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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ugust 14, 2012

Empress Sunjeong in 1900

純貞孝皇后尹妃
Empress Sunjeong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년 음력 8월 20일 ~ 1966년 양력 2월 3일)는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계후(繼后)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박영효, 이재각 등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 인사인 윤택영의 딸이다. 정식 시호는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儀慈仁純貞孝皇后)이며, 순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다.


http://theme.archives.go.kr/next/photo/palace04List.do?phoNum=0


창덕궁은 태종 5년에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지은 궁궐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리기도 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고, 광해군 2년에 중건되었다. 또 인조반정 때 인정전을 제외하고 불에 탔고, 인조 25년에 복구되었다.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반복되었고, 1917년 내전 일곽이 소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한 강녕전 동ㆍ서 행각 등의 건물이 해체되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를 편 궁궐이다.
북한산 매봉 기슭에 세운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히 많고,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이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되었다. 창덕궁은 한국 궁궐 건축의 비정형적인 조형미를 대표하며, 경복궁의 웅장함과는 달리 화려하고 섬세한 여성미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자연과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으로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개화의 물결이 일면서 창덕궁 안에는 19세기 서양식 내부 장식이 전통 궁궐 양식과 섞여 들었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식으로 변형되었다. 1970년에 창덕궁 후원 보수공사를 완료하여 일본식 정원을 한국식으로 변경하였고,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창덕궁 인정전 일곽을 원형대로 복원·정비하였다.
창덕궁 낙선재는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등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족이 기거했던 곳으로 1989년까지 사람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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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 철 제목 영친왕 이은 빈소(CET0029700)
기록물 건 제목 영친왕 이은 빈소 2(1970)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newsId=20090520000137






순정효황후(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비 윤비) 백납병풍 찾았다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가 소장했던 12폭 백납병풍 중 일부 화폭. 강원태 기자 wkang@


100여년 전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가 소장했던 백납병풍이 발견돼 눈길을 끌고 있다.

병풍은 조선 말기 초상화 화가로 유명했던 채용신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채용신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산수화 등을 담고 있어 작가 연구의 새로운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20일 가마골역사연구원 주영택(71) 원장에 따르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윤비가 부산 해운대구 우1동 장지마을에 2년간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윤비가 자신을 돌봐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이 12폭 병풍을 건넸다는 것. 이후 병풍은 그의 딸이 서울로 시집갈 때 딸에게 건네졌으며 딸이 병풍에 있던 60점의 그림 중 9점의 그림을 소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주 원장이 그림을 입수하게 됐다. 이후 주 원장은 소지자에게 병풍의 부산박물관 기증을 적극 독려하고 있다.

병풍 소지자 김남숙(72·여·경기도 성남시)씨는 아버지로부터 병풍을 건네받은 뒤 운반이 어렵자 대형 병풍을 폭마다 잘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후 김씨는 집에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림 한 장씩을 오려줘 현재 그림은 9점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한때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 이 병풍 그림을 집 한 채 값을 주고 사겠다는 뜻을 전해오기도 했다고 한다.

병풍에 담긴 그림 60점은 꽃, 개, 풍경 등 제각각 다른 소재를 다룬 산수화, 화조화, 풍속화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각 다복과 풍요, 장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병풍은 1907년께 순종 즉위 후 동궁계비 윤비가 순정효황후가 되는 것을 축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납병풍은 병풍 한 폭에 여러 장의 그림을 마치 옷을 깁듯이 붙여 놓았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병풍은 김씨에게 건네지기 전까지는 해운대 장지마을에서 잔치 때마다 마을사람들이 돌아가며 펼치는 '물건'이기도 했다. 윤비가 자신의 안방에 뒀던 병풍으로 좋은 의미가 다 담겨 있다고 하자 마을사람들이 경사가 있을 때마다 빌려가곤 했다는 것.

부산박물관 이성훈 학예연구사는 "일단 9점의 그림 중 채용신의 호 '석지'라는 낙관이 찍혀 있는 3점의 작품은 채용신의 작품이 맞을 것으로 보이지만 나머지 6점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면서 "백납병풍의 경우 온전하게 보전된 게 거의 없고, 채용신은 조선 말기 김은호와 함께 초상화로 당대 최고였던 화가로 초상화 이외 작품은 많지 않아 이번 병풍 그림은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석지(石芝)는 물론 석강(石江), 정산(定山) 등의 호를 사용했던 채용신(1850~1941)은 조선 말기 화가로 100여점의 초상화, 10여점의 화조화를 남겼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흥선대원군, 최익현 등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전통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이며 전통과 서양화법을 조화시켜 세부묘사와 원근, 명암 등을 표현하였다. '운낭자 27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최익현 초상' 등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


http://cafe.daum.net/huldaclark/5dd7/932?docid=1DgXC5dd793220120128075602



사진 가격 11만원. 경매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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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품 설명


1966년 2월에 붕어하신 조선 마지막 황후 순종비 윤대비 국장 장례식 장면 사진입니다.

역사가 요구한 이 분의 정확한 이름은 순종효왕후이며

교양없는 사람들은 윤비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윤황후의 장례식 사진입니다.

윤황후의 영구를 싣은 영구차가 시민들이 운집한 종로통을 지나며

애도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할머니들이 거리로 나와 이 영구차를 바라보며

땅을 치며 통곡했지요.

당시 파란망장한 생을 살았을 할머니들에게는 저버릴 수 없는 조선의 국모,

자신들의 국모였지요.. 그래서 그렇게 땅을 치며 울었지요..

이 사진이 찍힌 장소는 파고다공원 즉 탑골공원 근처로 보입니다.

윗 3장의 사진은 실물을 스캔한 것이며

실물 200% 확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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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효황후(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비 윤비) 백납병풍 찾았다
당대 최고 채용신 作 12폭 60점 그림 중 9점 발견






100여년 전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가 소장했던 백납병풍이 발견돼 눈길을 끌고 있다.

병풍은 조선 말기 초상화 화가로 유명했던 채용신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채용신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산수화 등을 담고 있어 작가 연구의 새로운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윤비 6·25때 해운대 피란.선물로 준 것 후손이 보관.향토사학자 주영택씨 확인

20일 가마골역사연구원 주영택(71) 원장에 따르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윤비가 부산 해운대구 우1동 장지마을에 2년간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윤비가 자신을 돌봐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이 12폭 병풍을 건넸다는 것. 이후 병풍은 그의 딸이 서울로 시집갈 때 딸에게 건네졌으며 딸이 병풍에 있던 60점의 그림 중 9점의 그림을 소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주 원장이 그림을 입수하게 됐다. 이후 주 원장은 소지자에게 병풍의 부산박물관 기증을 적극 독려하고 있다.

병풍 소지자 김남숙(72·여·경기도 성남시)씨는 아버지로부터 병풍을 건네받은 뒤 운반이 어렵자 대형 병풍을 폭마다 잘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후 김씨는 집에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림 한 장씩을 오려줘 현재 그림은 9점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한때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 이 병풍 그림을 집 한 채 값을 주고 사겠다는 뜻을 전해오기도 했다고 한다.

병풍에 담긴 그림 60점은 꽃, 개, 풍경 등 제각각 다른 소재를 다룬 산수화, 화조화, 풍속화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각 다복과 풍요, 장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병풍은 1907년께 순종 즉위 후 동궁계비 윤비가 순정효황후가 되는 것을 축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납병풍은 병풍 한 폭에 여러 장의 그림을 마치 옷을 깁듯이 붙여 놓았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병풍은 김씨에게 건네지기 전까지는 해운대 장지마을에서 잔치 때마다 마을사람들이 돌아가며 펼치는 '물건'이기도 했다. 윤비가 자신의 안방에 뒀던 병풍으로 좋은 의미가 다 담겨 있다고 하자 마을사람들이 경사가 있을 때마다 빌려가곤 했다는 것.

부산박물관 이성훈 학예연구사는 "일단 9점의 그림 중 채용신의 호 '석지'라는 낙관이 찍혀 있는 3점의 작품은 채용신의 작품이 맞을 것으로 보이지만 나머지 6점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면서 "백납병풍의 경우 온전하게 보전된 게 거의 없고, 채용신은 조선 말기 김은호와 함께 초상화로 당대 최고였던 화가로 초상화 이외 작품은 많지 않아 이번 병풍 그림은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석지(石芝)는 물론 석강(石江), 정산(定山) 등의 호를 사용했던 채용신(1850~1941)은 조선 말기 화가로 100여점의 초상화, 10여점의 화조화를 남겼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흥선대원군, 최익현 등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전통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이며 전통과 서양화법을 조화시켜 세부묘사와 원근, 명암 등을 표현하였다. '운낭자 27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최익현 초상' 등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부산일보/이현정 기자 2009.5.20>

윤비(순종비)와 궁중 여인들1900년대




南山伝統韓屋村 純貞孝皇后尹氏の本家


朝鮮第27代純宗の皇妃である純貞孝皇后尹氏が嫁ぐまで暮らした家です。

http://www.archidata.co.kr/filebase/Data/45271/ka191.htm


순정효황후 윤비 친가
(純貞孝皇后 尹妃 親家)
- 남산골 한옥마을
- 구 옥인동 서용택 가옥


현소재지:서울 중구 필동2가 84-1 일대,
원소재지:서울 종로구 옥인동 47-133
1870년 창건

* 개론

조선의 제 27대 순종(純宗)의 황후(皇后)인 윤씨가 동궁의 계비(繼妃)로 책봉되었던 열 세살까지 살았던 집으로 고종 12년(1875)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원 소재지는 종로구 옥인동에 있으나 가옥이 너무 낡아 그 양식 그대로 본떠 남산골 한옥마을에 복원하였다. 원래 민속자료 23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남산에 새롭게 복원되면서 문화재 지정은 취소되었고 구 가옥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
최상류 주택으로서 별궁(別宮)에 비견될 만한 품격을 갖추었던 집이다.

* 구성

이 가옥은 안채, 사랑채, 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ㄷ’ 자형 평면의 몸채의 전면에 대문과 사랑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갖는다. 대문간의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채는 안채보다 높게 자리잡아 누각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원 가옥이 있었던 옥인동의 대지조건상 서울시가지를 한눈에 보기 좋도록 의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 가옥은 사랑채의 하부에 관리인 실을 두어 복층으로 사용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합각면은 전돌쌓기하였다.
안채는 중앙에 6칸 규모의 대청을 두고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하였다. 안방 아래로 딸방과 부엌, 찬방, 찬모방, 행랑방을 순차적으로 두고, 건넌방 아래로 서고, 아들방을 순차적으로 배치하였으며 전후면에 퇴를 두었다. 기단은 세벌대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모난돌을 다듬어 주춧돌을 놓고 평주를 세웠다. 대청 중앙에 고주를 세운 1고주 5량가이며, 공포는 쇠서가 없는 초익공을 놓고 간마다 운공(雲工)을 세 개씩 두었다. 본래 민가에는 공포를 사용할 수 없는데 궁집으로서의 품격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평면도




* 지도


(참고 문헌 : 한국의건축문화재(서울편) / 홍대형저,
남산골한옥마을 사이트)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c2Kc&articleno=43&categoryId=0&regdt=20120723173736#ajax_history_home




南山谷韓屋村

南山谷韓屋村是將原本散落在首爾市區裡的五棟韓國傳統韓屋遷移至此而組成的。
從朝鮮時代(1392~1910)的兩班士大夫宅邸到一般平民的生活瓦屋的住家規模及家具擺飾如實呈現。
朝鮮時代南山谷地區因為有溪谷與名為「泉雨閣」的閣樓(可以觀賞四周景色,沒有門與牆壁像亭子的房子),
所以夏天避暑的最佳場所。建造南山谷韓屋村時,也修復了泉雨閣,並在腹地內蓋了可以與溪谷同樂的亭子,
可欣賞周邊景致,這裡也是散步的好地方。


可一窺朝鮮時代兩班士大夫五棟宅邸的地方

在「南山谷韓屋村」可一窺朝鮮時代兩班士大夫的五棟宅邸,包含了純貞孝皇后尹妃(朝鮮第二十七代王純宗的妃子,
相傳當時親日派強迫純宗在韓日合邦條約上蓋印鑑,但是純貞孝皇后將玉璽藏在裙子裡,抵死不從)的娘家、
海豊府院君尹澤榮(朝鮮第二十五代王哲宗及後宮生的公主之丈夫)的宅邸、
都邊首(木工的最高負責人)李承業(建造朝鮮宮殿景福宮時的建築負責人)的宅邸、五衛將金春永(朝鮮時代的軍人)的房子。




朝鮮時代兩般士大夫的生活文化
韓屋村裡的代表性韓屋可以說是純貞孝皇后尹妃的娘家,這個宅邸是「ㅁ」的構造,打開接待客人的廂房、
女主人居住的廂房及大門的話,印入眼簾的是連結這三個地方獨特的大門構造,外觀上以院子為中心,房屋圍繞的構造,
由此可知院子對於韓屋來說不是房子的外部,而是房屋的中心構造。

此外也將韓屋特有之門的構造表現得體,韓屋的門不是只有將外部與內部隔離的功能,也就是說還有將走廊及房間為成一體,
或者可隨著需求調整房間與房間的間格的功能。

親身感受及學習的韓國文化

韓屋村也時常舉辦韓國傳統公演和射箭等傳統遊戲,此外也會實際舉行韓國式傳統婚禮,因此想瞭解韓國婚禮文化的遊客,
可以於週末前往體驗。

為了外國人所準備的跆拳道體驗活動

原在慶熙宮舉行的跆拳道示範表演及體驗活動已經遷至南山谷韓屋村內舉行。
針對外國遊客提供直接學習韓國傳統武術跆拳道的體驗活動, 於韓屋村內學習跆拳道的攻防動作與踢腿技巧等。

沿著散步路,可以到達像噴火口的廣場,是埋葬「首爾一千年時空膠囊」的地方,
雖然與1994年埋葬迎接首爾定都六百年時空膠囊的韓屋村具有不同的意義,但都意旨保存過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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