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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ugust 31, 2012

Great Korea Empire participated to Exposition Universelle de Paris 1900, Expo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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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대한민국까지 세계박람회에 얽힌 이야기 - 2부 기타 글 모음
2011/08/18 06:40
http://blog.naver.com/livingocean/50118610626
2부. 유럽의 중심에서 조선의 문화를 외치다

안녕하세요.
그 어느때보다 역사 공부에 열심히인 연이 입니다^^

지난주에 소개해드린 조선의 세계최초 박람회 모두 기억하시죠?
미쳐 못보신 분들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추천은 미덕^^>

조선에서 대한민국까지 세계박람회에 얽힌 이야기 - 1부
http://blog.naver.com/livingocean/50118098459 (☜ 클릭)

지난 포스팅에서는
조선의 첫번째 박람회 참관기를 이야기 해드렸다면
오늘은 그 두번째,
대한제국의 파리세계박람회 이야기를 알려드리려고 해요.

그럼 지금부터 흥미 진진한
우리 박람회 역사속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1897년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근대로 향하는 힘찬 도약을 시작한 대한제국은
1889년과 1900년에 열린 파리세계박람회에 참가를 했습니다.



그 당시 세계박람회는 개최된지 50여년이 지난 후로
유럽 내에서는 각국의 기술과 발전을 홍보하는 장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행사였다고 합니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파리박람회에선 에펠탑이 세워지고,
1900년 파리박람회 때는 알렉상드로 3세 다리와 전철역이 건설되어
파리가 세계박람회와 함께 발전했다고도 하니
세계박람회의 위상이 대단했겠죠?



서구 열강과 일본, 중국 등 주변국들 틈바구니에서
나라의 근대화와 발전을 꿈꾸던 고종황제는
1896년 1월 프랑스 서리공사 르페브라가 1900년 4월 파리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대한제국을 공식 초청하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리에서 대한제국의 힘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박람회의 참가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대한제국은 파리박람회에 320㎡의 전시장 안에
관복, 나전칠기, 머리띠, 부채, 담뱃대, 병풍, 생강 분쇄기 등의 다양한 물품과 함께
불경, 삼국사기, 팔만대장경 등의 목판 인쇄물을 전시했다고 하는데요~

이는 대한제국의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 주고,
목판 인쇄물을 통해 5천 년 문화 민족의 자긍심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 이렇게 보지 않고 전해지는 이야기만 들어도
뿌듯하고 자랑스럽기만 하답니다.



대한제국의 파리박람회 참여 기록은
1900년 프랑스 신문 '쁘띠 쥬르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국왕이 직접 보내온 값진 수집품들과
한국에 거주했던 프랑스인 소유의 소품들이 세련되게 배치돼
한국의 자원과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다"
라고 평가했고,

'가려움증용 빗' 이라고 소개한 참빗에 대해
"너무 긁으면 괴로울 게 분명하다"라며
대한제국에서 온 물건을 재미있게 소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동방의 작은 나라가 분명
유럽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 거 같아요^^

대한제국의 파리박람회에서의 활약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농산물 가공식품으로 대상,
야생작물과 의료로 2개의 금메달,
가구, 도자기, 의복, 자수, 종이 등의 예술품 출품으로
10개의 은메달과 5개의 동메달, 3개의 장려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유럽인들의 대한제국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했을 것 같죠?

그리고 지금 프랑스 파리에서의 한류는
이때의 한국에 대한 관심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서 아닐까요? ㅎㅎㅎ

안타깝게도 이후 일제 강점으로
우리의 박람회 참가는 더이상 어렵게 됐지만,
파리박람회는 동방의 작은 나라가 아닌,
대한제국의 문화와 예술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음이 분명한 것 같아요.







2012여수세계박람회는 세계박람회를 통해 선진국을 따라잡고
대한제국의 힘을 세계에 보여주고자 했던 고종의 바램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기술과 환경의 우수성을 알리고 그 중심에 당당히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과 관심이 필요한 거
모두 아시죠?

박람회 역사에 대해 관심있게 읽어주신 여러분
너무나 감사드리고요!
이제 마지막 3부만 남아있으니 흥미진진한 우리의 박람회 역사!
끝까지 기대해주세요~

I'll be Back! ㅎㅎㅎ
[출처] 조선에서 대한민국까지 세계박람회에 얽힌 이야기 - 2부|작성자 여니수니

http://blog.naver.com/livingocean/50118098459

조선에서 대한민국까지 세계박람회에 얽힌 이야기 - 1부 엑스포 사람들 / 기타 글 모음
2011/08/12 06:30
http://blog.naver.com/livingocean/50118098459
1부. 조선 최초의 세계박람회를 돌아보며...

안녕하세요~ 연이입니다~
이웃님들~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요이땅~ 하셨죠? ^^


<추천 꾸욱~>

요즘은 시간이 어찌나 빨리가는지 자고 일어나면 TGIF 입니다.
폭풍 업무 후에 있을 불금(불타는 금요일) 계획은 세우셨나요?
저는 칼퇴와 함께~ 주말 여행을 다녀올 심산입니다. ^^
부러우면 지는 거에요~ ㅋ



문득 얼마나 많은 어제들이 오늘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계박람회도, 우리나라도 수많은 어제가 쌓여 오늘의 모습을 하고 있겠죠?
또 그 둘만의 오롯한~ 러브스토리(?)도 있을테구요~
(오오~ 철학적이다~ 멋지다~ ㅋㅋ)
우리나라와 세계 박람회는 언제 어떻게 처음 만났을까요?
얼마나 오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걸까요?
그 역사의 대서사시를~ 지금부터 시리즈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호~ 대하드라마 작가가 된 듯한 이 기분~ 찡긋~)



조선이 만난 최초의 세계박람회는 1893년 시카고세계박람회입니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개최했던 대전 엑스포가 1993년이었으니까
최초로 세계박람회에 참가한지 딱 100면 만에 직접 개최를 한 것이죠

그러나 조선의 세계박람회 참가 역사는 많지 않았습니다.
1893년 시카고세계박람회, 1900년 파리세계박람회,
그리고 세계박람회는 아니지만 1901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박람회의
참가 기록만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배라던지 한국 전쟁 등의 아픈 역사로 인해
아무래도 세계박람회 참가는 어려울 수 밖에 없었겠죠?

그래도 조선이 처음 참가한 시카고세계박람회를 보면
재밌는 사항들이 정말 많습니다!


당시 청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고픈 고종 황제의 강력한 의지로
조선 전시관은 한글로 '대죠션(대조선)' 이라는 국호를 사용했구요,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지어진 전시관 안에는
가마, 도자기, 모시, 부채, 갑옷, 관복, 활, 화살 등의
조선의 모든 것! 이 전시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스튜어트 컬린이란 미국인이 한국에서 머물던 당시에 모은
윷놀이 도구를 조선관에 출품했다고도 하는데요,

외국인들에게 비춰진 조선의 물건들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조선이란 작고 미지의 나라에서 온 모든것이
신기하게만 보여지지 않았을까 해요.



게다가 조선 전시관에선 조선의 궁중 악사들까지 파견되어
전시와 전통음악의 연주가 함께 이루어져
관람객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조선 전시관은 대성공을 거두었구요.

기록에 남은 그때 상황을 보면
"구경하는 사람이 몰려들어 관리자가 미처 응대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종이에 물품 이름과 용도를 적어
물품 위에 붙이는 것으로 구경꾼들의 응대를 대신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한류 열풍의 시초가 조선의 세계박람회 참가가 아닐까요? ㅋ

그러나 조선 최초로 해외에 세운 전시관은
박람회가 끝난 후 일어난 화재로 인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됐다면 더할 나위 없이
우리에게 소중한 공간이 되었을텐데 너무 안타까워요.

그래도 다행인건 조선 전시관은 사라졌지만 박람회 때 전시됐던 일부 물품이
시카고 필드박물관, 뉴욕 피다비박물관,
워싱턴 스미소니언박물관 등에 기증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 시카고 필드박물관에 보관된 한국전통 유물중에
약 3백여 점이 1893년 세계박람회에 참가한
조선에서 가져온 유물이라고 하니,
꼭 한번 방문해서 우리의 역사를 느끼고 싶어요!



혹시나 이번 휴가를 시카고로 가시는 이웃님이 계시거나
아니면 미국에 살고계시는 이웃님이 계시다면
꼭 한번 우리 조선의 박람회 역사를 느껴보고 오면 어떨까요?
물론 저에게도 생생한 후기를 들려주셔야 한다는 거!!!^^

오늘은 우리나라가 세계 박람회에 처음 참여한 이야기를 알려드렸는데요,
여기서 끝나면 섭섭하죠~
전 이제 고작 1893년 이야기를 했는걸요!

우리 나라의 세계 박람회 참가 역사는 다음주에도 이어집니다. 쭈욱~
몹시 시대가 되시더라도 기다려주새요~
커밍쑨~

행복한 주말 보내시고
다음 주에 만나요~ 제발~
[출처] 조선에서 대한민국까지 세계박람회에 얽힌 이야기 - 1부|작성자 여니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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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의 한류 - 파리 만국박람회| ㆍ한류열풍 소식
별낭자|조회 2024|추천 0|2007.11.15. 01:40
1900년의 한류 - 파리 만국박람회
기사원문보기




[김세원 기획위원] 20세기 벽두인 1900년 4월 14일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유럽은 바야흐로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대, 1880∼1900)의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보불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유럽에는 전쟁이 없었고 사회에는 평화가 가져온 향락적 분위기와 함께 세기말적 댄디즘 무정부주의 등 새로운 사상들이 잡탕처럼 공존했다. 산업혁명을 통해 주도 세력으로 떠오른 신흥 부르주아지들에게는 종말을 맞이한 19세기의 모든 것, 낡아빠진 사상을 불식하겠다는 강렬한 욕구와 함께 새로운 세기에는 모든 것이 변하고 새롭게 발전할 것이란 기대가 혼재해 있었다.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1851년 5월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린지 50년, 만국박람회는 각종 공산품과 공예품을 통해 자국의 산업기술 수준을 겨루는 국력 홍보마당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상 유럽의 문화수도였던 파리는 런던을 따라잡기 위해 만국박람회를 집중 개최했다. 프랑스의 랜드마크가 된 에펠탑이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탄생했고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가 건설됐다.

서구 열강을 따라잡고자 노력했던 고종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 대규모 국제 행사에 주목했다. 조선은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간소한 전시대를 설치한 적은 있으나 전시관을 건설하고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한 적은 없었다.

1893년 5월 7일 이폴리트 프랑댕 조선주재 프랑스공사는 파리 외무부에 공문을 보내 “조선의 고관들과 이희 폐하(고종)가 만국박람회를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대표하기 위해 왕가의 일원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고 보고했다. 구한국외교문서에는 1896년 1월 프랑스 서리공사 르페브르가 1900년 4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조선을 공식 초청했으며 고종이 흔쾌히 허락했다고 기록돼 있다.

1897년 1월 박람회 사무국과 다리 역할을 할 프랑스 주재 특사 및 전권공사로 민영환이 임명된 데 이어 1898년 8월 대표단 명단이 발표됐다. (후에 수정된 명단에 따르면) 명예위원장은 종2품 관원이었던 민영찬 대공, 위원장은 샤를르 루리나 파리주재 총영사였다. 1899년 6월 3일자 독립신문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품을 출품할 사람을 모집하는 재정후원자 트레물네의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전시관은 곧 국력의 상징이었다. 1878년 파리박람회부터 참가국들이 나름대로 전시관을 꾸밀 수 있게 되어 저마다 특색을 살리면서 가장 눈에 띠는 건물을 세우려는 참가국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할당되는 부지 면적은 참가국의 규모와 재정, 프랑스에 대한 관심도에 따라 결정됐다.

참가국 명단 끝부분에 있는 조선에게는 샹드 마르스 서쪽 쉬프렌대로, 영국 제과관과 향수부속관 사이의 부지가 주어졌다. 처음에 구상됐던 전시관은 두 개로 17세기 유럽에 만연했던 중국 민예품에 대한 애호를 그대로 답습하여 중국풍에 가까웠다.

1900년 1월 재정후원자 드 글레옹 남작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할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 후임자가 나타났다. 새로운 재정후원자 미므렐 백작은 두 개로 설계된 건물을 하나로 줄였다. 전시관 건축은 베트남의 사이공극장을 건축했던 외젠 페레가 맡았다.

당시 파리 만국박람회를 소개했던 잡지와 신문기사, 공식 소개 책자를 보면 한국 전시관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한국정부 대표단은 쉬프렌 대로에 극동의 모습을 가장 잘 살린 우아하고 독창적인 건축물을 세웠다. 320제곱미터에 이르는 건물은 화려한 색을 칠한 목조건물로 넓은 기와지붕을 이었고 골조는 금빛으로 빛난다. 위로 치솟은 처마 끝은 이곳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입구는 서울의 주택 문을 재현했다. 내부는 서울의 황제가 기거하는 옛궁의 알현실(경복궁 근정전)을 본떴다. 모든 벽에는 오래된 명주천이 걸려있다. 전시관 주위는 난간이 있는 회랑이 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공식 책자)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화려한 색깔이 입혀져 있고 극동 건축의 특징인 하늘을 향해 치솟은 처마끝과 커다란 지붕이 있는 한국관은 행인들의 시선을 끈다. 건축가는 황제의 고궁에 있는 알현실에서 받은 영감을 마음껏 발휘했다.” (1900년 발간된 서적 ‘파리박람회’)

당시 ‘라 퐁데리 티포그라피’ ‘르 프티 주르날’같은 신문 잡지의 기사들도 악기, 자개 공예품, 그림, 장롱, 도자기, 자수, 의복 등 전시된 귀중한 소장품과 토속품들은 Coree란 나라의 자원과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특히 기자들은 한국 인쇄술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전시한 진열대 앞에 한동안 멈춰 섰다. 콜랭 드 플랑시 공사가 구입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0년 11월 12일 박람회는 폐막했다. 56개 초청국 중 40개국이 참가했으며 총 방문객 수는 5086만 800명에 이르렀다. 한국은 농산물 가공식품으로 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2개의 금메달(야생작물과 의류), 10개의 은메달(가구 도자기 자수 의복 종이 등), 5개의 동메달, 3개의 장려상을 받았다.

전시품들의 일부는 기메박물관과 국립기술직업전문학교 부설 기술직업박물관으로 보내졌다. 아시아전문 박물관으로 알려진 기메박물관은 청색 인공색소와 알미늄 생산으로 많은 돈을 번 사업가 에밀 기메가 1879년 설립했다. 세계 각국의 종교와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기메는 세계일주를 통해 수집한 세계 각국의 물품들을 모아 전시했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 체결이후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와 조선을 여행했던 프랑스인들이 수집한 민속품,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때 전시품 등 350여점의 한국 공예품을 소장하게 된 기메박물관은 1893년부터 한국 관련 민속품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박물관 부설 도서관에선 한국 민간신앙 서적, 1880년대 한양에서 출판된 한글 소설을 볼 수 있었다. 한편 1890년 법학을 공부하러 프랑스로 건너간 홍종우(김옥균의 암살범)는 1892년 6월부터 1년간 기메박물관에 근무하면서 프랑스인 동료와 함께 ‘향기로운 봄’(춘향전),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심청전), ‘한 해 운수를 알아보는 안내서’(直星行年便覽)등의 한국 서적을 불역하여 출판했다.

기메박물관은 미지의 나라들에 대한 온갖 지식의 산실이기도 했다. 1897년부터 1893년까지 동양에 관한 연속 무료 강연회가 열렸고 강연 내용은 각각의 책으로 출간됐다. 21개월 동안 한국에서 근무한 뒤 1896년 프랑스로 돌아온 모리스 쿠랑은 ‘8~9세기의 한국’ ‘한국에서의 종교’등 한국과 관련된 6개의 강연회를 맡아 한국의 다양한 문화적 풍요로움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대한제국은 다음해인 1901년 하노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1902년 10월엔 해외박람회 국내유치를 위해 박람회 임시사무소를 개설했다. 당시 국내 언론은 1903년 서울에서 박람회가 개최될 것이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등장으로 상황은 다르게 전개됐다. 1905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한국이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어가면서 모처럼 유럽에 일기 시작하던 한국에 대한 관심의 불씨는 꺼지고 말았다. 1918년 에밀 기메가 사망한 후 한국의 전시품들이 전시실에서 밀려나 창고에 처박힌 것처럼 프랑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꼬레’(한국)는 사라져갔다.

파리만국박람회에 일본 도자기의 포장지로 사용됐던 우키요에(일본 에도시대의 풍속화)가 고호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화풍에 영향을 미치며 유럽에 ‘자포니즘’(일본풍) 유행을 몰고 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이 ’한류‘(韓流)의 원형이다. 한 세기 전 프랑스에서 싹은 틔웠으되 일제에 짓밟혀 채 꽃피지 못하고 스러져 버린 ’한류‘의 ’화석들‘을 발굴하는 노력이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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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19세기에서 20세기로

20세기 벽두인 1900년 4월 14일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유럽은 바야흐로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대, 1880∼1900)의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보불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유럽에는 전쟁이 없었고 사회에는 평화가 가져온 향락적 분위기와 함께 세기말적 댄디즘 무정부주의 등 새로운 사상들이 잡탕처럼 공존했다. 산업혁명을 통해 주도 세력으로 떠오른 신흥 부르주아지들에게는 종말을 맞이한 19세기의 모든 것, 낡아빠진 사상을 불식하겠다는 강렬한 욕구와 함께 새로운 세기에는 모든 것이 변하고 새롭게 발전할 것이란 기대가 혼재해 있었다.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1851년 5월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린지 50년, 만국박람회는 각종 공산품과 공예품을 통해 자국의 산업기술 수준을 겨루는 국력 홍보마당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상 유럽의 문화수도였던 파리는 런던을 따라잡기 위해 만국박람회를 집중 개최했다. 프랑스의 랜드마크가 된 에펠탑이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탄생했고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가 건설됐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서구 열강을 따라잡고자 노력했던 고종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 대규모 국제 행사에 주목했다. 조선은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간소한 전시대를 설치한 적은 있으나 전시관을 건설하고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한 적은 없었다.
1893년 5월 7일 이폴리트 프랑댕 조선주재 프랑스공사는 파리 외무부에 공문을 보내 “조선의 고관들과 이희 폐하(고종)가 만국박람회를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대표하기 위해 왕가의 일원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고 보고했다. 구한국외교문서에는 1896년 1월 프랑스 서리공사 르페브르가 1900년 4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조선을 공식 초청했으며 고종이 흔쾌히 허락했다고 기록돼 있다.
1897년 1월 박람회 사무국과 다리 역할을 할 프랑스 주재 특사 및 전권공사로 민영환이 임명된 데 이어 1898년 8월 대표단 명단이 발표됐다. (후에 수정된 명단에 따르면) 명예위원장은 종2품 관원이었던 민영찬 대공, 위원장은 샤를르 루리나 파리주재 총영사였다. 1899년 6월 3일자 독립신문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품을 출품할 사람을 모집하는 재정후원자 트레물네의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전시관은 곧 국력의 상징이었다. 1878년 파리박람회부터 참가국들이 나름대로 전시관을 꾸밀 수 있게 되어 저마다 특색을 살리면서 가장 눈에 띠는 건물을 세우려는 참가국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할당되는 부지 면적은 참가국의 규모와 재정, 프랑스에 대한 관심도에 따라 결정됐다.
참가국 명단 끝부분에 있는 조선에게는 샹드 마르스 서쪽 쉬프렌대로, 영국 제과관과 향수부속관 사이의 부지가 주어졌다. 처음에 구상됐던 전시관은 두 개로 17세기 유럽에 만연했던 중국 민예품에 대한 애호를 그대로 답습하여 중국풍에 가까웠다.
1900년 1월 재정후원자 드 글레옹 남작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할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 후임자가 나타났다. 새로운 재정후원자 미므렐 백작은 두 개로 설계된 건물을 하나로 줄였다. 전시관 건축은 베트남의 사이공극장을 건축했던 외젠 페레가 맡았다.

###파리에 재현된 경복궁 근정전
당시 파리 만국박람회를 소개했던 잡지와 신문기사, 공식 소개 책자를 보면 한국 전시관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한국정부 대표단은 쉬프렌 대로에 극동의 모습을 가장 잘 살린 우아하고 독창적인 건축물을 세웠다. 320제곱미터에 이르는 건물은 화려한 색을 칠한 목조건물로 넓은 기와지붕을 이었고 골조는 금빛으로 빛난다. 위로 치솟은 처마 끝은 이곳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입구는 서울의 주택 문을 재현했다. 내부는 서울의 황제가 기거하는 옛궁의 알현실(경복궁 근정전)을 본떴다. 모든 벽에는 오래된 명주천이 걸려있다. 전시관 주위는 난간이 있는 회랑이 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공식 책자)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화려한 색깔이 입혀져 있고 극동 건축의 특징인 하늘을 향해 치솟은 처마끝과 커다란 지붕이 있는 한국관은 행인들의 시선을 끈다. 건축가는 황제의 고궁에 있는 알현실에서 받은 영감을 마음껏 발휘했다.” (1900년 발간된 서적 ‘파리박람회’)
당시 ‘라 퐁데리 티포그라피’ ‘르 프티 주르날’같은 신문 잡지의 기사들도 악기, 자개 공예품, 그림, 장롱, 도자기, 자수, 의복 등 전시된 귀중한 소장품과 토속품들은 Coree란 나라의 자원과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특히 기자들은 한국 인쇄술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전시한 진열대 앞에 한동안 멈춰 섰다. 콜랭 드 플랑시 공사가 구입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0년 11월 12일 박람회는 폐막했다. 56개 초청국 중 40개국이 참가했으며 총 방문객 수는 5086만 800명에 이르렀다. 한국은 농산물 가공식품으로 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2개의 금메달(야생작물과 의류), 10개의 은메달(가구 도자기 자수 의복 종이 등), 5개의 동메달, 3개의 장려상을 받았다.

####19세기말 파리의 한류
전시품들의 일부는 기메박물관과 국립기술직업전문학교 부설 기술직업박물관으로 보내졌다. 아시아전문 박물관으로 알려진 기메박물관은 청색 인공색소와 알미늄 생산으로 많은 돈을 번 사업가 에밀 기메가 1879년 설립했다. 세계 각국의 종교와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기메는 세계일주를 통해 수집한 세계 각국의 물품들을 모아 전시했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 체결이후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와 조선을 여행했던 프랑스인들이 수집한 민속품,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때 전시품 등 350여점의 한국 공예품을 소장하게 된 기메박물관은 1893년부터 한국 관련 민속품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박물관 부설 도서관에선 한국 민간신앙 서적, 1880년대 한양에서 출판된 한글 소설을 볼 수 있었다. 한편 1890년 법학을 공부하러 프랑스로 건너간 홍종우(김옥균의 암살범)는 1892년 6월부터 1년간 기메박물관에 근무하면서 프랑스인 동료와 함께 ‘향기로운 봄’(춘향전),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심청전), ‘한 해 운수를 알아보는 안내서’(直星行年便覽)등의 한국 서적을 불역하여 출판했다.
기메박물관은 미지의 나라들에 대한 온갖 지식의 산실이기도 했다. 1897년부터 1893년까지 동양에 관한 연속 무료 강연회가 열렸고 강연 내용은 각각의 책으로 출간됐다. 21개월 동안 한국에서 근무한 뒤 1896년 프랑스로 돌아온 모리스 쿠랑은 ‘8~9세기의 한국’ ‘한국에서의 종교’등 한국과 관련된 6개의 강연회를 맡아 한국의 다양한 문화적 풍요로움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대한제국은 다음해인 1901년 하노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1902년 10월엔 해외박람회 국내유치를 위해 박람회 임시사무소를 개설했다. 당시 국내 언론은 1903년 서울에서 박람회가 개최될 것이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일제에 짓밟힌 한류의 싹
그러나 일본의 등장으로 상황은 다르게 전개됐다. 1905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한국이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어가면서 모처럼 유럽에 일기 시작하던 한국에 대한 관심의 불씨는 꺼지고 말았다. 1918년 에밀 기메가 사망한 후 한국의 전시품들이 전시실에서 밀려나 창고에 처박힌 것처럼 프랑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꼬레’(한국)는 사라져갔다.
파리만국박람회에 일본 도자기의 포장지로 사용됐던 우키요에(일본 에도시대의 풍속화)가 고호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화풍에 영향을 미치며 유럽에 ‘자포니즘’(일본풍) 유행을 몰고 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11월 말까지 고려대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불 120주년 기념 특별전 ‘서울의 추억, 한국-프랑스 1886-1905‘에 가면 일본과 중국에서 아시아 전체로 확산되고 있는 ’한류‘(韓流)의 원형을 볼 수 있다. 한 세기 전 프랑스에서 싹은 틔웠으되 일제에 짓밟혀 채 꽃피지 못하고 스러져 버린 ’한류‘의 ’화석들‘을 확인하고 나오는 길, 전시장 중앙에 걸린 일본순사의 조선인 사살 사진이 관람객들의 발길을 놓아주지 않는다.


Who did protect this country,Martyrs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46845

선열이시여, 이 나라를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1] 연재를 시작하며
07.10.24 14:08l최종 업데이트 07.10.26 10:59l박도(parkdo45)




▲ 구한말 의병장들 일제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 체포된 호남의 의병장들로 대구감옥에 갇혀 있던 당시의 모습이다(앞줄 왼쪽부터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천년, 강우경, 이영준, 뒷줄 왼쪽부터 황장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규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의병장).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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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면서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한다. 이 말에는 역사를 모르면 거듭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는 뜻도 담겨있다. 우리나라는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45년 일제에게 나라를 되찾았지만 국토는 아직도 두 조각난 채 겨레는 분단의 아픔에 살고 있다.

이제 곧 국권을 빼앗긴 국치(國恥) 망국(亡國)의 100주년을 맞을 참이다. 하지만 자라나는 세대들은 한 세기 전 치욕의 우리 역사를 대부분 잘 모르고 있다. 그들을 탓하기 전에 기성세대가 역사를 제대로 들려주지 못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나는 망국(亡國) 100주년을 앞둔 이 즈음에 나라를 빼앗겼던 구한말과 일제강점 때에 나라를 지키겠다고 당신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린 선열의 발자취를 더듬고자 한다. 그분들의 핏자국을 뒤쫓으며, 그 거룩한 애국심을 되새기고, 뒤늦게나마 그 영전에 옷깃을 여미고 엎드려 절 올리고자 한다.

아울러 그 행적을 취재하여 <오마이뉴스>에 연재 뒤 다시 책으로 엮어 다음 세대에게 지난 역사를 들려줌과 아울러, 앞으로 다시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경각심을 심어 주고자 한다. 그러면서 한 세기 전 기울어진 나라를 지키려다가 이름 없이 산화(散華)한 선열의 충혼(忠魂)을 기려 우리 겨레의 사표(師表)로 길이 드높일 것이다.

나는 1999년, 2000년 두 해에 걸쳐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하여 2000년 8월에 도서출판 우리문학사에서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은 나라> 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한 뒤, 이를 다시 다듬어 오마이뉴스에 <항일유적답사기>라는 연재 기사로 2003년 4월 20일부터 시작하여 2003년 7월 21일까지 모두 59회를 연재하였다.

그 뒤 2004년에 다시 중국대륙을 답사하여 2004년 7월 13일부터 2004년 8월 21일까지 <다시 항일유적지를 가다>라는 제목으로 모두 17회 연재 기사를 실은 바가 있다. 두 연재 기사를 합하면 76회인데 이번에 기획하는 이 답사 취재는 그 연장으로 국내편 <항일유적답사기>라 할 수 있겠다.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기사 76회를 가다듬어 도서출판 눈빛출판사에서 <항일유적답사기>라는 책으로 발간하였다. 이 <항일유적답사기>는 한국문학예술위원회 선정 2007년 제1분기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젊은 세대를 위해 가능한 쉽게 쓸 생각


▲ 한일병탄조약 전문 일제는 1905년 대한제국에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하며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기 시작하여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탄조약을 조인하였다.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당시 조선통감 테라우치 마시타게(寺內正毅)가 회동하여 협정한 협정서 제1조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라고 기록돼 있다. 8월 29일 한국을 일본에 병합하여 한국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라고 하였다. 초대 총독은 테라우치 마시타게(寺內正毅)가 승진하였다.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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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항일유적 취재 답사는 구한말 의병 전적지를 중심으로 답사할 테지만 때로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투사들의 행적도 더듬을 예정이다. 답사 범위는 우리나라 전 지역을 호남, 영남, 중부, 북한 4개 권역으로 나누어 우선 제1차로 호남에서 출발하여 영남, 중부를 두루 취재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중간 중간 답사 지역이 애초 계획과 다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취재 대상도 구애받고 싶지 않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이라면 다 귀한 분들이요, 글을 쓰는 데는 자유로운 게 가장 좋기 때문이다. 남한지역을 어느 정도 답사한 뒤 여러 가지 여건이 허락한다면 북한 지역도 취재하고 싶다.

사실 나는 역사학도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 깊은 공부가 없다. 나의 취재 답사는 새로운 역사를 발굴하기보다는 이미 역사학자들의 애써 연구로 남긴 저서나 기록들을 참고로 하여 역사의 현장을 찾아 확인하고 유족이나 후손을 만나 그 분들의 마음속에 담긴 얘기를 듣고, 이를 내 나름대로 거른 뒤 젊은 세대를 위해 가능한 쉽게 쓰려고 한다.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이 기사가 연재되는 동안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성원을 바란다. 나의 기록에 잘못이 있거나 중요한 사실을 빠트리거나 더 가다듬거나 보태야 할 내용, 새로운 자료나 일화가 있다면 서슴지 마시고 댓글이나 쪽지 함으로 귀중한 말씀을 보내주시면 가능한 기사에 담을 것을 약속드린다.

오늘 아침, 목욕재계를 하고 천지신명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님께 깊이 절을 올린 뒤 국내 항일유적답사기 그 첫 회를 송고한다.

하늘이시여, 선열이시여! 이 나라를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덧붙이는 글 | 기사문 특성상 일일이 참고 문헌을 밝히지 못할 경우는 연재 마지막 회에 참고 문헌을 일괄해서 밝히겠습니다.

태그:의병, 항일유적답사기 태그입력

Thursday, August 30, 2012

Russian soldiers appeared for scramble in Korean peninsula [JoongAng Ilbo]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20&total_id=3549863

[그때 오늘] 대한제국에 등장한 러시아 군인들 한반도 쟁탈전 신호탄 울리다
[중앙일보] 입력 2009.03.30 01:59 / 수정 2009.04.09 16:55




1900년 오늘 러시아는 마산포를 조차했다. 만주 진출 거점인 여순항과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는 러시아 군함에 석탄을 대는 창고를 짓기 위해서였다. 대한제국의 위정자들이 마산을 내준 것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명성왕후 시해사건 이후 그들은 자력이 아닌 러시아의 힘에 기대 왕조의 생존을 꾀하는 ‘인아책(引俄策)’을 썼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을 보내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해줄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 대한제국 군대의 훈련을 맡은 군사고문단도, 재정고문과 총세무사 자리도 러시아 사람 일색이었다. 사진 속 러시아 군인들은 1896년 10월 민영환과 함께 입국한 푸차타 대령 일행으로 보인다.

1860년 베이징조약에서 영·불 연합군의 군홧발에서 벗어나게 해준 대가로 중국이 러시아에 연해주를 넘길 때만해도 우리 위정자들은 이 조치가 가져올 후폭풍이 얼마나 클지 전혀 몰랐다. 연해주 할양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열강의 쟁탈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일 년 중 넉 달이 얼어붙는 연해주의 관문 블라디보스토크항은 ‘동방을 경략하라’는 이름의 함의(含意)를 충족하기에는 부족했다. 일본과 영국 같은 해양 세력들은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군항을 확보할 경우 예상되는 위협을 병적으로 걱정하는 ‘공로증(恐露症·Russophobia)’에 걸렸다. 일본은 열도의 옆구리를 겨누는 단도의 서늘함에 가슴을 졸였고, 영국은 중국 무역과 인도 경영이 받을 타격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역사에 도돌이표는 있는가? 한 세기 전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에서 한반도를 침략할 구실을 찾았다. 냉전이 끝난 오늘날, 일부 일본인들은 러시아가 아닌 북한의 미사일이 심장을 노리는 비수와 같다며 핵무장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힘의 정치(power politics)’가 통하는 국제정치판의 현실은 한반도를 놓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힘겨루기가 벌어졌던 한 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대한제국 때부터 6자회담이 열리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기 지속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징은 열강의 이해가 엇갈리는 세력 각축장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거울 삼아 큰비가 오기 전에 미리 둥지를 고치는 미우주무(未雨綢繆)의 혜안을 우리 위정자가 갖길 바랄 뿐이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the Great Korean Empire was shameless Pro-Japan?

http://mediocris.egloos.com/10266441

부끄러운 대한제국 황실, 명백한 친일과 미심쩍은 항일 by Mediocris
2009/11/24 16:03 한국근현대 mediocris.egloos.com/10266441 0 comments
황실, 친일과 항일 사이

한겨레21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기사전송 2006-08-25 18:05

이은·이구·이우 등 일본 군부에서 승승장구
일부는 일본인으로 귀화하기도
의친왕 이강의 3·1운동 배후설과 상하이 망명기도설 있지만 확인은 어려워




이따금 언론 보도를 통해 황실 후손들의 근황이 전해질 때마다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나라를 말아먹고도 당신들은 잘 먹고 잘 살지 않았냐”는 냉소다. 그 말에 섣불리 토를 달긴 힘들다.

1910년 8월29일 맺어진 한일합방조약 3조는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와 태황제 폐하와 황태자 폐하 전하와 그 후(后)와 비(妃) 및 그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상응하는 존칭과 권위와 명예를 향유케 하며 또 그것을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고 못박고 있다. 쉽게 말해 “나라는 빼앗더라도, 당신들 먹고살 걱정은 없게 해주겠다”는 배려인 셈이다. 이 때문에 ‘반민법안’을 만든 남조선과도입법의회 회의석상에서 의열단 출신 독립투사 박건웅 의원(1990년 독립장 서훈)은 “동경의 이왕은 왜 자살하지 않았는가. 그와 같은 민족 반역자는 마땅히 죽었어야 할 것이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본 왕실, 조선 황실에 교제비 지원

해방 이전까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정신적으로는 말 못할 수모를 당해왔는지 모르지만, 경제적으로는 일본 왕실의 보호 아래 풍족한 생활을 누려온 것은 사실이다. 영친왕과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 여사)를 혼인시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실천한 일본 왕실은 ‘이왕가’로 몰락한 옛 조선 황실에 매년 120만엔의 교제비를 지원했다. 일본 방송인 혼다 세쓰코가 1988년 써낸 <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를 보면 “120만엔의 수입은 천황가에 다음가는 거액의 비용이었다”(그 무렵 총리대신의 연봉이 1만엔가량)며 “그 때문에 많은 일본의 황족과 화족들은 이왕가를 부러워하는 분위기였다”고 적었다.

이후 영친왕은 ‘왕족’이라는 신분을 바탕으로 일본 군부에서 승승장구한다. 그는 17살이던 1913년 11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17년 5월 졸업했고 같은 해 12월5일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20년 12월7일 일본 군부의 핵심 엘리트가 될 사람들만 가려 뽑는 육군대학에 입학했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한국인으로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영친왕 이은, 의친왕 이강의 두 아들 이건과 이우 그리고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근무한 죄로 2차 대전 이후 교수당한 홍사익 중장 등 4명뿐이다. 이후 영친왕은 1931년 8월1일 대좌(대령)로 진급해 보병 59연대장으로 부임했고, 1938년 7월에 소장으로 진급한 뒤, 1939년 8월 근위보병 제2여단장, 1940년 5월 오사카 사단장을 거쳐 1940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해방 이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은 1947년 10월 모모야마 겐이치라는 창씨명으로 일본인으로 귀화해 일본에 동화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독립운동사에서 황실의 역할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한황실재건회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이종엽(32)씨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황실 변수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한황실의 독립운동사를 기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이다. 이강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한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각별한 사이였다. 3·1운동이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인 3월3일을 앞두고 계획됐고, 당시 사람들은 고종의 독살설을 대부분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고종의 죽음은 3·1운동을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만세 사건인 1926년 6·10 만세 사건이 터진 날은 순종의 인산일이었다.) 안천 서울교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이강은,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뒤에서 조종한 핵심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민족대표 33인은 당시 유명한 요릿집이었던 태화관은 의친왕의 사저였던 사동궁과 담 하나를 끼고 남쪽에 있었습니다. 탑골공원과 태화관은 약 10분 정도 되는 거리고, 사동궁과 태화관은 2분 걷는 거리의 담 하나 앞집입니다.”

30여명 자손을 둔 의친왕, 반일 산아투쟁?


3·1운동이 진압된 뒤 이강이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역사는 이 사건을 ‘대동단 사건’으로 기억한다. 대동단 사건은 1919년 10월10일 조선을 빠져나가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한 구한말 대신 동농 김가진(1846~1922)이 이강을 모셔오기 위해 꾸민 사건이었다. 김가진의 며느리인 독립운동가 정정화(작고) 여사는 1987년 펴낸 <녹두꽃>에서 “시아버님은 당시 의친왕 이강과 친근한 사이였고 사돈까지 맺기로 약속했다”며 “이강에게 (상하이 망명에) 동행할 것을 권유해 이강은 쾌히 승락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강은 간호원 출신의 애첩 최효신을 데려가겠다고 떼를 쓰다 1919년 11월10일 기차를 놓쳤고, 결국 다음날인 11월11일 11시 수색발 중국 안동(지금의 단둥) 열차를 탔다. 불행히도 이강은 단둥역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돼 망명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이강은 매일 감시의 눈초리를 그치지 않는 밀정에게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술과 여자에 빠져 30명 가까운(정확한 자손의 수는 아무도 모른다) 자손을 둔다. 안천 서울교대 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일제에 대항한 의친왕의 거룩한 산아투쟁”이라고 주장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알기 힘들다. 당대 사람들은 고종도 국권 회복을 위해 해외 망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 이왕직 장시국자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익이 독살한 것으로 믿었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2006년 5월 옛 대한제국 황실 자손들의 역사를 정리한 <제국의 후예들>을 쓴 정범준씨는 “황실 독립운동사의 난점은 황실이 당시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과 어떤 영향을 줬는지 명확한 문헌 증거로 입증하기 어렵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는 황실의 독립운동이 일제의 감시로 은밀하게 이뤄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세인들의 주목을 끌만큼 대단한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됐든, 황실이 저문 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아무 노력도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린 그 사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고종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
헤이그 밀사사건 내탕금 받았다는 헐버트 박사의 증언 남아 있지만

고종이 마련한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에 대한 소문은 사실일까?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긴 힘들지만 이를 방증하는 증언들은 얼마든지 있다.

서울 마포구 양화진에 자리한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에 가면, 이제는 한국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버린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의 무덤을 찾을 수 있다. 그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 등과 고종의 밀사로 파견돼 구미 언론들을 상대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고, 1949년 7월29일 프레지던트 헤스호 편으로 해방된 대한민국을 찾은 뒤 8일 만에 숨졌다.

이때 그가 남긴 말이 헐버트 박사 한국 방문을 주도한 김을한씨의 저서 <인간 영친왕>에 기록돼 있다. “저는 소위 헤이그 밀사사건 당시에 고종황제께서 막대한 내탕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본인에게 위탁한 것이 있어서 상해 노중(露中)은행에 예금한 바가 있는데, 그 후 한일합병에 성공한 일제가 그것을 알고 전부 몰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고종황제와 본인만이 아는 비밀로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기어이 이 일을 결말지어야 하겠습니다.” 그는 “은행에 맡긴 증서와 모든 관계 서류를 잘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갑작스레 숨졌고 고종의 막대한 내탕금의 행적도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 밖에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 선우훈이 고종의 7촌 조카이자 매국노 이지용의 증언을 모아 <사외비사- 덕수궁의 비밀>이란 책을 써냈는데 이곳에도 고종이 “황실 소유의 금괴 85만 냥을 12개의 항아리에 나누어 담아 황실 재정을 담당하던 이용익에게 시켜 비밀장소가 담긴 지도를 들고 탈출을 기도하던 직전에 시해당했다”는 진위를 확인하기 힘든 얘기가 수록돼 있다.

What process was the Great Korean Empire established?

http://ask.nate.com/qna/view.html?n=3418051


대한제국 수립에 대하여.. 10
llnabjnll | 03.08.19 17:32
답변 1
조회 1,120

네티즌공감
대한 제국 수립은 어떤 뱅경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는지.. 또 그 결과와 역사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가르쳐주세요.

그리고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되어있던데 그 이유는 뭔가요..??

가르쳐주세요. 태그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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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님의 답변
08.03.24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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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계기로 개화당은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올리려고 하였다. 우선 용어를 공식적인 칭호에서 군주(君主)를 대군주(大君主)로, 전하를 폐하(陛下)로 높여 불렀으며, 명령을 칙(勅), 국왕 자신의 호칭을 짐(朕)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 노력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단되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함으로써 1896년 1월부터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고 같은 해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중단되었다.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후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가 연합하여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추진, 8월에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쳤으며, 9월에는 원구단(圜丘壇)을 세웠고, 드디어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제국을 성립하기까지 서로 연합하였던 독립협회와 수구파는 정체(政體) 문제로 대립하였다.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 개혁하여야 한다고 한 반면, 수구파는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 11월 2일 중추원신관제(中樞院新官制)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발전적인 계획은 수구파들의 모략으로 좌절되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朴定陽)을 대통령, 윤치호(尹致昊)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제(共和制)를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다.

이에 고종은 경무청(警務廳)과 친위대(親衛隊)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킨 다음 조병식(趙秉式)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여기에 자주 독립세력을 꺾어버리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한 일본이 수구파에 가담, 독립협회의 운동을 탄압하도록 권고하고 이를 고종이 받아들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해산함으로써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싸움은 수구파의 승리로 끝났다.

이를 지켜본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안 정부도 1904년 1월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서울을 점령하고 2월 23일 대한제국을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은 침해되기 시작, 일본은 7월 20일에는 군사경찰훈령(軍事警察訓令)을 만들어 치안권(治安權)을 빼앗았으며, 8월 22일에는 한일외국인고문용빙(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관한 협정서로 재정권을 빼앗아갔고,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강제체결되고, 같은 해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국호는 다시 조선으로 바뀌었다.

출처 : 역사백과

While dragged 15-year-old girl by Japanese military police,her mom was...


1 名前: ◆TOFU/XEczQ @甘味処「冷奴」φφ ★[sage] 投稿日:2012/08/30(木) 02:31:00.45 ID:???
「満十五才の1939年、秋夕(チュソク)を過ぎていくらも経たないある日だった。その日もママ(オン
マ)と一緒に木花を取るが、小さい軍用車に乗って真っ赤な腕章をはめた日本憲兵4人が現れた。
憲兵らは私が分からない日本語で責め立て私は恐ろしくて反抗もできなくて‘ママ!’とだけ叫び
まくった。ママが憲兵の脚をつかんで、‘私たちの子供を連れて行くなら私を殺して行け。’と言った
ら憲兵は足でママを容赦なく蹴った。ママは畑を転がって倒れ、それがママとの最後の別れだった。」
(陳慶彭(チン・ギョンベン)おばあさん)

悲劇は随所で訪れた。木花を取った秋にも霜の降りた月にも、憲兵らは家と言わず学校と言わず
襲った。1937年、南京占領過程で大々的な民間人虐殺と強姦を行った日帝が国際社会の猛非難
を受けた時点だった。1932年、満州に日本軍慰安所を設置した日帝は戦争が長期戦に突入する
とすぐに強姦と性病など軍内の性問題を体系的に管理するとし慰安所を拡大した。誰にも慰めら
れない慰安婦らの数奇な人生はそのように外れ始めた。

強制動員方法は多様だった。暴力と脅迫は普通であり、「金が儲かる。」と就職詐欺を働くことも頻
繁だった。キム・プンソンおばあさんは「日本人が‘きれいな服着て工場に就職させてくれるからナ
ムル食べて苦労して暮らさなくても良い、と言われて連れて行った。」と証言した。

1992年、韓国政府の慰安婦実態調査に参加したある被害者は「1938年、日本の真鍮器上納要
求と創氏改名に反対したお父さんが連行された。愛国奉仕隊を支援すればお父さんが解放され
るかもしれないと思って支援したところ直ちに従軍慰安婦に引きずられて行った。」と証言した。

慰安婦の生活は地獄と違わなかった。ムン・オクチュおばあさんは「部屋にはふとんと枕二つあっ
た。(私が留まった)中国東北部トアンソンは寒くて到底耐えられなかった。一日に20人ないし30
人は相手にしていたようだ。」とした。イ・オクプゥンおばあさんは「土曜日と日曜日には朝九時から
夜十二時まで受けた。」と証言した。

終戦は慰安婦生活の終わりでなくまた他の悲劇の始まりだった。日本軍は慰安所の存在を隠す
ために慰安婦らを集団的に虐殺したり遺棄した。生き残ったこれらの中には羞恥心で故郷に帰る
代わりに現地に残る道を選んだ人も多かった。かろうじて故国に帰っても、戻ってくるのは‘体を売
りに行ってきた。’という蔑視であった。

1992年6月1日、東京地方裁判所で‘金田君子’と自己紹介したおばあさんもやはりそのような被
害者のひとりだった。太平洋戦争犠牲者遺族会が日本政府を相手に提起した被害補償請求訴訟
で証人に立ったイおばあさんは唯一の生計手段の家政婦ができなくなるかと思ってかつらにサン
グラスをかけたまま仮名で証言台に立ってこのように話した。

「子供も産むことができなず結婚もできなくて一生行き場もない身分になってしまった。身体も心も
アヘンで腐った。日本の土地をすべてもらっても私の青春は帰ってこない。私の青春を返してく
れ。」

当時、慰安婦はオランダ人100人余りと台湾人など最小5万人から30万人に達した。現在生存し
ている我が国の慰安婦被害者は61人だ.

ペ・ギョンホン記者

ソース:ソウル新聞(韓国語) 15才少女、日憲兵に引きずられて行く間ママは…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830500007&spage=1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830500007&spage=1
15살 소녀, 日헌병에게 끌려가는 동안 엄마는…
[위안부 증거 있다] 누구에게도 위안받지 못한 그녀들의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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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열다섯 살인 1939년, 추석을 지낸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엄마와 함께 목화를 따는데, 작은 군용차를 타고 빨간 완장을 찬 일본 헌병 4명이 나타났다. ‘겐삐’(헌병)들은 내가 모르는 일본말로 몰아세웠고, 난 무서워서 반항도 못하고 ‘엄마!’만 외쳐댔다. 엄마가 겐삐의 다리를 붙들고, ‘우리 애기를 데리고 가려면 날 죽여놓고 가라.’고 하자, 겐삐는 발로 엄마를 사정 없이 내리찍었다. 엄마는 밭을 구르면서 휘뜩 자빠지셨고, 그것이 엄마와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진경팽 할머니)




비극은 도처에서 찾아왔다. 목화 따던 가을에도, 동짓달에도, 헌병들은 집과 학교를 가리지 않고 덮쳤다. 1937년 난징점령 과정에서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과 강간을 자행한 일제가 국제 사회의 맹비난을 받던 시점이었다. 1932년 만주에 일본군 위안소를 설치한 일제는 전쟁이 장기전에 돌입하자 강간과 성병 등 군내 성 문제를 체계적으로 관리한다며 위안소를 확대했다. 누구에게도 위안받지 못한 위안부들의 기구한 삶은 그렇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강제동원 방법은 다양했다. 폭력과 협박은 예사였고, “돈을 벌게 해주겠다.”며 취업사기를 치는 일도 빈번했다. 김분선 할머니는 “일본 사람이 ‘옷도 고운 것 입고 공장에 취직시켜 줄 테니 나물 뜯으며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데려갔다.”고 증언했다. 1992년 우리 정부의 위안부 실태조사에 참여한 한 피해자는 “1938년 일본의 놋그릇 상납요구와 창씨개명에 반대한 아버지가 연행됐다. 애국봉사대에 지원하면 아버지가 풀려날 수 있다고 해서 지원했더니 곧바로 위안부에 끌려갔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위안부의 생활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문옥주 할머니는 “방에는 이불 하나와 요 하나, 베개 둘이 있었다. (내가 머물렀던) 중국 동북부 도안성은 춥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면서 “하루에 20명 내지 30명은 상대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옥분 할머니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종전은 위안부 생활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일본군은 위안소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위안부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거나 유기했다. 살아 남은 이들 중에는 수치심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대신 현지에 남는 길을 택한 사람도 많았다. 가까스로 고국에 돌아온다 해도 되돌아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멸시였다.

1992년 6월 1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가네다 기미코’(金田君子)라고 자신을 소개한 할머니 역시 그런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피해 보상 청구 소송에서 증인으로 나선 이 할머니는 유일한 생계수단인 파출부일을 할 수 없게 될까봐 가발에 선글라스를 쓴 채 가명으로 증언대에 서 이렇게 말했다. “자식도 낳을 수 없고 결혼도 못하고, 평생 오갈 데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몸도 마음도 아편으로 썩었다. 일본땅을 다 줘도 내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 청춘을 돌려달라.” 당시 위안부는 네덜란드인 100여명과 타이완인 등 최소 5만명에서 30만명에 이르렀다. 현재 생존해 있는 우리나라 위안부 피해자는 61명이다.

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273 名前:名無しさん@13周年[] 投稿日:2012/08/30(木) 20:58:13.43 ID:58DNK6Wj0

↓
1、1939年には「憲兵警察制度 (朝鮮総督府)」は無い。1939年まで。
軍の憲兵隊が暇そうに20万人拉致したとして、朝鮮人の警察官や軍人、
抗日テロリストたちが抗議をした記録は一切残っていない。

2、真っ赤な腕章の憲兵隊

日本の憲兵の腕章


どこの国か分かりませんが、これが赤い憲兵の腕章


>憲兵らは家と言わず学校と言わず
>襲った。

学校?
学校に通えていたの?!
日帝による人類史上最悪の植民地の元で?





http://www.wara2ch.com/archives/6571759.html#more


5:闇仙 ◆ZfXxlDUuVU :2012/08/30(木) 00:00:36.93ID:H2fS5gKG

どんだけ暇なんだね日本の憲兵は


7:<丶`∀´>(´・ω・`)(`ハ´  )さん:2012/08/30(木) 00:01:04.47ID:fLTwEZ9S

なんで奴隷が高級品のアヘン吸えるんだよw


9:<丶`∀´>(´・ω・`)(`ハ´  )さん:2012/08/30(木) 00:01:13.56ID:eXOgzgrm

それは憲兵じゃなくて、単なる人身売買を生業として同胞の朝鮮人だろ?
今の図式となんら変わらん。




26:<丶`∀´>(´・ω・`)(`ハ´  )さん:2012/08/30(木) 00:04:18.16ID:0/ZRUbc8

>満十五才の1939年
>私が分からない日本語で責め立て


_ノ乙(、ン、)_あれ?日本語教育を強要されて
言葉(朝鮮語)を取り上げられたとか言ってませんでしたっけ?w


27:<丶`∀´>(´・ω・`)(`ハ´  )さん:2012/08/30(木) 00:04:24.16ID:G88Rj0t4

>>1
>‘体を売りに行ってきた。’という蔑視であった。

強制連行被害者という言葉は無かったと。



44:<丶`∀´>(´・ω・`)(`ハ´  )さん:2012/08/30(木) 00:06:51.38ID:4rdN2ZT0

>>27
引きずられて誘拐されたはずなのに
この反応は無いよなw
















51:<丶`∀´>(´・ω・`)(`ハ´  )さん:2012/08/30(木) 00:08:47.16ID:4onF3Fdd

>>1
> 私が分からない日本語

??

この世代って、完全に日本人として生まれた世代でしょ?
15歳で日本語が分からないなんて、有るの??



250:<丶`∀´>(´・ω・`)(`ハ´  )さん:2012/08/30(木) 00:35:52.25ID:J9awFQhb

>>51
ないですΣ( ̄。 ̄ノ)ノ
爺さんが朝鮮半島で小学校の教諭をしていましたが聞いたことないです、教え子に国交正常化直ぐに京城に、別の年に賓客で平壌に呼ばれるほどの人なので間違いないと思います。


52:<丶`∀´>(´・ω・`)(`ハ´  )さん:2012/08/30(木) 00:08:50.82ID:ysY9HzLW

15歳連行って事は、多分朝鮮戦争の慰安婦の騙りだろうな
体力勝負の戦地売春婦に、規則を破ってまで子供を連れて行くわけがない


53:<丶`∀´>(´・ω・`)(`ハ´  )さん:2012/08/30(木) 00:09:15.56ID:ZiPHFSdk

その割りには日本人と朝鮮人の間に生まれた子供の話って、聞かないな。



117:<丶`∀´>(´・ω・`)(`ハ´  )さん:2012/08/30(木) 00:17:58.04ID:xjhuZHpy

>>53
そう、それが謎だよな。
古来全ての売春婦に付き物の話が完全に欠落してんの。
ピルなんて無い時代に一体どうやってそんな完璧な避妊できてたんだ、ホント。



132:清純派うさぎ症候群Lv.14 【東電 72.6 %】 ◆QO1QQUNTAcLf :2012/08/30(木) 00:20:22.28ID:T8Ak+nJC BE:1198838636-2BP(6000)

>>117
腹を蹴飛ばして堕胎させてたってほざいた
馬鹿を前に見た気がします。



147:<丶`∀´>(´・ω・`)(`ハ´  )さん:2012/08/30(木) 00:22:26.13ID:3sLM4/Sl

>>117
突撃一番って凄いですね。



165:<丶`∀´>(´・ω・`)(`ハ´  )さん:2012/08/30(木) 00:24:26.62ID:xjhuZHpy

>>147
現代のオカモトゴムを超える避妊度だなww
てかコンドームある時点でかなり真っ当な売春環境だわ。


195:<丶`∀´>(´・ω・`)(`ハ´  )さん:2012/08/30(木) 00:28:03.58ID:ysY9HzLW

赤い憲兵の腕章発見




213:<丶`∀´>(´・ω・`)(`ハ´  )さん:2012/08/30(木) 00:30:15.28ID:nYPSHrYn

>>195
なんか、歴史の真実が見えてきたようなー…(´-ω-`)






68:<丶`∀´>(´・ω・`)(`ハ´  )さん:2012/08/30(木) 00:11:51.93ID:kpPxxPsn

wikiには
>韓国併合年で「憲兵警察」と「一般警察」を合わせた人数は、7712名(その内、朝鮮人は4440名)。うち「憲兵警察」は2019名(その内、憲兵補助員としての朝鮮人が1012名)であった
とあるが
アルェー?



80:<丶`∀´>(´・ω・`)(`ハ´  )さん:2012/08/30(木) 00:13:09.18ID:yiweQOE6

>>68
有名な話なんだけどなぁ


ついでに、太平洋の後方支援のトップって、叩き上げの朝鮮人中将だろ。


75:<丶`∀´>(´・ω・`)(`ハ´  )さん:2012/08/30(木) 00:12:42.14ID:a/8dzy6L

>>1
どこから突っ込めばいいやらwwww
突っ込んだら負けか?

とりあえず大東亜戦争はるか以前から金属徴発に慰安婦狩りたぁ日本軍先見の明ありすぎwwww


76: ◆65537KeAAA :2012/08/30(木) 00:12:45.56ID:Yu1D+FPu BE:65232454-PLT(13000)

黙ってみていたどころか「娘を返せ!」とも言わず、1970年代まで忘れていた朝鮮男児www





206: 忍法帖【Lv=40,xxxPT】 【東電 72.6 %】 :2012/08/30(木) 00:29:11.30ID:VeuHBWDo

>>1
真面目に答えると
奴隷にするならなぜ母親も連れて行かなかったんだ?
子供が15歳なら母親は40前
売春婦としては無理があるが、飯炊きなり洗濯なりさせられるだろ
またそこまで残忍な憲兵がどうして母親を生かしておいたのか?
これも矛盾しているよな

>キム・プンソンおばあさんは「日本人が‘きれいな服着て工場に就職させてくれるから
>ナムル食べて苦労して暮らさなくても良い、と言われて連れて行った。」と証言した。
この人は隣の家のおばさん(朝鮮人)がそう言って呼び出して、日本人に引き渡されたんじゃなかったか?
これだから朝鮮人の証言はあてにならないんだよ


209:<丶`∀´>(´・ω・`)(`ハ´  )さん:2012/08/30(木) 00:29:27.19ID:VqhZ08aO

そんなことより、日本在住の売春婦を持ち帰って下さい


216:<丶`∀´>(´・ω・`)(`ハ´  )さん:2012/08/30(木) 00:30:46.28ID:N8Zn/MZs

朝鮮人の少女を日本人の学生がからかったというだけで
朝鮮では大規模な暴動がおきました。
そんなところで30万人も強制連行なんか不可能です!


236:<丶`∀´>(´・ω・`)(`ハ´  )さん:2012/08/30(木) 00:32:34.05ID:65DvdEhT

本職放り出して慰安婦狩りとは帝国陸軍の憲兵隊はよっぽど暇だったんだなぁ(棒)


237:<丶`∀´>(´・ω・`)(`ハ´  )さん:2012/08/30(木) 00:32:52.07ID:qoiXfOfm

憲兵警察制度 (朝鮮総督府)
1919年の三・一独立運動後、朝鮮総督府の「武断統治」に
批判が高まったこと、また日本の警察制度としては異例の形態であった
ことから、まもなく廃止された。
http://ja.wikipedia.org/wiki/%E6%86%B2%E5%85%B5%E8%AD%A6%E5%AF%9F%E5%88%B6%E5%BA%A6_(%E6%9C%9D%E9%AE%AE%E7%B7%8F%E7%9D%A3%E5%BA%9C)

憲兵って、どこの誰??
制度が無いんだけど。


258:<丶`∀´>(´・ω・`)(`ハ´  )さん:2012/08/30(木) 00:37:15.33ID:qEc+iVrm


日本の憲兵の腕章





なるほどねぇ・・・


294:<丶`∀´>(´・ω・`)(`ハ´  )さん:2012/08/30(木) 00:41:50.79ID:nURVBU+Q

だからさぁ
朝鮮人将校も朝鮮人政治家も沢山居たわけで
なんでそいつ等がクーデターなり起こさなかったの?


298:<丶`∀´>(´・ω・`)(`ハ´  )さん:2012/08/30(木) 00:42:13.94ID:fUUKC4UX

米軍の聞き取り調査によると慰安婦の平均年齢は25歳


301:<丶`∀´>(´・ω・`)(`ハ´  )さん:2012/08/30(木) 00:42:50.65ID:fUUKC4UX

日本の弁護士達がインドネシアを訪問し、「補償のために日本からやってきた。
元慰安婦は名乗り出て欲しい」という新聞広告を出したがインドネシア政府は
「日本との補償問題は1958年の協定により、完結している」との声明を発表している。
また、インドネシアの新聞社は「我々には歴史とプライドがある。『お金をくれ』
などとは、360年間、わが国を支配したオランダに だって要求しないとの見解を発表し、
日本から来た弁護士らを批判した。













319:<丶`∀´>(´・ω・`)(`ハ´  )さん:2012/08/30(木) 00:44:47.01ID:ZiPHFSdk

実際に出兵した知り合い(故人)から大昔に聞いた話。

・自分の部隊にも慰安婦が一人いたが、娼館から派遣された女性だった。
・妹と同じ年だったので、可愛そうで抱けなかった。
・身近にいる唯一の女性で、みんなから家族以上に大切にされていた。
 食料不足の時にはお腹が空かないよう、自分達の分を減らして女性に食事を与えていた。
・今報道されているような強制連行の話は、聞いたことが無い。

との事でした。


330:<丶`∀´>(´・ω・`)(`ハ´  )さん:2012/08/30(木) 00:46:06.97ID:fUUKC4UX

※1943年の大卒初任給は75円です。

■アメリカ軍の調査書(ミャンマーのミチナでアメリカ軍の捕虜になった慰安婦の調書)
日本兵の月収は15円~25円。
慰安婦の月収は1000円~2000円。
慰安婦は個室で生活し、日本兵に比べて贅沢な生活をしていた。
また接客を断る権利も認められていた。


■韓国人元慰安婦、文玉珠の裁判記録(日本に郵便貯金の変換を要求した裁判)
貯金の記録を調べると、1943年6月から1945年9月まで12回の貯金の記録があった。
合計金額は26145円だった。
更に故郷の大邱に5000円を送金している。

■元日本海軍中佐、杉浦実の述懐
慰安婦は約5000円の借金を3ヶ月から半年で返済した。
更に約5000円~10000円の貯金を持っていた。
30000円も貯金している慰安婦もいて、みんなで驚いた。

※1943年の大卒初任給は75円です。


366:<丶`∀´>(´・ω・`)(`ハ´  )さん:2012/08/30(木) 00:52:27.59ID:RQEt+gkF

(◎▲◎;)気の毒に。
朝鮮人女衒は、ひどいことをしますね。
帝国軍は、強制禁止の令を発布しましたが、
悪人の犯罪は、なかなか止まず、
遺憾の限りです。


370:<丶`∀´>(´・ω・`)(`ハ´  )さん:2012/08/30(木) 00:53:28.63ID:MjzDNA7h

こんなむちゃくちゃな話がお隣さんでは事実としてまかり通るのか。

エロゲと現実の区別がつかない国だけあるな。

the rare photos of Great Korea Empire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4048508


[현장취재] 차길진 법사, 대한제국 황가 희귀 사진 공개
[일간스포츠] 입력 2010.03.07 18:42 / 수정 2010.03.07 18:43



차길진 법사가 최근 대한제국 황가 희귀 존영 사진과 3.1운동 태극기를 공개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자두꽃 금박 문양이 선명하게 찍힌 고종황제와 엄비, 순종황제와 순종효황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존영 사진과 3.1운동 당시 정교하게 제작된 접이식 태극기다. 대한제국 구명시식 도중 익명의 독지가에게 기증받은 귀중한 자료다.

황실 존영 사진 세 점은 대한제국 내무성에서 제작해 배포한 것이다. 사진에는 '이태왕 전하·엄비 전하·이왕전하·윤비전하·이왕은 전하·방자여왕전하'라고 명기되어 있다. 일제가 황실 존영 사진에서 자두꽃 금박 문양을 없애버린 1932년 이전에 제작된 걸로 보인다. 현존하는 황실 존영 사진 중 이처럼 자두꽃 금박 문양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은 드물다.

3.1운동 당시 사용된 휴대용 태극기도 눈길을 끈다. 펼치면 깃대가 30cm에 이르지만 접으면 10cm로 줄어든다. 이를 무명 주머니에 접어서 도포자락에 숨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차 법사는 "이 태극기는 당시 일제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만세 운동을 전개해야 했던 긴박한 상황을 느끼게 한다. 3.1운동 당시 평택 지역에서 썼던 태극기"라면서 "이 태극기와 대한제국 황가 존영 사진 세 점이 함께 기증됐다. 이는 3.1운동이 대한제국 회복 운동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