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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대한민국까지 세계박람회에 얽힌 이야기 - 2부 기타 글 모음
2011/08/18 06:40
http://blog.naver.com/livingocean/50118610626
2부. 유럽의 중심에서 조선의 문화를 외치다
안녕하세요.
그 어느때보다 역사 공부에 열심히인 연이 입니다^^
지난주에 소개해드린 조선의 세계최초 박람회 모두 기억하시죠?
미쳐 못보신 분들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추천은 미덕^^>
조선에서 대한민국까지 세계박람회에 얽힌 이야기 - 1부
http://blog.naver.com/livingocean/50118098459 (☜ 클릭)
지난 포스팅에서는
조선의 첫번째 박람회 참관기를 이야기 해드렸다면
오늘은 그 두번째,
대한제국의 파리세계박람회 이야기를 알려드리려고 해요.
그럼 지금부터 흥미 진진한
우리 박람회 역사속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1897년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근대로 향하는 힘찬 도약을 시작한 대한제국은
1889년과 1900년에 열린 파리세계박람회에 참가를 했습니다.
그 당시 세계박람회는 개최된지 50여년이 지난 후로
유럽 내에서는 각국의 기술과 발전을 홍보하는 장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행사였다고 합니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파리박람회에선 에펠탑이 세워지고,
1900년 파리박람회 때는 알렉상드로 3세 다리와 전철역이 건설되어
파리가 세계박람회와 함께 발전했다고도 하니
세계박람회의 위상이 대단했겠죠?
서구 열강과 일본, 중국 등 주변국들 틈바구니에서
나라의 근대화와 발전을 꿈꾸던 고종황제는
1896년 1월 프랑스 서리공사 르페브라가 1900년 4월 파리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대한제국을 공식 초청하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리에서 대한제국의 힘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박람회의 참가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대한제국은 파리박람회에 320㎡의 전시장 안에
관복, 나전칠기, 머리띠, 부채, 담뱃대, 병풍, 생강 분쇄기 등의 다양한 물품과 함께
불경, 삼국사기, 팔만대장경 등의 목판 인쇄물을 전시했다고 하는데요~
이는 대한제국의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 주고,
목판 인쇄물을 통해 5천 년 문화 민족의 자긍심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 이렇게 보지 않고 전해지는 이야기만 들어도
뿌듯하고 자랑스럽기만 하답니다.
대한제국의 파리박람회 참여 기록은
1900년 프랑스 신문 '쁘띠 쥬르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국왕이 직접 보내온 값진 수집품들과
한국에 거주했던 프랑스인 소유의 소품들이 세련되게 배치돼
한국의 자원과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다"
라고 평가했고,
'가려움증용 빗' 이라고 소개한 참빗에 대해
"너무 긁으면 괴로울 게 분명하다"라며
대한제국에서 온 물건을 재미있게 소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동방의 작은 나라가 분명
유럽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 거 같아요^^
대한제국의 파리박람회에서의 활약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농산물 가공식품으로 대상,
야생작물과 의료로 2개의 금메달,
가구, 도자기, 의복, 자수, 종이 등의 예술품 출품으로
10개의 은메달과 5개의 동메달, 3개의 장려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유럽인들의 대한제국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했을 것 같죠?
그리고 지금 프랑스 파리에서의 한류는
이때의 한국에 대한 관심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서 아닐까요? ㅎㅎㅎ
안타깝게도 이후 일제 강점으로
우리의 박람회 참가는 더이상 어렵게 됐지만,
파리박람회는 동방의 작은 나라가 아닌,
대한제국의 문화와 예술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음이 분명한 것 같아요.
2012여수세계박람회는 세계박람회를 통해 선진국을 따라잡고
대한제국의 힘을 세계에 보여주고자 했던 고종의 바램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기술과 환경의 우수성을 알리고 그 중심에 당당히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과 관심이 필요한 거
모두 아시죠?
박람회 역사에 대해 관심있게 읽어주신 여러분
너무나 감사드리고요!
이제 마지막 3부만 남아있으니 흥미진진한 우리의 박람회 역사!
끝까지 기대해주세요~
I'll be Back! ㅎㅎㅎ
[출처] 조선에서 대한민국까지 세계박람회에 얽힌 이야기 - 2부|작성자 여니수니
http://blog.naver.com/livingocean/50118098459
조선에서 대한민국까지 세계박람회에 얽힌 이야기 - 1부 엑스포 사람들 / 기타 글 모음
2011/08/12 06:30
http://blog.naver.com/livingocean/50118098459
1부. 조선 최초의 세계박람회를 돌아보며...
안녕하세요~ 연이입니다~
이웃님들~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요이땅~ 하셨죠? ^^
<추천 꾸욱~>
요즘은 시간이 어찌나 빨리가는지 자고 일어나면 TGIF 입니다.
폭풍 업무 후에 있을 불금(불타는 금요일) 계획은 세우셨나요?
저는 칼퇴와 함께~ 주말 여행을 다녀올 심산입니다. ^^
부러우면 지는 거에요~ ㅋ
문득 얼마나 많은 어제들이 오늘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계박람회도, 우리나라도 수많은 어제가 쌓여 오늘의 모습을 하고 있겠죠?
또 그 둘만의 오롯한~ 러브스토리(?)도 있을테구요~
(오오~ 철학적이다~ 멋지다~ ㅋㅋ)
우리나라와 세계 박람회는 언제 어떻게 처음 만났을까요?
얼마나 오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걸까요?
그 역사의 대서사시를~ 지금부터 시리즈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호~ 대하드라마 작가가 된 듯한 이 기분~ 찡긋~)
조선이 만난 최초의 세계박람회는 1893년 시카고세계박람회입니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개최했던 대전 엑스포가 1993년이었으니까
최초로 세계박람회에 참가한지 딱 100면 만에 직접 개최를 한 것이죠
그러나 조선의 세계박람회 참가 역사는 많지 않았습니다.
1893년 시카고세계박람회, 1900년 파리세계박람회,
그리고 세계박람회는 아니지만 1901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박람회의
참가 기록만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배라던지 한국 전쟁 등의 아픈 역사로 인해
아무래도 세계박람회 참가는 어려울 수 밖에 없었겠죠?
그래도 조선이 처음 참가한 시카고세계박람회를 보면
재밌는 사항들이 정말 많습니다!
당시 청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고픈 고종 황제의 강력한 의지로
조선 전시관은 한글로 '대죠션(대조선)' 이라는 국호를 사용했구요,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지어진 전시관 안에는
가마, 도자기, 모시, 부채, 갑옷, 관복, 활, 화살 등의
조선의 모든 것! 이 전시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스튜어트 컬린이란 미국인이 한국에서 머물던 당시에 모은
윷놀이 도구를 조선관에 출품했다고도 하는데요,
외국인들에게 비춰진 조선의 물건들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조선이란 작고 미지의 나라에서 온 모든것이
신기하게만 보여지지 않았을까 해요.
게다가 조선 전시관에선 조선의 궁중 악사들까지 파견되어
전시와 전통음악의 연주가 함께 이루어져
관람객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조선 전시관은 대성공을 거두었구요.
기록에 남은 그때 상황을 보면
"구경하는 사람이 몰려들어 관리자가 미처 응대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종이에 물품 이름과 용도를 적어
물품 위에 붙이는 것으로 구경꾼들의 응대를 대신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한류 열풍의 시초가 조선의 세계박람회 참가가 아닐까요? ㅋ
그러나 조선 최초로 해외에 세운 전시관은
박람회가 끝난 후 일어난 화재로 인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됐다면 더할 나위 없이
우리에게 소중한 공간이 되었을텐데 너무 안타까워요.
그래도 다행인건 조선 전시관은 사라졌지만 박람회 때 전시됐던 일부 물품이
시카고 필드박물관, 뉴욕 피다비박물관,
워싱턴 스미소니언박물관 등에 기증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 시카고 필드박물관에 보관된 한국전통 유물중에
약 3백여 점이 1893년 세계박람회에 참가한
조선에서 가져온 유물이라고 하니,
꼭 한번 방문해서 우리의 역사를 느끼고 싶어요!
혹시나 이번 휴가를 시카고로 가시는 이웃님이 계시거나
아니면 미국에 살고계시는 이웃님이 계시다면
꼭 한번 우리 조선의 박람회 역사를 느껴보고 오면 어떨까요?
물론 저에게도 생생한 후기를 들려주셔야 한다는 거!!!^^
오늘은 우리나라가 세계 박람회에 처음 참여한 이야기를 알려드렸는데요,
여기서 끝나면 섭섭하죠~
전 이제 고작 1893년 이야기를 했는걸요!
우리 나라의 세계 박람회 참가 역사는 다음주에도 이어집니다. 쭈욱~
몹시 시대가 되시더라도 기다려주새요~
커밍쑨~
행복한 주말 보내시고
다음 주에 만나요~ 제발~
[출처] 조선에서 대한민국까지 세계박람회에 얽힌 이야기 - 1부|작성자 여니수니
http://cafe442.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5sb4&fldid=5ChS&contentval=007tpzzzzzzzzzzzzzzzzzzzzzzzzz&nenc=&fenc=&q=&nil_profile=cafetop&nil_menu=sch_updw
1900년의 한류 - 파리 만국박람회| ㆍ한류열풍 소식
별낭자|조회 2024|추천 0|2007.11.15. 01:40
1900년의 한류 - 파리 만국박람회
기사원문보기
[김세원 기획위원] 20세기 벽두인 1900년 4월 14일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유럽은 바야흐로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대, 1880∼1900)의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보불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유럽에는 전쟁이 없었고 사회에는 평화가 가져온 향락적 분위기와 함께 세기말적 댄디즘 무정부주의 등 새로운 사상들이 잡탕처럼 공존했다. 산업혁명을 통해 주도 세력으로 떠오른 신흥 부르주아지들에게는 종말을 맞이한 19세기의 모든 것, 낡아빠진 사상을 불식하겠다는 강렬한 욕구와 함께 새로운 세기에는 모든 것이 변하고 새롭게 발전할 것이란 기대가 혼재해 있었다.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1851년 5월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린지 50년, 만국박람회는 각종 공산품과 공예품을 통해 자국의 산업기술 수준을 겨루는 국력 홍보마당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상 유럽의 문화수도였던 파리는 런던을 따라잡기 위해 만국박람회를 집중 개최했다. 프랑스의 랜드마크가 된 에펠탑이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탄생했고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가 건설됐다.
서구 열강을 따라잡고자 노력했던 고종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 대규모 국제 행사에 주목했다. 조선은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간소한 전시대를 설치한 적은 있으나 전시관을 건설하고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한 적은 없었다.
1893년 5월 7일 이폴리트 프랑댕 조선주재 프랑스공사는 파리 외무부에 공문을 보내 “조선의 고관들과 이희 폐하(고종)가 만국박람회를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대표하기 위해 왕가의 일원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고 보고했다. 구한국외교문서에는 1896년 1월 프랑스 서리공사 르페브르가 1900년 4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조선을 공식 초청했으며 고종이 흔쾌히 허락했다고 기록돼 있다.
1897년 1월 박람회 사무국과 다리 역할을 할 프랑스 주재 특사 및 전권공사로 민영환이 임명된 데 이어 1898년 8월 대표단 명단이 발표됐다. (후에 수정된 명단에 따르면) 명예위원장은 종2품 관원이었던 민영찬 대공, 위원장은 샤를르 루리나 파리주재 총영사였다. 1899년 6월 3일자 독립신문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품을 출품할 사람을 모집하는 재정후원자 트레물네의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전시관은 곧 국력의 상징이었다. 1878년 파리박람회부터 참가국들이 나름대로 전시관을 꾸밀 수 있게 되어 저마다 특색을 살리면서 가장 눈에 띠는 건물을 세우려는 참가국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할당되는 부지 면적은 참가국의 규모와 재정, 프랑스에 대한 관심도에 따라 결정됐다.
참가국 명단 끝부분에 있는 조선에게는 샹드 마르스 서쪽 쉬프렌대로, 영국 제과관과 향수부속관 사이의 부지가 주어졌다. 처음에 구상됐던 전시관은 두 개로 17세기 유럽에 만연했던 중국 민예품에 대한 애호를 그대로 답습하여 중국풍에 가까웠다.
1900년 1월 재정후원자 드 글레옹 남작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할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 후임자가 나타났다. 새로운 재정후원자 미므렐 백작은 두 개로 설계된 건물을 하나로 줄였다. 전시관 건축은 베트남의 사이공극장을 건축했던 외젠 페레가 맡았다.
당시 파리 만국박람회를 소개했던 잡지와 신문기사, 공식 소개 책자를 보면 한국 전시관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한국정부 대표단은 쉬프렌 대로에 극동의 모습을 가장 잘 살린 우아하고 독창적인 건축물을 세웠다. 320제곱미터에 이르는 건물은 화려한 색을 칠한 목조건물로 넓은 기와지붕을 이었고 골조는 금빛으로 빛난다. 위로 치솟은 처마 끝은 이곳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입구는 서울의 주택 문을 재현했다. 내부는 서울의 황제가 기거하는 옛궁의 알현실(경복궁 근정전)을 본떴다. 모든 벽에는 오래된 명주천이 걸려있다. 전시관 주위는 난간이 있는 회랑이 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공식 책자)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화려한 색깔이 입혀져 있고 극동 건축의 특징인 하늘을 향해 치솟은 처마끝과 커다란 지붕이 있는 한국관은 행인들의 시선을 끈다. 건축가는 황제의 고궁에 있는 알현실에서 받은 영감을 마음껏 발휘했다.” (1900년 발간된 서적 ‘파리박람회’)
당시 ‘라 퐁데리 티포그라피’ ‘르 프티 주르날’같은 신문 잡지의 기사들도 악기, 자개 공예품, 그림, 장롱, 도자기, 자수, 의복 등 전시된 귀중한 소장품과 토속품들은 Coree란 나라의 자원과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특히 기자들은 한국 인쇄술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전시한 진열대 앞에 한동안 멈춰 섰다. 콜랭 드 플랑시 공사가 구입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0년 11월 12일 박람회는 폐막했다. 56개 초청국 중 40개국이 참가했으며 총 방문객 수는 5086만 800명에 이르렀다. 한국은 농산물 가공식품으로 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2개의 금메달(야생작물과 의류), 10개의 은메달(가구 도자기 자수 의복 종이 등), 5개의 동메달, 3개의 장려상을 받았다.
전시품들의 일부는 기메박물관과 국립기술직업전문학교 부설 기술직업박물관으로 보내졌다. 아시아전문 박물관으로 알려진 기메박물관은 청색 인공색소와 알미늄 생산으로 많은 돈을 번 사업가 에밀 기메가 1879년 설립했다. 세계 각국의 종교와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기메는 세계일주를 통해 수집한 세계 각국의 물품들을 모아 전시했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 체결이후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와 조선을 여행했던 프랑스인들이 수집한 민속품,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때 전시품 등 350여점의 한국 공예품을 소장하게 된 기메박물관은 1893년부터 한국 관련 민속품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박물관 부설 도서관에선 한국 민간신앙 서적, 1880년대 한양에서 출판된 한글 소설을 볼 수 있었다. 한편 1890년 법학을 공부하러 프랑스로 건너간 홍종우(김옥균의 암살범)는 1892년 6월부터 1년간 기메박물관에 근무하면서 프랑스인 동료와 함께 ‘향기로운 봄’(춘향전),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심청전), ‘한 해 운수를 알아보는 안내서’(直星行年便覽)등의 한국 서적을 불역하여 출판했다.
기메박물관은 미지의 나라들에 대한 온갖 지식의 산실이기도 했다. 1897년부터 1893년까지 동양에 관한 연속 무료 강연회가 열렸고 강연 내용은 각각의 책으로 출간됐다. 21개월 동안 한국에서 근무한 뒤 1896년 프랑스로 돌아온 모리스 쿠랑은 ‘8~9세기의 한국’ ‘한국에서의 종교’등 한국과 관련된 6개의 강연회를 맡아 한국의 다양한 문화적 풍요로움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대한제국은 다음해인 1901년 하노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1902년 10월엔 해외박람회 국내유치를 위해 박람회 임시사무소를 개설했다. 당시 국내 언론은 1903년 서울에서 박람회가 개최될 것이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등장으로 상황은 다르게 전개됐다. 1905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한국이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어가면서 모처럼 유럽에 일기 시작하던 한국에 대한 관심의 불씨는 꺼지고 말았다. 1918년 에밀 기메가 사망한 후 한국의 전시품들이 전시실에서 밀려나 창고에 처박힌 것처럼 프랑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꼬레’(한국)는 사라져갔다.
파리만국박람회에 일본 도자기의 포장지로 사용됐던 우키요에(일본 에도시대의 풍속화)가 고호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화풍에 영향을 미치며 유럽에 ‘자포니즘’(일본풍) 유행을 몰고 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이 ’한류‘(韓流)의 원형이다. 한 세기 전 프랑스에서 싹은 틔웠으되 일제에 짓밟혀 채 꽃피지 못하고 스러져 버린 ’한류‘의 ’화석들‘을 발굴하는 노력이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어야 하지 않을까?
http://www.kjclub.com/jp/exchange/theme/read.php?tname=exc_board_65&uid=289206&fid=289206&thread=1000000&idx=1&page=1&number=192321
#벨 에포크-19세기에서 20세기로
20세기 벽두인 1900년 4월 14일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유럽은 바야흐로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대, 1880∼1900)의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보불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유럽에는 전쟁이 없었고 사회에는 평화가 가져온 향락적 분위기와 함께 세기말적 댄디즘 무정부주의 등 새로운 사상들이 잡탕처럼 공존했다. 산업혁명을 통해 주도 세력으로 떠오른 신흥 부르주아지들에게는 종말을 맞이한 19세기의 모든 것, 낡아빠진 사상을 불식하겠다는 강렬한 욕구와 함께 새로운 세기에는 모든 것이 변하고 새롭게 발전할 것이란 기대가 혼재해 있었다.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1851년 5월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린지 50년, 만국박람회는 각종 공산품과 공예품을 통해 자국의 산업기술 수준을 겨루는 국력 홍보마당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상 유럽의 문화수도였던 파리는 런던을 따라잡기 위해 만국박람회를 집중 개최했다. 프랑스의 랜드마크가 된 에펠탑이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탄생했고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가 건설됐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서구 열강을 따라잡고자 노력했던 고종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 대규모 국제 행사에 주목했다. 조선은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간소한 전시대를 설치한 적은 있으나 전시관을 건설하고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한 적은 없었다.
1893년 5월 7일 이폴리트 프랑댕 조선주재 프랑스공사는 파리 외무부에 공문을 보내 “조선의 고관들과 이희 폐하(고종)가 만국박람회를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대표하기 위해 왕가의 일원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고 보고했다. 구한국외교문서에는 1896년 1월 프랑스 서리공사 르페브르가 1900년 4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조선을 공식 초청했으며 고종이 흔쾌히 허락했다고 기록돼 있다.
1897년 1월 박람회 사무국과 다리 역할을 할 프랑스 주재 특사 및 전권공사로 민영환이 임명된 데 이어 1898년 8월 대표단 명단이 발표됐다. (후에 수정된 명단에 따르면) 명예위원장은 종2품 관원이었던 민영찬 대공, 위원장은 샤를르 루리나 파리주재 총영사였다. 1899년 6월 3일자 독립신문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품을 출품할 사람을 모집하는 재정후원자 트레물네의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전시관은 곧 국력의 상징이었다. 1878년 파리박람회부터 참가국들이 나름대로 전시관을 꾸밀 수 있게 되어 저마다 특색을 살리면서 가장 눈에 띠는 건물을 세우려는 참가국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할당되는 부지 면적은 참가국의 규모와 재정, 프랑스에 대한 관심도에 따라 결정됐다.
참가국 명단 끝부분에 있는 조선에게는 샹드 마르스 서쪽 쉬프렌대로, 영국 제과관과 향수부속관 사이의 부지가 주어졌다. 처음에 구상됐던 전시관은 두 개로 17세기 유럽에 만연했던 중국 민예품에 대한 애호를 그대로 답습하여 중국풍에 가까웠다.
1900년 1월 재정후원자 드 글레옹 남작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할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 후임자가 나타났다. 새로운 재정후원자 미므렐 백작은 두 개로 설계된 건물을 하나로 줄였다. 전시관 건축은 베트남의 사이공극장을 건축했던 외젠 페레가 맡았다.
###파리에 재현된 경복궁 근정전
당시 파리 만국박람회를 소개했던 잡지와 신문기사, 공식 소개 책자를 보면 한국 전시관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한국정부 대표단은 쉬프렌 대로에 극동의 모습을 가장 잘 살린 우아하고 독창적인 건축물을 세웠다. 320제곱미터에 이르는 건물은 화려한 색을 칠한 목조건물로 넓은 기와지붕을 이었고 골조는 금빛으로 빛난다. 위로 치솟은 처마 끝은 이곳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입구는 서울의 주택 문을 재현했다. 내부는 서울의 황제가 기거하는 옛궁의 알현실(경복궁 근정전)을 본떴다. 모든 벽에는 오래된 명주천이 걸려있다. 전시관 주위는 난간이 있는 회랑이 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공식 책자)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화려한 색깔이 입혀져 있고 극동 건축의 특징인 하늘을 향해 치솟은 처마끝과 커다란 지붕이 있는 한국관은 행인들의 시선을 끈다. 건축가는 황제의 고궁에 있는 알현실에서 받은 영감을 마음껏 발휘했다.” (1900년 발간된 서적 ‘파리박람회’)
당시 ‘라 퐁데리 티포그라피’ ‘르 프티 주르날’같은 신문 잡지의 기사들도 악기, 자개 공예품, 그림, 장롱, 도자기, 자수, 의복 등 전시된 귀중한 소장품과 토속품들은 Coree란 나라의 자원과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특히 기자들은 한국 인쇄술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전시한 진열대 앞에 한동안 멈춰 섰다. 콜랭 드 플랑시 공사가 구입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0년 11월 12일 박람회는 폐막했다. 56개 초청국 중 40개국이 참가했으며 총 방문객 수는 5086만 800명에 이르렀다. 한국은 농산물 가공식품으로 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2개의 금메달(야생작물과 의류), 10개의 은메달(가구 도자기 자수 의복 종이 등), 5개의 동메달, 3개의 장려상을 받았다.
####19세기말 파리의 한류
전시품들의 일부는 기메박물관과 국립기술직업전문학교 부설 기술직업박물관으로 보내졌다. 아시아전문 박물관으로 알려진 기메박물관은 청색 인공색소와 알미늄 생산으로 많은 돈을 번 사업가 에밀 기메가 1879년 설립했다. 세계 각국의 종교와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기메는 세계일주를 통해 수집한 세계 각국의 물품들을 모아 전시했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 체결이후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와 조선을 여행했던 프랑스인들이 수집한 민속품,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때 전시품 등 350여점의 한국 공예품을 소장하게 된 기메박물관은 1893년부터 한국 관련 민속품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박물관 부설 도서관에선 한국 민간신앙 서적, 1880년대 한양에서 출판된 한글 소설을 볼 수 있었다. 한편 1890년 법학을 공부하러 프랑스로 건너간 홍종우(김옥균의 암살범)는 1892년 6월부터 1년간 기메박물관에 근무하면서 프랑스인 동료와 함께 ‘향기로운 봄’(춘향전),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심청전), ‘한 해 운수를 알아보는 안내서’(直星行年便覽)등의 한국 서적을 불역하여 출판했다.
기메박물관은 미지의 나라들에 대한 온갖 지식의 산실이기도 했다. 1897년부터 1893년까지 동양에 관한 연속 무료 강연회가 열렸고 강연 내용은 각각의 책으로 출간됐다. 21개월 동안 한국에서 근무한 뒤 1896년 프랑스로 돌아온 모리스 쿠랑은 ‘8~9세기의 한국’ ‘한국에서의 종교’등 한국과 관련된 6개의 강연회를 맡아 한국의 다양한 문화적 풍요로움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대한제국은 다음해인 1901년 하노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1902년 10월엔 해외박람회 국내유치를 위해 박람회 임시사무소를 개설했다. 당시 국내 언론은 1903년 서울에서 박람회가 개최될 것이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일제에 짓밟힌 한류의 싹
그러나 일본의 등장으로 상황은 다르게 전개됐다. 1905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한국이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어가면서 모처럼 유럽에 일기 시작하던 한국에 대한 관심의 불씨는 꺼지고 말았다. 1918년 에밀 기메가 사망한 후 한국의 전시품들이 전시실에서 밀려나 창고에 처박힌 것처럼 프랑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꼬레’(한국)는 사라져갔다.
파리만국박람회에 일본 도자기의 포장지로 사용됐던 우키요에(일본 에도시대의 풍속화)가 고호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화풍에 영향을 미치며 유럽에 ‘자포니즘’(일본풍) 유행을 몰고 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11월 말까지 고려대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불 120주년 기념 특별전 ‘서울의 추억, 한국-프랑스 1886-1905‘에 가면 일본과 중국에서 아시아 전체로 확산되고 있는 ’한류‘(韓流)의 원형을 볼 수 있다. 한 세기 전 프랑스에서 싹은 틔웠으되 일제에 짓밟혀 채 꽃피지 못하고 스러져 버린 ’한류‘의 ’화석들‘을 확인하고 나오는 길, 전시장 중앙에 걸린 일본순사의 조선인 사살 사진이 관람객들의 발길을 놓아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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