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30, 2012

Photographic materials related military comfort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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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jejuet.kr/customer/3YN/content.asp?idx=261&bnum=104

본군위안부관련 사진자료

일본군 사령부 근처에서 미 해병 순찰대에 의해 발견된 위안부들(1945. 오키나와)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위안부들이 얼마나 귀국했는지 알 길은 없으나
이미 상당수가 위안소에서 또는 이동 중에 죽었다는 보고가 있다.
간신히 살아남은 위안부들은 미군 수용소에 있다가 귀국하거나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스스로 귀국했는데 위안부를 했다는 자격지심에
귀향을 결심하지 못하고 현지에 정착한 사람들도 많았다.




미얀마와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미군과 중국군의 보호를 받고 있는 위안부들[1944.08]


전쟁이 끝난 후 그대로 버려진 위안부들
중국과 미얀마의 국경지대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를 당시 연합군이 촬영한 사진이다.
4명의 위안부 중 유일하게 임신한 모습을 하고 있는 분이 북한에 생존해 계신 것을
2000년 8월에 알게 되었다. 북한 남포시에 살고 있는 박영심(朴永心, 78세)할머니로서
북한을 방문했던 일본인 자유기고가 니시노 루미코(西野瑠美子)의 추적으로 생존 사실이
극적으로 확인됐다.
朴할머니는 아사히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사진에 있는 임신 여성이 바로 나" 라며 "아기는 포로 수용소에서 유산됐다" 고 확인했다.



일본군에게 학살되어 파묻기 전 위안부들의 시체 1944년 9월.
중국과 미얀마의 국경지대에서 발견된 구덩이에 버려진 조선인 위안부들의 시체



위안소 내의 오락시간에 동원된 위안부들
위안부들은 위안소에서 '하루코' '게이코' '노부코' 등의 일본식 이름을 받아서 사용했다.
군인들은 위안소를 주로 '삐야'로 불렀고 '위안소' '빵빵야'라고 부르기도 했다.
위안부는 '삐'(중국어로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말)
혹은 민족에 따라 '일본삐', '조선삐', '지나삐', '대만 쿠냥(처녀)' 등으로 불리웠다.



전선의 이동으로 일본군 트럭에 실려 이동중인 위안부들
현지 위안부와 달리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따라 다닌 경우가 많았다


성병 검진용 진찰대
아소우 군의관이 스스로 설계해 만들어낸 나무로 된 산부인과용 진찰대이다.
나무판 위에 올라가 오리주둥이 같은 것으로 검사를 하고 성병이 있으면 살바르산 606번 주사를 놔주었다.
이 주사를 맞으면 코에서 냄새가 나고 어질어질하며 비위가 상했다고 한다.
또 일본군은 위안부의 성병치료와 임신방지를 이유로 수은을 강제로 먹거나 몸에 수은증기를 쏘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최근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당시 수은 때문에 얼굴이 돌아간 위안부를 목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성병 검진가는 위안부들
위안소 설치의 목적중의 하나가 성병 예방인 만큼 위안소와 위안부의 위생에 대한
군의 통제는 엄격했고 이와 관련된 규정도 많았다.
성병 검진은 근처 군인병원이나 따로 마련된 진료소에서 일주일에 한 번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인은 성병 검사에 합격한 위안부만 상대할 수 있었다.
불합격한 경우는 위안소 방 앞에 천 조각을 걸어 말렸다.
흰 천은 허가하지만 위생구를 사용하라는 의미이고
분홍색은 요주의, 붉은색은 유독한 환자라는 의미였다.
검사에서 떨어지면 관리들이 싫어할 것을 염려해 자기들끼리 미리 검사하여 이상하다 싶으면
흙이나 먼지를 묻혀 군의관을 속이는 경우도 있었다.



위안소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군들
뒤에 붙여져 있는 것이 '위안소 규정'이다 요금은 30분에 병사는 5전, 하사관 70전이며
1시간에 병사 1원(엔), 하사관 1원 50전,
30분짜리가 없는 장교는 1시간에 2원 50전이었으며 장교인 경우 자고 갈 수도 있었다



위안소 밖까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군들



어린 소녀까지 포함된 도암면 처녀회 (소화 20년 1945)
'여자정신근로령'에 의해 근로협력명령을 내려진 후 조선 각지에서 일본 경찰의 지휘로 처녀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정신대의 이름으로 각 군수공장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위문대(慰問袋) 만들기에 동원된 한국인 부녀자들



정신대로 끌려가기 전 신사참배를 하러 가는 12∼16세의 소녀들(1944)
1944년 일왕의 칙령이 발표되자 국민학교 학생까지 담임의 권유로 인해 여자정신근로대로 끌려갔다.
사진은 일본 나고야에서 12세부터 16세까지의 조선여성이 총동원된 나고야시(市) 조선여자정신대가
군인의 인솔로 근로협력에 동원되고 있다.



상해에 처음 세워진 위안소의 외부
정문에
"성전의 승리를 위해 용사를 환영합니다. 신심을 다해 봉사하는 일본 여성의 서비스"라는 글이 보인다.
군위안소는 군이 직접 운영하거나 민간에 위임하였는데 어느 경우에나 군대의 보호 감독 및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위안부로 끌려가서 낮에는 간호부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패전이 명확해지자 '위안부' 사실을 숨기기 위해 위안부들을 간호부로 위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안부나 군간호부 모두 군대가 총괄하였다.



나무막사로 지어진 상해 육군 오락소

각 방에 위안부를 한 명씩 넣어두고 군인들을 받게 하였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위안소 형태 외에도 중국인 집이나 상가를 이용하든가
전방에서는 천막으로 급조하여 사용하였다.

[ 출처 :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역사관( http://www.hermuseum.go.kr/ )]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http://www.cybernanum.org/
[출처] 일본군위안부 사진자료|작성자 두루미



위 사진 사실 보고만 있어도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저 사진 조차도 정말 순화된 일부만일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 실상은 얼마나 더 치욕적이고 가슴아프며 생각조차 하기 싫을까??

우리가 광복을 맞이하며 잃어버린건 단지 애국자들 독립 운동가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식을 잃었고, 누구의 연인이었을런지는 몰라도 아리따운 자신의 반려자를 잃었을 것이다. 한 국가의 여인네들을 저렇게 욕보이고도, 일본은 아직도 제정신 못차리고, 사과도 제대로 안하고 이제 언제 운명하실지 모른채 그래도 정기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할머니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다.

그리고 광복 64주년인 지금까지도 이 문제는 양국간의 뜨거운 핫이슈로 남아 있다. 어쩌면 평생.... 그리고 우리는 이 비참했던 한국 여인들의 아픔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군대위안부에 관한 일본공식 입장발표를 한번 볼까요??

근거

1993년 일본 정부의 관방장관인 고노 요헤이 장관은 그간 한·일 간에 격렬한 논란이 되어 왔던 군대위안부 문제에 관해 공식입장을 천명하였다. 여기서 고노요헤이 장관은 “일본군 위안부의 모집과 동원·관리 등에 일본군이 관여해 강제성이 있었다고 인정하고 사죄 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배경

종군위안부의 존재와 그에 대한 배상·보상 문제는 90년대 이후 한·일관계의 가장 뜨거운 쟁점 중의 하나였다. 1965년에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과 재산 청구권에 관한 협약에 의해 형식적인 전후처리 문제는 종료되었지만 종군위안부 문제는 논외로 취급되었다는 전제하에 한국은 90년대 이후 종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일본에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내에서는 종군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혹은 위안부는 상행위의 일부라는 등의 몰역사적인 입장을 주장하는 일부 인사들도 등장하는 등 위안부문 제에 대한 성의 있는 대처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1993년 발표된 고노 담화는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군대위안부에 대한 일본관헌의 관여가 있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강제성이 있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에 대한 사죄의 의사를 표함으로써 종군위안부 문제해결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내용

고노담화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정부차원의 보상배상 조치에는 부정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 대신 민간차원의 기금을 조성하여 과거 위안부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아시아여성기금이다. 아시아여성기금은 2005년 6월10일 출범하여 국민모금 6억엔(보상금)·정부 출연금 14억엔(의료·복지사업 등) · 정부보조금 28억엔(여성존업사업 등))을 모집하여 다음과 같은 위로에 상당하는 조치를 결정하였다. (1) 종군위안부 출신자에게 일률적으로 1인당 200만엔 ‘보상금’ 지급 (기초자금 모금), (2) 의료·복지지원사업의 실시 (1인당 5년간 300만엔 상당의 현금 지급, 기초자금은 일본정부 출연금), (3) 사업실시 때 대상자에게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하는 ‘총리의 편지’ 발표. (4) 여성존엄사업(여성문제를 테마로 하는 국제포럼개최 등)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위안부 당사자들의 거부에 의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즉 위안부 당사자들은 일본정부의 공식사죄와 반성 그리고 그에 따른 배상과 보상을 요구하며 아시아여성기금의 조치에 대해 일부를 제외하고 이를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뭐밍?? 사실 협상해 주고 사과해 주는 듯하면서 이건 뭐.... 그냥 얼렁뚱땅 넘어갈 속셈인듯....

게다가 2007년 보도된 뉴스에 의하면 일본 의원들의 소위 막말은 끊이지 않는다.
일본 의원들 "종군 위안부 강제 동원 없었다"
출처: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idetail&rev=5&query=%C1%BE%B1%BA%20%C0%A7%BE%C8%BA%CE&from=image&ac=1&sort=0&res_fr=0&res_to=0&merge=0&spq=0&start=2&a=pho_l&f=nx&r=2&u=http%3A%2F%2Fcafe.naver.com%2Fdegue1456%2F393&thumbnail=http%3A%2F%2Fthumbview01.search.naver.com%2Fthumbnails%3Fq%3Dhttp%3A%2F%2Fcafefiles.naver.net%2F20090725_263%2Fdaisutre_1248521147363P1nSz_jpg%2F%25C1%25BE%25B1%25BA%25C0%25A7%25BE%25C8%25BA%25CE_daisutre.jpg&signature=915451753023&gdid=90000004_0115ED2E0000018900000000
sbs뉴스 중...



<8>

<앵커>

이렇게 우리가 3.1절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는 사이에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이 다시 어이없는 주장을 하고 나섰습니다. 일본 정부나 군이 종군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이하 생략-

웁스, 아웃츄, 테러블,,,, 참 언제나 막말 잘하는 것은 알았지만 ㅠ.ㅠ.
사실 조사 하다 보니 너무 화가 나서..... 사진보고 한번 울컥, 일본의 막말에 다시한번 울컥..... 정말 우리가 제대로 된 증거 기록들만 있었더라면 세계 방방 곡곡에 그 명백한 사실들을 알릴수 있는데 말이죠,,,, 마음만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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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의 절규(1944)

전선의 이동으로 일본군 트럭에 실려 이동중인 위안부들



위안부 여성들이 머문 숙소



일본의 강제 행위에도 어쩔수 없는 위안부 여성






어린 소녀가 일본 고급 관리의 위안부로 되었다


손을 뒤로 묶고 강제로 키스하는 장면


겁탈 당하여 정신이 이상해진 소녀


하릴없이 있는 그들이 너무 슬퍼 보입니다



강제로 추행을 당해도 그들은 어쩔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군인들사이에 한가운데서 묶여있는 여성


구들,,,,,,,,,,,,,,,,,,,,,,,,,,,,,,,,,,,,,,,,,,,,,,

어딘가로 끌려가기를 기다리는 여성들



위안부 여성이었던 할머니의 마음뿐만 아니라 몸에조차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출처 : ♡그리움,눈물,사랑♡ | 글쓴이 : 나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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