무를 담당하였다. 내무는 경무국과 협조하여 국민의 위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노력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은 구습을 쉽게 버리지 못하여 한성 장안의 위생 상태는 별로 개선되지 못하였다.
내용
광무 8년(1904) 6월에 위생청결소 사무위원장 신태휴 경무사는 한성부 5서에 다음과 같은 청소법을 시달하였다.
① 각 호주에게 매일 쓰레기를 소제케 하되 준수치 않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② 분뇨통에 분급할 것이니 법에 의하여 시행케 하도록 하라.
③ 우물의 불결로 질병이 발생하니 금후로는 우물을 청결케 하라.
④ 공중변소를 만들 것이니 모두 그 변소를 이용하고 가로변의 방뇨는 엄금한다.
이 청소법이 시달하고 나서 경시청에서는 오물기지로 남문밖 굴포전과 동문 밖 성변전의 한 모퉁이를 택하고 한성부에 훈령하여 초가 10간 이상, 와가 6간 이상은 분통을 자비케 하고, 그 외는 관비로 통을 만들어 분급하되 그 비용은 3개월에 분납케 하여 일제히 분통을 갖추게 하였다,
그리고 5서 내의 도로를 신축하는 한편 공중변소도 설치하고 인분회사 한성위생사를 설립하여 쓰레기와 오물을 차로 운반케 하였다.
경과
한일의정서의 조인으로 일제에 의한 고문정치가 시작된 광무8년(1904) 5월 19일 의정부 참정 조병식과 내부대신 이용태는 경무사 신태휴를 위생청결소 사무위원장으로 하여 상주하게하고 내부 위생국장 및 사무위원을 임명하여 한성부 내의 위생청결법을 실시하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궁내에도 위생청결사무소를 설치하고 경위원 총관과 경무관 6명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애당초 국민복지를 위한 사업이었음에도 갓 부임한 일본인 고문들은 아전인수격으로 사무처리를 하여 청결소 제1 사업은 일본인 거주지역에 집중되었다. 그 지역은 아직 복개되지 않은 하천으로 남서의 창동, 수각교, 장동, 사동 등의 하천 소통작업이었다.
광무 9년(1905) 2월 3일 마루야마는 경무고문 용빙계약을 맺고 2월 15일부터 직접 한성부내 청결유지에 나서 한성위생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월 250원에 일본인 인부 1명과 한국인 인부 23명을 각 경찰서 관구에 배치하였다.
이에 시내 도로의 청소와 대소구거의 준설을 시행하였으나 소기의 능률을 올리지 못하자 다음해(1906) 5월 30일 의탁을 해약하고 경무청 직영사업으로 돌리게 되었다.
참고자료
기창덕, <조선시대말 개명기의 의료> 의사학 제5권 제2호, 1996
대한의사학회 홈페이지(http://medhist.kams.or.kr)
집필자
김용하(순천향대 금융경영학과 교수)
최초 주제 집필일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일
2007. 12. 01
관련주제
[환경] [정책/제도] 오물청소법
:: podochung : 포도청이야기
차인배선생님의 포도청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였던 포도청의 역사와 자료 등
정보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글 수 47
한성부조선시대조회 수 2551 추천 수 0 2008.04.14 15:45:27
http://www.koreana.or.kr/months/news_view.asp?b_idx=891&lang=ko&page_type=list
조선 왕조의 연회용(宴會用) 건물 경회루(慶會樓) 조회수 1213
저자/소속 김봉건
사진작가
김봉건 金奉建 Kim Bong Gon
국립문화재연구소장 General Director,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경복궁 경회루는 조선시대에 궁중 연회나 국가의 중요 행사가 열리던 장소이다. 국보 제 224호로,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전통 목조건축 중 단일건물로는 가장 장대한 2층 누각이다.
경회루에 진입하기 위해 문을 들어 들어서면 하얀 화강석 기둥이 줄지어 늘어선 광경을 마주치게 된다. 기둥열의 상단에는 넓은 천장이 전개되고 있다. 이 때 관람객은 줄지어 늘어선 기둥들에 의해 시야가 좁아졌다가 다시 확장되어 확 트이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경회루는 본디 경복궁 침전(寢殿) 서쪽의 작은 누각이었다. 이 누각이 기울게 되자 조선 태종(太宗) 12년(1412)에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더 큰 규모로 새로이 건립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경복궁이 불타면서 경회루도 함께 소실되어 250여 년 간 폐허로 남아 있었다. 이후 고종(高宗)이 경복궁을 중건(重建)하면서 경회루도 고종 4년(1867)에 중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당시의 것으로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누각 형태의 건물이다. 경회(慶會)라는 명칭은 임금과 신하가 덕(德)으로서 서로 만난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임금이 정사를 돌봄은 사람을 얻음으로써 그 근본을 삼는다는 인식에서 유래하였다.
옛 문헌들은 경회루는 각종 연회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여기서는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기능 외에도 왕이 출전하는 장수들을 위로하고, 종친들의 연회를 베풀며, 활쏘기를 구경하고, 과거시험을 치르는 등 궁궐 내의 중요한 행사가 치러졌다. 특히 경회루 연못은 국가 전체의 물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가뭄이 들 경우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물로서 불을 막은 건축 이념
고종 때의 대신인 정학순(丁學洵)이 지은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서는 경회루 축조의 의미를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유교적 우주질서를 체계화하여 설명하려 하였던 역(易)의 원리에 따라 설명코자 하였다. 이는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의 건물들이 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하늘과 땅의 이치를 담으려고 했다는 것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회루는 48개의 기둥을 사용하여 세웠는데 만들어지는 칸이 모두 35칸으로, 주역의 64괘와 밀접한 36궁 즉 육육궁(六六宮)과 관련이 있다. 건물의 칸수가 35로 36 중 1이 모자란 것은 비어있는 허공이 태극의 하나라는 뜻이 있어서 이를 합쳐 36이 되기 때문이다. 육(六)은 주역의 팔괘 중 감괘(坎卦)로 큰물을 상징한다. 따라서 경회루 축조의 뜻이 원래 불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경복궁 전면의 관악산이 불타는 모습 즉 화형(火形)을 하고 있어 경복궁이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풍수지리설과 실제로 빈번했던 화재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런 상징성을 동원하여 경회루를 축조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동(銅)으로 만든 용을 연못에 집어넣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용은 8괘 중 건(乾)괘에 해당되는 것으로 금생수(金生水)의 오행(五行) 원리에 따라 불을 제어한다고 한다. 실제로 1997년 연못 준설 때 이 동용이 발견되어 <경회루전서>의 내용이 사실로 확인된 바 있다.
<사진> 경회루 연못에서 출토된 동용(銅龍)
이외에도 <경회루전서>에서는 유교적 질서가 건축계획에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즉 경회루 평면은 3중(重)으로 되어 있는데 제일 안쪽 3칸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의미하고 기둥 8개는 8괘를 의미한다고 한다. 내진(內陣) 칸은 12칸으로 1년 12달을, 기둥 16개에는 각각 4개씩의 문짝을 달았는데 이는 주역의 64괘를 의미한다. 외진(外陣) 기둥 24개는 24절기(節氣)를 의미한다고 한다. 즉 당대인들의 관점에서는 경회루가 유교적 철리(哲理)를 가득 담고 있는 상징이기를 염원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진> 『경회루전서』에 수록된 경회루삼십육궁지도(慶會樓三十六宮之圖)
지붕과 기둥
전통건축의 가구(架構)의 특성 때문에 입면 구성에 있어 지붕은 전체적으로 큰 볼륨을 차지한다. 게다가 경회루는 매우 큰 규모의 건물이어서 자연히 지붕의 볼륨이 거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부에 비해 상부 지붕이 지나치게 커서 가분수 같은 모양을 띠게 된다. 그러나 경회루에서는 상층 기둥 외에 하층의 기다란 돌기둥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입면으로 인지되어 지붕의 볼륨감을 상쇄시키며 전체적으로 조화된 입면비례를 보여 준다. 즉 상, 하층기둥은 별개이나 시각적으로는 마치 단일 층의 입면에 속하는 것으로 느껴지게 하고 있다. 당시 건립을 담당한 장인의 뛰어난 조형감각을 엿볼 수 있다.
경회루에 진입하기 위해 문을 들어서면 하얀 화강석 기둥이 줄지어 늘어선 광경을 마주치게 된다. 기둥열의 상단에는 넓은 천장이 전개되고 있다. 이 때 관람객은 줄지어 늘어선 기둥들에 의해 시야가 좁아졌다가 다시 확장되어 확 트이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천장에는 꽃 문양을 화려하게 베풀어 기둥열의 흰색과 대조되면서 극적으로 변화되는 공간적 쾌감을 더욱 높이고 있다.
현재의 기둥은 외진을 제외하고는 상부보다 하부의 기둥 직경이 넓어지는 민흘림 수법을 채택하고 있어 서구 건축의 엔타시스 수법과는 다른 단순함과 절제된 느낌을 주고 있다. 조선조 성종(성종)대의 경회루는 지금과는 달리 돌기둥에 용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를 본 오끼나와의 사신(使臣)이 돌기둥에 새긴 용이 연못에 비치는 광경을 당시 서울의 3가지 장관(壯觀) 중의 하나로 손꼽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고종 대의 중건 시에는 돌기둥에 새겨진 용조각은 재현되지 못하였다.
<사진> 경회루 하부의 기둥
2층 마루의 생동감과 개방성
2층 바닥은 마루바닥으로 전체를 하나의 레벨로 구성하지 않고 3단으로 높이 차이를 두어 구성하였다. 즉 외진에서 안쪽으로 갈수록 높이를 높여 중앙이 가장 높은 귀한 신분의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바닥의 구성은 사용하는 사람들의 위계에 따른 유교적 신분질서를 반영하는 것이다.
바닥 레벨의 차이는 위계질서 외에도 공간감 측면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즉 경회루와 같이 넓은 면적의 마루를 하나의 레벨로 처리할 경우 지나치게 넓고 밋밋하여 지루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 레벨 차이를 둠으로써 공간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효과를 꾀한 것이다.
바닥이 3개의 높이 차이를 가진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그렇다고 3개의 영역이 완전히 벽체 등으로 폐쇄되어 있지는 않다. 즉 각각의 영역은 상부에는 광창(光窓)을, 하부에는 문을 두어, 문을 열 경우 자연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데 지장이 없다. 이런 방식으로 누각건물의 개방성을 적절히 살리고 있다.
<사진> 경회루 내부 전경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낙양각(落陽刻)으로 장식하였다. 낙양각은 고구려 고분(古墳) 등에서 보이는 장막(帳幕)이 건축적으로 변모한 부재이다. 낙양각으로 인하여 외부에서 경회루를 바라볼 때 화려한 느낌을 준다. 또, 건물 내부에서 기둥 사이 트인 공간으로 외부 경관을 바라 볼 때, 그 화려한 장식이 마치 액자와 같은 느낌을 주어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소위 말하는 프레임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사진> 기둥 사이 프레임을 통해 본 외부 경관
연못 위의 인공 섬
경관이 뛰어난 곳에 세워 좋은 경치를 완상하게 하는 게 누각의 본디 기능이니, 경회루야말로 경관적 포인트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뒤로는 준수한 북악의 봉우리가, 오른편에는 힘찬 인왕산이 우뚝 버티고 서 있으며 전면에는 멀리 남산과 관악산이 보인다. 왼쪽에는 경복궁의 수많은 건물 지붕 선이 겹겹이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경회루의 입지를 더욱 유리하게 하는 것은 커다랗게 축조한 네모진 연못인 방지(方池)의 존재이다. 물은 건축물은 부드럽게 해 주는 중요한 조경요소로 동서고금을 통하여 많이 사용되었다. 넓은 대지에 경회루와 같이 규모가 큰 누각이 물 없이 덩그라니 서 있었다면 매우 밋밋한 풍경이 되었을 것이다. 연못이라는 인공적 요소의 도입으로 거대한 경회루가 연못에 비치는 뛰어난 경치를 연출하였다.
<사진> 경회루 전경
방지에는 2개의 인공 섬을 구축하고 여기에 각종 수목을 심었다. 연못과 인공 섬을 축조하는 기법은 도가(道家)의 신선사상(神仙思想)에서 유래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이 그리던 이상향(理想鄕)과 관련이 있다.
경회루는 인공적으로 축조한 연못에 장대한 규모의 누각을 지은 것으로, 당시의 토목공학적인 기법을 주목하게 만든다. 그 하나는 자연적인 환수 시스템이다. 연못의 바닥을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게 하여 자연적으로 물이 흐르게 하였다. 따라서 바닥에서 솟아나는 지하수와 북악에서 흘러오는 물이, 고요하고 거울 같은 수면 경관을 깨지 않으면서 수면 아래에서 자연스레 환류하여 물이 썩지 않고 깨끗하게 유지된다. 그 세심한 배려가 놀랍다.
<사진> 경회루 전면의 석조난간과 연못
<사진> 경회루 측면의 다리
한편 인공적으로 축조한 경회루의 호안(湖岸)은 태종대 축조 이후 별다른 문제없이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의 경회루가 연못 한편의 인공대지 위에 건립되었으나 수백 년이 흐른 오늘까지 흐트러짐이 없는 것으로 당시 토목기술 수준의 우수함을 엿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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