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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평전-51] 납득못할 ‘대동아공영권’ 동조 발언
<임종국 평전> 2010/03/28 16:00 정운현
끝으로 그의 세계관,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사례 한 둘을 소개하고 넘어가야겠다. 앞에서 나는 종국이 ‘친일문학 공적론(功績論)’을 폈을 때 홍사중의 비판과 같은 입장에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런데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또 하나 더 있다.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종국의 시각이다. 우선 종국이 오오무라에게 보낸 편지(1984년 6월 25일자) 원문을 보자.
“근대 한일관계를 조사하고 있으면, ‘대동아 공영권’이란 것은 이상(理想) 그 자체는 옳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듭니다. 동아(東亞) 각 국의 정황이든 일본의 군부파시즘이든 그런 이상이 상당 부분 굴절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동아를 위한 동아라는 국민적 이상, 국민적 정열을 지니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그 시대 사람들은 행복했겠다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한국인도 또 일본 분들도 별로 이렇다 할 만한 국민적 이상이나 정열을 갖고 있지 않은 듯 합니다만……. 인간이란 결국 신념―비록 그릇된 신념이라 하더라도-으로 불타오를 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이하 후략)”
사실 나로선 ‘친일문학 공적론’을 접했을 때 만큼이나 당혹스럽다.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이 옳았다니, 그 시대 사람들은 행복했겠다니, 또 비록 그릇된 신념일지라도 정열적으로 불타올라서 행복했다니……. 다시 생각해도 나로선 적잖이 당혹스럽다. 혹 ‘식민지근대화론’을 펴는 사람들의 주장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다. 이것이 진정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란 말인가? 나도 이렇게 감정적인 투로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반론을 펴 보이겠다. 독자여러분은 나와 임종국 가운데 누구의 주장이 더 일리가 있는지 판단해 보시라.
우선 논의의 핵심어인 ‘대동아 공영권’ 용어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자. ‘동아(東亞)’는 동아시아의 준말로, 즉 일본 ․ 조선 ․ 중국 ․ 만주 일대를 지칭한 것이다. 여기에 ‘대(大)’자가 붙은 ‘대동아(大東亞)’는 여기에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 타이 ․ 말레이시아 ․ 보르네오 ․ 네덜란드령 동인도 ․ 미얀마 ․ 뉴질랜드 ․ 인도 까지를 포함한, 즉 동아시아에 동남아시아까지의 더한 광대한 지역을 일컫는다.
'대동아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혹사당한 조선인 희생자들의 모습
실지로 일제는 인도차이나, 미얀마(구 버마), 남양군도 등에 까지 나아가서 전쟁을 벌였다. 조선인 여성 위안부가 일본군에 끌려 버마 전선까지 투입됐었고, 조선인 징용자 가운데는 남양군도까지 끌려가 미군포로 감시를 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전범재판에 회부돼 이른바 ‘B․C전범’으로 처벌되기도 했다. 남양군도를 여행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떤 지역에서는 1m만 파면 조선인 징용자들의 유골이 나온다고 했다. 우리는 그들의 유골마저 아직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은 ‘대동아 공영권’의 탄생 배경과 경위. 이 말은 1940년 7월 일제가 국책요강으로 ‘대동아 신질서 건설’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처음 사용됐다. 이어 한 달 뒤인 8월 1일 마쓰오카 일본 외상은 담화를 통해 처음 ‘대동아 공영권’을 주창했다. 그 이듬해인 1941년 12월 8일 일본 연합함대 소속 공격편대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2월 10일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하고는 다시 이틀 뒤인 12일에는 전쟁 목적이 ‘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일제는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른바 ‘지나사변’)을 일으키고는 ‘동아 신질서’를 건설해야 한다고 부르짖기도 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토대로 한 ‘대동아 신질서 건설’ 계획은 이렇게 숨가쁘게 진행됐다. 결국 중일전쟁 이후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함으로써 일본 주도의 동아시아의 신질서에 의한 ‘신체제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 ‘신질서’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는 점이다. 전적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야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이를 수호할 전쟁이 요구되었고, 여기에 본토와 식민지, 그리고 침략국 국민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일제는 이들에게 오직 ‘신체제 수립’만을 강요하며, 그들이 주장하는 ‘대동아공영권’이 아시아 국민들에게 행복과 안녕을 가져다 줄 것처럼 선전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조선은 물론 일제의 영향 하에 있었던 대다수 나라의 백성들은 그들의 침략전쟁에 징병, 징용, 학도병, 지원병 등의 이름으로 내몰렸다. 후방에 남은 대다수의 사람들도 전쟁물자 동원으로 인해 극도의 궁핍을 강요당했다.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친일파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징병제 실시와 반도인의 감격’(서춘),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김성수), ‘가라! 청년학도여’(최남선), ‘싱가포르 함락과 팔굉일우’(박희도), ‘지원병을 아들로 두어’(조병상) 등의 나팔수 노릇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종국이 "‘대동아공영권이란 것은 이상(理想) 그 자체는 옳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듭니다."라고 쓸 수 있단 말인가?
다음은 ‘정열로 타오른 그릇된 신념’과 관련해서. 이 건은 그가 <친일문학론>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룬 인물인 춘원 이광수의 경우를 예로 들고 싶다. 그에 따르면, 이광수는 초창기 민족진영에서 활동하다가 변절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민족정신이라고 할 건더기 자체가 없었던 인물이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있을 그 즈음 그는 도쿄에서 일본인 사내아이의 동성애 연애소설(원제 ‘愛か’)을 쓰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춘원의 청년기 정신상태는 대략 감이 잡힌다.
도쿄에서 ‘2.8선언문’을 작성한 인연으로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편집하던 그는 1921년 총독부의 묵인, 비호 하에 입국한 후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다. 이어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징역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그는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마침내 노골적인 친일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만절(晩節)을 보고 초심(初心)을 안다’ (* 종국이 <한국일보> 1988년 1월 30일자에 쓴 칼럼 제목임)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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