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ugust 28, 2012

Yagbang Gisaeng,medicine Kisaeng

Yagbang Gisaeng
약방 기생

http://blogs.yahoo.co.jp/saihikarunogo/9786296.html

韓国ドラマ「ホジュン」(47話)イエジンの悲運のクライマックス!
近くて遠い韓国が、韓国ドラマを通じて近くなりました。 韓国の人々の感情、生活、歴史がわかる韓国ドラマは 両国の交流に寄与するすぐれものです。

韓国ドラマ、韓国の人々の哀歓のドラマ(TOP)


韓国ドラマ「ホジュン」(47話)イエジンの悲運のクライマックス!
47巻(韓流巻のレンタルビデオ)はイエジンの運命のクライマックスです。
公式サイトを見たりで凡その筋は、しいていたのですが、イエジンの運命を知って、胸がはりさけそうでした。

イエジンは、仕事の面ではともっかく、男性との関係では不運の目にあってきています。
ホジュンを慕うイエジンは、正義派のイ・ジョンミョンとも悲痛きわまりない別れに遭遇しています。

そして、今度は明の大使がやってきますが、政治的に難航している朝廷は、普段は接待に妓生を使う変わりに、教養と美しいイエジンとセヒョンをお伽にさしだしようにします。
医女でありながら、薬房妓生といわれていたそうですが、イエジンは、病人を直したいためだけに医女になったのですから、事情を知るすべもありません。

接待に国の運命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から、逃れるすべもありません。ホジュンに手紙を書き、死を決意したイエジン。イエジンの理不尽な運命に涙がでてきます。

イエジンが絹の最高の服を着せられて化粧を施された姿は、冷たく澄んで韓国美人の最たるもので、とめどなく涙を流すさまは、胸が詰まる想いです。

ここから先は、いえません。イエジンの運命を呪います。

韓国ドラマにどんでん返しという言葉があるそうです。

イエジンの運命を呪い、イエジンともども涙を流した私が、、、、、、、。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8&cp_code=cp0904&index_id=cp09040066&content_id=cp090400660001&print=Y





의녀
의녀(醫女)

조선시대에 부인들의 질병을 구호, 진료하기 위하여 두었던 여자 의원.

〔연 원〕 이 의녀제도는 1406년(태종 6) 검교한성부 지제생원사(檢校漢城府知濟生院事) 허도(許道)의 건의에 따라 제생원(濟生院)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는데, 의료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출발된 것이지만 우리 나라의 전통적 풍습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당시 부인들은 자신의 병을 남자 의원에게 진단받기를 꺼려 제생원에서 의녀를 따로 뽑아 주로 맥경(脈經)과 침구(鍼灸)의 법을 가르쳐 진료하게 하였는데, 그들이 습독하는 방서(方書:약방문을 적은 책)는 맥경·침구 이외에 부인과 및 산서(産書) 등이었다.

〔교 육〕 그 당시는 남녀의 자유로운 접촉을 기피하던 때이므로 중서계급(中庶階級)에 속한 여자들은 이 업에 종사하기를 원하지 않아 창고(倉庫)나 궁사(宮司) 소속의 비녀(婢女)들 가운데에서 동녀(童女)를 뽑았다.
뿐만 아니라, 외방(外方:지방) 각 도의 계수관(界首官:큰 도로변에 위치한 군과 현)의 여비(女婢) 중에 영리한 동녀를 선택하여 침구술과 약이법(藥餌法)을 가르쳐서 그 술법을 습득시킨 뒤에 지방으로 되돌려 보내어 부인들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들 외방에서 선발된 의녀들은 먼저 ≪천자문≫·≪효경 孝經≫·≪정속편 正俗篇≫을 가르친 다음에 서울로 보내오게 하였는데, 이것은 제생원에서 의방을 습득하기에 앞서 글자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1434년(세종 16) 7월에도 제생원 의녀들을 권장하기 위하여 여기(女妓)의 예에 따라 1년에 두 번씩 미곡을 내리게 하였다.
그리고 1478년(성종 9) 2월에는 예조에서 의녀를 권장하기 위하여 여섯 조항을 계청(啓請)하여 성적에 따라 내의녀(內醫女)·간병의녀(看病醫女)·초학의녀(初學醫女)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 권장의 법을 달리하였다.
이들은 주로 의방서·진맥·명약(命藥)·침구·점혈(點血) 등 의료업무에 종사해 왔으나, 사회적 대우는 천류(賤流)에 속한 기녀나 노비계급과 비슷하게 취급되었다.
1485년에 천류 자녀의 종량법(從良法:비녀가 평민에게 시집가 아이를 낳았을 경우 그 아이는 양인이 되게 한 법)을 정할 때에도 의녀는 창기(娼妓)와 같이 종량될 수 있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고 있다.
≪속대전≫ 예전에 의하면, 영조 때에 와서는 장려책으로 내국여의(內局女醫)와 혜민서여의(惠民署女醫)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그대로 채택되어 왔다.

〔의기화 醫妓化〕 성종 말경에는 의녀를 공사(公私)의 연유(宴遊:잔치)에 참가하도록 하였으나 기녀들과 함께 연회에 초청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1502년(연산군 8) 6월에 그 당시의 부호들의 혼수가 너무 사치하다 하여 혼가의 납채일(納采日)에 의녀를 보내어 그 물품들을 검사하게 하였는데, 그 뒤부터 연회 때에 기녀와 함께 어전 섬돌 위에 앉게 하면서, 의서를 배우는 이외에 음악을 가르치어 내연(內宴)이 있을 때에는 기녀와 함께 공공연히 참가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유희와 음희(淫戱)를 일삼던 연산군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다. 그 뒤 중종 때에 들어와서도 처음에는 의녀를 의기(醫妓)라는 이름으로 조관들의 연회에 계속 초청하였다.
1510년(중종 5) 이후로는 의녀를 연희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법률로써 수차에 걸쳐 엄금하고 의료의 본업에 돌아가도록 단속하였다. 그러나 한번 흐려졌던 풍기는 시정되지 않고 여전히 연회에 출입하였다.
한때는 연유에서도 내의원의 의녀는 흑단(黑緞)가리마(족두리)를 쓰고, 다른 기녀들은 흑포(黑布)를 쓰게 하였으며, 혜민서의 의녀는 약방기생(藥方妓生)이라고 불러 관기 중에서도 제일품에 속하였다.
이 의녀들은 천류 출신이라는 전통적 습속에 얽매여 남성의 의관들과 같은 사회적 지위를 끝까지 얻지 못하고 다만 천류로서 겨우 그 면목을 유지하여 왔을 뿐이다.
갑신정변을 전후하여 개화의 신풍조가 밀려들어 노비제도가 폐지되고 서양의학에 의한 왕립병원(王立病院)이 새로 설치되어 현대식 간호원이 요청되었으나 종래의 관습으로 인하여 처음에는 이 사업에 종사하기를 꺼리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經國大典, 續大典, 朝鮮解語花史(李能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近世朝鮮의 醫女制度에 關한 硏究(金斗鍾, 淑明女子大學校 亞細亞女性問題硏究所, 196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http://www.imbc.com/broad/tv/drama/daejanggum/concept/index.html



가. 조선조 의녀 ‘장금’의 성공담

남존여비의 봉건적 체제하에서 무서운 집념과 의지로 궁중최고의 요리사(料理師)가 되고,
우여곡절 끝에 조선 최고의 의녀(醫女)가 되어 어의(御醫)를 비롯한 수많은 내의원(內醫院) 남자 의원들을 물리치고 조선조 유일한 임금 주치의가 되었던 역사상 실존인물,
의녀(醫女) “장금”(長今)!
조선조 중종(1506-1544)때 “대장금”(大長今)이라는 엄청난 칭호까지 받은 전설적인 인물인 장금(長今)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그 동안 역사에 뭍혀 있던 한 여성의 의미 있는 성공사례를 소개합니다

나. 궁중내 하층민들 중심의 애환과 갈등

왕과 왕비, 후궁과 권신 중심의 권력쟁탈과 암투를 기본으로 엮는,
기존 궁중사극(宮中史劇)에서 벗어나, 미천한 신분의 주인공 장금(長今)을 중심으로
궁중내의 하층민(下層民)들인, 무수리, 나인, 상궁, 내시, 금군병사, 정원서리, 내의원 사령 및 의녀들의 갖가지 애환과 갈등을 궁중이면사(宮中裏面史)와 함께 우리 사극(史劇)에서 처음으로 보여줍니다.

다. 궁중요리를 중심으로 한 전통음식에 관한 모든 것

현대인들의 중요한 관심사로 대두된 음식문화(飮食文化)에 대한 정보를 궁중요리(宮中料理)를 중심으로 그 종류와 조리방법을 상세히 소개하고 아울러 보양식(補陽食)을 포함한 우리고유의 전통음식에 관한 모든 것을 시청자들에게 소개합니다.

라. 조선조 의학 상식 및 의녀제도에 대한 소개

그 내밀성(內密性) 때문에 의학의 금기(禁忌)로 여겨왔던 부인병(婦人病) 중심의 한방치료와 가정에서 여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갖가지 민간요법 그리고 세계 유일한 제도였던 “조선조 의녀제도”(醫女制度)와 특성과 운용, 의녀(醫女)와 의원(醫員)의 관계, 역할 등에 관하여 드라마에서 상세히 소개합니다.
특히 기존 의학드라마와 차별화하기 위해 약초학(藥草學), 부인병(婦人病), 일반침구(一般鍼灸)등 생활과 밀접한 내용의 질병을 주로 다룹니다 .






http://www.womennews.co.kr/news/28729










영화 속 과학이야기
세계 사상 유례없는 여의사 ‘의녀(醫女)’
대장금

‘대장금’의 주인공인 대장금은 여자 의사가 되어 중종 10∼39년(1515∼1544) 최고 의녀(醫女)의 길을 겪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이는 실화를 토대로 한 것이다.

대장금이 의녀로서 궁중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사상이 세계 유례가 거의 없는 의학상의 획기적인 사건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자 의사의 양성이다.

의녀제도는 중국이나 서양의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수한 제도다. 외국의 경우 단순히 남자 의사들의 보조 역할을 하는 경우는 있으나 부인병을 직접 치료하고 진맥하고, 시침하고 처방하는 일까지 모두 담당하는 전문 여의사는 외국의 경우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녀제도는 태종 6년(1406) 당시 한성윤겸교겸제생원지사였던 허수의 진언에 따라 제생원에서 탄생했는데 그는 의녀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남녀가 7세가 되면 서로 동석하지 않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지만 병에 걸려서 위급하게 되면 종실의 처자라도 의원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남의(男醫)가 처자의 피부를 주무르게 되니 남녀유별의 교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간혹 남의의 진료를 받기 부끄럽게 여겨서 그대로 죽기를 원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폐단을 고치고자 여의를 설치해야 한다.”

초기에는 부정기적으로 의녀를 뽑아 양성했지만 의녀의 필요성이 더 늘어가면서 3년마다 정기적으로 뽑고, 또 수가 모자라면 부정기적으로 뽑았다.

대장금은 중종 10년(1515년) 3월에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본격적으로 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2년 8월부터다. 대장금의 치료 능력이 탁월하자 왕실의 신임을 받아 중종의 병 치료를 전담하며 1524년 2월 대장금에게 체아직(遞兒職, 녹봉을 주기 위해 특별히 만든 관직)을 내려 명실공히 중종의 어의녀(御醫女)이자 주치의가 된다. 대장금은 이후 계속 중종의 어의녀로 활동했는데 중종 39년(1544년) 2월 3일 중종이 얼마나 대장금을 신임했는지 다음과 같은 말로도 알 수 있다.

“목이 쉬고 땀이 많이 나므로 약을 써야 한다는 것은 의녀가 알고 있다. 소소한 약에 관한 의논은 의녀(대장금)를 통해 전해줄 터이니 상의하도록 하라.”

근래 대장금이 각광을 받는 것은 당시에 어의나 의녀들이 행한 의료가 ‘의식동원(醫食同原)’에 의한 민중의술, 즉 약선(藥膳, 약이 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즉 약과 음식이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개념으로 현재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민중의술 살리기’ 운동도 대장금 등의 성공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http://community.freechal.com/ComService/Activity/PDS/CsPDSContent.asp?GrpId=1585918&ObjSeq=5&PageNo=1&DocId=25591822




1인 다역의 파워 우먼, 조선 의녀(醫女)들 2003-11-19 오후 2:17:00
김쌍규 조회 : 163
1인 다역의 파워 우먼, 조선 의녀(醫女)들



의녀 인향이와 취엽이

1693년 10월 6일 三更(밤11시~새벽1시 사이) 구중궁궐 안에서 산모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출산의 신호를 알리는 복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궁 밖에 있던 인향이와 취엽이는 궁궐에서 급히 부른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갔다. 의녀였던 두 사람은 아이를 받아본 경험이 많아 이번 출산시에 대령하라는 명을 이미 받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두 의녀는 익숙하게 산모의 진맥을 잡아보고 진통 여부를 확인하는 등 상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남자 의원들은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므로 밖에서 초조하게 대기하면서 의녀들의 전언(傳言)을 기다렸다.
산모의 복통이 계속되는 데 어찌될지 모르겠으니 일단 불수산(拂手散)을 달여 먹이는 것이 좋겠다고 의녀들이 건의하자, 밖에서 대기하던 내의(內醫)들은 곧바로 약물을 대령하도록 준비하였다. 불수산이란 출산을 돕는 일종의 분만촉진제였다.
그런데 밤새도록 통증을 호소하던 산모는 해가 밝아오자 그만 기운이 다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의녀들은 다시 인삼차를 먹여 기운을 북돋을 것을 청하였고 이내 인삼차가 산실(産室)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방안으로부터 힘찬 아이의 울음 소리가 퍼져 나왔다. 무사히 아이를 받았다는 의녀의 보고가 있자, 수의(首醫:내의 가운데 우두머리)는 곧바로 이 소식을 임금에게 아뢰기 위해 아이의 출생 시각이 적힌 사주단자(四柱單子)를 받아들고 처소로 달려갔다.


史劇의 주인공 의녀


국가의례(儀禮)에 동원된 의녀들-
가체에 검은 모단(冒緞)을 뒤집어 썼다.
최근 미모의 여배우가 의녀 역할을 맡은 '대장금'이라는 드라마가 화제다. 시작 전부터 세간의 이목을 끌면서 떠들썩하더니 역시 빈말이 아닌 듯 흥미로운 첫 회분을 선보였다. 요즘 사극(史劇)은 다양하고 특이한 소재들을 발굴하여 재미를 더하고 있다. 의녀 역시 매우 흥미로운 주제임이 분명하다. 그동안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그러나 막상 의녀에 대한 논문이나 저술들을 볼라치면 기왕의 연구가 너무 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 이 지경인지가 궁금할 정도이다. 아마 역사연구자들 스스로가 의녀 연구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라고 치부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으나, 의녀를 연구하려해도 별반 자료가 없는 현실이 또 하나의 주요 원인이 될 듯싶다.
어쨌든 조선시대 여성들의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하고 출산을 도울 목적으로 마련되었던 일종의 여의사 제도인 의녀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의 내외법이 강조되던 조선전기에 설치되었다. 남자 의사에게 신체를 내보이지 않아 죽어갔던 여인들마저 있었으니 이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천한 신분의 관비(官婢)들 가운데 어리고 똑똑한 자들을 선발하여 혜민서에 배속시켜 글을 가르친 후 문리를 어느 정도 깨치면 의서를 읽히고 또 의술을 가르쳐 의료 현장에서 일하도록 한 것이다. 어차피 관비들의 경우, 관청에서 신역(身役)을 져야할 입장이었으므로 서울에 올라와 의술을 배우고 의녀로 생활하다가 혹 궁궐의 여인들을 치료하는 공이라도 세운다면 단박에 천한 신분을 면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의녀는 신분 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기도 하였다.


의녀의 진짜 임무?

그러나 의녀들 대부분이 천한 신분이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비록 의술을 배워 전문적인 지식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환자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다양한 사료(史料)에 등장하는 의녀들의 실제 모습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라기보다는 사대부가의 여인들을 수색하고 탐문하거나 여죄수의 몸수색을 담당하는 형사, 혹은 사치스러운 혼수를 엄금하려는 행정 보조원, 아니면 단지 허드렛일을 보조하는 식모이거나, 심지어 잔치나 연회에 불려나가 남성들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창기(娼妓) 노릇까지 서슴없이 하는 그러한 모습들이다.
의사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이렇게 다양한 일들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는 전문성의 결여였다. 비록 혜민서나 내의원 의녀로 활동하는 경우, 다양한 의술과 의학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교육장치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실제 그리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하였으며 때문에 의술이 정밀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많은 불신을 받게되었고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로서보다는 심부름이나 허드렛일 심지어 창기 역할마저도 감당하게 된 것이다.
여성 환자들을 위한 의료인력 양성이라는 목적으로 시작된 의녀제도는 전문 기술직과 여성에 대한 조선시대의 부정적인 평가로 인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여성들을 대상으로 각종 질환을 치료하고 있는 의녀들의 활동을 여러 기록에서 접할 때마다, 형편없는 대우와 차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사로 대접받기 위해 애쓴 그녀들의 애환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http://hjyoo2000.egloos.com/m/7453302



인 다역의 파워 우먼, 조선 의녀(醫女)들
의녀 인향이와 취엽이

1693년 10월 6일 三更(밤11시~새벽1시 사이) 구중궁궐 안에서 산모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출산의 신호를 알리는 복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궁 밖에 있던 인향이와 취엽이는 궁궐에서 급히 부른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갔다. 의녀였던 두 사람은 아이를 받아본 경험이 많아 이번 출산시에 대령하라는 명을 이미 받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두 의녀는 익숙하게 산모의 진맥을 잡아보고 진통 여부를 확인하는 등 상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남자 의원들은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므로 밖에서 초조하게 대기하면서 의녀들의 전언(傳言)을 기다렸다.
산모의 복통이 계속되는 데 어찌될지 모르겠으니 일단 불수산(拂手散)을 달여 먹이는 것이 좋겠다고 의녀들이 건의하자, 밖에서 대기하던 내의(內醫)들은 곧바로 약물을 대령하도록 준비하였다. 불수산이란 출산을 돕는 일종의 분만촉진제였다.
그런데 밤새도록 통증을 호소하던 산모는 해가 밝아오자 그만 기운이 다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의녀들은 다시 인삼차를 먹여 기운을 북돋을 것을 청하였고 이내 인삼차가 산실(産室)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방안으로부터 힘찬 아이의 울음 소리가 퍼져 나왔다. 무사히 아이를 받았다는 의녀의 보고가 있자, 수의(首醫:내의 가운데 우두머리)는 곧바로 이 소식을 임금에게 아뢰기 위해 아이의 출생 시각이 적힌 사주단자(四柱單子)를 받아들고 처소로 달려갔다.


史劇의 주인공 의녀


국가의례(儀禮)에 동원된 의녀들-
가체에 검은 모단(冒緞)을 뒤집어 썼다. 최근 미모의 여배우가 의녀 역할을 맡은 '대장금'이라는 드라마가 화제다. 시작 전부터 세간의 이목을 끌면서 떠들썩하더니 역시 빈말이 아닌 듯 흥미로운 첫 회분을 선보였다. 요즘 사극(史劇)은 다양하고 특이한 소재들을 발굴하여 재미를 더하고 있다. 의녀 역시 매우 흥미로운 주제임이 분명하다. 그동안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그러나 막상 의녀에 대한 논문이나 저술들을 볼라치면 기왕의 연구가 너무 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 이 지경인지가 궁금할 정도이다. 아마 역사연구자들 스스로가 의녀 연구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라고 치부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으나, 의녀를 연구하려해도 별반 자료가 없는 현실이 또 하나의 주요 원인이 될 듯싶다.
어쨌든 조선시대 여성들의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하고 출산을 도울 목적으로 마련되었던 일종의 여의사 제도인 의녀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의 내외법이 강조되던 조선전기에 설치되었다. 남자 의사에게 신체를 내보이지 않아 죽어갔던 여인들마저 있었으니 이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천한 신분의 관비(官婢)들 가운데 어리고 똑똑한 자들을 선발하여 혜민서에 배속시켜 글을 가르친 후 문리를 어느 정도 깨치면 의서를 읽히고 또 의술을 가르쳐 의료 현장에서 일하도록 한 것이다. 어차피 관비들의 경우, 관청에서 신역(身役)을 져야할 입장이었으므로 서울에 올라와 의술을 배우고 의녀로 생활하다가 혹 궁궐의 여인들을 치료하는 공이라도 세운다면 단박에 천한 신분을 면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의녀는 신분 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기도 하였다.


의녀의 진짜 임무?

그러나 의녀들 대부분이 천한 신분이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비록 의술을 배워 전문적인 지식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환자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다양한 사료(史料)에 등장하는 의녀들의 실제 모습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라기보다는 사대부가의 여인들을 수색하고 탐문하거나 여죄수의 몸수색을 담당하는 형사, 혹은 사치스러운 혼수를 엄금하려는 행정 보조원, 아니면 단지 허드렛일을 보조하는 식모이거나, 심지어 잔치나 연회에 불려나가 남성들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창기(娼妓) 노릇까지 서슴없이 하는 그러한 모습들이다.
의사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이렇게 다양한 일들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는 전문성의 결여였다. 비록 혜민서나 내의원 의녀로 활동하는 경우, 다양한 의술과 의학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교육장치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실제 그리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하였으며 때문에 의술이 정밀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많은 불신을 받게되었고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로서보다는 심부름이나 허드렛일 심지어 창기 역할마저도 감당하게 된 것이다.
여성 환자들을 위한 의료인력 양성이라는 목적으로 시작된 의녀제도는 전문 기술직과 여성에 대한 조선시대의 부정적인 평가로 인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여성들을 대상으로 각종 질환을 치료하고 있는 의녀들의 활동을 여러 기록에서 접할 때마다, 형편없는 대우와 차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사로 대접받기 위해 애쓴 그녀들의 애환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김 호(중세2분과,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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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화려하고 서글픈 꽃, 기녀

기방풍경 Ⅰ. 우리들은 조선시대의 기생 가운데 몇몇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수많은 굶주린 사람들을 살려낸 제주 기생 만덕이나, 나라를 위해 일신을 던져 역사에 이름을 남긴 진주 기생 논개도 있다. 야사에는 물론이고 때로는 정사에도 기녀들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그들의 평소 생활하는 모습은 아직까지는 명쾌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기녀가 아무리 뛰어나도 일개 천인이었으므로 그 생활상이 자세히 갖춰져 남아 있을 리 없다. 대체 기방이 언제부터 있었으며, 어떻게 생긴 곳인지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서는 장님 코끼리 만지듯 기녀의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다.



동기교육 Ⅱ. 기녀에는 서울 장악원(掌樂院)에 소속된 경기(京妓)와 지방 고을에 소속된 관기(官妓)가 있다. 시대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경기는 대략 200명 정도였고 관기는 대략 고을마다 20명 정도가 있었는데 이 또한 지방 사정에 따라 달라서 작은 고을은 10명 밖에 안 되는 경우도 있었고 많은 경우는 2, 3백 명에 이르는 수도 있었다. 기생이 많았던 곳으로는 평양이 유명했는데, 예전에 대원군은 조선을 병들게 한 3대 집단으로 충청도 양반, 전라도 아전과 함께 평안도 기생을 들기도 했다.
기녀는 신분으로 표현하자면 천인이었다. 그들의 임무가 천하기도 하지만 핏줄도 대개 천했다. 지방의 관기들은 이름도 천해서 흔히 주탕(酒湯)이라 불렀다. 술자리에서 술맛을 돋구는 술국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세조는 궁중에 잔치가 있어 기녀들을 불러들여야 할 때면 분을 두껍게 바르고 들어오게 했다. 천한 것들이니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었다.
관기들은 대개 악공(樂工)의 딸이나 지방 고을에서 물긷고 빨래하는 관비(官婢) 중에서 인물이 곱고 재주가 뛰어난 어린 여자아이들 가운데서 선발되어 관기로 양성되었다. 그러나 관기는 천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관비보다는 훨씬 나은 대우를 받았으며 차림새도 관비와는 달랐다.



기마기녀 기녀성장 Ⅲ. 기녀가 되려면 음률을 알아야 했고 때로는 시문도 익혀야 했으므로 상당한 정도의 교육을 받아야 했다. 양반들을 상대하려면 어느 정도 품위를 지킬 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천인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전문직 여성으로서 그에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일반 평민 여자들과는 달리 고운 비단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다닐 수도 있고 화관(花冠)이나 화려한 노리개에 금은으로 된 머리장식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녀를 대접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녀를 상대하는 양반을 위한 것이었다.
기녀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차림새가 있었다. 기녀들은 가리마라고 부르는 쓰개를 썼다. 가리마는 이마를 가린다는 뜻으로 차액(遮額)이라고도 하는데 검은색 또는 짙은 자주색 천을 사각형 모양으로 겹쳐 그 안에 두터운 종이를 넣은 것으로써 머리에 써서 뒤로 정수리를 넘어 끝자락은 어깨에 내려오게 한 것이다. 가리마는 기녀 외에도 침선비, 의녀 등 천한 신분으로서 특정 직종에 종사하는 여자들만이 썼던 쓰개였다.
기녀들은 이 밖에도 전모(氈帽)라는 쓰개도 쓰고 다녔다. 가늘게 자른 대에 기름에 절은 한지를 붙여 둥글게 만든 쓰개이다. 후에 가리마나 차액은 후에 족두리로 바뀌어 쓰이지 않게 되었다.


Ⅳ. 기녀의 주된 임무는 춤추고 노래하는 일이다. 서울의 경기들은 나라에 매인 몸으로서 왕의 행차나, 궁중의 잔치, 사신 접대 등에 동원되어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는 일을 맡았다. 이들은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징발되어 연회장에 동원되었으니, 국립 합창단원 겸 무용단원이었던 셈이다.
기녀들은 그 대가로 약간의 보수를 받았는데 문종 때 경기의 1년 급료가 백미 한 섬이었다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생활을 꾸려나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라에 불려 가는 일이 없을 때면 고관이나 부잣집 잔치 자리에서 춤추고 노래해서 그 대가로 전두(纏頭)를 받아 생활했다.


선유락 검무
기녀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잠자리 시중을 드는 일도 있었다. 이들을 방기(房妓), 방수기(房守妓) 또는 수청기(守廳妓)라 불렀다. 이 말은 관리가 숙소에서 잠을 잘 때 방이나 마루에서 지키면서 수발을 든다는 뜻인데 그러면서 잠자리를 함께 하게 한 것이다. 특히 함경도나 평안도의 북쪽 변방에는 기녀들이 많았는데, 기녀들은 오지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그곳에 잠시 1년간 변방 근무를 위해 들어온 군관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빨래와 바느질을 해주고 밥 해주고 밤이면 잠자리까지 같이해야 했다. 그러다가 함께 지내던 군관이 근무기한이 끝나 돌아가면 다음 사람을 맞이해야 했다. 특히 북쪽 변방 지역에 기생이 많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기녀 중에는 재주가 뛰어나 큰 부자가 된 인물도 있고, 세조 때 4기녀로 명성을 날렸던 옥부향, 자동선, 양대, 초요경처럼 재주를 발판으로 천인 신분을 벗어난 경우도 있었다. 연산군 때의 장녹수는 기생 출신으로서 포악스런 연산군을 쥐락펴락하면서 잠시나마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재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다.
기녀 가운데는 고관의 첩으로 들어앉아 남부럽지 않게 사는 수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했다. 젊어서는 여러 사람의 총애를 받아 넉넉하게 먹고살다가도 나이가 들어 곱던 얼굴에 주름이 지고 남자들의 관심이 멀어지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기생은 나이가 들면 세 가지가 없어지고 한 가지가 남는다는 말이 있었으니 재산과 미색과 명성은 사라지고 오직 달콤한 말재간만 남는다는 말이다. 기녀는 노류장화(路柳墻花)라는 말 그대로 길거리에 선 버드나무나 담 밑에 핀 꽃처럼 지나가는 뭇 남정네들 손에 꺾이기 쉬운 꽃이었고 시들면 버려지는 꽃이었다.
정연식(중세2분과, 서울여대 교수



http://ask.nate.com/knote/view.html?num=289586





기녀는 삼국시대의 유녀(遊女)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찍부터 우리 역사에 나타난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관아에 기녀를 배치하였다. 기녀는 관청의 행사와 관리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필요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기생은 관기가 대부분으로 기녀들이 독립적으로 기방을 차린 뒤 손님을 받는 일은 조선후기의 일이다.

지방과 시기에 따른 기녀의 수

기녀는 한양에 거주하는 경기(京妓)와 각 고을의 지방기(地方妓)로 나뉜다. 기녀의 수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난다. 연회를 자주 연 연산조때 기녀의 수는 크게 증가되어 한때 한양에 머문 기녀가 만여명에 달했다. 각 지방에는 목(牧), 부(府), 군(郡), 현(縣) 등의 행정구역에 따라 기녀의 수가 정해졌는데 적은 곳은 20명에 불과했지만 평양과 같이 색향(色鄕)으로 유명한 곳은 200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기녀제도는 유교를 국가사상으로 하는 조선 사회의 질서에 사실상 반대되는 것으로서 이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조선초부터 활발했다. 그러나 기녀제도가 관리들 자신의 처신에 직접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폐지는 불가능하였다. 특히 관료들 사이에 “전국의 기녀제도가 폐지되면 관리들이 모두 옳지 못한 방법으로 일반 가정의 여자를 범하여 훌륭한 인재들이 벌을 받게 될 것이므로 기녀제도를 폐지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많았는데, 오늘날 국가에서 윤락가를 묵시적으로 인정하려는 인식과 유사하였다. 결국 기녀제도는 조선의 사회적 통치이념과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한말까지 유지되었다.


누가 기녀가 되는가?
1900대 초반의 기녀

기녀의 종류는 여악(女樂), 의녀(醫女), 창기(娼妓)등이 있는데, 원칙적으로 관기(官妓)를 뜻한다. 이들의 신분은 천인으로 국가에 소속된 공노비와 같은 존재였다. 기녀는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 번 기적(妓籍)에 올려지면 천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령 양반과 혼인하더라도 그 자식은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녀가 되었다. 기녀의 신분은 관아에 예속된채 세습되었다. 늙거나 병이 들어 기녀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딸이나 조카 혹은 여자아이를 대신 들여보내야 했으며 혹은 돈을 바치고 속량되는 경우가 아니면 평생 벗어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기녀는 모녀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대를 잇는 기녀외에도 일반 백성이나 양반의 자식이 기녀가 되기도 하였다. 흉년이 들어 가족이 흩어질 때 흔히 여자아이는 기녀로 팔려갔으며, 역적 집안의 여자들이 강제로 기녀가 되기도 하였다.


기녀의 자질

춤을 추고 있는 기녀

기녀의 활동기간은 15~50세인데 어린 기녀를 동기(童妓), 나이 든 기녀를 노기(老妓), 노기보다 나이가 많아 퇴역한 기녀를 퇴기라고 불렀다. 기녀 중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활약하는 것은 한양에 거주하는 경기(京妓)였다. 이들은 어린 나이에 기녀 교육을 시작하기도 하지만 보통 15세가 되어 기적에 오른 뒤 장악원에 소속되어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교육과목은 글씨, 그림, 춤, 노래, 악기연주, 시, 책읽기, 대화법, 식사예절 등 타인을 대하거나 즐겁게 할 때 필요한 것이었다. 특히 이들이 상대하는 부류가 왕족과 고관이나 한학적 교양이 높은 유생이었으므로 예의범절은 물론 문장에도 능해야 했다. 기녀 한 명마다 담당선생이 지정되었으며 악기 하나는 전문적으로 배우게 하였다.
교육내용에 대해서는 수시로 점검하였으며 실력이 향상되지 못하면 벌을 서거나 심한 경우 내?기도 하였다. 따라서 한양에서 교육받은 기녀가 뛰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재주는 중앙에서 가르치면 충분했으나 인물에 있어서는 지방출신도 필요하였다. 따라서 지방관청에 소속된 지방기(地方妓) 중에서도 미모와 재주가 출중하면 한양의 관청으로 발탁되었다. 조선시대의 미인은 옥같이 흰살결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정갈한 얼굴로 대표되었는데, 이러한 미인은 각 지방에서도 선발해야만 수요를 채울 수 있었다. 교육을 마친 후에 이들은 용모와 재주에 따라 1패(牌), 2패, 3패의 3등급으로 나뉘었다. 1패는 왕과 고관이 도열한 어전(御前)에 나가 춤과 노래를 부르는 최상급 기녀이며, 2패는 각 관아와 고관집에 출입하는 기녀이고, 3패는 일반인과 상대하는 제일 하급 기녀이다.


특수한 기녀인 의녀



기녀 중에는 양방(兩房)기생이라고 하는 내의원 혜민서 소속 의녀인 약방(藥房)기생과 상의원(尙衣院)의 침선비(針饍婢)인 상방(尙房)기생이 있다. 의녀제도는 내외법이 엄격한 조선사회에서 여자들의 진료를 남자 의원에게 맡길 수 없어서 마련되었다. 의녀제도는 태종 6년(1406)에 처음 생겼다. 당시 부인들이 병에 걸렸는데도 남자 의원에게 몸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치료를 회피하게 되어 죽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관청에 소속된 어린 여자노비를 선발하여 의녀로 삼았다. 이것은 여성들의 인명을 소중히 여긴 것도 있지만 남성과의 접촉을 막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세종대에는 지방에도 의녀를 두었는데 지방관청의 어린 여자노비를 제생원에 데려다 의술을 가르친 후 본래 고을로 돌려보내어 그 지역의 부녀환자를 돌보게 하였다.

의녀들은 의학서적과 약방문을 읽기 위해 한문교육을 받은 후 침술과 출산 등을 배웠다. 이외에도 유교적 소양을 갖추기 위해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을 배워야했다. 그리고 이들은 의술을 배우더라도 주로 남자의원의 보조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의녀들이 부녀환자를 진료할 때는 방밖에 남자 의원이 동석하여 의녀가 말하는 환자의 증세를 듣고 치료방법을 처방해주었다. 약의 조제도 의원이 처방한 것을 만들어 주는 일을 하였다. 그렇지만 남자 의원이 여자환자를 볼수 없는 상태에서 의녀만이 환자의 환부를 만질 수 있었다. 따라서 부녀자들의 부스럼과 출산, 간호 등은 의녀가 아니면 할 수 없었다.

상의원에 소속된 침선비는 왕과 왕비의 의복을 짓는 일을 하는 기녀였다. 의녀와 침선비가 기녀로 분류되는 이유는 왕실과 관료들의 접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약방기생, 상방기생 또는 선상기라고도 불렸다. 특히 내의원의 의녀들은 약방기생이라 하여 예복으로 녹의홍삼을 입고 침통을 찰 수 있는 대우를 받았다. 또한 궁중이나 고관집 연회에서 첩이 되어 사대부계층에 들어갈 수도 있었으므로 신분상승을 위한 계기가 되었다.

의녀가 기녀와 같은 일을 하게 된 것은 연산조부터였다. 연산군은 궁중에서 비빈, 내인들의 진료에만 종사하던 의녀들에게 가무와 악기연주를 가르쳐 일반 관기와 함께 연회에 참석시켰다. 그리고 의녀들은 한문교양을 수학하였으므로 글도 쓰고 시를 지을 수 있어 일반 관기보다 품격이 높았다. 연산조에는 궁중연회를 많이 열어 의녀가 본직인 의술보다 기녀로서의 역할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종반정 이후 의녀의 연회 참석을 금지 시키고자 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서 결국 의녀들은 한말까지 의료와 가무를 병행하는 애매한 직업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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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자들의 직업은 어떤것들이 있었나요?
nhgj77786 | 08.01.21 11:40
답변 1
조회 581

네티즌공감
요즘 여자들의 직업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요~ 제가 어릴때만해도 그렇게 직업이 많지 않았는데..
조선시대에 여자들은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었나요?
태그조선 조선여자직업 여자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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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q2q34 님의 답변
08.01.21 13:34
답변공감
안녕하세요 ^^
옛날 여자들은 궁녀, 의녀, 기녀, 무녀, 다모 등의 직업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여성은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권리를 가진 삶의 주체로서 인정되기 보다는 억압하고 통제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이상적인 유교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삼았는데, 같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은 중국의 국가들에 비하여 여성들의 지위 및 생활에 대하여 특히 엄격한 제한을 가하는 윤리관을 확립하였다.

이와 같은 까닭은 고려 때까지 이어온 자유로운 성개방 풍조와 여성위주의 성가치관으로부터 성적인 측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당시의 집권세력의 남자들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로 인하여, 한마디로 『여성은 집 바깥에서 할 일이 없다. 때문에 내 굴려선 안된다.』라는 인식이 전반적으로 사회에 자리 잡혔으며,여성들은 지배 계층에 의해 집안에 가둬져야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여인들은 개체로서 인정되지 못하고 가문이나 어떤 계층에 종속된 반절의 인간으로 인정되었다. 그녀들은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고 성으로만 불리워 졌으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사임당이나, 혜경궁 홍씨등이 그렇다.
그렇다고 조선 시대의 여성들이 집 안에서만 있은 것은 아니었다.
극히 제한적이긴 하지만 당시 남녀의 분별을 엄격히 하자던 사회적인 규범 속에서도 여성이 집 바깥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에도 가사가 아닌 분야로서 여성의 직업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1. 궁녀
그 대표적인 것으로 먼저 궁녀를 들 수 있다.
궁녀는 신분에 있어서도 종9품에서 높게는 정5품까지의 품계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에 당시의 일반 여성에게는 선망하던 직업의 하나였다.
당연히 이 직업은 연줄이 없으면 쉽게 얻을 수가 없었다.

최소한 상궁 정도의 추천을 받을 수 있어야만 했고. 더욱이 궁녀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신분 제한이 있었다.
궁녀는 주로 중인 계급으로, 양반도 평민도 아닌 낮은 벼슬아치들의 여식이 대부분이었다.궁녀는 이처럼 아무나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궁녀가 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것을 일찍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무엇보다도 철부지 어린 나이에 궁으로 들어가야만 했는데, 대개는 4세에서 10세 사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어린 딸아이가 가마를 타고 궁궐로 들어가는 일이 집안의 영광으로 내비치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아이의 일생을 생각하면 아픈 마음에 부모들이 않아 눕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어린 나이에 입궐을 하게 되면 처음 불리는 명칭은 '애기 항아님'이었고, 보수는 한 달에 백미 4말이었으며, 1년에 명주와 무명 각 한 필씩에다 솜 한 근, 그리고 여름철에는 베,모시 등을 내렸다.

대신에, 한번 입궁하게 되면 결코 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몸이었으며, 궁중 법도를 하나도 빠짐없이 배우는 엄격한 수업을 거쳐. 궁중의 몸가짐과 궁중 언어를 배울 뿐만 아니라, 언문(지금의 한글)과 계녀서를 읽어야 하고, 천자문에서부터 소학,대학은 물론 서예에서부터 바느질과 수놓는 방법까지 두루 익히지 않으면 안되었다. 머리가 멍청한 여자 애는 궁녀노릇도 어려웠던 것이다.

입궁한 지 15년이 지나게 되면 일종의 성년이 되는 의식을 치르게 되며, 이것이 비로소 정5품의 궁중 상궁이 되는 관례(冠禮)라는 것이다.
이 날은 특별히 명주 한 필과 모시 한 필, 그리고 무명,베 각 한 필씩을 내린다.
또한 본가에서는 버선,바지,속치마 등과 음식을 장만하여 신랑없는 혼례같은 의식을 주는 것으로써 부모로서의 마지막 도리를 다하게 된다. 그리고, 궁녀가 된 여인의 삶은 대궐처마의 바람소리에 묻혀가는 것이다.

2. 의녀(醫女)
다음으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의녀였다.
남녀 접촉을 금지한 사회에서의 아이러니한 여성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유교적 사상에 의해 남성 의원이 여성의 몸을 만지고 치료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나머지 치료를 받지 아니하여 죽게 되는 사례까지 발생하자, 태종 6년부터 제생원에서 어린 여자 아이 십여 명을 선발하여 맥경,침구등을 가르친 것이 그 효시가 된다.

그러나 의녀는 앞에서 살펴본 궁녀와는 달리 신분 제한을 따로 두지 않았던 듯하다.
남녀의 자유로운 접촉을 금지해 온 당시의 사회 구조 속에서 의녀와 같이 외간 남자들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직업이 중인 계급의 여성에게 허용된 까닭은 당시의 상류 계급이 여성에게 갖고 있는 편협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그 들의 여자만을 규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 5년에는 지방에도 의녀를 두기로 하고, 충청,전라,경상도에서 12~13세 정도의 똑똑한 여관비 두 명씩을 선발해서 제생원의 의녀들과 함께 가르쳤다.
이때의 교육은 내의,간병,초학의등 3등급으로 나뉘었으며, 일정한 수준의 학업 성적에 미달되거나 하면 본래의 신분인 노비따위로 다시금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일단 교육을 이수하게 되면 의녀로서 지방의 관서에 배치될 수 있었다.
또한, 의녀의 자식들은 평민의 신분을 가질 수 있도록 제도적인 배려도 보장이 되었다.

3. 기녀
기녀는 흔히 기생으로 더 알려져 있는 여성의 직업이다.
본래는 궁중 또는 지방 관서의 연회나 유흥 행사 등에서 가무와 풍류로서 흥을 돋구는 일을 업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조선 시대에 들어와 신분적 계급 제도가 확립되어 관기(官妓)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지면서 그 수효가 급증했다.

관기는 노년에 접어 들면 마침내 퇴기가 되어 관기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간 이들이 기녀방을 두고 사기(私妓)를 양성해 벼슬아치들의 노리개로써 공급하게 되었다.
기녀방이 애기(愛妓)공급원으로 자리잡으면서 조선 시대에는 나이 어린 기녀가 많게 되었다. 물론 사회적인 저항이 뒤따랐다.
무엇보다 도덕을 중요시하는 풍토였으므로 기녀 폐지에 대한 논의는 개국초기부터 활발히 개진되었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만약 관기를 없앤다면 관리들이 일반 가정의 아녀자를 범하게 될 터이고, 그렇게 된다면 결국 훌륭한 인재들이 처벌을 받게 되어 국가적인 손실이 크다는 식의 벼슬아치들의 주장에 밀려 허울로 내세우는 도덕적인 저항은 번번이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신관 사또가 임지에 부임하게 되면 기녀들은 나귀를 타고 풍악을 울리면서 영접길에 올랐다는데, 감영의 사령들말고도 그 숫자가 무려 50여 명을 헤야리는 풍경을 한말에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열 두어 살 된 여자아이를 성의 노리개로 하는 세태가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부르게 했던 시대에 틀 잡히고, 정책적으로 장려되었으니 정말 못 말릴 백성이다.

4. 무녀(巫女)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으로는 무녀가 있었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무녀는 각종 제의는 물론 의무까지 맡아 질병의 원인이 되는 신의 저주를 푸는 역할을 민가에서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까지 행하였다.
심지어는 좌 정승의 누이 동생을 비롯해 상류층 여성들이 무녀로 진출했는가 하면, 이들 상류층 출신 무녀는 선관이라 해서 특별히 사회적인 지위도 높았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유교적 질서의 확립을 위해 불교를 포함, 무속 신앙에 대해서도 배척 운동이 심했다. 세종 때에는 사헌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성 안의 무녀들을 급기야 성 밖으로 축출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 말기까지 사실상 우리 민족의 의식 구조를 지배했던 신앙은 다름 아닌 무속이었을 만큼 무속신앙은 배척에도 불구하고 그 뿌리가 깊었다.

세종, 성종과 같이 유교주의 이념이 투철했던 왕들도 가뭄이 들 때면 무녀를 동원해 기우제를 거행했으며, 태종의 경우에는 기우제를 거행하고 비가 내리자 동원된 무녀 74명 모두에게 각각 쌀 1섬씩을 내리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5. 다모(茶母)
MBC드라마로 인해서, 새로이 알게된 조선시대 여형사 직업이었는데, 수사권이라는 직업적 책임을 부여해서, 조선시대 여인네들에게 선망의 직업 중 하나였다고 한다.
다모로 인해서 역모를 미연에 방지한적도 있다고 한다.
출처 : 검색















http://female.culturecontent.com/SubMain_A_sub.asp?GUBUN_CODE=&LCLS_CODE=A27&MCLS_CODE=C




영조정순왕후반차도 中 의녀
《임하필기》속에서 보이는 궁중여성의 산속(産俗)
조선후기 문신인 이유원의 문집으로 유명한 《임하필기》에, 그 속에 보이는 궁중여성의 산속(産俗)에 관한 자료를 발췌한 것이다.

원문

선발/산속 개요
왕비의 육아
후궁의 출산
대군공주탄생의제
춘추일기
육전조례
용재총화



산실(産室)의 설치
삼대(三代)가 산실의 일을 행한 일
풀을 매다는 문(懸草之門)
해마(海馬)와 석연(石燕)
방울을 다는 것에 대한 분변(懸鈴之辨)
여수공(女水工)



산실(産室)의 설치

산실을 설치할 때는 정시(正時) 전 일각(一刻)에 약원의 세 제조가 대령의관(待令醫官), 별장무관(別掌務官), 범철관(泛鐵官) 등을 거느리고 교태전(交泰殿)으로 나아가고 본원(本阮)의 아전 또한 따른다. 여러 집사들은 방에 나아가서 24방위도(方位圖)를 각 해당 방위에 붙이고 또 당월도(當月圖)와 차지부(借地符)를 붙이는데 모두 주홍색으로 쓴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 길방(吉方)에 먼저 볏짚을 깐다. 그 다음에는 고석(藁席), 다음에는 백교석(白絞席), 다음에는 양모전(羊毛氈), 다음에는 유둔(油芚), 다음에는 흰 말가죽, 다음에는 세고석(細藁席)을 깐다. 또 다람쥐 가죽과 삼실을 말가죽 밑에 둔다. 조금 가까이 위에 태의(胎衣)가 놓일 방위에는 또한 붉은 글씨의 부적을 붙인다. 그리고 외관이 차지법 부적을 세 번 읽는다. 말고삐를 방의 벽에 거니, 해산할 때 잡는 것이다. 구리 방울은 청 난간에 거니 일이 생기면 흔들어 의관을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를 홀기(笏記)에 모두 기재한다. 상이 헌창(軒窓)에 임하여 보고, 여러 사람들은 제각기 거행하고 물러난다. 그날은 당저 8년 신미(1871) 10월 7일 갑자였다. 도제조는 나였고, 제조는 조성교(趙性敎)였으며, 부제조는 김원식(金元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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