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30, 2012

The history of the past 100 years and Japan forced annexation Korea

http://hook.hani.co.kr/archives/10684


한일 강제 병합 100년과 과거사



올해로 한일 강제 병합이 100년이 되었다. 그나마 과거사에 대해 진보적 입장이라는 일본의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고, 최근 일본의 나오토 총리는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일 강제 병합이 한국인의 의사에 반(反)하였다는 사죄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의 학계와 일본의 진보적 역사학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조선왕실의궤 반환이라는 성과 외에는 지극히 평범한 외교적 수사로서 핵심을 비껴나갔다는 지적이었다. 핵심적인 1910년의 한일 강제 병합이 원천 무효라고 선언하지 않았다는 것은 담화의 진정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었다. 사람들은 내심 나오토 총리의 담화에서 한일 강제 병합의 원천 무효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담화에서 드러난 일본의 입장은 종전에 비해 큰 변함이 없는 것이었는데 사실 이러한 일본의 입장이 지속될 것이라는 점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이러한 한일 강제 병합에 대한 일본의 입장과 딜레마는 종전 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되던 1952년에 이미 드러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조선인 BC급 전범에 대한 딜레마였다. 강제병합의 원천 무효의 여부에 따라 제 2차 세계 대전과 관련한 식민지 조선의 지위에 관한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 수순인 바, 강제 병합을 원천 무효로 인정하는 순간 제 2차 세계대전과 관련한 식민지 조선과 조선인은 일본인으로서가 아닌 피해 당사국으로서 관련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고, 징용과 위안부 및 여러 물질적 수탈 행위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는 수순을 밟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책임 회피를 넘어 식민지 근대화론을 통해 한국과 대만에 대한 식민지 통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일본의 입장에서 한 순간에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것이 다름 아닌 강제 병합 원천 무효 선언인 것이다.

조선인 전범과 샌프란시스코 조약 그리고 조선인의 책임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조선인으로서 제 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의 전범으로 판결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많은 역사책이 식민지 조선의 수탈에 대해 이야기만 할 뿐 구체적인 수탈과 전쟁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이 써야 했던 불명예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태평양 전쟁에서 BC급 전범이 된 사람들은 대체로 동남아 지역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한 군속들이다. 1930년대 초에 전쟁이 심화됨에 따라 조선인에 대해서는 징용과 징병을 할 움직임을 보이자 전장에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군속이 된 자들인데, 그들은 이등병보다 낮은 계급으로서 명령을 수행하는 것 이외엔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다. 하지만 많은 포로들을 학대하는 과정에서 집행자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포로 학대의 주된 전범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와 영국 전범 재판소에서 일본인으로 간주되어 엉터리 재판 절차와 변호권도 없이 전범으로 처리된 경우가 대다수였다. 재판은 일본인으로서 받아야 했지만 일본인으로서 그 어떤 변론 및 신변 보호도 받지 못 한 채, 독립된 한국과 일본 양국으로부터 버림 받았던 것이다.



1952년 4월 12일 일본의 중의원 법무위원회의에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 11조에 규정된 ‘일본인’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오니시 중의원이 지적한 조선인 대만인의 전범으로서의 책임 문제였다. 이 당시 정부 위원인 후루하시는 다음과 같은 답을 했다.


“조약 제 11조에서 일본인으로 규정한 자는 그 범죄 당시에 일본인으로서 일본 전쟁에 관여해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 재판 당시에도 일본인이었던 사람,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본이 앞으로도 형 집행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인과 대만인도 제 11조에서 말하는 일본인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강화조약 발효까지는 조선 및 대만인들도 일본인이고, 일본인으로서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 1952년 4월 12일 일본 중의원 법무 위원 회의록 제 31호 -

비록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후에는 한국 국적으로 회복되는 전범이라 하더라도 과거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 후루하시의 논리였다. 사실 많은 징용과 징집, 위안부에 대처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살펴보면 후루하시의 논리와 묘하게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일본 국민으로서 태평양 전쟁에 참여했으므로 당시 국민으로서 보편적인 의무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서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해 한국의 독립을 최종 승인 되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식민지 조선인들이 외국인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 보상 책임을 질 의무가 없다는 것이 오늘날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미리 결론짓자면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문제가 많은 강화 조약이었다. 1951년 당시 한국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전후 처리보다 어떻게든 일본을 자유진영에 속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는 전쟁 피해 당사국인 한국과 중국이 빠져있었고, 전쟁 배상액도 종전에 모든 교전국이라는 원칙도 배제되었다. 또한 바로 이 조약에서 한국의 영토에 관한 내용에 독도가 빠졌다는 이유로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국제 정세 속에서 맺어진 조약을 통해 일본은 식민지 책임에서 해방되었다. ‘조선인 또한 일본 국민으로서 전쟁에 동참했기 때문에 특수한 피해자가 아니다’라는 논리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한일 강제 병합에 대해서 원천 무효가 아닌 유효론 또는 부당하지만 유효하다는 유효부당론(有效不當論)을 펼치는 이유도 바로 식민지 조선을 특수한 피해자로 규정하지 않기 위한 책임 회피의 노력인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한일협정을 통해 배상 문제에서도 해방된 일본의 입장에서는 굳이 한일 강제 병합의 원천 무효를 선언함으로서 새로운 배상 책임을 애써 만들 리가 없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논리의 중심에는 국제적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강화시켜줄 증거인 조선인 BC급 전범과 한일 강제 병합의 법적 효력이 존재하고 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몹시 억울할 수밖에 없다. 선택하지 않은 식민지 운명과 선택할 수 없었던 제 2차 세계대전의 참전 그리고 전쟁 동반자로서 전범의 멍에를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정리하지 않은 과거사, 교과서에 실리지 못하는 진실

오늘날 한국의 국사 교육은 대체로 민족사적 관점의 식민 수탈에 관한 것만 다룬 채, 식민지 조선인의 삶과 제 2차 세계대전 속의 식민지 한국에 대한 심도 있는 교육을 시키진 않는다. 그 결과 많은 국민들이 일본의 이러한 교묘한 논리를 이해하지 못 한 채, 단편적으로 식민지 문제에 접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당시 식민지 조선인이 생각하는 국가관과 당시의 전쟁에 동원된 정황, 조선인으로서의 지위와 제 2차 세계대전과의 관계 등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내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애초부터 알려졌어야 될 과거사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정리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정리되지 않은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야 말로 아직까지 한일 과거사 관계를 정리하지 못 한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우익 지식인에게 이러한 현실을 틈타 책임 회피 논리를 구성하고 심지어는 식민지 근대화라는 해괴한 논리를 구성하는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이 지난 수 십 년 동안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국제 관계가 도덕률이나 양심과 관계없이 힘의 논리와 국력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본으로부터 자발적인 반성을 바라는 일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한국 전쟁 와중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라는 최고의 면죄부를 받고, 경제 부흥에 성공한 일본은 마침내 경제적 지원이 절실한 약소국 한국을 상대로 유리한 협약까지 맺었다. 이러한 마당에 자신들의 전쟁 및 식민지 수탈 책임을 극소화하려는 움직임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독일의 사례를 들며 일본을 비난하지만 만약 일본의 전쟁 피해 당사국이 약소국인 한국이 아닌 프랑스나 영국 같은 서방세계의 강대국이었다면 일본도 일치감치 독일처럼 과거사를 반성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념 갈등과 경제 부흥이라는 과제 앞에서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 관계와 시대적 과제에도 불구하고 정리되어야 할 정신적 유산인 과거사를 지속적으로 미루어 왔다는 점은 우리 사회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젠 나름대로 먹고 살만한 나라가 되었음에도 십 수 년째 근현대사 정리 되지 않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단편적인 암기식 교육으로 국사를 가르치고, 교육적 비중을 낮춘 채 식민지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후대에 전승해주지 못 하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몇몇 한국인 학자들은 엉터리 논리인 ‘식민지 근대화론’을 교과서에 넣으려는 어처구니가 없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이웃 국가의 진심어린 사과와 배상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진심어린 사과는 그냥 나오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과거사에 대한 무게를 느끼고 올바르게 정리한 후, 국제적으로 잘못된 과거사를 널리 알려 일본의 역사 왜곡에 압력을 줘야 한다. 그리고 외교적으로 책임과 사과를 요구하고, 올바른 역사관으로서의 전환을 촉구할 때야말로 진정으로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와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성찰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또한 그렇게 정리되어야만 양국이 과거사를 딛고 미래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과거사는 현재진행형

과거사는 비단 일제 식민지 역사 뿐 만이 아니다. 4.19 혁명에 관한 일이나 군사정권 당시의 반민주적 과거사 그리고 신군부에 의한 광주 민주화 운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있어서 군부 정권을 찬양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색깔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과거사에 대한 매우 슬픈 자화상을 보여준다. 이미 역사적인 진실이 드러났음에도 정치적 논리에 의해 과거사가 왜곡되어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 또한 한국인의 숙제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스스로 역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확실하게 만들지 못 한 탓이다. 현재의 우리들이 후대를 위한 올바른 역사관과 과거사 정리에 대해 갈망하고 그러한 대중적 요구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기로 현재 우리가 겪는 많은 역사적 논쟁의 대부분은 스스로 무관심해 알지 못 한 까닭에 과거사 진실에 대해 제대로 주장하지 못 한 바가 더 크다고 본다. 일본과 과거사에 대해 이토록 다투는 것도 어째보면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될 과거사의 쟁점을 몰랐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올바른 역사관을 통해 역사적 진실에 대한 요구를 높이면 진실을 추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를 통해 밝혀낸 진실은 외교적인 쟁점으로 승화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 했기 때문에 사이비 논리가 침투하여 논쟁이 격화되고, 역사적 진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점 옅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깝게는 일 년 전에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그를 둘러싼 의문 또한 대한민국의 밝혀야할 역사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가 가진 의혹의 진실에 대한 요구를 하지 않았고, 검찰 수사 중단과 함께 그 일은 유야무야 넘어가버렸다. 그 결과가 어떤가? 비리가 진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데도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논리에 맞게 그 사건을 포장하고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최근 한 경찰청장 후보가 확실하지 않는 의혹을 마치 진실인양 말한 일까지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사람에 대한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자 역사가 이러한 논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일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논쟁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8.15 광복절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과거사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론 또한 한일 양국 간의 문제를 재조명할 것이다. 반복되는 일본의 소극적인 입장 표명을 비판하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우리가 무엇을 정리하고 알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한일 강제 병합 100주년이 된 오늘 “왜 그들은 지금까지 반성하지 않는가?”를 말하기 전에 “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져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의 역사 인식은 어디까지이고,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무엇을 정리했느냐는 것은 사과를 받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일본이 자신들의 국익에 따라 논리를 구성할 것이라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책임 회피를 위해 거짓과 왜곡을 하는데도 그러한 논리를 논파하지도 못 하고, 외교적인 차원에서도 열세라면 진실을 밝히고 전파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역사적 진실을 되찾아야 한다는 열정만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에 대한 냉정함이 요구되어야 한다. 또한 이젠 더 이상 과거사 정리를 미루지도 말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필요한 때이다.










인용
일본 중의원 법무회의록 제 31호 : 우스미 아야코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 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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