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y 17, 2013

Comfort women Kim Hak-sun: Was sold to Kisaeng of Pyongyang at the age of 14, by mothers

http://cooljapan1.blogspot.jp/2013/02/comfort-women-kim-hak-sun-was-sold-to.html

Comfort women Kim Hak-sun: Was sold to Kisaeng of Pyongyang at the age of 14, by mothers 慰安婦 金学順、母親によって14歳の時に平壌の妓生に売られた
Kim Hak-Sun [김학순] (then a 67-year-old Korean woman, who died in 1997)

The Hankyoreh newspaper (15/08/1991)


Was sold to Kisaeng of Pyongyang at the age of 14, by mothers living has become difficult.


BEHIND THE COMFORT WOMEN.
CONTROVERSY: HOW LIES BECAME TRUTH
(Page 14)


No longer able to make ends meet, my mother sold me to a kisaeng house owner in Pyongyang when I was 14. After living there for three years, I thought I had gotten my first job. But the place I was taken by the kisaeng house owner who had adopted me was a division of the Japanese Army in North China. There were more than 300 soldiers there. First I was sold for ¥40, then trained to be an entertainer for a few years, and after that I went to a place where Japanese soldiers were stationed.


http://www.sdh-fact.com/CL02_1/39_S4.pdf


Newspaper article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81500289114013&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1-08-15&officeId=00028&pageNo=14&printNo=1004&publishType=00010


"김학순" 1991-08-15
http://www.kinds.or.kr/

1991年8月15日 ハンギョレ新聞

従軍慰安婦の惨状を知らしめる
国内居住者中 初 過去暴露 金学順さん(全文訳)


종군 위안부 참상 알리겠다/국내거주자중 첫 과거폭로 김학순씨
[한겨레]|1991-08-15|14면 |사회 |해설
◎언젠가 밝혀야 할 역사적 사실/아직도 일장기 보면 분노 치밀어


17살 꽃다운 나이에 5개월여동안 일본 군인들의 종군 위안부를 지낸 김학순(67·서울 종로구 충신동 1·사진) 할머니가 14일 오후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에서 당시 참상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일제 강점 아래 종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던 한국인 중 해방 이후 국내에 살면서 자신의 참담한 과거를 폭로한 경우는 김학순씨가 처음이다.

“그동안 말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역사적 사실’이기에 털어놓기로 했습니다. 차라리 속이 후련합니다.”
주름살이 깊게 팬 할머니로 변한 김씨는 50년 전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가 가슴 아픈 듯 연신 눈시울을 적시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도 ‘일장기’만 보면 억울하고,가슴이 울렁울렁합니다. 텔리비전이나 신문에서 요즘도 일본이 종군 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일본을 상대로 재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현재 한달에 쌀 10㎏과 3만원을 지급받는 생활보호대상자로 생활을 연명하고 있는 김씨의 사연은 기구하다.


24년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난 김씨는 아버지가 생후 1백일 만에 돌아가신 뒤 생활이 힘들어진 어머니에 의해 14살때 평양 기생권번으로 팔려갔다. 3년간의 권번생활을 마친 김씨가 첫 취직인 줄 알고 권번의 양아버지를 따라간 곳이 북중국 철벽진의 일본군 3백여명이 있는 소부대 앞이었다.


“나를 데리고 갔던 양아버지도 당시 일본 군인들에게 돈도 못받고 무력으로 나를 그냥 빼앗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뒤로 5개월 동안의 생활은 거의 날마다 4∼5명의 일본 군인들을 상대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김씨가 있었던 곳은 소부대 앞에 세워진 가건물로,5명의 10대 한국 여성이 함께 있었다. 쌀과 부식은 부대에서 제공됐고 24시간 감시상태에서 지냈다. 몇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김씨는 그때마다 일본 군인들에게 들켜 두들겨맞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우리나라와 중국을 오가며 ‘은전’장사를 했던 한국인 조원찬(31)씨가 마침 위안소에 들렀을 때 그에게 사정해 겨우 도망쳐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뒤 조씨와 함께 만주로 가 중국 상하이 등지를 전전하면서 살다가 해방 뒤 조씨와 서울로 와 정착했다. 아들 딸 1명씩을 낳고 살던 김씨는 6·25직후 아들 딸을 잃고,53년엔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 식모살이,날품팔이 등을 하며 어렵게 살아왔다고 목이 메어 말했다.


김씨는 최근 취로사업을 나갔다가 만난 원폭 피해자 이맹희(66·여)씨와 한국 정신대 문제대책협의회의 권유로 사실을 밝히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정부가 일본에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와 배상 등을 요구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편 정대협은 “김씨의 증언을 시작으로 생존자,유가족들의 증언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정신대 실상이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김미경기자>



(私の訳)

従軍慰安婦の惨状を知らせる/国内居住者のうち、最初の過去の暴露金学順さん[ハンギョレ] 1991-08-15 / ハンギョレ新聞 14面(社会面)

◎いつか言わなければならない歴史的事実 / まだ日の丸に怒りがこみ上がる


17歳の花のように美しい年齢で5ヶ月余りの間、日本の軍人たちの従軍慰安婦を務めた金学順 (キム ハックスン 김학순) (67歳、ソウル市鍾路区チュンシンドン(忠信洞)のおばあさんが14日午後、韓国女性団体連合オフィスで、当時の惨状を暴露する記者会見を行った。日帝強占下、従軍慰安婦生活を強要された韓国人のうち、解放以後、国内居住者で、自分のひどい過去を暴露した例は、金学順さんが初めてだ。

「これまで言いたくても勇気がなかったが口を開けました。いつかは明らかになければならない "歴史的事実"なので打ち明けることにしました。いっそ気分がすっきりします。」
シワが深く愛らしいのおばあさんに変わったキムさんは50年前の思い出したくない過去が胸が痛むようすでずっと目がしらを濡らして話し始めた


「今"日の丸 "を見ると、悔しくて、胸がムカムカします。テレビや新聞で、最近も日本が従軍慰安婦を集めた事実がないという話を聞くと胸が崩れます。日本を相手に裁判でもしたい心情です。 」現在の月に米10㎏と3万ウォンを支給される生活保護対象者として生活を延命しているキムさんの事情は数奇である。


24年の満州吉林省で生まれた金さんは、生後100日後に父親が亡くなったあと、生活が難しくなった母親によって14歳の時に平壌(ピョンヤン)の妓生(キーセン)グォンボン(券番)* に売られていった。 3年間のグォンボン生活を終えたキムさんが初めての就職だと思ってグォンボンの養父に沿って行ったのが北中国の鉄壁陣の日本軍3百人がいる小部隊の前だった。


「私を連れて行った継父も、当時の日本軍人たちにお金も受け取れず武力で私だけ奪われるようでした。その後5ヶ月間の生活はほぼ毎日4〜5人の日本軍人を相手にするのがすべてでした 」金さんがいたのは小部隊の前に立てられた仮設の建物で、5人の10代の韓国女性が一緒にいた。米とおかずは部隊で提供されたし、24時間監視状態で過ごした。何度も脱出を試みたキムさんは、その度に日本軍人ら(等)にバレて殴られたりしたと打ち明けた。


当時、我が国(韓国)と中国を行き来して‘銀銭’商売をした韓国人ゾ・ワンチァン(31)さんがちょうど慰安所に立ち寄った時彼に頼んでやっと逃げて出てくるのに成功した。その後、ゾさんとともに満州に行って中国、上海などの地を転々としながら生きて解放の後ゾさんとソウルにきて定着した。息子と娘1人ずつを生んで暮らしていたキムさんは、6.25(朝鮮戦争)直後に息子と娘を失い、53年には夫までこの世を去り、家政婦肉*、日雇などをして苦しい生活だったと喉をつまらせた。


キムさんは最近、就労事業で会った原爆被害者イ・メングフィ(66·女)さんと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の勧誘で事実を明らかにすることを決心したという。キムさんは 「(韓国)政府が日本に従軍慰安婦問題について公式謝罪と賠償を要求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力説した。


一方、挺対協(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は 「キムさんの証言を皮切りに、生存者、遺族らの証言を通じて、歴史の裏街道に埋もれていた挺身隊の実態が明らか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強調した。

<キム·ミギョン(金美景)記者>



*권번 グォンボン[券番]
キーセンを養成したり紹介したりしていた中間業。置屋。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c510&logNo=40056344483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rView=no&Dictionary_Id=10028171&query=%B1%C7%B9%F8


권번[券番]
본문
권번은 일제시대에 기생들의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을 부르는 이름이다. 조선에는 원래 관기제도 외에는 공창제도라는 것이 없었으나, 한일합병 후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의 일본식 유곽제도를 1916년 3월 데라우치[寺內] 총독이 공창제도로 공포했다. 그 이후 기생도 허가제가 되어 권번에 기적을 두고 세금을 내게 했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정 출입을 지휘하고 화대를 받아주는 중간 역할을 담당했다.
권번의 효시는 1900년대 초기에 생겨난 기생조합에 찾을 수 있는데, 가장 먼저 생긴 기생조합은 한성기생조합이다. 한성기생조합은 관에 속해 있었던 조선시대의 관기(官妓)가 해체되던 즈음에 이루어졌다. 관기는 1907년부터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1908년 9월에는 장례원에서 관리하던 기생들을 경시청에서 관리하고 기생들에게 자유영업을 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폐지하게 된다. 이러한 관기제도의 폐지에 불만을 품은 기부(妓夫)들은 기부(妓夫) 있는 기녀, 즉 유부기(有夫妓)들을 모아서 조합을 조직하게 되는데, 이것이 한성기생조합이었다. 한성기생조합은 1908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름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09년 4월 1일자 <황성신문>에서이다. 관련된 신문기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기생조합성립]. 박한영 등 30여인이 발기하여 한성 내 기생영업을 조합하여 풍속을 개량하기로 목적하고 규칙을 제정하여 경청(警廳)에 청원하였다더라. (황성신문, 1908년 10월 27일)

[자선연주회]. 문천군 기근을 위하여 한성기생조합소에서 음력 윤달 11일로 한 10 일 연주회를 원각사에서 열어 다소간 기부를 바라니, 원각사의 성의 또한 감사하여 이로써 알려드리니 모든 군자는 왕립하시기를 바랍니다. 한성기생조합소 백. (황성신문, 1909년 4월 1일)

한성기생조합은 후에 광교기생조합으로 명칭을 바꾸게 되고 이후 1914년에 다시 한성권번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 한성기생조합의 설립과 함께 조선 기생의 ‘권번화’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부기(有夫妓)조합인 한성기생조합에 맞서 기부(妓夫) 없는 기녀들인 무부기(無夫妓)들의 조합도 생겨나게 되는데 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1915년 당시 기생조합으로는 신창기생조합, 순창기생조합 등이 더 있었다. 이중 광교, 다동, 신창 조합 등은 모두 근대적인 문물이 보다 발달해 있던 서울의 남촌에 자리잡고 있었고, 순창조합만이 북촌에 위치하였다. 더 자세히 보면 광교기생조합은 경성 무교정(武橋町) 92번지, 다동기생조합은 경성 다옥정(茶屋町) 177번지, 신창기생조합은 경성 황금정(黃金町) 3정목(丁目), 순창기생조합은 경성 의주통(義州通) 2정목 201번지에 있었다.
서울에 이어 1910년대에는 지방에도 기생조합이 생긴다. 진주기생조합이 1913년 5월에 설립되었고, 평양기생조합이 1912년 12월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구기생조합은 1910년 5월 31일 즈음에 만들어졌다.
기생조합들은 이후 일본식 명칭인 권번(券番)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하여 한성, 광교 기생조합은 한성권번으로, 다동조합은 대정권번(大正券番)으로 개칭된다. 이후 대정권번에서 분리되어 생긴 대동권번(大同券番)과 조선권번(朝鮮券番), 또 경상도, 전라도 기생을 중심으로 한 한남권번(漢南券番) 등이 창립되었다. 1924년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권번으로는 대정, 한남, 한성, 조선의 넷을 손꼽았고, 대동권번은 폐지된 상태였다고 한다.
4대 권번 중 한성권번과 한남권번만 조선인이 경영하였고, 대정권번과 조선권번은 일본인 내지는 친일파가 경영한 것이다. 한성권번은 전통적으로 기생을 관리해온 별감 계층의 기부(妓夫)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기에 그 전통성을 주장하여 “그래도 한성권번인데” 운운하였다고 한다. 조선권번은 평양기생을 중심으로 하여 송병준을 배경으로 조직되었으며, 원로 하규일(河圭一) 씨가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한편 신창권번은 조중응(趙重應)의 후원을 힘입어 ‘시궁골(笠井町)’, ‘상패’라고 화류계에서 제일 천대를 받는 창부들에게 기생이라는 명칭을 주어 조합 허가를 내 준 것이다. 당시 신창조합에 소속되어 있었던 창부들은 그것을 축하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찬우무골’(永樂町)에 있던 조중응의 집에 가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기생조합이 생기고, 기생방에서 노는 절차는 깨어져 오입하는 법이 사라지자 기생이 될 수 있는 자격요건은 쉬워지고 가무(歌舞)보다는 얼굴을 중시하는 풍토가 조성되게 되었다. 평양서 올라온 벙어리 기생을 보고 기가 막혀 어느 노기(老妓)는 앙가슴을 쳤다고 한다. 얼굴만 예쁜 기생들의 수입으로 인기를 얻고 도리어 우수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자 10년 동안 공을 쌓아 명기 되기를 꿈꾸던 노기의 가슴은 쓸쓸하기도 했을 것이다. 더구나 카페, 여급 문화가 형성되면서 기생들도 전통적인 가무보다는 유행가나 사교춤을 더 즐기게 되었다.
하지만 권번은 여전히 한국의 전통 가무를 가르치는 중심적 기관이었다. 대정권번의 기생 수업은 20여 명 정도 단위로 이루어졌는데, 이왕직 아악부에 있었던 하규일과 악사 11명이 기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학습은 대개 아침 10시부터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학생들 중 노래와 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이 하규일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기생들은 각자 자기의 특성에 맞추어 가야금, 거문고, 양금 등을 배웠다. 노래는 우조(羽調) 6가지, 계면조(界面調) 6가지, 편 1~2가지를 배웠으며, 춤은 춘앵무(春鶯舞),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무고, 사고무, 무산향 등을 익혔다. 이러한 대정권번의 수업 내용을 보면 당시의 기생들이 기예를 익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실을 알 수 있다.

4대 권번 이외에도 몇 개의 권번들이 서울에 있었다. 경화권번(京和券番)은 당시 경무사 신태휴가 삼패(三牌)들을 중심으로 남부시동에 세운 것이다. 기생들 중에서도 격이 떨어지는 삼패로 구성된 경화권번의 기생들은 다른 권번의 기생들과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하는데, 1923년에 조선권번으로 흡수되었다. 경성권번(京城券番)은 1923년 10월 4일 홍병은을 중심으로 경성부 인사동 141-2번지에 설립되었다. 한때는 소속 기생이 200여명에 달하기도 했던 이 권번은 1932년 3월 12일에 서린동 70번지로 이전한 이후에는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종로권번(鐘路券番)은 1935년 9월 11일 권번 출신 기생 김옥교에 의해 경성부 청진정 164번지에 설립되었다가 이후 1942년 8월 17일에 삼화권번으로 통합되었다.
삼화권번(三和券番)은 조선, 종로, 한성의 3대 권번 주주들이 만든 권번이다. 1942년 8월 17일에 결성식을 거행하고 영업을 하였는데, 이후 일제에 의해 영업제지를 받았다가 광복 후에 부활하였다. 그러나 1947년 10월 14일자 과도정부 법률 제7호로 공창제도가 폐지됨으로써 한국에서 권번제도는 사라지게 되었다.

*家政婦肉(?)
식모살 シンモサル - 辞書には載っていません。
식모 は家政婦, 植毛, という意味で、살 は肉,魚肉,果肉;身,中身, 肌, …歳, といった意味です。で、直訳すると「家政婦肉」となります。
これを単に「家政婦」と訳すのはちょっと納得いかないので、検索してみたのですがはっきりしません。性的奉仕をすることもある家政婦のようなのですが、
韓国ドラマの紹介ブログなどでは、このシンモサルを「植毛歳」と訳したものを見かけます。でも、これでは意味不明です。
「植毛歳」という訳は、真実を隠すためのもののように感じます。

78歳のおばあさんから聞いたという、こんな悲しい身の上話もあります。


우리와 동석이 된 78세의 할머니는 자신의 옛날 이야기부터 현실의 문제를 숨김없이 말씀하십니다.어린나이에 고아가 되버려 먹고 살기 힘든 때라 근처 동네에 입양을 해서 먹고 살았는데...
결국은 식모살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글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왔답니다.


>私たちと同席になった78歳のおばあちゃんは、自分の昔の話から現実の問題を隠さずに語ってくれました。

>幼いころに孤児になってしまい、食べていくのが苦しい時だから、近くの町内に養子に入って暮らしたんだけど...

>結局は「家政婦肉」でした。

>それでハングルを知らずに今まで生きてきたそうです。


・・・隠さなければならないような存在の家政婦、まったく教育も受けさせてもらえない・・・普通の家政婦とは思えないんですが。
養子に入って「植毛歳」でした、というのではまったく意味不明ですし。

(他の方の訳)

従軍慰安婦の惨状を知らしめる国内居住者中 初 過去暴露 金学順さん

いつかは明らか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歴史的事実


未だに日章旗を見ると憤怒する


17歳の花のような歳の5ヶ月間余りの間、日本軍人たちの従軍慰安婦をした金学順(김학순67歳・ソウル鍾路区チュンシン洞1・写真)婆さんが14日午後 韓国女性団体連合事務所に当時の現状を
暴露する記者会見を持った。日帝強占下、従軍慰安婦の生活を強要受けた韓国人中、解放以後国内で活しながら自身の惨憺(さんたん)とした過去を暴露した境遇は金学順さんが初めてだ。


『これまで言いたくても勇気が無くて口を開くことが出来ませんでした。いつかは明らか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歴史的事実」なので打ち明けることにしました。かえってすっきりしています。


しわが深いおばあさんに変わった金さんは50年前の思い出したくない過去が胸を痛むかのように目頭を濡らすと話し始めた。


『今でも「日章旗」を見ると悔しく、胸がむかむかします。テレビや新聞で近頃も日本が従軍慰安婦を引っ張って行った事実はないという話を聞く時は胸が崩れます。日本を相手に裁判でもしたいくらいの心情です。』


現在ひと月米10kgと3万ウォンの支給を受け生活保護対象者として生活を延命している金さんの事情は数奇だ。


24年満州 吉林省で生まれた金さんは父親が生後100日で亡くなられた後、生活が苦しくなった母親のために14歳の時、平壌妓生(キーセン)検番(置屋)に売られて行った。3年間の検番生活を終え金さんが初就職と思って検番の養父について行ったところが北中国鉄壁の日本軍300余名がいる小部隊前だった。


『私を連れて行った養父も当時日本軍人たちにお金も貰えず無力に私をそのまま奪われたようでした。
その後5ヶ月間の生活は殆んど毎日4~5名の日本軍人達を相手にするのが全部でした。』


金さんがいた所は小部隊前に建てられた建物で、5名の10代韓国女性が一緒でした。米とおかずは部隊で提供され24時間監視状態で過ごした。何度も脱出を試みた金さんは、その度に日本軍人たちに見つかって叩かれたと打ち明けた。


当時我が国と中国を行き来し「銀銭」商売をしていた韓国人ジョ・ウォンチャン(조원찬31歳)さんが慰安所に来た時に頼んでようやく逃げ来ることに成功した。その後ジョさんと一緒に満州に行き
中国上海などの地を転々としながら住み、解放後ジョさんとソウルに来て定着した。息子と娘1名ずつ産んで住んでいた6・25(朝鮮戦争)直後、息子と娘を失い、53年には夫もこの世を去り女中奉公、日雇いなどをして貧しく生きてきたと喉をつまらせ言った。


金さんは最近就労事業に出て出会った原爆被害者イ・メンヒ(이맹희66歳)さんと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の勧めで事実を明らかにする決心をしたという。


金さんは『政府が日本の従軍慰安婦問題に対して公式謝罪と賠償を要求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力を込めて言った。


Guantanamo & Comfort Women [Yujiro 谷山雄二朗 Taniy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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