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30, 2012
The fate for 20-year, to be Ruined country, Gojong became to call from "Royal Highness" to " Majesty"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407/200407200433.html
[운명의 20년] 동학농민군 재봉기서 亡國까지
2. 40인이 메는 가마대신 4인가마를 탄 대군주
홍범14조로 ‘전하’서 ‘폐하’가 된 高宗… 그러나 두려웠다
입력 : 2004.07.20 18:0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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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다큐 운명의 20년
1895년 1월 7일. 한겨울의 매운 칼바람을 맞으면서 왕의 행차가 경복궁을 떠났다. 왕세자와 대원군을 비롯한 종친들과 문무백관들이 각기 가마와 말을 타고 배행하는 장려한 행렬의 목적지는 종묘(宗廟).
새로운 법령인 ‘홍범(洪範) 14조’를 제정 반포함을 보고하러 가는 길이다. 조선을 다스렸던 역대 임금들의 혼령을 모신 종묘에 국왕이 친히 나가 국정의 중요 현안을 보고하는 것은 왕실 행사 중에서 가장 신성하고 중요하고 성대한 행사이다. 그런데 돌연 긴 행렬의 한쪽이 흐트러지면서 심상치 않은 소동이 일었다.
“상감마마! 박영효 대감이 낙마하시었삽니이다!”
보고를 들은 임금의 얼굴이 침통하게 일그러졌다. 종묘 거둥길에서 왕실의 인척이자 내무대신인 박영효가 말에서 굴러떨어진 것은 나라의 미래가 불운함을 예시한 흉조라고 느낀 것이다. “어허! 불길한 일이로다!”
▲ 고종의 덕수궁 행차 4인가마를 타고 덕수궁에 들어서는 고종 행차. 1897년 대한제국 출범 후의 풍경이다.
임금은 본래 이번의 종묘 거둥은 결코 실행해서는 안 되는 매우 불길한 행사로서, 나라의 명운과 미래를 망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낭패감이 극심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감정의 격동을 느낄 때면 나타나는 수전증 현상이었다.
애당초 경복궁을 떠날 때 임금은 이미 이번 행차의 의미를 폄훼하는 조치를 취했다. 종묘 거둥에 사용하는 40인이 메는 화려한 의전용 대여(大輿)를 물리치고 4인이 메는 초라한 소여(小輿)를 대령하도록 명했다. ‘4인 소여에 탄 임금의 종묘 거둥’이란 전례가 전혀 없는 아주 해괴한 행차였다. 굳이 그런 모습으로 경복궁에서 종묘까지의 짧은 길을 도살장에 끌려가듯 가고 있는 중에 흉조까지 나타나니 더욱 참혹했다. 그러나 거둥을 중지할 수도 없었기에 임금의 행렬은 그대로 전진하여 종묘의 역대 열성위 신위 앞에 나아가서 “이날부터 ‘홍범 14조’를 실시함으로써 조선은 새로운 체제를 지닌 새로운 나라가 됨”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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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독립과 내정 개혁. 그것은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려면 반드시 추구하고 확보해야 할 근본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중요한 의의를 지닌 ‘홍범 14조’를 종묘에 가서 고하면서 임금은 왜 그처럼 두려움을 느꼈던 것일까.
이유는 역시 ‘홍범 14조’의 핵심인 제1조 때문이었고, 당시의 국제정세, 곧 대청 관계 때문이었다. 조선과 청나라는 그 시대 어법으로는 종주국과 속국의 사이지만, 오늘날로 보자면 매우 긴밀한 유대를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해온 아주 가까운 동맹국이라고 할 수 있다. 갑신정변과 동학농민항쟁의 경우에만 해도 청은 조선 정부의 요청에 따라 군사를 파견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일본과 피흘리며 전쟁을 벌였으니 조선과 청은 말 그대로 ‘혈맹’ 사이였다.
그러나 ‘홍범 14조’의 선포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주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고종으로서는 그에 따를 후유증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소 신료들과 백성들 중에서도 그 점을 염려한 이가 많아서 ‘홍범 14조’의 반포를 반기고 기리는 이 못지않게 우려하고 반대하면서 매우 착잡해 하는 이들도 많았다. 당시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계속 패배하고 있는 때가 아니었다면, ‘홍범 14조’의 반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대가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가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홍범 14조’로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한 데 따라 조선 왕실 가족들의 위호는 즉시 격상됐다. 주상 전하는 대군주 폐하로, 왕비 전하는 왕후 폐하로, 왕세자 저하는 왕태자 전하로 바뀌었다. 절대군주체제에서는 통치자의 위호(位號)가 나라의 격을 결정한다. 통치자가 ‘왕’이냐 ‘황제’이냐에 따라서 ‘왕국’과 ‘황제국(제국)’으로 갈린다. 왕국과 제국은 국호 자체가 군신(君臣)으로서의 상하관계를 규정짓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홍범 14조’와 그 후속조치들은 종래 ‘왕 전하’로 불렸던 조선의 통치자 위호를 ‘대군주(大君主) 폐하’로 바꾸는 것으로서 국가의 격을 ‘제국’에 맞먹는 정도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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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자주 독립’이란 명제는 당시 나라를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고 싶어한 조선인들이 간절히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어디 그뿐이었을까. 조선을 삼킬 야욕을 지닌 일본도 청으로부터의 조선 독립을 극력 원했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조선의 독립은 곧 조선에서 청제국의 보호막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약소국인 조선 임금 고종의 노심초사는 눈물겹다. 그는 일본 공사 이노우에와 처음에 합의했던 종묘 서고일인 갑오년 동짓날이 되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누워버렸다. 핑계가 아니라 후유증에 대한 염려로 정말 아팠는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날을 잡아 종묘에 서고하러 가게 된 고종이 짜낸 궁여지책이 ‘4인 소여’라는 카드였다. 혹시라도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승리한 뒤 ‘조선의 일방적인 관계 단절 선언’에 대해 강력하게 문책해 올 경우 “당시의 ‘홍범 14조’ 반포는 일본의 강요로 인한 것이지 결코 내 뜻이 아니었소. 이른바 ‘폐하’라는 내가 격식에 전혀 맞지 않는 4인 소여를 타고 갔던 것이 그 명확한 증거요”라고 내세우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홍범 14조’의 반포로 가장 두드러진 변화를 확실하게 보인 것은 역시 내정 개혁보다는 국체와 국제관계였다. 조선조 500년 만에 최초로 통치자에게 ‘폐하’라는 존칭을 붙이는 국체의 변동이 이루어졌고,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1637년에 성립되어 내려온 청국과의 종주국 관계가 258년 만에 완전히 해소되었다.
그러나 국제적 외교관계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쉼 없이 움직인다.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맥없이 패전하면서 조선의 군신과 백성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청국의 응징이나 보복이 전혀 없이 조선의 ‘대군주 폐하’ 시대는 정착되었다. 국가의 명운을 걸고 대군주 폐하 고종이 그처럼 고심하여 마련한 ‘4인 소여’의 히든카드는 지는 별처럼 역사 속으로 가뭇없이 폐기되었다.
(소설가 송우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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