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30, 2012

Japan defeating and military comfort women,massacre and collective Self-determ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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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일본 패전과 군위안부

학살과 집단자결

입력시간 2012-04-16 오후 9:50:27


군'위안부'의 학살, 집단자결 사례가 있는지에 대해 관심가진 이들이 꽤 있다. 그런데 이 관심에서 나아가기 전에 전쟁기 일본군 하의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집단자결과의 차이와 유사성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집단자결이라고 하면 용어상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 같은 어감이 있는데 실제 상황은 일본군의 감시하에 강요된 자결이라는 점에서 학살과 진배없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또 집단자결 혹은 학살현장은 대부분 일본군이 열세에 처한 지역이고 민간인 학살 이후 혹은 그것과 거의 동시에 일본군들도 자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계가 있지만 회고록이나 현장에 본 것을 기초로 한 기록 등에 기초하여 군'위안부에 대한 학살과 집단자결 사례에 대해 살펴본다.
   일본군에서는 포로나 패배는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지도부의 잘못에 의해 진행된 전쟁에서 병사들은 전원 전사나 자결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우를 일본군은 '옥쇄(玉碎)’라고 미화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연합군에 기밀을 누출시키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남양군도나 오키나와 등 격전지에서 군인·군속은 물론 민간인인 주민까지 집단자결을 강요하였다. 이것은 실제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타살이었다. 군위안부 피해자들의 학살이나 집단자결도 태평양제도나 격전지에서 주로 일어났다. 군위안부에 대한 학살 혹은 집단자결 유도의 다른 이유는 연합군에 대한 군위안부의 존재가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이 군위안부들을 간호부로 위장하여 군속으로 편입하거나(인도네시아 등지 남방군 예하부대), 일본군과 함께 데리고 갈 때도(필리핀) 이러한 조치 이유는 군위안부를 연합군에게 보여 일본군의 명예를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필요에 의해 동원하였다가 패전의 시점 군위안부들은 일본군의 부담이고 불명예로 되었다.
   학살의 규모나 상황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지만 사이판. 테니안. 팔라우 등 태평양제도, 버마와 중국 국경인 윈난(雲南), 오키나와 등에 대한 기록을 통해 격전지역의 일본군에 의한 집단 학살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윈난지역은 학살과 집단자결의 구체적인 사례가 잘 드러나는 곳이다. 이 지역상황을 잠깐 살펴 보자.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은 중국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중국의 해상, 육상 교통로를 끊어 중국으로의 전략 물자 등의 운송을 막으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된 이후 버마와 인도로 연결되는 육상 국제도로이며 중국 국민당정부의 생명줄이었던 ‘버마 공로’을 둘러싼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1942년 3월 이후 일본군은 랑군, 버마 전역을 점령한 뒤 윈난성을 침공하였다. 5월 일본군은 텐시 지역에 들어오고 라멍(拉孟) 일대의 이 지역을 松山(숭산, 일본은 마츠야마라고 불렀음)지구라고 불렀다. 이곳은 버마공로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 松山에는 일본군 제 56사단 제 113연대 松井연대장의 명령으로 개설된 위안소가 있었다. 여기에 2∼30명의 위안부가 있었다. 미국에서 발견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군 장교와 함께 죽은 성장한 여성시체 6구와 일본근 106명의 시체와 함께 발견된 6명의 조선인 위안부시체가 있었다. 앞의 여성은 민족구분이 되어 있지 않지만 연합군이 자살로 파악한 것으로 보아 일본군 장교와 함께 자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 6명의 조선인 여성은 집단자결하였는지 학살당하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그 부근에서 6명의 여성이 포로가 되었다. 그 중에 임신한 여성은 박영심이었다. 200명쯤으로 추산되는 이 지역의 조선인 위안부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유일한 인물이다. 박영심은 전쟁이 한창이던 최전선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참호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위안부'들은 중국군에 잡혀 昆明포로수용소에 7개월 정도 수용되었다가 북한으로 귀향했다.
   그리고 야전포병 56연대 제8중대가 있었던 곳에서도 조선인 위안부 15명 가운데 11명은 일본군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는 증언이 있다. 그리고 살인미수의 증언도 있다. 사토미(里美榮) 伍長은 당시 상급군인으로부터 승홍(염화제이수은)을 밥에 섞어 군위안부를 살해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는 차마 위안부들을 죽일 수가 없어 그 약을 버렸다고 한다.
  텅충(騰衝)의 조선인위안부 학살도 널리 알려져 있다. 텅충은 연합군이 탈환하기 전에 일본군 제56사단 보병 제148연대 주력이 수비하고 있었다. 텅충에는 위안소 네 곳이 확인되는데, 공자를 모신 사당인 文廟(孔子廟), 左所街위안소, 順城街蔡씨가와 그 이웃집이 군위안소로 사용되었다. 당시 중국신문에 실린 기사에는 9월 14일 텅충성이 함락되었을 때 12살 가량의 여자아이가 발견되었는데, 그의 증언에 의하면 어느 날 동틀 무렵 위안부들이 숨어있는 방공호에 일본군이 찾아와 기관총으로 13명을 사살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자료에서는 텅충성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마지막으로 저항을 하다가 패했을 때, 성 밖에서 13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포로로 잡혔으며 한 담모퉁이에는 15명의 조선인위안부 시체가 한곳에 쌓여 있었고 거기에는 기저귀를 찬 아기도 끼어 있었다.  널리 알려진 구덩이 속의 사진이 또 다른 자료이다. 이 사진은 미국의 프랭크 맨워렌(Frank Manwarren) 기자가 찍었는데, 뒷면에는 ‘일본군과 중국군이 이 도시에서 싸우는 동안 텅충에서 살해된 여성들을 매장하는 팀. 그들 대부분은 일본군에 감금되어 있던 Korean 여성들이다 ’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지역의 군위안부에 대한 학살 사실은 알려진 구덩이 사진, 신문기사 등이 시차를 달리하며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고 있어 동일 사건을 설명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당시 텅충지역에서 학살된 여성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 제1차세계대전 이후 포로에 대한 국제법이 만들어졌으나 일본은 중일전쟁과 제2차세계대전기에도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는 것은 큰 불명예로 가르쳤다. 그 뿐만아니라 이것은 각지 특히 태평양제도와 오키나와 등 격전지 주민에게 요구하였던 집단자결의 논리와 연결된다. 학살이나 집단자결이 있는 지역은 모두 격전지였고 연합군의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조선인 군'위안부'는 식민지민으로서 식민지 폭력성에 의해 동원되어졌고 전쟁 말기에 눈앞의 해방을 앞두고 이민족 여성의 이탈방지와 연합군으로의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 일본군의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참고문헌**
조선일보, 남양 테니안도, 귀환동포가 고발한 일본인의 잔학성, 1946.2.13.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짓밟힌 인생의 웨침, 조선 : 평양, 1995.
조최혜란, 일본군위안소에 대한 지역별 사례연구 : 남태평양,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책임을 묻는다, 풀빛, 2001.
강정숙, 일본군'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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