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명성왕후 사진은 없을까?
뉴스 스크랩 2006/07/27 10:41 ysku
[여적] 명성황후 사진
1990년 국정 중등 국사교과서에 명성황후라고 소개된 사진이 실린 적이 있다. 사진은 1894년 ‘드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이라는 잡지 11월 호에 실렸던 것으로 한동안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기사에 ‘조선 왕비의 상궁’이라는 내용이 명확히 나타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7년 후 교과서에서 빠졌다. 이후에도 간혹 명성황후임을 주장하는 사진이 등장했으나 아직 진위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영국의 한 사진 수집가가 공개한 사진도 독일어로 ‘시해된 왕비’(Die Ermodete Konigin)라고 쓰여 있긴 하지만 결국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명성황후의 사진 찾기는 사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있어 왔다. 역사학자 문일평 선생(1888~1939)의 호암문집을 보면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기 위해 당시까지 살아있던 황후의 상궁들을 찾아가 사진의 진위를 확인한 결과 한결같이 부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편인 고종이나 다른 비(妃)들의 사진이나 초상화는 있는 데 유독 명성황후의 것만 없을까. 우선 황후의 노출 및 대인기피증이 거론된다. 그녀가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벌인 목숨을 건 정치싸움 때문에 암살을 우려해 노출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녀가 “쾌활했다”는 언더우드 부인의 증언 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약하다. 또 다른 설은 사진이 영혼을 빼앗아 간다는 속설 때문에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이 역시 서양문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기록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세 번째 설은 일본이 1895년 명성황후 시해 후 사진을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가장 그럴 듯해 보이나 확실치는 않다.
명성황후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존재다. 유교이념이 지배하던 조선조에서 왕비로서는 사실상 유일하게 정치판을 좌지우지했던 정치적 풍운아였다. 그만큼 우리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모습을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할 지 모른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정치가로서 그녀가 우리 역사에 미친 공과를 따져보는 작업은 등한시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승철 논설위원〉
http://whajoongkwangya.com/zbxe/diaspora/5940
[화중광야 - 회복되는 韓民族의 디아스포라] 이 세계에서 어떤 나라가 931번의
침략을 받고도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
記錄이 없다하여서 모든 과거의 흔적(痕跡)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글/ 정재선 목회자
'우리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당한 명성황후의 장례식 절차를 기록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가 일본 황실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반환운동을 펼치고 있다.' <혜문 스님지음, '조선을 죽이다' 중에서>
'명성황후 살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이라면, 무엇 때문에 일제가 남의 나라 국모 장례식 절차를 수록한 도감을 가져 갔는가? 말이 앞뒤가 일치하지 않는다. 필시 '명성태황후' 살해 수일 전에 찍은 '진짜 사진'(御眞)도 이 세상 어디인가에 보관중이리라. (문일평 지음, '호암전집' 중에서)...그러니 때가 이르매, 반드시 밝혀지리라...
[명성태황후 진짜 사진 ㅡ 한민족의 자존(自尊)도 없는가? ㅡ 살해당한지 115년 오늘날 우리 한민족이 나서서 찾아야 할 때가 이르지 않았나?]
잊혀질 만하면 불거져 나오는 명성태황후(1851.11.17-1895.10.8)의 '진짜 사진설'(御眞說?)...서양인들의 기록들만으로는 진품 확인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동일 사진을 놓고도 갖가지 다른 명칭이 붙어다니니...'황후'인가 '궁녀'인가 반드시 진위를 밝혀내야 하지 않겠는가...2010년 5월 27일, 그 동안 가체 머리에 소매가 좁은 저고리를 입고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앉아 있는 조선시대 여인의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명성태황후'라고 명기한 1890년대 출판물이 처음으로 발견됐다고 전한다. <자세히보기>. 그러나 아마도 명성태황후의 사진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노력한 역사학자는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1888-1939)일 것이다.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1888-1939). 명성태황후의 '진짜 사진'(御眞)을 밝혀내려했던 최초의 역사학자 겸 독립운동가였다.
1888년(고종 25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천두(天斗)의 아들로 태어나다. 사학자·언론인.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호암(湖巖)이다.
1905년 유학을 떠나 일본의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서 이광수(李光洙)와 같이 공부하였다. 1908년 귀국하여 평양의 대성(大成), 의주의 양실(養實),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광문회(光文會)에 관여하였다.
1911년 정치학연구를 목적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였다. 이때 안재홍(安在鴻)·김성수(金性洙)·장덕수(張德秀)·윤홍섭(尹弘燮) 등과 교우하였다.
1912년 중국으로 건너가 주로 상해(上海)의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생활하였다. 중국신문사 대공화보(大共和報)에 근무하면서 논설을 쓰기도 하였고, 홍명희(洪命熹)·조소앙(趙素昻)·정인보(鄭寅普)와 동거, 교학하였으며,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와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다. 이 시기에 민중·언론·혁명아·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중국에서 귀국한 뒤 중동(中東)·중앙(中央)·배재(培材)·송도(松都) 등의 학교에서 교육활동을 하는 한편, '조선일보'·'중외일보 中外日報'·'개벽' 등에 글을 쓰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나갔다.
1925년 역사연구를 위하여 일본유학을 떠났으나 1년도 되지 않아 귀국하였다. 1933년 '조선일보'의 편집고문이 되면서부터 언론을 통한 역사의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민족문화 또는 민족정신을 찾아 이를 널리 보급하려 하였던 노력은 1939년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문일평의 역사연구는 주로 1930년대에 이루어졌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정신적·내면적 침략이 갈수록 심화되어 국학연구가 그 밑바탕에서부터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연구를 통하여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역사적 사실'의 근원적 연구보다는 '역사성' 곧 '역사의 진실'의 부여에 관심을 두었으며, 역사적 지식의 정리와 의미의 보급에 더 힘을 쏟았다. 저서에 '조선사화'(朝鮮史話/1945) '호암전집' '한국의 문화'(1969) 등이 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필자가 이렇게까지 힘을 들여가면서 명성태황후의 '진짜 사진'(御眞/초상화 포함)을 추적하는데는 이런 이유에서이다.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보면, 명성태황후의 '진짜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 속에서는 위 문일평 역사학자의 '호암전집'에서 보듯이, 이 세상 어디인가에 존재해 있는 그 '진짜 사진'이 속히 세상에 나타내 보여지기만을 바라는 갈급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남편인 고종이나 다른 비(妃)들의 사진이나 초상화는 있는데 유독 명성태황후의 것만 없을까? 명성태황후는 격동기 한국 역사의 주인공이다. 또 사진 촬영이 가능했던 시기에 생존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다른 어느 역사적 인물보다 사진의 존재 여부에 대한 관심이 높다.
만약 '진짜 사진'이 실재한다면, 당시 왕비의 옷차림 등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실제 문일평 선생의 글을 읽으면 사진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진위를 둘러싸고 설이 분분한 것도, 따지고 보면 명성태황후 '진짜 사진'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필자가 지금까지 알아 본 바로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인 것으로 나타난다:
①노출 및 대인기피증설 ㅡ 명성태황후가 시아버지인 흥선대원왕(대원군)과 벌인 목숨을 건 정치싸움 때문에 암살을 우려해 노출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명성태황후가 '쾌활했다'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호튼(Horton)의 증언 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약하다.
②사진이 영혼을 빼앗아 간다는 속설 ㅡ 이 역시 명성태황후가 서양문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기록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③일본이 불태웠다는 설 ㅡ 일본이 1895년 명성태황후 살해 후 사진을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가장 그럴 듯해 보이나 확실치는 않다.
그런데 두 서양의 여자가 묘사한 '명성태황후'의 모습은 기이하리만큼 일치한다. 하나는 앞서 말한 명성태황후의 시의(侍醫)였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내 릴리어스 홀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1851-1921)(한국명/好敦)의 기록이다. 미국 북장로교의 의료선교사로서 한국에 파송받았다. 1888년 3월에 독신으로서 한국에 도착한 그 여자는 '제중원'의 '부녀과장'으로서 원장 '헤론'(John Heron)을 돕고 있었다. 그 해 7월 어느 날, 그 여자는 명성태황후를 간호해 달라는 대궐의 요청을 받고, 헤론 원장과 벙커(Bunker) 부인과 함께 입궐하게 된 것이다. 다음은 홀튼이 고종과 황후를 알현하면서 황후에 대한 인상을 기록한 것이다 (아래 이미지 왼쪽 참조):
The queen, of course, excited my deepest interest. Slightly pale and quite thin, with somewhat sharp features and brilliant piercing eyes, she did not strike meat first sight as being beautiful, but no one could help reading force, intellect and strength of character in that face, and as she became engaged in conversation, vivacity, naivete, wit, all brightened her countenance, and gave it a wonderful charm, far greater than mere physical beauty; and I have seen the queen of Korea when she looked positively beautiful. (Lillias H. Underwood,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e Or Life In Korea, Boston: American Tract Society, 1904, p.22).
내가 왕비에게 깊은 흥미를 느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좀 창백하고 아주 바싹 마른 얼굴에 이목구비가 어쩐지 날카로운 느낌을 주며, 사람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총명한 눈을 지닌 그는 첫눈에 아름답다는 인상은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얼굴에서 힘과 지성 그리고 강한 개성을 읽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애기를 나누면서 보니까 그 생기발랄함과 소박함, 재치 같은 것들이 그의 용모를 환히 비추었고, 단순한 겉모습의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큰 매력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가 아주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에 나는 비로소 그가 진정한 조선의 왕비임을 깨닫게 되었다. (릴리아스 H. 언더우드 지음ㆍ김철 옮김, '조선견문록', 서울: 이숲, 2008. p. 44-45).
◆명성태황후 생전에 가장 신임을 얻어 알현하였던 서양의 두 여자: 릴리아스 언더우드(왼쪽)과 이사벨라 비숍(오른쪽). 이들의 '명성태황후'의 용모에 대한 기록이 일치하기에 한결 신빙성을 더해 준다.
다른 하나는 '명성태황후'에게 서양 문물을 소개하고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영국의 여행가이자 작가인 비숍 여사의 기록이다 (위 이미지 오른쪽 참조). 청일전쟁 직후 1895년 1월5일에 한국에 도착한 비숍 여사는 1월 8일 언더우드 부인의 소개로 '명성태황후'를 알현하게 되었다. 그 날 밖에는 영하 21도의 추위였다:
Her Majesty, who was then past forty, was a very nicelooking slender woman, with glossy raven-black hair and a very pale skin, the pallor enhanced by the use of pearl powder. The eyes were cold and keen, and the general expression one of brilliant intelligence...As soon as she began to speak, and especially when she became interested in conversation, her face lighted up into something very like beauty. <Isabella B. Bishop, Korea And Her Neighbors, New York: Fleming H. Revell Co., 1897, p.252-253>.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칠흑같은 흑발이었고,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주빛 가루를 뿌린 듯 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이사벨라 B. 비숍 지음ㆍ이인화 옮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경기: 도서출판 살림, 2009, p.295>.
그리고 비숍 여사와의 만남을 가진 1월 8일 후 정확하게 9개월이 지난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에, 명성태황후는 일본정부가 조종하던 '사무라이들'('낭인들' 용어 부적합)에 의해서 처참하게 살해되셨다.
이 두 서양 여자들의 표현을 들어보면, 왕비이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명성태황후의 모습이 우아하고 근엄했다는 것이다. 체형은 수척했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눈빛이 날카롭고 초롱초롱했다.' 는 것이 일반적인 용모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관한 글은 이미 필자가 앞의 글 <호국스페셜 제1부> 에서 밝혀 놓은 바가 있다. <아, 저 하늘에도 슬픔이/자세히보기>.
반면, 일본의 화가들이 그린 명성태황후의 모습이 비만하고 심술궂게 그려진 것은 악의적이었다. 마귀 할멈처럼 그의 눈을 그린 것은 그를 독한 여자로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일본 외교관들이 그를 '여우'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눈빛을 악의적으로 묘사한 탓이리라고 여겨진다.
한편, 문일평 선생은 그 당시 '명성태황후'의 '진짜 사진'(御眞)이라는 사진을 보고는 미심쩍은 생각이 었고, 당시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명성태황후의 상궁들을 찾아가 확인했더니 한결 같이 부인했다고 한다.('호암전집', 3권, 95쪽). 필자는 아래의 문일평 씨의 증언 <明成后御眞>을 가장 신빙성있게 받아들인다:
①오늘날 坊聞에 傳하는 明成后의 御眞이라는 것은 얼토當치아니한 贋本이다. 아는분의 말을 들으면 그 寫眞은 조금도 明成后의 御貌와 近似한데가 없다고한다 當時만해도 寫(다음 글자 탈자) 오늘날처럼 發達되지 못하였을뿐아니라 九重의 구름깊은 곳에 계신 高貴한 어른에 매우 어렵든 것이다 ②外人의 著書에 혹은 明成后의 御眞이라고 揭載한 것은 있지마는 그 역시 대중할 수 없는 것은 勿論이다.
그러면 요새 흔히 新聞과 雜誌에 나도는 明成后의 은 그 由來가 어떠한 것인가 그는 數十年前 李承晩博士의 著述한 책에 明成后의 御眞이라고 揷入한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맨처음 複寫하기는 德興書林 이었었고 그 다음에 複寫하기는 東亞日報이었었다. 이로부터 贋本이 眞正한 明成后의 御眞처럼 되고 말았거니와 이 寫眞을 가장먼저 李博士의 책에서 發見하였을 때 나는 크게 기뻐하여 그것을 寶藏할양으로 그윽이 떼어두었더니 ③厥後에 明成后의 御容을 짐작할 분을 찾어가 그 寫眞을 보인즉 아니라고 하므로 그제야 나도 贋本임을 알았다 側聞한 바에 依하면 일직 高宗皇帝께서 懸賞數萬圓으로 明成后의 御眞을 世間에 널리 求하신 일이 있었으나 마침내 얻지 못하고 말으셨다한다 ④一八九五年八月二十日의 政變이 있기 바루 數日前에 明成后께서 撮影하신 眞本이 있었지마는 그 眞本은 敵黨에게 利用한 바되어 부질없이 后의 悲運을 促進하는 媒介物을 지었을뿐이다.
⑤어느 西洋女子의 記錄에 이러한 말이있다 明成后께서 寫眞찍기를 즐겨하였다고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그어른의 寫眞은 世上에서 얻어볼수가없다 그야 寫眞이 있기만하면 언제나 世上의앞에 나타날때까지 있겠지만 一日이라도 速히 出現하기를 바란다. <'호암전집', 3권, 94-95쪽 全載>
◆위 이미지는 '호암전집' <제3권> '사외이문'(史外異聞) 94-95페이지에 기록된 문일평 선생의 <八二, 明成后御眞>을 한 페이지로 옮긴 것이다.(1939년 조선일보 간행).
'호암전집'(湖岩全集)은 문일평 선생의 '사담수필집'(史譚隨筆篇)이다. 역사 속의 일화, 인물, 사건 등등에 관한 유고(遺稿)를 수집 정리한 책으로서 1939년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간행되었다.
<제l권>은 정치외교사편으로 한미관계 50년사, 한말 외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선구(先驅), 조선인과 국제안(國際眼), 사상(史 上)의 경오년(庚午年)·정묘(丁卯)·병자(丙子)호란을 통해본 조선, 중요성을 띤 조선사의 3정축(丁丑), 조선의 정치가 군상, 만주와 조선인, 사상의 기인(奇人) 등이 수록되었다.
<제2권>은 문화풍속편으로 사안(史眼)으로 본 조선, 조선문화에 관한 1고찰, 세계문화사 선구, 조선문화의 별 페이지, 사상에 나타난 예술의 성직, 예술과 로맨스, 근대 명승소열전(近代名僧小列傳), 전쟁문학, 정음소사(正音小史), 조선여성의 사회적 지위 등이 수록되었다.
<제3권>은 1920년대에 쓴 수필 및 기행편으로, 사외이문(史外異聞)·동해유기(東海遊記)·근교산악사화 등이다. 본 3권에 명성태황후의 '진짜 사진'(御眞)에 관한 저자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본 기록은 명성태황후가 살해되신지 20-30여년 후에 기록된 바, 가장 객관적이고 신뢰성을 주는 기록으로 판단되었기에, 필자는 이 기록을 중심으로 하여 펼쳐나갈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다음의 세 종류의 사진이 우리에게 낯익은 사진들이다:
◆'예복차림의 궁녀'(A Palace-Woman In Full Regalia). <Homer Hulbert, The Passing Of Korea, p.138>에 수록. (화중광야제공)
◆조상들의 '명성태황후' 살해를 사죄하기 위해 그 후손들이 만든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이 보관하고 있는 '명성태황후'의 초상화(御影呈)이다. <자세히보기>.
◆프랑스 월간지 '피가로 일루스트레'(1893년 10월호)에 실린 '민,조선의 황후'라는 사진이다. 그러나 동일한 사진들이 서양의 여러 책들 속에 다른 인물로 실려있다.
[왼쪽사진설명] 아마 지금까지 나타난 기록상 가장 많이 알려진 사진일 것이다. 이 사진이 명성황후의 '진짜 사진'(御眞)이라고 외국인들의 책 속에 수록되었던 것인데, 아래의 문일평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명성태황후의 얼굴이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①오늘날 坊聞에 傳하는 明成后의 御眞이라는 것은 얼토當치아니한 贋本이다. 아는분의 말을 들으면 그 寫眞은 조금도 明成后의 御貌와 近似한데가 없다고한다 當時만해도 寫(다음 글자 탈자) 오늘날처럼 發達되지 못하였을뿐아니라 九重의 구름깊은 곳에계신 高貴한어른에 매우 어렵든 것이다 ②外人의 著書에 혹은 明成后의 御眞이라고 揭載한 것은 있지마는 그역시 대중할 수 없는 것은 勿論이다.
[가운데사진설명] 명성태황후 살해 가담 '사무라이' 37명 중 21명이 구마모토현(熊本縣) 출신이다. 구마모토현에서 그 후손들이 '명성태황후'를 살해한데 가담한 21명의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려는 의도에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明成皇后を考える会)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본 '가운데 사진'은 본 단체가 제작해서 보관하고 있는 '명성태황후의 초상화'이다. <자세히보기>.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만든 '가이 도시오' (甲斐利雄) 씨는 앞으로도 일본사람들에게 명성태황후 사건의 본질을 알릴 싸움을 계속할 뜻을 밝혔다:
작년까지는 중학교 교과서에 명성황후의 사진이 있었고, 상당한 실권을 쥐고 있는...이라는 캡션이 달려 있었습니다. 올해부터 앞으로 2년간 사용할 중학교 교과서에는 그것이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교과서에 없으면 선생님들이 가르칩니까? 안 가르칩니다. 선생 자신이 명성황후에 대해 잘 모르니까 교과서에 없다면 더더욱 안가르칩니다. 앞으로 2년간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는 사라져 버립니다. 안타깝습니다. 이것이 현재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더욱 나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서 전국의 선생님이나 아이들에게 일본과 한국이 뒤틀린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인식을 시켜야 됩니다.
일본사회에서 '명성태황후' 문제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데 불을 붙인 또 한사람의 주인공으로 재일동포 주영덕(54) 씨가 있다. 재일동포 2세로 구마모토(熊本) 출신이다. 다음은 주영덕 씨가 밝힌 그 동안의 경과다:
국평사의 선대 주지스님으로부터 여러가지 신세를 져서 보답을 하기 위해 이곳에서 강연을 열었다. 실은 1997년 종군위안부의 기술이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그때 전국의 자민당계의 보수세력이 '그런 일은 없었다, 괘씸하다'라고 하면서 일본 전국에서 기술내용을 삭제하라는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구마모토에도 청원서가 올라왔다. 당시 '교과서를 생각하는 모임'을 만든 시민단체분들이 있었는데, 사실상 그때부터 이런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우리들 힘이 부족해서 당시 구마모토와 충청남도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던 것도 있어서 한국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이것은 일본과 한국의 문제이니까 시민들이 서로 손을 잡고 연대해서 싸워나가자는 것으로 뜻을 모았다.
결국 구마모토 의회에서 1년간 끌다가 교과서 취소가 결정났다. 전국의 47개 도토후현 중에서 구마모토가 유일하게 기각 결정이 난 것이다. 그후부터 여러 한국시민단체와 교류가 시작되었다. 2001년 명성황후 사건에 대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그때부터 가이 선생을 필두로 본격적인 조사활동에 들어갔다. 그 가운데 한국을 방문하는 등(비디오 내용) 가이 선생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드디어 8월 24일 전국방송으로 처음 명성황후 사건을 다루게 된 것이다. 약 10년 정도 걸린 셈이다. 감회가 새롭다.
[오른쪽사진설명] 아마 이 사진도 왼쪽 사진과 함께 지금까지 나타난 기록상 가장 많이 알려진 사진일 것이다.
여러 차례 논란을 일으킨 이 사진은 19세기 한국소개 책자와 사진 컬렉션에서 여러 차례 발견된 바 있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의 궁중 여인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명성태황후'라는 주장이 크게 힘을 받지 못했다. <자세히보기>.
[참고자료] '명성태황후' 초상화 <자세히보기>.
[또 하나의 가능성]ㅡ 아들 이척(李拓)이 어머니 명성태황후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전한다...
◆고종과 왕세자. 아들 이척(李拓)이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전한다.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황제에 오른 순종. <미국 코넬대도서관제공>
[낭인(浪人)이란?]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이전에 한 가지 분명히 해둬야 할 용어가 있다. 바로 '낭인'(浪人)이란 용어이다. 필자는 이 용어 사용을 거부한다. '낭인'의 사전적 용어를 알아보았다:
1)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도는 사람. 유랑하는 사람. (2) 관직이 없이 유랑하는 사람. 浪士(낭사)②. (3) 실업자(失業者). <야후참조>.
위 사전적 정의상, '낭인'은 마치 '방랑자' 같은 뉘앙스를 던져준다. 이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는 중에 필자가 느낀 것은, 이들의 배후 세력들이 바로 일본 근대화를 주도하였던 '사무라이들'이라는 '진실' 때문이다.
19세기 말 메이지유신으로 정권을 찬탈한 비열한 '3류급 사무라이들'은 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한국낭인들을, 그리고 만주를 비롯한 중국일대에는 광개토태왕비문을 조작한 '사코'와 같은 대륙 낭인들을 파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밀정으로 파견한 이들을 '낭인'이라 치부했다. 일본에서 '낭인'이란 일반적으로 '깡패'나 '무뢰한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낭인이라 치부한 것은 일제의 처사를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즉 일본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열하게 변명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명성태황후 살해사건'도 일본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낭인들의 소행으로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성태황후 살해사건에 동원된 낭인들은 이러한 뜻과는 전혀 다르다. 살해에 참가한 낭인들은 군인, 경찰도 일부 있었지만, 양복과 일본 정통복장을 입고 총과 칼로 무장한 행동하는 재야 정치인으로 자칭 일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지식층들이었다.
한 마디로 '낭인들'은 '칼잡이들'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일정한 '거처가 없었단' 말인가? 이들이 '떠돌이들'이었단 말인가? 이들이 '실업자들'이었단 말인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최문형 교수의 증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낭인은 깡패나 부랑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대륙침략주의자들이었다. 미우라와 함께 조선에 건너와 왕후 시해에 기획 자문뿐만 아니라 낭인 동원까지 맡았던 ①시바 시로(柴四郞)는 하버드대학을 마친 뒤 다시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일본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궁성 침입과 살해를 담당했던 낭인 출신의 영사관보 ②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萬一)도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일본의 대표적 지성으로 사건 후 브라질과 루마니아에서 전권공사를 역임하였다.
한성신보사 사장으로 낭인의 집결을 담당했던 ③아다치 겐조(安達謙藏)는 훗일 가토다카아키(加藤高明) 내각의 체신상, 하마구치(濱口) 내각의 내상을 역임했다.
<최문형,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서울:지식산업사, 2006, p.225>
◆시바 시로(柴四郞/ 1852-1922)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萬一 /1865-1945)
◆아다치 겐조(安達謙藏/1864-1948)
특히 이들 중에서 '시바 시로'에 관하여 자료를 찾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의 생애를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필명을 찾게 되었고, 그 필명을 가지고 추적해 나갔다. 그랬더니...
◆필명 '도카이 산시'(東海散士)로 위장, 활동한 '시바 시로'(柴四郞). <자세히보기>
◆필명 '도카이 산시'(東海散士)의 본명이 '시바 시로'(柴四郞)임을 입증해준다.
이렇게 위장한 자였다. 위 자료를 보니, 1887년에 한국에 들어왔고, 재야 비밀단체를 조직하였고, 오쿠마 총리 때 참정관을 지냈다. 이 어찌 '낭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완전히 속이는 것이다.
1895년 10월 7일 일본 공사관 안의 모의
미우라 공사는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공덕리(마포 공덕동)에 파견, 대원군과의 교섭을 진행시켰다. 대원군의 의중을 파악한 이상, '대원군을 이용'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한 뒤, 결행의 기일을 10월 중순으로 예정하였고, 구체적인 계획은 완전히 비밀리에 붙이고 있었다. 오전 9시에 군부대신 안경수(安傾壽)가 공사관에 와서 훈련대 해산과 민영준의 궁내부 기용에 대해 미우라 공사의 동의를 구했다. 이 소식을 접한 미우라 공사는 대위기의 상황임을 직감하고 하루의 유예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급박하지만 이튿날인 10월 8일 새벽 '명성태황후 살해'를 결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였다. 이 날 오후 미우라 공사는 시바 시로(柴四郞/필명:도카이 산시/東海散士),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萬一), 오기와라 지로(荻原秀次郞) 등을 공사관으로 불러, 다음과 같이 각각의 역할을 분단시켰다:
아다치와 구니토모는 동지들을 모아 대원군을 호위하여 입궐할 것
오기하라는 비번(非番)의 경찰들을 인솔해서 아다치, 구니토모 등과 합류해서 입궐할 것
호리구치는 대원군 입궐에 관한 방략서(方略書/계획서)를 오카모토에게 전달할 것
<혜문 스님지음, '조선을 죽이다: 명성황후 살해 기록과 역사의 진실', 서울:동국대학교출판부, 2009, p.102-110>
오카모토( 岡本)는 육군 포병소좌 출신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 당시 일본 전권공사의 수행원이었고, 이후 조선으로 건너와 궁내부와 군부의 고문으로서 많은 한국인 관리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는 대원군과 절친하며, 10월 5일 이미 대원군과 입궐 교섭을 마친 후, 10월 7일에는 인천에 가 있었다. 이는 일본 귀국을 앞두고 단순히 작별 인사를 하러 갔을 뿐, 하등의 정치적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인천으로 간 것이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경 경복궁 광화문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일본국을 대표하는 한국 전권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작전명 '여우사냥' 작전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후 얼마 후 명성태황후는 45세를 일기로 살해당하셨다.
명성태황후 암해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된 일본인은 미우라 공사를 포함하여 모두 56명이었다. 그 내역은 군인 8명, 순사 8명, 외교관 3명, 조선정부 고용인 5명, 민간 '낭인' 32명인데, 조선정부에 임시 고용되어 있었으나, 본래 '낭인'이었던 자들까지 합치면 56명 가운데 '낭인'이 무려 37명이 이른다. 그러나 이들 '낭인들'은 결코 단순한 건달이나 깡패가 아니라 일본 정부와 교감한 극우 지식인들이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글로벌 엘리트'(Global Elite)였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들 가운데는 위 사진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버드대학과 도쿄대학 법학부 출신자를 비롯한 지성인도 많았고, 뒷날 각료나 외교관, 그리고 중의원 의원으로 출세한 자도 부지기수였다. 이들은 대륙침략을 주창하던 '현양사'(玄洋社), '흑룡회'(黑龍會)와 같은 일본 우익단체의 멤버들이었다. '흑룡회'는 일본비밀결사의 시조인 '현양사'에서 갈라져 나왔다. 다음은 1901-1910까지의 '흑룡회' 정회원과 찬조원의 명부이다. <자세히보기>. 이 명부 속에는 짧게는 5년전, 길게는 15년전 '을미사변'(명성태황후의 살해사건)에 깊숙히 관여되어 있는 자들도 올라 있음을 보게 되었다.
記錄이 없다하여서 모든 과거의 痕跡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한국병탄'에는 많은 인물들이 관여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위시한 관리, 무쓰 무네미쓰(陸奧光宗)와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를 포함한 외교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가쓰라 타로(桂太郞)가 이끄는 군부, 시부사와 에이이치(涉澤榮一)로 대표되는 재야계 등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물들이 '한국병탄'에 참여하였고, '명성태황후 살해'에 직ㆍ간접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자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행적들이 '역사적 사실'로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입증할 만한 '사료들'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이에 필자는 수 년간 짬짬이 자료들을 찾아 오다가 다음과 같은 판단에 이르게 되었다. 필자의 이러한 판단은 지금까지 읽어본 자료들이나, 보아온 다큐멘터리 등에서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자료를 접하는 분들은 필자의 이러한 '밝혀냄'을 '의아타'(?) 일축하지 마시고, 일반 역사 기록들 속에서는 밝혀지지 않음을 통탄하고서,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기 바란다.
'히젠도'(肥前刀)의 정체를 밝혀라!! ㅡ '아, 이것이 조선의 심장을 찌른 칼이구나!!' 전체 길이 120센티미터-칼날 90센티미터. 칼이 뿜어내는 살기에 방안에는 서늘하면서도 묘한 흥분이 감돌았다. (혜문/慧門 스님의 증언) ㅡ [필독관련자료 ㅡ 호국스페셜 제1부] <오늘밤 물소리는 바람따라 흐르려나/ 자세히보기>
●명성태황후 암살공작배후세력 (메이지 천황 ㅡ> 오쿠보 원로 ㅡ> 이토 총리 ㅡ> 이노우에 전공사 ㅡ> 미우라 현공사 ㅡ> 사무라이 도오 그리고 비밀조직 프리메이슨 요원 베어벡 선교사)
●암살작전명: '여우사냥'
●암살작전일시: 1895년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새벽
●암살무기: '히젠도'(肥前刀)
이 칼은 16세기 에도시대에 '히젠국'(肥前國)의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으로 알려졌다. 현재 후쿠오카 소재 '쿠시다신사'(櫛田神寺)에 보관중이다. 일본 '사무라이' 중 한 명인 '도오 가츠아키'(藤勝顯)가 명성태황후를 찌른 검으로 알려진 '히젠도'(肥前刀)로서 칼집에는 '一瞬電光刺老狐'(일순전광자노호-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이 칼은 1909년에 '쿠시다신사'에 기증한 자(익명)의 증언에 의해서 '한국의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라고 적혀있다. (KBS역사스페셜 영상캡쳐-2010.1.23방영)
그렇다면, 이 칼을 '명성태황후 찌른 칼'이라고 명명하지 아니하고 굳이 '히젠도'라고 하였을까?
이 칼이 16세기에 '히젠국'(肥前國)에서 만들어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일까? 문헌을 검색해보니, 이 칼을 만든 장인 '다다요시'(忠吉)는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만든 칼은 '태도'(太刀)라고 기록되어 있다. '살생용 긴 칼'이란 일반적인 뜻이다. 끝내 필자는 이 칼이 전해주는 하나의 '상징성'을 찾았다. 이 상징성은 필자 개인의 독창성이라 해도 할 수 없다. 바로 '히젠국'이 암시하는 것이 있었으니...이 지방은 에도시대 규슈(九州)지역의 나가사키(長崎)와 사가(佐賀) 두 곳을 합친 지방의 이름이요, 메이지유신의 세력들이 난 곳이었다. 사무라이들의 권위를 내세우려는 일종의 '세과시용'으로서 '히젠도'(肥前刀)라고 명명한 것은 아닐런지(?)...필자의 소경을 피력해보았다.
이미 '메이지유신'을 일으키기 수 년전에 '히젠국'으로부터 '나가사키'에로 사무라이들이 모여들었고, 거기서 모종의 공작들이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바로 이것이다:
南日本の最初のプロテスタントのクリスチャンとして知られている村田、若狭の守を通して、フルベッキ博士は肥前地方の首都佐賀でよく知られるようになり、藩士たちの訪問をよく受けるようになりました。
維新直前の数年間、フルベッキ博士は薩摩、長州、土佐や他の地方の藩士のおびただしい訪問を受けました、かれらは絶えず、長崎を経由して旅をしており、1868年に実現する出来事についてお互いに議論していたのでした。
ほとんどのものは以前外人に出会った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が彼らの中に、小松、西郷兄弟、副島やほかの人々のようにこの重大な時期に著名になった者たちが名を連ねていました。
1866年肥前の大名が長崎に学校を開き、フルベッキ博士はここと政府の学校と両方で日替わりで教えるように任命されました。
この肥前の学校の生徒の中に現在の岩倉侯と彼の兄弟がいました。
将軍家の崩壊と帝国の力による維新もその長崎の学校をあまり混乱させなかったし、他の側への政府の変換がそのクラスを一日たりとも休ませ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
남일본 최초의 Protestant(개신교) 크리스찬으로서 알려져 있는 무라타(村田/사진10번), 와카사(若狭)의 수(守)를 통해, 후르벡키(네델란드식 발음/영어식 발음=베어벡) 박사는 히젠(肥前) 지방의 수도 사가(佐賀)에 잘 알려지게 되어, 번사(藩士/사무라이)들의 방문을 잘 받게 되었습니다.FONT>
메이지유신 직전의 몇 년간, 후르벡키(베어벡) 박사는 사쓰마(薩摩), 조슈(長州), 토사(土佐)나 다른 지방의 번사의 엄청난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끊임 없이, 나가사키를 경유해 여행을 하고 있어, 1868년에 실현되는 사건에 대해서 서로 논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은 이전에 외국인을 만났던 적이 없었습니다만, 그들중에, 코마츠(小松/사진 11번), 사이고 형제(西郷/사진 13,14번), 소에지마(副島/사진 41번)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이 중대한 시기에 저명하게 된 사람들이 일원이 되고 있었습니다.
1866년 히젠의 다이묘(大名/막부의 부하 명칭)가 나가사키(長崎)에 학교를 열어, 후르벡키(베어벡) 박사는 여기와 정부의 학교와 양쪽 모두에서 하루씩 교대로 가르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이 히젠의 학교의 학생중에 오늘날의 이와쿠라(岩倉) 후작(사진 31번)과 그의 형제(사진 37,38)가 있었습니다.
막부의 붕괴와 제국의 힘에 의한 유신도 그 나가사키의 학교를 그다지 혼란시키지 않았고, 다른 측면의 정부의 변환이 그 클래스(학급)을 하루라도 쉬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번역/ 예미마 정>. (자세히보기)
위 사진에 관한 설명은 이미 <호국스페셜 제1부>에서 언급하였다. 이 사진 중에서 베어벡의 제자들 44명 가운데서 '히젠지방'(肥前地方)의 사무라이 출신들이 8명(번호순대로, 2,5,6,21,24,27,36,41)이나 된다. 이 중에서 <27번>을 주목하자. 이 자가 베어벡 선교사의 제자 <42번> 소에지마 다네오미(岡本健三郞)와 함께 베어벡의 두 수제자 중 하나이다. 와세다대학의 창학자로서 스승 베어벡을 와세다대학의 원점인 '치원관'(致遠館)의 교장으로 앉힌다. 와세다대학이 여기서 발원되었다는 말이다. 바로 '오쿠마 시게노부'(大隅 重信)이다. 아래 사진 하단에서 왼쪽의 사진이다. 이 사진이 메이지유신 직전에 찍었다는 것인데(기록에 따라 메이지유신의 기원을 1867년으로 혹은 1868년으로 다르게 산정하기 때문에, '明治 OO년'하면 서력(서기)로 일치되지 않음을 알아둬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보기>. 이 사진 촬영시기도 1868년으로 되어 있어서 문헌기록상 약간의 차이가 발견된다. 자, 문제는 이들이 바로 무인시대였던 '막부시대'를 마감시키고, 왕정시대에로 복고시킨 주모자들이다. 이들 중에는 자기 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은 자들도 있다. <12>번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 利通)와 <13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는 한 때는 절친했던 '동지'였다가 권력 앞에서 '대적'으로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사이고는 마지막 일본의 내전인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의 '다바루전투'(田原坂)에서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옛 동지였던 오쿠보가 정부군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오쿠보도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 암살당하고 만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도록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 <43번>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이다. 그는 '에도시대'(江戶時代)에서 '메이지시대'(明治時代)로의 이른바 '유신회천'(維新回天)의 풍운아였다. '사초동맹(薩長同盟/사쓰마와죠슈동맹)을 체결시키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 사람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1836-1867)이다. 아깝게도 메이지유신을 코앞에 두고는 31세 젊은 나이에 암살당하였지만, 지금까지도 일본인들로부터 가장 추앙을 받는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베어벡의 제자들이 '메이지유신'의 주도자들이었으며, 그들이 1945년에 멸망할 때까지 한반도를 침탈하고, 갖가지 잔악한 행위들을 벌려온 원흉들임에는 '역사적 사실'로서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위 이미지 차트는 필자가 그 동안 섭렵하였던 것을 종합하여 정리해 본 것이다. 일반 역사서나 자서전 등을 그리도 파헤쳐 보았건만, 전혀 그러한 근거를 찾을 수 없었는데...마틴 위코프(Martin N.Wyckoff) 교수가 1909년에 베어벡 선교사의 생애에 관하여 추모강의한 내용에서 밝혀진 것이다. 위 차트상에서, '미우라'가 한국 공사로 임명을 극구 고사하였을 때,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천황의 측근이자 궁내차관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의 간곡한 만류로 공사직을 다시 수락하였다고 최문형 교수는 밝히고 있다. (최문형,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서울:지식산업사, 2006, p.225). 그런데 베어벡과 야마가타와의 관련성은 아직 밝혀내지 못하였다. 다만 위 네 명(야마가타, 오쿠마, 이토, 이노우에)이 메이지 통치시대에 '원로들'로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고 전한다. 메이지도 이들의 건의를 사소하게 다루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이들은 청년시절부터 베어벡을 만났고, 그에게서 정치, 천문, 과학, 건축, 군사 및 어학(영어, 네델란드어, 불어, 독어) 등을 배웠다. 이들이 메이지유신 이후에 입신출세한 자들이다. '자, 그렇다면, 이들은 1867년(1868년)부터 본격적으로 '유신'(혁명)을 위하여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였을 것인데...그 자금이 어디로부터 조달되었을까?' 필자는 이런 생각을 가끔 해보았다. 속된 표현으로 '기름이 있어야 굴러가는 법인데'...이들의 출신은 거의 가난하였던 하급 사무라이 가정의 출신들이다.
이에 관한 증거는 '역사적 기록'에서는 거의 찾아 볼수 없을 것이다. 아니, 아직 보지 못하였다. 이는 분명코 '역사적 진실' 속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야사'(野史) 혹은 '비사'(秘史)라고 일컫는다. 그러기에 개인으로서 필자는 이러한 자료와 만나기란 여간 어렵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기에 주 예호바에게 더더욱 엎드려 간구하게 된 것이다. 그 자료가 2007년에 입수된 '플포드'(Benjamin Fulford) 씨가 밝혀낸 '일본 프리메이슨의 비밀의 역사'라고 하는 아티클이다. 이 글은 작년에 <제1부>에 이미 번역해서 올린바 있다. 필히 읽어보시기 바란다. [호국스페셜 제1부] <오늘밤 물소리는 바람따라 흐르려나/자세히보기>.
Admiralペリーが到着して、日本人にそれらの経済を強制的に開けさせた後に、アジアのロスチャイルドの部下(ジャーディン・マシソン)はエージェントに日本に行かせました。彼の名前はトーマス・ブレーク・グラバーでした、そして、彼の任務は日本の内戦を始めることによって、新しい兵器市場を創設することになっていました。この戦争の究極の目的は植民地化のために日本を準備することでした。結局Gloverの陰謀は発見されました、そして、彼は何とかいくつかの戦艦と兵器を販売しましたが、倒産は彼に追い込まれました。
페리(Perry/이 제독의 후손이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전 국방장관 윌리암 페리) 해군 제독이 일본에 도착하여 일본인에게 경제 개방을 강요한 후, 아시아의 로스차일드(Rothschild)의 사람인 '쟈딘 매써슨'(Jardine Matheson)은 일본에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라는 요원을 보냈다. 그의 임무는 일본에 내전을 촉발시킴으로써 무기 시장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일본의 식민지화 건설을 준비해 주는 것이었다. Thomas는 전함 몇대와 무기 몇점을 팔 수 있었으나 결국 토마스의 계략이 공개되면서 그는 파산 상태에 처한다.
今回までには、彼らの長い迷子になったいとことの仲間を知っていて、フリーメーソンは異なったアプローチを決めました。異なったロスチャイルドフリーメーソンエージェント(グイド・H.F.フェルベック)は非常にうまくいっている日本のフランチャイズを始めました。彼はこの写真のセンターの男性です。
이 때쯤, 프리메이슨은 그들과 오랫동안 헤어졌다 만난, 마치 가족과 같은 그룹과의 연합에 대해 알게 되면서 다른 접근방식을 취하게 된다. 다른 로스 차일드(Rothschild) 프리메이슨 요원인 귀도 베어벡(Guido H.F. Verbeck)이 일본 프렌차이즈를 성공적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당시 핵심적인 인물이 된다. 그가 바로 아래 사진에서 중간에 앉아있는 자이다.
이 글에서 언급된 '토마스 글로버'(Thomas Glover/1838-1911)는 일본 '미쓰비시회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베어벡 선교사가 나가사키에 도착한 1859년에 글로버도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글로버는 프리메이슨 로스차일드 소속의 상하이 소재 영국 '쟈딘 매써슨회사'(Jardine, Matheson & Co)에서 근무하다가, 나가사키에 영국의 상관(商館/무역관) 개설을 위해 도착한 것이다.
그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군부세력인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의 쇄국정책 일환으로 나가사키 항만을 외국에게 개방하였으되, 그 체류 장소를 '데지마'라고 하는 인공섬에 한정시켜 버렸던 것이다. 무려 1639년부터 1859년까지 모든 해외 물자의 집산지였던 곳이다.
당시 일본은 1년에 한 번 쇼군(將軍/일본 막부의 수장)에게 국제 흐름을 설명하는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서 서양을 이해했다.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만 교류를 허락한 이유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관심사는 일본과의 무역으로 이익을 남기는 것이지, 포르투갈인들처럼 '예수회 전도'(카톨릭 선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데지마'(出島)는 1634년부터 2년에 걸쳐 포르투갈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로서 '에도 바쿠후'가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나가사키에 건설한 인공섬이다. 이 섬은 나가사키의 마치슈(町衆/부유한 상공업자)들에게 건설을 명하여 만들어졌다. 건설비용은 우선 건설을 담당한 업자들이 부담하게 하고, 나중에 입주할 포르투갈인(후에 네덜란드인으로 교체)들에게 토지 사용료(임대료)를 업자들에게 매년 지불하는 형식으로 건설비용을 보상받도록 하였다.
1639년 로마 가톨릭 선교(예수회 전도) 활동을 하는 포르투갈인들을 추방시킨 후에는 1641년 히라도(平戶/구슈(九州) 북서쪽에 위치한 섬으로, 1550년 개항되어 일본 최초로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과 무역을 한 곳. 일본 카톨릭교 역사지)에서 네덜란드의 '연합동인도회사'(VOC/1602년 설립)의 상관(商館)을 이곳으로 옮기고 네덜란드인들을 거주시켰다. 이후, 약 200년 동안 네덜란드인과의 통상 활동 및 일본내 활동에 대한 막부의 통제가 이루어졌다. 원칙적으로 공무상 출입이 허용된 일본의 관리외 기생 이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었고, 네덜란드인도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일본 체류 기간 동안 좁은 데지마 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 여성과 결혼하는 등 자유롭게 생활했다고 한다. 1855년 '일란화친조약체결'에 의하여 네덜란드인의 나가사키 시로의 자유로운 출입이 허가되고 나서, 그 존재가치가 유명무실해졌으며, 1859년 '데지마' 내의 네덜란드 상관(商館)은 폐쇄되었다. (위키피디어 참조).
◆우측 상단에 보이는 것이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 '데지마'(出島)이다. 네델란드 국기가 보인다. 네델란드 상인들은 220년(1639-1859) 동안 이 섬을 벗어날 수 없었다. (KBS역사기행 영상캡쳐-2006.11.19방영).
나가사키에 도착한 '글로버'는 '쇼군'(將軍)과 그 막부 타도열망에 가득찼던 젊은 사무라이(志士)들 간에 점점 고조되어 가는 긴장 속에서 그들에게 배와 무기를 판매하여 돈을 벌었다. 게다가 일본 해안에 증기선들이 증가하자, 석탄의 공급이 절실하였다. 이에 글로버는 '히젠지방의 사무라이들'과 손을 잡고 1868년에 나가사키 근해 한 섬에다 '다카시마탄광'(高島炭鉱)을 투자하였다. 이는 서구식으로 석탄을 개발하는 최초의 광산이었고, 글로버는 이 사업에서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다. 이 광산은 1881년에 '미쓰비시'가 인수하였고, 글로버는 '미쓰비시'의 선박건설에 '브로커'로 참여하게 된다.
글로버가 나가사키 '미나미야마테'(南山手) 언덕에 저택을 지은 것은 1863년이었다. 이 저택이 나가사키 프리메이슨의 '롯지'(집회소)가 되어 버린다. 지금은 일본의 관광 명소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전한다. 우리네 같이 지난 날의 과거의 흔적을 송두리째 말살시키는 행위(예/광화문-세종로 거리 공원화)는 비난받아 마땅하리라...그런 것을 볼 때, 그 '뒤에서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우리 민초들은 속여 갈 수 있어도...위에서 보고 계시는 창조자이시요 예호바이신 하나님은 절대로 숨길 수 없음이로다!!
필자가 이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이 있다. 일본의 경우는 절대로 고적(古跡)과 기념물을 훼손 및 파손 시키지 않는 것이다. 글로버가 프리메이슨 집회소로서 제공한 자신의 집이 오늘날에는 하나의 관광 명소로 보존되어 있다. 글로버가 죽은 후에 '미쓰비시회사'가 관리해 오다가 정부에다 기증하였다고 전한다. 우리의 경우를 보자. 19세기 근대개화기 중에 한국에도 프리메이슨 요원들이 입성하였고, 서울 정동 안에 프리메이슨 '롯지'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프리메이슨'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프리메이슨'은 개방된 것으로 판단된다.
トーマスはスコットランド系 フリーメイソンといわれるが、根拠はない。 邸内にはコンパスと定規を組み合わせたフリーメイソンリー特有のマークが刻まれた石柱があるが、これはもともとグラバー邸にあったものではない。フリーメイソンリーのロッジ(集会所)にあったものを昭和41年(1966)に寄贈され移設したものなお日本のフリーメーソン設立(横浜ロッジ)も慶応2年(1866)といわれ可能性は否定出来ないが… (자세히보기).
토마스는 스코틀랜드계 프리메이슨이라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저택내에는 컴퍼스와 자를 조합한 프리메이슨의 특유의 마크가 새겨진 석주가 있지만, 이것은 원래 글로버 저택에 있던 것은 아니다. 프리메이슨리의 롯지(집회소)에 있던 것을 쇼와 41년(1966)에 기증받아 이전한 것으로 여전히 일본의 프리메이슨 설립(요코하마 롯지)도 케이오 2년(1866)이라고 하는 가능성은 부정 할 수 없지만…(번역/ 예미마 정)
1885년 10월 5일, 나가사키 안에 '프리메이슨 롯지'(Masonic Lodge/本山은 영국)가 들어선 것이다. 메이지유신 거사 2년전의 상황이다. 다음 자료를 보면, 온갖 사람들이 이 모임에 회원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The Nagasaki Masonic Lodge was inaugurated at No. 50 Oura on October 5, 1885. The founding members were all British, but during the following years, men of various nationalities and religions became members and participated in regular meetings and social events. The lodge moved to a new building at No. 47 Oura in June 1887. The Freemasons contributed to the Nagasaki community until disbanding in the early Showa Period due to a lack of members. Today, the graves of several former Freemasons can be found in Nagasaki's international cemeteries, and the stone gate of the former lodge is preserved in Glover Garden. <자세히보기>.
푸치니(Giacomo Puccini)의 오페라 '나비부인'(Madame Butterfly)을 아시는지? 미국 해군장교 핀커튼에게 버림받은 일본인 나비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비극으로 세계적으로 수없이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나가사키를 무대로 하는 이 슬픈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글로버 가정이다. 소매에 '나비무늬'가 새겨진 기모노를 즐겨입었던 글로버의 일본인 아내 '야마무라 쓰루'(山村 鶴/1848-1899)가 바로 나비부인의 모델이 된 것이다. 이 오페라는 일본을 세계에 알리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
◆글로버 가족 사진이다. 글로버는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였다. 글로버 뒤 왼쪽이 딸 '하나'(Hana)요, 그 오른쪽이 아내 '쓰루'이다. '하나' 옆이 남편 영국 상인 '버넷'(Walter Bennett)이다. 이들은 1897년에 나가사키에서 결혼하였고, 그후로 한국에 와서 체류하였다. 그리고 글로버는 손주를 안고 있다. 원 안의 사진은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모델이 된 아내 '쓰루'의 노년의 모습이다. (위키피디어제공).
위 글에서 '쟈딘 매써슨상사'는 이미 밝혔듯이, '조슈오걸'(長州五傑)이 런던에까지 유학을 헀을 정도로 은택을 베푼 집단이었다. 그 장본인이 바로 '글로버'였다. 여기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포함되어 있음은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프리메이슨에 연루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필자의 현상황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의 이 사진 하나로서 이토가 프리메이슨 요원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의 주모자 이토 히로부미의 정체/자세히보기). 이같은 역사적 기록으로 보아도, 이들은 이미 세계 열강의 '침략지배'라고 하는 우월주의 사상에 심취되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スコットランド・アバディーンシャイアで沿岸警備隊の1等航海士トーマス・ベリー・グラバー(Thomas Berry Glover)とメアリー(Mary)の間に8人兄弟姉妹の5番目として生まれる。ギムナジウムを卒業。1859年、上海に渡り「ジャーディン・マセソン商会」に入社。その後、開港後まもない長崎に移り2年後に「ジャーディン・マセソン商会」の長崎代理店(グラバーの肩書きは、「マセソン商会・長崎代理人」)として「グラバー商会」を設立。貿易業を営む。当初は生糸や茶の輸出を中心として扱ったが八月十八日の政変後の政治的混乱に着目して薩摩・長州・土佐ら討幕派を支援し、武器や弾薬を販売。亀山社中とも取引。薩摩藩の五代友厚・森有礼・寺島宗則、長澤鼎らの海外留学、長州五傑のイギリス渡航の手引きもしている。 (위키피디어)
스코틀랜드 애버딘샤이어에서 연안경비대의 1등 항해사 토마스 베리 글로버(Thomas Berry Glover)와 메어리(Mary)의 사이에 8 형제 자매의 5번째로 태어난다. 고등 학교를 졸업. 1859년, 상하이로 건너가 '쟈딘 매써슨상사'에 입사. 그 후, 개항 후 얼마되지 않은 나가사키로 옮겨 2년 후에 「쟈딘·매써슨 상사」의 나가사키 대리점(글로버의 직함은, '쟈딘 매써슨상사·나가사키 대리인')으로서 '글로버 상사'를 설립. 무역업을 경영한다. 원래는 생사나 차의 수출을 중심으로 취급했지만, 8월 18일의 정변 후의 정치적 혼란에 주목해 사츠마·조슈·토사 등 막부를 토벌한 파(사무라이)를 지원해, 무기나 탄약을 판매. 카메야마 사내와도 거래. 사츠마 번의 고다이 도모아쓰·모리 아리노리·데라시마 무네노리, 나가사와정 등의 해외 유학, 조슈5걸의 영국 도항의 안내도 하고 있다. (번역/ 예미마 정)
글로버에 관해서는 여기서 줄인다. 다만, 이러한 상황하에서 '베어벡'과 '글로버'와의 교제에 관한 기록(자료)도 어디인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찾아지는대로 밝힐 것이다.
'1868년에 실현되는 사건에 대해서 서로 논의'
'히젠지방'의 사무라이들과 그 밖의 '조슈'(長州) '사쓰마'(薩摩) 등지에서 몰려오는 사무라이들은 '베어벡 ' 선교사 스승을 중심으로 '1868년에 실현되는 사건에 대해서 서로 논의'하였다고 즉 '메이지유신'을 꾀하고 있었음을 신학교 후배인 위코프(M.N. Wyckoff) 교수는 증언하고 있다. 베어벡은 일본에 선교사로 와서는 '사무라이들'을 모아놓고서 이렇게 대담한 '음모'를 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베어벡 선교사가 일본 안에서 40년간 살다가 죽었어도, 한국인과의 접촉에 관한 자료를 아직 찾아내지 못하였다. 다만 최근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당시 너무 흥분(?)한지라, 이 사람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짬짬이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이 사람에 관한 서적들을 구하여 읽었다. 그러는 중에 그가 메이지유신의 주도자들이었던 '사무라이들'의 스승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가 바로 '귀도 베어벡'이란 선교사이자, 프리메이슨 비밀요원이었다. 그는 남의 나라 안에서 '메이지 유신정변'의 주모자들의 스승으로서 정신적 기둥이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필자가 '명성황후'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7년인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행된 국내외 '그리스도교역사' 관련 책들을 읽어보았지만, 19세기에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였던 외국 선교사들의 저서들을 읽어본 중에서는 유독 이 '베어벡' 선교사에 관하여 언급된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이진호 장로님이 저술하신 '동양을 섬긴 귀츨라프'(한국감리회교회사학회 편)을 읽는 중에, <귀츨라프의 동양선교 인맥도표>(p.162)를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귀츨라프(1803-1851) 선교사의 주변에 두 인물이 나온다. 파크스(귀츨라프 妻의 사촌남동생) 일본 공사와 베어벡 선교사는 귀츨라프의 제자들이었다. 귀츨라프는 마카오에서 파크스에게 언어 훈련을 혹독하게 시켰다. 그리고 귀츨라프는 자이스트(Zeist/네델란드 중부도시)에서 베어벡을 격려해주었다:
It was also as inspiring as it was interesting to see and meet the veteran missionaries returning from their distant fields, often bringing a dozen children from other missionaries with them to be taken to Germany to school. Thus they were to be separated from their parents for years. Such lives of self-denial made deep impressions upon the Verbeck children. Gutzlaff of China was especially inspiring to young Guido.
선교현장들로부터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선교사들이 다른 선교사들의 자녀들 10여명을 함께 데리고 와서 독일에 있는 학교로 보내짐을 보는 것은 퍽이나 고무적이었다. 이처럼 자녀들은 부모들과 수 년간을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자기부정(自己否定)의 삶이 베어벡 형제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귀츨라프는 특별히 어린 귀도 베어벡에게 격려를 해주었던 것이다.
(William Elliot Griffis, Verbeck Of Japan: A Citizen Of No Country, Edinburgh:Oliphant, Anderson & Ferrier, 1900, p.42).
귀츨라프는 자신의 처 사촌남동생(귀츨라프의 사촌처남)인 파크스에게도 언어를 가르친 스승이었다. 그리고 소년 베어벡에게 해외 선교의 꿈을 강하게 심어준 스승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깊은 관련성이 '한국그리스도교역사' 속에는 빠져 있는 것일까?
해리 파크스(Harry S. Parkes/1828-1885)(중국명:巴夏禮)의 조부는 목회자였고, 부친은 은행을 다니다가 사업가로 변신하여 철제품 제조공장을 운영하였다. 파크스는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 Society)에서 1807년에 최초로 중국에 파송한 선교사이자 통역관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1782 -1834)(중국명:마리쑨/馬禮遜)의 둘째 아들 '존 모리슨'(John Morrison/1814-1843(중국명:馬儒翰)의 보조로 동아시아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였다. 파크스는 1885년 3월 사망하기까지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 한국에 이르기까지 관여하지 않은 지역이 없을 정도로 동아시아 외교 현장을 두루 누볐다.
1834년 아버지 모리슨 선교사가 죽자, 아들 존은 영국 '런던선교회'에다 아버지의 유지를 이을 성경번역을 지원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모리슨 선교사가 귀츨라프 선교사에게 죽기 전에 남은 성경부탁을 아들 존과 마무리 짓도록 유언한 적이 있다. 찰스 귀츨라프(Charles Gutzlaff/귀도 귀츨라프, 칼 귀츨라프 동명인), 메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엘리야 브리지맨(Elijah Coleman Bridgman), 그리고 존 모리슨(John Robert Morrison) 네 명이 착수하였다. 드디어 1847년에 발행되었으니, 이른바 '귀츨라프역본'이 바로 그것이다(아래 이미지 왼쪽). 이 역본은 당시 중국어 전통한자(深文理/High Wen-li)로 번역된 것이어서, 번역원본인 <킹제임스성경>에 정확하고 충실한 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데 모리슨의 아들 존은 4년전에 죽음으로 이 성경의 출판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전통한자(深文理/High Wen-li)로 번역된 귀츨라프 구약역본(1847) (화중광야제공)
◆홍콩 소재 귀츨라프 묘비를 닦고 있는 디모데 박 전도사 (2001.6) (화중광야제공)
이럴 즈음, 해리 파크스(Harry Parkes)는 아편전쟁 후 난징 조약(南京條約) 체결이 한창 진행되던 1842년에 중국 파견 전권대사의 통역사인 존 모리슨(John R. Morrison) 사무실에서 일을 도와주면서 외교와 인연을 맺었다. 그 후 1885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40여 년을 중국ㆍ일본ㆍ한국에서 근무한 그는 동아시아 외교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아마도 한 지역에서 이렇게 오랜 기간 외교 활동을 한 인물은 역사적으로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파크스가 처음 동아시아 지역과 인연을 맺은 때는 1834년에 그의 사촌 누나와 결혼한 귀츨라프 선교사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그는, 마카오에 살고 있던 사촌 누나와 그 남편 귀츨라프의 초청을 받았을 때, 별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건너갈 수가 있었다. 당시 10대 초인 파크스는 새로운 언어를 쉽게 배울 수 있는 좋은 환경 속에서, 특히 동아시아 지역 외교관의 길로 나아가는 통로가 된 중국어를 자연스레 습득하게 되었다. 이는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될 파크스에게는 좋은 조건이 되었다. <위키피디어 참조>.
파크스의 행보에 있어 주목할 사례는 주일 공사로 부임 및 메이지유신 전후의 상황에서 찾을 수가 있다. 영국은 1858년에 일본의 막부(幕府/바쿠후)가 맺은 5개국(안세이/安政) 통상조약의 한 국가로서 일본과 정식 수교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세이조약'으로 일본 내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더욱 격화되는 결과만 초래하였는데, 그런 와중에 1862년 영국과 직결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 해 행차에 나선 사쓰마번(薩摩藩/Satsuma Shone)의 영주가 요코하마 교외 '나카무기'촌을 지나치다가 영국인 4명 중 한 명인 리처드슨(C. L. Richardson)을 살해하고 3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유는 영국인들이 행렬을 방해하고 어지럽게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하여 강력한 항의를 하였으며, 막부는 일정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으로만 사건을 무마하려 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사쓰마번의 사과를 받기를 원했고, 이에 사쓰마번이 불응하자 영국 동양 함대 7척이 포격을 가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영주로부터 사과를 받는 것과 함께 2만 5천 파운드 배상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부분은, 사쓰마번은 서구의 힘 앞에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알게 되었고, 영국은 막부 내에서 사쓰마번의 독자적인 능력을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둘은 서로 접근하여 막부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개국시켜야 한다는 공감을 갖게 되었다. 파크스가 1865년에 공사로 부임한 다음, 메이지유신에 지지를 보낼 때 가장 긴밀히 접촉한 곳이 바로 사쓰마번이었다는 사실은,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이다.
◆귀츨라프 선교사의 제자(사촌처남)으로서, 동양에서 인정받는 외교관 해리 파크스 공사. 한국에 부임한 후 이듬해 1885년에 사망한다.
(위키피디어제공)
이렇듯 일본에서의 상황들을 접하면서 영국 정부는 중국에 취했던 외교 정책(베이징 조약)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을 다루려고 했다. 당시 외무성은 우선 중국에 있던 상하이 영사 윈체스터(C. A. Winchester)를 대리공사로 보냈는데, 파크스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윈체스터가 부임지로 가서 보니 당시 일본 상황을 다룰 적격 인물이 자신보다 파크스임을 알게 되었고, 이를 간접적으로 본국에 타전하였다. 사실 영국 정부도, '애로우號' 사건이나 1860년 '베이징조약'이 맺어지기까지 파크스가 협상의 선봉에 섰었고, 포로가 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조약들을 성사시켰던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종합되어, 1865년 3월 7일자 정부 공문을 통해 상하이에 머물던 파크스가 공사로 임명되었다. 이제 파크스는 중국에서 23년간(1842-1865) 얻은 외교적 경험을 일본에서 실질적으로 펼쳐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귀츨라프 선교사의 두 제자인 베어벡과 파크스 간의 서로 교제에 관하여는 확인한 바가 없다. 다만 그럴 가능성(?)을 열어 놓고 계속 찾아 볼 것이다.
한편, 미국공사관이 정동에 자리잡은 이후 중국주재 영국공사 파크스 경(Sir Harry Parkes)이 한국에 부임했다. 그는 18년간의 외교관 생활(1865-1883)을 접고, 1883년 중국주재 영국공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년 후 1884년에 한국에 초대 영국공사직을 겸임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총영사 애스톤(W. G. Aston)과 부영사 찰스(W. R. Charles)가 서울에 도착하여 정동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영국공사관이 개관된 것은 1884년 4월 16일이지만, 이미 그 전 해인 1883년부터 부지에 대한 교섭은 진행되고 있었다. 궁내부대신 이용익(李容翊)이 소유하고 있었던 정동 4번지가 교섭대상 부지였다. 교섭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영국정부는 서울에 중재를 요청하여 어렵게 이 땅을 매입할 수 있었다. 이로써 영국공사관과 영국성공회가 정동에 자리잡게 되었고 영국인들도 정동에 거주하게 되었다. 파크스의 공과는1883년 11월에 체결된 '2차 한영조약'으로 귀결된다. 이 조약은 파크스가 일본 공사로 부임하였던 1870년대 후반부터 시도한 방식으로 얻어낸 결과라고 전한다. 이토록 귀츨라프의 제자(사적으로 사촌 처남)로서 동양에 발을 디뎌놓았던 파크스는 중국을 기점으로 일본을 거쳐서 한국에 이르도록 능숙한 외교관 솜씨를 발휘한 것으로 들린다.
모든 점에서 훌륭한 여성이라고 서구인들은 명성태황후를 칭찬했다. 지성있고 교육받았고 성격이 강해 굽힐 줄 모르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대원군(흥선대원왕)이 감당하기 어려운 적수라고 외교관들은 그를 칭찬했다. 특히 서양 여성들이 그의 매력과 친절에 끌렸다.
1884년 4월 아버지 파크스 경을 따라 서울에 온 큰 딸 마리온 파크스(Marion P. Parkes) 양은 5월 7일 궁궐에 초대되어 만난 명성태황후의 첫 인상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The Queen is very small, but evidently understands how to hold her own and rules the King who is bright, cheerly, little man. (Joseph Longford, The Story Of Korea, London :T. Fisher Unwin, 1911, p.318).
왕비는 키는 아주 작지만, 당당하고 처신할 줄도 분명히 알고, 영리하고 명랑하며 적은 남자인 왕을 다스릴 줄 아는 용감한 여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 자료는 파크스 양이 그 당시 기록해 둔 것을 케스윅(James J. Keswick)과 결혼 후에 작가 '롱포드'(Joseph Longford)에게 건네준 것이다. 전체 본문은 별도의 기회가 주어지면 상세하게 번역할 것이다. 그리고 파크 공사의 둘째 딸이 마벨 파크스(Mabel Desborough Parkes/-1890)이다. 이 딸은 영국 극동지역 해군 제독 '윌리스'(George O. Willes)의 전속부관이었던 '레벳'(Egerton Bagot Byrd Levett-Scrivener) 해군 대위를 만나 1884년에 결혼하였고, 1885년에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파크스 공사는 외손자를 본 행복의 편지를 보냈고, 안타깝게도 1885년 이 해에 베이징(北京)에서 죽는다. 그런데 더욱 불행하게도, 파크스의 둘째 딸은 결혼 6년되던 해 1890년에 낙마(落馬)로 인하여 죽고 만다. <파크스 家係圖/자세히보기>.
이제는 제 자리를 찾자!!
"일본 궁내청 왕실도서관에 '왕실의궤' 오대산본 44종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그 중에는 명성태황후의 죽음과 2년 2개월에 걸친 슬픈 국상의 기록 '명성태황후 국장도감의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궁내청 소장 의궤 반환운동의 과정에서 명성황후 살해사건, 그리고 암살당시 사용된 칼과 마주치게 되었다"는 '혜문'(慧門) 스님의 증언이다. <자세히보기>.
이 일본 궁내청 안 어디엔가 '명성태황후'의 '진자 사진'(御眞)이 숨겨져 있을, 아니 잘 보관되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소이(所以)는 무엇일까?
위 이미지는 명성태황후 숭모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며,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기념관'에 걸려 있는 명성태황후 영정이다(원본은 컬러임). 명성태황후 생가의 문화재 설명가는 현재 명성태황후의 '진짜 사진'(御眞)은 실존하지 않으며, 명성태황후라 알려진 사진은 모두 '시녀/궁녀'의 사진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위 초상화는 명성태황후를 묘사한 여러 글들을 토대로 권오창 화백이 그린 것으로서, '가장 닮은 초상이다'라고 '다니엘 정'은 전한다. <자료협조/ 다니엘 정>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니, '순종효황제'가 어머니 명성태황후를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필자가 보아온 사진들 중에는 '진짜 사진'(御眞)이 국내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게 되었는데...글쎄...??...이승만의 저서 '독립정신'(1900)에 실린 <사진①>은 얼굴이 일그러져 있어 변조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장도빈의 '대원군과 명성황후'(1927)에 실린 <사진②>는 <사진①>과 비교하면 일그러진 얼굴이외는 자태가 비슷하다. 그리고 1935년 조선일보 '신년특별호'에 실린 '규중에 숨은 고은 각씨' 제하의 <사진③>을 자세히 보면 이 사진도 앞의 두 사진들과 옷맵씨는 물론 주름의 그림자까지 닮아 있어 아무튼 세 사진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고 전한다.
자, 그런데 오른쪽 사진은 필자로서는 처음 대하는 어진이다. 이 어진은 1910년 한일병합 후에 '황제'가 '왕'으로, '폐하'가 '전하'로, '황태자'가 '왕세자'로 칭호의 격이 낮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황실의 제복을 입고 찍은 순종효황제의 모습이다. 이 사진은 1936년에 일본에서 발간된 '황실황족성감'(皇室皇族聖鑑) 속에 수록된 것이라고 전한다. [송광호 칼럼 <13> 사라진 조선왕조 마지막 후손들의 초상/자세히보기]. 작가 송광호 씨의 노고에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필자는 이 책을 보진 못했으나, 일제가 강제로 한국을 병합하고 나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후손들의 초상을 실으면서, 어찌하여 '명성태황후'의 사진은 빼놓았는가!! 그 저의가 무섭지 않는가!! 필자의 판단이 앞으로 입증될 것이다. 일본제국을 조종해오던 '프리메이슨' (로스차일드가문ㅡ하자르제국/ 하자리아제국/ ReformationOnline/자세히보기)이 '명성태황후'에 대하여 겁을 먹었던 것이다. 이 '여우'(일제가 비하시킨 명성태황후의 별칭)를 살려두면, 자기들의 대륙침탈 음모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기에...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밝혀둠은 바로 '비밀결사의 꼭두각시' 일본이 표방하는 대륙침탈은 한반도와 중국대륙의 점령이 아니다. 저들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러시아였다. 다만, 한반도와 중국을 우선 점령하여 '베이스기지'로 삼아놓은 후에, 점차적으로 러시아를 점령하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러시아가 미리 만주지역을 점령하였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일으킨 전쟁이 '러일전쟁'(1904-1905)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이유는 '역사적 사실' 속에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역사적 진실' 속에서만 찾아질 뿐이다. 러시아는 '정교'(Orthodox)의 마지막 보루였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권에서 이루어진 '크로노스'(Χρονοζ)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하나님은 러시아의 정교를 보호하시는 것이다!! <필독관련자료/ReformationOnline/1453년 무슬림 투르크족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자세히보기>. 그러기 때문에...'역사적 사실'에서는 동구권의 '정교인들'이 무자비하게 희생을 당하였다. 비근한 예로서, 폴란드가 그러했고, 아르메니아가 그러했다. 그러면 왜 '정교인들'이 이토록 희생을 당해야 했는가? 이에 관한 자료는 별도로 올릴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관련 서적들을 구입해서 읽어보면, 하나같이 제대로 원본들을 입수하여, 말끔하게 밝혀놓은 자료들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니...참으로 개탄스러울 뿐이다. 교수직 및 연구직에 있는 자들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외부제공(산학협동체) 연구비를 지원받아서 얼마든지 자료들을 밝혀낼 수 있으련만...TV다큐멘터리에 몇 초 나오는 '인터뷰' 정도로서는 불충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른 것이다. 필자 같이 나약한 상황에서...여러 자료들을 입수하려니...참으로 외부의 도움이 없이...여간 버거운 것이 아니다. 특히, 입증해야 할 자료들을 구하지 못해서 발만 동동 굴릴 때는 여간 비통함을 느끼지 못한다. 저들은 지금까지 무얼 했는가?...앉아서 '친일파' 작성에만 몰두하였는가? 지금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가? 과거의 '흑룡회'나 들춰내고 있는건지? 그 비밀조직이 최근에 '백룡회'로 명칭을 바뀐 사실은 알고나 있는건지...? 참으로 '오호로다!!'
[맺으면서] '명성태황후'의 지식이란 중국의 고전의식에 불과하였지만, 세계의 강대국들과 그들의 정부에 대해서 지적인 높은 안목을 소유하였고, 넓고 진보적인 정책을 가진 애국적이고 국가에 헌신하는 왕비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분은 따뜻한 마음, 어린애들을 위한 부드러운 사랑과 섬세함을 지녔고, 어느 유럽 고관에게도 명예스러울 만큼 우리 선교사들에게 사려깊었다. 그분은 외국의 궁전을 본 일이 없는 한국인이지만 완전한 숙녀였다.'
그러한 사실도 전혀 모른채 서원(書院) 중심의 '주자학'이 한반도를 '은둔의 나라'로 인식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 격의 나라'로 인식되었을 때...그 속에서 저 여주(驪州) 땅 한 조그만 고을에서는 '민자영'(閔玆暎)이가 열심히 이 '주자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민치록(閔致祿)의 딸로서, 16세에 고종의 아내가 되었으니, 바로 '명성태황후'이다. 고종은 영조의 형제 안현군의 현손(玄孫/5세손)인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 이재황(李載晃) 곧 이명복(李命福)이었다. 이 영조의 부친인 숙종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초비(初妃)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였으며, 계비(繼妃)는 인현왕후(仁顯王后)였다. 바로 인현왕후가 민자영의 6대조(六代祖)요 영의정이었던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그러니 인현왕후가 민자영의 5대조 고모할머니인 것이다. 요즈음 MBC TV에서 방영중인 '동이'(同伊)에 나오는 인물이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도쿄를 세계제국의 수도'로 만들려 했던...극동 곧 동양의 제국화에 있어서, 한반도는 바로 이 제국화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이 음모에는 6명의 주역들이 포진되어 있었으니, 오쿠마와 이토 두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내세운 '동양의 평화론'은 겉으로 보기에는 문명과 문화를 이식시켜 옴으로써 식민지화에서 필수 요건들로서 선교, 교육, 의료, 복지, 건설 등의 '요목(要目)들'을 끌어들였던 것이요, 특히 선교의 부문을 살펴보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체험하는 그러한 '복음전도' 및 '영적인 각성'을 통한 '하나님의 그 왕국'의 건설에 있었던 것이 주요 사역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역을 빌미로 하여서, 식민지화를 위하여 선교사, 저널리스트, 작가 등을 보내어서, 우선적으로 그 나라의 '사전' '문법' '전통' '역사' '문화'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여 발행하고 있었다. 자료를 찾다보니, 일본의 경우, 이러한 실례로 발행된 책들이 부지기수이다. 필자 역시 '그리스도교역사'를 읽고 배우는 과정에서 보편적인 '역사적 소산'만을 곧 '미개화된 남의 나라에다 개화의 꽃'을 피우다!!'라는 판에 박힌 전제를 내세운 자료들을 섭렵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킹제임스성경>을 만나게 되었고, 그 성경을 6년간이나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투성이들'을 만나고 그것들을 바로 잡는 사역에 전력해 오다가...일부 자료들 한 구석에 몇 줄 안되는 내용이었지만...그런 것들이 하나의 단서가 되어서...진실로 역사를 올바르게 보고 판단해야 겠다는 소명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필자가 작년에 <호국스페셜 제1부>를 연재하는 동안, 언급하였지만, 동일한 물체를 보는데는 두 가지가 있으니, 바로 '정시'(正視)와 '사시'(斜視)라고 말한 바 있다. 제아무리 올바른 사물이라도 통과하는 '렌즈의 초점이 제자리에 놓이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진리일진대...이 렌즈 초점을 흐려놓고서는 비뚤어지고 뚜렷하지도 않은 피사체를 보고는 그대로 믿고 따라오라는 식의 역사교육이 있었고, 그것을 교육현장에서 직접 체험하였던 필자이다. 그 당시는 주로 암기식으로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교육이었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학교 현장에서의 교육은 점점 발전해가는 새시대를 향하여 대비하지 않았던(못했던) 것 같다. 그 전환점이 1979년 10월 26일 사건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이후로 들어선 정부들의 정책들은 그 이전의 정부가 세워놓았던 역사교육의 현장들을 차곡차곡 부숴나가는 일(?)에 전념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필자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러다가 근래에 PC의 대중 보급화로 인하여 숨겨지고 눌려있던 많은 역사적 기록물들이 발굴되기 시작하였고...네티즌들은 갈등을 일으켰을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 역시 그러 사람 중 하나이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배웠던 일부 사실들이 '옳지 않다'라는 결말에 이르렀을 때는...이미 역사의 현장은 멀리도 와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진실들을 필자 자신 만이 간직하고 지나치기에는 '양심'에 반영되는 '자책' 때문에 이리도 밝히게 된 것이다. 세계 역사상, 우리 한민족 처럼 타민족들로부터 침략을 받은 예는 거의 전무할 것이다. 최근에 어느 네티즌의 짧은 글을 읽었는데...이 글의 부제로 실었듯이, '이 세계에서 어떤 나라가 931번의 침략을 받고도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라는 글에 큰 공감을 가지게 되었다. 참으로 이렇게 수난을 받아오면서도, 우리 한민족의 언어가 생존해 있고, 문화가 생존해 있고, 역사기록이 생존해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한 민족임을 자부하게 된다. 이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이 국가가 주도해 나가야 할 역사교육의 핵심이 아닌가 싵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러한 물결들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고...그 대신에 한반도 안에는 이국적인 요소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다문화가족'이 바로 그 현장이다. 그 이전에 필자는 한 가지 묻고 싶다. 월남전에 참전하였던 민간인과 군인을 통해서 있었던 '라이 따이한'의 존재는 지금 어디로 사라졌는가!! 記錄이 없다하여서 모든 과거의 痕跡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2010년은 이같은 우리 한민족의 과거의 흔적을 교훈삼아서...서로가 공존하는 시대로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을 괴롭혀 왔던 저들을 너른 마음으로 포용해주고 용서해주고 화해해주는 그러한 '큰 바다 같은 마음'으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통하여 인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생각이시니, '인류사해동포주의'(人類四海同胞主義)요, 우리 한민족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고 호소하는 바이다!! 특히, 일본의 경우, 저들이 100년전에 우리에게 자행해 온 행위들은 우리 한민족에게 '원한'을 심기에 충분하다. 필자도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들어왔고 배워왔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져 있다. 저들의 그 행위들은 용서가 되진 않더라도, 이해해야 할 것이니, 그리고 급변해가고 있는 세계 질서, 곧 '뉴월드오더'(New World Order)로부터 새로이 진행중인 '뉴인터내셔널오더'(New International Order) 속에서 살아남아야 할 것이니, 이는 이 시대의 우리의 의무(몫)이요, 훗날 우리 후손들이 이어가야 할 발판인 것이다. 오늘 라디오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이 호주정부로 부터 착륙허락을 받지 못하고 본국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아픈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만약 우리 쪽으로 왔더라면....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처하였을까??...물론 2007년 우리의 두 형제들이 탈레반에게 희생되었던 아픈 상처가 아직 아물진 않았을지라도...용서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우리 한민족은 포용하지 않았을까?? 혼자서 중얼거렸다. 끝으로, 외형상 우리 한반도 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그 복음'을 전수받았던 일본이다. 그 일본의 복음화를 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이 일본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때가 이른 것 같다'고 감히 전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그리고 필자의 한 가지 소원이라면, 일본이 '명성태황후'의 '진짜 사진'을 되돌려주는 아량을 베풀어주기를 간구해본다. 21세기 앞으로도 이렇게 응어리진채 '반목' 속에서 지낼 수야 없지 않겠는가? <용서와 화해>의 인간의 지고의 가치 중 하나인 '미덕'(美德)이 발휘될 그 날이 오기만을 2010년 '국치 100년'에 간구해본다!! 그리고 이 글이 집필되도록 기도와 마음과 '헌물'로 도와주고 있는 '화중광야 가족' 여러분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샬롬!! (2010.6.9/오후에) (2010.6.10/깊은 밤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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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1] '명성태황후암살사건: 114년만의 풀림'
어느 나라든 역사를 말할 때에는 자국 중심으로 서술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 인식은 많은 갈등을 겪어 왔고, 식민지 지배를 받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그 분노와 아픔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9년 8월24일 방영된 일본 메인 뉴스 프로그램인 'TV 아사히'가 방영한 '報道STATION'의 15분 정도에 걸친 '명성태황후 살해 ㅡ 114년째 '(일본은 '민비시해'라고 격하시킨다) 관련 보도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기도 한다. 이 보도자료를 '영상캡쳐'과 함께 전문을 번역하여 실은 사이트가 있어, 여기 올린다. <자세히보기>. [하단 YouTube 동영상 참조]. 다음은 <YouTube>에 올려진 관련 동영상 <명성태황후암살사건: 114년만의 풀림>이다:
◆明成太皇后暗殺事件:114年目の氷解(1)
◆明成太皇后暗殺事件:114年目の氷解(2)
◆明成太皇后暗殺事件:114年目の氷解(3)
[부록2] 미국 '뉴브런스윅 신학교' 출신의 동양 선교사들 ㅡ 베어벡, 위코프, 그리피스 그리고 언더우드
베어벡 선교사의 행적을 발표한 위코프 교수의 신상기록은 거의 찾을 수가 없다. 다음은 필자가 간신히 찾아 낸 것이다:
Martin Nevius Wyckoff was born on 10. Feb. 1850 at Middlebush, Somerset County, New Jersey. He was the son of Jacob Wyckoff and Sarah Jane Voorhees. Martin Nevius Wyckoff was baptized at Dutch Reformed Church, Middlebush, Somerset County, New Jersey. He graduated from Rutgers University, New Brunswick, Middlesex County, New Jersey. He was professor of chemistry and physics at Union College, Schenectady, New York. Martin was also Treasurer at Tokyo University and a missionary and educator there. He married Anna Catharine Baird, daughter of William Baird and Harriet Voorhees, on 5. Jul. 1873. Martin Nevius Wyckoff died on 27. Jan. 1911 at Tokyo, Japan, at age 60. (http://www.conovergenealogy.com/conover-p/p2732.htm)
위 자료에서는 그가 '도쿄제국대학교'의 '재무담당자'였다고 했는데,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메이지대학교'의 교수이기도 하였으니, 그곳에 가보면 그의 신상기록을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위 약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네델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에서 밥팀례를 받았으며, 베어벡(1830-1898) 선교사와는 미국 '네델란드 개혁교회'가 세운 '러트거스대학교'(Rutgers University)의 동문이다. 그리고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도 1884년에 이 대학교(뉴브런스윅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이듬해 일본(요코하마)를 거쳐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언더우드 선교사는 '네델란드 개혁교회'가 아닌 '미국북장로교회'로부터 한국 파송을 받고,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선을 타고, 다음 해 1885년 1월 25일에 일본의 요코하마(橫濱)에 도착하였다. 당시 일본 안에는 '네델란드 개혁교회'가 운영하는 '뉴브런스윅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이 많았다. 1859년에 베어벡(Guido Verbeck)을 위시해서 브라운(Samuel Robbins Brown), 시몬즈(Duane B. Simmons)와, 1861년에는 온 발라(James Hamilton Ballagh) 등의 선교사들이 와 있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장로교로 이적하였던 관계로, 일본에 와 있던 장로교회의 선배 선교사 햅번(James Curtis Hepburn) 박사 집에 머물면서,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에 필요한 훈련을 받게 되었다. 1882년 한국의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9월에 일본으로 망명와서 1883년 4월에 그리스도인이 된 '이수정'(李樹廷)으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수정은 요코하마 주재 미국성경공회의 총무 '루미스'(Henry Loomis) 선교사의 요청을 받고서, 한문성경을 토대로 하여 '현토한한신약성서'(懸吐漢韓新約聖書)와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 그 가운데서 '마가복음'이 1885년 초 요코하마에서 1,000부를 인쇄하였으며, 이 번역본을 언더우드가 읽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요코하마에서 2개월 이상 말을 배움과 동시에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얻어 갖고, 3월 26일 '고오베'(神戶)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4월 5일 한국(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이광린,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서울:연세대학교출판부, 1992, p.16-19. 참조]
비록 선교사 파송 교단은 달랐지만, 베어벡 선교사와는 나이가 무려 29년이나 차이가 나지만, 언더우드는 '뉴브런스윅 신학교' 출신의 베어벡 선교사의 후배였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까지 베어벡과 언더우드 두 선교사 간의 교제관계에 대하여는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일본어 동사의 활용법'(1887) (베어벡 저서) <자세히보기>
◆'영작문초보'(1892) (위코프 저서)<자세히보기>
베어벡과 위코프 두 선교사는 미국 뉴저지주 '뉴브런스윅신학교'의 동문이다. 베어벡이 위코프의 선배이다. 두 선교사는 각각 '메이지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시 일본어의 영어적용 및 영어교육에 관하여 가르치기 위해서 위와 같이 교재를 저술하였다. 다음은 두 선교사의 약력이다:
G. F. Verbeck, A Synopsis of the Conjugations of the Japanese Verbs, with Explanatory Text and Practical Application. KELLY & WALSH, LIMITED Yokohama 1887年(明治20).
Verbeck はフルベッキと呼ばれ、S.R.Brownと同じく米国オランダ改革派教会の宣教師である。長崎渡来後、長崎洋学所済美館・致遠館の教師として大隈重信・副島種臣等を教え、1872年(明治5)に大学南校の教師から教頭となり、太政官法律顧問となった。1879年より東京一致神学校・明治学院教授として生涯を遂げた。この本は彼が明治学院教授時代に著したものである。
Martin N. Wyckoff, "English Composition for Beginners" Prepared for Japanese Students (英作文初歩)Teacher in MEIJI GAKUIN 丸善商社 1892年(明治25)
1878年(明治11)J.H. Ballahは横浜に先志学校を開設し、ワイコフが1881年(明治14)より引き継いだ。この学校は1883年(明治16)にはヘボン塾の後身築地大学校と統合され東京一致英和学校となり、1888年(明治19)年4月に東京一致神学校等とともに明治学院へと発展した。この本は明治学院で使われたワイコフ著の英語教科書である。明治学院にはWykoff賞という英会話賞があった。
<Created/20100529> <Updated/201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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