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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에 보는 한국 남성 정장의 역사
셔츠 트렌드서칭 2013/07/10 09:33
패션시대인 요즘 남성복도 눈이 부시게 진화하고 있어요. 주변만 살펴봐도 다양한 남성 패션 브랜드 매장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요. 사실 한국의 남성 정장의 역사는 100여 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답니다.
오늘은 우리에겐 익숙한 이 남성 정장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해요. 바로 대한민국의 남성 정장의 역사말이죠. 여러분도 은근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도대체 언제 들어왔는지, 어떻게 발전을 해왔는지.
매일 혹은 자주 입는 남성 정장. 오늘부턴 우리나라의 역사 정돈 알면서 입는 것은 어떨까요?
1. 한국 남성 정장 역사의 시작
우리나라의 정장의 시작 시점에 대해선 2가지 관점이 있어요. 하나는 우리 땅에 정장을 입고 들어온 때, 쉽게 말해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교류를 시작한 문호개방의 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양복을 제도로서 허용한 시기이냐의 문제인데요. 흔히 우리나라 양복의 시작이라고 하면 보통 제도로서 허용한 1895년을 기준으로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종황제 대례복고종황제 연미복
* 고종황제의 대례복(좌), 연미복(우)
1895년은 우리 역사에 피 눈물이 맺힌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벌어진 해이기도 한데요. 이 사건으로 친러시아 세력이 물러나고 친일세력이 내각으로 자리잡게 되죠. 이 후 내각은 고종을 설득해 개혁조치를 내리게 했는데요. 이 개혁조치의 3가지 포인트는 음력 폐지, 단발령, 그리고 바로 외복제도에 대해 외국제를 사용해도 무방하게 하는 양복 공인이었답니다.
2. 양복에 대한 반발
1895년 양복착용이 공인된 후, 이에 대한 반발은 무척이나 강했어요. 이 당시의 분위기는 양력을 쓰고 머리를 깎으며 양복을 입는 일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민족적 의분이라고 까지 생각했었죠. 이에 따라 독립신문을 포함한 각종 언론에서 문호개방에 대한 긍정적인 모습을 선전하기 시작했고 관복 또한 새롭게 양복화된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답니다.
이 후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양복은 곧 매국의 상징이 되어버리고 말았는데요. 친일파의 조직인 일진회의 지나치친 의식개혁 운동이 국민들의 증오를 한층 더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서양의 물결은 어떤 내부적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는 상황이 이어졌으며 양복은 점차 우리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답니다. 19세기 말부턴 서울을 비롯한 평양, 부산 등의 대도시에서 양복점이 생겨난 시점이기도 하죠.
3. 양복의 확산
1919년 3월 1일, 삼일독립운동은 문화적 측면에서도 일대의 전기가 되었습니다. 삼일 운동 이후 사회 풍속의 급전으로 구시대와 신시대의 윤리적 충돌이 현저하게 나타났는데요. 1920년대에 들면서 남성 정장의 수요는 급격하게 증가되었고, 양복점의 개설은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는 인기 직업이 되었답니다.
셋단추 정장 한국 정장 역사
이 시기에는 남성 정장에 대한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부쩍이나 늘어 기술을 가르치는 실습소는 대성황을 누리게 됩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중요도시에서 양복 실습소는 대박을 누리게 되었죠.
4. 양복의 발전 그리고 암흑기
1930년대 일제 하에서 양복업계는 그 규모가 커졌어요. 위에서 언급했듯 그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엄청 늘어났죠. 이 시기에 업계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배자나 피지배자 모두가 근대화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인데요. 이런 시대적 물결을 타고 양복은 전국에 널리 퍼져나갔답니다. 이런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까지 지속되었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경기침체가 이어지며 양복업계에서는 배급제가 실시되며 한인들이 운영하는 영세한 양복점이 수선방으로 전락해 우리 양복 업계는 암흑기를 겪기 시작했답니다.
5. 광복 후 새로운 진화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남을 날이에요. 이때 남성 정장 업계도 새로운 진화가 시작되었는데요. 그간 일본인들이 독점하던 양복 업계를 다시 찾은 것이죠. 우리 양복인들은 한자리에 모여 앞으로 양복 업계의 장래를 위해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발전에 대해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양복인들의 단체인 전선복장연구회가 태동하게 되었답니다.
6. 한국 전쟁 = 새물결의 시작
한국전쟁은 한국 남성 정장의 역사에 있어서도 일대 전기가 되었어요. 군복의 활용은 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졌으며 군복 등을 탈색해 입을 수 있었던 사람은 오히려 선택된 계층이기도 했죠. 하지만 사회의 엘리트 계층은 그래도 신사복을 입고 다녔답니다.
이승만 정장역사
또 하나의 패션 현상으로 해외에서 들어오는 구호품 의류의 착장을 들 수 있어요. 서양인이 입던 의류는 너무 커서 그대로 입을 수 없었기 때문에 줄여서 입는 시기가 도래했는데요. 당시 피난 양복인들은 부산에 모여 군복의 수선과 구호품의 사이즈를 줄여가며 생활을 이어갔답니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양복사에서 암흑기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시기야 말로 그 후 펼쳐진 새로운 물결에 밑거름이 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7. 맞춤정장의 전성기
1950년대 중반부터 붐이 일어난 양복의 수요는 1960년에 들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대도시는 물론 읍 단위의 작은 도시에서도 중심가에는 꼭 양복점이 들어섰죠. 이 시기에는 국내 복지회사가 계속 창설되 복지가 흔하게 됨으로서 판촉 활동이 활발하게 되며 양복의 기술 발전이 눈부시는 시기였답니다.
1967년 7월 스페인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 양복직종에 홍근삼씨가 참가해 금메달을 획득했는데요. 뜻 밖의 결과에 모든 양복인들이 기뻐했고 국위선양에 대한 자신감이 들뜨기도 했습니다. 당시 양복과 제화 부문은 입상의 기대조차 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모든 비용을 자비로 출전해야 했기 때문이에요.
이후 우리나라는 이 분야에서 내리 12연패의 위업을 달성했고 그만큼 국내 양복기술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답니다.
8. 근대 정장 이야기
1970년 초에 들어서며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불황을 맞게 됩니다. 시민들의 개념 또한 '입는다'라는 개념에서 '연출한다'는 개념으로 이전되었고 이에 따라 정장 문화는 새로운 전환점에 들어서게 되죠. 때문에 필연적으로 기술 향상과 고급화의 추세로 나가가기 시작했답니다.
더셔츠스튜디오 한국 공장
1980년대의 개막은 많은 도전과 희망을 맞은 시기에요. 1983년에 들어서면서 일부 대기업에서 대규모의 기성복을 제조하기 시작하며 양복업계에 충격을 주었죠. 이후 점차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가며 기성복 중심의 트렌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남성 패션 브랜드의 수가 증가하며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했고 셔츠와 넥타이 등을 전문적으로 파는 전문 브랜드도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여러분이 매일 그리고 자주 입는 현재의 정장&셔츠로 이어지게 되었답니다^^
'휴-' 19세기 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남성 정장의 역사에 대해 알아봤어요. 기나긴 여정을 한 눈에 정리하니 만만치 않네요^^; 저 역시 매일 정장과 셔츠를 입지만 이런 역사를 알기 전과 후의 느낌은 사뭇 다르답니다. 입을 때 마다 은근히 역사가 생각나면서 '과거엔 이랬겠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죠.
우리가 흔히 입은 정장. 멋스러움과 자기만의 개성을 뽐낼 수 있는 요즘.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며 선배, 선조들의 노력에 감사한 마음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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