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5, 2012

Pitiful Joseon Yi Dynasty,from the birth began as a betray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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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리도 못난 이씨왕조(李氏王朝)

이씨왕조는 왕조의 탄생부터 배신으로 시작되었다.
신라와 이씨조선은 자신들의 통치력이 다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자발적으로 왕씨고려와 일본에 통치권을 넘겼다. 그러나 왕조말기의 왕씨고려가 스스로 모순을 극복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원명교체기의 대륙정세에 부응하고 불필요하게 백성들을 전쟁에 희생시키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 위화도 회군이 전혀 명분을 가지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존재했던 다른 체제교체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 명분은 상당히 초라하다.
이성계가 명나라에 올린 표문은 다음과 같다.

중화를 마땅히 높일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홍무 21년(1388)년에 신우와 최영 등이 군대를 함부로 일으켜 요동으로 향하고자 했으며, 25년(1392)에 왕요(공양왕)와 정몽주 등이 신우의 부정한 뜻을 계승하여 장차 상국을 범하려 하므로, 신이 온 나라 신민들에게 효유하여, 오랑캐가 중화를 소란하게 할 수가 없으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할 수 없다고 말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역리와 순리를 알게 되고, 저들이 모두 그 죄에 자복하였으니, 다만 상천이 밝게 알 뿐이 아니오라, 실로 황제께서 환하게 보신 바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aa_10206001_001

장수가 왕을 범하는 것은 괜찮고 오랑캐가 중국을 범하는 것은 안된단 말인가?
새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다 명에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에서 어느 것을 써야할 지 물어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쓰게 된다. 이 조선(朝鮮)은 단군조선이 아니라 기자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다. 이씨조선은 기자국(箕子國)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01년 11월 29일
'삼가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은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가 혼미(昏迷)하여 도리에 어긋나서 스스로 멸망하는 데 이르게 되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신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보게 하였으므로 놀라고 두려워서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요사이 황제께서 신에게 권지 국사(權知國事)를 허가하시고 이내 국호(國號)를 묻게 되시니, 신은 나라 사람과 함께 감격하여 기쁨이 더욱 간절합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國號)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小臣)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奏達)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裁可)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aa_10111029_001

한민족사에서 구체제의 지배세력을 도륙한 경우는 이씨왕조가 유일하다.
왕씨고려는 신라와 견씨백제의 지배세력을 포용하였다. 일본 또한 이씨조선의 왕족을 일본귀족으로 대우해 주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왕씨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 3부자를 목을 매달아 죽이고 강화도와 거제도에 유배시켰던 왕씨일족은 모두 바다에 던져죽였다. 이어 전국에서 왕씨 색출작업을 벌여 발견되는 대로 목을 베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id=Silla&ctgry=2465

명나라에 기대어 탄생한 왕조인지라 명나라를 섬기는 풍조는 왕조내내 계속되었다.
태종은 명나라에 말을 여러 차례 바쳤는데 아래 기록은 그 중 하나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9년 10월 22일
임금이 태평관에 가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임금이 황엄에게 이르기를,
“황제의 은혜가 이미 중하니, 감히 말 1만 필을 바치겠습니다.”
하니, 황엄이 말하기를,
“원제의 자손이 여거하에 도망가 살고 있어 8대를 전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내부하지 아니하여, 황제께서 내년 봄에 평정코자 하여 2월 초6일에 대군을 움직이기로 기일을 정했으니, 마땅히 진헌 마필을 운을 나누어 시기에 도달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ca_10910022_001

명나라에 바치는 것은 말 뿐만 아니라 처녀도 있었는데 태종에 이어 세종도 여러 차례 명나라에 처녀를 바쳤다. 이것이 백성들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은 아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09년 07월 18일
중궁이 경회루에 나가서 처녀 7인을 불러 보고 전별연을 베풀었는데, 처녀의 어머니와 친족들도 또한 연회에 참예하였다. 집찬비(執饌婢) 10인과 수종(隨從)하는 비(婢) 16인은 루(樓) 아래에서 음식을 먹이었다. 성씨(成氏)·차씨(車氏)에게 따르는 비(婢)는 각기 3인이고 그 나머지는 각기 2인이었다. 밤에 날씨가 맑고 고요한데 슬피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니, 이를 듣는 사람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씨왕족은 이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한(漢)나라가 공주를 오랑캐에게 시집보낸 것과 대조가 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06년 07월 20일
진헌색이 계하기를, “이번 처녀를 선택하여 고를 때에 종실의 친척과 전조(前朝) 왕씨와 귀화하여 온 사람과 국가에 관계되는 죄인의 딸자식은 모두 간선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씨왕조의 처녀진헌은 단지 왕조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
http://www.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thrd=1739
신라촌락문서에 의하면 신라의 4개 촌락의 인구가 442명이었는데 이중 5.6%에 달하는 25명이 노비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만 해도 노비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씨왕조의 통치기간에는 노비의 수가 증가하여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는 백성의 1/3이 노비였다. 이씨왕조의 이러한 성격때문에 일본이 침략해 왔을 때 백성들이 도리어 이씨왕조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4월 14일,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났다. 거가(선조일행의 피란행렬)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중략) 임해군의 집과 병조 판서 홍여순의 집도 불에 탔는데, 이 두 집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유도 대장이 몇 사람의 목을 베어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이 떼로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7월 1일
왜장 청정(淸正)이 북계로 침입하니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임해군과 순화군)와 여러 재신을 잡아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남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 토관 진무 국경인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는 스스로 대장이라 일컬으며 갑기 5천으로 진을 결성하였다. ... 경인이 마침내 객사를 포위하고 두 왕자 및 부인, 여시 노비 등과 재신 김귀영, 황정욱, 황혁과 그들의 가속을 잡아 모두 결박하고 마치 기물을 쌓아놓듯 한 칸 방에 가두었다. ... 그리고 여러 진과 보의 토병과 호수가 모두 관리를 붙잡고 배반하며 항복하였으므로 왜인들은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점령하게 되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id=Silla&ctgry=1793
19세기 말,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쓸고 일본이 서양문물을 열심히 배우고 있을 때 이씨왕조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고종의 탄생일에 감사와 수령들은 전례에 따라 진상을 하였는데, 그들은 왕가의 친척을 통하여 궁중으로 보냈다.
정해년(1887) 7월에 민영소와 민영환이 입시할 때 김규홍은 전라감사, 김명진은 경상감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민영환은 먼저 김명진의 물목을 바쳤다. 그 물목은 일본 명주 50필과 황저포 50필뿐이었다. 고종이 얼굴을 붉히며 그 물목을 용상 밑으로 던져 버리자 민영환은 황급히 물목을 주워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 후 민영소가 김규홍의 물목을 바쳤다. 그의 물목은 춘주 500필, 갑초 500필, 백동 5합, 바리 50개였고, 기타 물건도 이와 같이 많았다. 고종의 얼굴은 희색이 감돌며, “번신의 예가 당연히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규홍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민영환은 그 즉시 나가서 자기 돈 2만냥을 보태 물건을 사가지고 바쳤다. 민영환은 김명진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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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매천야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매천야록이 야사이고 위의 기록을 뒷받침할만한 다른 기록이 없긴 하지만 이 기록은 대체로 당시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이씨왕조는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넘기기로 한다.

조선왕조실록 순종 3년 8월 22일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 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전권위원(全權委員)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또한 짐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하라.”

한일합방조약에는 통치권을 넘기는 댓가도 명시되어 있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예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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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영친왕, 1897~1970)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1907년 대한제국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이후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1940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박정희가 만주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있을 당시에는 군부대와 학교를 돌며 태평양 전쟁을 독려하고 있었다.
1945년 일본이 미국에 항복했을 때 그는 제1항공군 사령관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은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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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대제 2011/01/22 18:07 #
조선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왕조가 실망스러운건 정말 부인할 수가 없군요.
솔까역사 2011/01/22 18:10 #
예 범위를 조선이 아닌 왕조로 잡으면 될 거 같습니다.
검투사 2011/01/23 09:41 #
이제 <마이 프린세스> 같은 드라마까지 나온 것을 보면서 이 나라 국민들이 정말 막장으로 치닫는구나 싶더군요.
이씨 왕조의 "마지막 공주"의 자손(김태희 역)의 드레스룸을 보면서 "저거 꾸밀 돈은 어디서 나왔을까" 싶더라는...
(물론 무슨 신하의 자손이자 재벌인 야동순재가 번 돈이겠지만, 참 씁쓸하더군요.)
강희대제 2011/01/23 12:38 #
오오
중간횡령과 뇌물수수 / 관직매매로 인해 벌어들인 돈은 과연 어디다 쓰나 했더니 그런데에 쓰기 위한 것인가..
오오미..
검투사 2011/01/23 13:01 #
뭐, 무슨 만화 원작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황제"(최불암 역)인가가 "독립운동했다"고 나오고
이번에는 "순조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준 돈을 야동순재의 아버지인지 할아버지인지가 빼돌려서 반성하려고" 김태희 공주를 모셨다는 식이지만... 그러고 보면 그 "독립운동 자금하라고 준 돈"은 어디서 났을까를 생각하면...
검투사 2011/01/23 09:42 #
아울러 <마이 프린세스>의 그 드레스룸은 그것을 만든 방송국의 아침방송에서 "시청자들의 (긍정적인) 눈길을 사고 있다"고 소개하더군요. (먼~산)
KittyHawk 2011/01/24 21:07 #
그나마 그런 왕조의 창피함을 자각했기 때문인지 구한말, 일제를 경험했던 황족 중 한 분은 왕조 부활을 반대하고 민주공화국의 건국을 주장했다더군요.
타네 2011/01/25 03:14 #
나름 근심이 깊었던 걸로 압니다. 독살위협때문에 항상 깡통음식만 드시고 가슴엔 홧병이 있었다고,... 임시정부로 건너가려고 항상 기회를 노렸다던데..

일제 강점기 때의 정책이 "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모르게 하라" 예요. 유독 침략 받은 역사를 강조하고 업적을 지나치게 비하해서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없애는게 주목적이었죠. 지금도, 백제사람들 일부가 일본에 건너가 나라를 세웠던 기록과 여러가지 고대사들은 탈취해가서 돌려주기는 커녕 보여주지도 않는다고 해요.

사실 조선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완전히 대등했고, 조선초기까지 일본이나 여진한테 조공을 받던 제2의 열강이었는데..군사가 용맹해서 중국에서도 부담스러워하고 견제가 심했다고....

사실 조선의 탄생이 반갑진 않아요. 잃어버린 요동땅을 되찾고 사대주의를 합리화하지 않았다면 군사적으로도 더 강해져서 후대의 비극이 없지 않았을까 한다는.....

그런데 윗 글이 참......까라면 깐다고 못 깔게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
타네 2011/01/25 03:15 #
근데 혹시 뉴라이트 세요?
백범 2011/01/26 12:41 #
이조를 까면 뉴라이트???

에라이 파쇼같은 놈아.

평생 일본 탓만 하세요. 대부분 너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국수주의 파쇼들 뿐이니 그러니 무슨 발전이 있겠냐.

너님은 병사 월급으로 지급되는 쌀 대신 모래하고 자갈쪼갠걸 월급으로 주는 민모씨 일가족의 직계후손이라도 되시는지???
타네 2011/01/25 03:15 #
..............왜놈 이구나
백범 2011/01/26 12:41 #
..............파쇼 였구나
고리아이 2011/01/25 17:41 #
영친왕의 부일은 귀한 이야기네영
그렇다고 해서 조선왕

http://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thrd=1787




한일합방의 정치적 책임은 이씨조선의 왕에게 있다.

우리는 흔히 한일합방에 대해 그 책임을 몇몇 친일파의 탓으로 돌리고 만다. 그러나 한일합방의 체결과정을 살펴보면 한일합방의 최종적인 책임은 왕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순종 4권, 3년(1910 경술 / 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22일(양력) 1번째기사
한일 합병 조약안(韓日倂合條約案)에 대하여 국무 대신 외에 황족 대표자 및 문무 원로의 대표자들이 회동하여 어전회의를 열었다.

순종 4권, 3년(1910 경술 / 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22일(양력) 2번째기사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 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전권위원(全權委員)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또한 짐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하라.”

순종 4권, 3년(1910 경술 / 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22일(양력) 3번째기사
일한병합조약(日韓倂合條約)이 체결되었다.
〈병합 조약(倂合條約)〉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는 양국간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 만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위원에 임명한다. 위의 전권위원은 회동하여 협의하여 다음의 여러 조항을 협정한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예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인(韓人)으로서 특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고 또 은금(恩金)을 준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前記)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施政)을 전적으로 담임하여 해지(該地)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있고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경유한 것이니 반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를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記名)하고 조인(調印)한다.
융희(隆熙) 4년 8월 22일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명치(明治) 43년 8월 22일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의 통치를 일본에 넘기기로 한 것은 이씨왕조의 조정에서 결정된 것이고 이완용은 그 실무적인 협상을 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국의 주인은 왕이니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완용은 이후 고종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게 되는데 이것도 그가 고종의 뜻을 결코 거스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한일합방은 이씨왕조가 결정한 것이므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
일한병합조약문을 읽어보면 그 주요 내용이 이씨왕가의 신분보장과 금전지급에 관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것 또한 이씨조선이 왕국이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이해가 된다. 왕국의 주인인 왕이 자신의 통치권을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고 넘길 리는 없는 것이다. 한일합방을 통하여 왕과 몇몇 왕족은 일본 황족으로 편입되고 나머지 주요 왕족과 대신들도 조선귀족으로 편입되어 신분을 보장받고 은사금도 받았다.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표현을 흔히 쓰는데 일본으로부터 가장 큰 댓가를 받은 사람이 누구이고 왕국의 주인이 누구였던가를 생각해 본다면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분명해 진다.


물론 친일파들이 한일합방의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사실이다. 매천야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宋秉畯(송병준)이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고 李容九(이용구), 徐彰輔(서창보), 李學宰(이학재), 洪肯燮(홍긍섭), 崔晶圭(최창규) 등과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한국인은 회유(懷柔)되기 어려우므로 속국(屬國)을 만들어 진압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고, 그들은 合邦宣言書(합방선언서)를 지어 일본정부로 올렸다. 이때부터 합방문제가 크게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一進會(일진회)가 정부로 合邦論(합방론)을 제의하여 이를 상주(上奏)하기를 바랐으나 李完用(이완용)이 물리쳤다. 그것은 이완용이 합방론을 제창(提唱)하려고 하였으나 일진회에서 먼저 그 안(案)을 제의하므로, 그들을 시기하여 閔泳奎(민홍규) 등에게 연설회를 권장하고 그들의 제의를 물리친 것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id=seadragon&ctgry=2303


한일합방은 조선의 요청을 일본이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대다수 조선의 백성들은 한일합방을 반대하였다. 한일합방 직전의 매천야록 기록을 보면 전국 각지에서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의병활동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대다수 조선의 백성들은 한일합방을 반대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왕국의 주인은 왕이며 백성은 왕국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다. 한일합방의 체결과정을 살펴보아도 백성들의 뜻을 반영하는 과정이 없었고 체결된 조약문의 내용을 읽어보아도 백성들의 안위는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의 최대 관심사는 종묘사직이지 백성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과 순종은 나라를 팔아먹은 나쁜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다. 한일합방에 대한 책임은 정치적 책임일 뿐이지 '좋다'와 '나쁘다'로 구분되는 도덕적 책임이 아니다. 한일합방에 대해 책임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일제식민지배체제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만약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지 않고 일제식민지배체제가 지속되어 조선인이 일본인으로 완전히 동화가 되었다면 이씨조선의 순종은 신라 경순왕과 비슷한 평가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또 한반도를 둘러싼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고종과 순종이 아니라 그 누가 왕이었다 하더라도 이씨조선이 독립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이다. 고종 대신에 당나라의 지배야욕을 물리친 신라 문무왕을 넣고 순종 대신에 원나라의 간섭을 물리친 왕씨고려의 공민왕을 넣고 이완용 대신에 목숨을 걸고 왕씨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킨 정몽주를 넣으면 한일합방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한일합방은 몇몇 사람들의 특수한 성향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당시의 국제적인 역학관계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봐야 한다. 굳이 조상탓을 하자면, 그러한 국제적인 역학관계가 도래할 것을 미리 예측하고 일본처럼 개항과 근대화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지 못했던 이씨조선의 지도자들을 탓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 무리한 바램이다.



한일합방의 교훈은 반일이 아니라 극일이 되어야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1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둘러싸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자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하였다. 또 1982년 광복절 기념식전에서도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한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 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한일합방의 역사로부터 매우 올바른 교훈을 얻는 말들이다. 일본이나 한일합방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미워한다고 해서 이미 지나간 과거가 바뀌지는 않는다. 미래에 또 다시 그런 불행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1984년 가을, 한국 경제가 파산 직전의 상태로까지 가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하여 60억 달러의 융자를 간청하여 그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본 정치인들이 식민지배와 독도에 관해 한국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발언들을 늘어놓자,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하며 속시원한 얘기를 내뱉었다. 그러나 1997년 동남아에서 발생한 외환위기가 한국까지 덮쳐오자, 그도 별 수 없이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이 이를 거절하였고 한국경제는 파산하고 말았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독도 주변해역에 대한 한국의 독점적 권한을 포기하는 '신한일어업협정'을 일본과 맺고서야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나라를 잃은 설움을 절절히 겪었던 조상들이 들으면 화낼 일이 많다.
일본은 한국보다 인구가 세 배 정도 많고 한반도 전체보다는 두 배 정도 많다. 인구가 세 배 많은 나라와 맞서려면 1인당 국민소득이 그 나라보다 세 배 많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일본의 절반밖에 안된다. 규모가 작다면 효율이라도 높아야 하는데 한국의 국가 효율은 일본보다 훨씬 뒤져 보인다. 국가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소 중 하나가 범죄인데 한국의 범죄율은 일본보다 훨씬 높다. 살인을 예로 들어보면, 한국의 살인 발생 비율은 일본보다 무려 다섯 배나 높다. 그 밖에도 매춘여성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거나 일본에 있는 매춘여성의 상당수가 한국 여성이라는 사실들은 우리가 과연 한일합방의 치욕스런 역사로부터 제대로 교훈을 얻고 있는지 회의가 들게 하는 부분이다.
흔히 일본과 친일파를 욕하거나 한일축구시합에서 한국선수를 광적으로 응원하는 것을 애국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국력을 키우는데 별 도움이 못된다. 실질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은 준법, 병역 그리고 납세다. 법질서를 잘 지키고, 병역을 충실히 이행하며, 열심히 일해서 세금을 많이 내면 그게 바로 애국이요 한일합방과 같은 수모를 다시 당하지 않는 방법인 것이다.


참고: http://qindex.info/drctry.php?id=Silla&ctgry=1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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