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17, 2014
"My nationality is Japan" filled in by the autograph to the representation of stay in the U.S. ,the first president of Korea,Yi Syngman
"My nationality is Japan" filled in by the autograph to the representation of stay in the U.S. ,the first president of Korea,Rhee Syngman
■韓国の初代大統領…李承晩のアメリカ滞在時の自筆国籍表記に「私の国籍は日本」と記入■
初代大統領の李承晩(イ・スンマン)がアメリカ滞留時代に国籍 を「日本」と表記した文書が公開されて注目を集めている。
最近アメリカの国家記録院と古文書保管サイトのAncestry.comが公開した資料によれば、1918年の李承晩元大統領の徴集書類で国籍が「日本」になっている事が判明した。
これに関連してニューヨークの韓国日報では、この書類は『第一次世界大戦徴集カード(U.S. World-War I Draft Registration Cards)』で、李承晩元大統領の『英語名』(Syngman Rhee)、『生まれた年』(1875年)などと一致する連邦文書60件が発見されたと伝えた。
李承晩元大統領が直接筆記体で作成したこのカードには、年齢(44歳)と旧暦誕生日(3月26日)、
職業は韓国学校校長(Korean School Principal)、ハワイ在住住所など人的事項が書かれている。
また、『一番近い親戚』はイ・シム(Shim Rhee)にして関係を『妹(Sister)』に、韓国の住所と一緒に
作成して人種は『アジアン(Oriental)』と表記した。
★驚くべき事は、李元大統領が自分の国籍を『日本』(Japan)と記載したという事実だ。日本の強制併合で植民地の国民に転落した時点ではあるが、ハワイなどアメリカで外交中心の独立運動を行っていた彼が、個人情報欄に国籍を日本と明記した事は非常に興味深い。
ソース:ニューヨーク=NEWSIS(韓国語)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31005_0012410664&cID=10104&pID=10100
“내 국적은 일본” 이승만 美체류시절 자필 국적표기 충격
등록 일시 [2013-10-05 10:02:32]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 체류시절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문서가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Ancestry.com)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1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징집서류에 국적이 일본으로 돼 있다. 이 카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필기체로 작성한 것으로 당시 44세이던 그는 음력생일(3월 26일)과 함께 직업은 ‘한국학교 교장’(Korean School Principal), 주소는 ‘하와이’로 돼 있다. 이번에 발견된 고문서중엔 1933년 이 전 대통령의 뉴욕 입항 기록을 비롯 연방 문서 60건이 발견됐다. 사진은 이승만의 ‘제1차 세계대전 징집카드. 2013.10.05. <사진=뉴욕한국일보 제공> robin@newsis.com 201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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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징집카드 자필 작성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일고 있는 가운데 미국 체류시절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문서가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Ancestry.com)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1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징집서류에 국적이 일본으로 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관련, 뉴욕한국일보는 이 서류는 ‘제1차 세계대전 징집 카드(U.S. World War I Draft Registration Cards)’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영문 이름’(Syngman Rhee), ‘생년’(1875년) 등과 일치하는 연방 문서 60건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필기체로 작성한 이 카드엔 나이(44세)와 음력생일(3월 26일)과 직업은 ‘한국학교 교장’(Korean School Principal), 하와이 거주 주소 등 인적사항들이 나와 있다.
또한 ‘가장 가까운 친척’은 이 심(Shim Rhee)으로 관계를 ‘누이(Sister)’로 한국 주소와 함께 작성했고 인종은 ‘아시안(Oriental)’이라고 표기했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 체류시절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문서가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Ancestry.com)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1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징집서류에 국적이 일본으로 돼 있다. 이 카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필기체로 작성한 것으로 당시 44세이던 그는 음력생일(3월 26일)과 함께 직업은 ‘한국학교 교장’(Korean School Principal), 주소는 ‘하와이’로 돼 있다. 이번에 발견된 고문서중엔 1933년 이 전 대통령의 뉴욕 입항 기록을 비롯 연방 문서 60건이 발견됐다. 사진은 이승만의 ‘제1차 세계대전 징집카드 뒷면. 2013.10.05. <사진=뉴욕한국일보 제공> robin@newsis.com 2013-10-05
놀라운 것은 이 전 대통령이 자신의 국적을 ‘일본’(Japan)으로 기재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강제합병으로 식민지 국민으로 전락한 시점이기는 하지만 하와이 등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펼친 그가 신상 정보난에 국적을 일본으로 밝힌 것은 적잖이 흥미롭다.
1차 대전 징집 자원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된 징집 카드는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18~45세 사이의 남성을 대상으로 했다. 시민권자는 물론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남성들을 포함, 미 전역에서 약 2400만명이 카드에 자신의 개인정보를 수록했다. 현재 이 징집카드는 ‘셀렉티브 서비스(Selective Service)’란 이름으로 만 18~25세 남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가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것은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한 시점에서 아시아의 열강인 일본의 국민으로 신상정보를 기록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듬해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등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던 그가 미국의 공문서에 '일본인'이라고 밝힌 것은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논란거리인 그의 ‘친일성향’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러일전쟁 막바지였던 1905년 8월4일, 이승만은 하와이의 윤병구 목사와 함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이승만이 고종 밀사로 파견된 것이라는 설이 제기됐지만 당시 뉴욕헤럴드 트리뷴 등 미국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과 윤병구는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의 대표자”라면서 “황제는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대한제국과 고종을 적극 부정했다. 1904년 결성된 일진회는 이듬해 11월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을사늑약을 적극 찬성하는 등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친일단체로 성장했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 체류시절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문서가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Ancestry.com)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1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징집서류에 국적이 일본으로 돼 있다. 이 카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필기체로 작성한 것으로 당시 44세이던 그는 음력생일(3월 26일)과 함께 직업은 ‘한국학교 교장’(Korean School Principal), 주소는 ‘하와이’로 돼 있다. 이번에 발견된 고문서중엔 1933년 이 전 대통령의 뉴욕 입항 기록을 비롯 연방 문서 60건이 발견됐다. 사진은 이승만의 1933년 뉴욕 입항기록. 2013.10.05. <사진=뉴욕한국일보 제공> robin@newsis.com 2013-10-05
뉴욕헤럴드 트리뷴은 “러시아 사람들은 줄곧 적이었고, 우리는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고 있는 것에 기뻐한다”는 윤병구의 말과 함께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이들은 일본을 주인으로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하기도 했다.
한편 이번에 발견된 고문서중엔 1933년 이 전 대통령의 뉴욕 입항 기록도 있다. 1933년 유럽 방문 후 프랑스에서 출항한 ‘렉스’호에 올라 뉴욕항을 통해 미국에 입국한 기록이다. 이 입국 서류에 나타탄 이승만의 직업은 ‘박사, 교수’(Doctor, Professor)였고, ‘영어를 읽고 쓸 수 있냐?“는 질문란에 ‘그렇다(Yes)’고 돼 있다. 인종은 ‘한국인’(Korean), 출생지는 ‘한국(Korea), 서울(Soeul)’로 작성됐다.
그밖에 필리핀과 일본 등을 출발해 하와이 호놀룰루나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등에 도착한 다수의 입항기록과, 육로를 통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입국기록 등이 함께 발견됐다.
robin@newsis.com
▶ 강용구 박사, ‘키’는 노력으로 더 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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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hj 2014-01-29 16:52:23추천1반대0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에 의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절차에 따라 비준되어야 하며, 그 비준서가 양국에 의하여 워싱턴에서 교환되었을 때에 효력을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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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hj 2014-01-29 16:51:59추천1반대0
결정된 바에 따라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내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許與)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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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hj 2014-01-29 16:51:21추천1반대0
각 당사국은 타 당사국의 행정관리하에 있는 영토 또한 금후 각 당사국이 타 당사국의 행정관리 하에 합법적으로 들어갔다고 인정하는 영토에 있어서 타 당사국에 대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의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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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hj 2014-01-29 16:50:44추천0반대0
어느 일방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정이 외부로부터의 무력침공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한다. 당사국은 단독적으로나 공동으로나 자조와 상호원조에 의하여 무력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지속하여 강화시킬 것이며, 본 조약을 실행하고 그 목적을 추진할 적절한 조치를 협의와 합의하에 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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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hj 2014-01-29 16:49:36추천1반대0
당사국은 관련될지도 모르는 어떠한 국제적 분쟁이라도 국제적 평화와 안전과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하고 또한 국제관계에 있어서 국제연합의 목적이나 당사국이 국제연합에 대하여 부담한 의무에 배치되는 방법으로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의 행사를 삼가할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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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hj 2014-01-29 16:48:53추천0반대0
어떠한 잠재적 침략자도 가지지 않도록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대하여 그들 자신을 방위하고자 하는 공통의 결의를 공공연히 또한 정식으로 선언할 것을 희망하고 또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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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hj 2014-01-29 16:46:35추천1반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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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2013-10-08 16:05:37추천3반대2
원조 가카의 충격적인 비밀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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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6276461 2013-10-08 16:04:37추천2반대1
원조가카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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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 2013-10-07 18:55:18추천1반대1
헌법이 명시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정신을 뿌리채 뽑아낸
독재자 이승만의 본 모습을 밝힌 소중한 자료가
얼마전 나왔다.
아직도 이런 자를 국부로 삼자고 주장하는 분들의
정신상태는 대체 무엇일까?
연구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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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ysfine.com/kobak/kohist.html
http://www.allposters.co.uk/-sp/Korean-Leader-Syngman-Rhee-and-His-Wife-Posters_i8528988_.htm
http://www.koreaherald.com/view.php?ud=20100513000767
[Rediscover Seoul(78)] ‘Ehwajang,’ home of Korea’s first president
Published : 2010-05-13 17:41
Updated : 2010-05-13 17:41
In the residential area near Daehangno, Seoul‘s favorite street for culture and art, is a beautifully cared for garden with several hanok (traditional houses). This is Ehwajang (梨花莊 meaning pear blossom manor).
In May, when all flowers are in full bloom, Ehwajang boasts a graceful and elegant appearance. There is also a special story behind Ehwajang. It is the place where the loving spirit of Korea’s first president and his wife remains.
Ehwajang
As you enter Ehwajang, the building on the right is the family residence (built in 1985) and a statue of President Rhee is on the lawn. The hanok right ahead is the main building where Rhee and his wife lived. Even at a short glance, Ehwajang is an attractive place.
After liberation from Japan on Aug, 15, 1945, the Rhees returned from the U.S., but didn‘t have anywhere to live. Thirty-three friends who felt sorry for them donated money and bought a hanok. Built in the 1930s, the house had originally been the residence of the third son of King Injo of Joseon Dynasty. They gave the house to Rhee in the winter of 1947. The couple left Ehwajang when Rhee Syngman took the office of president and moved to Gyeongmudae, the residence of the president. He spent 12 years at Gyeongmudae, and returned to Ehwajang after he stepped down on April 26, 1960. The Rhees then stayed at Ehwajang from April 28 thru May 29, until they left for Hawaii.
If you follow the path on the right side of the garden you come to Jogakdang. Jogakdang is an eye-catching building on a small hill, where the first Cabinet was organized and announced on July 24, 1948. The building’s small size reflects the economic conditions of that time. Inside Jogakdang, Rhee‘s calligraphy of “nambuktongil” (unification of the south and the north) hangs on the wall. As we pass Jogakdang and move toward the main building, there is the Rhee Syngman Exhibition Hall which opened in 1988. Faded black and white photos on the wall reflect back on Korean history. There are captions for the photos written in English.
Inside of the main building, there is a living room in the center, a reception room and a study on the right, a bedroom and a kitchen on the left. And in other spaces, many articles left by the deceased are exhibited. Worn articles provide another window on the life of Rhee and his wife. Underwear and socks mended many times, pencil stubs, a worn-out coat, a shabby cupboard and brassware show that they really lived frugally.
Rhees’ love story
Korea’s first president, Syngman Rhee Francesca Donner
How did they meet each other? Was it possible to marry a foreigner at the time?
Rhee Syngman was born in 1875. He was the third child of Rhee Gyeong-seon, who was part of a ruined aristocratic family. He was an only son. At age 16, in 1890, he married a woman two years older than him, in his hometown, and she gave birth to their first son three years later. They got along well, but it seemed that their marriage was not easy due to Rhee‘s frequent imprisonment, exile and political involvement. On Feb. 26, 1906, their son died of typhoid in Philadelphia. Their relationship rapidly deteriorated following the sudden death of their son and ended in divorce.
Francesca Donner was born in 1900 in Austria and spent her childhood in Vienna. She was the third daughter of a wealthy father, who ran a trading company and a soda factory. She was a talented person who could speak several languages, and her father wanted to name her as his successor. In 1920, she married a race-car driver but divorced in 1923.
In February 1933, she was on a trip with her mother to Switzerland. She stayed at a hotel near Lake Leman. The hotel restaurant was crowded with the participants of a U.N. meeting. Rhee joined Donner’s table at the restaurant and they met. Rhee had flown from the U.S. to make an appeal for Korea‘s independence. He spent busy days, interviewing with journalists and representatives of various delegations.
The next day, Francesca found and saved an interview article of Rhee arguing for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had it delivered to Rhee through the hotel reception desk. She also sent another article from a different newspaper. This kind action was appreciated by Rhee, and he treated her to tea.
Francesca’s mother did not like her daughter meeting an Asian man, and she decided to take her home. However, they were still connected. She kept writing letters to Rhee in Geneva, and met him once again in early July, when he came to Vienna to get an entry visa to the Soviet Union.
In 1934, after one year and three months, they finally got married in New York. The wedding was paid for by Francesca, and the wedding gift from Rhee was one small pearl from Jeju Island. Rhee was 59, and Francesca was. Would love really break the barriers of age and nationality? Is there really an unavoidable, destined love?
Life as a Korean
From that time on, Francesca’s life was full of hardship as the wife of a poor man dedicated to fighting for the independence of his country. Right after their marriage, Rhee‘s colleagues in Hawaii sent him telegrams twice telling him not to bring his Western wife back to Hawaii, but he boarded the ship to Hawaii with his wife. Despite some concerns, many of them came to the harbor to welcome the couple, and they threw a big party.
Francesca was open to embracing Korean culture. Rhee had her follow Korean culture and thinking. He taught her that Korean men never entered the kitchen and the wife must not talk about her husband at all. She had learned the same things from her parents, and so this was not unnatural for her. She learned Korean, wore hanbok and made kimchi. She taught piano lessons, took care of their children and cooked meals. She typed until her fingers got blisters. For Francesca, Rhee was a husband and a comrade.
After the death of her husband in 1965, Francesca stayed in her hometown Vienna for five years until 1970. She came back to Ehwajang to live with the family of her stepson, Lee In-su.
She died in 1992, leaving a will that requesting the Korean flag and the Bible that Rhee had used when he was fighting for the independence of Korea be put into her coffin. She also asked for the coffin to be covered with her husband’s calligraphy “nambuktongil” (unification of the south and the north).
Francesca helped her husband‘s great cause, the independence of Korea, for 12 years, lived as the first First Lady of the Republic of Korea for another 12 years, and lived as a Korean grandmother for 22 years.
As I left Ehwajang, the face of young Francesca overlapping that of old Francesca kept coming to my mind. She spent her last days in a foreign country strange to her just because of her love. I could not help but ponder what love was, and that she might have been a Korean in her previous life. With these thoughts, I was moved to tears.
Travel Data
*Direction: After leaving Exit 2 of Line 4, Hyehwa Station, pass Marronnier Park and Korea National Open University, and turn left at the first alley. Go straight ahead until you meet the stairs toward Naksan Park. Ehwajang is located right next to the stairs.
Address: 1 Ihwa-dong, Jongno-gu
Open hours: 10 a.m.–5 p.m.
Admission fee: Free
Information: (02)762~3171(reservation required)
Nearby restaurants: Dama (02-741-5511, traditional Korean dishes), Suda (02-762-7565, handmade coffee and snacks), Pizza More (02-718-6644, pizza and pasta), Sotdae (02-741-1357, shabu shabu), Hong Kong Banjeom (02-3675-5004, spicy noodle soup), Hobnob (02-744-2255, beer bar) are some of good dining places in Daehangno.
*mini interview
Tourists look at photos exhibited at Ehwajang
Tourists’ reactions
There were some tourists visiting Ehwajang when I visited there: Remo Drost, 30, and Tineke Zwart, 21, a couple from the Netherlands. They were exchange students majoring in international business. They arrived in Korea two months ago, and in two months they will return home after traveling to Jeju-and Southeast Asian countries.
They first pointed out that the well-tended garden, articles and photos exhibited at the museum were very impressive. Drost expressed big interest in the fact that a European lady married a Korean man. He admitted that there was “destiny” between a man and a woman. He said the age gap would never be a problem and he felt okay about having a relationship with a woman older than him.
Kevin Cowell, a Canadian, and Jessica O‘Kelly from the U.S. seemed very familiar with Korea. They had stayed in Korea for quite some time. They carefully looked at the photos as if they were studying them. They also admired the beauty of the garden. There were other Canadians, Michael Vander, 35, and Anne in her 60s, who had been living in Korea for almost 10 years. They said that it was very good to see the actual site which they had heard about and to get know about its history and former occupants.
*Travel Tip: If you are a tourist, you might want to make a reservation at the Seoul Tourism Organization for the walking tour course. You can reserve the course that starts from Dongdaemun → Seoul (Naksan) Fortress → Biu-dang → Naksan Park → Exhibition Hall → Ehwajang (2.5km). The scenery of Seoul seen at the top of Naksan fortress wall is captivating. Japanese, Chinese and English guide services are available. Tour times are 10 a.m. and 2 p.m. on weekdays and 10 a.m., 2 p.m. and 3 p.m. for weekends. For more information, call (02) 6925-0777.
By Lee Sin-hwa
Lee Sin-hwa is the author of “Best Places to Travel with a DSLR Camera.” (www.sinhwada.co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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