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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April 2, 2012

korea Government-General was cracked down the kidnappers. -The Dong-a 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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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대의 경제성장 [차명수 영남대 교수] 6
Category : 【 전재 기사 】 Tag :
식민지 시대는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을‘수탈과 착취’했던 제로 섬 게임의 시대였고,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점점 더 못 살게 되고 일본 사람들은 더 잘 살게 되었다는 생각은휴전선 남쪽과 북쪽에서 모두 상식이 되어 있다. 그렇게 된 중요한 한 이유는 남북한 정부가 각각 검정한 역사 교과서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의국민계정 추계는 이런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보였다. 1941-45년의 전쟁기간에대해서는 1인당 생산을 추계할 수 없지만,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새로운 총생산 및 인구추계는 식민지 시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911-40년 동안에 1인당 생산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1인당 생산 증가의 이면에서 일본인들의 소득이 증가하면서 조선인들의 소득이 감소하는 극단적 소득분배의 불평등화가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사람들의 소득이 일본 사람들의 소득보다는 느리게 증가했지만, 조선인들의 평균적 생활수준은 향상되었다. 식민지기에는 전체 자산에서 일본인 소유 자산의 비중이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는 식민지 권력이 조선인의 자산을 수탈해서 일본인들에게 분배하거나 조선인들이 가난해져서 자산을 일본인들에게 팔아 넘긴 결과가 아니었다. 이는 유입된 일본 자본이 한국에 새로운 생산설비를 건설하고 자본스톡을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필자는 이런 사실들이 역사 교과서에 제대로 반영되고 근거 없는 주장들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북한 역사 교과서가 입을 모아 가르치고 있는 또 하나의 가설은,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이것이 일제의 착취와 수탈로 짓밟혔다는 것이다. 그런데최근의 경제사 연구는 18, 19세기에 인구는 정체했으며 생활수준은 하락했을 가능성이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식민지 시대에 인구가 매년 1.33%, 1인당 생산이 2.37%의속도로 증가했던 것과 커다란 대조를 이룬다. 이는 남북한 역사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조선 후기는 정체, 식민지기는 발전의 시대였음을 알려준다.

1930년대 공업화 과정에서 상당 규모의 자본이 북한지역에서 축적되었는데, 해방 후남한은 북한지역의 자본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또 1950년 북한의 남침은 남한에 남아 있던 자본마저 상당 부분 파괴해 버렸다. 그래서 허수열(2005)은 식민지 시대와 해방후 남한의 경제성장을 식민지기 성장의 연장선상에서 보려는 것은 무리이며, 두 시기는단절된 시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식민지 과거와 최근 반 세기는 공장이나 철도처럼 금방 눈에 띄지는 않지만 끊기 어려운 고리들로 연결되어 있다.

우선,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식민지기 동안 계속된 사망력 변천은 결국 해방 후 남한의출산력 변천을 가져오고, 이는 부양률을 하락시켰다. 그 결과 저축률과 투자율 상승이 급속히 상승하고 빠른 자본축적이 진행되면서 고도성장이 진행되었다.

둘째, Acemoglou,Johnson & Robinson(2001)은 유럽 국가들의 지배를 받은 지역에는 식민지기의 제도가 독립 후에도 유지 존속되어 독립 후 경제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였다. 그리고 그 중요한 한 이유는 식민지기에 형성된 근대적 엘리트들이 독립 이후에 자신들의 모태가 된 식민지기의 제도를 유지시킬 강한 인센티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지배를 받은 한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남한 경제발전의 토대가 된 근대적 시장경제 체제는 식민지기에 형성된 것이었다(Cha2000). 그리고 식민지기에 출현한 장교, 관리, 판사, 검사, 경찰들은 해방 후 남한의 시장경제 체제를 공산주의 체제로 전환시키려는 북한군과 빨치산의 노력을 저지한 핵심적세력이 되었다.

셋째, 식민지기에는 근대교육이 보급되고 근대적 행정 사법 기구, 공장에 취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인적 자본이 축적되었다. 식민지기의 문맹률 감소, 취학률 증가, 조선인 기술자∙기능공∙숙련공 증가가 이를 보여주는 지표인데(古㼓 1996; 안병직1993), 인적 자본스톡의 크기와 증가속도를 측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식민지 시대에 근대적 경제성장이 일어났다는 말은 식민지 통치가 근대적 경제성장을가져왔다는 말과는 다르다. 맬더스적 정체에서 근대적 경제성장으로의 이행은 한국합병이전, 갑오개혁 이후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사망률이 떨어지면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1898년부터였다. 지대와 임금의 하락이 멈추고 상승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이우연 2001; 차명수 2001). 실질 논가격 하락추세가 상승 추세로 반전된 것은 이보다 더 빠른 1880년대였다(차명수∙이헌창 2004:161, 그림 7-A).

그러나 이는 내재적 발전론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밖으로부터의 근대문명의 충격과 이에 자극을 받은 위로부터의 개혁의 결과였다. 우선, 청일전쟁 이후 일본으로부터의 자본유입이 급증했는데, 이 중 상당 부분은 조선에 대한 토지 투자였다. 일본인 지주들이 가지고 온 일본품종 벼가 1890년대 후반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이는 1900년경 이후의 지대와 임금의 하락 추세를 상승 추세로 반전시키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오두환 985: 337-38). 둘째,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 아래 놓인 조선정부는 부국강병을 위해 인구증가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보건위생 개선정책을 실시했다(신동원 1996).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기전에 근대적 경제성장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한국이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맬더스의 덫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근대적 경제성장은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빨라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첫째, 1876년 개항을 계기로 선진 생산기술의 전파를 가로막는 장벽들이 철거되기 시작했는데, 1910년 합병은 이 장벽들을 거의 완전히 무너뜨렸다. 식민지 지배와 함께 외국인(특히 일본인)들의 대조선 투자에 따르는 정치적 위험(political risk)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자본유입이 증가했을 것이다. 또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자본이동뿐 아니라 노동력 이동도 급격히 확대되었다. 특히 일본인 기술자와 숙련 노동자들의 조선유입, 조선인노동자들의 일본 이민을 통해 기술전파 속도는 더욱 빨라졌을 것이다. 식민지기 무역은완전한 자유무역이 이루어지던 개항기에 비해서는 보호무역주의적이었지만, 1950,1960, 1970년대의 남한에 비해서는 훨씬 자유무역주의적이었다.

둘째, 조선총독부는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도입하고, 근대적 재정통화제도를 확립했다.아울러 조선총독부는 철도, 도로, 항만, 교통, 통신 설비를 확충해 나갔다. 이런 정책들은 시장경제를 발전시킴으로써 자원배분을 효율화하고 기술습득 및 개발을 자극함으로써경제성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총독부는 세율인상을 통한 세수확대, 일본 자본시장에서의 자본도입을 통해 공공투자를 늘려 나갔는데, 이는 총 투자율을 올림으로써 경제성장에 기여했을것이다. 일본정부가 제공한 보충금 등의 경상 이전과 사업공채의 발행은 만성적 적자에 시달리던 조선총독부의 재정 상황을 호전시켜 공공투자 확대를 도왔을 것이다.
출처 :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제13장 경제성장∙소득분배∙구조변화 [차명수 영남대 교수]
대한민국 헌법과 일본국 헌법 전문의 비교
Category : 미분류 Tag :
대한민국 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일본국 헌법 전문
일본국민은 정당하게 선출된 국회에서의 대표자를 통해서 행동하고, 우리와 우리의 자손을 위하여, 전국민의 협력과 화합에 의한 성과와 우리나라 전토(全土)에 걸쳐서 자유가 가져다 주는 혜택을 확보하고, 정부의 행위에 의해 다시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함을 결의하고, 이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선언하고, 이 헌법을 확정한다.

본디 국정(國政)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국민으로부터 그 권위가 유래하고 , 국민의 대표자가 그 권력을 행사하며, 국민이 그 복리를 누린다. 이는, 인류보편의 원리로서, 이 헌법은 이러한 원리에 바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반(反)하는 일체의 헌법, 법령 및 조칙(詔勅)을 배제한다.

일본국민은 영구한 평화를 염원하고, 인간상호의 관계를 지배하는 숭고한 이념을 깊이 자각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전국민의 공정과 신의를 신뢰하여, 우리의 안전과 생존을 지키고자 결의했다. 우리는 평화를 유지하고, 전제(專制)와 예종(隷從), 압박과 편협을 지상에서 영원히 제고하고자 노력하는 국제사회에 있어서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하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전세계의 국민이 모두 공포와 결핍으로부터 벗어나, 평화 속에서 생존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우리는, 어느 나라도 자국 일에만 전념하여 타국을 무시해서는 안 되며, 정치도덕의 법칙은 보편적인 것으로, 이 법칙에 따르는 것은 자국의 주권을 유지하고 타국과 대등관계에 서려는 각국의 책무라고 믿는다.

일본국민은 국가의 명예를 걸고 전력을 다해 이 숭고한 이상과 목적을 달성하기를 맹세한다.
誘引魔(유인마)의 跋扈(발호) [동아일보 1939년 3월 29일 제1면]
Category : 【 동아일보 】 Tag : 위안부
誘引魔(유인마)의 跋扈(발호)
一(일)
殘忍無道(잔인무도)한 저 白白敎徒(백백교도)의 罪相(죄상)이 아직 法(법)의 裁斷(재단)을 받기도 前(전)에 各種類似(각종유사) 宗敎事件(종교사건)이 疊出(첩출)하는가 하면 一方(일방)에는 處女誘引(처녀유인) 賣喫事件(매끽사건)이 不絶(부절)하고 잇으니 日昨(일작) 東大門署(동대문서)에서 摘發(적발)한 所謂(소위) 河允明事件(하윤명사건)과 西大門署(서대문서)에서 檢擧中(검거중)인 裵長彦事件等(배장언 사건등)은 그의 가장 顯著(현저)한 事例(사례)라 하겟다.

이들은 그 所行規模(소행규모)가 자못 크고 內容(내용)이 極(극)히 惡質(악질)의 것이나 其他群小事例(기타군소사례)는 一一(일일)히 指摘(지적)하기에 어려우리만치 數多(수다)하게 潛行(잠행)되고 잇어 진실로 우리 社會(사회)의 文化水準(문화수준)을 疑心(의심)하게하고 구태여 이런 것을 問題(문제)로 삼는 것부터가 벌서 自身(자신)의 苛責(가책)이크다.

二(이)
그러면 어째서 이같은 非人道(비인도),非合法(비합법)의 人間惡(인간악),社會惡(사회악)이 演出(연출)되고 잇는가? 이것은 무엇보다 첫재로 그 當事者(당사자)들의 罪過(죄과)를 들지 안흘 수 없을 것이다. 먼저 黃金(황금)의 威力(위력)에 手段(수단)을 가리지 못하고 가진 詐行(사행)을 敢行(감행)하는 人肉商(인육상)들의 罪惡(죄악)은 唾罵(타매)하고 膺懲(응징)하여도 오히려 不足(부족)한바 잇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그 對策(대책)을 말한다면 그 誘引魔(유인마)들로 하여금 改悛(개전)케하고 退治(퇴치)하야 再現(재현)을 防止(방지)하는 것이 第一義(제일의)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絶對(절대)로 根本的(근본적)退治策(퇴치책)은 되지못한다. 그 理由(이유)는 한 사람의 誘引魔(유인마)와 한 黨(당)의 誘拐團(유괴단)을 抑壓(억압)햇다고 해서 그 類似分子(유사분자)가 醱酵(발효)할 만한 社會的溫床(사회적온상)이 備置(비치)되어 잇고 그 陷井(함정)에 射落(사락)되지 안흘 수 없는 濟經條件(제경조건)이 잇다면|아니 이 地上(지상)에 無知(무지)와 悲慘(비참)이 存在(존재)하는 동안에 잇어서는 이와 類似(유사)한 性質(성질)의 事件(사건)이 恒常繼續(항상계속)될 것이며 오직 다만 場所(장소)와 사람을 바꾸어서 나타나고 잇을는지도 모른다.


三(삼)
그러니 먼저 誘引魔(유인마)의 跋扈(발호)를 沮止(저지)한다는 것은 重言(중언)할 餘地(여지)가없고,現在司直(현재사직)이 이 點(점)에 留意(유의)하는바 없지 안치마는 앞으로도 一段注力(일단주력)하여야 할 것이다。그러되 우리가 日常(일상)에 잇어서 遺憾(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늘 朝鮮(조선)의 警察行政(경찰행정)이 한便(편)으로 기우치지 안는가 하는 것이다.



換言(환언)하면 社會(사회)의 不安(불안)을 除去(제거)함에 잇어서 從來(종래) 思想對等(사상대등)에는 萬全(만전)을 期(기)하엿 지마는 鄙近(비근)한 雜犯(잡범)의 措置(조치)에 多少不徹底(다소불철저)한 感(감)이없지 안헛다。

純眞(순진)한 農村處女(농촌처녀) 하나를 또는 虛榮(허영)에 날뛰는 都市(도시)의 少女(소녀) 하나를 脫線(탈선)케 한것이 그다지 큰 問題(문제)가 아니라면 이것은 큰 잘못이다. 그것을 다만 正當(정당)치 못한 個人間(개인간)의 한가지 契約(계약)이라고만 돌릴 수 없는것은 勿論(물론) 性道德(성도덕)을 破壞(파괴)하고 社會秩序(사회질서)를 侵蝕(침식)하는 害毒(해독)은 그 影響(영향)이 어느 것보다 結斷(결단)코 적은 것은 아니다. 勿論(물론) 이때까지 이런 事件(사건)을 만히 摘發(적발)하엿고 또 犧牲(희생)된 少女(소녀)들의 勞苦(노고)가 적지 안흔 것을 記憶(기억)하는 바이나 앞으로 좀더 이 方面(방면)의 掃淸(소청)이 必要(필요)하다는 것이 또한 無理(무리)는 아닌 것이다.


四(사)
끝으로 거듭 말하는 것은 誘引魔(유인마)가 跋扈(발호)하지 못하도록 適正(적정)한 社會的(사회적) 調整策(조정책)을 잊지말어야 하겟다는 것이다.""法律(법률)과 風習(풍습)에 依(의)하야 어떤 永劫(영겁)의 社會的處罰(사회적처벌)이 存在(존재)되고 그리하야 人爲的(인위적)으로 地獄(지옥)을 文明(문명)가운데 맨들어 노코 聖(성)스러운 運命(운명)을 世俗的因果(세속적인과 )에 依(의)하야 紛糾(분규)시키는 동안에 잇어서는 그런 性質(성질)의 事件(사건)이 繼續(계속)되리라는"빅톨,유고"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안코 또는 誘引(유인)하는 者(자)나 或(혹)은 誘引(유인)되는 者(자)의 責任(책임)을 곧 社會(사회)에 轉嫁(전가)시키지 안는다고 해도 그 個人(개인)을 問責(문책)하는 同時(동시)에 社會(사회)가 또한 連帶的責任(연대적책임)을 저야만하게 되는 것이 잘못이 아니요 當然(당연) 또 當然(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宗敎的情緖(종교적정서)를 가젓고 經濟的條件(경제적조건)이 生活(생활)을 支配(지배)하는 때가 만흔 것인데 誘引(유인)되는 動機(동기)가 모두 無智(무지)하엿고 環境(환경)이 悲慘(비참)하엿기 때문에 두가지의 貫革(관혁)에 失敗(실패)하엿던 것이다. 이 點(점)을 看取(간취)한다면 當局(당국)은 좀더 그들을 指導(지도)하고 未然(미연)에 防止(방지)하려는 全般的對策(전반적대책)을 어찌 樹立(수립)하지 안흘 수 잇으랴.
출처 :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동아일보 1939년 3월 29일 제1면
人身賣買敢行(인신매매감행)하는 惡德紹介業(악덕소개업)에 鐵槌(철퇴) [동아일보 1939년 3월 12일 조간]
Category : 【 동아일보 】 Tag : 위안부

출처 :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동아일보 1939년 3월 12일 조간 제2면
명성황후는 명례궁 수입의 88%를 당오전으로 충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출은 수입 291만 량을 훨씬 초과하는 444만 량이었다. 식료비는 354만 량 이며 총지출의 79%에 달하였다.
Category : 【 명성황후 明成皇后 】 Tag : 이영훈
1855년부터 조선왕조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農業生産(농업생산)이 급속하게 감소하고, 物價(물가)가 지속적으로 치솟고, 市場(시장)이 분열하였다(李榮薰 2007). 이 위기의 기간에 명례궁의 수입은 <표1>에서 보듯이 1853-1854년 32,954량에서 1892-1893년 2,916,290량으로 무려 88배나 팽창하였다. 동기간 물가도 급하게 치솟았다. 예컨대 米(쌀) 1석의 가격은 6량에서 138량으로 23배나 올랐다. 이를 감안하면 명례궁의 실질 수입은 동기간 3.8배 증가하였다.

위기의 시대를 반영하여 宮房田(궁방전)으로부터의 실질 수입은 감소하였다. 액면으로는 8,742량에서 184,824량으로 21배 증가하였지만, 물가가 23배나 올랐기 때문이다. 정부의 공상도 액면으로 8.5배 증가하였지만 물가의 상승폭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위기의 시대에 정부재정의 형편도 악화되었기 때문이다.(*5) 그런 가운데 명례궁의 실질 수입을 3.8배나 끌어올린 것은 왕실로부터의 內下(내하)였다. 내하가 1892-1893년에 연평균 257만 량을 초과한 가운데 총수입의 88.2%를 차지하였다.

명례궁에 대한 왕실의 내하는 이전에도 있긴 했지만 비정기적이었다. 대개 銀(은)으로 내려졌는데, 때때로 다른 현물일 수도 있었다. 받자책에 의하면 錢(전)의 형태로 내하가 매년 행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1882년부터이다. 이후 1894년까지 內下(내하)의 추이를 제시하면 [그림2]와 같다. 이에서 보듯이 내하는 1882년 38,100량에 불과하였는데 1887-1888년에 연간 50만 량을 넘었으며, 1891년 이후 급증하여 1894년에는 270만 량 이상의 거액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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