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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anuary 14, 2014

Korean whores in US camp, the korean comfort stations

cnn기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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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일곱집매>

‘일곱집매’는 일곱 집이 다정한 자매처럼 살았다고 해서 불려진 안정리의 옛 이름. 연극은 과거 평택 안정리 캠프 험프리 부근 기지촌을 배경으로 한다. 미군을 대상으로 일했지만, 지금은 독거노인이 되어 방치된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7개의 작고 허름한 방에서 첫 장면이 시작된다.



그곳에 한국 기지촌 여성 인권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한 자료 조사차 하나가 찾아온다. 그가 과거 기지촌 할머니들과 현재 클럽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 선희, 미군기지 공사장에서 일하는 춘권 등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연극의 배경이 되는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는 일본군 군사비행장이 있었던 곳.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미국 공군 비행장이 들어섰다. ‘양공주’ ‘양색시’라 부르며 손가락질하는 사회적 편견 속에서 스스로 죄의식을 키우며 산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다. (서울 대학로 연우소극장/070-8236-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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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기지촌에서 살다 간 어느 혼혈인의 죽음
옛 미군 기지촌에서 이제 혼혈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입양·이민을 가거나 자살·객사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파주 선유4리의 김종철씨도 기구하게 살다 세상을 떠났다.
변진경 기자 |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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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승인 2008.08.26 11:2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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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한향란
고 김종철씨의 장례식. 한 이웃이 지적장애인인 그의 돈을 빼앗기 위해 찍게 한 증명사진이 영정이 됐다. 한 지적장애인 혼혈인이 있었다. 미군 기지촌에서 태어나 48년을 살다 8월15일 숨진 고(故) 김종철씨. 무연고 장으로 치를 뻔했는데, 유일한 혈육인 동생 김민수씨(가명·39)가 나타나 빈소를 지켰다. 동생과 마을 사람 등이 증언한 김종철씨의 기구한 삶과 죽음을, 동생 김민수씨의 일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형이 죽었다. 2008년 8월20일 새벽 6시, 경기시 파주시 문산장례식장 5호실에 내가 서 있다. 영정 사진 속 형은 피부가 검고 입술이 두껍다. 상복을 입은 나는 평범한 한국계 얼굴이다. 우리는 어머니가 같다. 파주시 문산읍 선유4리 옛 미군 기지촌에 살던 어머니는 아홉 살 터울로 우리 형제를 낳았다. 형과 나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각자 아버지가 다르다는 건 안다. 형의 아버지는 흑인이고 내 아버지는 한국인이다.

우리 형제의 고향은 ‘미군 기지촌’이라 불렸다. 바와 클럽, 햄버거 집, 세탁방이 일렬로 늘어선 거리에는 늘 외출 나온 미군이 북적였다. 어릴 적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우리 형제는 이웃의 한 할머니 밑에서 미군에게 껌을 팔며 생계를 이었다. 나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지만 ‘10살 미만의 지능을 가진 흑인계 혼혈인’ 형은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1995년, 길러주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고향을 떠났다. 그로부터 9년 후 미군 기지가 철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4년이 더 흐른 2008년 8월에는 48년간 고향을 지키던 형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돈이 화근이었다. 가족도, 집도, 정신도 없이 살던 형을 위해 마을 어르신이 모아준 기초생활수급비 1200여 만원이 형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동네 사람들 가게 물건도 날라주고, 물도 떠오고, 눈이 오면 동네에 쌓인 눈도 치우던 형이었다. 허드렛일로 한푼 두푼 마을 사람들에게 용돈을 받으며 살던 형은 1년 전쯤부터 술이 늘기 시작했다. 마을 재개발로 빈집이 많아지자 외지인이 싼 월세로 그곳에 들어왔다. 형은 그들 중 몇몇과 어울리며 매일 술을 마셔댔다.

형은 발가벗은 채 튕겨져 나왔다

형의 ‘술친구’ 중 한 명이 나쁜 마음을 먹었다. 정 아무개씨는 형 명의의 기초생활수급비 통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김종철’ 이름 석 자밖에 쓸 줄 모르는 형을 데리고 증명사진을 찍고, 동사무소·농협에 데려가서 통장 분실신고를 내고, 현금카드를 만들었다. 돈 400여 만원을 뽑아 자기 오토바이와 어머니를 위한 순금 팔찌, 아버지를 위한 손목시계를 샀다. 8월14일, 동네 주민이 신고해 정씨는 사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그날 경찰서에서 동네 사람들은 형을 지적장애인으로 등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장애인 수당이 나오고 정씨의 처벌도 더 강해진다는 말에 다음 날 큰 병원에 가서 정식 진단을 받게 하기로 했다. 형을 이발시키고 속옷도 사서 갈아입혔다. 자고 내일 보자고 마을에서 만들어준 방에 형을 데려다줬다. 저녁에 형은 방을 나와 또 술을 마셨다. 자기 돈을 빼앗은 정씨와 또 다른 ‘술친구’인 김 아무개씨(50)가 형과 함께 있는 걸 주민이 목격했다.

이튿날인 8월15일 새벽 0시30분쯤, 마을 사람 5명은 김씨가 세들어 사는 방에서 형이 발가벗은 채 튕겨져 나오는 걸 봤다. 누가 세게 민 것 같았다고 한다. 형은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를 땅에 크게 부딪친 뒤 의식이 없었다. 김씨가 형을 질질 끌어 방에 집어넣고 문을 잠근 후, 경찰이 왔다. 경찰은 당시 형이 눈을 뜨는 걸 보고 돌아갔다고 주장한다. 목격자들 말은 다르다. 열린 문 사이로 안을 쓱 보더니 ‘술 취했는데 자게 냅둬’라고만 했단다. 광복절인 그날 아침 8시40분쯤 형은 뇌출혈로 숨진 채 발견됐다. 김씨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저녁 때 함께 술을 마신 정씨가 경찰에 신고했다.

마을 사람 몇몇은 김씨가 정씨처럼 형 돈을 빼앗으려다 죽인 것이라고 의심한다. 8월14일 밤, 정씨 사건으로 형에게 돈이 있다는 걸 안 김씨가 형에게 방 보증금 100만원을 빌려달라고 채근했다는 것이다. 형이 그날 밤 자기 통장을 관리해주는 ‘바비 할머니’(70) 집 앞에서 뱅뱅 도는 걸 누가 목격했단다. 평소 잔소리를 많이 하는 바비 할머니가 무서워서 형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형과 비슷한 나이의 혼혈인 아들을 둬 형에게 애착을 가졌던 바비 할머니는 “겨울에 따뜻하게 잘 집 한 칸 마련해주려고 수급비를 모아줬는데… 이 돈이 종철이를 죽게 만들었다”라며 장례식 내내 흐느꼈다.

주민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

생전에 형은 동네에서 인기가 좋았다. 약장수가 와 음악을 틀면 신나게 춤을 잘 췄다. 술을 많이 먹어도 남한테 해코지 한번 하는 일이 없었다. 2004년 MBC <생방송 화제집중>에 나온 뒤로 형은 동네에서 스타가 됐다고 한다. 식당에서는 밥을 주고, 편의점에서는 라면을 주고, 청년회에서는 컨테이너 방을 마련해줬다. 겨울에 전열선 코드를 안 뽑고 외출하는 형을 위해 밤 9시에 켜지고 아침 9시에 꺼지는 자동타이머까지 만들어줬다. 마을 어른 한 분은 동네 사람이 형에게 가진 부채 의식을 얘기했다. “종철이는 피해자다. 종철이 같은 아이를 만든 우리 모두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 보살펴줬는데 부족한 점이 많았다.”

사실 난 형이 끔찍이 싫었다. 밖에서는 착한 형이었지만 나에게는 폭력을 많이 휘둘렀다. 서로를 싫어했다. 같은 뱃속에서 났지만 씨가 다르다고 생각하니 형이 원수 같았다. 형이 때릴 때면 나도 피부색을 들먹이며 형을 욕했다. 친구가, 친구 여동생이, 친구 부모님이 나와 형을 안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다. 지금도 고향 친구 집에 가면 친구 부모님 앞에서 괜스레 주눅이 든다. 애를 셋 낳았는데, ‘저런 놈이 애를 뭘 그리 많이 낳았나’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 같다. 1999년에 결혼한 아내도 내 형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 아이들은 아직 삼촌의 존재를 모른다.

매일 껌을 팔고 구걸하고 미군 벙커에서 자는 지긋지긋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나는 미군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와 형이 먹고살아가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 거지 취급하며 주든, 예뻐하며 주든 뭘 주는 건 그들밖에 없었다. 미군이 학대해도 내가 아쉬워서 구걸하는 것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형은 나보다 미군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장가 안 가냐”라고 물으면 “장가가면 뭐해, 깜둥이나 낳을 것을”이라고 대답했다고 청년회 총무가 전했다.

형도 가고, 선유4리도 곧 사라진다. 2년 전 근처 당동리에 LG필립스 협력업체 단지가 들어서면서 마을은 상업·주택 지구 재개발 붐으로 들썩였다. 부동산 가게가 40군데 개업하고 땅값은 평당 1000만원까지 올랐다. 8월20일 오후, 형 장례식을 치른 뒤 나는 드문드문 가게를 지키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형에게 밥을 준 매운탕집 아주머니와 돈을 잘 쥐어준 철물점 아저씨, 아직도 눈물이 글썽이는 편의점 주인 부부 등 형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분들 앞에서 처음으로 내가 형의 동생임을 밝혔다. 이웃은 “형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울었다. 형과 고향이 싫어 도망쳤던 나는 그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바비 할머니와 형 유품을 갖고 승강이를 벌였다. 형은 빼앗기고 남은 수급비 800여 만원을 남겼다. 형이 죽자 사기 피의자 정씨가 겁을 먹고 이장님께 반환한 오토바이와 금팔찌·시계도 유품이 됐다. 형을 죽게 한 수급비는 장례비용으로 쓰였다. 내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남은 돈과 귀금속을 국가에 귀속시키거나 펄벅 재단에 기부하려 했다고 한다. 나는 절대로 받지 않겠다고 하는데 동네 분들은 조카가 학교 다니는 데 삼촌이 남긴 돈을 쓸 수 있으면 좋지 않으냐고 나를 설득했다. 그래도 받지 않고 떠났다.

8월20일 오전 10시 벽제 화장터. 형의 관이 불 속에 있다. 영정 사진을 가만히 본다. 죽기 바로 며칠 전, 사기 피의자 정씨가 돈을 빼앗기 위해 형을 사진관에 데리고 가 찍은 사진이다. 그게 영정 사진이 됐다. 마지막으로 형을 본 건 지난 설 때였다.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만났다. “밥 먹었어?” “응.” “요새도 술 많이 먹어?” “아냐.” “많이 먹지 마.” “안 먹어.” 형이 싫어 떠났지만, 살면서 형을 잊은 적은 없다. 나는 형의 시신과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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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기지촌 여성의 생생한 육성 기록
기사입력 2013-06-14 18:50기사수정 2013-06-14 18:50 트위터페이스북싸이월드확대 축소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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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기지촌 여성의 생생한 육성 기록>

신간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출간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인 미군 기지촌 문제를 생생한 증언과 함께 기록한 책이다.

자기 실명을 밝힌 기지촌 출신 여성이 책을 엮은 김현선 씨와 함께 처음 인신매매돼 간 곳인 ‘파주 용주골 기지촌’부터 마지막 기지촌인 ‘동두천 보산리 기지촌’까지 전국의 기지촌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자신이 겪은 기지촌 여성으로서 삶과 고통에 대한 기억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기지촌 출신 여성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사실 그녀에게 ‘그곳’을 방문하는 것은 마음의 상처를 다시 떠올리는 일이다.

이 책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거나 감정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비언어적 표현’까지 모두 기록했다. 그래서 그녀의 인생과 고통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저 문산 장파리에는 미군들 훈련 가는 데…. 클럽에 나가면 미군들 훈련장에 쫓아가래. 그럼 산을 넘어서 (중략) 하늘을 지붕으로 삼고, 땅을 방바닥으로 삼고, 그러면서 미군을 받았다…. 동지섣달에 구덩이를 이렇게 파구서, 거기에 들어가 팔으라 하면 팔고…몸을…한 놈 하고 나면은 고담에 또 딴 놈, 또 딴 놈, 또 딴 놈 (중략) 살아온 게 진짜…죽지 않고 여기까지 이 나이 먹도록 살아온 것만 해도 진짜…참…살아온 게 미쳐버리겠다…흑흑흑….”(102∼103쪽)

그녀는 “기지촌 언니들의 삶을 알리고자 증언을 결정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기지촌에 대한 자료나 서적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지촌의 문제가 아직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책은 미군 감축이 단행됐던 1970년대 초 정부가 각 기지촌에 성병진료소를 설치하고 미군의 ‘위안시설’들을 재정비한 사업은 국가가 직접 나서 건강한 ‘양공주’ 기지를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권인숙 명지대 교수는 추천사에서 “국가폭력의 실상을 알리고 미군 위안부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져 우리 사회가 진심으로 이들에게 사과하고 포옹하도록 이끄는 제물로 제대로 쓰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고 썼다.

한울아카데미. 344쪽. 2만8천원.

changyong@yna.co.kr

公開日: 2012/08/31
(서울=News1) 하지수 기자=1960~70년대 미군이 국내에 주둔하던 시절 기지촌 성매매로 정신적·육체적 충격을 당한 여성들의 인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기지촌여성인권연대'가 31일 발족식을 가졌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성매매근절을 위한 한소리회, 두레방 등 7개 단체로 이루어진 기지촌여성인권연대는 이날 서울 종로구 흥사단에서 4년여간의 준비기간을 마치고 출범을 선언했다.

이들은 과거 '외화벌이의 주역'이라는 미명 아래 인권 사각지대 속으로 떠밀렸지만 정부로부터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 기지촌에서 일했던 엄숙자 할머니는 "젊었을 때 우리가 늙으면 정부에서 집도 지어준다고 하더니 그 말을 한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 갔느냐"며 "우리는 꽃 같은 인생을 나라에 바친 거나 마찬가지다"고 울분을 토했다.

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처럼 우리도 외국 군인에 의한 피해자라"며 "쌀이라도 줘서 먹고사는데 걱정을 덜 하게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유영님 기지촌여성인권연대 상임대표는 "우리가 함께하는 이 순간들이 기쁨과 화해의 길, 나와 너의 치유의 길이 되고있다"며 "우리가 가는 길을 지켜보며 '같이 걷고싶다'고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환영한다. 우리의 여정에 많은 분들의 동참을 바란다"고 눈물을 참기도 했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는 축사를 통해 "입을 닫고 있다고 역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며 "한국과 미국정부에 요구할 것이 있으면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도 그동안의 경험을 교과서 삼아 기지촌여성인권연대와 손잡고 열심히 길을 걷겠다"며 "식민주의를 좋아하고 꿈꾸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우쳐주겠다"고 의지를 보였다.

기지촌여성인권연대는 앞으로 기지촌 성매매 피해여성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한미 양국 정부를 상대로 기지촌 여성들의 개별적·집단적인 소송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기지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061회_3 섹스 동맹, 기지촌] 2003.02.09
이제는 말할수 있다 섹스 동맹 기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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