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ne 5, 2012

the portraits of disappeared the last descendants of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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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호 칼럼 <13> 사라진 조선왕조 마지막 후손들의 초상

편집자註] 다섯 세기를 이어온 조선왕조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종말을 고했습니다.


조선왕조 말기, 대한제국이 선포됨으로써 마지막 군주였던 고종과 순종은 '황제'로 등극했지만 이미 왕실은 사실상의 권력을 상실한 뒤였고 한-일 합방 이후 왕실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순탄치 않은 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해방이 되고난 뒤, 새로 독립된 이 나라에 새 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도 왕실은 철저하게 소외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왕가의 마지막 후손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향기칼럼에서는 굴곡으로 점철된 이 나라의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며 온갖 질곡을 감내해야 했던 조선왕가 마지막 후손들의 모습을 만나 봅니다.



무자년 신년아침, 지난날 일본 도쿄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한 책자 <황실황족성감(皇室皇族聖鑑)> (명치, 대정, 소화 전3권/소화11년 발행, 오른쪽 사진)에 나타나 있는 이씨(李氏)왕조 계보내용을 토대로 사진과 함께 소개합니다.


고종, 순종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마감한 최후의 임금으로 평소 일반대중에겐 역사상으로만 존재했던 왕으로 지나쳐 왔으나 한편 생각해보면 마지막 왕족의 뿌리에 관한 역사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제에 의해 굴욕을 당한 슬픈 역사를 지닌 최후의 조선황실가족. 대한제국 멸망을 위해 일제로부터 귀족칭호와 막대한 토지, 돈 등을 하사 받고 나라를 넘기는데 앞장선 망국, 매국노 조선인들에게 새삼 분노가 치솟습니다.


역사기록에는 조중응(趙重應), 이완용(李完用), 윤덕영(尹德榮), 송병준(宋秉畯), 고영희(高永喜), 이지용(李址鎔), 박제순(朴齊純), 이병무(李秉武), 이재곤(李載崑), 임선준(任善準), 이근택(李根澤), 이하영(李夏榮) 등이 가장 용서받지 못할 매국행위의 선두주자요 핵심인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마지막 왕인 고종, 순종을 비롯한 황족 사진자료 및 설명입니다.



* 이 사진은 근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자료로, 1907년 일본 황태자(나중 일본 대정천황이 됨)가 방한(訪韓)해 경복궁 경회루에서 촬영한 기념사진입니다.


앞줄 왼쪽부터 아리스가와궁 전하, 한국 황태자(당시 10세의 이은), 일본 황태자(요시히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이 있고, 바로 뒷줄에는 왼쪽부터 이병무, 이완용 총리대신, 도고 대장, 카츠라 대장, 송병준, 조중응의 모습이 보입니다.



* 역시 일본 황태자 방한당시(1907년) 창덕궁 비원에서 찍은 사진.(사진 촬영지와 관련해 창덕궁이 아닌, 남산 왜성대 총독관저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모두 훈장 달린 황실군복차림으로 앞줄 왼쪽부터 아리스가와궁 전하, 순종, 일본 황태자, 이왕(이은)전하입니다. 韓-日 양국 황실끼리 촬영한 사진입니다. 뒷 줄 왼쪽 맨끝에 서 있는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입니다.

- 1907년 10월 19일 촬영



* 조선 마지막 왕조 계보

한일합방 후 일본에서 발간한 조선왕조 계보입니다. 일본에 합병된 탓에 '황제'가 '왕'으로, '폐하'가 '전하'로, '황태자'가 '왕세자'로 칭호의 격이 낮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朝鮮最後の王朝の血統
日韓併合後、日本で出版された朝鮮王朝の系譜です。日本に併合されたせいで"皇帝"が"王"で、 "陛下"が"殿下"で、 "皇太子"が"王子"と称号の格が低くなったことがわかります。


* Pedigree of the last dynasty of Korea
the genealogy of Joseon Dynasty,published in Japan after the annexation of Korea.
because of colonized by japan, the title was low down as from "Emperor" to "king","Your Majesty" to "Your Royal Highness",   "crown prince" to "Prince"




* 고종황제 (1852~1919)


조선26대 임금. 대한제국의 광무황제에 오른 후 1907년 일본의 압력(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왕위를 순종에게 양위했습니다.



* 명성황후(1851~1895)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 당하기 1년전에 일본 신양당 출판사에서 인쇄한 석판 초상화입니다.


고종은 정비인 명성황후(민자영)로부터 4남 1녀를 두었으며, 모두 8명의 부인으로부터 9남 4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 중 성년으로 성장한 이들은 순종(1874~1926), 의친왕 이강(1877~1955), 영친왕 이은(1897~1970)과 덕혜옹주(1912~1989) 등 4명뿐이었습니다.



* 고종과 엄비


고종은 모두 여덟 명의 부인을 두었습니다. 부인들의 이름은 귀비 엄씨(영친왕 모), 귀인 이씨, 귀인 장씨(의친왕 모), 소의 이씨, 귀인 정씨(이 우), 귀인 양씨(덕혜옹주 모) 등입니다.

그 가운데 궁녀신분이었던 엄비는 명성황후 사망 뒤 고종의 총애를 입어 영친왕(이은)을 낳고 나중 국모의 역할을 수행하며 '순헌황귀비'시호까지 받았습니다. 엄비는 진명, 숙명여학교 설립자입니다.



* 순종황제(1874~1926, 왼쪽 사진은 황실 제복 차림)


순종황제는 고종의 3남으로 왕위를 이었으나 워낙 심신이 병약해 두 왕비(민씨와 윤씨)사이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고종의 7남이었던 이은(李垠, 영친왕)이 황세자로 책봉됐습니다.



* 순종 비 (윤씨부인, 1894~1966년)


마지막 국모였던 순정황후 윤씨. 13세 때 순종의 비가 되었습니다. 한일합방 당시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숙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다고 전해집니다.



* 영친왕(이은, 1897~1970), 부인 이방자 여사



* 이구(1931~2005)

고종의 7남인 이은(李垠, 영친왕)은 11세 때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으며 일본인 부인 이방자 여사 사이에 아들 이구(李玖, 1931~2005)를 두었습니다.



* 이강(1877~1955, 의친왕)


고종의 5남이던 이강(李堈, 의친왕)은 영친왕 생모인 엄비의 견제로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견제를 당하고 6.25 전쟁 당시엔 제대로 식생활을 못해 55년 영양실조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 이강(李堈)공비 김수덕 여사(1878~1964년)


자신은 자손을 못 보았으나 이강 공 슬하 21명의 자녀들을 감싸고 돌봐줘 그들로부터 '큰어머니'로 불렸다고 합니다.



* 이강(의친왕)의 장남 이건(李鍵) 공자(1909~1990)


이강 공자는 모두 22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이건(李鍵)공자(1909~1990)입니다. 이건은 1947년 아예 일본에 귀화해서 한국과 인연을 끊었습니다. '비둘기 집'을 부른 가수 이석은 이강의 11번째입니다.



* 이건 공자의 장남 이충 공자(의친왕의 손자)



* 이우 공자(의친왕의 차남)



* 이우 공자 부부


이강의 2남 이우(李鍝, 1912~1945)는 조선왕실인들 가운데 민족의식이 가장 강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일본 육군중좌(중령)였으나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한국인 박찬주 여사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해방을 바로 앞둔 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 덕혜옹주(1912~1989)


고종이 환갑 때 낳은 고명딸입니다. 23세때 일본에 가서 공부했고 일본인 백작과 결혼했습니다. 62년 일본에서 고국 땅으로 돌아와 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종은 덕혜옹주를 일제에 빼앗기지 않으려 황실시종의 조카와 정략결혼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 받아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덕혜옹주를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갔습니다. 덕혜옹주는 몽유병, 치매 등의 질환을 앓았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왕조 마지막 왕손들의 순탄치 못했던 일대기는 순탄치 못했던 이 나라 근대 역사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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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댓글 7개 / 댓글 작성시 30포인트 적립
지유석 해방 후 이 나라에 새 정부 수립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조선왕조를 다시 복위시키는 방안도 심심찮게 거론됐다고 합니다. 어쩌면 현실적인 방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한일합방 당시 이 나라는 왕정체제였으니까요. 하지만 이승만은 행여 왕정복고가 유력한 방안으로 부상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왕족들을 철저하게 소외시켰습니다. 이런 탓에 마지막 왕손들은 해방되어서도 기구한 운명을 짊어져야 했지요.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신해혁명으로 폐위되고 한량으로 지내다가 일제에 의해 만주국 황제로 등극하더니 중-일전쟁 후엔 인민재판에 회부돼 반동으로 몰렸다가 결국 정원사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지요.

우리네 마지막 왕손들도 기구하기는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요? 아마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만큼이나 기구한 스토리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08-01-04 14:41

포아풀 참 슬픈 역사네요. 그리고 기구한 운명이네요.
1989년 대한극장에서 '마지막 황제'를 봤지요.
그 이후로 심심찮게 보던 영화와의 내용과 어쩌면 이리 닮아 있을까요.
국적만 다를 뿐...
08-01-04 22:23

이정훈 어디를 보나 마지막 황실은 비참한게 역사의 한장인가 봅니다. 변화의 시각으로 새로운 장을 열수 있었는데, 조선왕조의 운명인지, 그렇지 못하고 심히 쓸쓸했음은 참 안타깝네요.. 그래도 조선의 역사는 참으로 위대했음으로 길이 보존되길..
08-01-08 08:16

icowkim@ha… 나서지 않고 묵묵히 본연의 임무에 무섭도록 충실한 귀하 같은 분이 계셔서 역사적 가치 의미로서의 좋은 자료 잘 보았읍니다.
두번째 사진에 앞줄 맨 왼쪽이 아리스가와노미야전하이고 세번째가 왕태자(대정왕)인데 바뀌었네요. 귀한자료 다시 한 번 확인하셔서 혹시 정정이 필요 하시면...

우스게 소리로 첫장의 일왕태자 사진을 보면 뭔가 조금 띨빡하게 보이지 않나요?
후일 대정왕은 공식석상에서 읽고난 원고를 둘둘 말아서 마치 망원경을 보듯(듣)이
참석자를 쳐다보는 기행을 행하고 해서 일왕실의 근친교배로 인한 이상현상을 나타냈고, 젊은 나이에 일찍 꽥 했을 겁니다.

08-01-08 15:14

송광호 icowkim 님, 지적해주신 대로 입니다. 자료를 확인하니 사진이름이 바뀌었네요.
대정 황태자는 맨 왼쪽이 아니라 3번째입니다. 깊이 감사 드립니다.

08-01-09 09:59

최훈희 우리의역사의 지난세월의 사진을보니 마음이 슬프네요. 먼저가신 왕실의 그분들의 마음은 어땔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감사합니다.
08-01-10 12:44

민수 일본 황족의 이름을 . 아리스가와노미야 왕. 이거나.. 왕세손이거나.. 그런게 아니고 왜 "전하"를 쓰는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전하라는 것은.. 보통 신하가 왕을 올려부를때 하는 말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하니 보기 좋지 않네요.
10-06-1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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