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October 18, 2012

the history of Kon-nyo,Dedicator women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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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貢女)는 약소국이 강대국에 조공의 하나로 여자를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최근의 공녀로는 위안 스카이가 조선 여성들을 데려간 것이 있다.[출처 필요]
[편집]한국

신라시대에 당나라에 조공으로 공녀를 바치기 시작한 이래 1894년 대한제국 고종이 청나라의 종주국을 부정하기 전까지 매년 중국에 조공으로 공녀를 바쳤다. 바쳐지는 공녀의 수는 일정치 않았으며 어떤 경우에는 대량으로 공녀를 데려가기도 했다.
공녀 중에는 중국이나 몽골의 황제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거나 비빈으로 간택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 출신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총애를 받은 이씨(李氏), 인종(仁宗)때에 영비(英妃) 달마홀도(達麻忽都[1]), 원말의 기황후[2]와 권황후[3], 조선의 여비 한씨[4]와 공신부인 한씨[5]가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이렇게 공녀 출신이 황후나 후궁이 되면 고려와 조선에 있던 그의 친정은 상당한 혜택을 보았다. 기황후의 친족인 기철, 기원 5형제와 여비 한씨, 공신부인의 남동생인 한확 등이 그들이다.
[편집]주석

↑ 기황후-고려
↑ 원나라 순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황후가 된다.
↑ 원나라 소종의 황후
↑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으로 영락제 사후 순장당하였다.
↑ 명나라 선덕제의 후궁
[편집]바깥 고리

나라가 힘이 없어 중국에 바쳐진 인간 진상품… 貢女(공녀) 잔혹사 조선일보 2011년 04월 20일자
공녀와 위안부 국민일보 2011.12.18
공녀들의 슬픔을 그치게 하다-위키트리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005662700&code=11171211

[한마당-최정욱] 공녀와 위안부
2011.12.18 17:59


1408년 4월 명나라 사신들을 영접한 태종은 황당한 얘기를 듣게 된다. “조선에 가서 잘 생긴 여자가 있으면 몇 명을 간택해 데리고 오라”는 황제의 명을 받았다는 것. 태종은 곧 공녀(貢女) 선발을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하고 전국에 금혼령을 내렸으며 각 도에 관리를 보내 여성을 간택하게 했다. 대상은 양가의 13세 이상 25세 이하 미색을 갖춘 처녀였다.

하지만 선뜻 딸을 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따라 처녀를 숨기는 집안에 대해서는 재산몰수와 매질 등 가혹한 처분이 이어졌다. 결국 그 해 11월 사신들은 최종 선발된 처녀 5명을 데리고 명나라로 돌아갔다. 당시 처녀들의 행차에는 뒤따르는 가족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이어졌다고 한다. 조선의 공녀 역사는 공식적으로는 중종 때까지 계속된다.

나라가 보내도 이처럼 억울할진대 식민지 시절 강제로 끌려갔던 이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수요 집회가 지난 14일 1000회를 맞았다. 정대협은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 정오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제 강점기 위안부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책임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 때 집회를 취소하고 지난 3월 동일본 대지진 때는 추모집회로 대신한 경우를 빼면 20년간 이어진 세계 최장 집회다.

이날 집회에서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 대사는 이 늙은이들이 다 죽기 전에 하루빨리 사죄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이날 일본대사관 건너편에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양국 외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낸 평화비도 공개됐다. 시민사회의 모금으로 건립된 이 평화비는 위안부 소녀 모습을 형상화했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의 집회가 1000번을 맞도록 제대로 된 사과조차 없는 일본의 모습은 실망스러울 뿐이다. 현 정부 역시 뉴라이트 쪽의 입김이 커지면서 위안부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실제 지난 8월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배상을 위한 적극적 교섭이나 중재에 나서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한·일 양국의 무관심 속에 위안부 할머니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17일 일본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강도 높게 언급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화려한 외교적 수사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성과들이 나왔으면 한다.

최정욱 차장 jwchoi@kmib.co.kr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9174


연재소설]10장-1 ‘공녀들의 슬픔’을 그치게 하다
조회2962 추천0 스크랩0 10.05.31 08:58 역동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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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10장-1 ‘공녀들의 슬픔’을 그치게 하다10.05.31 08:58 역동선생


이야기는 6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갑술년(1274, 원종15) 봄. 결혼도감이 설치되어 원나라에 보낼 여자들을 구했다. 원나라는 만자군(蠻子軍: 남송의 귀순병을 중심으로 조직한 군대)의 혼인을 위하여 관용비단 1,640단의 납폐물을 보내어 남편이 없는 여자 140명을 급히 요구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해 가을까지 독신녀와 역적의 처, 노비의 딸, 파계승의 딸 등을 강제로 선발하여 마치 공물처럼 원나라에 바쳐졌으니 이들이 바로 ‘공녀(貢女)’였다. 공녀로 뽑힌 여자들에게는 치장할 화장 값으로 비단 12필씩이 주어졌다

이제현이 태어난 해이기도 한 정해년(1287)에 충렬왕은 교지를 내렸다.

양갓집 처녀는 먼저 관청에 신고한 다음에 혼인시켜라. 어긴 자는 처벌하라.

그로부터 20년 후인 정미년(1307)에 충렬왕은 다시 교지를 내렸다.

나이 16세 이하 13세 이상의 여자는 마음대로 혼인할 수 없게 하라.

이처럼 공녀는 주로 13세에서 16세까지의 앳된 소녀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에 금혼령이 내려지기 전에 미리 혼인시킴으로써, 열 살이 되면 혼인을 서두르는 조혼의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원나라에서 지속적으로 공녀를 요구한 이유는 부녀자 강탈을 통해 고려인들의 저항을 무력화하고, 원나라의 부족한 궁녀의 보충을 위해 미모와 총명을 겸비한 고려의 처녀들을 요구했던 것이다.

후일 김찬은 공녀로 선발된 어린 소녀들의 심정을 <동녀시〉로 대변했다.

온 세상이 갑자기 한집이 되니
동쪽 땅에 명령하여 궁녀를 바치라 하네.
규중(閨中)에 거처하여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였더니
관청에서 선발함에 심사하는 많은 눈을 어찌 감당할까.

살짝 다듬은 근심 어린 두 눈썹이 파란데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억지로 들게 하니 온통 발개지누나.
어린 꾀꼬리가 깊은 숲 속 나무를 떠나려 하고
젖내 나는 제비가 날아 옛 둥지를 잃으려 하네.
낭원(閬苑: 신선의 화원, 원나라 궁궐)에 옮겨 심은 꽃은 금방 핀다 하고
광한(廣寒: 달의 궁전, 원나라 궁궐)에 붙여진 계수나무는 편안히 자란다 하지.

떠나가는데 미적대지만 솜털 깔린 수레에 실리고
바쁘게 떠나려 하자마자 준마가 달리누나.
부모의 나라가 멀어지니 혼이 바로 끊어지고
황제의 궁성이 가까워질수록 눈물이 비 오듯 하는구나.

공녀제도는 1274년(원종 15년)에 140명이 원나라로 보내진 것을 시초로, 60년이 지나도록 계속되어 폐해가 극심했으며, 원나라로 갔던 처녀진공사(處女進貢使)의 왕래 횟수가 50회 이상 되었다.

을해년(1335, 충숙왕 복위4) 봄. 세월은 흘러 권씨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2년이 지났다. 이때 이제현은 후학지도와 저술활동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느 날, 경기도 포천에 사는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원나라에 공녀로 팔려간 딸의 생사를 묻기 위해 이제현을 찾아왔다. 종2품의 정당문학을 사직한 재상의 집이었지만, 민초들을 제 자식처럼 사랑하는 주인의 덕성 때문인지 하인들은 뜻밖의 손님을 따듯하게 이제현에게 안내했다.

박씨는 이제현에게 공손히 예를 표한 후 말했다.

“대감마님, 소생의 미천한 여식이 원나라 황제의 숙위 타리부화(朶里不花)의 첩실로 팔려간 지 여러 해 되었는데 소식이 끊긴 지 오래되었사옵니다. 연경을 오가는 상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 남쪽에서 일어난 진우량의 군대가 강서 일대를 점령하자 사위가 황명을 받고 진우량의 토벌을 위해 강서성으로 출정했는데 부하들의 반란으로 그만 목숨을 잃었다 하옵니다. 제 딸의 생사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제현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박씨를 바라다보며 이야기했다.


“중국의 전란 통에 애꿎은 우리의 딸들이 죄 없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어서 알고 있소이다. 내 연경에 기별을 해서 고려 댁의 생사를 확인해 볼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고, 고맙습니다. 대감마님.”

당시 지배층 출신의 공녀들은 황제의 후궁, 귀족 내지 고위 관료의 처 혹은 첩이 되어 그런대로 지낼 만 했지만, 대부분 일반 백성 출신의 공녀들은 원에 귀부한 여러 나라 군인의 처, 원나라 황실의 궁녀 혹은 잡역부가 되어 인간 이하의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약소국 고려 소민(小民)들의 분노한 민심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공녀가 원나라로 떠나갈 때 딸을 잃은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으며, 산천초목도 서러워서 울었다. 이를 보는 사람들도 슬퍼서 탄식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해 겨울. 이제현의 수철동 사랑방에는 공녀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제현, 이곡 두 사제가 서안(書案)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이때 이곡은 한 해 전에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직보문각(直寶文閣) 벼슬을 맡고 있었다.

스승인 이제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가정(稼亭), 자네는 명년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간다지.”

“예, 스승님. 2년 후 다시 원나라 조정에 출사하는 조건으로 작년에 귀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고려의 딸들이 공녀로 뽑혀 원나라에 팔려간 지가 얼마나 되었지?”

“한 60년은 된 것 같습니다.”

“모녀가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 못하니, 아픔이 골수에 사무쳐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된 자가 셀 수 없네. 천하에 이보다 더한 원통함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난 세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된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천륜에 반하는 만행입니다.”

“가정, 명년에 출국하게 되면 공녀 문제의 심각성을 원나라 황제에게 상소하도록 하게. 그리하여 공녀제도의 폐습이 하루빨리 없어질 수 있도록 해결에 앞장서주게.”

“스승님, 저의 둔필(鈍筆)로 과연 원나라 황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뭐든지 불가능한 법이네. 그러나 뭐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는 법이네.
영웅호걸(英雄豪傑)과 범부(凡夫)의 차이가 그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네. 모든 일에는 기회라는 것이 있네. 기회를 멋지게 포착하는 사람만이 영웅호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알겠습니다, 스승님. 가슴앓이 끝에 병들어 죽은 고려 부모들의 원혼을 달래주고 앞으로 더 이상 불행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825120150






"중국에 공녀, 일본에 위안부, 그리고 우리"
[인터뷰] <해외 입양과 한국 민족주의> 펴낸 이삼돌 박사
강이현,전홍기혜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08-08-25 오후 12:12:12

'노예, 공녀, 위안부….'

그는 그 자신을 비롯한 약 16만 명의 상황을 그렇게 비교했다. 결코 스스로 원하지 않았던, 금전적 거래의 대상이 된 강제 이주. 심지어 아직도 매년 2000여 명에게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바로 해외 입양인이다.

이삼돌(토비아스 휘비네트) 박사는 태어난 이듬해인 1972년 스웨덴으로 입양됐다. 그가 다시 한국을 방문한 때는 그가 25살이었던 1996년. 당시 스웨덴 주재 한국 대사관의 초청을 받아 세계 한민족 축전에 참가한 그는 해외 입양인을 대하는 한국인의 모습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뿌리깊은 민족주의였다.

"나는 축전 기간 내내 입양인을 따라다니는 취재 기자들, 그리고 주최 측이 입양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다른 어떤 나라 사람도 아닌 바로 한국인이라고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해외 입양을 놓고 본격적인 사회문화적 연구를 시작했다. 특히 매년 한국을 방문하면서 그는 해외 입양이라는 문제가 한국의 미디어와 대중 문화에서 지속적으로 다뤄지고, 또 유통되고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국 해외 입양의 역사와 대중문화 속 해외 입양을 분석한 연구의 결실은 스톡홀름대학 동양어과 한국학 박사 논문으로 나왔다. 출간되자마자 이 논문은 지난 15년간 나온 스웨덴의 박사학위 논문 가운데 인터넷상에서 가장 많은 '내려받기' 건수(3만4499건)를 기록하는 등 국제적으로 높은 관심을 받았다. 논문은 최근 <해외 입양과 한국 민족주의>(뿌리의 집 옮김, 소나무 펴냄)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돼 출간됐다.

그는 논문에서 단순히 한국의 민족주의만 언급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의 해외 입양에 서구의 식민주의가 결합됐다고 분석했고, 궁극적으로 해외 입양이 중단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을 불편히 여긴 서구 엘리트 계층의 반발로 그는 스웨덴에서 연구소를 그만둬야 했다.

지난 21일, 온 국민이 올림픽 응원 열기에 휩싸여 있는 시간, 그 열광만큼 우리 사회가 모두 애써 외면하려 하는 진실을 알리기 위한 모임이 서울 한 곳에서 출발했다. 이삼돌 박사가 연구위원으로 참여한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TRACK)' 창립총회가 열린 것이다.

입양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채 입양인에게 '민족성'을 강요하며 '복원'을 시도하는 한국, 완전무결한 탈식민화만을 내세우며 근대성의 어두운 뒷면인 해외 입양은 감추려는 한국. 그곳에서 진실을 요구하고 화해를 제안하는 해외 입양인들의 발걸음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모임이 열리기 전인 지난 19일, 서울 청운동에 위치한 해외입양인 쉼터 '뿌리의집' 사무실에서 이삼돌 박사를 만나 그의 책에 대한 이야기와 해외 입양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해외 입양은 한국의 역사, 사회, 문화 속에서 해석돼야 한다"

▲ 이삼돌(토비아스 휘비네트) 박사. ⓒ프레시안

프레시안 : 해외 입양에 얽힌 한국의 역사, 그리고 민족주의를 4편의 국내 영화와 4곡의 노래를 통해 분석했다. 그런 접근 방법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삼돌 : 1996년 한국에 왔을 때 사람들이 해외 입양인, 입양에 관한 영화와 노래가 있다고 알려줬다. 이후에 관련된 작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매년 한국에 오면서 특히 비디오 대여점이나 중고레코드 가게에서 노래와 영화를 수집했다.

2001년, 박사 과정에 들어가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 더 체계적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한국언론재단, 한국영화 아카이브 등 인터넷에서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신문, 잡지 기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레시안 : 특히 이 작품들을 선정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이삼돌 박사는 논문에서 장길수의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김기덕의 <야생동물보호구역>, 박광수의 <베를린리포트>, 이장수의 <사랑>, 시나위의 <어머니의 땅>, 문희준의 , 클론의 <버려진 아이>, 스카이의 <영원> 등 총 8편의 작품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이삼돌 : 잘 알려진 감독과 가수들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많이 알려져 있다고 보았다. 또 이들 작품의 주제가 내가 분석하려는 주제와도 맞았다.

또 나는 입양에 관한 다양한 작품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2002년까지 수집을 했지만 이후 <마이 파더> 등 입양을 다룬 신작이 계속 나왔다.

한국과 서구 학계 가릴 것 없이 입양은 그 자체로서 다룰 뿐 다른 이슈와 연관짓지 않는다. 학문의 범위도 사회복지학, 법학, 심리학, 의학 등에서 뿐이다. 나는 입양을 다른 관점으로 보고 싶었다. 바로 한국의 역사, 사회, 디아스포라, 문화, 미래에 관한 시각이다.

입양 문제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 서양의 식민지주의다. 즉 심리적 문제와 이데올로기가 결합돼 한국 입양 문제를 구성한다.

"오랜 종속의 역사의 연장선에 해외 입양이 있다"

프레시안 : 그런 관점은 한국의 일반 독자에게는 굉장히 낯설게 들릴 것 같다.

이삼돌 :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을 예로 들어 보자. 이 영화에 등장하는 4살짜리 여자 아이는 한국인 입양인이고, 스웨덴인 양부모는 그를 가혹하게 대한다. 이후 성인이 된 그를 한국인 기자와 목사가 구해준다.

여기에서 서양의 식민주의와 한국의 민족주의를 차례로 볼 수 있다. 매우 전형적으로 입양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이지만 또 흑백 논리로 볼 수도 없는 문제다. 두 관점 모두를 비판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한 전제로 두고 싶다.

그러나 그 중에서 민족주의적 관점을 논할 때 나는 해외 입양을 젠더, 계급, 소수자 문제 등과의 연장선 상에서 한국의 내적인 사회 문제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한국의 해외 입양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분단, 한국 전쟁, 군사 정부라는 역사적 흐름과, 가부장적 문화, 계급 문제를 살펴봐야 한다.

프레시안 : 한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심한 굴곡의 역사를 지닌 나라는 많다. 그런데 유독 한국의 해외 입양 규모가 크다. 왜 그럴까.

이삼돌 : 한국은 오랜 종속의 역사가 있다. 중국, 일본, 미국, 그리고 서구. 즉 사람을 제국으로 보내는 오랜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중국으로 공녀를 보냈고, 일제 강점기에는 정신대 여성이 있었다. 이제 아이들을 서양으로 입양시킨다. 해외 입양을 전통적인 인구 이동 문제에서 보자면 강제된 이주라는 측면에서 아프리카의 노예와도 비교할 수 있다.

또 한국 전쟁은 서구인들이 봤을 때 식민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 2차 대전이 종료된 뒤 제3세계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전쟁이었다. 그런 까닭에 근대적인 국제 입양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처음 입양아들은 한국 전쟁에서 특히 많이 태어난 혼혈아였다. 한국인과 서양인 모두 그들을 부끄러워하며 한국에서 내보내고 싶어했고, 해외 입양은 그들의 공동 작업이었다. 결국 그들은 국제 입양을 통해 인종 세척을 한 셈이었다. 장애아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중문화 속 해외 입양, 그것은 되풀이되는 악몽과 같다"

▲ 이삼돌 박사는 "해외 입양을 대중문화 속에서 이렇게 많이 다뤄지는 나라는 없다"며 "이것은 악몽처럼 부끄러운 기억을 되풀이하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한국의 해외 입양을 국가적 트라우마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

이삼돌 : 우선 입양에 대해 이렇게 많은 대중문화에서 다뤄지는 나라는 없다. 신문, 잡지, TV에서도 가족 찾기 프로그램이 있다. 대중 문화와 매스미디어에서는 입양은 매우 전면에 나타난 이슈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이러지 않다.

왜 한국인들은 이런 작품들을 생산하고 소비할까. 그것은 악몽처럼 부끄러운 기억을 되풀이하는 현상이라는 것이 내 분석이다.

그런데 입양은 지나간 일에 그치지 않는다.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서구에서는 한국이 '아이를 외국으로 입양하는' 가난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다.

해외 입양을 들여다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다. 한국 경제가 예전보다는 많이 발전하고 잘 살지만 그래도 아직 입양의 문제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해결되고 있지 않고 있다. 해외 입양이 계속되는 한 한국의 국제적 이미지는 언제나 슬픈 역사, 가난한 나라로 남아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가 해외 입양을 인식하는 태도에 '부끄러운 비밀'로 여기는 태도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최근 다니엘 헤니에 대한 인기나 해외 입양인에 대한 인식을 보면 그런 태도도 상당 부분 변한 것 같다.

이삼돌 : 1991년에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 나온 뒤 <마이 파더>가 나오기 까지 16년이 흘렀다.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입양 문제가 정말 비밀스런 문제였고 영화는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훨씬 더 일반화됐다. TV 드라마를 봐도 해외 입양인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제 그들은 해외 입양인도 드라마의 캐릭터로 활용한다. 나는 이를 긍정적으로 본다.

해외 입양은 분명히 반대하지만 해외 입양과 해외 입양인 문제는 따로 떼어서 보아야 한다. 입양은 중단되어야 하지만 입양인에 대한 시각이 일반화되는 것은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화해와 치유 위해서는 먼저 해외 입양이 중단되어야 한다"

프레시안 : 새로 만드는 단체 이름에 '진실과 화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이삼돌 : 이 단체의 목적은 해외 입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입양 산업에서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났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인신매매였다. 진실이 나와야 해결될 수 있다.

또 미래를 위한 화해가 필요하다. 일종의 치유 과정이다. 많은 성인 입양인들은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매우 화가 나 있다. 그들의 화가 누그러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궁극적으로 그들과 화해하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우선 해외 입양이 중단되어야 한다.

프레시안 : 한국에서는 입양 문제가 일단 해외로 보내고 나면 끝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자라서 성인이 되어서 1990년대부터 한국에 들어와서 부모를 찾고 이런 과정에서 계속되는 문제라는 걸 깨달은 것 같다.

이삼돌 : 그런 면에서 이 문제는 아프리카 노예와 비교할 수 있다. 그때 수백 만 명이 이주됐고, 그런 측면에서 비슷하다. 노예 이주는 중단됐지만 그들로 인한 사회적 문제는 계속되고 있지 않나.

프레시안 : 앞으로 어떤 연구를 할 계획인지.

이삼돌 : 이 논문은 해외 입양을 바라보는 한국적 시각에 관해 쓴 책이다. 이후 스웨덴에서 새로운 책을 썼다. 바로 성인 입양인에 대한 인종 차별 등의 경험 등 서구의 시각에 관한 것이다. 또 '트랙' 등 한국의 해외 입양을 중단하고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펴나갈 계획이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http://www.expres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104







공녀(貢女), 환향녀(還鄕女)
<기고> 김민수 전 문화재청 고궁박물관 연구원
2012년 07월 14일 (토) 23:46:32 김민수 stopksk@hanmail.net


‘공녀(貢女)’는 조선국이 명나라의 요구로 뽑아 보낸 처녀이다.

명나라는 1408년(태종 8)부터 1521년(중종 16)까지 거의 10여 차례 환관(宦官)과 함께 공녀(貢女)를 요구하였다.

1521년(중종 16) 명나라의 새 천자가 등극한 것을 축하하는 하등극사(賀登極使)로 홍숙(洪淑)을 보낼 때 공녀(貢女)의 철폐를 명나라에 요구하여 공녀의 요구가 사라졌다.

‘환향녀(還鄕女)’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전쟁 중 적에게 강제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이며 정절(貞節)을 잃었다는 이유로 남편들로부터 공개적으로 이혼 청구를 받은 여성들이었다.

환향녀(還鄕女)의 남편들이 이혼을 청구할 경우에는 먼저 국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선조 대에 환향녀(還鄕女)의 남편들이 집단으로 국왕에게 이혼을 청구했다.

선조는 “이혼을 요청한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환향녀(還鄕女)들이 절개를 잃은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고 이혼 청구를 거절했지만, 환향녀(還鄕女)의 남편들은 모두 첩을 얻어 부인을 멀리했다.

환향녀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도 많이 발생했다. 평안도 의주에서 평양까지는 미인이 많아 벼슬아치나 양반의 처까지도 끌려갔다.

청나라에 끌려간 여자들 중 많은 돈을 주고 돌아온 여자들은 환향녀(還鄕女)로 불리면서 치욕을 감수해야 했고, 환향녀(還鄕女)는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아야만 했으나, 인조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http://ask.nate.com/knote/view.html?num=1221004


* 잊혀진 여성 공녀(환향녀)를 아시나요?
segama26 | 08.11.02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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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공감


지난달 31일 서대문구 홍제천에서 열린 '공녀! 그녀들을 아십니까?' 추모행사가
여성문화유산해설사회 주최로 열렸다.

일명 '환향녀' 로 불린 공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한풀이 춤이 펼쳐졌다.
공녀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원(元), 명(明), 청(淸)의 요구에 응해 바쳐진 여자들을 말한다.

이들 환향녀는 홍제천에서 목욕재개하고 몸과 마음을 씻으면 행적을 묻어버리고
그녀들의 정조문제를 거론하는 자는 엄단하라는 인조의 영이 있었으나 고향에서 조차 버림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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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향녀의 유래

조선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 중 하나는 '삼전도 굴욕사건' 이다.
병자호란의 결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을 치렀고 청군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고 김상헌 등 척화파의 주요 인물들을 묶어
심양으로 돌아간다.

병자호란의 치욕은 일반백성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병란으로 말미암아 재산 피해뿐만 아니라 수많은 양민과 부녀자들이 볼모로 끌려가 갖은 치욕과
고통을 당하고 그 곳에서 죽기도 했다. 주로 북쪽 지방에 사는 여인들의 피해가 컸다.
특히 의주에서 평양까지는 미인이 많아 벼슬아치나 양반의 처까지도 끌려갔다.
청나라에 끌려간 여자들 중 대부분 돌아올 수 없었으나, 많은 돈을 주고 돌아온 여자들도 '환향녀' 로
불리면서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시대적인 아픔이 서려있는 '화냥년' 에 대해 알아봅니다.

제 남편이 아닌 남자와 동침하는 짓인 이른바 서방질을 하는 계집을 사람들은 '화냥년' 이라고 한다.
이 '화냥년' 이 생긴 것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병자호란은 1637년 1월 30일 조선의 왕이 청나라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그러나 더욱 치욕스런 일이 그 다음에 일어났다. 청나라 군사가 철수하면서 50여만 명의 조선 여자를
포로로 끌고 간 것이다.

이 때 청나라 군대인 되놈들에게 전리품으로 끌려갔던 여인들 중 속전(贖錢)을 물거나 도망쳐
고향에 돌아온 여인들을 일컬어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다. 당시에 되놈들에게 강제로 끌려간 많은
부녀자들은 그들에게 성적인 굴욕을 당했기로 더럽혀진 몸으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아왔다가
가문의 손상된 명예와 주변의 눈살 때문에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여인들이었다.

옛 어른들은 여인이 싱겁게 웃으면 '웃긴! 되놈한테 업혀갔다 왔나' 하고 곧잘 나무랐다.
우리 옛글 속에는 싱겁고 허튼 웃음을 '환녀함소(還女含笑)' 라 했다.
여기에서 환녀란 병자, 정묘호란 때 전리품으로 되놈들한테 업혀갔다 돌아온 환향녀다.
돌아온 이 여인들이 오랜만에 만난 부모 형제를 보고 통곡은커녕 야릇한 웃음을 띠었던 것이다.
태그환향녀 공녀


http://redpig518.tistory.com/351






밀대 체공녀 &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다 함께 잘살기 2010/11/21 03:13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 하청 지회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 그리고 오늘 분신했다는 한 노동자의 소식을 접하며 '을밀대 체공녀'를 떠올렸다. 1931년 평양 고무신 공장 노동자들의 동맹 파업에 참가하여 공장을 점거했다가, 경찰의 출동으로 한밤중에 쫓겨나 을밀대 지붕 위에 홀로 올라가 농성을 벌인 그 "여류 투사"의 이름은 강주룡이다. 그는 "이천삼백 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깍기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덩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다고 '"산보객"들에게 "일장연설"을 할 만큼 뜨거운 연대 정신과 인간애의 화신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대공황 직후의 이른바 경제 위기의 시기였고, 그의 신분은 남성 노동자보다 훨씬 열악한 노동 조건에 놓였던 여성 노동자였다. 지금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슷하다면 비슷한 처지였다는 얘기다. 근 8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여러 모로 건재하다고나 할까. 5조1천억 원을 들여 건설회사 인수할 돈은 있어도,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며 그들의 반밖에 안 되는 임금과 해고 위협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쓸 돈은 한 푼도 없는 자본가만 봐도 말이다.

아래 옛 잡지 <동광>의 기사나 <퍼슨웹>의 가상 인터뷰는 예전에 네이버 블로그에 한 번 올렸던 것이다. 그대로 긁어다 재활용한다. 5년이 지나 다시 봐도 감동스럽다.

※ 새벽 두 시에 목숨을 걸고 농성하는 중에 "기생을 끼고 산보하는 잡놈"들을 보는 기분은 어땠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잡놈들은 참 많기도 하다.

※ 또 하나. 일제시대라지만 연대 파업의 대상이었던 평양 고무신 공장의 자본가들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조선 자본가들 역시 정부 당국 및 경찰과 사이가 참 좋았던 듯하다.

※ "노동쟁의의 신전술을 보여준 일본 연돌남(煙突男)"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인 노동자들도 많았고 그들 또한 조선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싸우는 입장이었다는 거다. "연돌남"이란 아마도 '굴뚝에 올라가서 농성을 벌인 남자'를 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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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대(乙密臺)의 체공녀(滯空女)
- 여류 투사 강주룡(姜周龍) 회견기]

평양 명승 을밀대 옥상에 체공녀가 돌현하엿다.

평원(平元) 고무직공의 동맹파업이 이래서 더 유명하여젓거니와 작년 노동쟁의의 신전술을 보여준 일본 연돌남(煙突男)과 비하야 좋은 대조를 이루는 에피소드라 할 것이다.(중략)

「우리는 사십구 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이천삼백 명 고무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것임으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랴는 것입니다. 이천삼백 명 우리동무의 살이 깍기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덩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와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하야서는(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집웅우에 올라 왓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겟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자본가의 (중략)하는 노동대중을 대표하야 죽음을 명예로 알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타야 나를 여기서(집웅) 강제로 끄러내릴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집웅우에 사닥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곳 떠러져 죽을 뿐입니다.」

이것은 강주룡이 5월 28일 밤 12시 을밀대 집웅우에서 밤을 밝히고 이튿날 새벽 산보왔다가 이 희한한 광경을 보고 뫃여든 백여명 산보객 앞에서 한 일장 연설이다. 이 연설을 보아서 체공녀 강주룡의 계급의식의 수준을 엿볼 수 잇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생애를 하며 어떠한 환경의 지배를 받앗나? 이것이 편집자로부터 내게 발한 명령이다.

6월 7일. 부외(府外) 선교리(船橋里) 평원 고무직공 파업단 본부로 강주룡여사를 방문하엿다. 유달리 안광을 발하는 작은 눈, 매섭게 생긴 코, 그리고 상상이상의 달변은 첫 인상으로 수월치않은 여자라는 것이엇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의 과거 생애가 듣는 나를 놀라게 하엿다. 오늘 그의 가진 의식과 남자이상의 활발한 성격이 우연한 바가 아님을 알수잇다. 이제 잠간 나는 붓을 돌리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대로의 그의 과거 생의 독백을 속기한다.

고단했던 간도길 - 결혼에서 사별, 노동자가 되기까지

나의 고향은 평북 강계(江界)입니다. 열네살까지는 집안이 걱정없이 지냇으나 아버지의 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야 내나히 열네살쩍예 서간도로 갓습니다. 거긔서 농사하면서 칠년동안 살앗는데 스므살 나든 해에 통화현에 잇는 최전빈(崔全斌)이라는 이에게 시집갓습니다. 남편은 그때 겨우 15세의 귀여운 도련님이엇습니다.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았다기보다도 남편을 사랑하엿습니다. 첫눈에 아조 귀여운 사람 사랑스런 사람이라는 인상을 얻엇습니다. 부부의 의도 퍽 좋앗습니다. 동리가 다 부러워 하엿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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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 현대차 분신 노동자 “오른쪽 바퀴는 정규직, 왼쪽은 제가 달았는데…”
(인터뷰 동영상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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