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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March 9, 2015
the monument of King Jinheung in Silla (540-575)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北漢山 眞興王 巡狩碑址)
Bukhansansillajinheungwangsunsubi (Monument commemorating the border inspection Mt.Bukhansan by King Jinheung) is one of the monuments built in commemoration of the tours of King Jinheung of Silla (540-575) in Silla Era. The King visited this area after the Han River was incorporated into silla territory. Originally, it was located at Bibong Peak on Mt.Bukhansan, but now it is preserved at an exhibition hall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The monuments are made from polished stones and it stood on a natural rock in a two-story pedestal. Because upper parts of monuments are missing, the remaining monuments are 1.54 meter high and 0.69 meter width. There is an article, which has 12 lines and each line has 32 letters in Haeseoche (the square style of Chinese handwriting). The written contents contain why and how the King visited the area, and most of them are acclaiming King Jinheung's expansion of territory. Also the inscription included King’s achievements.
Its building date is not clear because the era name carved on the monument inscription is worn out. It is assumed that it might have been built between 22nd year (561) of King Jinheung and 29th year (568) of King Jinheung when he founded Hwangchoryeongbi Monument or later than it. It is discovered and decoded in 16th year (1816) of King Sunjo in Joseon Era by Kim Jeonghui who was best calligraphers in Joseon dynasty. The historical fact that carved on the monuments are important material in studying the period of the Three States.
http://211.252.141.88/site/main/index004
新羅真興王巡狩碑と拓本
新羅555年(真興王16)、北漢山飛峰、高155.5cm、国宝 3号
黄草嶺 新羅真興王巡狩碑(榻本)
新羅568年
新羅・真興王が北漢山を巡狩の後、立てた碑(北漢山新羅真興王巡狩碑)
番号新收 018242-000
時代新羅 真興王16年(555年)頃
出土址(詳細) 北漢山
規模高さ154.0cm、幅69.0cm
素材石
6世紀中頃、新羅は対外的に勢力を大きく拡大した。真興王(チンフンワン、在位540-576)は新しく確保した領土を視察し、多くの場所に碑を建てたが、北漢山(プッカンサン)新羅真興王巡狩碑はその一つである。現在真興王巡狩碑は4基が残っている。この碑は555年頃、現在のソウル鍾路区・旧基洞・北漢山・碑峰頂上に建てられたが、当時の新羅が三国の要衝だった漢江流域まで治めていたことが分かる。
巡狩碑は長い歴史の間忘れ去れていたが、1816年、書家であり金石学者の金正喜(キム・ジョンヒ、1786-1856)によって偶然発見され、判読されたことで歴史の表舞台に再び登場した。
碑身の磨耗が激しいが、判読できる字から総合してみると、真興王が漢江流域を開拓し、漢城を巡幸したことを記念するという内容、王に随行した臣下の名前、碑が建てられた背景と保存に関する内容が刻まれていることが分かる。
1972年、保存のために国立中央博物館に移転された。
1962年 12月 20日国宝第3号に指定された。碑身の高さ 1.54m,幅 0.69m,厚さ 0.16mだ。
破損が憂慮されて現在は国立中央博物観で所蔵している。
今まで発見された 4基の真興王巡幸碑の中で一つで, 花崗巖になっているこの碑石の形態は他の碑とは違い直四角形に加工された石材を使って自然岩盤の上に二段の階を作って建てた。碑身の上端に一段の燭を作ったことで見て元々は蓋石を覆ったことに推定され。
碑文は碑身を研磨した後正面に 12行を刻んだが上部はひどく摩滅されたし第12行は判読が不可能であり,その他にも字画が明らかではない所が多い。したがって 1行の字数も確かではないが 30字が過ぎるように見える。字体は六朝式の楷書で字径は 3cmだ。 字の意味は3碑の碑文で推し測るが前半部は純粋の事蹟に関することで,後半は遂行した人名を列記したようだ。
碑石側面には 1816年(順調 16)とその翌年に阮堂金正喜が実査来読した事実が '此新羅真興大王巡狩之碑丙子七月金 正喜金敬淵来読,己未八月三十日李済鉉竜仁人,丁丑六月八日金正喜趙寅永同来審定 残字 六十八字'に記録されているし,以後で世に知られ始めた。
真興王 16年王が北漢山に巡幸事実があるがこれをすなわち碑の建立連帯路の表示は難しくて,残っている字の内容を検討すれば 568年(真興王 29) 以後真興王生存時の事で推定される。
新羅・真興王が北漢山を巡狩の後、立てた碑(北漢山新羅真興王巡狩碑)
番号新收 018242-000
時代新羅 真興王16年(555年)頃
出土址(詳細) 北漢山
規模高さ154.0cm、幅69.0cm
素材石
http://article.joins.com/news/blognews/article.asp?listid=13475105&cat=
국보 제3호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조인스 블로그] 입력 2014-08-04
문화재청 자료
- 공식명칭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한자명칭 :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 지정일 1962.12.20
- 테마 기록유산, 서각류, 금석각류, 비
- 시대 신라시대
- 주소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內)
문화재청 설명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眞興王 巡狩碑 (진흥왕 순수비)
신라 진흥왕이 새로 넓힌 영토를 직접 돌아보고 세운 비석을 말한다.
'巡狩(순수)'란 천자가 제후의 封地(봉지)를 직접 순회하면서 현지의 통치상황을 보고받는 의례로 巡行(순행)이라고도 하며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을 순수비라고 하는데, 진흥왕순수비의 비문 속에 나타나는 巡狩管境(순수관경)이란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신라 진흥왕은 가야 소국의 완전병합, 한강 유역의 확보, 함경도 해안지방 진출 등 활발한 대외정복사업을 수행하여 광범한 지역을 새로 영토에 편입한 뒤 拓境(척경)과 순수를 기념하여 비석을 세웠다.
북한산비는 신라의 한강 하류 진출을 밝혀 주는 비문이며, 561년에 세워진 창녕비는 신라의 대가야 정복 사실을 증명하는 순수비, 568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황초령비, 마운령비는 신라의 함흥지방 진출을 밝혀 주는 비문으로 알려져있다.
현재 남아있는 진흥왕 순수비는 이번에 소개하는 북한산비와 함께 창녕비(국보 제33호), 그리고 북한지역에 위치한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모두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었음)가 있으며, 그동안 고려 태조 왕건이나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졌던 북한산 순수비는 조선후기 금석학자 추사 김정희에 의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이 밝혀졌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북한산 순수비 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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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비의 글자를 판독하여 적어 놓았다. 윗부분 일부는 마모가 심하여 읽을수 없고, 군데군데 글자판독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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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면의 3줄 새김중 오른쪽에는 병자년(1816년) 7월 김정희(추사), 김경연이 와서 비문을 읽었다. 라고 씌어있고 왼쪽에는 정축년(1817년) 김정희, 조인영이 함께 남아있는 글자 68자를 심정하였다고 새겼다. 가운데 줄에는 기미년(1859년) 8월 20일 용인사람 이제현이라고 새겨져있는데 추사 김정희의 판독과는 무관한 낙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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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에는 6.25전쟁중 상흔으로 보이는 총탄자국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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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비봉에는 문화재청에서 모의 비석을 세웠다. 진흥왕 순수비가 있어 비봉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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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yellow.kr/article.jsp?no=220032026704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 국보 제3호
※ 황성열의 세계 - 문화재 : http://yellow.kr/nt.jsp
※ 국보 제3호 /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 1962년 12월 20일 지정 /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시대 작품이다.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 신라 진흥황 척경비(국보 33호)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순수(巡狩)'란 천자가 제후의 봉지(封地)를 직접 순회하면서 현지의 통치상황을 보고받는 의례로 순행(巡行)이라고도 한다. 순수비란 순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을 말하는데, 진흥왕순수비의 비문 속에 나타나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4기(基)의 진흥왕 순수비 중 하나로, 화강암으로 된 이 비석의 형태는 다른 비와는 달리 직사각형으로 가공된 석재를 사용하여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비신의 상단(上端)에 1단의 촉을 만든 것으로 보아 원래는 개석(蓋石)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眞興王巡狩碑興太王及衆臣等巡狩管境之時記□分甲兵之□□□年□□□□覇主設□賞□所用高祀□□□□□□相戰之時新羅太王德不□兵故□□□□□强建文得人民□□□□□□□□□□□□□□□□□□□□如有忠信精誠□□□□□□徙可加賞舜物以□□心引□□衆路過□城陟□□見道人□居石窟□□□□刻石誌辭□□尺干內夫智一尺干沙喙□□智近干南川軍主沙夫智及干未智大奈末□□□沙喙屈丁次奈天指□□幽則□□□□□劫初立所造非□巡守見□□□□□刊石□□□記我万代名
글뜻은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의 비문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전반부는 순수의 사적(事蹟)에 관한 것이고, 후반은 수행한 인명(人名)을 열기(列記)한 듯하다.
이 비의 첫머리에 ‘진흥태왕(眞興太王)’이 나타나는데, 이전의 왕인 지증왕과 법흥왕은 왕의 명칭으로 마립간, 매금왕, 태왕 등으로 일컬었으나, 진흥왕은 명실공히 자신을 태왕으로 칭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에서 사용한 태왕을 본떠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신라의 달라진 위상을 알 수 있는 왕호이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이 비문에 보이고 있다. 이 비에는 ‘사돌부 출신인 무력지가 잡간’이라고 하는데, 잡간은 신라 17관등 중에서 3등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김무력은 한강유역으로 확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장군으로 550년 무렵에는 5등급인 아간지였으나 561년 이후에는 잡간으로 승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탁본(北漢山 眞興王 巡狩碑 拓本) -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가 옆면에 새긴 글자가 보인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來讀 : 이것은 신라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1816년) 7월 김정희, 김경연이 와서 비문을 읽었다.
己未八月二十日 李濟鉉 龍仁人 : 기미년(1859년) 8월 20일 용인사람 이제현
丁丑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同來 審定殘字六十八字 : 정축년(1817년)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이 함께 남아있는 글자 68자를 심정하였다.
비의 뒤쪽에는 무수한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 북한산 비봉(碑峰, 560m)에 있을때의 모습. 순수비가 있던 자리는 1972년 사적 제228호로 지정되었고, 2006년 복제비가 세워졌다.
- 북한산 비봉의 순수비를 경복궁 근정전으로 옮길때 (1972년 8월 16일 촬영)
이 비 부근에 승가사가 있고 조선 태조 때의 국사였던 무학(無學)의 탑비가 있어 종래 ‘무학의 비’ 또는 ‘도선(道詵)의 비’로 알려져 왔으나, 1816년(순조 16) 7월에 김정희(金正喜)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이 비석을 조사하고, 다시 이듬 해 6월 조인영(趙寅永)과 같이 비문을 조사하여 68자를 심정(審定), 비로소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비문에는 정확한 연대를 알려주는 간지나 연호가 없어 여러 학설이 있다. 대체적으로 진흥왕 16년(555)이나 진흥왕 29년(568) 무렵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확정되지는 않았다.
전자는 진흥왕이 16년(555)에 북한산을 순수하였다는『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이 때에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고 후자는 북한산비의 내용이 568년에 세워진 마운령비, 황초령비와 비슷한 점과 비문 중의 ‘남천군주(南川軍主)’를 근거로 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 보이는 “진흥왕 29년(568) 10월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했다”는 내용과 연결하여 이 비는 568년 10월 이후에 세워졌다고 본다.
- 진흥왕 순수비
http://younghwan12.tistory.com/m/post/1987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진흥왕의 영토확장,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younghwan | 2010/01/06 16:21 |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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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은 고구려.백제.가야를 공격하여 영토를 함경도 지역가지 확장시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단양적성 등지에 비를 세웠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를 옮겨와 전시해 놓고 있다. 또한 법흥왕때에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질서를 세웠는데 그 흔적들이 영일 냉수리 신라비나 울진 봉평 신라비에 남아 있다. 북한산 비봉 진흥왕 순수비를 비롯하여 황초령 순수비 등을 보존하기 위해 추사 김정희 선생의 많은 노력이 담겨 있고 그 흔적으로 북한지역 황초령 비각에 그의 글씨가 현판에 적혀 있다고 한다.
이미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중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이미지 북한산 비봉. 진흥왕 순수비가 있던 자리에는 복제품이 서 있다.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
진흥왕은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단양적성 등지에 영토확장을 기념하는 비를 세웠는데 신라영역으로 새로 편입된 지역을 순수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에 충성한 자들을 포상하며, 군신이 함께 축하한 것을 기념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미지 황초령비 보호 비각에는 김정희가 쓴 '진흥북수고경'이라는 현판이 남아 있는데, '진흥왕이 북쪽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한 옛 영토'라는 뜻이다.
황초령비는 진흥왕이 함흥지역을 순수하고 나서 군신이 모여 축하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로 마운령비와 함께 진흥왕대 여준다. 신라의 동북쪽 영토가 함흥지역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추사 김정희는 우리나라 금석문 자료의 연구와 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북한산순수비'를 발견하였고, '황초령순수비' 등의 보호에도 영향을 끼쳤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이미지 이미지 단양적성비. 비석은 남한강변 단양 적성에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이미지 영일 냉수리신라비 (복제품).
율령은 법흥왕 7년에 반포하였으며 신라 사회 전반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와 더불어 행정과 관련된 기록문화도 발달하였는데, '영일 냉수리 신라비'나 울진 봉평 신라비'에는 율령과 관련된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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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신라시대 목간(복제품). 경주 월성을 중심으로 한 왕경이나 지방 중심지에서는 기록이 목간에 남아 있다.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 신라의 영토확장과 함께 신라의 토기가 전국적으로 퍼져 났다고 한다.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 신라 수막새 기와.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 건축기술이 뒤떨어졌으나 법흥왕 이후 수많은 사찰이 건설되면서 신라 나름대로의 건축기술이 정립되고 기술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첨부된 장소는 비봉, 진흥왕 순수비이고,
주소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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