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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잔혹한 삼일운동 탄압 증거
출처
http://waegu.blog.fc2.com/blog-entry-42.html
▲ 삼일절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가 최초 발굴공개한자료
2월 26일, 91주년 31절을 앞두고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함경도지역 31운동 참여자에 대한 조선총독부 검사의 기소 관련 기록 원본을 일본에서 입수하여 공개했다.
이 기록을 작성하고 소장했던 이시카와 노부시게(石川信重, 1871~?)는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으로 1908년 12월 통감부 검사로 내한하여 의주구 재판소, 전주구 재판소 등에서 근무하였으며, 1910년 강제병합 후에도 조선총독부 검사로 유임되어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과 군산지청 등에서 근무했다.
주로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호남에서 재직하여 의병 탄압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 함흥지방법원 검사로 자리를 옮겨 근무하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함경도 일대의 항일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를 지휘하고 기소하는 책임을 맡았다.
함흥지방법원용 미농지에 세필 붓과 펜과 연필 등으로 빼곡하게 적은 이 기록은 기소를 위한 준비 자료로 보인다.
▲ 이시카와 검사가소장했던 대정8년보안법사건 문서의 표지
표지에는 "다이쇼(大正) 8(1919)년, 보안법사건, 이시카와(石川) 검사"라고 붓글씨로 쓰고 날인이 되어있다.
서두에는 ▲(사건)번호▲죄명▲피고(이름과 수)▲(수록)페이지 등이 기록된 목록이 있다.
목록에는 ▲193(호) ▲ 보안법 출판법 위반 ▲ 이근재(李根栽) 외 40명 ▲1(쪽)"부터 "709(호) ▲보안법 출판법 위반 ▲ 이구준(李求準) 외 3명 ▲ 224(쪽)까지 총 115개 사건 항목이 13쪽에 걸쳐 적혀 있다. 함흥지방법원 관할 지역인 함경도 일대에서 3월부터 5월 사이에 일어난 삼일만세운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목록 바로 뒤부터는 순서대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분량은 무려 448쪽에 달한다. 이들의 죄명은 보안법 위반,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소요 보안법 위반이 대부분이고 훼기(毁棄)와 상해도 1건씩 포함되어 있다. 출판법 위반은 <3 data-blogger-escaped-.1="">를 인쇄 배포한 경우에 해당된다.
자료는 치열했던 3.1운동의 실상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압축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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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한국독립운동, 한국역사, 일제강점기, 일제만행, 일본,
[ 2013/03/01 ] 일본의 만행 | 댓글(0)
일제 관동대지진 재일교포 6천명 학살.
출처
“일제 관동대지진때 한인 6천명 학살”
http://media.daum.net/culture/art/view.html?cateid=1021&newsid=20050925174211445&p=khan
경향신문 | 입력 2005.09.25 17:42
일본 시가현립대 강덕상 명예교수(73)는 강재언, 이진희, 박경식, 박종근 등과 함께 재일사학자의 1세대에 속한다. 강교수는 독립운동 관련 자료 수집·편찬자로 더 유명하다. 그가 펴낸 '현대사 자료'(전7권·미스즈서방)는 '강덕상 자료집'으로 불리며 독립운동 연구에 기초사료가 되고 있다.
한국민족운동이 전공인 강교수는 연구자로서도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1923년 관동대학살을 분석한 '관동대진재', 안중근·홍범도등 주요 독립운동가의 삶을 기록한 '조선독립운동의 군상', 친일파를 연구한 '조선인 학도 출진', 그리고 최근작 '여운형평전' 등이 그것이다. 이중 '관동대진재'는 그의 대표작이다. 1975년 초판이 발간되고 2003년 개정판이 나온 이 책이 비로소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김동수·박수철 공역, 역사비평사)이라는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지난 20일 방한한 강교수를 서울 시내 호텔에서 만났다.
-어떻게 관동대지진 사건을 연구하게 됐나.
"일제시대 자료 연구·분석에 한창이던 1962년께 일본 국회도서관으로부터 미국에서 '반환문서'가 도착했다면 조사를 요청받았다. 이 가운데에는 관동대지진 관련 자료가 적지 않았는데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엮어 '관동대진재와 조선인'(1963)이라는 자료집을 냈다. 이후 이들 자료를 토대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의 관계를 고찰한 논문을 여러 편 썼다. 1975년에 출간된 단행본 '관동대진재'(중앙공론사)는 이러한 연구를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쓴 책이다. "
-'관동대진재'가 관동대지진에 대한 첫 단행본이라 하는데, 선행 연구는 없었나.
"일본에서 관동대지진 연구는 해방 이후에야 시작됐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연구는 일본인 사회주의자 피살 등 자국민들의 피해자에게만 초점이 맞춰졌다. 1959년에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소요'라는 조선인 학살을 다룬 논문이 나왔으나 학살 원인을 조선인의 폭동·소요에 돌렸다. 또 조선인 학살을 일본 사회주의자 살해사건과 비슷한 무게로 다루고 있다. 일본인 10여명이 죽은 사건과 6,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살해된 사건이 어떻게 함께 다뤄질 수 있는가."
-단행본 발간 이후 일본내의 반응은.
"75년 처음 책이 나왔을때 일본 언론의 반응은 뜨거웠다. 아사히, 마이니치 등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 서평을 다루며 "이제야 비로소 진실이 드러났다. 일본 사회는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때부터 관동대지진에 관한 증언도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 역사학계도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학살'(야마다 쇼지), '관동대진재와 계엄령'(마쓰오 쇼이치) 등이 일본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조선인 학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조사도 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애도의 말 한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
-관동대지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관동대지진은 식민지 조선의 해방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이다. 일본 정부는 3·1운동, 상해임시정부 수립, 청산리전투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염려했다. 관동대학살은 독립운동의 기세를 꺾으려는 식민지주의가 빚어낸 대참사다. 이는 3·1운동, 간도사변 당시 활동한 일본 군인·경찰들이 관동대지진 때 학살을 지휘한 데서도 확인된다. 조선인의 굳건한 항일의식에 공포감을 느꼈던 일본 관헌들이 지진으로 권력기구가 마비되자 조선인이 무엇을 하지 않을까 예단해 선제공격으로 대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시가전을 벌이며 6,000여명을 살해한 일은 전례가 없다."
-한국어 번역 출간이 30년 만에 이뤄진 까닭은.
"60~70년대 군사정권 때만 하더라도 한국 정부는 일본의 학자들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였다. 학자들도 드러내놓고 일본 연구성과를 인용하지 못했다. 내 책을 인용하고도 '강덕상'이란 이름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그간 관동대학살에 대한 무관심도 한 원인이었던 것 같다. 한국 정부는 지금껏 일본 정부에 관동대학살에 대해 조사를 요구하거나 자료제출을 요구한 적이 없다. 최근 한국에서는 과거사 청산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들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에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일본은 진실규명과 함께 사죄·배상해야 한다. 관동대학살은 한·일 양국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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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관동대학살, 일제만행, 민족차별, 혐한, 유언비어, 재일한국인, 일본, 동영상,
[ 2013/01/20 ] 일본의 만행 | 댓글(0)
진주만 공습이 계획적인 기습이었다는 증거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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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12월 8일의 일·미 개전을 둘러싼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최후 통첩의 수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미국에 「비열한 기습」이라고 비난 당한 문제에 관해, 일본 본국에서 대사관에 최후 통첩의 수정을 지시하는 전보가 반나절 이상 (일부러) 늦게 발신되고 있던 것을 증명하는 감청 기록이 미국에서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분명하지 않았던 발신 시각이 판명되어,「 주 워싱턴 일본대사관의 직무 태만에 의한 지연」이라는 지금까지의 정설에 파문을 일으킬 듯하다.
http://www.nikkei.com/article/DGXDZO49302190X01C12A2BC8001/
http://www.gesomoon.com/Ver2/board/view.php?tableName=transUser&bIdx=15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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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일본, 일제만행, 진주만공습, 제2차세계대전, 미국,
[ 2012/12/10 ] 일본의 만행 | 댓글(0)
일본 제국주의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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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국(김·세그) 1926 년생
「다니고 있던 진죠소학교로부터, 교사에 연행되었습니다.소년 소녀 약 100명이 일한 것은, 와카야마현의 방적 공장입니다.1년간에 십여명이라도 사고로 죽었습니다」(촬영지=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평양시)
금도린(김·치린) 1924 년생
「1944년 11월에 「소집 영장」으로 소집되어 아이치현 카리야시에서 「농경 근무대」로서 농사일을 했습니다.상등병에게 쿠와로 맞아 접힌 손가락은, 지금도 굽힐 수 없습니다」(촬영지=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평양시)
안세이토쿠(안·손드크) 1929 년생
「인천(인천)의 「시바우라 통신기」의 공장에서, 13~16세의 아이 약 200명이 1일 15~16시간이나 토목 작업을 하게 했습니다.대부분이 영양 실조가 되었습니다」(촬영지=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평양시)
대만 선주 민족 전 군인·군속과 그 유족이,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고 데모를 했다.선주 민족은 「타카사고 의용대」등으로 해서 필리핀이나 뉴기니의 격전지에 보내져 많은 사망자·부상자를 냈다.(촬영지=대만·타이뻬이시)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인 청년 5~6만명을 「병보」라고 하는 이름의 보조 병력으로서 모았다.군속인데 일본군의 각부대에게 배속되어 인도네시아의 밖에까지 보내져 전투에 참가했다.(촬영지=인도네시아·스카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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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일본, 일제만행, 일본군위안부, 동남아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대만, 북한,
[ 2012/10/24 ] 일본의 만행 | 댓글(0)
동남아시아 일본의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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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동남아시아를 침략한 것일까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은, 중국의 민중의 끈질긴 저항을 위해서 수렁에 빠졌습니다.게다가 난징대학살이나 대도시에의 무차별 폭격을 실시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도 격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특히 쥬우케이의 장개석 정권을 지원하고 있던 미국은, 일본의 불령 인도차이나 남부에의 진주에 대항하고, 일본에의 석유나 철등의 수출을 금지하는 등의 강경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일본은, 중국에서의 전쟁을 속행하려고 했습니다.풍부한 광물자원과 고무등의 농산물을 가지는 동남아시아에 침략을 실시한 것은, 석유등의 중요 전략 물자를 확보해, 아울러 버마등에서 중국 측에 보내지고 있던 군수품의 보급로를 끊기 때문에 했다.일본군이 점령하는 동남아시아에의 미국 해군의 진출을 막기 위해서, 진주만의 기지를 기습했습니다.그런데 일본 정부는, 선전의 불평으로서 이 전쟁의 목적은, 구미의 지배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해, 아시아의 민족과 일본의 민족이 공존하는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싱가폴의 아이들이 배우고 있는 역사의 워크·북에 오른 문제입니다. 여러분!압니까.
일본에서 전승 축하에 끓어오르는 2월 18일, 싱가폴에서는 야마시타 도모유키 군사령관의 명령으로, 화교(중국인)는 시내의 지정지에 집합하도록(듯이) 들었습니다.그것은, 「적성 화교」를 적발하기 위해(때문에)라는 것으로, 「검증」이라고 불렸습니다.명령에서는 18 에서 50세까지의 남자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실제로는 화교의 노인이나 여성도 대상으로 여겨졌습니다.이 적발은 3회에 및, 말도 통하지 않은 채 외관이나 태도만으로 판별하거나 현지의 사람에게 밀고시키거나 하고, 많은 화교를 재판 없이 사형으로 했습니다 .그 희생자의 수는, 일본측에서는 5,000명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현지에서는 약 4~5 만명으로 하는 설까지 있습니다.이러한 현지 주민에 대한 학대나 학살은, 싱가폴에만 머물지 않고, 일본군이 침략한 동남아시아 각지에서도 행해졌습니다.
시가의 일각에 갇혀진 사람들
검증 끝난 스탬프 「검증」으로 양민(백성)이라고 판단된 사람에게는, 신분 증명서 등에 검증 끝난스탬프가 밀렸다
말레이 반도 쿠아라피라에 있어서의 유골의 발굴·매장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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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으로 몸 팔러 나간 "카라유키상" 으로 불리는 일본 여성들
출처
외국으로 몸 팔러 나간 "카라유끼상"으로 불리는 일본 여성들
이 여성을 "카라유끼상"(唐行さん)이라 부르며
19세기 후반에 꼬임에 빠져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등지로 건너 가서 창부로 일한 일본 여성을 뜻한다. 카라유끼상의 어원은, 한자로 외국(중국)을 의미하는+唐, 간다+行き, 사람(님) + さん의 합성어로 당시에는 "외국으로 나간 사람"이란 뜻로 이렇게 불렀다.
"카라유끼상"들
그러나 당시에는 "카라유끼상"이라 하지 않고, 추업부(醜業婦), 천업부(賤業婦), 밀항부(密航婦) 그리고 출신지역에 따라 시마바라족(島原族), 아마쿠사녀(天草女) 등과 같이 경멸적인 의미로 불렸었다.
대부분이 나가사키현 시마바라(長崎縣 島原半島)와 쿠마모토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출신의 여성이 많았으며 이곳이 "카라유끼상" 발상지라고 알려져 있으며 점차적으로 일본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바다가 인접한 지역으로 옛부터 유럽의 선박왕래가 빈번하였으며, 이국의 풍물에도 익숙해져 "이인환대"(異人歡待)의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풍 속에, 바다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거리적으로도 동경에 가는 것 보다 배로 외국인 상해로 가는 것이 더 가까웠다.
사족(蛇足) : 16세기 중후반에, 일본 전국시대인 오다 노부나가 그랬던 것과 같이, 그의 유지를 이어 받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크리스천에 대해 호의적으로 일본의 국교지정으로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갑짜기 크리스천을 멀리하게 되고 탄압하게 된 동기에는, 그들이 진출한 나라에서 포교 뒤에 한결같이 포르투갈 령이나 스페인 령의 식민지로 변해 가는 사실과, 더욱이 쿠마모토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지방의 빈곤 가정출신의 수 많은 여성이 노예선에 태워져 인도방면으로 팔려 나간 사실 등을 알게 되고서부터 였다.
: 山岡莊八저 역사문고 講談社 발행 "?川家康" 제20권 중에서
"카라유끼상"의 발상지
나가사키현 시마바라(長崎縣 島原半島)와 쿠마모토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카라유끼상"으로서 외국으로 나간 일본 여성들은 농촌, 어촌 등의 가난한 가정 출신의 딸들이었다. 첫번째 원인은 빈곤이었다. 당시 일본은 빈곤한 사람이 많았으며, 돈벌이를 위해 딸들이 팔렸다. 또 일본은 무로마찌 시대(室町時代, 1336-1573)부터 시작된 공창제도가 있어, 부모가 딸들을 팔아, 받은 돈으로 생활하는 풍경은 당시로는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즉 나라가 그러한 권한을 부모에게 인정하고 있었다. 집안과 형제자매를 위해 스스로 고행에 몸을 투신하는 딸은 효녀로 보는 것이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그러한 딸들, "카라유끼상"은 돈벌이 장소의 무대가 이번에는 외국으로 옮겨졌다.
그녀들을 외국의 유곽에 넘긴 가교역할을 한 사람들은 외국 선원과 밀접한 "삔뿌"(嬪夫, ピンプ)라 불리는 알선책 업자와 제겐(女衒, ぜげん)으로 불리는 국내 모집책 사람들이었다. 특히 이런 제겐(女衒, ぜげん)들은 가난한 농가, 농촌을 돌아 다니며 적당한 연령의 처녀를 찾아 내어, 외국으로 취업시켜 준다고 유혹하여, 그녀들의 부모에게 현금을 건넸다.
*제겐(女衒, ぜげん) : 돈에 곤궁한 집을 찾아 전국 각지로 돌아니며, 주로 젊은 여성을 사들여 유곽 등의 성풍속 관계의 일을 강제적으로 시키는 인신매매의 중개업자. 제겐들은 그녀들을 매춘업자에게 넘기므로 수입을 얻었으며, 이러한 돈으로 자신이 직접 외국에서 유곽 경영을 시작한 사람도 있었다. "判人"이라고도 한다.
"카라유끼상"이 된 가장 많은 원인은 전술한 바와 같이 유혹이었다. 달콤한 돈벌이의 꼬임에 속았다. 제겐이란 "일본판 노예 거래업자"들은, "싱가포르에 가서 호텔에 취직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라고 유혹했다. 그리고 잘 통하는 외국선 선원에 건네어 밀항도록 했다. 여기에 든 수수료 비용이라며 당시 약 500엔(현재 500만 엔 상당)이 본인의 채무로 떠 안게 되었다. 이것을 갚기 위해 팔려간 땅에서 어떤 일을 해서라도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카라유끼상""(からゆきさん) 관련 출판 서적들
유혹당해 온 "카라유끼상"은 현지에 도착한 현지의 유곽에서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성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500엔의 채무를 갚지 못하면 집에 있는 부모로부터 대신 갚도록 한다."라고 하는 협박에, 그녀들은 울면서 창부의 세계에 뛰어들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분발로 자포자기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몸을 버린 셈 치고..."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세계 각국에 진출해 있던 유럽인들로부터 그녀들의 인기는 높았다. 백인이 유곽을 지나면 그녀들은 "카민사-"라고 말을 건넸다. "Come in, sir"의 서투른 일본식 발음이었으며, 백인들 사이에서는 "카민사-"라는 닉네임으로 그녀들을 불렀다.
이국인 상대의 "카라유끼상"에 대해 "일본 여성은 순종적이고 정직하고 친절하다. 다른 외국 여자와 달리 악랄한 거래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첫 번째로 일본여성은 믿음이 있고 순수하다. 두 번째로 돈을 너무 밝히지 않고, 세 번째로 훔치는 버릇이 없다. 네 번째로 누구나 친절하다."라는 이방인들이 평가였다.
이 무렵 시베리아의 "카라유끼상" 가운데 친일가로 잘 알려진 안톤 체홉(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은 "카라유기상"과 하루밤을 보냈다. "항상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다. 미소로 대답하고 있다."라고 그의 친구에 보낸 편지가 있다.
다른 작가 서머셋 모음(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Neil MacAdam"이란 작품에는 "일본여성은 눈 언저리에 부드러운 웃음이 가득하고, 그녀들은 방에 들어가면 먼저, 머리를 공손히 숙여, 그리고 예의 바르게 정중한 인사를 건넨다."라고 쓰고 있다.
비록 그녀들은 빈농의 가정에 태어나 유혹으로 이국에 팔려와 생활하며, 한편으로는 추업부(醜業婦), 천업부(賤業婦), 밀항부(密航婦) 등으로 불기도 했던 어두운 그녀들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신선한 감을 주고 있다.
이러한 여성의 외국 도항은, 당시 여론에서도 "낭자군"(娘子軍)으로 불리며 상당히 긍정적으로 선전되기도 하여 메이지 말기에는 최고조에 달했다. 중국인의 화교에 비교될 정도로 그녀들도 세계 구석구석에 진출했으며 한때 그 숫자는 20-30만명에 달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 있어서 일본의 지위가 차츰 높아지자 그녀들의 존재는 "국가의 수치"라고 비난받기에 이르렀다. 1920년 "유곽 폐창령"과 더불어 외국에 있는 일본 유곽도 폐지되게 되었다. 대부분이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그녀들의 특별한 갱생대책이 없어 현지 잔류한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로, "카라유끼상"의 존재는 "전쟁 전 일본의 취부"로써 일반에게 알려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카라유끼상" 진출 분포도
"카라유끼상"의 도항처는 주로, 중국, 홍콩,필리핀, 보르네오,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각지 그리고 미주지역과 아프리카였다. 특히 당시 아시아 각국을 식민지배하고 있던 서구열강의 군대로부터 강한 요망있었던 지역으로 많은 일본 여성들이 파견되었다. 또 멀리는 시베리아, 만주 하와이, 캘리포니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잔지바르(Zanzibar, 탄자니아의 자치령)까지 진출한 일본 여성도 있었다.
문학 "산다칸 8번 창관"
1972년 야마자키 토모코(山崎 朋子) 씨의 논픽션 문학 "산다칸 8번 창관"(サンダカン/Sandakan 八番娼館, 1974년 영화화)이 출판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것이 촉매가 되어 많은 연구서가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サンダカン八番娼館 望鄕"은 베를린 국제 영화제 최우수 여우상 수상
주연 여우 타나카 키누요(田中 絹代, 1909-1977, 여배우, 감독)
-- "산다칸", 현재 말레이시아 사바주에 있는 상업도시 Sandakan(보르네오), 중국어로 山打根으로 표시한다. 주위는 망그로브(Mangrove) 숲과 오랑우탄의 보호구가 존재한다. 여기에는 당시 일본 유곽 경영자가 만든 일본인 묘지가 있으며, "카라유끼상"(해외 매춘부)으로 몸을 팔러왔던 그녀들의 묘지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기도 했었다.
"카라유끼상"들의 근로조건
유명한 "카라유끼상"의 한 사람 키타카와 사끼(北川サキ) 씨의 보르네오에서는 예로는, 창부목의 수입은 50%, 이 가운데 빛 변제분이 25%, 나머지에서 의상비, 잡비 등에 충당했다. 생활을 위해서는 적어도 매월 약 20여 명의 손님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빚 문제에 대해서는 "갚을 생각이 있으면 더 열심히 일하면 금방 갚을 수도 있었다."라고 한다. 이것은 최소한 월 120명의 손님에 상당하며 매달 100엔 정도씩 빚 변제가 가능했다고 한다.
보통은 손님이 적었으나, 항구에 배가 들어오면 어느 유곽이나 만원으로, 심할 경우에는 하루 밤에 30여명의 손님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금액으로 1박에 10원(약 1만 엔), 숙박 없이는 2원이었다. 손님 한 사람에 걸리는 시간은 3분에서 5분 사이로 이 이상 시간이 걸리면 할증요금이 부과되는 규정이었다.
(참고 : 필리핀에서는 당국의 위생국의 창부의 성병 검사는 주 1회 임질검사 그리고 월 1회 매독검사를 실시했으며, 이 비용을 그녀들이 부담해야 했다.)
카라유끼상 "오키쿠의 증언"
카라유끼상 오키쿠의 증언을 토대로 "오키쿠의 생애"란 서적이 출판되었다. "오키쿠"의 생애 1899년(明治32年)에 히로시마현(廣島縣)에서 태어나 제겐(女衒, ぜげん)의 꼬임으로 1916년 17살에 말레이시아로 팔려 갔다.
카라유끼상 "오키쿠" / 카라유끼상 "오키쿠"의 생애
그녀의 출생은 일본 피차별부락(被差別部落, 근세초기 이후 봉건적 신분제도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 혹은 차별 받는 지역)에서 8명 형제의 막내로 태어난 오키쿠 집안은 초가집의 초라한 작은 집으로, 집 밖에 설것이대가 있는 그런 가옥이었다. 그녀가 3살 때 부친을 10살 때 모친은 유명을 달리했다.
초등학교 4년에 중퇴하고 언니 오키미가 일하는 오카야마(岡山)의 돗자리 공장에서 아이를 돌보아 주기로 했다. 오키쿠는 같은 돗자리 공장에서 일하는 오토미라는 여자로부터 유혹을 받아, 고우베(神戶)에서 밀출국되었다. 당시 대부분 카라유끼상들은 배밑에 숨어 밀항으로 출국하였다. 배는 1개월 걸려 도착한 싱가포르에서 경매에 붙여졌다.
말레이시아 크랑에 아직도 남아있는 "20번지"
말레이시아 크랑에 있는 20번지 유곽에 500엔(현재의 화폐로 약 500만엔)에 팔린 오키쿠는, 그 빚을 갚기 위해 3년간 일해야 했다. 유곽에서 3년간 일한 뒤, 빚을 갚고 자유의 몸이 된 20세 때에 싱가포르에서 독립하여 인도인과 결혼하였다. 여기서 그녀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약 10여년 간의 이 "자유"가 오키쿠에게는 가장 즐거웠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그녀는 다른 일본인들과 같이 인도에 억류되었다.
"오키쿠" 부부
1946년 석방되었을 때 그녀는 47세. 말레이시아 국적을 취득하여 현지에서 보내다, 1973년 57년 만에 귀국했다. 일본 매스컴은 그녀의 귀국을 크게 보도함으로 "카라유끼상"의 관심이 집중되게 되었다. 그녀는 일본으로 귀화 신청을 마치고, 아직도 말레시아에 남아 있는 옛 "카라유끼상"의 귀국을 종용하면서, 그리고 고국을 그리워하며 자신들의 처지와 가족의 입장을 생각해 귀국하지 못한 채 이국의 땅에 묻힌 "카라유끼상"의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3년 뒤에 사망한다. 카라유끼상 "오키쿠의 생애"는 그러한 그녀의 77년간의 일생을 기록한 논픽션 작품이다.
후세에 이름을 남긴 "카라유끼상"
특히 어린 그녀들은 태평양 전쟁 훨씬 전부터 외국으로 진출하여 현지 사정과 외국어에 능통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들의 지금까지 활동지역은 적지로 변했으며,
어학에 뛰어난 그녀들은 자진하여 조국을 위해 현지인들의 통역으로 몸을 바친 여성도 많았다.
카라유끼상 "오에이"(おエイ)
"오에이"(おエイ) "러시아 해군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여성으로 고향 나가사키(長崎)에 그녀의 기념비가 있으며, "나가사키 3대 여걸"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여러 서적에서도 소개되었으며, 12살 때 마을을 등지고 상해를 거쳐 시베리아의 바이칼호까지 그녀의 족적이 남아있다. 특히 러시아와 관계가 깊으며, 뒤로 니콜라이 2세와 러일전쟁 사령관 크로드버킨, 노기 대장과 싸운 스텟셀 등 많은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본명은 "道永エイ"
시베리아의 "카라유끼상"
시베리아의 "오키쿠"(お菊) 이 사람에 대해서는 많은 잡지, 신문 등에서 취급하였으나, 아직도 신비에 쌓인 부분이 많다. 1878년 야마쿠찌현에서 태어나 17살 때에 조선으로 건너, 뒤로 만주, 시베리아를 전전했다. "오키쿠"(お菊)가 일약 유명해 진 것은 러시아 혁명에서 일본군 시베리아 출병에 걸친 동란의 시기에 일본군에 협력하여 수 많은 공적을 세운 점이다. 연대장으로부터는 감사장이, 일본 상훈국 총재로부터는 금 80원의 공로금을 받았다. 현재의 하얼빈의 일본인 묘지에 잠들고 있다.
만주의 "카라유끼상"
만주의 "오키쿠"(お菊) 만주의 "오키쿠"(お菊)와 시베리아의 "오키쿠"(お菊)는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있으나, 내가 조사한 자료에서는 다른 인물로 판단하고 기술하고자 한다. 그녀도 상당 부분 신비에 가려진 인물로 아마쿠사(天草) 출생으로, 7살 때에 조선의 어느 요리집으로 팔려 나 갔다. 뒤로 대륙 각지를 전전 방랑하게 되며, 일본군 시베리아 출병 때에는 일본군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만주 중대 사건으로, 일본군에 체포된 마적단(馬賊團, 유격대 조직) 장작림(張作霖)과 그의 처남을 처형 직전에서 구출한 것을 계기로 마적단에 투신했다. 여 두목으로 이름을 떨쳤다. "오키쿠"(お菊)가 직접 발행한 통행증은 어디서나 가장 신뢰를 받았다. 병으로 몸져 누어있을 때인 1923년 39세의 짦은 생애를 니콜라이에흐스크 사건(니항사건, Nikolayevsk Incident)으로 영면했다.
*니항사건 : 1920년3월 일본군 시베리아 출병 때에 러시아인, 조선인, 중국인 4천 명으로 조직된 유격대에 의해, 흑룡강(아므르 강) 하구에 있는 니콜라이에흐스크 항의 일본 육군 수비대(제14사단 보병 제2연대 제3대대)와 일본 거류민이 무차별 학살당한 사건. 5월 일본 육군이 원군을 파견하자 유격대는 항구를 방화하고, 거류민과 포로를 모두 살해하고 도주했다. 이때의 희생자는 6000천 명에 이른다.
"카라유끼상" 키노시타 쿠니(木下クニ)
키노시타 쿠니(木下クニ) 아마쿠사(天草) 출신으로 보르네오(현재 카리만탄) "산다칸 8번 창관"(サンダカン八番娼館, 유곽)에 근무하면서, 많은 돈을 모아 같은 처지의 일본인을 추모하기 위해 일본인 묘지를 만들었다. 그녀의 일화는 일본 영사관의 위치는 모른 사람도 "키노시타 쿠니"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덕망이 높았다. "남양(南洋, 동남아시아)의 여왕"이라고도 불렸다. "카라유기상"의 지상목표는 재산을 모아 "금의환향"이었으며, 이 시대에 그러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녀도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양장 모습의 "카라유끼상"
시마키 요시(島木ヨシ) 그녀는 1886년 아마쿠사(天草)에서 태어나, 19살 때에 "카라유끼상"이 되었다. 상해와 싱가포르 등을 전전, 인도 폼베이(현 뭄바이)에 단신으로 진출하여 "저팬니스 마사지"를 시작했다. "일장기를 가슴에 안은 민간외교"라는 기개로, 인도의 독립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 수상 등 거물의 치료도 담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년 고향에 아마쿠사(天草)로 돌아와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남아시아의 "카라유끼상"
코마쯔 케이(小松ケイ) 16살 때에 고향 아마쿠사(天草)를 떠나 상해를 거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여기서 커다란 회사를 경영하는 네덜란드 인의 눈에 들어, 성과 같은 대저택의 여주인이 되었다. 고향에 집을 짖고 그 네덜란드 인과 같이 살기도 했다. 이 집은 아직도 남아 있으며 현재는 그녀의 조카가 관리하고 있다. 그녀도 금의환향했다. 케이의 묘지는 -그녀가 하얀 파라솔에 하얀 드래스 모습으로 귀향했을 때의- 작은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있다.
캐나다의 "카라유끼상"
야마다 와카(山田わか) 요코스카(橫須賀)에서 태어났다. 1890년 무렵 18세 때 이미 유부녀였으나, 제겐(女衒, ぜげん)에 유혹 당해 머나먼 시애틀로 팔려갔다. "아라비아의 오야에(お八重)"라는 이름으로 8년간 일했다. 독지가의 도움으로 공부를 시작했으며, 뒤로 여류 평론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창부 후생시설을 만드는 등 어려운 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기적과 같은 그녀 발자취는 이국에 깊이 남겼다.
일본을 대표하는 「女衒 ZEGEN」의 한 사람
오카무라 이헤이지(村岡 伊平治, 1867-1945)
전설적인 "제겐"으로 알려진 인물 오카무라 이헤이지(村岡 伊平治)
오카무라 이헤이지(村岡伊平治, 1867-1945)는 일본의 대표적인 제겐으로 알려진 인물. 나가사키현 시마바라(長崎縣 島原半島) 출신으로 누나와 동생 2명의 4형제의 장남으로 태아났다. 부친은 1877년 토지세 개정문제로 동분서주 하던 중에 객사, 이로부터 형제들은 빈곤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헤이지는 주류와 야채 행상으로 가계를 도왔다.
18살 때 배로 홍콩으로 건너가, 중국 각지, 싱가포르, 행상, 인도 캘커다, 하노이, 대만, 동인도 제도 등을 전전하며 여관업, 이발소, 유곽, 행상, 진주 조개 채집, 통역, 식당, 노무자 알선, 야채재배, 제과 등 수 많은 일과 사업을 경험했다. 한편 유곽에서 일하는 "카라유끼상"들을 홍콩 해적으로부터 구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女衒 ZEGEN」이란 직업에 뛰어 들어 유곽도 경영했다.
오카무라 이헤이지(村岡 伊平治)의 자서전 『村岡伊平治自傳』
그의 사업들은 상당히 성장하고 있었으나, 1919년 폐창제도 개시 그리고 1937년 해외 매춘부 폐지령이 공표되고서부터 사업은 내리막 길로 접어들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 갔다. 그의 자서전 『村岡伊平治自傳』은 "제겐"으로서 자신의 일생을 기록하여 1960년에 남긴 것이다. 자서전이 쓰인 당시 군부의 남방개발의 굴욕 등의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발행이 되지 않았으나 전후 겨우 출판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신의 "자화자찬"등 과장된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산다칸 8번 창관"의 야마자키 토모코(山崎 朋子) 씨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당시 일본이 진행하고 있던 남방개발 그리고 유곽의 "카라유끼상"들의 실태를 연구하는 제1급의 귀중한 연구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점은 높이 평가되는 자서전이다.
제80회 칸느 국제 영화제 참가 영화 「女衒 ZEGEN」(제겐)
감독각본 : 이마무라 쇼우헤이(今村 昌平, 1926-2006) 주연 배우 : 오가타 켄(緖形 拳, 1937-2008)
제작일:1987년 상영시간 : 2시간4분, 배급:東映, 今村프로
주연 배우 : 오가타 켄(緖形 拳, 1937-2008)
당시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했던 "「女衒 ZEGEN」"(제겐) 중의 한 사람 오카무라 이헤이지(村岡 伊平治, 1867-1945) 씨의 반생을 그린 작품. 『村岡伊平治自傳』(오카무라 이헤이지 자서전)에 픽션을 가미하여 영화화했다.
영화 「女衒 ZEGEN」의 로케는 대만 "九분"에서 촬영되었다. 여기는 일제시대 아시아 최대의 금 광산이 있었으며, 아직도 옛날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어 관광지로 많은 일본이 찾기도 하는 곳이다.
The Guinness World Records 에도 올라 있고, Wikipedia 에도 올라가 있는 세계 최대 황금
황금 덩어리의 "九분" 박물관
영화 "「女衒 ZEGEN」"(제겐)의 줄거리
나가사키현 시마바라(長崎縣 島原半島) 출신으로, 그는 뜻을 품고 고향을 버린지 벌써 8년이 지나고 있었다. 동료 2명과 같이 홍콩의 항구에 도착하였다. 머리카락은 엉키고 부슬부슬, 옷은 너덜너덜한 모습이었다. 호주머니에는 여유의 돈도 없었다. 무작정 "대일본 제국 영사관"으로 들어갔다. 1902년(明治 35年) 정월달, 伊平治는 여기서 우에하라(上原) 대위로부터 만주 밀정으로서 임무를 띠고, 시베리아 대 설원으로 향했다.
여기서 그는 봉천의 한 유곽에서 "도메"라고 하는 나가사키현 시마바라(長崎縣 島原半島) 출신의 여자와 만난다. 그녀를 통해 어렸을 때부터 사귀던 "시호"가 싱가포르로 팔려 간 것을 알게된다. 홍콩으로 돌아온 "이헤이지"(伊平治)는 에치젠야의 아사나가(越前屋 朝長)라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방문했으나, 놀랍게도 "시호"는 그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아사나가가 싱가포르에서 그녀 사들였던 것이었다. 사랑하는 옛 연인을 다시 사들인 "이헤이지"는, 홍콩 해적에 잡혀 간 일본인 "카라유끼상"들을 구출한 것인 인연이 되어 "제겐 사업"을 하게 되었다.
"여자 무역"은 국가를 위해서 라며 자신을 나타내는 그는, 남양의 섬들을 건너 다니며 장사에 몰두했다. 한편 "시호"는, 이전에 해적으로 지금은 영국령 말레이 포트 센텐햄에 진출한 "왕"이란 남자의 허락으로, 여기에다 유곽 영업 허가를 받았다. 1904년2월(明治 37年)에 "대 러시아 선전포고"할 무렵까지 "이헤이지"(伊平治)는 많은 직원을 데리고 있었다. 장사도 번성하여 4개의 유곽을 경영하게까지 되었다.
1912년(明治 45年) 여름 천황이 서거하자 그는 할복(순사)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곧 재기한 그는 사업에 몰두하게 되었으나, 차츰 반일감정이 높아지자 일본 유곽도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1919년6월(大正 8年) 폐창제도의 탄생은 "이헤이지"(伊平治)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미 세상은 빠르게 변하게 되었다. 많은 여자들이 일본으로 귀국을 희망하고 있으며, "시호"는 "왕"과 눈이 맞아 그의 곁을 떠났다. "왕"은 이러한 기회에 이헤이지"(伊平治) 소유의 모든 유곽과 "시호"를 포함해 20만 달러에 손에 넣었다.
1941년12월(昭和 16年) 태평양 전쟁이 시작할 무렵, "이헤이지"(伊平治)는 이미 70세가 되었으나, 그의 "제겐 근성"은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일장기(히노마루)를 선두로 상륙해 오는 일본군 대열을 향해 그는, "군이들이여! 여자라면 나한테 맡겨라..."라고 외치고 있다.
사족(蛇足)
"카라유끼상"은 외국 각지에서 활약하게 되면서 일본인 묘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많은 유럽인들의 전진기지가 되었던 싱가포르에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일본인 유곽이 있었으며 여기에 최대 규모의 "카라유끼상"의 공동묘지가 있다. 그녀들은 평균연령 12-14살 때에 팔려 나가, 5-6년 사이에 말라리아 등의 풍토병, 성병, 폐병 그리고 아편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고국의 가족들은 딸들의 소식을 모른 채...
"카라유끼상"들의 공동묘지
홍콩섬 "카라유끼상"들의 공동묘지 / 보르네오섬 "카라유끼상"들의 공동묘지
홍콩섬 Happy Valley 경마장 부근에 있는 공동묘지 일각에 일본인 묘지가 있다. 성공하여 여기에 묻힌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일본으로 귀국하지 못한 채 여기서 눈을 감고, 지금도 여기에서 잠들고 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잠든 그녀들은 조국을 향해 묻혔다.
어려서 돈 때문에, 부모 형제자매와 이별하여, 외국에서 그녀들은 모두가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렇게 망향의 무념 속에 생을 마감한 그녀들은 같은 동료들의 따뜻한 도움으로 이국의 일본인 묘지에 잠들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일본인 묘지"에 안장된 사람은 행운이었던 편이며, 많은 사람이 바다에 버려지거나, 정글에 버려진 경우도 상당했다. 이국에서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세상을 떠난 "카라유끼상"의 운명적인 생애였다.
쿠마모토시 니혼키(熊本市 二本木)에 유일하게 남았던 유곽유적 "구 일본정"(舊日本亭)
메이지(明治)에서 쇼우와(昭和)에 걸쳐 큐우슈(九州) 최대 규모의 홍등가로 번창한 쿠마모토시 니혼키(熊本市 二本木)에 유일하게 남았던 유곽유적 "구 일본정"(舊日本亭) 건물의 해체작업이 9월1일부터 시작된다. 일본 전통예능 죠우류우리나 나가우타(淨瑠璃, 長唄)을 키워 온 유곽문화의 명성을 전해 온 건물해체에 지역주민과 민속학 전문가로부터 아쉬운 목소리가 일고 있다.
"홍등가" 니혼키(二本木)의 거리 풍경
"구 일본정"(舊日本亭)은 쌀장사로 돈을 번 지역유지가 1896년(明治 29)에 세웠다. 1층은 연회장이나 유녀가 객을 맞이하는 방. 2층은 객실이 길에 이어져 있다. 전쟁 뒤로 유곽페지령이 내려지자, 한때 아파트로 이용되기도 했다. 작년 8월 노후화가 심해 "구 일본정"(舊日本亭)을 보전하기 위해 지역 유지가 모여, 지역재계 등에 협력을 호소했으나, 불황으로 충분한 자금이 모이지 않게 되었다.
"홍등가" 니혼키(二本木)에 있는 "구 일본정"(舊日本亭) 건물 모습
메이지기(明治期)의 건물을 이축.보존하는 "박물관 메이지촌"(明治村, 愛知懸 犬山市 소재)에게 협력을 요청했으나, "유곽의 성격상, 초중등학생의 견학자에게 설명하기 어렵다."라고 거절 당했다. 이 건물의 소유자 타케무라(竹本健治, 66)는 "옛날 분위기의 술집"(レトロな居酒屋)로 개장하려는 계획이었으나, 건축 기준법에 의해 화재 발생시의 소화대책이 필요하다고 하여 단념했다.
"홍등가" 니혼키(二本木)의 거리 풍경
그 옛날 "홍등가"로 불린 니혼키(二本木)를 상징하는 건물이 자취를 감추는 것에 대해, 민속학 한 준교수(熊本大 鈴木寬之)는 "니혼키는, 유녀들이 전승해 온 죠우류우리나 나가우타(淨瑠璃, 長唄), 샤미센(三味線) 등 예능의 거점의 하나. "구 일본정"(舊日本亭)은 지역의 예능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중요했다."라며 아쉬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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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 교수 기고 ‘한일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가’
문서 변조되고 날인도 없었다
이태진 교수 기고 ‘한·일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가’[上] / 국왕·대신들에 군사적 위협 가해 강제하기도
기사입력시간 [1075호] 2010.05.26 (수) | 이태진 |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
▲ ‘합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재빨리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를 내걸고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 뉴스뱅크
올해는 한·일 병합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이후 36년간 치욕스러운 식민 통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식민 지배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한·일 양국에 깊은 앙금으로 남아 있다. 지난 5월11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 등 한·일 양국의 지식인 2백14명은 ‘한·일 병합 조약은 무효이다’라는 내용의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 가운데도 ‘왜 조약이 무효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시사저널>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기고를 통해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지를 두 차례에 걸쳐 알아본다.
▲ ‘조일수호조규’에 대한 조선 국왕의 비준서. ‘대조선국 주상’이라는 직함을 쓰고 그 아래 날인했다. 러일전쟁 후 한국의 국권을 빼앗은 조약들도 이런 형태의 비준서가 있어야 했다.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① 조약 관계 수립 초기의 ‘온전한’ 조약들
국제법상 조약(Treaty)은 두 나라의 국가 원수가 각기 협상 대표를 선정해 그에게 전권위임장을 수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위임장을 소지한 두 나라 대표는 합의한 장소에서 만나 서로 위임장을 보인 다음, 협상에 들어가 합의 결과를 조약문으로 작성해 각기의 직명, 이름을 쓰고 사인 또는 날인하는 순서를 밟는다. 그 다음에 국가 원수가 그 조약문을 받아보고 잘못된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 비준서를 발부해 효력을 발생시킨다.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에서 시작된 이러한 절차와 형식은 지금까지 국제 사회에서 그대로 준수되고 있다. 국교가 수립된 나라 사이에는 행정적 편의를 위해 주재 공사(legation)와 외무대신의 책임 아래 국가 원수의 비준서 발부를 생략하는 약식 조약(Agreement, Arrangement)을 체결할 수 있었다. 단, 이는 국권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의 사안에 한했다.
▲ 1882년 8월7일자 임오군란 피해에 대한 조선 국왕의 사죄 국서의 어새 날인 부분. ⓒ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한국과 일본은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의 체결로 조약에 의한 근대적 국교 관계를 맺었다. 흔히 강화도 조약으로 불리는 이 조약이 불평등 조약으로 알려진 것은 잘못이다. 이 조약 체결 당시 조선측은 일본측이 가져온 초안에 대해 최혜국 조관을 제외할 것을 요구하고, 나머지 12개 중 9개 조에 걸쳐 문안 수정과 용어 변경을 요구할 정도로 능동적이었다.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과는 달리 개국·개화의 뜻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물론 양국 황제의 비준서 발부로서 효력을 발휘했다.<사진 1> 불평등 관계는 6년 뒤 대원군이 임오군란을 일으켰을 때, 일본측이 교관 피살과 공사관 소실에 대한 책임을 조선 정부에 물어 압박을 가하면서 생겼다. 이때 최혜국 조관이 들어가고 관세 자주권도 잃게 되었다.
임오군란 후 일본은 제물포조약(1882), 세칙(稅則)에 관한 조약(1883) 그리고 갑신정변 후에는 한성조약(1886) 등의 체결을 요구했다. 이 조약들은 정식 조약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 제물포조약, 한성조약 등은 일본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여 사죄·사과의 뜻을 담은 조선 국왕의 국서(國書)로서 비준서에 대신했다.<사진 2>
1880년대 일본과의 조약 관계는 이처럼 어느 것도 요건을 미달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측이 요건 충족을 더 강하게 요구했다. 한성조약 체결 때 조선 대표(김홍집)가 위임장을 잊고 회담장에 오자 일본 대표(井上馨)는 이를 가져올 때까지 협상에 임하지 않았다. 일본의 이러한 ‘준법’ 태도는 한반도에 대한 청국의 절대적인 영향을 조금씩 밀어내는 외교 전략의 성과에 대한 법적 근거를 확실하게 해두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정부 또한 외국과 체결한 조약의 충실한 이행을 추구했다. 각 조약들의 내용을 분류한 편람 형식의 <약장합편(約章合編)>을 여러 차례 편찬 간행해 실무자들이 이용하도록 했다. 이는 약소국으로서 조약 관계를 통해 독립국으로서의 입지를 확보해가려는 ‘성실 외교’의 모습으로, 일본과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 ‘대조선 대일본 양국 맹약’. 군주의 비준서가 없는 강제 조약의 최초 사례이다.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② 청일전쟁 이후 달라지기 시작한 일본의 태도
일본은 1880년대 후반에 징병제를 확대 시행하면서 국가 예산의 7할을 군비 확장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청국과 결전을 벌여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포석이었다. 1894년 6월 초, 동학 농민군 진압을 구실로 청·일 양국의 군대가 조선에 동시 출병했다. 청군이 동학 농민군의 활동지와 가까운 아산만에 상륙한 반면, 일본군 1개 여단 8천여 병력은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입했다. 농민군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조선의 내정 개혁을 촉구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는 명백한 내정 간섭이자 주권 위협의 사태였다. 이 난입에 대해 군주와 정부는 강력히 항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일본군은 7월23일 새벽 0시30분에 1개 대대를 경복궁에 무단 진입시켜 왕을 감금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이틀 뒤 충남 성환 근처에 있는 청군을 공격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은 1880년대 중·후반에 부산에서 서울,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설한 전신선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관리 총책인 조선 군주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경복궁 바로 앞에 있는 전신국을 장악했다. 첨단 통신 시설의 장악은 일본군이 승리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본측은 이 침략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친일 내각을 구성해 국왕 몰래 외부대신과 ‘잠정합동조관’ ‘대조선 대일본 동맹’이라는 조약들을 체결했다.
<사진 3> 이것들은 군사적 협조에 관한 것으로 국권에 저촉되는 것이 분명한데도 약식을 취해 군주가 개입하는 것을 막았다. 약식 조약으로 조선의 국권을 위협하는 사태는 이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왕비 살해라는 극악한 만행이 바로 뒤를 이었다.
일본 대본영(大本營)은 전쟁이 끝난 후 삼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내놓게 되자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만은 고수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전신선 관리를 위한 1개 대대 병력 잔류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조선 군주 고종은 완전 철수를 강하게 요구했다. 이에 대본영은 왕비를 살해하는 것으로 위협을 가했다. 이 만행은 대원군을 앞세워 새벽 4시까지 종결 지워 대원군이 한 것처럼 꾸며졌던 것인데, 시간 계획에 차질이 생겨 한 시간 반이나 늦게 동이 튼 뒤에 이루어지면서 일본인들이 주범이라는 것이 드러나 일본 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 러일전쟁과 동시에 강요된 ‘의정서’의 첫 장과 끝장. 앞부분에 위임 사실이 언급되고 마지막에 양국 대표의 서명 날인이 보인다. 비준서 없는 약식 조약이었다.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러일전쟁과 함께 벌어진 국권 탈취 사기극
왕비 살해의 만행이 국제 사회에 폭로된 뒤, 일본은 한반도에서 손을 빼고 유일한 전리품인 타이완에 대한 식민 체제 구축에 집중했다. 고종은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난 틈을 타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을 임시 거처로 삼고 국정 주도권을 회복해 대한제국을 출범시켰다. 청국이 패전으로 물러나고, 일본마저 움츠러든 상황은 대한제국에게 하나의 기회였다. 이때 미국 워싱턴D.C.를 모델로 한 서울 도시 개조 사업이 이루어져 서울 거리에 전차가 달렸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해 서북철도(서울~의주) 부설 공사가 시작되고, 지폐 발행을 위한 중앙은행 설립에 필요한 투자도 이들로부터 약속받았다.
영국이 1899년 금 본위제로 바꾼 뒤, 한국은 금광 개발에 많은 이점이 있어 유럽 자본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은 일본 공사가 본국 정부에 한국의 변화를 보고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고종 황제는 영세중립국을 목표로 중립국 벨기에의 외교관들로부터 자문을 받으면서 적십자사 등 각종 국제 기구 가입을 서둘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방치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타이완 식민지 체제 구축 중에 러시아와 전쟁을 하기 위한 군비 확장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군의 최선발대가 이번에도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입했다. 10년 전에 미수에 그친 한국의 보호국화가 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서울에 진입한 1개 사단 병력은 한국 주차군이라는 이름으로 상주하면서 조약 강제를 지원했다. 국권 관련 조약들은 시종 이 주차군의 무력 시위 아래 강요되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한국에 5개 조약을 강요하면서 국권을 하나씩 앗아갔다. ①의정서(1904. 2.23) ②제1차 일·한 협약(1904. 8.22) ③제2차 일·한 협약(을사조약, 1905. 11.17) ④일·한 협약(1907. 7.24) ⑤한국 병합 조약(1910. 8. 22, 29) 등이다. 이 조약들 가운데 한국 황제의 비준서를 갖춘 것은 하나도 없다. 국권 관련 사항을 국가 원수의 의사 표명인 비준서가 없이 약식으로 취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위법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강제로 이루어진 조약을 서구 열강에 알리는 과정에서 문서 변조 행위를 일삼았다.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①을 내놓았다. 한반도의 여러 곳을 군사 기지로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싫지만 제3조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구절이 들어 있어 부득이 이를 허용했다. 8월 하순에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 외교고문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의 ②를 내놓았다. 이 협정은 ‘제1차 일·한 협약’이라고 불리지만, 실은 각서(memorandum)로서 제시된 것이었다. 제3항에는 한국 정부가 타국과 외교 관계를 가지게 될 때는 사전에 도쿄의 일본 정부와 상의해야 한다는 외교 간섭 조항까지 들어 있었다.
▲ ‘제1차 일·한 협약’으로 불리는 각서. 제목도 없고 대표 위임에 관한 언급도 보이지 않는다.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사진 5>에서 보듯이 이 문건은 약식 조약에서도 반드시 밝히는 대표 선정과 위임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세 가지 요구 사항만 나열한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이 문서는 조약의 형식을 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어본이 없다. 일본어로 작성된 것이 일본 외교사료관에만 소장되어 있다.
▲ ‘제1차 일·한 협약’의 영어 번역본. 원문에 없는 제목(Agreement)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②를 협조국인 영국·미국 정부에 알리기 위해 영어번역본을 만들면서 머리에 ‘Agreement’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사진 6> (* 당시는 영어 번역본 작성이 필수가 아니었다) 각서에 불과한 것을 조약으로 둔갑시키려 한 것이다. 각서는 ‘약속’ 사항이 당사국 간의 문제에 그치는 반면, 조약은 약식이라도 제3국과의 외교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국, 미국 정부는 실제로 이 ‘Agreement’에 근거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배타적 지배권을 묵인하는 제2차 영·일 동맹,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국권 탈취를 노린 사기극이었다.
문서 변조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05년 9월에 러일전쟁을 종결짓는 강화회의가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렸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11월17일에 한국 정부에 대해 ③을 내놓았다.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조약이었다.
▲ 보호 조약인 ‘제2차 일·한 협약’ 첫 장과 끝장. 제목이 들어갈 첫 줄이 비어 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이 조약문에는 제목이 들어갈 첫 줄이 비어 있다.<사진 7> 한국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조약이 제목이 없는 부실 문서라면 누가 믿겠는가? 영어 번역본에는 이 빈자리가 ‘Convention’이라는 단어로 채워졌다.<사진 8> 이 단어는 Treaty와 함께 정식 조약에 사용되는, 특히 보호 조약에 많이 쓰이는 용어였다. 한국의 황제와 대신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생긴 하자를 감추기 위해 또 문서 변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 ‘제2차 일·한 협약’의 영어 번역본. 원문에 없는 제목(Convention)이 들어가 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미국·영국으로부터 7억 엔에 달하는 거액의 차관을 얻고 있었다. 부실 조약의 결함이 노출되면 ‘문명국’의 반열에서 떨어져나와 채무국으로서 겪을 고초가 더 클 것이 뻔했다. 저들은 사후에 이런 결함을 은폐하기 위해 조약의 이름에 제1차, 제2차라는 차수를 붙이기도 했다. ‘제2차 일·한 협약’을 둘러싼 일본의 범법 행위는 이것이 모두가 아니었다. 국왕과 대신들에 대한 군사적 위협에 고종 황제 협상 지시설 유포 등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황제의 서명까지 위조했다
이태진 교수 기고 ‘한일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가’ / ‘한일 의정서’와 달리 같은 필체·끈 사용
기사입력시간 [1076호] 2010.06.02 (수) | 이태진 |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
▲ 일본 황태자 마중 나가는 순종 황제 마차. ⓒ연합뉴스
올해는 한·일 병합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이후 36년간 치욕스러운 식민 통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식민 지배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한·일 양국에 깊은 앙금으로 남아 있다. 지난 5월11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 등 한·일 양국의 지식인 2백14명은 ‘한·일 병합 조약은 무효이다’라는 내용의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 가운데도 ‘왜 조약이 무효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시사저널>은 지난호에 이어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기고를 통해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지를 알아본다.
▲ ‘제2차 일한협약’(보호조약)의 한·일 양국어본 비교(왼쪽). 한국어본의 끈이 일본어본과 같은 청색이다. 일본어본은 ‘의정서’처럼 ‘재한국일본공사관’ 용지를 사용했지만, 한국어본은 ‘한국 외부’ 표시가 없는 적색 괘지이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① 보호조약 강제의 현장, 일본이 남긴 강제 증거
‘제2차 일한협약’(을사륵약)은 가장 중요한 주권인 외교권을 빼앗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측의 저항은 어느 때보다 컸고, 일본측의 강압도 가장 난폭했다. 일본은 총리대신을 네 번 지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보내 현장을 지휘하게 했다.
1905년 11월15일 이토가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이 자리에서 세 시간이 넘도록 쟁론이 벌어졌다. 일본의 요청을 들은 고종 황제는, 그렇다면 한국은 아프리카의 토인국이나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헝가리 신세가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절대로 이에 응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토는 외부대신에게 협상에 임하라고 지시해주기를 협박조로 거듭 말했지만, 황제는 이런 중대사는 정부에서도 절차가 있고 중추원과 일반 신민의 의견까지 들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거부했다. 이토는 전제국가에서 황제의 뜻 외에 다른 무슨 절차가 필요하냐고 폭언하면서 협상 지시를 거듭 촉구하고 물러났다.
대한제국의 ‘의정부회의 규정’(최종 규정, 1904년 3월4일자)에 따르면, 조약은 외부대신이 상대국의 제안을 접수해 의정부 회의에 회부해 의정(또는 참정)이 토론을 주재해 다수 의견으로 회의록을 작성해 황제에게 재가를 구하는 한편, 중추원에도 동의를 구하도록 되어 있었다. 11월16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겐죠(林權助)는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협상안을 제출했다. 고종 황제와 대신들은 곧 회동해 이 안건은 회의에 아예 회부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11월17일 아침부터 일본 공사는 한국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으로 초치해 제안을 수락할 것을 회유·압박했다. 대신들이 응하지 않자 하야시 공사는 황제와 직접 의논할 것을 제안하면서 황제의 거처인 중명전(重明殿)으로 이동했다. 황제와 대신들은 간담회 형식으로 다시 만나 계속 거부할 것을 다짐했다. 오후 6시께 하야시 공사는 이토 특사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 대사가 직접 나설 것을 요청했다. 이토는 종일 한국주차군 사령부(현 웨스틴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대한제국의 영빈관 대관정을 무단 점거해 사용)에서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쯔(長谷川好道)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는 이 전갈을 받고 하세가와와 함께 헌병들을 거느리고 중명전으로 갔다. 좁은 입구와 마당은 일본군 헌병들로 가득 차다시피 했다.
▲ ‘한국 병합 조약’의 한국측 전권위임장. 국새가 날인되어 있고 그 위에 순종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보인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이토는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했지만, 황제는 대사와는 더 할 얘기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토는 퇴궐하려는 한국 대신들을 불러 세워놓고 한 사람씩 심문조로 찬반 의견을 물었다. 이토는 반대 의견에 대해서도 엉뚱한 토를 달아 찬성으로 간주해 찬성자를 다수로 만들었다. 이완용이 조약의 시한을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라고 명시하고, ‘한국 황실의 안녕을 보장한다’라는 구절을 넣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전날 이토와 짠 각본이었다. 이토는 반대자는 참정(한규설)과 탁지대신(민영기) 두 사람뿐이라고 선언하면서 이완용의 제안을 반영해 조약문을 새로 쓰게 했다. 이즈음 통역관 마에마 교오사쿠로 해금 헌병들을 데리고 한국 외부에 가서 외부대신의 직인을 가져오게 했다. 새로 쓴 조약에 날인을 마쳤을 때는 11월18일 새벽 1시 30분께였다. 외교권 이양이라면 ‘조일 수호 조규’처럼 한국 황제의 비준서가 반드시 첨부되어야 하는데도 이 조약에는 외부대신 직인만 찍혀 있을 뿐이다.
일본측은 억지를 부리던 중에 결정적인 강제의 물증을 스스로 남기고 있는 것을 몰랐다. 한국측의 손으로 작성되고 철해져야 할 한국어본의 조약문이 일본공사관측에 의해 처리된 증거가 남겨졌다. 1년여 전의 ‘의정서’만 해도 조약문은 각기 외교 업무를 주관하는 양측의 기관이 주관해 처리되었다. 즉, 한국은 ‘韓國外部’, 일본은 ‘在韓國日本公使館’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용지를 사용하고, 각기 서로 다른 끈으로 그 문건들을 철해 교환했다.<사진 1> 한국측은 황색, 일본측은 청색의 끈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때는 일본어본은 ‘의정서’ 때와 같은 용지와 끈을 사용했지만, 한국어본은 기관명이 인쇄되지 않은 적색 괘지에 일본측이 사용한 청색 끈으로 철해져 있다.<사진 2> 이것은 일본공사관측이 한국어본까지 직접 챙겼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귀국 후 천황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내용까지 조작했다. 추밀원 비서실장(都築馨六)이 작성한 보고서의 초고(일본 국회 헌정 자료실 소장)에는 이토 특사가 한국 황제를 알현했을 때의 분위기를 ‘한국 황제는 이번 조약에 찬성하지 않아’라고 적었다. 그런데 ‘찬성하지 않아’의 구절 위에 흑색 선을 긋고 ‘찬성하지 않을 수 없어’라고 고치고 한국 황제가 처음부터 협조적으로 임한 것으로 내용을 바꾸었다. 이런 조작 후에 ‘황제 협상 지시’를 정론처럼 삼아 한국 정부의 <官報>에 이 조약을 ‘한일 협상 조약’으로 게재하게 하는 한편, 한·일 양측의 공식 기록들을 모두 이 각도에서 작성하도록 했다.
▲ (왼쪽) 이탈리아의 사진 잡지(1907년 8월4일자)의 표지 사진. ‘신황제’ 대역의 젊은 환관이 ‘구황제’ 대역 환관으로부터 양위를 받고 막 용상에 올라앉아 있다. 앞쪽에 일본 장교 복장의 인물이 보인다. (오른쪽) 순종 황제 이름자 서명 위조 상태. 하나여야 할 필체가 여섯 가지 정도 된다. 통감부 직원들이 각기 소관별로 위조 처리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② 고종 황제 퇴위 강제, 뒤이은 순종 황제 친필 서명 위조
고종 황제는 ‘제2차 일한협약’이 강제되자 곧바로 독일,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 수교국의 국가 원수들을 상대로 조약 무효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906년 1월 말에 외교권 실행 기구로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이토는 고종 황제가 1907년 6월에 비밀리에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3인을 파견하자, 이를 구실로 퇴위를 강제했다. 황제는 이를 거부했지만, 일본 정부는 7월20일에 환관 두 명을 신·구 황제의 대역으로 동원해 양위식을 거행했다.<사진 3>
이토는 7월24일에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통감이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직접 관여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한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퇴위 강제와 함께 추진된 것이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절차를 밟는 것이 될 수 없었다. 한국 황제가 퇴위를 거부하고 황태자가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전권 위임과 같은 절차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이 조약은 말미에 두 사람이 ‘각기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 조인한다’라고 밝히고 있지만, 신·구 황제 어느 쪽도 위임을 허락해준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이 조약은 통감이 나서 대한제국의 통치 체제를 통감부의 것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 ‘한국 병합 조약’ 전권위원들의 기명 날인 상태.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황제와 황태자는 이토의 강압에 오래 맞섰다. 8월2일에 통감부가 융희(隆熙)라는 새 연호를 공표했지만, 황태자는 나서지 않았다. 일본은 황태자의 이복동생인 10세의 영친왕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를 인질로 삼는 계략으로 황제를 압박했다. 일본의 황태자가 먼저 서울을 방문하는 것으로 계략이 가시화되자 고종 황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황제는 11월15일 종묘를 방문한 다음 경운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태자(순종)가 있는 창덕궁을 들렸다. 3일 뒤 황태자가 종묘를 찾고 선대왕들의 신위 앞에서 황제의 위에 오르겠다는 서고(誓告)를 올렸다.
이때 통감부는 다시 기묘한 계략을 부렸다. 황제의 서고문에 이름자를 친필로 기입하는 난을 만들었다. 새 황제가 ‘李拓’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여기에 써넣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황제의 결재 방식을 황제가 이름자를 직접 쓰는 친서(親署) 제도로 바꾸었다. 이 방식은 일본에서 명치유신 이래 해 오던 것이었다. 서고가 끝나자마자 통감부의 직원들은 서고문을 넘겨받아 이날부터 1910년 1월18일까지 2개월간 61건의 문서에 황제의 이름자 서명을 흉내 내어 안건들을 처리했다.<사진 4>
이 문건들은 대한제국의 정부 조직과 재판소, 감옥 제도 등을 통감부 감독 체제로 바꾸는 것들이었다. 공문서 위조 행위가 내정권 탈취에서도 대규모로 행해졌다.
▲ ‘한국 병합 조약’의 한국 황제 ‘칙유’(조선총독부 홍보용). 국새가 아닌 것이 찍히고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없다.
③ 병합 조약에 순종 황제는 서명하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후 무력 투쟁을 벌이는 의병들의 기세는 국내외에서 날로 높아갔다. 1909년 6월에 이토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통감 자리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10월에 일본의 만주 진출에 한몫하고자 하얼빈으로 갔다가 거기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본거를 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 안중근이 이끄는 특파대에 의해 처단되었다. 일본 군부는 이토가 통감에서 물러나기 직전에 한국 병합에 대해 이토도 찬성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본 군부는 하얼빈 사건 후 배후 조직에 대한 철저한 탐문 조사를 마치고 1910년 3월에 안중근을 극형에 처한 뒤, 6월에 ‘한국병합준비윈회’를 발족시켰다. 병합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검토하고 문건들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안중근 사건에 대한 조사를 주관한 육군대신 데라우찌 마사다케(寺內正毅)가 7월 하순 통감으로 부임해 병합 집행에 나섰다.
일본은 병합 조약만은 정식 조약의 요건을 다 갖추려고 했다. 준비위윈회는 한국측의 이름으로 낼 문건들도 모두 준비했다. 데라우찌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사전에 협조를 당부한 뒤, 8월22일에 위임장부터 내놓고 이것을 순종 황제에게 가져가서 서명과 날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황제는 이완용 외에 친일 분자 윤덕영, 민병석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시간 이상 버텼다. 그것은 침묵 시위였다. 창덕궁 낙선재에 갇힌 몸이 된 그에게는 이미 저항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 ‘大韓國璽’라고 새겨진 국새를 찍고 그 위에 자신의 이름자를 직접 썼다.<사진 5> 이완용은 이를 받아들고 남산 아래 통감 관저로 달려갔다. 데라우찌가 내놓은 조약 본문에 기명 날인했다.<사진 6> 그런데 데라우찌는 다시 각서 하나를 내놓았다. 병합의 사실을 알리는 양국 황제의 조칙을 언제든지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은 체결과 동시에 한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 비준 절차를 밟을 시간이 없으므로 병합을 알리는 조칙의 공포로 대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新韓民報) 1926년 7월18일자에 실린 순종 황제의 유조. ‘병합 인준은 일본이 제멋대로 한 것이요 내가 한 바가 아니다’라고 밝히고 “여러분들이여 노력해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라고 끝맺었다.
양국 황제들의 조칙은 8월29일에 반포되었다. 그런데 한국 황제의 조칙은 ‘칙유’로 이름이 바뀌고, 위임장과는 달리 국새가 아니라 ‘勅命之寶’라고 새겨진 어새가 찍혔다. 그 위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황제의 이름자 서명도 없다.<사진 7> 이 어새는 황제의 행정 결재용으로서 통감부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킬 때 빼앗아간 것이었다. 따라서 이 날인은 순종 황제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순종 황제는 1926년 4월26일에 운명하기 직전에 곁을 지키고 있던 조정구(趙鼎九)에게 유언을 구술로 남겼다. 자신은 나라를 내주는 조약의 조칙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구술 유언 조칙은 멀리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발행하던 신한민보에 실렸다.<사진 8> 이 진술은 ‘칙유’의 상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한국 병합 조약’만은 정식 조약의 구비 조건을 다 갖추려 했던 일본측의 계획과는 달리 비준서를 대신할 한국 황제의 조칙은 발부되지 않은 것이 되었다.
▲ ‘한국 병합 조약’의 한·일 양국어본 재질 비교. 앞표지, 첫 페이지 그리고 뒤표지(왼쪽부터).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일본측은 병합 조약에서도 결정적인 강제의 흔적을 남겼다. <사진 9>에서 보듯이 이 조약은 한·일 양국어본이 똑같은 용지에 똑같은 필체로 작성되고 똑같은 끈으로 묶여져 있다. 조약이 한쪽 의사로 강제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세계 조약사상 이런 예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종군기자 메켄지가 기록한 구한말 일제와의 사투
출처
http://waegu.blog.fc2.com/blog-entry-35.html
저자: 'F.A. Mckenzie'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으로 1869년 퀘벡에서 태어나 1931년 63세로 생을 마감한 언론인이며 저술가였다.
그는 1900년에서 1910년까지 런던의 '데일리 메일'의 기자였다.
39세의 나이로 런던 데일리지의 특파원으로 우리나라를 찾았던 멕켄지는 일제에 항거하고 있는 의병들을 저자가 직접 만나 글로 옮꼇으며, 당시 의병들이 어떤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 싸웠는지,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의병 사진'도 그가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F.A.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중에서 :
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이른 가을 더운 날이었다.
눈부신 햇빛이 시가가 내려다 뵈는 언덕위에 나부끼는 일장기를 쪼이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을 비추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시내와 재의 산더미 위를 걸었다.
나는 일찌기 이렇게 철저한 파괴를 본 적이 없었다.
1개월 전까지는 번잡하고 유복하던 촌락이 지금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기와 조각과 회색의 잿더미, 타다 남은 찌거기더미가 줄지어 있었다.
온전한 벽도, 한개의 대들보도 파손되지 않은 옹기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재를 파헤치면서 무언가 쓸만한 것을 찾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제천은 지도 위에서 사라졌다.
나는 산길을 따라 이천으로 가는 연도의 마을을 내려다 보았을 때 친구들이 한 말이 생각났다.
일본의 폭력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눈앞에 마을이 차례차례로 잿더미화한것을 보았다. 파괴는 모두가 완전했다.
단 하나의 집이나 벽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겨울준비를 위한 단지와 화로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폐허로 돌아와 재건에 나섰다.
나는 며칠 동안 이러한 정경이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불감증이 되었다. 그러나 폐허에 던져진 집없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돌연 연민의 정이 끓어 올랐다.
많은 한국인 노인들이 그런것처럼 존경받아야 할 위엄에 찬 노인들, 젖 떨어지지 않은 아이들을 가진 부인들, 건강한 남자들은 내가 본바로 판단하면 딴 사람들보다 깨끗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해질 무렵 저녁을 짓던 사동이 그릇을 떨어뜨리며 달려와서 소리쳤다.
"선생님, 의병이 나타났습니다. 여기 군인들이 왔어요."
순간 5,6명의 의병들이 뜰로 들어섰다.
나이는 18세에서 26세 사이였고 그 중 얼굴이 준수하고 훤칠한 한 청년은 구식 군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머지는 낡은 한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총을 들고 있었는데 하나도 성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 중 인솔자인 듯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들은 언제 전투를 했습니까?
오늘 아침에 저 아랫 마을에서 전투가 있었습니다. 일본군 4명을 사살했고, 우리측은 2명이 전사했고, 3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우리 의병들은 말할 수 없이 용감하지만 무기가 없습니다. 총은 낡아 쓸모가 없고 화약도 거의 떨어졌습니다. 당신은 원하면 아무 곳이나 다닐 수 있는 사람이니 우리에게 무기를 좀 사다 주십시오. 돈은 5천 달러건 1만 달러건 필요한 대로 드리겠습니다.
애석했지만 나는 이 요구를 거절 할 수 밖에 없었다. 종군 기자로서 어느 한 쪽에 이익을 제공하는 것은 기자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일본군으로부터 내가 본 의병들의 상황에 대해 정보를 요청 받았으나 그때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다음날 내가 가진 비상의약품으로 부상당한 의병들을 응급처치 해주고 마을을 떠났다. 한 아낙네가 다가와 "우리는 한 서양인이 우리의 참상을 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당신이 본 것을 세계에 전하여 우리 현실을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솔직히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보다는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한국을 돌아본 결과 내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본군은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비인도적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반면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It was their purpose to avoid as far as possible any publicity being given to the doings of the Righteous Army, and to represent them as mere bands of disorderly characters, preying on the population.
일본은 가능한 한 의병들의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고, 의병이 단순하게 양민을 약탈하는 난폭한 성격의 匪徒로 묘사하는게 목적이였다
In June, 1908, nearly two years afterwards, a high Japanese official, giving evidence at the trial of Mr. Bethell before a specially convened British court at Seoul, said that about 20,000 troops were then engaged in putting down the disturbances, and that about one-half of the country was in a condition of armed resistance.
그로부터 약 2년 후인 1908년 6월, 서울에서 특별히 열린 영국의 영사 재판에서 Bethell에 대한 재판에서 증언하던 한 일본인 고위 관리는 그 당시 약 2만 명이 의병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었고 전국의 약 절반이 무장 봉기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말했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BOK00003173276IN
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472520&page=2&b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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