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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uly 2, 2014

Yankonju,comfort women for Korean and U.S.army

한국군 위안부 洋公主 (ko:양공주、ヤンコンジュ、ヤンカルボ)
comfort women for Korean army


163146 洋公主(米軍&韓国軍従軍慰安婦)のつづき pinknohat 2013/09/22 713 2



敵軍兵を捕らえて娼婦に仕立てるのだ。ジュネーブ条約を持ち出して議論している場合ではない。南鮮で流布される捏造慰安婦の“悲劇”よりも醜悪。完全にアウトだ。


洋公主の物語は、慰安婦捏造ストーリーの元ネタであることは確実だが、歴史の表舞台に突然登場した時期も極めて近い。80年代、南鮮で反米・反軍政ムードが高まる中、基地村の問題が浮上した。






▼基地村闊歩する米兵と洋公主95年(東亜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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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北左派の連中が、反米闘争の新テーマとして提起したのである。その過程で90年代初頭、挺身隊を意図的に歪曲した“従軍慰安婦”がクローズアップされる。

その流れか、我が国の左派系組織やフェミ系団体が基地村問題を指摘するケースも目立つ。韓国軍慰安婦の公的資料を発掘したのも、南鮮のフェミニスト女性学者だった。

【語り始めた基地村の洋公主】

「固定式慰安所-特殊慰安隊」

そうした記述が、1956年に韓国陸軍本部が編纂した公文書『後方戦史(人事編)』に残っていた。実績統計として、4ヵ所89人の慰安婦が1年間で20万回以上の“慰安”を行なったと記されている。

参照:朝日新聞アーカイブ『朝鮮戦争時の韓国軍にも慰安婦制度 韓国の研究者発表』

河野洋平の顔面に叩き付けたくなるような資料だが、加瀬英明氏によると約10年前、研究発表に慌てた南鮮政府は、国防部資料室の韓国軍慰安婦資料を閲覧禁止にしたという。
▼置屋前に並ぶ洋公主(LIFE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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確かに青瓦台にとって致命的な歴史資料。特に陸軍将校だった朴正煕の娘は言い逃れできない。しかし資料を隠蔽しても「洋公主」の存在は、NJ州のマラソン主催者が受け答えたように一般に知られている…

南鮮国内に米兵向け慰安婦がウヨウヨいたことを知りながら我が国を罵倒する精神構造は異常だ。日本時代の慰安婦が「20世紀最大の人権侵害」で、洋公主については「ノーコメント」など許されない。 


▼物色中の米兵と洋公主(LIFE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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捏造慰安婦が第三国の地方都市でスパークする一方、洋公主は歴史の陰でひっそりした印象だ。

実在の洋公主は、海外巡業に励むこともなく、実名で告発を始めたのも最近である。


▼昨年7月邦訳版出版『基地村の女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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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称慰安婦が適当なウソを並べるのと違い、まだ証言も少なく資料は封印…学術的な研究も滞りがちだ。



しかし、証拠写真どころか活動中の映像まで残っている。反日陣営を攻撃する恰好の歴史事実だ。

しかも洋公主の相手は朝鮮戦争・ベトナム戦争世代に遡る米兵だ。グレンデールなどでやりたい放題の在米朝鮮 人 に鉄槌を下し、米国務省を怯ませることも出来る。
▼米兵と戯れる洋公主(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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慰安婦捏造派の妄言に反論することも重要だが、洋公主や韓国軍慰安婦をキーワードに真正面から反撃する姿勢も欠かせない。

知られざる洋公主の実像は、捏造慰安婦の壮大なウソを暴く可能性を秘め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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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병을 잡고 창녀로 키운다.제네바 조약을 꺼내 논의하고 있을 때는 아니다.남선으로 유포되는 날조 위안부의“비극”보다 추악.완전하게 아웃이다.


양공주의 이야기는, 위안부 날조 스토리의 원재료인 것은 확실이지만, 역사의 정식 무대에 돌연 등장했던 시기도 지극히 가깝다.80년대, 남선으로 반미·반군정무드가 높아지는 중, 기지마을의 문제가 부상했다.


▼기지마을 활보 하는 미국 병사와 양공주 95년(동아일보)

화상

친북 좌파의 무리가, 반미 투쟁의 신테마로서 제기했던 것이다.그 과정에서 90년대 초두, 정신대를 의도적으로 왜곡한“종군위안부”가 클로즈 업 된다.

그 흐름인가, 우리 나라의 좌파계 조직이나 페미계 단체가 기지마을 문제를 지적하는 케이스도 눈에 띈다.한국군 위안부의 공적 자료를 발굴했던 것도, 남선의 feminist 여성학자였다.

【말하기 시작한 기지마을의 양공주】

「고정식 위안소-특수 위안대」

그러한 기술이,1956년에 한국 육군 본부가 편찬 한 공문서 「후방 전사(인사편)」에 남아 있었다.실적 통계로서4개소 89명의 위안부가 1년간에 20만회 이상의“위안”을 행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참조:아사히 신문 어카이브(archive) 「한국 전쟁시의 한국군에게도 위안부 제도 한국의 연구자 발표」

코노 요헤이의 안면에 내던지고 싶어지는 자료이지만, 카세 히데아키씨에 의하면 약 10년전, 연구 발표에 당황한 남선정부는, 국방부 자료실의 한국군 위안부 자료를 열람 금지로 했다고 한다.
▼치 가게앞에 줄선 양공주(LIFE잡지)

화상

확실히 청와대에 있어서 치명적인 역사 자료.특히육군 장교였던 박정희의 딸(아가씨)는 발뺌해 할 수 없다.그러나자료를 은폐 해도 「양공주」의 존재는, NJ주의 마라톤 주최자가 대답같게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남선국내에 미국 병사를 위한 위안부가 우요우요 있던 것을 알면서 우리 나라를 매도하는 정신 구조는 비정상이다.일본 시대의 위안부가 「20 세기 최대의 인권침해」로, 양공주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등 용서되지 않는다. 


▼물색중의 미국 병사와 양공주(LIFE잡지)

화상

날조 위안부가 제3국의 지방도시로 스파크 하는 한편, 양공주는 역사의 그늘에서 고요히 한 인상이다.

실재의 양공주는, 해외 순회공연에 힘쓸 것도 없고, 실명으로 고발을 시작했던 것도 최근이다.


▼작년 7월 국역판 출판 「기지마을의 여자들」

화상

자칭 위안부가 적당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과 달라, 아직 증언도 적게 자료는 봉인…학술적인 연구도 막히기 쉽상이다.



그러나, 증거 사진은 커녕 활동중의 영상까지 남아 있다.반일 진영을 공격하는 모양의 역사 사실이다.

게다가양공주의 상대는 한국 전쟁·베트남 전쟁 세대에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 병사다.그렌데이르등에서 제멋대로의 재미 조선인에 철퇴를 내려, 미국무성을 기가 죽게 할 수도 있다.
▼미국 병사와 노는 양공주(BBC)

화상

위안부 날조파의 망언에 반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양공주나 한국군 위안부를 키워드에 바로 정면으로부터 반격 하는 자세도 빠뜨릴 수 없다.

알려지지 않은 양공주의 실상은, 날조 위안부의 장대한 거짓말을 폭로할 가능성을 은밀한이라고 있다.


http://blog.ohmynews.com/q9447/285242




















[서평]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윤미향의 <20>



▲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시위, '수요시위'. 그것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켜온 20년간의 용기다.

때로 사람들을 성찰하게 한다는 뜻에서 역사는 귀한 스승이다. 그러나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실체로서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대신에 우리는 그 역사를 관통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역사를 추체험할 수 있다. 역사의 질곡을 맨몸으로 겪어낸 사람들, 이들이 겪은 삶은 '일상'을 넘어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윤미향 상임대표가 쓴 <20>(웅진주니어, 2010)에서는 그런 '역사적 삶'을 고통스럽게 살아온 할머니들을 만날 수 있다. '정신대 할머니'로 흔히 불려 온 이들이 겪어야 했던 한국 현대사. 이 책에서 우리는 역사가 무명의 갑남을녀들에게 어떤 상처를 입히는가를 아프게 확인할 수 있다.


▲ 윤미향, 웅진주니어, 2010
<20>은 지난해 나온 책이다. 지난 9월 18일 방영된 MBC <시사매거진 2580> '20년이 흘렀지만…'을 시청하고 정대협 홈페이지에 접속했다가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주저 없이 책을 주문했다. 학교 사서교사에게 이 책을 여러 권 구입해 달라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병상에 누워 있어도,
일본대사관 앞
수요일 12시

그것은 희망이었습니다.

20년간 지켜온 할머니들의 용기와 희망

위 인용구는 책의 속표지를 넘기면 만나게 되는 구절이다. 이 책은 1992년 첫 시위 이래 20년 동안 계속돼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시위'라고 불리고 있는 정대협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시위를 담고 있다. 이 책에 새겨져 있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켜온 아름답고 경이로운 '용기'와 '희망'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면에는 최갑순 할머니를 비롯한 모두 여덟 분의 할머니들의 초상이 실려 있다. 흑백 사진 속의 할머니들, 무심한 표정을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 온다. 굵게 패인 주름, 앙다문 입술, 하얗게 센 성긴 머리카락…. 그것은 이 땅의 20세기를 할퀴고 간 가혹한 역사,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흔적이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this picture was taken in 1960' during in korean war,
the left soldier wears UN military jacket and those women put north korean jacket.
この写真は朝鮮戦争時に撮影されました、
左の兵士は国連軍軍服、女性達は北朝鮮の人民服を着てるからです。

▲ 군대 따라 이동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들. 이들은 병사들을 따라 다니며 성 노예로 살아야 했다.


1992년 1월 8일 첫 시위 이래 어느덧 1천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시위는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일제의 전쟁범죄에 대한 '피해자'들의 문제제기다. 그러나 반인륜적 범죄인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실 규명,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이 시위가 20년째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가 미해결 상태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20년 동안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진행돼 온 이 시위의 주축은 물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2차 대전 종전 후 무려 반세기 가까이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이 끔찍한 진실을 세상 속으로 드러낸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끔찍한 역사의 희생자를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가진 만만찮은 성격을 드러내준다. 정신대(挺身隊)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뜻으로, '일제의 인력동원 정책'을 의미하는 낱말이므로 합당한 명칭이 될 수 없다.

또 위안부라는 말도 함부로 쓸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전쟁 중 일본군의 '성 노예' 제도를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결국 '강제 종군 위안부', '일본군 성 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등을 거쳐 합의된 이름이 일본군 '위안부'다. '위안부'는 여전히 부당한 이름이지만 일제에 의해 불렸던 이름이므로 작은따옴표('')로 묶어서 사용하되 범죄 주체인 일본군을 붙여서 일본군 '위안부'라고 쓰게 된 것이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덕경 할머니가 그린 그림 '라바울 위안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희생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뒤늦게 이 비극을 전해 들으면서 사람들은 '고통스런 희생'이라는 글귀로 써내려가지만 할머니들이 살아온 세월과 그로 말미암은 상처를 어찌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공개 증언의 용기가 세상을 바꾸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최초로 공개 증언에 나섰던 김학순 할머니. 할머니는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불안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했고 여느 여성들처럼 쉽게 혼인하지도 못했다.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안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당하기도 했고 몸이 망가져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피해자였지만 그들이 겪은 희생의 성격 때문에 오히려 비난 받았으며 스스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랜 침묵 끝에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한 할머니들의 수요시위는 20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 동안 234명의 할머니가 피해자 신고를 했고 그 중 많은 분들이 일본의 사죄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이제 생존자는 80여 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20년간 계속된 할머니들의 당당한 외침은 사회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 '빼앗긴 순정'
일본 정부는 국제 여론에 떠밀려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조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일부 책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또 '강제성은 없었다'며 자신들의 법적 책임을 부인하다 부분적으로 강제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배상금' 아닌 '위로금'에 지나지 않는 '국민기금'을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형식의 기만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랜 침묵 속에 살다가 뒤늦게 인권에 눈뜬 할머니들의 눈부신 활약은 국제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2007년 미국 하원과 유럽의회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된 것이다.

정대협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지치지 않는 끈질긴 싸움은 현실을 바꾸는데 그치지 않고 오랜 고통과 침묵 속에 살아온 할머니 자신들도 변화시켰다. 할머니들은 일본의 더러운 전쟁 범죄를 고발하고 증언하면서 전쟁이 인권 유린의 근원임을 깨달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역사와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 것이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 반대는 전근대적 역사의식

할머니들은 더 이상 자신과 같은 희생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전쟁을 멈춰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또한 더 이상 여성들이 수난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평화의 나라'를 위해 그런 역사를 기록해 놓은 박물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2004년, 정대협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 미래 세대에게 평화로운 세상을 물려주기 위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박물관) 건립 사업을 시작했다.

박물관 건립 사업은 8년 간 모금활동을 펼쳐 17억원을 모으고, 서울시로부터 서대문 독립공원 매점 부지에 100여 평의 땅을 확보하면서 순조롭게 진척되는가 했다. 하지만 박물관 건립은 '독립공원 내 위안부 박물관 건립은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광복회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위해 정대협이 매입한 성미산 기슭의 단독주택


이런 일련의 과정이 MBC <시사매거진 2580> '20년이 흘렀지만…' 편으로 방영되면서 누리꾼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그러나 서대문 독립공원 안 박물관은 무산되고 정대협은 모인 돈으로 성미산 기슭의 한 단독주택을 매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박물관 건립사업이 좌초된 것은 아직도 잔존해 있는 전근대적 가치관을 뛰어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한계를 드러낸 일이었다.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이 감당해야 했던 희생과 고통을 자신들의 빛나는 무용담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역사의식이 여전히 전근대적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뜻에서 주류 남성들이 만들어온 역사는 비겁하다 못해 치졸하기까지 한 셈이기도 하다.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역사도 아우르다

지은이 윤미향 상임대표는 아주 쉽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듯 조곤조곤 한국 현대사를 청소년들 앞에 펴 보인다. 청소년용으로 펴낸 책이지만 굳이 어른들이 읽지 못할 수준은 결코 아니다. 책에 다양하게 실린 관련 사진과 자료, 할머니들이 손수 그린 그림, 수요시위에 동참한 학생들의 편지글 등도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우리나라를 피해자로서뿐 아니라 현대사를 거치면서 스스로 가해자가 된 역사까지 아우르는 점이다. 지은이는 '전쟁과 여성,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악연', 즉 전시에 자행되는 전쟁 성폭력의 진실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임을 환기하는 것이다.

이른바 제 2의 일본군 '위안부'는 우리 현대사 속에서도 재현되었다. 해방 후 미군 주둔기지 주변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성매매나 산업화 시기 국가에 의해 암묵적으로 용인된 '기생 관광'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강간은 우리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뒤바뀐 역사적 비극이었던 것이다.

지은이는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미래'를 이야기한다. 남성 중심주의적 가부장적인 생각이 전쟁 중 성폭력을 일으키고 여성을 억압한다. 또 극단적 식민주의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며 여성을 '식민지'화한다고 그는 말한다. 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끔찍한 희생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역사적 진실과 함께 '인권'이야말로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가치라는 것이다.

지난 8월,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위안부'와 원폭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을 두고 한일 양국 사이에 분쟁이 있음에도 정부가 아무런 해결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청구권에 대해 협의하자고 한 우리 정부의 제안을 거부했다.


▲ 김복선, 황금주 할머니의 젊은 시절. 역사가 이 아름다운 처녀들을 일본군인들의 성 노예로 몰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는 달리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건강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부끄러운 역사를 넘어 자국의 이익과 명예보다 인권을 선택한 것이다. 가해자로서 우리의 숙제인 베트남 문제는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베트남에 학교를 세우거나 평화 활동을 펼치는 것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을 다룬 다큐 <낮은 목소리>에 출연했던 이용수 할머니가 베트남을 방문해 피해 여성을 만나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이야기는 묘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할머니는 처음에 베트남의 피해 여성을 만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할머니는 국적을 넘어 자신과 같은 피해자인 베트남 여성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지은이는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알기'를 권하면서 책을 끝맺는다. 그러나 안다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참여하고 관심을 갖는 순간부터 역사는 변화해 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추상적 관념으로 우리 현대사를 이해해 온 청소년들은 그녀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추상과 관념을 하나씩 걷어내고 '역사'의 생생한 실체를 만날 수 있을 터이다.


덧붙이는 글 | <20>(윤미향 씀 | 웅진주니어 | 2010.11. | 1만2000원)


책 표지의 날개에는 “이 책의 인세 전부는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 기금으로 기부됩니다.”라고 쓰여 있다. 앞서 말한 성미산의 단독주택을 마련했지만 박물관을 꾸미려면 6억 원을 성금으로 더 모아야 한다고 한다.

정대협 누리집(http://www.womenandwar.net/index.php)에 가면 10만 원으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1만인 건립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 그게 부담스러우면 이 책(12,000원)을 사서 아이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이 사업을 돕는 방법이 되겠다.

내가 구입한 책은 초판 3쇄다. 아직 만 부도 팔리지 않았다는 뜻이겠다. 부끄럽게도 우리보다 먼저 일본 도서관협회가 이 책을 선정도서로 뽑았으니 책의 가치는 입증된 셈이다. 아이들의 ‘몰역사’를 탓하지 말고 스스로 역사와 만나는 방법을 찾게 하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터이다.

2011.10.16 13:38 ⓒ 2011 OhmyNews


* 이 기사를 읽고 전교조 경북지부 참교육실천대회 국어분과에서 초청강연회 소식을 전해 왔다.



전교조 경북지부 참실대회 국어분과 초청 강연회

* 주제 :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현황과 대책
* 강사 : 윤미향(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20> 의 저자)
* 날짜 : 2011. 11. 26(토) 14:30-17:30
* 장소 : 구미교육연수원

오는 12월 14일(수)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한맺힌 수요집회를 시작한 지 1000번째 되는 날입니다. 정대협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 과정과 앞으로 계획에 대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되겠다는 소명감으로 우리 모임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해 주었습니다.
그 전에 <20>을 읽어 두시면 더욱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7635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
[창간 2주년 발굴특종 ①] 일본군 종군 경험의 유산
02.02.22 15:16l최종 업데이트 02.02.26 21:51l김당(da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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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기간[1951∼1954년] 3∼4개 중대 규모 운영…연간 최소 20여만 병력 '위안'

흔히 전쟁이 나면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고통을 한 가지 더 겪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다름아닌 '성적 유린'인데, 피아 군인을 가릴 것 없이 자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같은 여성들의 피해사례는 동서고금의 전쟁사 곳곳에 기록돼 있다.

흔히 '위안부'라면 일제하 구 일본군들이 조선(한국)여성들을 강제로 끌고가 중국, 남양군도 등에서 성적 노리개로 부린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도 병사들의 사기진작 차원에서 '위안부'를 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충격을 던지고 있다.

당시 서울, 강릉 등지의 군부대에서는 중대단위로 '위안부대'를 편성, 운용했는데 병사들은 '위안 대가'로 티킷이나 현금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오마이뉴스>는 우리 현대사에서 묻혀진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차원에서 전문학자의 연구결과와 김당 편집위원의 취재를 토대로 4회 정도의 관련기획물을 실을 예정이다.-<편집자 주>


▲ 위안소 앞에 줄지어 선 일본군 병사들. 예비역 장성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국군 장병들도 24인용 야전막사니 분대천막 앞에서 이처럼 줄을 서서 위안대를 이용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군 위안소를 두고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처음으로 공식 제기되었다. 6·25 전쟁 당시 국군이 위안소를 두고 장병들이 이용케 했다는 주장은 그 동안 몇몇 예비역 장군의 회고록과 참전자들의 증언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어 왔다.

그러나 군 당국이 편찬한 공식기록(전사) 등을 근거로 한국군이 위안대를 설치·운영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이를 계기로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진상 규명운동이 전개될 경우, 지난 90년대 일본군 종군위안부 문제가 처음 제기된 때와 유사한 파문도 예상된다.

김귀옥 박사(경남대 북한전문대학원 객원교수·사회학)는 2월23일 일본 교토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에서 열리는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심포지움'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한국전쟁과 여성ː군 위안부와 군 위안소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관련 인터뷰 기사 송고 예정).

김박사의 논문은 한국군(한국전쟁) 위안부 문제라는 사안의 특성상 일본 언론들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계 언론의 큰 관심을 끌 것으로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사기 앙양과 전투력 손실 방지를 위한 필요악"

현재까지 발굴된 한국전쟁 당시 군 위안부 제도의 실체를 보여주는 유일한 공식자료는 육군본부가 지난 1956년에 편찬한 <후방전사(인사편)>에 실린 군 위안대 관련 기록이다.

김박사는 <후방전사> 기록과 예비역 장성들의 회고록, 그리고 관계자 증언 등을 토대로 당시 국군은 직접 설치한 고정식 위안소와 이동식 위안소 그리고 사창(私娼)의 직업여성들을 이용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고 주장한다. 우선 <후방전사(인사편)>의 '제3장 1절 3항 특수위안활동 사항' 기록을 보면 군 위안대 설치 목적은 다음과 같다.

"표면화한 사리(事理)만을 가지고 간단히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이라고 단안(斷案)하면 별문제이겠지만 실질적으로 사기앙양은 물론 전쟁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교대 없는 전투로 인하여 후방 내왕(來往)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본(本) 특수위안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당시 군은 위안부들을 '특수위안대(特殊慰安隊)'라는 부대 형식으로 편제해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후방전사> 제3장의 '특수위안활동 사항'에는 흔히 '딴따라'라고 부르는 군예대(軍藝隊) 활동도 포함된다.

따라서 '특수위안대'는 군예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후방전사>는 군예대의 활동을 '위문 공연(慰問 公演)'이라고 표현하는 반면에 특수위안대의 활동은 '위안(慰安)'이라고 용어를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 '특수위안'은 여성의 성(性)적 서비스를 뜻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사(戰史)에서 위안대 운영이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임을 인정한 대목이다. 이는 일제시대에 설치된 공창(公娼)이 1948년 2월 미군정청의 공창폐지령 발효로 폐쇄되었음에도 국가를 수호하는 군이 자체적으로 사실상의 공창(군 위안대)을 운영하는 모순된 활동, 즉 범법행위를 자행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후방전사>는 군이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 제도를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전투력 손실 방지와 사기 앙양을 위해 불가피한 일종의 '필요악'으로 간주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군 위안대는 그 동원방식이나 운영기간 및 규모 면에서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설치 목적이나 운영 방식 면에서는 비슷함을 보여준다. 이는 또 당시 한국군 수뇌부의 상당수가 일본군 출신이었음을 감안할 때 시사하는 바 크다. 일본군에서 위안부 제도를 경험한 군 수뇌부가 한국전쟁 기간에 위안부 제도를 주도적으로 도입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방전사>에 따르면 위안대를 설치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다만 "동란(動亂)중 (위안대) 활동상황을 연도별로 보면 큰 차이가 없었으며 전쟁행위와 더불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고 돼 있어 전쟁 이후 설치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김귀옥 박사는 관련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설치 시기를 1951년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후방전사>는 "휴전에 따라 이러한 시설의 설치목적이 해소됨에 이르러 공창(公娼) 폐지의 조류에 순명(順命)하여 단기 4287(서기 1954)년 3월 이를 일제히 폐쇄하였다"고 그 폐쇄 시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서울 강릉 춘천 원주 속초 등 7개소 설치 운영

한편 <후방전사> 기록에 따르면 위안대가 설치된 장소는 △서울지구 3개 소대 △강릉지구 1개 소대 △기타 춘천 원주 속초 등지로 총 7개소에 이른다. 그러나 위안대 규모에 대해서는 <후방전사> 내에서도 앞뒤의 기록이 달라 정확한 그 규모를 산정하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후방전사>의 일부 기록(148쪽)에는 위안대 규모가 △서울지구 제1소대 19명 △강릉 제2소대 31명 △제8소대 8명 △강릉 제1소대 21명 등 총 79명으로 돼 있다.

그러나 같은 책의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150쪽)에는 위안부 수가 △서울 제1소대 19명 △서울 제2소대 27명 △서울 제3소대 13명 △강릉 제1소대 30명 등 총 89명으로 돼 있다.

따라서 전후 맥락으로 볼 때 전자의 기록은 오기(誤記)이고 후자의 '실적 통계표'가 정확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통계도 기타(춘천 원주 속초 등지) 지역 위안대는 포함하지 않고 있다. 아무튼 기록을 토대로 당시 위안소 소재지와 규모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한국군 위안대 설치 장소와 규모
군에 위안대를 설치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후방전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군이 위안대 설치 및 운영을 주도한 사실은 <후방전사>의 다음과 같은 대목이나 예비역 장성들의 회고록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선 부대의 요청에 의하여 출동위안(出動慰安)을 행하며 소재지에서도 출입하는 장병에 대하여 위안행위에 당하였다.(……) 한편 위안부는 1주에 2회 군무관(軍務官)의 협조로 군의관의 엄격한 검진을 받고 성병에 대하여는 철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후방전사>)

이는 당시 군이 군인들이 위안소를 찾아와 이용하는 고정식 위안소뿐 아니라 위안대가 위안을 위해 부대를 찾아가는 이동식 위안소도 운영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또 군의(軍醫)가 직접 위안부를 상대로 주 1회 성병검진을 실시한 점이나 장교를 상대하는 여성과 병사를 상대하는 여성이 따로 있었다는 점 등은 한국군 위안부 제도가 과거 일본군 종군위안부 운영방식을 그대로 답습했음을 의미한다.

주월(駐越)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예비역 육군 중장)은 자신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넘어>(1994년)에서 <후방전사>의 기록과는 달리 소대 규모가 아닌 중대 규모로 위안대를 운용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채명신 장군이 서울지구의 3개 소대 위안부 인력을 1개 중대 규모로 계산한 결과일 수 있다. 어쨌건 채장군에 따르면 당시 위안부 규모는 180∼240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예비부대로 빠지기만 하면 사단 요청에 의해 모든 부대는 위안부대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5연대도 예외는 아니었고, 예비대로 빠지기도 전부터 장병들의 화제는 모두 위안부대 건이었다."(이하 밑줄은 필자 강조)


▲ <후방전사>에 실려있는 단기 4285년(서기 1952년)의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 89명의 위안부가 연간 20여만명의 군인을 '위안'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기간에 군이 설치한 이 '특수위안대'의 '위안' 활동 실적은 얼마나 될까. 그것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자료는 바로 <후방전사>(150쪽)에 실린 '특수위안부 실적통계표'이다. 단기 4285년도이니 곧 1952년도 1년간의 '위안' 실적이다. 다른 해의 실적도 이와 비슷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이 통계표에 따르면, 1952년 당시 '특수위안대'에 편성된 위안부는 89명이고, 이들로부터 '위안'을 받은 군인은 연간 20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다만 이 실적이 실적통계표에 적시한 4곳(서울 제1, 2, 3소대·강릉 제1소대)에 출입한 군인들의 통계인지, 위안대가 현지부대로 '출동위안'한 군인들의 통계까지 포함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 <표 2> 김귀옥 박사가 수정한 1952년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


'위안대'는 예비대 병력의 '제5종 보급품'

전선에서 전투를 마치고 후방으로 교대된 예비부대 병력이 위안부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다른 장군들의 회고록에서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차규헌 장군(예비역 육군 대장) 또한 자신의 회고록 <전투>(1985년)에서 예비대 시절에 겪은 이동식 군 위안소 제도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1952년) 3월 중순의 기후는 봄을 시샘할 듯 쌀쌀했다.(……) 잔적을 완전히 소탕한 후 예비대가 되어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있을 때 사단 휼병부(恤兵部)로부터 장병을 위문하러 여자위안대가 부대 숙영지 부근에 도착하였다는 통보가 있었다. 중대 인사계 보고에 의하면 이들은 24인용 야전천막에 합판과 우의로 칸막이를 한 야전침실에 수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중대병사들은 열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했다고 하였다."


▲ 김희오 장군(예비역 소장)의 회고록 <인간의 향기>. 34년간의 군 생활에서 한국전쟁 당시 처음 본 공개적 군 위안소 운영 사례에 대해 '영원히 찜찜한 기억'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김희오 장군(예비역 육군 소장) 또한 '이동식'이긴 하지만 이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위안부 제도를 기억하고 있다.

김장군은 군에서 직접 위안소를 설치 운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연대 간부들이 당시 사창가였던 '종3'(종로3가)에서 거금을 주고 위안부로 데려온 것으로 기억한다. 김장군은 자신의 자서전 <인간의 향기>(2000년)에서 그 대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중부전선) 수도고지 전투도 잊혀지고 도망병 발생도 진정되어 갔다. 이제 FTX(야전훈련)에 본격 돌입하기 위해 소화기 및 장비 점검, 보급품 정비 등이 한창 진행되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연대1과에서 중대별 제5종 보급품(군 보급품은 1∼4종밖에 없었음) 수령지시가 있어 가 보았더니 우리 중대에도 주간 8시간 제한으로 6명의 위안부가 배정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백주에 많은 사람이 오가는 가운데 줄을 서서 분대천막을 이용하는 것이라던가 또 도덕적으로나 양심상 어정쩡하기도 해서 썩 내키지가 않았다. 먼저 소대에 2명이 할당되고 그중 1명이 먼저 소대장 천막으로 배정되어 왔다. 나는 출신환경 등 몇 마디 대화만 나누고 별로 도와줄 방법이 없어 그 동안 모아 놓았던 건빵 한 보따리를 싸서 선임하사관에게 인계하였다."


▲ 김희오 장군

두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군 부대에 소위 '제5종 보급품'이라는 이름으로 위안부들이 배정되어 왔고 24인용 야전천막이 위안소로 가설(차규헌 장군)되거나 분대 막사를 위안소로 대용(김희오 장군)하였다.

위안대가 '제5종 보급품' 취급을 받은 것은 일본군 종군위안부가 '천황의 하사품'이나 '군수품'으로 취급받은 점과 일맥상통한다. 또 병사들이 줄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한 것이나 소대장 천막으로 먼저 배정된 후에 병사들에게 배정된 점 등도 일본군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증언하는 위안소의 풍경과 닮은꼴이다.

운영 방식은 증언에 따라 조금 다르다. 채명신 장군에 따르면 전선에서의 위안부대 출입은 '티켓제'로 운용토록 하였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티켓이 주어지는 것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나눠주었다. 또 공훈의 정도에 따라 티켓의 숫자가 달라졌다고 한다. 이는 군인들이 군표나 현금을 주고 이용했던 일본군 위안소와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이것은 홋카이도나 사할린 지역에 강제 연행한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회사에서 마련한 위안시설에서 일한 '산업위안부' 제도와 닮은꼴이다. 일본이 저지른 대표적인 전쟁범죄인 종군위안부 문제에 가려 산업위안부 문제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군수기업들은 노동자들에게 일종의 '성과급'으로 위안소를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제공하는 등 노동자를 통제하는 데 위안소 제도를 이용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결국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한국전쟁 기간의 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의 잔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부끄러운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잔재"

그 때문인지 회고록에 군 위안부 제도를 기록한 장군들은 하나같이 위안소 운영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전쟁의 아픔, 그리고 절대빈곤의 참상을 지적한다.


▲ 한국전쟁 당시 연대장으로 복무한 채명신 장군(주월 한국군사령관)은 "군 위안부 제도는 장병들의 사기 진작과 성병 예방을 위해 도입한 '군부의 치부'이지만 당시 사회에 만연한 사창(私娼)을 군에 흡수해 인권을 보호한 측면도 있다"고 주장했다.
채명신 장군은 자신이 회고록에 기록한 한국전쟁 당시 겪은 군 위안부 제도에 대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군부의 치부이지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채장군은 당시의 암울한 현실과 시대상황을 예로 들어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당시는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많은 젊은 여자들이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에서 몸을 팔고 전선 근처에까지 밀려드는 시절이었다. 당연히 사창에는 성병이 만연했고 사창을 방치할 경우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도 우려되었다. 따라서 군에서 장병들의 사기 진작과 전투력 손실 예방을 위해서 위안대를 편성해 군의관의 성병검진을 거쳐 장병들이 이용케 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창녀들을 군의 위안대에 흡수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필요악으로서 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된 많은 사창가 여자들의 인권을 보호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당시 연대장이었던 채장군은 군 위안부 제도를 기획한 군 수뇌부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또 채장군은 위안대의 규모에 대해서도 "명칭 상으로는 부대(특수위안대)이지만 부대 편제표에 의해 편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안부나 사창의 사정(수요공급)에 따라 위안대 규모가 그때그때 달라 정확한 인원을 산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소대장님 티킷 한 장 더 얻을 수 없나요?"

....우리 5연대에서는 '위안부대'를 이용하는 데 몇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위안부대 출입은 티킷제로 운용토록 하였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티킷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나눠준다. 물론 훈장을 받았다면 당연히 우선권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다.

"5연대는 무조건 계급에 관계없이 훈장을 많이 탄 사람부터 순서대로 위안부를 상대할 수 있다."

내가 이런 규칙을 만들자 부대 내에선 한바탕 입씨름이 벌어졌다.

"이제 너희는 모두 내 동생이다. 알았나?"

"잠시만 기다려라. 곧 내가 너희들에게 등정기를 발표할테니…. 기대하시라."

모든 입과 귀가 위안부대로 쏠려 있었다. 용감한 박판도 중사도 규정대로 두 장의 티킷을 받게 되었고, 첫 번째로 위안소에 가게 되었다.

난 당시 연대장이었으니 이 얘긴 후일 대대장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그런데 박중사는 숫총각이라 위안부 상대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한다. 그리곤 티킷도 다른 전우에게 주려 하는 걸 규칙이라 안된다며, 분대원들이 억지로 떠메곤 위안부대의 천막 속에다 집어넣었다 한다.

모든 분대원들은 천막 안을 들여다보면서 역사적 사태(?)를 지켜보았는데, 아뿔싸 순진한 박판도 총각은 여자가 바지를 벗기려 하자 "싫다"며 도망가질 않나, 억지로 벗기곤 강행하려 하자 결사적으로 피하질 않나, 밖에서 지켜보는 분대원들에게 한바탕 웃음만 안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좁은 곳이라 결국은 여자한테 붙잡혔는데 상대가 숫총각이란 걸 안 여자가 장난삼아 그의 물건을 만지면서 "애걔, 요만한 걸 가지고 왔어?"하며 놀리자, 끝끝내 그는 총(?) 한방 못쏴보고 얼굴만 빨개가지곤 도망쳐 나왔다는 거였다.

분대원들은 자신의 분대장에게 치욕의 여름(夏)을 남기지 않으려, 그날 밤 철저한 강의와 사례를 들려주어 결국 박판도 중사를 설득시켰다. 다음날 재시도 끝에 박판도 중사는 결국 성공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다. 한번 위안부대를 다녀온 박중사가 완전히 맛을 들인 것이다.

"저…, 소대장님. 저…, 티킷 한 장 더 얻을 수 없나요?"

이 지경까지 되어 내게 보고가 올라오니 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허, 그놈 참. 그래 대대장이 알아서 두어 장 더 집어줘…. 하하하…."

그때부터 난 왠지 마음에 걸렸다. 순진한 녀석이 전투만 알다가 어느날 갑자기 인생의 어떤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다면….

<채명신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267~269쪽에서 인용)


육군본부의 공식기록인 <후방전사>의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1952년)에 따르더라도 당시 위안대를 이용한 장병은 적게 잡아도 연간 20만명을 넘는다. 또 "위안대를 이용할 수 있는 예비대로 빠지기도 전부터 장병들의 화제는 모두 위안부대 건이었다"는 채장군의 증언에서 보듯,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모든 군인들은 군이 설치·운용한 '특수위안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바로 그 '공공연한 비밀'이 50년만에 뒤늦게 불거진 것은, 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군부의 치부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찌꺼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군 위안대는 동원방식이나 기간 그리고 규모 등에서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와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상당 부분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와 유사한 방식으로 운용된 것 또한 사실이다(아래 <표 3> 참조).


<표 3> 일본군·한국군 위안부 제도의 유사점과 차이점
우선 사기 앙양과 전투력 손실 예방을 내세운 설치 목적부터가 유사하다. 또 병사들이 군대천막 앞에서 줄을 서서 이용하고 군의관이 성병검진을 하는 이용·관리 풍경도 흡사하다. 또 일본군의 군표 대신에 티켓과 같은 대가가 지불된 거래형식으로 운용되기도 했다.

이는 목격자들의 증언으로도 뒷받침된다. 한국전쟁 당시 이 희한한 제도를 처음 겪은 김희오 장군은 처음 위안대를 목격한 순간에 직감적으로 "이는 과거 일본군 내 종군 경험이 있는 일부 간부들이 부하 사기앙양을 위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장군은 34년간 군 생활에서 처음 본 공개적인 군 위안소 운영 사례에 대해 그 당위성을 떠나 영원히 찜찜한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기억한다.

이 '찜찜한 기억'은 바로 8·15 해방과 48년 정부 수립 이후 초기 국가 및 군부 형성에 깊은 영향을 준 친일파 청산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합참의장은 1대 이형근 의장부터 14대 노재현 의장까지, 육군 참모총장은 1대 이응준 총장부터 21대 이세호 총장에 이르기까지 일제 군경력자들이 독식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 문제는 미청산된 친일파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는 것이다.

김귀옥 박사는 "한국전쟁 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불행한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이 문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처럼) 피해 여성과 사회 단체 그리고 학계가 연대하여 풀어내야 할 우리의 과거 청산 문제의 하나"임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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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때도 '위안대' 운용 계획"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 ③ - 김귀옥 박사 인터뷰


href="mailto:dangk@ohmynews.com">김당 기자 dangk@ohmynews.com















김귀옥 박사는 "냉전·친일파가 그 원조인 우리나라 우익이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한 일본 우익을 반성시킬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1950년 6월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위안소를 설치하고 3∼4개 중대 규모로 위안대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라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이 '공공연한 비밀'은 2월22일 <오마이뉴스>에 처음 보도되기까지 지난 50년 동안 남자들의 군 시절
무용담이나 술자리에서나 운위될 뿐 한번도 공론화되지 못했다.

한국군의 어두운 과거를 담은 이 공공연한 비밀은 학계에서도 '금단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구(舊)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근대사 연구가 눈을 돌리게 된 것이 냉전체제가 붕괴된 이 10여 년 사이의 일임을
감안하면,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에 대한 뒤늦은 관심은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더욱이 오랜 분단 상황과 군부 독재정권 하에서 군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종종 '이적행위'로 간주되었다.

한국군의 이 부끄러운 치부를 처음 '공론의 장'으로 끌어낸 이는 여성 사회학자인
김귀옥 박사(경남대 북한전문대학원 객원교수·사회학)다. 김 박사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사람들의 역사적 경험과 정체성을 연구하기 위해 지난
1996년 월남인 정착촌(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 등)에 들어가 현지 조사활동을 벌이다가 한국전쟁 당시 군이 운영한 위안소와 위안부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처음 접했다.

이산(離散)과 폭력 같은 전쟁과 분단이 야기한 문제들을 사회학적으로 연구해온 김 박사는 지난
수년간 한국군 위안부라는 민감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들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오면서 그 동안 그 실체가 전혀 공개되지 않았던 북파공작원과
민간인 납치(납남)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월간 <말>지와 <민족 21> 등에 기고해 주목을 끈 바 있다.


젠더(gender) 관점의 평화 연구자로서 늘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는 김 박사를 만나 '한국군 위안부'라는 민감한 주제를
연구하게 된 저간의 사정을 들어보았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중인 지난 2월20일 서울 세종로 미 대사관 앞에서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의 상징인 '평화의 비둘기'를 들고 1인
시위중인 김귀옥 박사.


"북파공작원들 '위안부'도
현지조달"

- 한국군이 위안대를 설치·운영한 사실을 언제 어떤 계기로 처음 알게
되었나.
"1996년 11월 속초에서 월남민 인터뷰를 하던 중에 이 문제를 처음 접했다. 1950년 10월 유엔군에 체포된 이
월남민은 당시 민간인인데도 인민군으로 분류되어 거제도(포로수용소)로 이송될 때까지 포로로서 미군부대를 따라다니며 취사와 빨래를 했다. 그런데 이
월남민에 따르면 당시 부대에는 이남 말씨를 쓰는 위안대 여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이는 점령지(이북)에서 끌고 온 여자들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즉
미군과 국군이 50년 10월 휴전선을 돌파할 때 이미 여자들을 끌고 갔다는 얘기였다."

- 그것은
한국군이 아니라 미군 부대가 위안대를 운용한 얘기 아닌가.
"바로 그 얘기가 출발이 되어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와 관련된 기록을 1956년 육군본부가 편찬한 <후방전사>에서 발견했다. 사람들의 입 소문이나 기억의 소산이 아니라 군이
'특수위안대'라는 이름으로 위안소를 설치해 운영했다는 확실한 근거 기록을 찾게 된 것이다."

- 관련
기록을 찾은 뒤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 문제에 접근했는가.
"그 뒤로 군 관계자들을 만날 때면 이 기록의 진위 문제나 위안부
운용이 어느 정도 보편적인 것이었는지를 물어 확인하고 예비역 장성들의 회고록에 관련 기록이 있는지를 검토했다. 또 다른 위안대의 형태는
북파공작원과 위안부 여성의 만남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북파공작원이었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가운데, 원산 앞바다의 섬에서 첩보·공작활동을 하면서
북한 지역에 침투해 여성들을 납치하면 십중팔구는 강간을 하거나 여자들은 섬으로 끌고 와 위안부 역할을 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것은 HID 첩보부대의 일부에 국한된 얘기 아닌가.
"내가 만난
북파공작원들은 원산 앞 바다 섬을 몇 개 전전했는데 이런 위안부들이 그 섬마다 다 있었다고 증언했다. 원래 게릴라부대는 보급품을 현지 조달하게
돼 있지만 이들은 북한 여성까지 현지에서 (보급품으로) 조달했다는 얘기다. 나는 이런 현상이 증언자의 부대에만 있었다고 보지 않는다."


-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도 청취했는가.
"구체적인 증언을 청취하지는 못했다. 그
중에는 1951년 당시 16살에 북파공작원들에게 납치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고 아이 둘까지 낳은 할머니(1936년생)를 수소문해 어렵게
찾았는데 '전쟁 때 아이 낳고 고생하며 산 것밖에 없다'며 더는 할 얘기가 없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당시 친구들과 4명이서 여맹(女盟) 회의를
하다가 한밤중에 북파공작원들에게 납치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임에도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갖고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일본에서
열린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심포지엄에 발표한 김귀옥 박사의 한국군 위안부 관련 논문을 보도한 <아사히신문> 2월24일자
기사.
- 군이 위안소를 설치·운영한 시대적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1950년 전쟁 중에 많은 여성들이 강간과 겁탈을 당했다. 그런데 51년 여름이 되면 전선이 교착된다.
그러니까 50년에는 앞서의 유엔군 민간인 포로가 말한 것처럼, 여자들이 비정규적인 형태로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낮에는 빨래하고 밤에는 군인을
위안하는 그런 형태로 운용되었는데 51년 여름 전선이 교착되자 군 스스로 위안부 제도를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 필요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50년에는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강간과 납치 그리고 강제된 위안부 생활이 가능했다면, 51년에는 전선이
고착되어 후방의 지루한 전쟁이 계속되면서 주기적으로 전선에서 후방으로 교체되는 장병들에게 뭔가 유인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 제도를 도입한 것은 일본군에 복무한 경력이 있는 한국군 수뇌부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경험한 것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는가.
"예비역 장군들의 증언에 따르면,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한국전쟁 당시 군의 골간이었던 일본군·관동군 출신 장교들에 의해서 군 위안대가 창설되었다는 추정이다. 이것은 51년 당시 육군본부
휼병부(恤兵部)를 누가 주도했는지를 파악하면 훨씬 더 진전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간·납치에 의한 위안부도
있었을 것 추정"

- 군 위안부 제도의 도입을 기획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드러나지
않는가.
"육군본부의 공식기록인 <후방전사>에는 위안부 제도를 도입한 주체가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장군들의 증언으로 볼 때 일본군·관동군 출신으로 추정하는 데 무리가 없다. 그리고 육군이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것은, 그 당시에
작전지휘권을 유엔군(미군) 사령관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위안소 설치·운영에 관한 건도 유엔군(미군) 사령관이 최종 승인했거나 적어도 묵인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 미군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가진 것과 후방지역에서 한국군이
위안소를 운영하는 것은 별개라고 보는데.
"왜 위안부 제도의 미군 승인 문제를 꺼내냐면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이 위안대를
운영하려고 계획을 했는데 미군의 반대로 무산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이 그렇게 증언을 했다. 월남전
때도 한국군이 사기 진작을 위해 위안부 운영을 계획했는데 미군이 동의하지 않아 운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전쟁 때도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미군의 승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위안부 설치·운영에 관한 보고는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
한국전쟁 당시 군은 위안소를 어떤 방식으로 운영했나.
"크게 보면 육군본부에서 관할한 고정식 위안소과 이동식 위안소 그리고
비정규적인 위안부의 세 가지 형태이다. <후방전사>에 보면 육군은 서울에 3곳, 강릉에 3곳, 그리고 속초·원주·춘천 등 총 9곳에
고정식 위안소를 설치해 위안부를 붙박이로 두고 운영했다. 그리고 필요시에, 이를테면 전방에서 준후방지역으로 빠져나온 부대가 위안부를 요청하면
위안부 여성들을 거기로 보냈다. 일종의 이동식이다. 제3의 형태는, 일부 장군들의 기억에 따르면, 각 사단이나 연대 단위에서 사창의 여자들을
데려와 위안부로 이용하고 사단 휼병부나 연대 인사처에서 돈을 지급하는 비정규적인 임시 위안소이다. 비정규는 부대 사정에 따라 자체적으로 위안부를
이용한 것이지만 정규 위안소와 공통점은 개인(군인)이 아닌 군(부대)이 비용을 지급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정규적인 형태로 운영한 위안부가
정규적으로 운용한 위안부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것이 하나의 가설이다."

- 한국전쟁 당시 고정식
위안소의 설치 장소는 어디이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서울에 세 군데가 있었는데 가장 규모가 큰 곳이 충무로 4가
148번지에 소재한 위안소였다. 대한극장 앞인데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광희동이다. 물론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 번지수의 건물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86∼88년 무렵에 철거가 되어 지금은 기종빌딩으로 바뀌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자리에 있었던 낡고 허름한
건물을 사람들이 '해병대아파트'라고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광희동 토박이 조사를 통해 확인해 보았지만, 사람들은 왜 해병대아파트라고
불렀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 그곳이 민간인의 출입을 금지한 '군 전용 위안소'라는 근거가
있는가.
"민간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군 전용 위안소'라는 것은 <후방전사>에도 나온다. 또 군의관이 성병 관련
정기검진을 했다. 그리고 그 성격을 공창으로 파악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후방전사>는 위안소 폐쇄 배경을 '공창이
없어지는 시대 조류에 따라서 없앤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공창이다, 또는 아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가(군)가
운영한 것을 육군이 인정한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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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8c8f70; FONT-FAMILY: verdana,굴림체; TEXT-DECORATION: none">▲김귀옥
박사가 <민족 21>(2001년 9월호)에 쓴 '속초 세 할머니가 겪은 6·25 전쟁'에 관한 글과 사진. 이산(離散)과 폭력 등
전쟁과 분단이 야기한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글을 발표해 주목을 끌고
있다.
- 그렇다면 군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위안소를
운영했으며 위안부들은 어디에서 충원했나.
"위안소를 설치한 시점은 51년 여름으로 추정되고 폐지 시점은 54년 3월로 명시되어
있다.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충원되어 왔는지는 언급이 없다. 따라서 이것을 밝히는 것이 큰 숙제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일부 예비역 장군들이
기억하듯이 '종3 여자'(사창)만으로 충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속초 같은 데도 전시(戰時)에 사창이 있었는데 사창 여자들과 위안소
여자들은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그 근거는 무엇인가.
"해방 이후 공창이나
유곽의 여성은 약 2천여 명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여성들이 48년 말에 2만여 명으로 늘어났다가 전쟁이 끝나고 50년대 중반이 되면 30여만
명으로 늘어난다. 이런 통계를 보면 당시 사창 여자들만으로 군 위안소를 충원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상당한 인원은 여염집 여자들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가난과 빈곤 때문에 흘러들어온 사람도 있지만 일부는 강간과 납치에 의한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내가 만난 한 여성은 자기가 군부대에 잡혀 있을 때 그 부대에 이미 그런 여성들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우익이 반성해야 일본 우익을 반성시킬 수 있다"

-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논문을 이번에
일본에서 열린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심포지움'(2월22∼25일)에서 발표하게 된 특별한 배경이 있는가.
"지난
2000년 학술단체협의회가 주최한 한국전쟁 관련 학술행사의 종합토론회에서 아직까지 현대사에서 풀어내지 못한 과제의 하나로 한국군이 운영한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처음 얘기했다. 그래서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몇몇 신문기자들이 내게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달라고
했는데 그 규모나 실태를 아직 조사중이어서 지금은 얘기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 그해 겨울에 북파공작원에 대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위안부 얘기가 약간 들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 연구자인 후지메 유키 교수(일본 오사카 외대)가 이 글을 보고는 제5회 동아시아 평화
인권 대회에서 이것을 주제로 글을 발표하면 좋겠다고 공개적으로 추천하는 바람에 고민 끝에 결국 글을 발표하기로 결심을
했다."

- 한국군 위안부라는 민감한 주제의 논문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발표할 경우 이 논문을 일본
우익이 악용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는데 그에
대한 소신이나 반론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
"물론 그에 대한 고민은 여러 번 했다. 당연히 걱정하게 되는 것은 구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아직 매듭짓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 우익들이 이를 악용할 가능성이다. 그래서 사실 이 문제를 96년에 처음 접했으면서도 공론화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생각은 확고하다. 일본 우익도 문제지만 우리나라 우익도 그에 못지 않게 문제라는 것이다.
지난해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에서 드러났지만, 냉전 친일파가 그 원조인 우리나라 우익이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한 일본 우익을 반성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이른바 국익을 앞세워 이를 미뤄둘 것이 아니라, 군이 작성한 공식문건이 있는 한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역사
청산을 제대로 함으로써 일본 우익의 관점을 바꿔내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사과도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이 글을 쓰고 발표한
배경이다."

- 왜곡된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한국군 위안부 문제 진상규명을 위해 정부와 군 그리고
민간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군은 국가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데 여자들이 그 까짓쯤이야,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국가 차원에서 위안부를 동원한 것은 아니라고 발뺌하는 일본 정부의 논리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군이 어두운 과거사를 밝히는
것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군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군이 적극적으로 나서
당시 자료를 공개하고, 진상을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제2의 김학순 할머니(일본군 위안부 증언자) 같은 분이 나와서 증언을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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