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30, 2012

the deployment aspect in Comfort women and the prostitution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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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의 전개양상과 매춘사업

2011/12/29 08:19

군 위안부의 태동을 언제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제1설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전용 매춘시설에서 위안부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제2설은 1932년 군에서 직영한 상해 해군위안소를 위안부의 기원으로 본다. 현재의 통설이다. 제3설은 "모집"에 의해 민간인 위안부가 조달되기 시작한 중일전쟁기 전후를 그 시작으로 본다.

세계 어딜가도 군인이 있는 곳은 매춘의 수요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러일전쟁 직후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軍事機密)明治三十七八戰役統計』에 따르면 1905년 9월 현재 관동주에 거류 중인 일본인 2명 중 1명이 매춘부로 조사되고 있다. (관동주 55.4%, 여순 49.2% 금주 78.9%가 매춘부)

사정이 이렇다보니 성병이 만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막대한 전력손실로 이어지는 바,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당시에는 전사자가 1,378명인데 비하여 성병으로 전선에서 탈락한 자는 2,012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연유로 군당국이 장병의 곧휴단속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 사료된다.

관련 논저를 살피건대, 군당국이 직접 개입하여 매춘시설을 통제하거나 감독, 관리하는 묘수는 러시아가 일본에게 전수해준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에이 발발하기 전인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만주에 주둔하였던 러시아는 주둔지 안에 허가받은 매춘업소를 설치하였는데 가옥의 무상대여는 물론 보초병을 세우고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장병들이 매춘업소를 통과하려면 우선 소속 부대에서 군표를 구매하여 이것을 보초병에게 제시하고 들어갔다. 매춘부들은 수입한 군표를 현금으로 교환하는 대신 소정의 세금을 러시아 군에 바쳤는데, 이런 시스템은 일본 위안부 운영방식과 거의 유사하다 볼 수 있다.

이러한 매춘시설은 당시 연합군이었던 영국, 프랑스, 일본 주둔지에서도 설치되었고 매춘부의 채용 및 위생관리 등에 있어 상호협조하기로 했던 바, 이때 허용된 매춘부의 최저 연령은 13세라지? ㅋ 도동놈의 새끼들. 따라쟁이 일본은 이때 꼽사리 꼈다가 러시아의 선진기법에 흠뻑 감동을 받고, 대동아 전쟁 수행시기에 중국과 남태평양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 위안소를 설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소결 :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1932년 일본은 상해에 해군위안소를 처음으로 시범설치하였는데, 1936년 말 상해영사관의「在留邦人의 特種婦女 狀況 및 단속」이라는 문서를 보면 해군위안소에 종사하는 전체 작부 131명 중 조선인이 29명이라 되어 있으니, 소위 강제연행으로 표방되는 중일전쟁기 이전에도 조선인 위안부가 존재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소위 대좌부 출신의 위안부는 일본군 전용 섹스파트너로 종사하였지만, 오늘날 반도의 흔한 위안부 인식과는 거리가 좀 있다.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는게 논의의 진전을 위해 바람직 할 것 같다.

1933년 4월 관동군 혼성제14여단에서 작성한「衛生業務旬報」에 따르면 평천(平泉)에 일본인과 조선인 창기(娼妓) 38명이 들어와서 개업했으므로 16일 이들의 검미(檢黴)는 앞으로 매주 1회 실시하기로 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즉, 중일전쟁기 이전 일본군 위안소에 등장하는 조선인 위안부는 대부분 창기(娼妓) 출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일전쟁 이후의 조선인 위안부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반도의 흔한 위안부 인식처럼 조선의 순결한 처녀를 인간사냥하듯 납치하여 군용트럭에 싣고 온 사람들일까? 물론 자의가 아닌 사기와 강요, 또는 인신매매에 의해 부득이 위안부를 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권번 출신의 기생이었다가 군과 결탁한 업자의 손에 트레이드 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가사의 궁핍을 면하기 위해 자원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쪽이 소수였다, 다수였다는 별로 의미가 없는 논쟁같다.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명징한 자료나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히 증언자의 사례를 취합해 통계를 산출하는 것은 표본의 오류일 뿐만 아니라 신뢰성이라곤 1g도 없어보인다. 그런 어설픈 논증으로 일본 원숭이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1940년 5월 삼천리에는 「武漢의 朝鮮 동포」라는 제하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무한(武漢) 삼진(三鎭)에 거주하는 동포의 수는 내지인 약 육천 명, 반도인 약 이천 명이다. 그 생활 상태는 대개 부유하며 또한 일지사변(日支事變)으로 의하여 반수 이상은 막대한 물질을 적립하고 있다. 각 人의 직업은 각색각종이나 주로 무역상 잡화상 여관업 음식점 위안소업 등이다. 그외에 과수원을 경영하는 인사도 있고 교육기관을 설치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전지(戰地)인 것 만치 경기가 호경기이지만 각종 물가가 매우 빗싸다. 제일 경기 좋기는 위안소업이다. 여인 一人이 매일 수입금이 5,60원 이상이다.

위안부라 하면 흔히 포주에 의해 착취당하고 이동과 생활이 제약된 노예같은 삶을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일본군 육군대장의 1년치 연봉에 맞먹는 수입을 올리고 있는 위안부도 있었다는 게 놀랍기 짝이없다. 이게 단순히 만주의 일부지역에 국한된 일일까 하는 의심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역시 같은 잡지 삼천리(1941년 제13권)「상해시보 총경리 최경수씨와 상해의 조선인 제문제를 語함」이라는 제하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기자 : 남경에는 얼마나 거주하고 있습니까.
최경수 : 남경에는 1,000명의 거류동포(居留同胞)가 있습니다.

기자 : 남경에 있는 1,000여명의 조선 동포는 대체로 어떠한 사업에 종사하고 있습니까.
최경수 : 부끄러운 말이지만 대부분은 위안소, 즉 유곽업(遊廓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위 기사에 따르면 상해의 위안소는 유곽업과 동종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거류동포라고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납치나 유괴된 자가 아닌 여권을 소지하고 영사관에 정식신고된 조선 국적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위안부 이미지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을까?

나의 의심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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