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23, 2012

Thousand Character Classic千字文korean website

http://100.naver.com/100.nhn?docid=145888

1권. 중국 남조(南朝) 양(梁)의 주흥사(周興嗣:470?∼521)가 글을 짓고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중에서 해당되는 글자를 모아 만들었다고 하며 사언고시(四言古詩) 250구(句), 합해서 1,000자가 각각 다른 글자로 되어 있다.
내용은 ‘천지현황(天地玄黃)’에서 시작하여 ‘언재호야(焉哉乎也)’로 끝난다. 당나라 이후 급격히 보급되어 많은 서가(書家)에 의하여 쓰여졌으며 그 중에서도 습자교본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왕희지의 7대손 지영(智永)이 진서(眞書:楷書)와 초서(草書)의 두 체로 쓴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 본으로 1109년에 새긴 석각(石刻)이 전하고 있다.
송대(宋代) 이후 이용범위가 점점 확대되어 《천자문》의 순서를 이용하여 문서 등의 번호를 붙이는 습관도 생기고 또 《속천자문》이 나오는가 하면 전연 딴 글자를 뽑아 《서고천자문(敍古千字文)》이라 이름붙인 종류도 많이 나왔다.
이 책이 한국에 전해진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백제 때 왕인(王仁)이 《논어(論語)》 10권과 함께 이 책 1권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보다 훨씬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한문의 입문서로서 초보자에게는 필수의 교과서로 중용(重用)되었으며 선조 때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쓴 《석봉천자문》은 유명하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09321


千字文으로 書藝史를 쓰다

역사학자 E. H. 카아(CARR, 1892~1982)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였다. 사(史)가 중요하다. 우리가 사(史)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 사실을 반추하여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보다 발전적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학문과 예술과 문화는 어차피 과거의 축적을 통한 현재의 재발견이고, 재해석이며, 이를 거친 창신(創新)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역사 속에서 연속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11월 13일부터 23일까지 연세대학교 박물관에서 전시될 심은 전정우(沁隱 全正雨)씨의 66체천자문 작품들을 보면서 작가가 천자문에 매진하는 이유를 알았다. 30체 천자문을 발표한 2년 전에 어렴풋이 느꼈던 점이 이제 66체를 발표하는 시점에 와서 보다 분명해졌다. 주흥사가 만든 '천자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천자문으로 서예사를 쓴다'는 점이다. 천자문이 씨줄이라면 3천년 서예사의 중요 서체를 날줄로 삼아 씨줄과 날줄을 엮어 서예사를 쓰고 있는 셈이다.


▲ 마왕퇴죽간(馬王堆竹簡) 千字文 70×70cm
ⓒ 전정우
천자문
'천자문으로 쓰는 서예사'라는 말은 2004년 10월부터 쓰기 시작한 66체천자문 면면을 살펴보면 단번에 이해하게 된다. '66체'는 서예사에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서체이자 변천시기의 중요 서체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것은 바로 천자문을 쓰기에 각 서체의 현존하는 글자가 부족한 경우이다. 66체천자문 가운데는 역대 명필의 천자문 전문도 있지만, 동일 글자가 몇 십 자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이때 중요한 점은 문자학적 검증과정이다. 작가는 당대(當代) 서풍은 물론, 대상 텍스트나 해당 작가의 필의(筆意)를 분석하고, 서체의 앞뒤 관계를 살피고 서체 간의 문자 구조를 파악하여 빈틈을 메우고, 마침내 자신의 것으로 재해석해낸 것이다.


▲ 무(無) 1 49×66cm (문자추상)
ⓒ 전정우
문자추상
그러나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단순히 천자문 전문(全文)을 해당 서체로 완성해내는 것이 아니다. 없는 글자를 채워 넣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 이 작업을 나는 '리라이팅(rewriting)'으로 읽었다. 하나의 서체로 천자문을 쓰되 그것에 국한되어 외향적 유사성인 형임(形臨)만을 지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천자문을 거듭 쓰는 이유를 '공부를 위해서'라고 강조하였지만 공부에 더하여 새로운 창작의 결과물을 낳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런 면에서 나는 심은천자문을 '천자문으로 쓰는 서예사'라고 의미지었는데, 작가는 바로 천자문을 가지고 서예사를 종횡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부단한 상호작용'으로 현재에 재탄생시켜 놓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66체라는 두터움이 이룬 업적이요, 깊은 집중이다.

이는 얼마든지 새로운 창작의 방향도 낳을 수 있는데, 가령 <66체 반야심경>도 가능하고, <66체 법화경>을 쓰는 것도 가능하다. 그래서 66체천자문은 글자수 1000자, 250구라는 숫자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 노자 도덕경 구(老子 道德經 句) 205×35cm
ⓒ 전정우
도덕경
천자문 그 자체가 내포한 동양철학의 심오함이라든가 깊은 사유의 문장은 이미 오랜 역사를 거쳐 인정받아왔으니 별도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물론 천자문은 현대, 그리고 한국 상황에는 적합하지 않거나 거리가 먼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천자문이 지금도 여전히 의미있는 점은 동양학문 입문서로서 가치를 지니는 것에 국한되지만은 않는다. 바로 천자문을 통하여 전통의 교감과 연결선을 만들고 이를 통하여 현대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창조해낸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천자문을 선택한 것은 탁월한 측면이 있다. 나는 <칠체천자문(七體千字文)> 시리즈 출간 기획자로서 천자문에 대해 느끼는 매력이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번 심은 66체천자문은 '천자문으로 쓰는 서예사'로, '천자문'의 의미를 넘어선다고 본다.




http://blog.naver.com/neoyunmc/100013353602



http://gangsanilee.tistory.com/298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K6An#ajax_history_0
http://www.sisapress.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5283


선조의 명에 의해 간행된 석봉 <천자문>(왼쪽 맨 위부터)은 가장 널리 알려진 <천자문>이다. 김인후 <천자문>(오른쪽 첫 번째)과 박팽년 <천자문> (오른쪽 두번째)은 초서로 쓰인 대표적인 <천자문>이며, <성리천자문>(오른쪽 세 번째)은 조선 성리학의 요체를 천자문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맨 오른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봉선사판 조맹부 <천자문>.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하늘천 따지’전(8월16일~9월19일)은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우선 <천자문>을 소재로 삼은 국내 최초의 전시다. 한자 붐을 타고 <천자문> 교재 수십종이 서점에 나와있는 현실에서 뜻밖이다.

또 하나. <천자문>을 뗐다는 이들도 처음 보았을 색다른 <천자문>의 세계가 펼쳐진다. 전시장에는 국내의 현존 <천자문> 책 중 가장 오래된 1475년 봉선사판 조맹부 <천자문>을 비롯해 조선시대와 일제 때 인쇄하거나 필사한, 글씨체뿐 아니라 내용까지 판이한 <천자문> 100여 종이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 하나 더. 국립 전시 기관이 전시회를 열 경우 논문을 첨부한 고급 도록이 함께 출간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판만 먼저 나오고 학술 논문은 나중에 따로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전문가들도 처음 본 자료가 많아 논문을 수정할 시간이 필요해서다. 따라서 전시 기간에 두 차례 열리는 학술토론회는 전시와 별도로 주목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천자문>이라고 하면 ‘하늘 천 따 지’로 시작하는 것만 떠올린다.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문사였던 주흥사(周興嗣, ?∼521)가 지었다는 <천자문>이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즉 혼돈에서 하늘과 땅이 갈리는 것으로 시작해 언재호야(焉哉乎也)라는 허사로 끝나는 2백50구의 사언고시다. 국내에는 백제 때 처음 전해졌다. 이후 안평대군·박팽년·이황·김인후·신위·조윤형 등 저명한 도학자들이 자신의 서체로 <천자문>을 적어서 남겼다. 그 중 석봉 한 호가 1583년 선조의 명을 받고 쓴 <천자문>이 가장 유명하다.

친일파 <천자문>에 ‘대한제국 독립만세’

그러나 <천자문>이 꼭 이렇게만 씌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주흥사 <천자문>의 형식만 빌려 다양한 <천자문>을 썼다. 도학의 핵심을 1천 자로 정리한 <성리(性理) 천자문>은 ‘일리태극, 이기음양’ 순으로 되어 있다. <역대 천자문>은 중국의 역사를 담은 것이고, 이에 맞서 우리 선조들은 <조선역대 천자문>을 썼다. 다산 정약용이 쓴 <아학편(兒學編)>도 일종의 <천자문>이다. 다산이 ‘학동들의 공부에 적절치 않은 일시적 희작’이라고 <천자문>을 호되게 비판한 뒤 초학자용 학습서로 쓴 책이 <아학편>이다.

근대 초는 대중 계몽기였다. 민족 교육의 상당 부분이 서당에서 이루어졌던 만큼 다양한 <천자문>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어 주석이 달린 <천자문>, 그림을 곁들인 <천자문>도 있다. 서양 선교사가 편찬한 <유몽천자>(어린이를 계도한다는 뜻)는 세계사를 서술하고, 여기 등장하는 새로운 한자를 <천자문> 형식으로 정리한 교양 서적이다. 대표적인 근대 지식인이자 친일파였던 윤치호도 자신의 <천자문>을 썼다. 전향하기 전에 쓴 듯, 1천자 안에 ‘대한제국 독립만세’라는 두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순조(1790~1834)가 세손 시절 쓴 천자문구.
국내에서 간행된 <천자문>에는 대부분 우리말 석문이 달려 있어서 국문학 연구의 귀한 자료로 이용된다. 가령 18세기에 편찬된 <주해 천자문>에는 ‘거칠 황(荒)’자에 ‘거칠다’와 ‘크다’는 두 가지 석음이 달려 있다. ‘황’자에 대한 용례가 늘었음을 뜻한다. 통영에서 편찬된 <천자문>은 서울에서 펴낸 <한석봉 천자문>을 저본으로 하면서도 ‘주머니 낭(囊)’자를 ‘줌치 낭’으로 달리 적었다. 이 책은 지방 사투리가 ‘교과서’에서도 쓰였음을 알려주는 주요 판본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되었다.

다양한 필사본들도 볼거리다. 못자리에 모를 심듯 단정하게 칸을 나누어 쓴 박팽년의 초서와, 글자와 글자가 한 기운으로 연결되어 흐르는 김인후의 초서를 비교하는 맛도 쏠쏠하다. 대부분의 필사본에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공부 방법을 전하는 내용 등 다양한 덧글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아 전통 시대 집안 교육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천자문>을 종합적이고 학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전시회 기간에 열리는 학술대회에는 서예 전문가와 국학자, 국문학자, 한문학자, 교육학자, 서지학자, 컴퓨터 폰트 연구자들이 모여 종합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천자문> 석음 연구의 권위자인 홍윤표 교수(연세대·국문학)는 “전문가인 나도 처음 본 자료가 많아 흥분된다. 전시기획자인 이동국 선생이 큰 일을 했다”라고 말했다.

전시장에서는 텍스트 외에 <천자문>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도 향유할 수 있다. 서예박물관은 임방울·이화중선 등 20세기 초 명창들이 부른 <천자문 뒷풀이 노래> SP판을 최근 발굴해 전시 현장에서 들려줄 예정이다. 어린이 박물관 체험교실과 여울목무용단의 창작 공연도 열린다. 문의 02-580-1282.

http://deungdae.hihome.com/chunjamu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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