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londontimes.tv/sub_read.html?uid=124
大韓帝国、その激動の瞬間
대한제국, 그 격동의 순간들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대한 제국, 그 격동의 순간들
▲ 고종황제(李熙)와 황태자(순종). 1907년 고종황제는 헤이그 밀사에 대한 책임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런던타임즈
▲ 대한제국의 군인이었던 윤웅렬(尹雄烈)소장과 그의 손자들. 그는 국채보상운동을 와해시킨 것으로 인해 106명의 친일 반민족 자 명단에 포함된다 ©런던타임즈
▲ 대한제국 고종황제(당시54세-1902년)의 서울 시내 행차도. 근위병들의 표정이 생생하다. ©런던타임즈
우리에게도 제국이 있었다. 비록 13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 정신과 이름은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거듭 나게 된 것이다. 세계 열강들이 각축을 벌이던 격랑의 시절 속에서 태어나고 막을 내린 대한제국,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수레바퀴는 돌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100 년 전 그 때와 너무도 흡사하다.
한반도의 분단으로 오히려 현 상황은 그 때보다 한층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6자 회담의 주변국 당사자 미·일·중·러 항상 그들이었다.
단지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멀리 있던 미국이 코 앞에 다가와 있을 뿐…
대한제국은 친러파의 주도로 고종이 러시아공관에 이동했던 아관파천에서 환궁한 직후에 황제즉위식을 거쳐 1897년 선포 되었다. 비록 외세에 의지한 제국의 설립이었으나 그 것은 자주 독립국을 갈망하던 우리 선조들의 꿈의 실현이었다. 이 즈음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가 결성되고 독립신문이 발간되고 독립문이 세워졌다.
우리 선조들은 그 때 신흥제국 러시아를 너무 믿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멀리 있던 러시아가 어떻게 극동의 한반도까지 세력을 뻗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피터스부르그에서 연해주와 중국의 대련을 있는 시베리아 만주철도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주연이 바뀌고 미국의 8함대와 오끼나와등의 미군기지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강국 러시아에 의지 했던 대가는 냉혹했다. 내정간섭과 함께 수 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주어야 했으며 기회균등을 요구하는 열강인 갑들에게 을로서 수없이 도장을 찍어대야 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되돌아 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나라는 자주 독립국인가? 그리고 하나의 강국에만 너무 지나치게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작금의 친미 반미의 논쟁은 진부하다. 100년이나 되풀이해온 소득 없는 패배주의의 호들갑일 뿐이다. 해방시절 그 노래를 기억하는가?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 속지말자 일본놈 일어난다’ 이제 ‘중국놈 주의하자’ 라고 한 귀절 더 붙여야겠다. 동북공정을 통해 준비중인 중국은 북한에 혼란이 오면 그 땅을 접수하려 할 것이다.
호랑이에게 팔다리를 하나씩 떼어주고 어찌 몸통만으로 생명을 유지할 것을 기대하겠는가.
일치단결하여 스스로의 힘을 기르고 외교에는 균형감각을 살려야 한다.
분열된 모습으로는 살쾡이 한 마리도 물리칠 수 없다.
대한제국은 1910년 치욕적인 한일합방으로 13년 만에 그 막을 내린다. 친러파였던 이완용 일파가 친일파가 되어 데라우치 총독에게 제국을 들어다 바친 것이다. 무력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그들이 지하에서 변명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백성에게 봉사하는 책임자의 자세가 아니다. 적어도 그 책임 있는 위치에 오른 자는 목숨을 걸고 항거 했어야 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동해물과 백두산을 그리며 아직도 가슴시린 100여년 전 역사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려 한다.
<김지호 런던타임즈 발행인>
http://sazine.co.kr/ex/1062
大韓帝国皇室の写真展
순종황제 친경식 행사 장면,1909년, 이와타 촬영
한미사진미술관에서는 그동안 수집해온 근대 사진들 중에서 황실 사진만을 선별해 2009년 3월 7일부터 <대한제국 황실 사진전>을 가진다.
지난 2006년 한미사진미술관 확장개관 전 <우리 사진의 역사를 열다>에서 그동안 미술관이 수집해오고 소장해온 근대사진들을 공개해 많은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 사진관련 사진으로는 지운영이 촬영한 것으로 추청 되는 초기 고종 사진, 그리고 의친왕의 아들인 이우공의 결혼 앨범 등이 포함되었었다.
<대한제국 황실사진전>은 그 연장선상에서 마련된 전시로 미술관 근대사진 소장품 중에서 황실사진만을 선별해서 기획된 전시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는 고종과 순종의 어진부터 영친왕과 이우의 초상 사진, 순종의 친경식, 그리고 고종의 국장 등 황실과 관련된 모습들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최근까지도 명성황후의 초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궁중의 여인의 원본사진이 처음 공개된다. 이 사진은 다양한 형태로 복사 또는 제작되고 변형되어 진위여부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원본이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확대되거나 사진의 상태로 인해 복사본이 전시되는 것이 아닌 역사의 시간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는 사진의 원본들로 전시가 구성되며, 앨범 속의 사진들은 영인본으로 제작되어 관람객들이 직접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을 들춰볼 수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한미사진미술관의 <대한제국 황실사진전>은 조선 왕조 519년에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 황실이었던 대한제국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지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이태왕국장의사진첩-조선장열,1919년,촬영자 미상
남서 순행을 마치고 인정전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순종과 일행들, 촬영자 미상, 1909년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 촬영자 미상, 1907-1910년
일본 황태자 한국방문 기념사진, 촌상천진촬영, 1907년
java
Showing posts with label Joseon royal families.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Joseon royal families. Show all posts
Thursday, December 6, 2012
Wednesday, September 5, 2012
Pitiful Joseon Yi Dynasty,from the birth began as a betrayal
http://trustle.egloos.com/1324450
지지리도 못난 이씨왕조(李氏王朝)
이씨왕조는 왕조의 탄생부터 배신으로 시작되었다.
신라와 이씨조선은 자신들의 통치력이 다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자발적으로 왕씨고려와 일본에 통치권을 넘겼다. 그러나 왕조말기의 왕씨고려가 스스로 모순을 극복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원명교체기의 대륙정세에 부응하고 불필요하게 백성들을 전쟁에 희생시키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 위화도 회군이 전혀 명분을 가지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존재했던 다른 체제교체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 명분은 상당히 초라하다.
이성계가 명나라에 올린 표문은 다음과 같다.
중화를 마땅히 높일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홍무 21년(1388)년에 신우와 최영 등이 군대를 함부로 일으켜 요동으로 향하고자 했으며, 25년(1392)에 왕요(공양왕)와 정몽주 등이 신우의 부정한 뜻을 계승하여 장차 상국을 범하려 하므로, 신이 온 나라 신민들에게 효유하여, 오랑캐가 중화를 소란하게 할 수가 없으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할 수 없다고 말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역리와 순리를 알게 되고, 저들이 모두 그 죄에 자복하였으니, 다만 상천이 밝게 알 뿐이 아니오라, 실로 황제께서 환하게 보신 바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aa_10206001_001
장수가 왕을 범하는 것은 괜찮고 오랑캐가 중국을 범하는 것은 안된단 말인가?
새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다 명에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에서 어느 것을 써야할 지 물어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쓰게 된다. 이 조선(朝鮮)은 단군조선이 아니라 기자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다. 이씨조선은 기자국(箕子國)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01년 11월 29일
'삼가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은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가 혼미(昏迷)하여 도리에 어긋나서 스스로 멸망하는 데 이르게 되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신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보게 하였으므로 놀라고 두려워서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요사이 황제께서 신에게 권지 국사(權知國事)를 허가하시고 이내 국호(國號)를 묻게 되시니, 신은 나라 사람과 함께 감격하여 기쁨이 더욱 간절합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國號)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小臣)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奏達)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裁可)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aa_10111029_001
한민족사에서 구체제의 지배세력을 도륙한 경우는 이씨왕조가 유일하다.
왕씨고려는 신라와 견씨백제의 지배세력을 포용하였다. 일본 또한 이씨조선의 왕족을 일본귀족으로 대우해 주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왕씨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 3부자를 목을 매달아 죽이고 강화도와 거제도에 유배시켰던 왕씨일족은 모두 바다에 던져죽였다. 이어 전국에서 왕씨 색출작업을 벌여 발견되는 대로 목을 베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id=Silla&ctgry=2465
명나라에 기대어 탄생한 왕조인지라 명나라를 섬기는 풍조는 왕조내내 계속되었다.
태종은 명나라에 말을 여러 차례 바쳤는데 아래 기록은 그 중 하나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9년 10월 22일
임금이 태평관에 가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임금이 황엄에게 이르기를,
“황제의 은혜가 이미 중하니, 감히 말 1만 필을 바치겠습니다.”
하니, 황엄이 말하기를,
“원제의 자손이 여거하에 도망가 살고 있어 8대를 전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내부하지 아니하여, 황제께서 내년 봄에 평정코자 하여 2월 초6일에 대군을 움직이기로 기일을 정했으니, 마땅히 진헌 마필을 운을 나누어 시기에 도달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ca_10910022_001
명나라에 바치는 것은 말 뿐만 아니라 처녀도 있었는데 태종에 이어 세종도 여러 차례 명나라에 처녀를 바쳤다. 이것이 백성들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은 아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09년 07월 18일
중궁이 경회루에 나가서 처녀 7인을 불러 보고 전별연을 베풀었는데, 처녀의 어머니와 친족들도 또한 연회에 참예하였다. 집찬비(執饌婢) 10인과 수종(隨從)하는 비(婢) 16인은 루(樓) 아래에서 음식을 먹이었다. 성씨(成氏)·차씨(車氏)에게 따르는 비(婢)는 각기 3인이고 그 나머지는 각기 2인이었다. 밤에 날씨가 맑고 고요한데 슬피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니, 이를 듣는 사람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씨왕족은 이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한(漢)나라가 공주를 오랑캐에게 시집보낸 것과 대조가 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06년 07월 20일
진헌색이 계하기를, “이번 처녀를 선택하여 고를 때에 종실의 친척과 전조(前朝) 왕씨와 귀화하여 온 사람과 국가에 관계되는 죄인의 딸자식은 모두 간선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씨왕조의 처녀진헌은 단지 왕조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
http://www.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thrd=1739
신라촌락문서에 의하면 신라의 4개 촌락의 인구가 442명이었는데 이중 5.6%에 달하는 25명이 노비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만 해도 노비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씨왕조의 통치기간에는 노비의 수가 증가하여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는 백성의 1/3이 노비였다. 이씨왕조의 이러한 성격때문에 일본이 침략해 왔을 때 백성들이 도리어 이씨왕조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4월 14일,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났다. 거가(선조일행의 피란행렬)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중략) 임해군의 집과 병조 판서 홍여순의 집도 불에 탔는데, 이 두 집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유도 대장이 몇 사람의 목을 베어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이 떼로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7월 1일
왜장 청정(淸正)이 북계로 침입하니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임해군과 순화군)와 여러 재신을 잡아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남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 토관 진무 국경인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는 스스로 대장이라 일컬으며 갑기 5천으로 진을 결성하였다. ... 경인이 마침내 객사를 포위하고 두 왕자 및 부인, 여시 노비 등과 재신 김귀영, 황정욱, 황혁과 그들의 가속을 잡아 모두 결박하고 마치 기물을 쌓아놓듯 한 칸 방에 가두었다. ... 그리고 여러 진과 보의 토병과 호수가 모두 관리를 붙잡고 배반하며 항복하였으므로 왜인들은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점령하게 되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id=Silla&ctgry=1793
19세기 말,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쓸고 일본이 서양문물을 열심히 배우고 있을 때 이씨왕조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고종의 탄생일에 감사와 수령들은 전례에 따라 진상을 하였는데, 그들은 왕가의 친척을 통하여 궁중으로 보냈다.
정해년(1887) 7월에 민영소와 민영환이 입시할 때 김규홍은 전라감사, 김명진은 경상감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민영환은 먼저 김명진의 물목을 바쳤다. 그 물목은 일본 명주 50필과 황저포 50필뿐이었다. 고종이 얼굴을 붉히며 그 물목을 용상 밑으로 던져 버리자 민영환은 황급히 물목을 주워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 후 민영소가 김규홍의 물목을 바쳤다. 그의 물목은 춘주 500필, 갑초 500필, 백동 5합, 바리 50개였고, 기타 물건도 이와 같이 많았다. 고종의 얼굴은 희색이 감돌며, “번신의 예가 당연히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규홍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민영환은 그 즉시 나가서 자기 돈 2만냥을 보태 물건을 사가지고 바쳤다. 민영환은 김명진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http://www.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thrd=1813
이것은 매천야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매천야록이 야사이고 위의 기록을 뒷받침할만한 다른 기록이 없긴 하지만 이 기록은 대체로 당시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이씨왕조는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넘기기로 한다.
조선왕조실록 순종 3년 8월 22일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 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전권위원(全權委員)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또한 짐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하라.”
한일합방조약에는 통치권을 넘기는 댓가도 명시되어 있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예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http://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thrd=1787
이은(영친왕, 1897~1970)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1907년 대한제국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이후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1940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박정희가 만주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있을 당시에는 군부대와 학교를 돌며 태평양 전쟁을 독려하고 있었다.
1945년 일본이 미국에 항복했을 때 그는 제1항공군 사령관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은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http://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thrd=1693
자동 검색 관련글
우리 백성들은 경복궁을 불태우지 않았다by 티티
퍼블리싱 및 추천같은 카테고리의 글
트랙백(0) 덧글(19)
트랙백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TrackbackURL : http://trustle.egloos.com/tb/1324450 [도움말]
덧글
강희대제 2011/01/22 18:07 #
조선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왕조가 실망스러운건 정말 부인할 수가 없군요.
솔까역사 2011/01/22 18:10 #
예 범위를 조선이 아닌 왕조로 잡으면 될 거 같습니다.
검투사 2011/01/23 09:41 #
이제 <마이 프린세스> 같은 드라마까지 나온 것을 보면서 이 나라 국민들이 정말 막장으로 치닫는구나 싶더군요.
이씨 왕조의 "마지막 공주"의 자손(김태희 역)의 드레스룸을 보면서 "저거 꾸밀 돈은 어디서 나왔을까" 싶더라는...
(물론 무슨 신하의 자손이자 재벌인 야동순재가 번 돈이겠지만, 참 씁쓸하더군요.)
강희대제 2011/01/23 12:38 #
오오
중간횡령과 뇌물수수 / 관직매매로 인해 벌어들인 돈은 과연 어디다 쓰나 했더니 그런데에 쓰기 위한 것인가..
오오미..
검투사 2011/01/23 13:01 #
뭐, 무슨 만화 원작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황제"(최불암 역)인가가 "독립운동했다"고 나오고
이번에는 "순조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준 돈을 야동순재의 아버지인지 할아버지인지가 빼돌려서 반성하려고" 김태희 공주를 모셨다는 식이지만... 그러고 보면 그 "독립운동 자금하라고 준 돈"은 어디서 났을까를 생각하면...
검투사 2011/01/23 09:42 #
아울러 <마이 프린세스>의 그 드레스룸은 그것을 만든 방송국의 아침방송에서 "시청자들의 (긍정적인) 눈길을 사고 있다"고 소개하더군요. (먼~산)
KittyHawk 2011/01/24 21:07 #
그나마 그런 왕조의 창피함을 자각했기 때문인지 구한말, 일제를 경험했던 황족 중 한 분은 왕조 부활을 반대하고 민주공화국의 건국을 주장했다더군요.
타네 2011/01/25 03:14 #
나름 근심이 깊었던 걸로 압니다. 독살위협때문에 항상 깡통음식만 드시고 가슴엔 홧병이 있었다고,... 임시정부로 건너가려고 항상 기회를 노렸다던데..
일제 강점기 때의 정책이 "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모르게 하라" 예요. 유독 침략 받은 역사를 강조하고 업적을 지나치게 비하해서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없애는게 주목적이었죠. 지금도, 백제사람들 일부가 일본에 건너가 나라를 세웠던 기록과 여러가지 고대사들은 탈취해가서 돌려주기는 커녕 보여주지도 않는다고 해요.
사실 조선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완전히 대등했고, 조선초기까지 일본이나 여진한테 조공을 받던 제2의 열강이었는데..군사가 용맹해서 중국에서도 부담스러워하고 견제가 심했다고....
사실 조선의 탄생이 반갑진 않아요. 잃어버린 요동땅을 되찾고 사대주의를 합리화하지 않았다면 군사적으로도 더 강해져서 후대의 비극이 없지 않았을까 한다는.....
그런데 윗 글이 참......까라면 깐다고 못 깔게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
타네 2011/01/25 03:15 #
근데 혹시 뉴라이트 세요?
백범 2011/01/26 12:41 #
이조를 까면 뉴라이트???
에라이 파쇼같은 놈아.
평생 일본 탓만 하세요. 대부분 너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국수주의 파쇼들 뿐이니 그러니 무슨 발전이 있겠냐.
너님은 병사 월급으로 지급되는 쌀 대신 모래하고 자갈쪼갠걸 월급으로 주는 민모씨 일가족의 직계후손이라도 되시는지???
타네 2011/01/25 03:15 #
..............왜놈 이구나
백범 2011/01/26 12:41 #
..............파쇼 였구나
고리아이 2011/01/25 17:41 #
영친왕의 부일은 귀한 이야기네영
그렇다고 해서 조선왕
http://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thrd=1787
한일합방의 정치적 책임은 이씨조선의 왕에게 있다.
우리는 흔히 한일합방에 대해 그 책임을 몇몇 친일파의 탓으로 돌리고 만다. 그러나 한일합방의 체결과정을 살펴보면 한일합방의 최종적인 책임은 왕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순종 4권, 3년(1910 경술 / 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22일(양력) 1번째기사
한일 합병 조약안(韓日倂合條約案)에 대하여 국무 대신 외에 황족 대표자 및 문무 원로의 대표자들이 회동하여 어전회의를 열었다.
순종 4권, 3년(1910 경술 / 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22일(양력) 2번째기사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 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전권위원(全權委員)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또한 짐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하라.”
순종 4권, 3년(1910 경술 / 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22일(양력) 3번째기사
일한병합조약(日韓倂合條約)이 체결되었다.
〈병합 조약(倂合條約)〉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는 양국간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 만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위원에 임명한다. 위의 전권위원은 회동하여 협의하여 다음의 여러 조항을 협정한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예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인(韓人)으로서 특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고 또 은금(恩金)을 준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前記)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施政)을 전적으로 담임하여 해지(該地)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있고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경유한 것이니 반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를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記名)하고 조인(調印)한다.
융희(隆熙) 4년 8월 22일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명치(明治) 43년 8월 22일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의 통치를 일본에 넘기기로 한 것은 이씨왕조의 조정에서 결정된 것이고 이완용은 그 실무적인 협상을 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국의 주인은 왕이니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완용은 이후 고종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게 되는데 이것도 그가 고종의 뜻을 결코 거스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한일합방은 이씨왕조가 결정한 것이므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
일한병합조약문을 읽어보면 그 주요 내용이 이씨왕가의 신분보장과 금전지급에 관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것 또한 이씨조선이 왕국이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이해가 된다. 왕국의 주인인 왕이 자신의 통치권을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고 넘길 리는 없는 것이다. 한일합방을 통하여 왕과 몇몇 왕족은 일본 황족으로 편입되고 나머지 주요 왕족과 대신들도 조선귀족으로 편입되어 신분을 보장받고 은사금도 받았다.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표현을 흔히 쓰는데 일본으로부터 가장 큰 댓가를 받은 사람이 누구이고 왕국의 주인이 누구였던가를 생각해 본다면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분명해 진다.
물론 친일파들이 한일합방의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사실이다. 매천야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宋秉畯(송병준)이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고 李容九(이용구), 徐彰輔(서창보), 李學宰(이학재), 洪肯燮(홍긍섭), 崔晶圭(최창규) 등과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한국인은 회유(懷柔)되기 어려우므로 속국(屬國)을 만들어 진압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고, 그들은 合邦宣言書(합방선언서)를 지어 일본정부로 올렸다. 이때부터 합방문제가 크게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一進會(일진회)가 정부로 合邦論(합방론)을 제의하여 이를 상주(上奏)하기를 바랐으나 李完用(이완용)이 물리쳤다. 그것은 이완용이 합방론을 제창(提唱)하려고 하였으나 일진회에서 먼저 그 안(案)을 제의하므로, 그들을 시기하여 閔泳奎(민홍규) 등에게 연설회를 권장하고 그들의 제의를 물리친 것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id=seadragon&ctgry=2303
한일합방은 조선의 요청을 일본이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대다수 조선의 백성들은 한일합방을 반대하였다. 한일합방 직전의 매천야록 기록을 보면 전국 각지에서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의병활동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대다수 조선의 백성들은 한일합방을 반대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왕국의 주인은 왕이며 백성은 왕국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다. 한일합방의 체결과정을 살펴보아도 백성들의 뜻을 반영하는 과정이 없었고 체결된 조약문의 내용을 읽어보아도 백성들의 안위는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의 최대 관심사는 종묘사직이지 백성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과 순종은 나라를 팔아먹은 나쁜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다. 한일합방에 대한 책임은 정치적 책임일 뿐이지 '좋다'와 '나쁘다'로 구분되는 도덕적 책임이 아니다. 한일합방에 대해 책임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일제식민지배체제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만약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지 않고 일제식민지배체제가 지속되어 조선인이 일본인으로 완전히 동화가 되었다면 이씨조선의 순종은 신라 경순왕과 비슷한 평가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또 한반도를 둘러싼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고종과 순종이 아니라 그 누가 왕이었다 하더라도 이씨조선이 독립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이다. 고종 대신에 당나라의 지배야욕을 물리친 신라 문무왕을 넣고 순종 대신에 원나라의 간섭을 물리친 왕씨고려의 공민왕을 넣고 이완용 대신에 목숨을 걸고 왕씨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킨 정몽주를 넣으면 한일합방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한일합방은 몇몇 사람들의 특수한 성향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당시의 국제적인 역학관계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봐야 한다. 굳이 조상탓을 하자면, 그러한 국제적인 역학관계가 도래할 것을 미리 예측하고 일본처럼 개항과 근대화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지 못했던 이씨조선의 지도자들을 탓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 무리한 바램이다.
한일합방의 교훈은 반일이 아니라 극일이 되어야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1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둘러싸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자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하였다. 또 1982년 광복절 기념식전에서도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한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 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한일합방의 역사로부터 매우 올바른 교훈을 얻는 말들이다. 일본이나 한일합방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미워한다고 해서 이미 지나간 과거가 바뀌지는 않는다. 미래에 또 다시 그런 불행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1984년 가을, 한국 경제가 파산 직전의 상태로까지 가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하여 60억 달러의 융자를 간청하여 그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본 정치인들이 식민지배와 독도에 관해 한국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발언들을 늘어놓자,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하며 속시원한 얘기를 내뱉었다. 그러나 1997년 동남아에서 발생한 외환위기가 한국까지 덮쳐오자, 그도 별 수 없이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이 이를 거절하였고 한국경제는 파산하고 말았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독도 주변해역에 대한 한국의 독점적 권한을 포기하는 '신한일어업협정'을 일본과 맺고서야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나라를 잃은 설움을 절절히 겪었던 조상들이 들으면 화낼 일이 많다.
일본은 한국보다 인구가 세 배 정도 많고 한반도 전체보다는 두 배 정도 많다. 인구가 세 배 많은 나라와 맞서려면 1인당 국민소득이 그 나라보다 세 배 많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일본의 절반밖에 안된다. 규모가 작다면 효율이라도 높아야 하는데 한국의 국가 효율은 일본보다 훨씬 뒤져 보인다. 국가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소 중 하나가 범죄인데 한국의 범죄율은 일본보다 훨씬 높다. 살인을 예로 들어보면, 한국의 살인 발생 비율은 일본보다 무려 다섯 배나 높다. 그 밖에도 매춘여성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거나 일본에 있는 매춘여성의 상당수가 한국 여성이라는 사실들은 우리가 과연 한일합방의 치욕스런 역사로부터 제대로 교훈을 얻고 있는지 회의가 들게 하는 부분이다.
흔히 일본과 친일파를 욕하거나 한일축구시합에서 한국선수를 광적으로 응원하는 것을 애국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국력을 키우는데 별 도움이 못된다. 실질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은 준법, 병역 그리고 납세다. 법질서를 잘 지키고, 병역을 충실히 이행하며, 열심히 일해서 세금을 많이 내면 그게 바로 애국이요 한일합방과 같은 수모를 다시 당하지 않는 방법인 것이다.
참고: http://qindex.info/drctry.php?id=Silla&ctgry=1774
지지리도 못난 이씨왕조(李氏王朝)
이씨왕조는 왕조의 탄생부터 배신으로 시작되었다.
신라와 이씨조선은 자신들의 통치력이 다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자발적으로 왕씨고려와 일본에 통치권을 넘겼다. 그러나 왕조말기의 왕씨고려가 스스로 모순을 극복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원명교체기의 대륙정세에 부응하고 불필요하게 백성들을 전쟁에 희생시키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 위화도 회군이 전혀 명분을 가지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존재했던 다른 체제교체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 명분은 상당히 초라하다.
이성계가 명나라에 올린 표문은 다음과 같다.
중화를 마땅히 높일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홍무 21년(1388)년에 신우와 최영 등이 군대를 함부로 일으켜 요동으로 향하고자 했으며, 25년(1392)에 왕요(공양왕)와 정몽주 등이 신우의 부정한 뜻을 계승하여 장차 상국을 범하려 하므로, 신이 온 나라 신민들에게 효유하여, 오랑캐가 중화를 소란하게 할 수가 없으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할 수 없다고 말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역리와 순리를 알게 되고, 저들이 모두 그 죄에 자복하였으니, 다만 상천이 밝게 알 뿐이 아니오라, 실로 황제께서 환하게 보신 바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aa_10206001_001
장수가 왕을 범하는 것은 괜찮고 오랑캐가 중국을 범하는 것은 안된단 말인가?
새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다 명에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에서 어느 것을 써야할 지 물어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쓰게 된다. 이 조선(朝鮮)은 단군조선이 아니라 기자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다. 이씨조선은 기자국(箕子國)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01년 11월 29일
'삼가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은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가 혼미(昏迷)하여 도리에 어긋나서 스스로 멸망하는 데 이르게 되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신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보게 하였으므로 놀라고 두려워서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요사이 황제께서 신에게 권지 국사(權知國事)를 허가하시고 이내 국호(國號)를 묻게 되시니, 신은 나라 사람과 함께 감격하여 기쁨이 더욱 간절합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國號)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小臣)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奏達)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裁可)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aa_10111029_001
한민족사에서 구체제의 지배세력을 도륙한 경우는 이씨왕조가 유일하다.
왕씨고려는 신라와 견씨백제의 지배세력을 포용하였다. 일본 또한 이씨조선의 왕족을 일본귀족으로 대우해 주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왕씨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 3부자를 목을 매달아 죽이고 강화도와 거제도에 유배시켰던 왕씨일족은 모두 바다에 던져죽였다. 이어 전국에서 왕씨 색출작업을 벌여 발견되는 대로 목을 베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id=Silla&ctgry=2465
명나라에 기대어 탄생한 왕조인지라 명나라를 섬기는 풍조는 왕조내내 계속되었다.
태종은 명나라에 말을 여러 차례 바쳤는데 아래 기록은 그 중 하나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9년 10월 22일
임금이 태평관에 가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임금이 황엄에게 이르기를,
“황제의 은혜가 이미 중하니, 감히 말 1만 필을 바치겠습니다.”
하니, 황엄이 말하기를,
“원제의 자손이 여거하에 도망가 살고 있어 8대를 전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내부하지 아니하여, 황제께서 내년 봄에 평정코자 하여 2월 초6일에 대군을 움직이기로 기일을 정했으니, 마땅히 진헌 마필을 운을 나누어 시기에 도달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ca_10910022_001
명나라에 바치는 것은 말 뿐만 아니라 처녀도 있었는데 태종에 이어 세종도 여러 차례 명나라에 처녀를 바쳤다. 이것이 백성들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은 아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09년 07월 18일
중궁이 경회루에 나가서 처녀 7인을 불러 보고 전별연을 베풀었는데, 처녀의 어머니와 친족들도 또한 연회에 참예하였다. 집찬비(執饌婢) 10인과 수종(隨從)하는 비(婢) 16인은 루(樓) 아래에서 음식을 먹이었다. 성씨(成氏)·차씨(車氏)에게 따르는 비(婢)는 각기 3인이고 그 나머지는 각기 2인이었다. 밤에 날씨가 맑고 고요한데 슬피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니, 이를 듣는 사람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씨왕족은 이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한(漢)나라가 공주를 오랑캐에게 시집보낸 것과 대조가 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06년 07월 20일
진헌색이 계하기를, “이번 처녀를 선택하여 고를 때에 종실의 친척과 전조(前朝) 왕씨와 귀화하여 온 사람과 국가에 관계되는 죄인의 딸자식은 모두 간선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씨왕조의 처녀진헌은 단지 왕조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
http://www.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thrd=1739
신라촌락문서에 의하면 신라의 4개 촌락의 인구가 442명이었는데 이중 5.6%에 달하는 25명이 노비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만 해도 노비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씨왕조의 통치기간에는 노비의 수가 증가하여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는 백성의 1/3이 노비였다. 이씨왕조의 이러한 성격때문에 일본이 침략해 왔을 때 백성들이 도리어 이씨왕조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4월 14일,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났다. 거가(선조일행의 피란행렬)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중략) 임해군의 집과 병조 판서 홍여순의 집도 불에 탔는데, 이 두 집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유도 대장이 몇 사람의 목을 베어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이 떼로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7월 1일
왜장 청정(淸正)이 북계로 침입하니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임해군과 순화군)와 여러 재신을 잡아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남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 토관 진무 국경인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는 스스로 대장이라 일컬으며 갑기 5천으로 진을 결성하였다. ... 경인이 마침내 객사를 포위하고 두 왕자 및 부인, 여시 노비 등과 재신 김귀영, 황정욱, 황혁과 그들의 가속을 잡아 모두 결박하고 마치 기물을 쌓아놓듯 한 칸 방에 가두었다. ... 그리고 여러 진과 보의 토병과 호수가 모두 관리를 붙잡고 배반하며 항복하였으므로 왜인들은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점령하게 되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id=Silla&ctgry=1793
19세기 말,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쓸고 일본이 서양문물을 열심히 배우고 있을 때 이씨왕조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고종의 탄생일에 감사와 수령들은 전례에 따라 진상을 하였는데, 그들은 왕가의 친척을 통하여 궁중으로 보냈다.
정해년(1887) 7월에 민영소와 민영환이 입시할 때 김규홍은 전라감사, 김명진은 경상감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민영환은 먼저 김명진의 물목을 바쳤다. 그 물목은 일본 명주 50필과 황저포 50필뿐이었다. 고종이 얼굴을 붉히며 그 물목을 용상 밑으로 던져 버리자 민영환은 황급히 물목을 주워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 후 민영소가 김규홍의 물목을 바쳤다. 그의 물목은 춘주 500필, 갑초 500필, 백동 5합, 바리 50개였고, 기타 물건도 이와 같이 많았다. 고종의 얼굴은 희색이 감돌며, “번신의 예가 당연히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규홍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민영환은 그 즉시 나가서 자기 돈 2만냥을 보태 물건을 사가지고 바쳤다. 민영환은 김명진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http://www.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thrd=1813
이것은 매천야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매천야록이 야사이고 위의 기록을 뒷받침할만한 다른 기록이 없긴 하지만 이 기록은 대체로 당시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이씨왕조는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넘기기로 한다.
조선왕조실록 순종 3년 8월 22일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 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전권위원(全權委員)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또한 짐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하라.”
한일합방조약에는 통치권을 넘기는 댓가도 명시되어 있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예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http://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thrd=1787
이은(영친왕, 1897~1970)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1907년 대한제국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이후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1940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박정희가 만주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있을 당시에는 군부대와 학교를 돌며 태평양 전쟁을 독려하고 있었다.
1945년 일본이 미국에 항복했을 때 그는 제1항공군 사령관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은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http://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thrd=1693
자동 검색 관련글
우리 백성들은 경복궁을 불태우지 않았다by 티티
퍼블리싱 및 추천같은 카테고리의 글
트랙백(0) 덧글(19)
트랙백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TrackbackURL : http://trustle.egloos.com/tb/1324450 [도움말]
덧글
강희대제 2011/01/22 18:07 #
조선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왕조가 실망스러운건 정말 부인할 수가 없군요.
솔까역사 2011/01/22 18:10 #
예 범위를 조선이 아닌 왕조로 잡으면 될 거 같습니다.
검투사 2011/01/23 09:41 #
이제 <마이 프린세스> 같은 드라마까지 나온 것을 보면서 이 나라 국민들이 정말 막장으로 치닫는구나 싶더군요.
이씨 왕조의 "마지막 공주"의 자손(김태희 역)의 드레스룸을 보면서 "저거 꾸밀 돈은 어디서 나왔을까" 싶더라는...
(물론 무슨 신하의 자손이자 재벌인 야동순재가 번 돈이겠지만, 참 씁쓸하더군요.)
강희대제 2011/01/23 12:38 #
오오
중간횡령과 뇌물수수 / 관직매매로 인해 벌어들인 돈은 과연 어디다 쓰나 했더니 그런데에 쓰기 위한 것인가..
오오미..
검투사 2011/01/23 13:01 #
뭐, 무슨 만화 원작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황제"(최불암 역)인가가 "독립운동했다"고 나오고
이번에는 "순조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준 돈을 야동순재의 아버지인지 할아버지인지가 빼돌려서 반성하려고" 김태희 공주를 모셨다는 식이지만... 그러고 보면 그 "독립운동 자금하라고 준 돈"은 어디서 났을까를 생각하면...
검투사 2011/01/23 09:42 #
아울러 <마이 프린세스>의 그 드레스룸은 그것을 만든 방송국의 아침방송에서 "시청자들의 (긍정적인) 눈길을 사고 있다"고 소개하더군요. (먼~산)
KittyHawk 2011/01/24 21:07 #
그나마 그런 왕조의 창피함을 자각했기 때문인지 구한말, 일제를 경험했던 황족 중 한 분은 왕조 부활을 반대하고 민주공화국의 건국을 주장했다더군요.
타네 2011/01/25 03:14 #
나름 근심이 깊었던 걸로 압니다. 독살위협때문에 항상 깡통음식만 드시고 가슴엔 홧병이 있었다고,... 임시정부로 건너가려고 항상 기회를 노렸다던데..
일제 강점기 때의 정책이 "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모르게 하라" 예요. 유독 침략 받은 역사를 강조하고 업적을 지나치게 비하해서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없애는게 주목적이었죠. 지금도, 백제사람들 일부가 일본에 건너가 나라를 세웠던 기록과 여러가지 고대사들은 탈취해가서 돌려주기는 커녕 보여주지도 않는다고 해요.
사실 조선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완전히 대등했고, 조선초기까지 일본이나 여진한테 조공을 받던 제2의 열강이었는데..군사가 용맹해서 중국에서도 부담스러워하고 견제가 심했다고....
사실 조선의 탄생이 반갑진 않아요. 잃어버린 요동땅을 되찾고 사대주의를 합리화하지 않았다면 군사적으로도 더 강해져서 후대의 비극이 없지 않았을까 한다는.....
그런데 윗 글이 참......까라면 깐다고 못 깔게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
타네 2011/01/25 03:15 #
근데 혹시 뉴라이트 세요?
백범 2011/01/26 12:41 #
이조를 까면 뉴라이트???
에라이 파쇼같은 놈아.
평생 일본 탓만 하세요. 대부분 너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국수주의 파쇼들 뿐이니 그러니 무슨 발전이 있겠냐.
너님은 병사 월급으로 지급되는 쌀 대신 모래하고 자갈쪼갠걸 월급으로 주는 민모씨 일가족의 직계후손이라도 되시는지???
타네 2011/01/25 03:15 #
..............왜놈 이구나
백범 2011/01/26 12:41 #
..............파쇼 였구나
고리아이 2011/01/25 17:41 #
영친왕의 부일은 귀한 이야기네영
그렇다고 해서 조선왕
http://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thrd=1787
한일합방의 정치적 책임은 이씨조선의 왕에게 있다.
우리는 흔히 한일합방에 대해 그 책임을 몇몇 친일파의 탓으로 돌리고 만다. 그러나 한일합방의 체결과정을 살펴보면 한일합방의 최종적인 책임은 왕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순종 4권, 3년(1910 경술 / 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22일(양력) 1번째기사
한일 합병 조약안(韓日倂合條約案)에 대하여 국무 대신 외에 황족 대표자 및 문무 원로의 대표자들이 회동하여 어전회의를 열었다.
순종 4권, 3년(1910 경술 / 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22일(양력) 2번째기사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 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전권위원(全權委員)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또한 짐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하라.”
순종 4권, 3년(1910 경술 / 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22일(양력) 3번째기사
일한병합조약(日韓倂合條約)이 체결되었다.
〈병합 조약(倂合條約)〉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는 양국간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 만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위원에 임명한다. 위의 전권위원은 회동하여 협의하여 다음의 여러 조항을 협정한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예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인(韓人)으로서 특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고 또 은금(恩金)을 준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前記)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施政)을 전적으로 담임하여 해지(該地)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있고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경유한 것이니 반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를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記名)하고 조인(調印)한다.
융희(隆熙) 4년 8월 22일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명치(明治) 43년 8월 22일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의 통치를 일본에 넘기기로 한 것은 이씨왕조의 조정에서 결정된 것이고 이완용은 그 실무적인 협상을 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국의 주인은 왕이니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완용은 이후 고종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게 되는데 이것도 그가 고종의 뜻을 결코 거스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한일합방은 이씨왕조가 결정한 것이므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
일한병합조약문을 읽어보면 그 주요 내용이 이씨왕가의 신분보장과 금전지급에 관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것 또한 이씨조선이 왕국이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이해가 된다. 왕국의 주인인 왕이 자신의 통치권을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고 넘길 리는 없는 것이다. 한일합방을 통하여 왕과 몇몇 왕족은 일본 황족으로 편입되고 나머지 주요 왕족과 대신들도 조선귀족으로 편입되어 신분을 보장받고 은사금도 받았다.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표현을 흔히 쓰는데 일본으로부터 가장 큰 댓가를 받은 사람이 누구이고 왕국의 주인이 누구였던가를 생각해 본다면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분명해 진다.
물론 친일파들이 한일합방의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사실이다. 매천야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宋秉畯(송병준)이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고 李容九(이용구), 徐彰輔(서창보), 李學宰(이학재), 洪肯燮(홍긍섭), 崔晶圭(최창규) 등과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한국인은 회유(懷柔)되기 어려우므로 속국(屬國)을 만들어 진압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고, 그들은 合邦宣言書(합방선언서)를 지어 일본정부로 올렸다. 이때부터 합방문제가 크게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一進會(일진회)가 정부로 合邦論(합방론)을 제의하여 이를 상주(上奏)하기를 바랐으나 李完用(이완용)이 물리쳤다. 그것은 이완용이 합방론을 제창(提唱)하려고 하였으나 일진회에서 먼저 그 안(案)을 제의하므로, 그들을 시기하여 閔泳奎(민홍규) 등에게 연설회를 권장하고 그들의 제의를 물리친 것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id=seadragon&ctgry=2303
한일합방은 조선의 요청을 일본이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대다수 조선의 백성들은 한일합방을 반대하였다. 한일합방 직전의 매천야록 기록을 보면 전국 각지에서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의병활동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대다수 조선의 백성들은 한일합방을 반대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왕국의 주인은 왕이며 백성은 왕국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다. 한일합방의 체결과정을 살펴보아도 백성들의 뜻을 반영하는 과정이 없었고 체결된 조약문의 내용을 읽어보아도 백성들의 안위는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의 최대 관심사는 종묘사직이지 백성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과 순종은 나라를 팔아먹은 나쁜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다. 한일합방에 대한 책임은 정치적 책임일 뿐이지 '좋다'와 '나쁘다'로 구분되는 도덕적 책임이 아니다. 한일합방에 대해 책임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일제식민지배체제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만약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지 않고 일제식민지배체제가 지속되어 조선인이 일본인으로 완전히 동화가 되었다면 이씨조선의 순종은 신라 경순왕과 비슷한 평가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또 한반도를 둘러싼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고종과 순종이 아니라 그 누가 왕이었다 하더라도 이씨조선이 독립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이다. 고종 대신에 당나라의 지배야욕을 물리친 신라 문무왕을 넣고 순종 대신에 원나라의 간섭을 물리친 왕씨고려의 공민왕을 넣고 이완용 대신에 목숨을 걸고 왕씨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킨 정몽주를 넣으면 한일합방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한일합방은 몇몇 사람들의 특수한 성향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당시의 국제적인 역학관계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봐야 한다. 굳이 조상탓을 하자면, 그러한 국제적인 역학관계가 도래할 것을 미리 예측하고 일본처럼 개항과 근대화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지 못했던 이씨조선의 지도자들을 탓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 무리한 바램이다.
한일합방의 교훈은 반일이 아니라 극일이 되어야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1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둘러싸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자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하였다. 또 1982년 광복절 기념식전에서도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한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 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한일합방의 역사로부터 매우 올바른 교훈을 얻는 말들이다. 일본이나 한일합방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미워한다고 해서 이미 지나간 과거가 바뀌지는 않는다. 미래에 또 다시 그런 불행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1984년 가을, 한국 경제가 파산 직전의 상태로까지 가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하여 60억 달러의 융자를 간청하여 그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본 정치인들이 식민지배와 독도에 관해 한국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발언들을 늘어놓자,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하며 속시원한 얘기를 내뱉었다. 그러나 1997년 동남아에서 발생한 외환위기가 한국까지 덮쳐오자, 그도 별 수 없이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이 이를 거절하였고 한국경제는 파산하고 말았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독도 주변해역에 대한 한국의 독점적 권한을 포기하는 '신한일어업협정'을 일본과 맺고서야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나라를 잃은 설움을 절절히 겪었던 조상들이 들으면 화낼 일이 많다.
일본은 한국보다 인구가 세 배 정도 많고 한반도 전체보다는 두 배 정도 많다. 인구가 세 배 많은 나라와 맞서려면 1인당 국민소득이 그 나라보다 세 배 많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일본의 절반밖에 안된다. 규모가 작다면 효율이라도 높아야 하는데 한국의 국가 효율은 일본보다 훨씬 뒤져 보인다. 국가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소 중 하나가 범죄인데 한국의 범죄율은 일본보다 훨씬 높다. 살인을 예로 들어보면, 한국의 살인 발생 비율은 일본보다 무려 다섯 배나 높다. 그 밖에도 매춘여성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거나 일본에 있는 매춘여성의 상당수가 한국 여성이라는 사실들은 우리가 과연 한일합방의 치욕스런 역사로부터 제대로 교훈을 얻고 있는지 회의가 들게 하는 부분이다.
흔히 일본과 친일파를 욕하거나 한일축구시합에서 한국선수를 광적으로 응원하는 것을 애국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국력을 키우는데 별 도움이 못된다. 실질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은 준법, 병역 그리고 납세다. 법질서를 잘 지키고, 병역을 충실히 이행하며, 열심히 일해서 세금을 많이 내면 그게 바로 애국이요 한일합방과 같은 수모를 다시 당하지 않는 방법인 것이다.
참고: http://qindex.info/drctry.php?id=Silla&ctgry=1774
Thursday, August 30, 2012
the rare photos of Great Korea Empire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4048508
[현장취재] 차길진 법사, 대한제국 황가 희귀 사진 공개
[일간스포츠] 입력 2010.03.07 18:42 / 수정 2010.03.07 18:43
차길진 법사가 최근 대한제국 황가 희귀 존영 사진과 3.1운동 태극기를 공개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자두꽃 금박 문양이 선명하게 찍힌 고종황제와 엄비, 순종황제와 순종효황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존영 사진과 3.1운동 당시 정교하게 제작된 접이식 태극기다. 대한제국 구명시식 도중 익명의 독지가에게 기증받은 귀중한 자료다.
황실 존영 사진 세 점은 대한제국 내무성에서 제작해 배포한 것이다. 사진에는 '이태왕 전하·엄비 전하·이왕전하·윤비전하·이왕은 전하·방자여왕전하'라고 명기되어 있다. 일제가 황실 존영 사진에서 자두꽃 금박 문양을 없애버린 1932년 이전에 제작된 걸로 보인다. 현존하는 황실 존영 사진 중 이처럼 자두꽃 금박 문양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은 드물다.
3.1운동 당시 사용된 휴대용 태극기도 눈길을 끈다. 펼치면 깃대가 30cm에 이르지만 접으면 10cm로 줄어든다. 이를 무명 주머니에 접어서 도포자락에 숨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차 법사는 "이 태극기는 당시 일제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만세 운동을 전개해야 했던 긴박한 상황을 느끼게 한다. 3.1운동 당시 평택 지역에서 썼던 태극기"라면서 "이 태극기와 대한제국 황가 존영 사진 세 점이 함께 기증됐다. 이는 3.1운동이 대한제국 회복 운동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
[현장취재] 차길진 법사, 대한제국 황가 희귀 사진 공개
[일간스포츠] 입력 2010.03.07 18:42 / 수정 2010.03.07 18:43
차길진 법사가 최근 대한제국 황가 희귀 존영 사진과 3.1운동 태극기를 공개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자두꽃 금박 문양이 선명하게 찍힌 고종황제와 엄비, 순종황제와 순종효황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존영 사진과 3.1운동 당시 정교하게 제작된 접이식 태극기다. 대한제국 구명시식 도중 익명의 독지가에게 기증받은 귀중한 자료다.
황실 존영 사진 세 점은 대한제국 내무성에서 제작해 배포한 것이다. 사진에는 '이태왕 전하·엄비 전하·이왕전하·윤비전하·이왕은 전하·방자여왕전하'라고 명기되어 있다. 일제가 황실 존영 사진에서 자두꽃 금박 문양을 없애버린 1932년 이전에 제작된 걸로 보인다. 현존하는 황실 존영 사진 중 이처럼 자두꽃 금박 문양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은 드물다.
3.1운동 당시 사용된 휴대용 태극기도 눈길을 끈다. 펼치면 깃대가 30cm에 이르지만 접으면 10cm로 줄어든다. 이를 무명 주머니에 접어서 도포자락에 숨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차 법사는 "이 태극기는 당시 일제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만세 운동을 전개해야 했던 긴박한 상황을 느끼게 한다. 3.1운동 당시 평택 지역에서 썼던 태극기"라면서 "이 태극기와 대한제국 황가 존영 사진 세 점이 함께 기증됐다. 이는 3.1운동이 대한제국 회복 운동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
The fate for 20-year, to be Ruined country, Gojong became to call from "Royal Highness" to " Majesty"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407/200407200433.html
[운명의 20년] 동학농민군 재봉기서 亡國까지
2. 40인이 메는 가마대신 4인가마를 탄 대군주
홍범14조로 ‘전하’서 ‘폐하’가 된 高宗… 그러나 두려웠다
입력 : 2004.07.20 18:07 30'
관련 핫이슈
역사다큐 운명의 20년
1895년 1월 7일. 한겨울의 매운 칼바람을 맞으면서 왕의 행차가 경복궁을 떠났다. 왕세자와 대원군을 비롯한 종친들과 문무백관들이 각기 가마와 말을 타고 배행하는 장려한 행렬의 목적지는 종묘(宗廟).
새로운 법령인 ‘홍범(洪範) 14조’를 제정 반포함을 보고하러 가는 길이다. 조선을 다스렸던 역대 임금들의 혼령을 모신 종묘에 국왕이 친히 나가 국정의 중요 현안을 보고하는 것은 왕실 행사 중에서 가장 신성하고 중요하고 성대한 행사이다. 그런데 돌연 긴 행렬의 한쪽이 흐트러지면서 심상치 않은 소동이 일었다.
“상감마마! 박영효 대감이 낙마하시었삽니이다!”
보고를 들은 임금의 얼굴이 침통하게 일그러졌다. 종묘 거둥길에서 왕실의 인척이자 내무대신인 박영효가 말에서 굴러떨어진 것은 나라의 미래가 불운함을 예시한 흉조라고 느낀 것이다. “어허! 불길한 일이로다!”
▲ 고종의 덕수궁 행차 4인가마를 타고 덕수궁에 들어서는 고종 행차. 1897년 대한제국 출범 후의 풍경이다.
임금은 본래 이번의 종묘 거둥은 결코 실행해서는 안 되는 매우 불길한 행사로서, 나라의 명운과 미래를 망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낭패감이 극심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감정의 격동을 느낄 때면 나타나는 수전증 현상이었다.
애당초 경복궁을 떠날 때 임금은 이미 이번 행차의 의미를 폄훼하는 조치를 취했다. 종묘 거둥에 사용하는 40인이 메는 화려한 의전용 대여(大輿)를 물리치고 4인이 메는 초라한 소여(小輿)를 대령하도록 명했다. ‘4인 소여에 탄 임금의 종묘 거둥’이란 전례가 전혀 없는 아주 해괴한 행차였다. 굳이 그런 모습으로 경복궁에서 종묘까지의 짧은 길을 도살장에 끌려가듯 가고 있는 중에 흉조까지 나타나니 더욱 참혹했다. 그러나 거둥을 중지할 수도 없었기에 임금의 행렬은 그대로 전진하여 종묘의 역대 열성위 신위 앞에 나아가서 “이날부터 ‘홍범 14조’를 실시함으로써 조선은 새로운 체제를 지닌 새로운 나라가 됨”을 고했다.
▶▶
자주 독립과 내정 개혁. 그것은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려면 반드시 추구하고 확보해야 할 근본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중요한 의의를 지닌 ‘홍범 14조’를 종묘에 가서 고하면서 임금은 왜 그처럼 두려움을 느꼈던 것일까.
이유는 역시 ‘홍범 14조’의 핵심인 제1조 때문이었고, 당시의 국제정세, 곧 대청 관계 때문이었다. 조선과 청나라는 그 시대 어법으로는 종주국과 속국의 사이지만, 오늘날로 보자면 매우 긴밀한 유대를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해온 아주 가까운 동맹국이라고 할 수 있다. 갑신정변과 동학농민항쟁의 경우에만 해도 청은 조선 정부의 요청에 따라 군사를 파견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일본과 피흘리며 전쟁을 벌였으니 조선과 청은 말 그대로 ‘혈맹’ 사이였다.
그러나 ‘홍범 14조’의 선포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주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고종으로서는 그에 따를 후유증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소 신료들과 백성들 중에서도 그 점을 염려한 이가 많아서 ‘홍범 14조’의 반포를 반기고 기리는 이 못지않게 우려하고 반대하면서 매우 착잡해 하는 이들도 많았다. 당시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계속 패배하고 있는 때가 아니었다면, ‘홍범 14조’의 반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대가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가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홍범 14조’로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한 데 따라 조선 왕실 가족들의 위호는 즉시 격상됐다. 주상 전하는 대군주 폐하로, 왕비 전하는 왕후 폐하로, 왕세자 저하는 왕태자 전하로 바뀌었다. 절대군주체제에서는 통치자의 위호(位號)가 나라의 격을 결정한다. 통치자가 ‘왕’이냐 ‘황제’이냐에 따라서 ‘왕국’과 ‘황제국(제국)’으로 갈린다. 왕국과 제국은 국호 자체가 군신(君臣)으로서의 상하관계를 규정짓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홍범 14조’와 그 후속조치들은 종래 ‘왕 전하’로 불렸던 조선의 통치자 위호를 ‘대군주(大君主) 폐하’로 바꾸는 것으로서 국가의 격을 ‘제국’에 맞먹는 정도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
‘조선의 자주 독립’이란 명제는 당시 나라를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고 싶어한 조선인들이 간절히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어디 그뿐이었을까. 조선을 삼킬 야욕을 지닌 일본도 청으로부터의 조선 독립을 극력 원했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조선의 독립은 곧 조선에서 청제국의 보호막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약소국인 조선 임금 고종의 노심초사는 눈물겹다. 그는 일본 공사 이노우에와 처음에 합의했던 종묘 서고일인 갑오년 동짓날이 되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누워버렸다. 핑계가 아니라 후유증에 대한 염려로 정말 아팠는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날을 잡아 종묘에 서고하러 가게 된 고종이 짜낸 궁여지책이 ‘4인 소여’라는 카드였다. 혹시라도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승리한 뒤 ‘조선의 일방적인 관계 단절 선언’에 대해 강력하게 문책해 올 경우 “당시의 ‘홍범 14조’ 반포는 일본의 강요로 인한 것이지 결코 내 뜻이 아니었소. 이른바 ‘폐하’라는 내가 격식에 전혀 맞지 않는 4인 소여를 타고 갔던 것이 그 명확한 증거요”라고 내세우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홍범 14조’의 반포로 가장 두드러진 변화를 확실하게 보인 것은 역시 내정 개혁보다는 국체와 국제관계였다. 조선조 500년 만에 최초로 통치자에게 ‘폐하’라는 존칭을 붙이는 국체의 변동이 이루어졌고,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1637년에 성립되어 내려온 청국과의 종주국 관계가 258년 만에 완전히 해소되었다.
그러나 국제적 외교관계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쉼 없이 움직인다.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맥없이 패전하면서 조선의 군신과 백성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청국의 응징이나 보복이 전혀 없이 조선의 ‘대군주 폐하’ 시대는 정착되었다. 국가의 명운을 걸고 대군주 폐하 고종이 그처럼 고심하여 마련한 ‘4인 소여’의 히든카드는 지는 별처럼 역사 속으로 가뭇없이 폐기되었다.
(소설가 송우혜)
Tuesday, August 14, 2012
Empress Sunjeong in 1900
純貞孝皇后尹妃
Empress Sunjeong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년 음력 8월 20일 ~ 1966년 양력 2월 3일)는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계후(繼后)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박영효, 이재각 등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 인사인 윤택영의 딸이다. 정식 시호는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儀慈仁純貞孝皇后)이며, 순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다.
http://theme.archives.go.kr/next/photo/palace04List.do?phoNum=0
창덕궁은 태종 5년에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지은 궁궐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리기도 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고, 광해군 2년에 중건되었다. 또 인조반정 때 인정전을 제외하고 불에 탔고, 인조 25년에 복구되었다.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반복되었고, 1917년 내전 일곽이 소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한 강녕전 동ㆍ서 행각 등의 건물이 해체되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를 편 궁궐이다.
북한산 매봉 기슭에 세운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히 많고,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이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되었다. 창덕궁은 한국 궁궐 건축의 비정형적인 조형미를 대표하며, 경복궁의 웅장함과는 달리 화려하고 섬세한 여성미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자연과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으로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개화의 물결이 일면서 창덕궁 안에는 19세기 서양식 내부 장식이 전통 궁궐 양식과 섞여 들었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식으로 변형되었다. 1970년에 창덕궁 후원 보수공사를 완료하여 일본식 정원을 한국식으로 변경하였고,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창덕궁 인정전 일곽을 원형대로 복원·정비하였다.
창덕궁 낙선재는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등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족이 기거했던 곳으로 1989년까지 사람이 살았다.
1 2
기록물 철 제목 영친왕 이은 빈소(CET0029700)
기록물 건 제목 영친왕 이은 빈소 2(1970)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newsId=20090520000137
순정효황후(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비 윤비) 백납병풍 찾았다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가 소장했던 12폭 백납병풍 중 일부 화폭. 강원태 기자 wkang@
100여년 전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가 소장했던 백납병풍이 발견돼 눈길을 끌고 있다.
병풍은 조선 말기 초상화 화가로 유명했던 채용신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채용신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산수화 등을 담고 있어 작가 연구의 새로운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20일 가마골역사연구원 주영택(71) 원장에 따르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윤비가 부산 해운대구 우1동 장지마을에 2년간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윤비가 자신을 돌봐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이 12폭 병풍을 건넸다는 것. 이후 병풍은 그의 딸이 서울로 시집갈 때 딸에게 건네졌으며 딸이 병풍에 있던 60점의 그림 중 9점의 그림을 소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주 원장이 그림을 입수하게 됐다. 이후 주 원장은 소지자에게 병풍의 부산박물관 기증을 적극 독려하고 있다.
병풍 소지자 김남숙(72·여·경기도 성남시)씨는 아버지로부터 병풍을 건네받은 뒤 운반이 어렵자 대형 병풍을 폭마다 잘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후 김씨는 집에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림 한 장씩을 오려줘 현재 그림은 9점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한때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 이 병풍 그림을 집 한 채 값을 주고 사겠다는 뜻을 전해오기도 했다고 한다.
병풍에 담긴 그림 60점은 꽃, 개, 풍경 등 제각각 다른 소재를 다룬 산수화, 화조화, 풍속화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각 다복과 풍요, 장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병풍은 1907년께 순종 즉위 후 동궁계비 윤비가 순정효황후가 되는 것을 축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납병풍은 병풍 한 폭에 여러 장의 그림을 마치 옷을 깁듯이 붙여 놓았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병풍은 김씨에게 건네지기 전까지는 해운대 장지마을에서 잔치 때마다 마을사람들이 돌아가며 펼치는 '물건'이기도 했다. 윤비가 자신의 안방에 뒀던 병풍으로 좋은 의미가 다 담겨 있다고 하자 마을사람들이 경사가 있을 때마다 빌려가곤 했다는 것.
부산박물관 이성훈 학예연구사는 "일단 9점의 그림 중 채용신의 호 '석지'라는 낙관이 찍혀 있는 3점의 작품은 채용신의 작품이 맞을 것으로 보이지만 나머지 6점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면서 "백납병풍의 경우 온전하게 보전된 게 거의 없고, 채용신은 조선 말기 김은호와 함께 초상화로 당대 최고였던 화가로 초상화 이외 작품은 많지 않아 이번 병풍 그림은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석지(石芝)는 물론 석강(石江), 정산(定山) 등의 호를 사용했던 채용신(1850~1941)은 조선 말기 화가로 100여점의 초상화, 10여점의 화조화를 남겼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흥선대원군, 최익현 등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전통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이며 전통과 서양화법을 조화시켜 세부묘사와 원근, 명암 등을 표현하였다. '운낭자 27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최익현 초상' 등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
http://cafe.daum.net/huldaclark/5dd7/932?docid=1DgXC5dd793220120128075602
사진 가격 11만원. 경매중 ~
http://www.e824.com/auction/index.html?go_url=./item_info/itemdetail.html&p_code=ZZ-J0--87429
* 물품 설명
1966년 2월에 붕어하신 조선 마지막 황후 순종비 윤대비 국장 장례식 장면 사진입니다.
역사가 요구한 이 분의 정확한 이름은 순종효왕후이며
교양없는 사람들은 윤비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윤황후의 장례식 사진입니다.
윤황후의 영구를 싣은 영구차가 시민들이 운집한 종로통을 지나며
애도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할머니들이 거리로 나와 이 영구차를 바라보며
땅을 치며 통곡했지요.
당시 파란망장한 생을 살았을 할머니들에게는 저버릴 수 없는 조선의 국모,
자신들의 국모였지요.. 그래서 그렇게 땅을 치며 울었지요..
이 사진이 찍힌 장소는 파고다공원 즉 탑골공원 근처로 보입니다.
윗 3장의 사진은 실물을 스캔한 것이며
실물 200% 확대한 것입니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RI1W&articleno=506#ajax_history_home
순정효황후(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비 윤비) 백납병풍 찾았다
당대 최고 채용신 作 12폭 60점 그림 중 9점 발견
100여년 전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가 소장했던 백납병풍이 발견돼 눈길을 끌고 있다.
병풍은 조선 말기 초상화 화가로 유명했던 채용신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채용신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산수화 등을 담고 있어 작가 연구의 새로운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윤비 6·25때 해운대 피란.선물로 준 것 후손이 보관.향토사학자 주영택씨 확인
20일 가마골역사연구원 주영택(71) 원장에 따르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윤비가 부산 해운대구 우1동 장지마을에 2년간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윤비가 자신을 돌봐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이 12폭 병풍을 건넸다는 것. 이후 병풍은 그의 딸이 서울로 시집갈 때 딸에게 건네졌으며 딸이 병풍에 있던 60점의 그림 중 9점의 그림을 소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주 원장이 그림을 입수하게 됐다. 이후 주 원장은 소지자에게 병풍의 부산박물관 기증을 적극 독려하고 있다.
병풍 소지자 김남숙(72·여·경기도 성남시)씨는 아버지로부터 병풍을 건네받은 뒤 운반이 어렵자 대형 병풍을 폭마다 잘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후 김씨는 집에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림 한 장씩을 오려줘 현재 그림은 9점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한때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 이 병풍 그림을 집 한 채 값을 주고 사겠다는 뜻을 전해오기도 했다고 한다.
병풍에 담긴 그림 60점은 꽃, 개, 풍경 등 제각각 다른 소재를 다룬 산수화, 화조화, 풍속화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각 다복과 풍요, 장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병풍은 1907년께 순종 즉위 후 동궁계비 윤비가 순정효황후가 되는 것을 축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납병풍은 병풍 한 폭에 여러 장의 그림을 마치 옷을 깁듯이 붙여 놓았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병풍은 김씨에게 건네지기 전까지는 해운대 장지마을에서 잔치 때마다 마을사람들이 돌아가며 펼치는 '물건'이기도 했다. 윤비가 자신의 안방에 뒀던 병풍으로 좋은 의미가 다 담겨 있다고 하자 마을사람들이 경사가 있을 때마다 빌려가곤 했다는 것.
부산박물관 이성훈 학예연구사는 "일단 9점의 그림 중 채용신의 호 '석지'라는 낙관이 찍혀 있는 3점의 작품은 채용신의 작품이 맞을 것으로 보이지만 나머지 6점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면서 "백납병풍의 경우 온전하게 보전된 게 거의 없고, 채용신은 조선 말기 김은호와 함께 초상화로 당대 최고였던 화가로 초상화 이외 작품은 많지 않아 이번 병풍 그림은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석지(石芝)는 물론 석강(石江), 정산(定山) 등의 호를 사용했던 채용신(1850~1941)은 조선 말기 화가로 100여점의 초상화, 10여점의 화조화를 남겼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흥선대원군, 최익현 등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전통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이며 전통과 서양화법을 조화시켜 세부묘사와 원근, 명암 등을 표현하였다. '운낭자 27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최익현 초상' 등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부산일보/이현정 기자 2009.5.20>
윤비(순종비)와 궁중 여인들1900년대
南山伝統韓屋村 純貞孝皇后尹氏の本家
朝鮮第27代純宗の皇妃である純貞孝皇后尹氏が嫁ぐまで暮らした家です。
http://www.archidata.co.kr/filebase/Data/45271/ka191.htm
순정효황후 윤비 친가
(純貞孝皇后 尹妃 親家)
- 남산골 한옥마을
- 구 옥인동 서용택 가옥
현소재지:서울 중구 필동2가 84-1 일대,
원소재지:서울 종로구 옥인동 47-133
1870년 창건
* 개론
조선의 제 27대 순종(純宗)의 황후(皇后)인 윤씨가 동궁의 계비(繼妃)로 책봉되었던 열 세살까지 살았던 집으로 고종 12년(1875)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원 소재지는 종로구 옥인동에 있으나 가옥이 너무 낡아 그 양식 그대로 본떠 남산골 한옥마을에 복원하였다. 원래 민속자료 23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남산에 새롭게 복원되면서 문화재 지정은 취소되었고 구 가옥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
최상류 주택으로서 별궁(別宮)에 비견될 만한 품격을 갖추었던 집이다.
* 구성
이 가옥은 안채, 사랑채, 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ㄷ’ 자형 평면의 몸채의 전면에 대문과 사랑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갖는다. 대문간의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채는 안채보다 높게 자리잡아 누각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원 가옥이 있었던 옥인동의 대지조건상 서울시가지를 한눈에 보기 좋도록 의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 가옥은 사랑채의 하부에 관리인 실을 두어 복층으로 사용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합각면은 전돌쌓기하였다.
안채는 중앙에 6칸 규모의 대청을 두고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하였다. 안방 아래로 딸방과 부엌, 찬방, 찬모방, 행랑방을 순차적으로 두고, 건넌방 아래로 서고, 아들방을 순차적으로 배치하였으며 전후면에 퇴를 두었다. 기단은 세벌대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모난돌을 다듬어 주춧돌을 놓고 평주를 세웠다. 대청 중앙에 고주를 세운 1고주 5량가이며, 공포는 쇠서가 없는 초익공을 놓고 간마다 운공(雲工)을 세 개씩 두었다. 본래 민가에는 공포를 사용할 수 없는데 궁집으로서의 품격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평면도
* 지도
(참고 문헌 : 한국의건축문화재(서울편) / 홍대형저,
남산골한옥마을 사이트)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c2Kc&articleno=43&categoryId=0®dt=20120723173736#ajax_history_home
南山谷韓屋村
南山谷韓屋村是將原本散落在首爾市區裡的五棟韓國傳統韓屋遷移至此而組成的。
從朝鮮時代(1392~1910)的兩班士大夫宅邸到一般平民的生活瓦屋的住家規模及家具擺飾如實呈現。
朝鮮時代南山谷地區因為有溪谷與名為「泉雨閣」的閣樓(可以觀賞四周景色,沒有門與牆壁像亭子的房子),
所以夏天避暑的最佳場所。建造南山谷韓屋村時,也修復了泉雨閣,並在腹地內蓋了可以與溪谷同樂的亭子,
可欣賞周邊景致,這裡也是散步的好地方。
可一窺朝鮮時代兩班士大夫五棟宅邸的地方
在「南山谷韓屋村」可一窺朝鮮時代兩班士大夫的五棟宅邸,包含了純貞孝皇后尹妃(朝鮮第二十七代王純宗的妃子,
相傳當時親日派強迫純宗在韓日合邦條約上蓋印鑑,但是純貞孝皇后將玉璽藏在裙子裡,抵死不從)的娘家、
海豊府院君尹澤榮(朝鮮第二十五代王哲宗及後宮生的公主之丈夫)的宅邸、
都邊首(木工的最高負責人)李承業(建造朝鮮宮殿景福宮時的建築負責人)的宅邸、五衛將金春永(朝鮮時代的軍人)的房子。
朝鮮時代兩般士大夫的生活文化
韓屋村裡的代表性韓屋可以說是純貞孝皇后尹妃的娘家,這個宅邸是「ㅁ」的構造,打開接待客人的廂房、
女主人居住的廂房及大門的話,印入眼簾的是連結這三個地方獨特的大門構造,外觀上以院子為中心,房屋圍繞的構造,
由此可知院子對於韓屋來說不是房子的外部,而是房屋的中心構造。
此外也將韓屋特有之門的構造表現得體,韓屋的門不是只有將外部與內部隔離的功能,也就是說還有將走廊及房間為成一體,
或者可隨著需求調整房間與房間的間格的功能。
親身感受及學習的韓國文化
韓屋村也時常舉辦韓國傳統公演和射箭等傳統遊戲,此外也會實際舉行韓國式傳統婚禮,因此想瞭解韓國婚禮文化的遊客,
可以於週末前往體驗。
為了外國人所準備的跆拳道體驗活動
原在慶熙宮舉行的跆拳道示範表演及體驗活動已經遷至南山谷韓屋村內舉行。
針對外國遊客提供直接學習韓國傳統武術跆拳道的體驗活動, 於韓屋村內學習跆拳道的攻防動作與踢腿技巧等。
沿著散步路,可以到達像噴火口的廣場,是埋葬「首爾一千年時空膠囊」的地方,
雖然與1994年埋葬迎接首爾定都六百年時空膠囊的韓屋村具有不同的意義,但都意旨保存過去。
Empress Sunjeong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년 음력 8월 20일 ~ 1966년 양력 2월 3일)는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계후(繼后)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박영효, 이재각 등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 인사인 윤택영의 딸이다. 정식 시호는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儀慈仁純貞孝皇后)이며, 순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다.
http://theme.archives.go.kr/next/photo/palace04List.do?phoNum=0
창덕궁은 태종 5년에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지은 궁궐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리기도 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고, 광해군 2년에 중건되었다. 또 인조반정 때 인정전을 제외하고 불에 탔고, 인조 25년에 복구되었다.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반복되었고, 1917년 내전 일곽이 소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한 강녕전 동ㆍ서 행각 등의 건물이 해체되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를 편 궁궐이다.
북한산 매봉 기슭에 세운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히 많고,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이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되었다. 창덕궁은 한국 궁궐 건축의 비정형적인 조형미를 대표하며, 경복궁의 웅장함과는 달리 화려하고 섬세한 여성미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자연과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으로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개화의 물결이 일면서 창덕궁 안에는 19세기 서양식 내부 장식이 전통 궁궐 양식과 섞여 들었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식으로 변형되었다. 1970년에 창덕궁 후원 보수공사를 완료하여 일본식 정원을 한국식으로 변경하였고,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창덕궁 인정전 일곽을 원형대로 복원·정비하였다.
창덕궁 낙선재는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등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족이 기거했던 곳으로 1989년까지 사람이 살았다.
1 2
기록물 철 제목 영친왕 이은 빈소(CET0029700)
기록물 건 제목 영친왕 이은 빈소 2(1970)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newsId=20090520000137
순정효황후(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비 윤비) 백납병풍 찾았다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가 소장했던 12폭 백납병풍 중 일부 화폭. 강원태 기자 wkang@
100여년 전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가 소장했던 백납병풍이 발견돼 눈길을 끌고 있다.
병풍은 조선 말기 초상화 화가로 유명했던 채용신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채용신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산수화 등을 담고 있어 작가 연구의 새로운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20일 가마골역사연구원 주영택(71) 원장에 따르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윤비가 부산 해운대구 우1동 장지마을에 2년간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윤비가 자신을 돌봐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이 12폭 병풍을 건넸다는 것. 이후 병풍은 그의 딸이 서울로 시집갈 때 딸에게 건네졌으며 딸이 병풍에 있던 60점의 그림 중 9점의 그림을 소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주 원장이 그림을 입수하게 됐다. 이후 주 원장은 소지자에게 병풍의 부산박물관 기증을 적극 독려하고 있다.
병풍 소지자 김남숙(72·여·경기도 성남시)씨는 아버지로부터 병풍을 건네받은 뒤 운반이 어렵자 대형 병풍을 폭마다 잘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후 김씨는 집에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림 한 장씩을 오려줘 현재 그림은 9점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한때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 이 병풍 그림을 집 한 채 값을 주고 사겠다는 뜻을 전해오기도 했다고 한다.
병풍에 담긴 그림 60점은 꽃, 개, 풍경 등 제각각 다른 소재를 다룬 산수화, 화조화, 풍속화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각 다복과 풍요, 장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병풍은 1907년께 순종 즉위 후 동궁계비 윤비가 순정효황후가 되는 것을 축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납병풍은 병풍 한 폭에 여러 장의 그림을 마치 옷을 깁듯이 붙여 놓았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병풍은 김씨에게 건네지기 전까지는 해운대 장지마을에서 잔치 때마다 마을사람들이 돌아가며 펼치는 '물건'이기도 했다. 윤비가 자신의 안방에 뒀던 병풍으로 좋은 의미가 다 담겨 있다고 하자 마을사람들이 경사가 있을 때마다 빌려가곤 했다는 것.
부산박물관 이성훈 학예연구사는 "일단 9점의 그림 중 채용신의 호 '석지'라는 낙관이 찍혀 있는 3점의 작품은 채용신의 작품이 맞을 것으로 보이지만 나머지 6점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면서 "백납병풍의 경우 온전하게 보전된 게 거의 없고, 채용신은 조선 말기 김은호와 함께 초상화로 당대 최고였던 화가로 초상화 이외 작품은 많지 않아 이번 병풍 그림은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석지(石芝)는 물론 석강(石江), 정산(定山) 등의 호를 사용했던 채용신(1850~1941)은 조선 말기 화가로 100여점의 초상화, 10여점의 화조화를 남겼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흥선대원군, 최익현 등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전통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이며 전통과 서양화법을 조화시켜 세부묘사와 원근, 명암 등을 표현하였다. '운낭자 27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최익현 초상' 등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
http://cafe.daum.net/huldaclark/5dd7/932?docid=1DgXC5dd793220120128075602
사진 가격 11만원. 경매중 ~
http://www.e824.com/auction/index.html?go_url=./item_info/itemdetail.html&p_code=ZZ-J0--87429
* 물품 설명
1966년 2월에 붕어하신 조선 마지막 황후 순종비 윤대비 국장 장례식 장면 사진입니다.
역사가 요구한 이 분의 정확한 이름은 순종효왕후이며
교양없는 사람들은 윤비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윤황후의 장례식 사진입니다.
윤황후의 영구를 싣은 영구차가 시민들이 운집한 종로통을 지나며
애도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할머니들이 거리로 나와 이 영구차를 바라보며
땅을 치며 통곡했지요.
당시 파란망장한 생을 살았을 할머니들에게는 저버릴 수 없는 조선의 국모,
자신들의 국모였지요.. 그래서 그렇게 땅을 치며 울었지요..
이 사진이 찍힌 장소는 파고다공원 즉 탑골공원 근처로 보입니다.
윗 3장의 사진은 실물을 스캔한 것이며
실물 200% 확대한 것입니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RI1W&articleno=506#ajax_history_home
순정효황후(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비 윤비) 백납병풍 찾았다
당대 최고 채용신 作 12폭 60점 그림 중 9점 발견
100여년 전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가 소장했던 백납병풍이 발견돼 눈길을 끌고 있다.
병풍은 조선 말기 초상화 화가로 유명했던 채용신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채용신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산수화 등을 담고 있어 작가 연구의 새로운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윤비 6·25때 해운대 피란.선물로 준 것 후손이 보관.향토사학자 주영택씨 확인
20일 가마골역사연구원 주영택(71) 원장에 따르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윤비가 부산 해운대구 우1동 장지마을에 2년간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윤비가 자신을 돌봐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이 12폭 병풍을 건넸다는 것. 이후 병풍은 그의 딸이 서울로 시집갈 때 딸에게 건네졌으며 딸이 병풍에 있던 60점의 그림 중 9점의 그림을 소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주 원장이 그림을 입수하게 됐다. 이후 주 원장은 소지자에게 병풍의 부산박물관 기증을 적극 독려하고 있다.
병풍 소지자 김남숙(72·여·경기도 성남시)씨는 아버지로부터 병풍을 건네받은 뒤 운반이 어렵자 대형 병풍을 폭마다 잘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후 김씨는 집에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림 한 장씩을 오려줘 현재 그림은 9점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한때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 이 병풍 그림을 집 한 채 값을 주고 사겠다는 뜻을 전해오기도 했다고 한다.
병풍에 담긴 그림 60점은 꽃, 개, 풍경 등 제각각 다른 소재를 다룬 산수화, 화조화, 풍속화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각 다복과 풍요, 장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병풍은 1907년께 순종 즉위 후 동궁계비 윤비가 순정효황후가 되는 것을 축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납병풍은 병풍 한 폭에 여러 장의 그림을 마치 옷을 깁듯이 붙여 놓았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병풍은 김씨에게 건네지기 전까지는 해운대 장지마을에서 잔치 때마다 마을사람들이 돌아가며 펼치는 '물건'이기도 했다. 윤비가 자신의 안방에 뒀던 병풍으로 좋은 의미가 다 담겨 있다고 하자 마을사람들이 경사가 있을 때마다 빌려가곤 했다는 것.
부산박물관 이성훈 학예연구사는 "일단 9점의 그림 중 채용신의 호 '석지'라는 낙관이 찍혀 있는 3점의 작품은 채용신의 작품이 맞을 것으로 보이지만 나머지 6점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면서 "백납병풍의 경우 온전하게 보전된 게 거의 없고, 채용신은 조선 말기 김은호와 함께 초상화로 당대 최고였던 화가로 초상화 이외 작품은 많지 않아 이번 병풍 그림은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석지(石芝)는 물론 석강(石江), 정산(定山) 등의 호를 사용했던 채용신(1850~1941)은 조선 말기 화가로 100여점의 초상화, 10여점의 화조화를 남겼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흥선대원군, 최익현 등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전통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이며 전통과 서양화법을 조화시켜 세부묘사와 원근, 명암 등을 표현하였다. '운낭자 27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최익현 초상' 등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부산일보/이현정 기자 2009.5.20>
윤비(순종비)와 궁중 여인들1900년대
南山伝統韓屋村 純貞孝皇后尹氏の本家
朝鮮第27代純宗の皇妃である純貞孝皇后尹氏が嫁ぐまで暮らした家です。
http://www.archidata.co.kr/filebase/Data/45271/ka191.htm
순정효황후 윤비 친가
(純貞孝皇后 尹妃 親家)
- 남산골 한옥마을
- 구 옥인동 서용택 가옥
현소재지:서울 중구 필동2가 84-1 일대,
원소재지:서울 종로구 옥인동 47-133
1870년 창건
* 개론
조선의 제 27대 순종(純宗)의 황후(皇后)인 윤씨가 동궁의 계비(繼妃)로 책봉되었던 열 세살까지 살았던 집으로 고종 12년(1875)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원 소재지는 종로구 옥인동에 있으나 가옥이 너무 낡아 그 양식 그대로 본떠 남산골 한옥마을에 복원하였다. 원래 민속자료 23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남산에 새롭게 복원되면서 문화재 지정은 취소되었고 구 가옥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
최상류 주택으로서 별궁(別宮)에 비견될 만한 품격을 갖추었던 집이다.
* 구성
이 가옥은 안채, 사랑채, 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ㄷ’ 자형 평면의 몸채의 전면에 대문과 사랑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갖는다. 대문간의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채는 안채보다 높게 자리잡아 누각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원 가옥이 있었던 옥인동의 대지조건상 서울시가지를 한눈에 보기 좋도록 의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 가옥은 사랑채의 하부에 관리인 실을 두어 복층으로 사용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합각면은 전돌쌓기하였다.
안채는 중앙에 6칸 규모의 대청을 두고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하였다. 안방 아래로 딸방과 부엌, 찬방, 찬모방, 행랑방을 순차적으로 두고, 건넌방 아래로 서고, 아들방을 순차적으로 배치하였으며 전후면에 퇴를 두었다. 기단은 세벌대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모난돌을 다듬어 주춧돌을 놓고 평주를 세웠다. 대청 중앙에 고주를 세운 1고주 5량가이며, 공포는 쇠서가 없는 초익공을 놓고 간마다 운공(雲工)을 세 개씩 두었다. 본래 민가에는 공포를 사용할 수 없는데 궁집으로서의 품격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평면도
* 지도
(참고 문헌 : 한국의건축문화재(서울편) / 홍대형저,
남산골한옥마을 사이트)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c2Kc&articleno=43&categoryId=0®dt=20120723173736#ajax_history_home
南山谷韓屋村
南山谷韓屋村是將原本散落在首爾市區裡的五棟韓國傳統韓屋遷移至此而組成的。
從朝鮮時代(1392~1910)的兩班士大夫宅邸到一般平民的生活瓦屋的住家規模及家具擺飾如實呈現。
朝鮮時代南山谷地區因為有溪谷與名為「泉雨閣」的閣樓(可以觀賞四周景色,沒有門與牆壁像亭子的房子),
所以夏天避暑的最佳場所。建造南山谷韓屋村時,也修復了泉雨閣,並在腹地內蓋了可以與溪谷同樂的亭子,
可欣賞周邊景致,這裡也是散步的好地方。
可一窺朝鮮時代兩班士大夫五棟宅邸的地方
在「南山谷韓屋村」可一窺朝鮮時代兩班士大夫的五棟宅邸,包含了純貞孝皇后尹妃(朝鮮第二十七代王純宗的妃子,
相傳當時親日派強迫純宗在韓日合邦條約上蓋印鑑,但是純貞孝皇后將玉璽藏在裙子裡,抵死不從)的娘家、
海豊府院君尹澤榮(朝鮮第二十五代王哲宗及後宮生的公主之丈夫)的宅邸、
都邊首(木工的最高負責人)李承業(建造朝鮮宮殿景福宮時的建築負責人)的宅邸、五衛將金春永(朝鮮時代的軍人)的房子。
朝鮮時代兩般士大夫的生活文化
韓屋村裡的代表性韓屋可以說是純貞孝皇后尹妃的娘家,這個宅邸是「ㅁ」的構造,打開接待客人的廂房、
女主人居住的廂房及大門的話,印入眼簾的是連結這三個地方獨特的大門構造,外觀上以院子為中心,房屋圍繞的構造,
由此可知院子對於韓屋來說不是房子的外部,而是房屋的中心構造。
此外也將韓屋特有之門的構造表現得體,韓屋的門不是只有將外部與內部隔離的功能,也就是說還有將走廊及房間為成一體,
或者可隨著需求調整房間與房間的間格的功能。
親身感受及學習的韓國文化
韓屋村也時常舉辦韓國傳統公演和射箭等傳統遊戲,此外也會實際舉行韓國式傳統婚禮,因此想瞭解韓國婚禮文化的遊客,
可以於週末前往體驗。
為了外國人所準備的跆拳道體驗活動
原在慶熙宮舉行的跆拳道示範表演及體驗活動已經遷至南山谷韓屋村內舉行。
針對外國遊客提供直接學習韓國傳統武術跆拳道的體驗活動, 於韓屋村內學習跆拳道的攻防動作與踢腿技巧等。
沿著散步路,可以到達像噴火口的廣場,是埋葬「首爾一千年時空膠囊」的地方,
雖然與1994年埋葬迎接首爾定都六百年時空膠囊的韓屋村具有不同的意義,但都意旨保存過去。
Tuesday, June 5, 2012
Joseon last crown princess Bangja,Ri Masako
http://blog.goo.ne.jp/kisawai_2007/e/443be44a5ab1650a5a5f05f08e14df12
小田島雄次『李方子ー一韓国人として悔いなく』ミネルヴァ書房、2007年
李王家皇太子妃である李方子(り・まさこ/イバンジャ、[1901-89])の評伝です。
梨本宮守正と(鍋島)伊都子の子として生まれ、20歳で李王家最後の皇太子であった李大王の子・李垠(リ・ウン)と結婚した方子(1920)。彼らの結婚は戦前の日本が韓国を支配する政策の一環としての国策でした。このことによって「日韓融和」が喧伝されましたが、実際には朝鮮人の同化、日本人化の推進に利用されたのでした。
方子の結婚は、本人がそのことを知る前に新聞紙上の記事から知ったというものでした(李垠は1907年に満11歳で伊藤博文が教育目的に日本に連れて来ました)。
彼らの結婚には、悲劇が付きまとっていました。予定されていた結婚が李大王の急死で延期されましたし(毒殺説があります)、最初の子・晋は朝鮮での覲見式、宗廟への奉審の儀にともなって行われた晩餐会の後に急死しました(これも毒殺説があります)。
関東大震災、戦中の苦労。敗戦後、日本国憲法施行の前日に公布された皇室令第12号によって王皇族としての地位と身分の喪失、さらに戦後は李承晩から疎まれ、1963年まで韓国への帰国が許されませんでした。
帰国後、李垠と方子とは大韓民国国民となります。方子が輝くのは、夫の死後(1970年)、韓国で始めた、慈善・福祉活動によってでした(身体障害者のための明暉園の設立など)。
母であった伊都子の「日記」と方子の著作『流れるままに』を下敷きに、方子の波乱万丈の人生を、大正、昭和の出来事、歴史的事件をふんだんにもりこみながら、たどった異色の評伝です。
「第1章・梨本宮方子の日々」「第2章・李王族の一員に」「第3章・動乱の時代」「第4章・流転」。巻末の「李方子年譜」は重要です。
http://hmpiano.net/riwakino/princess_masako.html
朝鮮李王朝最後の皇太子妃となった日本人女性
今朝、寝床の中で「日韓皇室秘話・李方子妃」(渡辺みどり著・中公文庫)を読み終え、溢
れる涙で枕を濡らしました。
外国に嫁がれた唯一の日本皇族の女性の物語は以前にも読んだことがあるのですが、
今回は年を取ったせいでしょうか、それとも今の日本がはなはだ情けない大人達で充ち
満ちている危機感からでしょうか、この数奇な運命に弄ばれながら高貴さと、良質さを失う
ことなく立派に生き抜いた大和撫子の存在に魂を揺り動かされるような感動を受けたので
す。
私が若いころから王族のような高貴な身分の人に深い関心を持ち続けたのは、このよう
な精神の気高さを身につけた人を頻繁に見出すからなんだろう、とこの本を読んで改めて
思いました。
梨本宮家の王女である方子妃は日韓併合後、人質として11歳で日本に連れてこられた
韓国王太子李垠と政略結婚をさせられますが、日韓の軋轢の中で様々な苦労を重ねな
がらも二人の中はむつまじく、最後まで添いとどけるのです。朴大統領が政権をとってから
初めて夫と共に韓国に迎え入れられたときは、反日感情の激しさもあいまって「チョッパリ
!」「異国の女」と韓国民の反感を買うのですが、夫の死後も韓国に留まって慈善活動に
従事し、19年後の平成元年に87歳で世を去ったとき、韓国政府は准国葬の扱いをし、韓
国民の多くが喪に服したのです。
「方子妃の葬列は1キロにも及び、チマチョゴリの女子学生が持つ韓国の国旗を先頭に立
ち、その後を全州李氏の幟(のぼり)がおよそ二百本続いた。その後から李王朝の伝統的
な衣裳に身を包んだ女官や楽士の列が続き、この葬列は李王朝残影とでもいおうか、李
王朝最後の伝統文化を次の世代に継承するという趣があった」と同書は記しています。
平成元年のこの葬列で女官たちが舞を舞いながら葬列に続く様を目撃したサンケイ新聞
ソウル支局長(当時)黒田勝弘氏は「韓国の人たちの方子妃に献げる哀悼、涙無しに見る
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そのエセー集に記しています。
それにしても我が国は何と素晴らしい女性を多く生み出しているのだろうか、と改めて感じ
入りました。それと同時に敗戦後、多くの皇族から皇族の身分を奪った愚かさを強く感じま
す。方子妃殿下のような良質の方々がいくらでも今でも皇族として残っておられたでしょう
から、お世継ぎ問題ももっと色んな選択肢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たことと思います。
今からでも遅くはありません。旧宮家を復活させることに私は賛成です。
小田島雄次『李方子ー一韓国人として悔いなく』ミネルヴァ書房、2007年
李王家皇太子妃である李方子(り・まさこ/イバンジャ、[1901-89])の評伝です。
梨本宮守正と(鍋島)伊都子の子として生まれ、20歳で李王家最後の皇太子であった李大王の子・李垠(リ・ウン)と結婚した方子(1920)。彼らの結婚は戦前の日本が韓国を支配する政策の一環としての国策でした。このことによって「日韓融和」が喧伝されましたが、実際には朝鮮人の同化、日本人化の推進に利用されたのでした。
方子の結婚は、本人がそのことを知る前に新聞紙上の記事から知ったというものでした(李垠は1907年に満11歳で伊藤博文が教育目的に日本に連れて来ました)。
彼らの結婚には、悲劇が付きまとっていました。予定されていた結婚が李大王の急死で延期されましたし(毒殺説があります)、最初の子・晋は朝鮮での覲見式、宗廟への奉審の儀にともなって行われた晩餐会の後に急死しました(これも毒殺説があります)。
関東大震災、戦中の苦労。敗戦後、日本国憲法施行の前日に公布された皇室令第12号によって王皇族としての地位と身分の喪失、さらに戦後は李承晩から疎まれ、1963年まで韓国への帰国が許されませんでした。
帰国後、李垠と方子とは大韓民国国民となります。方子が輝くのは、夫の死後(1970年)、韓国で始めた、慈善・福祉活動によってでした(身体障害者のための明暉園の設立など)。
母であった伊都子の「日記」と方子の著作『流れるままに』を下敷きに、方子の波乱万丈の人生を、大正、昭和の出来事、歴史的事件をふんだんにもりこみながら、たどった異色の評伝です。
「第1章・梨本宮方子の日々」「第2章・李王族の一員に」「第3章・動乱の時代」「第4章・流転」。巻末の「李方子年譜」は重要です。
http://hmpiano.net/riwakino/princess_masako.html
朝鮮李王朝最後の皇太子妃となった日本人女性
今朝、寝床の中で「日韓皇室秘話・李方子妃」(渡辺みどり著・中公文庫)を読み終え、溢
れる涙で枕を濡らしました。
外国に嫁がれた唯一の日本皇族の女性の物語は以前にも読んだことがあるのですが、
今回は年を取ったせいでしょうか、それとも今の日本がはなはだ情けない大人達で充ち
満ちている危機感からでしょうか、この数奇な運命に弄ばれながら高貴さと、良質さを失う
ことなく立派に生き抜いた大和撫子の存在に魂を揺り動かされるような感動を受けたので
す。
私が若いころから王族のような高貴な身分の人に深い関心を持ち続けたのは、このよう
な精神の気高さを身につけた人を頻繁に見出すからなんだろう、とこの本を読んで改めて
思いました。
梨本宮家の王女である方子妃は日韓併合後、人質として11歳で日本に連れてこられた
韓国王太子李垠と政略結婚をさせられますが、日韓の軋轢の中で様々な苦労を重ねな
がらも二人の中はむつまじく、最後まで添いとどけるのです。朴大統領が政権をとってから
初めて夫と共に韓国に迎え入れられたときは、反日感情の激しさもあいまって「チョッパリ
!」「異国の女」と韓国民の反感を買うのですが、夫の死後も韓国に留まって慈善活動に
従事し、19年後の平成元年に87歳で世を去ったとき、韓国政府は准国葬の扱いをし、韓
国民の多くが喪に服したのです。
「方子妃の葬列は1キロにも及び、チマチョゴリの女子学生が持つ韓国の国旗を先頭に立
ち、その後を全州李氏の幟(のぼり)がおよそ二百本続いた。その後から李王朝の伝統的
な衣裳に身を包んだ女官や楽士の列が続き、この葬列は李王朝残影とでもいおうか、李
王朝最後の伝統文化を次の世代に継承するという趣があった」と同書は記しています。
平成元年のこの葬列で女官たちが舞を舞いながら葬列に続く様を目撃したサンケイ新聞
ソウル支局長(当時)黒田勝弘氏は「韓国の人たちの方子妃に献げる哀悼、涙無しに見る
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そのエセー集に記しています。
それにしても我が国は何と素晴らしい女性を多く生み出しているのだろうか、と改めて感じ
入りました。それと同時に敗戦後、多くの皇族から皇族の身分を奪った愚かさを強く感じま
す。方子妃殿下のような良質の方々がいくらでも今でも皇族として残っておられたでしょう
から、お世継ぎ問題ももっと色んな選択肢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たことと思います。
今からでも遅くはありません。旧宮家を復活させることに私は賛成です。
Bangja, Crown Princess Euimin of Korea
李 方子(り まさこ、朝: 이 방자〈イ・バンジャ〉、1901年11月4日 - 1989年4月30日)は、日本の元皇族。梨本宮家に生まれ、旧大韓帝国の元皇太子で日本の王公族となった李垠の妃。
이방자(李方子りまさこ 리 마사코[*], 1901년 11월 4일 ~ 1989년 4월 30일) 또는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일본어: 梨本宮 方子なしもとのみや まさこ)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의민태자 이은(李垠)의 비이다.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는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이다.
http://blog.onekoreanews.net/moris/69
http://www.jti.co.jp/Culture/museum/exhibition/2005/0511nov/02_1.html
梨本宮家の人々
中央に守正・伊都子夫妻を挟んで、左が長女の方子(まさこ)、右が次女の規子。大正7(1918)年12月。
梨本宮邸内応接室の写真
明治治3(1870)年、伏見宮第19代貞敬王の第十王子守脩親王によって創設された。明治元(1868)年、守脩親王は円満寺門跡から復飾。明治3年、梨本宮の称号を与えられる。明治14(1881)年の守脩王の死去後、本来なら一代で絶えるところを、山階宮晃親王第一男子菊麿王、さらに久邇宮家第一代朝彦親王の第四子守正王がともに養子となって跡を継いだ。
第三代守正王は明治33(1900)年、侯爵鍋島直大の次女伊都子と結婚し、後に朝鮮の李王家に嫁ぐ、方子女王と規子女王の二女をもうけている。この結婚に際し、当時屈指の富豪であった鍋島家は、洋式衣装すべてをパリのオートクチュールに発注。三万円あれば一生食べていけると言われ、時の総理大臣大隈重信の給与が年俸で九千六百円の当時、一個が二万数千円するダイヤ十個使った王冠を用意するなど、その豪華絢爛さは話題となった。
また、守正王は良子皇太后の叔父にあたり、伊都子妃は秩父宮勢津子妃の伯母にあたるなど、梨本宮家は明治・大正・昭和の三代の天皇のそば近くにあって、それぞれの時代を見つめてきた。
とりわけ旧藩主華族に生まれ、嫁いで皇族となり、戦後は臣籍降下によって一般市民となった伊都子妃は、明治32(1899)年の正月から昭和51(1976)年に95歳で亡くなられるまでの77年余り、ほぼ毎日日記を書き続けたが、その日記は激動の歴史に生きた皇族妃、そして、一女性の記録として貴重なものである。
なお、渋谷区渋谷一丁目にある東京都児童会館や旧渋谷小学校一帯は、かつて二万坪を有した梨本宮邸跡にあたり、現在、渋谷区立宮下公園に唯一残る「宮下」の名(町名)は、梨本宮邸の下に位置したところから付けられた。
http://silentsilent.blog.so-net.ne.jp/2009-04-30
梨本宮方子王女と李垠殿下 [物語]
伊藤博文と李垠皇太子
大磯に別荘を構えられた宮様は梨本宮守正様。一家は守正殿下を主に鍋島家から嫁いだ伊都子夫人
長女に方子王女と妹君の姿で、右手に立たれた方子王女が15歳の時、大磯の吉田茂邸の近くの別荘で、韓国皇太子李垠殿下との御成婚が決定したという事を新聞で知ったと云う。
大正5年8月3日の朝日新聞
李垠殿下と方子王女のお二人
彼女は大正9年に19歳で李垠さんと結婚し、波乱に飛んだ生涯を終え、平成元年の4月30日の今日韓国で死去された。88歳の生涯であった。晩年は韓国の福祉の母と親しまれ、生年が1901年で、同年に生まれた沢田美喜さんはエリザベスサンダースホームで孤児達のために生涯を捧げられた事を不思議な巡り合わせに想う。今も西小磯の海辺に、梨本宮別荘は主こそ違えひっそりと建っている。お二人はこの町で出会われた事もあったのであろうかと、、、、、、
虹を架ける王妃 ~朝鮮王朝最後の皇太子と方子妃の物語~ 完全版
http://www3.kitanet.ne.jp/~kimono/oume/kimono/13.html
http://xmugix01.exblog.jp/i7/3/
宮家の肖像
男性左からジグザグに
賀陽宮恒憲王 伏見宮博義王 多嘉王 朝香宮鳩彦王 高松宮
久邇宮邦彦王 久邇宮朝融王 李王垠 閑院宮載仁王 梨本宮守正王
伏見宮博恭王 李堈公 秩父宮 閑院宮春仁王 東久邇宮稔彦王
女性左からジグザグに
久邇宮俔子妃 伏見宮経子妃 李王妃方子 秩父宮勢津子妃 多嘉王妃静子
伏見宮朝子妃 朝香宮允子妃 賀陽宮敏子妃 閑院宮直子妃 梨本宮伊都子妃
http://ameblo.jp/jjtaro/entry-11131024296.html
李方子妃殿下
韓国で尊敬される女性の上位に名を連ねる李方子妃殿下。
大正9年(1920年)皇族梨本宮守正王と伊都子妃の第一王女として生まれた方子(まさこ)女王は李氏朝鮮26代高宗の第四王子、李垠(イ・ウン)殿下とご結婚されました。日韓併合後10年、政治的な意図の結婚ですが、日本の考え方が良く表れています。日韓併合が白人等の植民地支配と同列だとすると皇族から嫁がせるなど考えられません。例えば英国が王室からインド王朝に嫁がせるなどと絶対に有り得ないわけです。でも日本は異なり、満州国の皇帝溥儀殿下の弟、溥傑殿下には流転の王妃で知られている嵯峨侯爵のご令嬢、浩様が嫁がれています。八紘一宇という同胞として見る心があったのです。
方子女王は嫁ぎ先をなんと新聞で知ったのだそうです。
「世間では親とか家とかのために結婚することは珍しくなく、本人の意思が重んじられないのは普通のこと。皇族はさらに自由がないとはいえ、せめて新聞に出る前に知らせて覚悟を決め、『お受けします』ときっぱり申し上げたかった」
と母親の伊都子妃に申し上げたそうです。
正式に父守正殿下から婚約を告げられたとき、
「よくわかりました。大変なお役だと思いますが、ご両親のお考えのように努力してみます。」
と答えられたそうです。
この方子女王の返事には母の伊都子妃殿下は毅然として映ったものの、それがゆえ、いっそう心を痛まれたと言います。
方子女王はこのときまだ学習院の学生で丁度夏休みのことでした。2学期が始まった初登校の日、髪は韓国式に結い昂然(こうぜん)として登校します。その姿に学友たちは覚悟を感じ、圧倒され、感心したと言います。
お相手の李垠殿下は明治天皇がそれはそれは、おかわいがりになった方で、明治天皇からの贈り物だけでも尋常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明治天皇の愛情をふんだんに受けて育った李垠殿下は口数が少ない方でしたが、結婚後、方子妃が帰宅する李垠殿下を青いチマチョゴリで出迎えると「よく似合いますよ」と応えたといいます。
昭和20年(1945年)の敗戦後、方子妃殿下は皇族から除籍されます。その後、李垠殿下の死を乗り越え、韓国で福祉事業に打ち込みます。
「チョッパリが寄付なんて図々しい」
「よその国で何を始めようというのだ」
「おとなしく飼い殺しされていればいいのに」
こういった風当たりにも負けず、障害を持つ人たちの支援活動を続けます。62歳から87歳で亡くなるまで、方子様の四半世紀は福祉一色でした。知的障害児施設の「明暉園」と知的障害養護学校である「慈恵学校」を設立し、昭和56年には韓国政府から「牡丹勲章」が授与されました。
平成元年四月三十日永眠。もうひとつの昭和の終わりと言われています。韓国では準国葬の扱いで、後に韓国国民勲章槿賞(勲一等)が追贈されました。
李方子妃殿下は韓国では尊敬される女性のベスト5に常に名を連ねるそうです。
参考文献
竹書房「世界が愛した日本」四條たか子(著)
ワック出版「歴史通」2009.7月号『軍人は戦争をしたくない』中條高徳/田母神俊雄
徳間書店「歴史を偽造する韓国」中川八洋(著)
参考サイト
Wikipedia「李方子」「高宗 (朝鮮王)」「李垠」「嵯峨浩」
添付画像
方子女王 1918年17歳の頃 (PD)
the portraits of disappeared the last descendants of Joseon Dynasty
http://book.culppy.org/bbs/board.php?bo_table=23_01&wr_id=85
송광호 칼럼 <13> 사라진 조선왕조 마지막 후손들의 초상
편집자註] 다섯 세기를 이어온 조선왕조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종말을 고했습니다.
조선왕조 말기, 대한제국이 선포됨으로써 마지막 군주였던 고종과 순종은 '황제'로 등극했지만 이미 왕실은 사실상의 권력을 상실한 뒤였고 한-일 합방 이후 왕실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순탄치 않은 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해방이 되고난 뒤, 새로 독립된 이 나라에 새 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도 왕실은 철저하게 소외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왕가의 마지막 후손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향기칼럼에서는 굴곡으로 점철된 이 나라의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며 온갖 질곡을 감내해야 했던 조선왕가 마지막 후손들의 모습을 만나 봅니다.
무자년 신년아침, 지난날 일본 도쿄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한 책자 <황실황족성감(皇室皇族聖鑑)> (명치, 대정, 소화 전3권/소화11년 발행, 오른쪽 사진)에 나타나 있는 이씨(李氏)왕조 계보내용을 토대로 사진과 함께 소개합니다.
고종, 순종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마감한 최후의 임금으로 평소 일반대중에겐 역사상으로만 존재했던 왕으로 지나쳐 왔으나 한편 생각해보면 마지막 왕족의 뿌리에 관한 역사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제에 의해 굴욕을 당한 슬픈 역사를 지닌 최후의 조선황실가족. 대한제국 멸망을 위해 일제로부터 귀족칭호와 막대한 토지, 돈 등을 하사 받고 나라를 넘기는데 앞장선 망국, 매국노 조선인들에게 새삼 분노가 치솟습니다.
역사기록에는 조중응(趙重應), 이완용(李完用), 윤덕영(尹德榮), 송병준(宋秉畯), 고영희(高永喜), 이지용(李址鎔), 박제순(朴齊純), 이병무(李秉武), 이재곤(李載崑), 임선준(任善準), 이근택(李根澤), 이하영(李夏榮) 등이 가장 용서받지 못할 매국행위의 선두주자요 핵심인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마지막 왕인 고종, 순종을 비롯한 황족 사진자료 및 설명입니다.
* 이 사진은 근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자료로, 1907년 일본 황태자(나중 일본 대정천황이 됨)가 방한(訪韓)해 경복궁 경회루에서 촬영한 기념사진입니다.
앞줄 왼쪽부터 아리스가와궁 전하, 한국 황태자(당시 10세의 이은), 일본 황태자(요시히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이 있고, 바로 뒷줄에는 왼쪽부터 이병무, 이완용 총리대신, 도고 대장, 카츠라 대장, 송병준, 조중응의 모습이 보입니다.
* 역시 일본 황태자 방한당시(1907년) 창덕궁 비원에서 찍은 사진.(사진 촬영지와 관련해 창덕궁이 아닌, 남산 왜성대 총독관저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모두 훈장 달린 황실군복차림으로 앞줄 왼쪽부터 아리스가와궁 전하, 순종, 일본 황태자, 이왕(이은)전하입니다. 韓-日 양국 황실끼리 촬영한 사진입니다. 뒷 줄 왼쪽 맨끝에 서 있는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입니다.
- 1907년 10월 19일 촬영
* 조선 마지막 왕조 계보
한일합방 후 일본에서 발간한 조선왕조 계보입니다. 일본에 합병된 탓에 '황제'가 '왕'으로, '폐하'가 '전하'로, '황태자'가 '왕세자'로 칭호의 격이 낮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朝鮮最後の王朝の血統
日韓併合後、日本で出版された朝鮮王朝の系譜です。日本に併合されたせいで"皇帝"が"王"で、 "陛下"が"殿下"で、 "皇太子"が"王子"と称号の格が低くなったことがわかります。
* Pedigree of the last dynasty of Korea
the genealogy of Joseon Dynasty,published in Japan after the annexation of Korea.
because of colonized by japan, the title was low down as from "Emperor" to "king","Your Majesty" to "Your Royal Highness", "crown prince" to "Prince"
* 고종황제 (1852~1919)
조선26대 임금. 대한제국의 광무황제에 오른 후 1907년 일본의 압력(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왕위를 순종에게 양위했습니다.
* 명성황후(1851~1895)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 당하기 1년전에 일본 신양당 출판사에서 인쇄한 석판 초상화입니다.
고종은 정비인 명성황후(민자영)로부터 4남 1녀를 두었으며, 모두 8명의 부인으로부터 9남 4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 중 성년으로 성장한 이들은 순종(1874~1926), 의친왕 이강(1877~1955), 영친왕 이은(1897~1970)과 덕혜옹주(1912~1989) 등 4명뿐이었습니다.
* 고종과 엄비
고종은 모두 여덟 명의 부인을 두었습니다. 부인들의 이름은 귀비 엄씨(영친왕 모), 귀인 이씨, 귀인 장씨(의친왕 모), 소의 이씨, 귀인 정씨(이 우), 귀인 양씨(덕혜옹주 모) 등입니다.
그 가운데 궁녀신분이었던 엄비는 명성황후 사망 뒤 고종의 총애를 입어 영친왕(이은)을 낳고 나중 국모의 역할을 수행하며 '순헌황귀비'시호까지 받았습니다. 엄비는 진명, 숙명여학교 설립자입니다.
* 순종황제(1874~1926, 왼쪽 사진은 황실 제복 차림)
순종황제는 고종의 3남으로 왕위를 이었으나 워낙 심신이 병약해 두 왕비(민씨와 윤씨)사이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고종의 7남이었던 이은(李垠, 영친왕)이 황세자로 책봉됐습니다.
* 순종 비 (윤씨부인, 1894~1966년)
마지막 국모였던 순정황후 윤씨. 13세 때 순종의 비가 되었습니다. 한일합방 당시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숙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다고 전해집니다.
* 영친왕(이은, 1897~1970), 부인 이방자 여사
* 이구(1931~2005)
고종의 7남인 이은(李垠, 영친왕)은 11세 때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으며 일본인 부인 이방자 여사 사이에 아들 이구(李玖, 1931~2005)를 두었습니다.
* 이강(1877~1955, 의친왕)
고종의 5남이던 이강(李堈, 의친왕)은 영친왕 생모인 엄비의 견제로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견제를 당하고 6.25 전쟁 당시엔 제대로 식생활을 못해 55년 영양실조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 이강(李堈)공비 김수덕 여사(1878~1964년)
자신은 자손을 못 보았으나 이강 공 슬하 21명의 자녀들을 감싸고 돌봐줘 그들로부터 '큰어머니'로 불렸다고 합니다.
* 이강(의친왕)의 장남 이건(李鍵) 공자(1909~1990)
이강 공자는 모두 22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이건(李鍵)공자(1909~1990)입니다. 이건은 1947년 아예 일본에 귀화해서 한국과 인연을 끊었습니다. '비둘기 집'을 부른 가수 이석은 이강의 11번째입니다.
* 이건 공자의 장남 이충 공자(의친왕의 손자)
* 이우 공자(의친왕의 차남)
* 이우 공자 부부
이강의 2남 이우(李鍝, 1912~1945)는 조선왕실인들 가운데 민족의식이 가장 강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일본 육군중좌(중령)였으나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한국인 박찬주 여사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해방을 바로 앞둔 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 덕혜옹주(1912~1989)
고종이 환갑 때 낳은 고명딸입니다. 23세때 일본에 가서 공부했고 일본인 백작과 결혼했습니다. 62년 일본에서 고국 땅으로 돌아와 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종은 덕혜옹주를 일제에 빼앗기지 않으려 황실시종의 조카와 정략결혼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 받아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덕혜옹주를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갔습니다. 덕혜옹주는 몽유병, 치매 등의 질환을 앓았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왕조 마지막 왕손들의 순탄치 못했던 일대기는 순탄치 못했던 이 나라 근대 역사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Share on twitter Share on facebook Share on print Share on favorites More Sharing ServicesShare
등록댓글 7개 / 댓글 작성시 30포인트 적립
지유석 해방 후 이 나라에 새 정부 수립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조선왕조를 다시 복위시키는 방안도 심심찮게 거론됐다고 합니다. 어쩌면 현실적인 방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한일합방 당시 이 나라는 왕정체제였으니까요. 하지만 이승만은 행여 왕정복고가 유력한 방안으로 부상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왕족들을 철저하게 소외시켰습니다. 이런 탓에 마지막 왕손들은 해방되어서도 기구한 운명을 짊어져야 했지요.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신해혁명으로 폐위되고 한량으로 지내다가 일제에 의해 만주국 황제로 등극하더니 중-일전쟁 후엔 인민재판에 회부돼 반동으로 몰렸다가 결국 정원사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지요.
우리네 마지막 왕손들도 기구하기는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요? 아마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만큼이나 기구한 스토리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08-01-04 14:41
포아풀 참 슬픈 역사네요. 그리고 기구한 운명이네요.
1989년 대한극장에서 '마지막 황제'를 봤지요.
그 이후로 심심찮게 보던 영화와의 내용과 어쩌면 이리 닮아 있을까요.
국적만 다를 뿐...
08-01-04 22:23
이정훈 어디를 보나 마지막 황실은 비참한게 역사의 한장인가 봅니다. 변화의 시각으로 새로운 장을 열수 있었는데, 조선왕조의 운명인지, 그렇지 못하고 심히 쓸쓸했음은 참 안타깝네요.. 그래도 조선의 역사는 참으로 위대했음으로 길이 보존되길..
08-01-08 08:16
icowkim@ha… 나서지 않고 묵묵히 본연의 임무에 무섭도록 충실한 귀하 같은 분이 계셔서 역사적 가치 의미로서의 좋은 자료 잘 보았읍니다.
두번째 사진에 앞줄 맨 왼쪽이 아리스가와노미야전하이고 세번째가 왕태자(대정왕)인데 바뀌었네요. 귀한자료 다시 한 번 확인하셔서 혹시 정정이 필요 하시면...
우스게 소리로 첫장의 일왕태자 사진을 보면 뭔가 조금 띨빡하게 보이지 않나요?
후일 대정왕은 공식석상에서 읽고난 원고를 둘둘 말아서 마치 망원경을 보듯(듣)이
참석자를 쳐다보는 기행을 행하고 해서 일왕실의 근친교배로 인한 이상현상을 나타냈고, 젊은 나이에 일찍 꽥 했을 겁니다.
08-01-08 15:14
송광호 icowkim 님, 지적해주신 대로 입니다. 자료를 확인하니 사진이름이 바뀌었네요.
대정 황태자는 맨 왼쪽이 아니라 3번째입니다. 깊이 감사 드립니다.
08-01-09 09:59
최훈희 우리의역사의 지난세월의 사진을보니 마음이 슬프네요. 먼저가신 왕실의 그분들의 마음은 어땔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감사합니다.
08-01-10 12:44
민수 일본 황족의 이름을 . 아리스가와노미야 왕. 이거나.. 왕세손이거나.. 그런게 아니고 왜 "전하"를 쓰는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전하라는 것은.. 보통 신하가 왕을 올려부를때 하는 말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하니 보기 좋지 않네요.
10-06-11 10:30
송광호 칼럼 <13> 사라진 조선왕조 마지막 후손들의 초상
편집자註] 다섯 세기를 이어온 조선왕조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종말을 고했습니다.
조선왕조 말기, 대한제국이 선포됨으로써 마지막 군주였던 고종과 순종은 '황제'로 등극했지만 이미 왕실은 사실상의 권력을 상실한 뒤였고 한-일 합방 이후 왕실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순탄치 않은 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해방이 되고난 뒤, 새로 독립된 이 나라에 새 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도 왕실은 철저하게 소외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왕가의 마지막 후손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향기칼럼에서는 굴곡으로 점철된 이 나라의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며 온갖 질곡을 감내해야 했던 조선왕가 마지막 후손들의 모습을 만나 봅니다.
무자년 신년아침, 지난날 일본 도쿄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한 책자 <황실황족성감(皇室皇族聖鑑)> (명치, 대정, 소화 전3권/소화11년 발행, 오른쪽 사진)에 나타나 있는 이씨(李氏)왕조 계보내용을 토대로 사진과 함께 소개합니다.
고종, 순종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마감한 최후의 임금으로 평소 일반대중에겐 역사상으로만 존재했던 왕으로 지나쳐 왔으나 한편 생각해보면 마지막 왕족의 뿌리에 관한 역사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제에 의해 굴욕을 당한 슬픈 역사를 지닌 최후의 조선황실가족. 대한제국 멸망을 위해 일제로부터 귀족칭호와 막대한 토지, 돈 등을 하사 받고 나라를 넘기는데 앞장선 망국, 매국노 조선인들에게 새삼 분노가 치솟습니다.
역사기록에는 조중응(趙重應), 이완용(李完用), 윤덕영(尹德榮), 송병준(宋秉畯), 고영희(高永喜), 이지용(李址鎔), 박제순(朴齊純), 이병무(李秉武), 이재곤(李載崑), 임선준(任善準), 이근택(李根澤), 이하영(李夏榮) 등이 가장 용서받지 못할 매국행위의 선두주자요 핵심인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마지막 왕인 고종, 순종을 비롯한 황족 사진자료 및 설명입니다.
* 이 사진은 근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자료로, 1907년 일본 황태자(나중 일본 대정천황이 됨)가 방한(訪韓)해 경복궁 경회루에서 촬영한 기념사진입니다.
앞줄 왼쪽부터 아리스가와궁 전하, 한국 황태자(당시 10세의 이은), 일본 황태자(요시히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이 있고, 바로 뒷줄에는 왼쪽부터 이병무, 이완용 총리대신, 도고 대장, 카츠라 대장, 송병준, 조중응의 모습이 보입니다.
* 역시 일본 황태자 방한당시(1907년) 창덕궁 비원에서 찍은 사진.(사진 촬영지와 관련해 창덕궁이 아닌, 남산 왜성대 총독관저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모두 훈장 달린 황실군복차림으로 앞줄 왼쪽부터 아리스가와궁 전하, 순종, 일본 황태자, 이왕(이은)전하입니다. 韓-日 양국 황실끼리 촬영한 사진입니다. 뒷 줄 왼쪽 맨끝에 서 있는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입니다.
- 1907년 10월 19일 촬영
* 조선 마지막 왕조 계보
한일합방 후 일본에서 발간한 조선왕조 계보입니다. 일본에 합병된 탓에 '황제'가 '왕'으로, '폐하'가 '전하'로, '황태자'가 '왕세자'로 칭호의 격이 낮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朝鮮最後の王朝の血統
日韓併合後、日本で出版された朝鮮王朝の系譜です。日本に併合されたせいで"皇帝"が"王"で、 "陛下"が"殿下"で、 "皇太子"が"王子"と称号の格が低くなったことがわかります。
* Pedigree of the last dynasty of Korea
the genealogy of Joseon Dynasty,published in Japan after the annexation of Korea.
because of colonized by japan, the title was low down as from "Emperor" to "king","Your Majesty" to "Your Royal Highness", "crown prince" to "Prince"
* 고종황제 (1852~1919)
조선26대 임금. 대한제국의 광무황제에 오른 후 1907년 일본의 압력(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왕위를 순종에게 양위했습니다.
* 명성황후(1851~1895)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 당하기 1년전에 일본 신양당 출판사에서 인쇄한 석판 초상화입니다.
고종은 정비인 명성황후(민자영)로부터 4남 1녀를 두었으며, 모두 8명의 부인으로부터 9남 4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 중 성년으로 성장한 이들은 순종(1874~1926), 의친왕 이강(1877~1955), 영친왕 이은(1897~1970)과 덕혜옹주(1912~1989) 등 4명뿐이었습니다.
* 고종과 엄비
고종은 모두 여덟 명의 부인을 두었습니다. 부인들의 이름은 귀비 엄씨(영친왕 모), 귀인 이씨, 귀인 장씨(의친왕 모), 소의 이씨, 귀인 정씨(이 우), 귀인 양씨(덕혜옹주 모) 등입니다.
그 가운데 궁녀신분이었던 엄비는 명성황후 사망 뒤 고종의 총애를 입어 영친왕(이은)을 낳고 나중 국모의 역할을 수행하며 '순헌황귀비'시호까지 받았습니다. 엄비는 진명, 숙명여학교 설립자입니다.
* 순종황제(1874~1926, 왼쪽 사진은 황실 제복 차림)
순종황제는 고종의 3남으로 왕위를 이었으나 워낙 심신이 병약해 두 왕비(민씨와 윤씨)사이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고종의 7남이었던 이은(李垠, 영친왕)이 황세자로 책봉됐습니다.
* 순종 비 (윤씨부인, 1894~1966년)
마지막 국모였던 순정황후 윤씨. 13세 때 순종의 비가 되었습니다. 한일합방 당시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숙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다고 전해집니다.
* 영친왕(이은, 1897~1970), 부인 이방자 여사
* 이구(1931~2005)
고종의 7남인 이은(李垠, 영친왕)은 11세 때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으며 일본인 부인 이방자 여사 사이에 아들 이구(李玖, 1931~2005)를 두었습니다.
* 이강(1877~1955, 의친왕)
고종의 5남이던 이강(李堈, 의친왕)은 영친왕 생모인 엄비의 견제로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견제를 당하고 6.25 전쟁 당시엔 제대로 식생활을 못해 55년 영양실조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 이강(李堈)공비 김수덕 여사(1878~1964년)
자신은 자손을 못 보았으나 이강 공 슬하 21명의 자녀들을 감싸고 돌봐줘 그들로부터 '큰어머니'로 불렸다고 합니다.
* 이강(의친왕)의 장남 이건(李鍵) 공자(1909~1990)
이강 공자는 모두 22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이건(李鍵)공자(1909~1990)입니다. 이건은 1947년 아예 일본에 귀화해서 한국과 인연을 끊었습니다. '비둘기 집'을 부른 가수 이석은 이강의 11번째입니다.
* 이건 공자의 장남 이충 공자(의친왕의 손자)
* 이우 공자(의친왕의 차남)
* 이우 공자 부부
이강의 2남 이우(李鍝, 1912~1945)는 조선왕실인들 가운데 민족의식이 가장 강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일본 육군중좌(중령)였으나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한국인 박찬주 여사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해방을 바로 앞둔 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 덕혜옹주(1912~1989)
고종이 환갑 때 낳은 고명딸입니다. 23세때 일본에 가서 공부했고 일본인 백작과 결혼했습니다. 62년 일본에서 고국 땅으로 돌아와 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종은 덕혜옹주를 일제에 빼앗기지 않으려 황실시종의 조카와 정략결혼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 받아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덕혜옹주를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갔습니다. 덕혜옹주는 몽유병, 치매 등의 질환을 앓았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왕조 마지막 왕손들의 순탄치 못했던 일대기는 순탄치 못했던 이 나라 근대 역사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Share on twitter Share on facebook Share on print Share on favorites More Sharing ServicesShare
등록댓글 7개 / 댓글 작성시 30포인트 적립
지유석 해방 후 이 나라에 새 정부 수립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조선왕조를 다시 복위시키는 방안도 심심찮게 거론됐다고 합니다. 어쩌면 현실적인 방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한일합방 당시 이 나라는 왕정체제였으니까요. 하지만 이승만은 행여 왕정복고가 유력한 방안으로 부상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왕족들을 철저하게 소외시켰습니다. 이런 탓에 마지막 왕손들은 해방되어서도 기구한 운명을 짊어져야 했지요.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신해혁명으로 폐위되고 한량으로 지내다가 일제에 의해 만주국 황제로 등극하더니 중-일전쟁 후엔 인민재판에 회부돼 반동으로 몰렸다가 결국 정원사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지요.
우리네 마지막 왕손들도 기구하기는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요? 아마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만큼이나 기구한 스토리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08-01-04 14:41
포아풀 참 슬픈 역사네요. 그리고 기구한 운명이네요.
1989년 대한극장에서 '마지막 황제'를 봤지요.
그 이후로 심심찮게 보던 영화와의 내용과 어쩌면 이리 닮아 있을까요.
국적만 다를 뿐...
08-01-04 22:23
이정훈 어디를 보나 마지막 황실은 비참한게 역사의 한장인가 봅니다. 변화의 시각으로 새로운 장을 열수 있었는데, 조선왕조의 운명인지, 그렇지 못하고 심히 쓸쓸했음은 참 안타깝네요.. 그래도 조선의 역사는 참으로 위대했음으로 길이 보존되길..
08-01-08 08:16
icowkim@ha… 나서지 않고 묵묵히 본연의 임무에 무섭도록 충실한 귀하 같은 분이 계셔서 역사적 가치 의미로서의 좋은 자료 잘 보았읍니다.
두번째 사진에 앞줄 맨 왼쪽이 아리스가와노미야전하이고 세번째가 왕태자(대정왕)인데 바뀌었네요. 귀한자료 다시 한 번 확인하셔서 혹시 정정이 필요 하시면...
우스게 소리로 첫장의 일왕태자 사진을 보면 뭔가 조금 띨빡하게 보이지 않나요?
후일 대정왕은 공식석상에서 읽고난 원고를 둘둘 말아서 마치 망원경을 보듯(듣)이
참석자를 쳐다보는 기행을 행하고 해서 일왕실의 근친교배로 인한 이상현상을 나타냈고, 젊은 나이에 일찍 꽥 했을 겁니다.
08-01-08 15:14
송광호 icowkim 님, 지적해주신 대로 입니다. 자료를 확인하니 사진이름이 바뀌었네요.
대정 황태자는 맨 왼쪽이 아니라 3번째입니다. 깊이 감사 드립니다.
08-01-09 09:59
최훈희 우리의역사의 지난세월의 사진을보니 마음이 슬프네요. 먼저가신 왕실의 그분들의 마음은 어땔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감사합니다.
08-01-10 12:44
민수 일본 황족의 이름을 . 아리스가와노미야 왕. 이거나.. 왕세손이거나.. 그런게 아니고 왜 "전하"를 쓰는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전하라는 것은.. 보통 신하가 왕을 올려부를때 하는 말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하니 보기 좋지 않네요.
10-06-11 10:30
Subscribe to:
Posts (Atom)














-himammo.jpg)










%EC%99%80%EA%B6%81%EC%A4%91%EC%97%AC%EC%9D%B8%EB%93%A41900%EB%85%84%EB%8C%80.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