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12, 2012

some questions for so-called the issue of comfort women part3 by jack4afric

http://jack4afric.exblog.jp/14128686

いわゆる従軍慰安婦問題について、私が抱いているいくつかの疑問(3)
疑問3:なぜ、戦後、何十年も経って慰安婦問題が浮上したのか?

過去の戦争において、日本軍の兵士のために慰安所が設けられ、そこで慰安婦が働いていたことは秘密でもなんでもありませんでした。

戦場で戦う兵士に慰安婦が必要であるというのは世界の常識で、日本だけでなく世界の多くの国では日本と同様、兵士のための慰安婦が存在しました。

もし、慰安婦がいなければ、現地の女性が兵士による性的暴行の犠牲者になる可能性があり、そういう意味でも慰安婦の存在は必要だったのです。

朝鮮戦争当時、北朝鮮との軍事境界線の近くの村で少年時代を過ごした崔吉城(チョー・キルソン)広島大学教授は、崔吉城・呉善花共著「これでは困る韓国」で、

村の近くに駐屯していた国連軍のアメリカ兵やイギリス兵が村の娘を襲って強姦する事件が相次ぎ、村人たちが困っているところに慰安婦の一行がやってきて国連軍兵士の相手をしてくれたお陰で、

村の娘が襲われることがなくなり、村人たちが慰安婦に感謝したというエピソードを紹介しています。

日本軍の兵士用の慰安所に朝鮮人の慰安婦がいたことも当時は秘密でもなんでもなく、朝鮮人慰安婦が小説や映画で取り上げられることもありました。

例えば、戦後まもない1947年に当時の流行作家だった田村泰次郎は、満州を舞台に日本兵と朝鮮人慰安婦の恋愛を書いた「春婦伝」という小説を発表しています。


この小説は1950年に池部良と李香蘭こと山口淑子の主演で映画化されています。

監督は谷口千吉で、脚本は黒澤明が書いていますが、脚本の段階でなぜかGHQからクレームがついて、山口淑子が演じるはずだった朝鮮人慰安婦の役を中国人の歌手に変えさせられたそうです。

その後、この小説は1965年に鈴木清順監督によって、原作と同じ「春婦伝」というタイトルで再映画化されます。

この再映画化作品は、かなり原作に忠実で、朝鮮人慰安婦の役は野川由美子が演じています。

各地を転々として満州まで流れてきた朝鮮人慰安婦と赤紙一枚で強制的に戦場に連行されてきた日本兵が互いの境遇に同情し合い、民族の違いを超えて愛し合うようになり、

手に手をとって軍を脱走するものの、追っ手に見つかって殺されてしまうという悲恋物語で、実際、朝鮮人慰安婦と恋に落ちた日本兵が慰安婦と一緒に駆け落ちする事件はよくあったそうです。

映画では、朝鮮人や日本人の慰安婦は様々な事情により慰安婦に身を落とした不幸な女性として描かれていますが、朝鮮人慰安婦が日本軍に強制連行される話はまったく出てきません。

それが戦後45年も経ってから突然、慰安婦の強制連行の話が出てくるのです。

きっかけは、朝日新聞が1991年から翌年にかけて従軍慰安婦の特集記事を組み、戦争中に多くの朝鮮人女性が「慰安婦狩り」に遭って、強制的に慰安婦にさせられたと報道したことです。

その根拠になったのは、1983年に出版された吉田清治という人物が書いた「私の戦争犯罪・朝鮮人連行強制記録」という本です。

この本で、吉田清治は昭和18年に軍の命令で韓国の済州島で女性を強制連行して慰安婦にしたことを告白し、韓国に行って謝罪までしたそうです。

しかし、1989年には韓国済州島の地元紙、済州新聞が取材結果をもとにこの吉田清治の「私の戦争犯罪」は捏造であると報じ、

1992年に済州島まで行って現地調査を実施した現代史研究家、秦郁彦も吉田の証言を裏付ける事実を見つけ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と報告しました。

その後、吉田清治本人が前記の著書の記述の一部はフィクションであることを認め、朝日新聞も吉田清治の証言は確認できないとの訂正記事を出したそうですが、

ときすでに遅く「従軍慰安婦問題」は一人歩きを始め、特ア3国を初めとする全世界の反日勢力による反日キャンペーンの格好のネタに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

慰安婦の強制連行説について、済州島出身の呉善花女史は次のように反論しています。

従軍慰安婦という言葉は最近になって出てきたものです。慰安婦がいたことは事実ですが、強制的に戦地へ連れて行くことなどは絶対にあり得ません。朝鮮も同じ国内でしたから、法治国家として司法の三審制度もあり、無法地帯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もちろん、警察権力もしっかりしていました。そういう法治主義システムの網をかいくぐって、婦女子を強制的に連れて行くことなど、当時の朝鮮ではとうていでき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呉善花著「生活者の日本統治時代」より

私は韓国で生まれて二十六歳まで韓国で生活していた間、村の女を軍や総督府の官憲が強制的に連行したといった話はいっさい耳にしたことがありません。 また、私が『生活者の日本統治時代』でインタビューした植民地世代の韓国人の誰一人として、 そのような光景を見たことも聞いたこともないといっています。にもかかわらず、最近になってそうした話が出るなんて、まったくおかしなことだというしかありません。日本の左翼活動家が反日民族主義の活動家に入れ知恵して以来、「そういうことがあったらしい」「そういうことがあったに違いない」「そういうことが事実あった」というようにエスカレートしていったことは明らかです。こうして「従軍慰安婦」問題は、女子挺身隊(女性の徴用者たち)と意図的に混同させられ、 大量の女たちが「従軍慰安婦」にさせられた、強制連行でそうさせられた、という物語がつくられ、それがあたかも真実であるかのように韓国国内で信じられるまでに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
呉善花著「反日韓国に未来はない」より

1996年には、高校日本史検定済み教科書7社9種類のすべてに従軍慰安婦に関する記述が掲載されていたそうですが、今年、ついに従軍慰安婦について記述した教科書がゼロになったといいます。

「新しい歴史教科書を作る会」をはじめとする関係者の地道な努力がやっと実ったわけで、現在、日本国内では、従軍慰安婦の強制連行は捏造であったという説が定説になりつつあるようです。

しかし、国際的には「従軍慰安婦の強制連行」は既成事実化されていて、南京大虐殺と同様、反日勢力によって、日本人が犯した犯罪として相変わらず、喧伝されています。

われわれ日本人は、この日本と日本人を貶める悪質な反日キャンペーンに粘り強く対抗し、反論し続ける必要があるでしょう。

소위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내가 안고 있는 몇 가지의 의문(3)의문 3: 왜, 전후, 몇십년이나 경과해서 위안부 문제가 부상한 것인가?

과거의 전쟁에 있어서, 일본군의 병사를 위해서 위안소가 마련되어져, 거기에서 위안부가 일하고 있었던 것은 비밀이라도 무엇이든지 없었습니다.

전장에서 싸우는 병사에게 위안부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세계의 상식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는 일본과 같이 병사를 위한 위안부가 존재했습니다.

만일 위안부가 없으면, 현지의 여성이 병사에 의한 성적 폭행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있어, 그러한 의미라도 위안부의 존재는 필요했습니다.

조선 전쟁 당시, 북한과의 군사경계선의 가까운 마을에서 소년시대를 보낸 최(崔) 요시키(吉城)(【죠】·【기루손】)히로시마(廣島)대학 교수는, 최(崔) 요시키(吉城)·오(吳) 젠(善) 하나(花) 공저 「이래서는 곤란하는 한국」에서,

마을의 가까이 주둔하고 있었던 국련군의 미국병사나 영국병이 마을의 딸을 습격해서 강간하는 사건이 잇따르고, 마을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에 위안부의 일행이 와서 국련군병사의 상대를 해 준 덕분으로,

마을의 딸이 습격 당하는 적이 없어져, 마을사람들이 위안부에게 감사했다고 하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본군의 병사용의 위안소에 조선인의 위안부가 있었던 것도 당시는 비밀이라도 아무 것도 아니고, 조선인 위안부가 소설이나 영화로 올릴 수 있는 것으로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전후 얼마 안되는 1947년에 당시의 유행 작가이었던 다무라 다이지로는, 만주를 무대에 일본병과 조선인 위안부의 연애를 쓴 「봄부 연고」라고 하는 소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1950년에 이케베(池部) 양호와 이(李) 가오리(香) 란(蘭) 것 야마구치(山口) 요시코(淑子)의 주연으로 영화화되고 있습니다.

감독은 다니구치(谷口)1000길로, 각본은 구로사와(黑澤) 아키라(明)가 쓰고 있습니다만, 각본의 단계에서 왠지 모르게 GHQ로부터 클레임이 붙고, 야마구치(山口) 요시코(淑子)가 연기할 것이었던 조선인 위안부의 역을 중국인의 가수로 바꾸게 했다고 합니다.

그 후, 이 소설은 1965년에 스즈키(鈴木) 세이준(淸順) 감독에 의해, 원작과 같은 「봄부 연고」라고 하는 타이틀로 재영화화됩니다.

이 재영화화 작품은, 상당히 원작에 충실해서, 조선인 위안부의 역은 노가와(野川) 유미코(由美子)가 연기하고 있습니다.

각지를 전전으로서 만주까지 흘러 온 조선인 위안부와 붉은 종이 1장으로 강제적으로 전장에 연행되어 온 일본병이 피차(서로)의 경우에 서로 동정해, 민족의 차이를 넘어서 서로 사랑하게 되고,

손에 손을 로 쳐서(계산하여)군을 탈주하지만, 추격자에게 찾아서 죽음을 당해버린다라고 하는 비련이야기에서, 실제, 조선인 위안부와 사랑에 빠진 일본병이 위안부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하는 사건은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조선인이나 일본인의 위안부는 각양각색인 사정에 의해 위안부에게 전락한 불행한 여성으로서 그려지고 있습니다만,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군에 강제 연행되는 이야기는 완전히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전후 45년이나 경과하고나서 돌연, 위안부의 강제 연행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계기는, 아사히신문이 1991년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종군 위안부의 특집 기사를 짜고, 전쟁중에 많은 조선인 여성이 「위안부 사냥」에 만나고, 강제적으로 위안부에게 하게 했다고 보도한 것입니다.

그 근거가 된 것은, 1983년에 출판된 요시다(吉田) 기요하루(淸治)라고 하는 인물이 쓴 「나의 전쟁 범죄·조선인 연행 강제 기록」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 책으로, 요시다(吉田) 기요하루(淸治)는 쇼와(昭和)18년에 군의 명령으로 한국의 제주도(濟州島)에서 여성을 강제 연행해서 위안부로 되게 한 것을 고백하고, 한국에 가서 사죄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89년에는 한국 제주도(濟州島)의 그 고장지, 제주(濟州)신문이 취재 결과를 바탕으로 이 요시다(吉田) 기요하루(淸治)의 「나의 전쟁 범죄」는 날조다라고 보도하고,

1992년에 제주도(濟州島)까지 가서 현지조사를 실시한 현대사학자, 하다(秦) 이쿠히코(郁彦)도 요시다(吉田)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사실을 찾을 수는 없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 후, 요시다(吉田) 기요하루(淸治) 본인이 전기의 저서의 기술의 일부는 픽션인 것을 인정하고, 아사히신문도 요시다(吉田) 기요하루(淸治)의 증언은 확인할 수 없다라는 정정 기사를 냈다고 합니다만,

풀어 이미 늦게 「종군 위안부 문제」는 혼자서의 보행을 시작하고, 特【아】3국을 처음 하는 전세계의 반일세력에 의한 반일 캠페인이 모습인 자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위안부의 강제 연행설에 대해서, 제주도(濟州島) 출신의 오(吳) 젠(善) 하나(花) 여사는 다음과 같이 반론하고 있습니다.

종군 위안부라고 하는 말은 최근이 되어서 나온 것입니다. 위안부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강제적으로 전지에 데리고 가는 것등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조선도 같은 국내이었기 때문에, 법치국으로서 사법의 3심 제도도 있어, 무법지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경찰권력도 멀쩡했습니다. 그러한 법치주의 시스템의 그물을 잽싸게 빠져나가고, 부녀자를 강제적으로 데리고 가는 것등, 당시의 조선에서는 도저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吳) 젠(善) 하나(花) 저 「생활자의 일본 통치 시대」에서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26나이까지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사이, 마을의 여자를 군이나 총독부의 관헌이 강제적으로 연행했다고 한 이야기는 일체 들은 적이 없습니다.  또, 내가 『생활자의 일본 통치 시대』로 인터뷰한 식민지세대의 한국인의 누구 한 사람으로서, 그러한 광경을 본 것도 들은 적도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이 되어서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다니, 완전히 우스운 것이라고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좌익활동가가 반일민족주의의 활동가에게 꾀를 일러준 이래, 「그러한 것이 있었을 모양이다」 「그러한 것이 있었던 것이 틀림 없다」 「그러한 것이 사실 있었다」라고 하는 것처럼 확대해 간 것은 명확합니다. 이렇게 해서 「종군 위안부」문제는, 여자정신대 (여성의 징용자들)이라고 의도적으로 혼동시켜져, 대량의 여자들이 「종군 위안부」에 하게 한, 강제 연행으로 그렇게 시켜진,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져, 그것이 마치 진실할 것 같이 한국 국내에서 믿을 수 있을때 까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吳) 젠(善) 하나(花) 저 「반일 한국에 미래는 없다」에서

1996년에는, 고교일본사검정완료 교과서 7사 9종류의 모두에 종군 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게재되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올해, 결국 종군 위안부에 대해서 기술한 교과서가 제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비롯한 관계자가 착실한 노력이 드디어 열매를 맺은 셈이어서, 현재, 일본국내에서는, 종군 위안부의 강제 연행은 날조이었다라고 하는 설(說)이 정설에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는 「종군 위안부의 강제 연행」은 기성사실화되고 있어서, 난징(남경)(Nanjing)대 학살과 같이 반일세력에 의해, 일본인이 범한 범죄로서 여전히,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들 일본인은, 이 일본과 일본인을 깎아내리는 악질적인 반일 캠페인에 끈질기게 대항하고, 계속해서 반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군소리: 「장해」를 일부러 「장애」라고 고쳐 쓰는 요즘의 위선적인 풍조에는 진절머리가 나지게 합니다.


本日のつぶやき:
「障害」をわざわざ「障がい」と書き直す昨今の偽善的な風潮にはうんざりさせられ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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