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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ugust 30, 2012

by "recruitment" or "forced draft"? represented the process of recruiting comfort women

http://parshas.net/bg/tag/342

우리 학계는 위안부 모집과정을 "강제연행"이나 "징집"으로 표현한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런 용어를 학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타당한가? 근거는 충분한가? 논리는 명확한가? 따위를 고려해 봐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듯 하다. 연행이든 징집이든간에 일본은 위안부 동원과 관련한 근거 법령을 만든 일이 없거니와, 간혹 위안소 규칙이나 위생 규정따위가 발견되고는 있지만, 그것이 모집과정에 있어서의 강제성을 규명하는 자료는 아닌 것이다.

일본은 위안소 설치와 운영 자체를 부정한 적은 없기 때문에, 조선 처녀를 공출하기 위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에서 조직적으로 모집에 간여하고, 편의를 제공한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나오지 않는한 "강제성"의 입증은 쉽지 않다. 어쩌면 우리 학자들이 그것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국고를 탕진해가며 연구랍시고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겠는가? 하지만 이 양반들이 원하는 자료라는 게 이미 일본측에서 충분히 연구되고 파악한 자료외에 더 무엇이 나오겠는가?

자료가 없다고 해서 없는 말을 만들어내거나 자구(字句)를 비틀어 망문생의(望文生義)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런식으로 역사적 진실을 파헤친다 한들 상대방이 인정할리도 없을 뿐더러, 우리만의 자기 만족을 위한 말잔치가 되서는 무의미하다. 예컨대 우리측 학자들이 강제모집의 근거랍시고 존나게 우려먹고 있는 있는『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을 보자.


이 통첩문은 언뜻 제목만 봐서는 위안부 모집에 국가가 간여한 것처럼 보여질 여지가 있으나 사실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위안부를 모집하지 않도록 관계기관과의 협력을 요한다는 내용일 뿐, 일본 정부가 유괴나 납치를 지시하거나 조장했다는 근거자료가 될 수는 없다.

지나사변 지역에 있어서, 위안소 설치를 위해 내지에 있는 종업부(從業婦) 등 모집하는 것에 대하여 군부의 양해 등이 있는 것처럼 명의를 이용해 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일반민의 오해를 사도록 하는 우려가 있고, 혹은 종군기자, 위문자를 개입시켜 통제가 안되는 모집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다. 또는 모집자의 인선이 잘못 선정되어 모집의 방법에 있어 유괴와 같은 방법으로 경찰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자 등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장래 이런 모집 등에 있어서 파견군으로 하여금 통제토록 하고 모집과 관련한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의 선정을 적절하게 하고, 그 실시에 있어 관계지방의 헌병 또는 경찰 당국과의 연대를 긴밀히 하여 앞으로는 군의 위신을 유지하고, 또는 사회문제상 유루(遺漏)않도록 배려하기를 통첩함
이 문서 어디를 봐서 강제연행의 근거자료로 써먹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측 학자들은 이에 대해 두가지 방향에서 억측의 논리를 펴고 있다. 첫째는 위 자료가 위안부 모집시 유괴와 같은 방법이 적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군당국이 시인하고 있다는 것이다.(강만길「한국민족운동사론」, 2008) 둘째는 위와 같은 단속이 내지에서만 이루어졌고 식민지에서는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강정숙「일본군 '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 2010)

그러나 이런 추론들은 논리적으로 허황되거나 근거가 박약한 주장이다.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통계연보를 보면 위안부 모집이 절정을 이루었던 일제말기로 갈수록 납치나 유괴와 같은 강력범죄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위안부 모집과 유괴납치 증가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

<표1> 유괴· 납치사건 검거현황(1931~1943)



그렇다면 강정숙이 주장하듯 식민지는 내지처럼 강력하게 유괴나 납치를 단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감소현상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일제시대의 강력범죄 발생현황을 보면 다른 강력범죄에서도 똑같이 감소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 근거가 없는 주장일 뿐이다. 단순히 식민지였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불합리의 가설이 당연하듯 추증(追增)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표2> 일제시기 강력범죄 발생건수 현황


우리 국사교과서들이 "위안부"를 최초로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제7차 교육과정 이후의 일이다. 총 6종의 근현대사 교과서를 분석해보면 위안부의 개념과 피해상황은 읽기자료를 통해 소상히 밝히고 있으면서, 정작 중요한 위안부 모집경위나 실태와 관련하여서는 정신대 피해자의 일부로 기술하거나 막연하게 강제로 끌고 가서 위안부로 종사케 했다는 등의 모호한 서술로 흐지부지하게 처리하고 있다.

강제로 끌고 갔다는 발상의 궁극적인 양태가 바로 요시다 세이지의 "인간사냥" 고백 사건이다. 1943년 제주에 상륙한 요시다 세이지는 경찰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마을 전체를 포위한 뒤 도망가는 사람들은 경찰이 사정없이 목검(木劍)으로 내리치고, 울부짖는 여자들을 후려갈기며 젖먹이 아이를 팔에서 잡아뗀 뒤 억지로 트럭에 실었다는 것이다. 조선헌병대 사령부를 제쳐두고(?) 본토에서 상륙한 이 특공대에 의해 백주대낮에 자행된 이 인간사냥은 마치 영화『아포칼립토』류에서나 봤음직한 잔인하고 야만적인 역사적 상상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게 한다. 어린 학생들이 이런 역사를 배워서 어디다 써먹겠는가?

하지만 요시다 세이지가 1996년에 이 증언이 날조된 소설임을 실토한지가 15년이 넘었는데도 최근까지도 이런 증언을 교과서에 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학위논문이 버젓이 논문심사를 통과되고 있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학문으로서의 역사가 아닌 선동과 증오의 수단으로 역사를 배우자고 하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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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세이지, 위안부, 인간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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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2012/01/03 01:22
방선주 박사가 발굴한 일본군 암호전보문에 의하면 위안부 모집과 관련 적지 않은 돈이 오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안부 모집비용은 전차금 명목으로 소요된 비용이 가장 컸을 것이고, 그외에도 운임비, 식대, 숙박비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암호 전보문 내용은「정신대연구소 소식 제30호, 2001」참조)

1945년 3월 14일 장가구(張家口)에서 일본 동경으로 보낸 비밀전보의 내용을 보면, 대략적인 1인당 모집비용을 산출해 볼 수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비용 부분만 간추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송금액을 위안부 인원수로 나누면 적게는 5,000엔에서 많게는 15,000엔이 소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안부를 수입한 현지 군부대에서 직접 모집비용과 소정의 수수료를 업자에게 송금하고 있는데, 송금환의 거래취소나 위조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현지 은행에 3배 정도되는 보증금을 예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중국이나 기타 해외 등지로 위안부를 내보냈을 경우 업자들에게 들어오는 송금액이 있었을 것이고 이 송금액은 고스란히 은행 송금환 계정에 잡혀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추적하면 국내 학자들이 추산하고 있는 최대 20만명의 위안부설은 "장군님 뻥치신다" 수준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 하다.

1910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의 각 은행에 잡힌 위체수불고 현황을 보면, 해외에서 국내로 송금한 거래 규모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다. 위안부 20만명이 10년에 걸쳐 해외로 송출되었다고 터무니없는 가정을 해볼때 중일전쟁 이후에는 위안부 수요가 증가해서 송출인원도 비례하여 급격히 증가했을 것이다.

그러면 상기 비밀전보문에서 추산된 1인당 모집비용을 5,000엔~15,000엔으로 계산했을 경우 송금환 수입금액은 급격히 증가하거나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어야 한다. 하지만 아래 도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중일전쟁기 이후 해외 위체 수입 증가율은 그 이전에 비해 두드러진 변화가 없다. 설령 위체수입 증가분의 전액이 위안부 모집비용과 관련되었다 가정해도 위안부 20만명은 택도 없는 개솔이라 사료된다.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을까 하면, 군인 몇명당 위안부 몇명이라는 아주 단순한 산수로 위안부 규모를 터잡았기 때문에 생긴 초보적 실수일 것이다. 일본이 운영한 위안소는 중국에서 남태평양에 이르는 각지의 모든 부대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병참이 운영되는 거점 부대를 중심으로 설치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지 않으면 저런 무리수가 나올 수 밖에 없다.

20만명의 위안부를 고용할 수 있는 천문학적인 돈을 대체 어떻게 일본 정부가 감당했을 수가 있겠나.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이 양반들은... 설마 이 많은 인원을 돈도 안주고 그냥 납치나 유괴로 데려왔다고 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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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명설,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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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2012/01/02 01:00
고대의 역사를 보면 처녀를 권력자의 부장품과 함께 순장하거나 또는 신전에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반복해 왔다. 단순한 인간의 생명이 아닌 처녀를 희생하는 행위 이면에는 종족번식과 관련된 인간의 욕망을 읽을 수가 있는데, 여성의 정조가 이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쉽게 알게 해준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이미 처녀를 공출하여 중국에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다.

외세의 강압에 의한 처녀공출의 역사는 어느 민족에게나 아픔일수 밖에 없고 수치의 역사였을 것이다. 위안부로 희생된 여성들의 처녀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이런 집단적 수치심을 자극하고, 내재된 역사적 트라우마를 동조화하려는데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일본인 위안부는 매춘녀 출신이 많았는데, 조선인 위안부는 대부분 순결한 미혼 처녀들이었다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한 뒤 그 죄질의 경중을 상대화 하려는 시도는 창녀에 대한 강간이 부정되었던 19C의 전근대적 사고방식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예컨대 이런 식의 자료를 들고 와서,


이런 식으로 무리한 논리 확장을 시도한 후


일본은 성병의 예방을 위해 조선의 미혼녀를 위안부로 집중 동원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의관 麻生徹男의 보고서에 등장하는 고작 80명 내외에 불과한 조선女들이 상해에 설치된 17군데 위안소를 대표하지도 않으며, 이러한 제한된 샘플의 표본만으로 일군 상층부가 조선여성의 "순결성"과 "상품성"을 인정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위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인 위안부보다 화대가 비쌌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천진(天津)의 육군병원에서는 麻生徹男의 보고와는 정반대로 조선인 위안부의 성병이 심각하여 주의를 요한다는 자료도 보인다. 天津陸軍病院特設分院,, 杭州陸軍病院,, 蘇州陸軍病院에서 공동으로 성병에 감염된 장병들을 조사한 결과, 조선女에게 성병이 감염된 경우가 4,403명, 일본女에게 감염된 경우가 2,418명, 중국女는 3,050명으로 조선女로부터 성병이 감염된 경우가 가장 많았다는 것이다.


이 조사에의 비고란에는 '조선女들의 활약이 타지 출신을 압도하므로 장래 전지에 참고를 요한다'는 견해가 첨부되어 있다. 이 견해가 조선女들의 활약을 칭찬한 얘기인지, 아니면 성병의 감염에 유의하란 얘기인지 판단이 어렵지만, 적어도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女에 비해 순결한 처녀들로 구성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조사보고로 보병 제224연대본부 의무실의「1939~1942년도 위생관계 참고서류철(1/3)」중 1940년에 작성한 성병에 관한 제 통계표에 따르면, 일본女의 경우 1,427명 조선女의 경우 2,455명, 중국인은 1,535명으로 조선女의 성병 감염률이 타지 출신을 압도하고 있다. 이 조사보고서에도 '이번 사변에서 반도 부녀의 진출이 활발하나 병원(病源)을 가진 자가 많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부 자료의 기록만을 가지고 일군 상층부에서 조선의 미혼처녀들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는 식의 의도까지 간파하는 연구자의 놀라운 창작력에 머리가 숙여지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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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처녀공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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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2011/12/29 08:19
군 위안부의 태동을 언제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제1설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전용 매춘시설에서 위안부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제2설은 1932년 군에서 직영한 상해 해군위안소를 위안부의 기원으로 본다. 현재의 통설이다. 제3설은 "모집"에 의해 민간인 위안부가 조달되기 시작한 중일전쟁기 전후를 그 시작으로 본다.

세계 어딜가도 군인이 있는 곳은 매춘의 수요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러일전쟁 직후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軍事機密)明治三十七八戰役統計』에 따르면 1905년 9월 현재 관동주에 거류 중인 일본인 2명 중 1명이 매춘부로 조사되고 있다. (관동주 55.4%, 여순 49.2% 금주 78.9%가 매춘부)

사정이 이렇다보니 성병이 만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막대한 전력손실로 이어지는 바,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당시에는 전사자가 1,378명인데 비하여 성병으로 전선에서 탈락한 자는 2,012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연유로 군당국이 장병의 곧휴단속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 사료된다.

관련 논저를 살피건대, 군당국이 직접 개입하여 매춘시설을 통제하거나 감독, 관리하는 묘수는 러시아가 일본에게 전수해준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에이 발발하기 전인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만주에 주둔하였던 러시아는 주둔지 안에 허가받은 매춘업소를 설치하였는데 가옥의 무상대여는 물론 보초병을 세우고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장병들이 매춘업소를 통과하려면 우선 소속 부대에서 군표를 구매하여 이것을 보초병에게 제시하고 들어갔다. 매춘부들은 수입한 군표를 현금으로 교환하는 대신 소정의 세금을 러시아 군에 바쳤는데, 이런 시스템은 일본 위안부 운영방식과 거의 유사하다 볼 수 있다.

이러한 매춘시설은 당시 연합군이었던 영국, 프랑스, 일본 주둔지에서도 설치되었고 매춘부의 채용 및 위생관리 등에 있어 상호협조하기로 했던 바, 이때 허용된 매춘부의 최저 연령은 13세라지? ㅋ 도동놈의 새끼들. 따라쟁이 일본은 이때 꼽사리 꼈다가 러시아의 선진기법에 흠뻑 감동을 받고, 대동아 전쟁 수행시기에 중국과 남태평양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 위안소를 설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소결 :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1932년 일본은 상해에 해군위안소를 처음으로 시범설치하였는데, 1936년 말 상해영사관의「在留邦人의 特種婦女 狀況 및 단속」이라는 문서를 보면 해군위안소에 종사하는 전체 작부 131명 중 조선인이 29명이라 되어 있으니, 소위 강제연행으로 표방되는 중일전쟁기 이전에도 조선인 위안부가 존재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소위 대좌부 출신의 위안부는 일본군 전용 섹스파트너로 종사하였지만, 오늘날 반도의 흔한 위안부 인식과는 거리가 좀 있다.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는게 논의의 진전을 위해 바람직 할 것 같다.

1933년 4월 관동군 혼성제14여단에서 작성한「衛生業務旬報」에 따르면 평천(平泉)에 일본인과 조선인 창기(娼妓) 38명이 들어와서 개업했으므로 16일 이들의 검미(檢黴)는 앞으로 매주 1회 실시하기로 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즉, 중일전쟁기 이전 일본군 위안소에 등장하는 조선인 위안부는 대부분 창기(娼妓) 출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일전쟁 이후의 조선인 위안부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반도의 흔한 위안부 인식처럼 조선의 순결한 처녀를 인간사냥하듯 납치하여 군용트럭에 싣고 온 사람들일까? 물론 자의가 아닌 사기와 강요, 또는 인신매매에 의해 부득이 위안부를 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권번 출신의 기생이었다가 군과 결탁한 업자의 손에 트레이드 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가사의 궁핍을 면하기 위해 자원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쪽이 소수였다, 다수였다는 별로 의미가 없는 논쟁같다.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명징한 자료나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히 증언자의 사례를 취합해 통계를 산출하는 것은 표본의 오류일 뿐만 아니라 신뢰성이라곤 1g도 없어보인다. 그런 어설픈 논증으로 일본 원숭이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1940년 5월 삼천리에는 「武漢의 朝鮮 동포」라는 제하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무한(武漢) 삼진(三鎭)에 거주하는 동포의 수는 내지인 약 육천 명, 반도인 약 이천 명이다. 그 생활 상태는 대개 부유하며 또한 일지사변(日支事變)으로 의하여 반수 이상은 막대한 물질을 적립하고 있다. 각 人의 직업은 각색각종이나 주로 무역상 잡화상 여관업 음식점 위안소업 등이다. 그외에 과수원을 경영하는 인사도 있고 교육기관을 설치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전지(戰地)인 것 만치 경기가 호경기이지만 각종 물가가 매우 빗싸다. 제일 경기 좋기는 위안소업이다. 여인 一人이 매일 수입금이 5,60원 이상이다.

위안부라 하면 흔히 포주에 의해 착취당하고 이동과 생활이 제약된 노예같은 삶을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일본군 육군대장의 1년치 연봉에 맞먹는 수입을 올리고 있는 위안부도 있었다는 게 놀랍기 짝이없다. 이게 단순히 만주의 일부지역에 국한된 일일까 하는 의심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역시 같은 잡지 삼천리(1941년 제13권)「상해시보 총경리 최경수씨와 상해의 조선인 제문제를 語함」이라는 제하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기자 : 남경에는 얼마나 거주하고 있습니까.
최경수 : 남경에는 1,000명의 거류동포(居留同胞)가 있습니다.

기자 : 남경에 있는 1,000여명의 조선 동포는 대체로 어떠한 사업에 종사하고 있습니까.
최경수 : 부끄러운 말이지만 대부분은 위안소, 즉 유곽업(遊廓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위 기사에 따르면 상해의 위안소는 유곽업과 동종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거류동포라고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납치나 유괴된 자가 아닌 여권을 소지하고 영사관에 정식신고된 조선 국적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위안부 이미지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을까?

나의 의심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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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추정의법칙,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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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2011/12/26 10:02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일본군위안부란 "일본 제국주의 점령기에 일본에 의해 군위안소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말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개념설명이 규범적 또는 역사적으로 타당한 접근인가? 하는 점에 있어 여러가지로 의문이 든다.

첫째로는 "끌려가" 라는 표현에 나타나고 있는 자의적 설정이 문제다. 위안부가 된 경위를 보면 대부분 모집업자들에 의한 "취업사기"가 주를 이루고 있고 납치나 유괴 등 물리적 강제력이 수반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따라서 "강요"라는 말도 부적당한데 취업사기도 간접적 강제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사실관계를 분명히 하는 쪽으로 기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둘째로는 "일본에 의해"라는 표현이 주는 가해주체의 모호성을 지적할 수 있다. 희소하나마 발견되고 있는 일본의 공문서를 확인해보면, 내무성에서는 위안부 모집행위를 불법으로 보고 단속하고 있으므로 일본 전체가 공식적으로 가담하고 있는지는 매우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당시 위안부 모집자들은 상당수 "조선인"업자들이 개입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불법 모집행위로 말미암은 책임소재를 놓고 볼 때 일본 군부와 공동정범으로 볼지 정범과 교사범 으로 볼지 여러가지 해석적 난점이 있겠으나, 적어도 불법모집에 가담한 조선인들의 책임이 상대적으로 가볍다 볼만한 근거가 없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의 가해자를 단순히 "일본"에 국한하여 고찰한다는 것은 편협한 자기암시적 착각에 불과하다.

세째로는 "성노예"라는 표현이 함의하고 있는 일반화 오류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초기의 위안소에는 주로 매춘여성들이 영리적인 목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있고, 후술하겠지만 여기에는 조선인 기생이나 업자들도 진출하였던 바 이들을 성노예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가 문제다.

또한 최초에는 사기나 강제 등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어쩔 수 없이 위안부 노릇을 강요당했으나 후에 자유의 몸이 된 뒤에도 생활고 등으로 인하여 재차 자발적 위안부가 된 경우까지 성노예라고 할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생각해봐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성노예라는 표현이 젠더적인 차원의 문제제기라고 본다면, 이는 보편적 인권의 시각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이지 민족적 감정의 발현으로 "조선"이나 "식민지 역사"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은 모순일 수 밖에 없다. 적어도 일본인 위안부는 그 규모면에서 우리를 압도하는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위안부여서 더 문제가 된다는 식의 가정은 도식적이며 추상적인 발상에 다름 아니다.

위안부의 역사적 전개나 논증과 관련하여 자료의 부족으로 명쾌한 정리가 곤란한 점은 상당히 애석하다. 다만, 선학들에 의해 발굴된 기존 사료들을 해석함에 있어 피해자 중심사관이나 민족주의적 거품을 걷어내는 일이 랑케가 언명한 "사실로서의 역사학"을 추구하는데 합당하다 보여진다.

따라서 본고는 다음과 같은 주제를 놓고 논지를 전개하고자 하노니, 위안부 동원 피해 사실을 일방부정하거나 일본측 입장을 맹목적으로 두둔하려는 의사가 없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1.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용과 개념의 문제
2. 초기 위안부의 형태와 자발성의 여부
3. 중기~말기 위안부의 모집방법과 일본의 대응
4. 증언사료에 대한 접근과 인식적 오류문제
5. 위안부 불법모집과 조선총독부의 개입 여부
6. 미군 포로심문서에 나타난 위안부 생활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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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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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2009/01/17 00:49

일제 말기, 중추원 사상조사위원회에 보고된 쇼와 19년(1944년) "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 자료에 의하면 수집된 유언비어로서 ①김일성은 영웅이다라는 소문 ②미혼여성은 징용한다는 소문 - 이로 인한 조혼(早婚) 풍조, ③ 남방전선 전사자가 격증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①은 그런갑다 할만하지만..②번은 좀 의외다. 미혼여성을 징용한다는 소문은 아마도 정신대나 위안부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이를 유언비어로 중추원에 공식보고 했다는 것은 위안부 징용은 거짓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죽자사자 시위하는 할마시들 무서워 함부로 얘기할만한 것은 아니다.

동 자료에는 ①에 대해서 조금 상술한 얘기들이 있다. 김일성 가짜설을 함부로 얘기하고 다니면 안되는 증거이기도 하다. 필기체로 되어 있어서 대학교수들도 해석하지 못한 내용을 올해 92세인 김병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대강의 뜻을 파악했다.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아 일본어를 한국어만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분이셔서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金日成-본명, 金成桂(주:金成柱의 誤記인듯) 나이 33세,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출생,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사령, 父는 撫松의 의원, 母는 龍山 어쩌구 저쩌구(해석불가) 장덕학교, 길림중학교 다니다가 공산비에 참여. 쇼와 10년(24세)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장(부하 수백명), 만주 치안확립 후(즉, 숙정공작 이후) 소련에 들어가서 첩자양성소 교관이 됨. 쇼와 11년~12년사이에 국경지대에 자주 출몰하다 혜산사건(보천보전투, 쇼와 12년) 당시 조선으로 침입하여 소요하고 도주함."

이 자료에 의하면, 서대숙이나 이종석이 얘기하는 바, 김일성의 실체설을 확실히 뒷받침 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게 또 있는데, 혜산사건을 다룬 사상휘보(1939년)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임. 공훈전자사료관에서 검색이 가능하니, 굳이 여기서 따로 그 내용을 이미지 파일로 올릴 필요는 없을 듯.

다만, 동북항일연군에도 김일성이 여럿 존재하였으므로, 섣불리 이 자료를 100% 맹신할 필요는 없지만, 이 자료가 틀렸다는 것을 반증할 자료가 나오지않는 한, 무조건 부정하는 자세도 바람직 하지 않은게 사실. 이명영의 연구는 증언 위주의 채록이 한계이기는 하나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가치는 있음. But 서대숙이나 이종석의 연구를 뒤집기는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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