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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ugust 14, 2012

national shameless in Gyonsuru year 庚戌国恥

庚戌国恥
경술(庚戌) Gyonsuru
경술국치(庚戌國恥)' : 1910년 8월29일

http://www.koreastory.kr/bbs/board.php?bo_table=book1&wr_id=12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경술국치)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후 일본에서는 하루빨리 조선을 완전 합병하라는 여론으로 들끓었고, 결국 일본은 1910년 7월 23일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제 3대 조선통감으로 보내었다. 외국 신문기자 프레데릭 맥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는 “이토 히로부미는 채찍으로 사람을 쳤지만 그는 쇠사슬로 사람을 칠 인물이었다.”라고 표현했다.

을사늑약 체결 5년 후,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는 일본의 탄압에 못 이겨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때, 한일합병 조약 체결 사실을 발표하게 됩니다. 당시 하늘에서도 일제의 강압에 의한 한일합병을 괴로워한 듯 1910년 운명적인 그해, 8월 10일을 전후해서 일본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곳곳에 산이 무너지고 제방들이 터져 강물이 범람하였으며, 철도와 도로가 불통되어 연락이 두절되는 곳이 속출하였다. 동경 일본 외무성의 시바타는 한국 강점을 위해 하루에도 여러 차례 서울의 통감부 통감 비서관 고다마 히데오와 전문을 주고 받았는데, 그 가운데 1910년 8월 14일 정오에 보낸 전문에도 당시의 심각한 수해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이번 수해는 심각해서 도쿄부 주변 및 인근 현의 상태는 필지(筆紙)로써 다 할 수 없음”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된 후, 일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했던 순종은 결국 일제와의 합병을 알리는 조서(詔書)를 발표했다.

“짐은 동양 평화를 위해,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써 양국이 서로 합쳐 일가를 이루는 것은 상호 만세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통치권을 모두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제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필요한 조문(條文)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한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받기 위해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위임하고 대일본제국 통감부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회동, 상의해 협조하도록 하노라. 여러 신하들도 또한 짐의 확실한 뜻을 본받아 시행하도록 하라.”

1910년 8월 22일 오후 2시, 창덕궁 대조전 흥복현에서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총리대신 이완용, 내무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대신 이재곤, 왕족대표 이재면, 원료대표 김윤식, 궁내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이병무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완용은 한일합병을 해야 하는 이유를 1시간 넘게 설명하였고, 이완용의 설명을 들은 대신들은 항의하지 않았으며, 통곡하거나 우는 자도 없었다. 총리대신 이완용은 이 날 한일합병안을 가결시키는 동시에 스스로 일한양국병합전권위원이 되어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관사로 찾아가 합병 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하며, 경술 9적이 국가와 백성을 배반하고 나라를 일본에 넘겨준 것이다. 윤덕영, 이완용, 한상룡, 조중응, 신흥우 등은 일본과 합병 한 것이 만족하다고 하였다. 참으로 대한제국의 멸망은 부정부패와 내부의 적 때문이었다. 이완용은 한일합병의 주역으로 훈 1등 백작과 잔무처리 수당 60여원,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 공채 15만 원을 받았다.

그때 나라 잃은 비통한 심경으로 한일합병 조항의 내용을 모두 소개해 본다.














제 1항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함.


제 2항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함.


제 3항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태황제폐하․황태자폐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기 지위에 응하여 상당한 존칭․위엄 그리고 명예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보지(保持)하기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함.


제 4항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과 기 후예에 대하여 각기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함.


제 5항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인으로서 특히 표창을 행함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금을 여(與)할 것.


제 6항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서 전연(全然) 한국의 시정을 담임하고 동지에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와 재산에 대하여 충분한 보호를 하며 또 기 복리의 증진을 도모할 것.


제 7항 일본국 정부는 성의와 충실로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하는 한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관리로 등용할 것.


제 8항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우증거(右證據)로 량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하는 것이다.





륭희(隆熙) 4年 8月 22日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印


명치(明治) 43年 8月 22日 통감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印


이 조약 또한 을사늑약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이다. 우리나라를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였으니 이보다 더 비참하고 부끄러운 문장이 또 어디 있을까.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강제로 순종에게 국새를 찍을 것을 강요하였으나 순종은 끝까지 거부하였다. 당시 순종 황제는 “한일 합병은 무효”라고 하면서, “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선포한 것으로 나를 유폐하고 협박하여 한 것이노라.”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한일합병조약 체결과 함께 제 27대 조선왕조는 519년 만에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한반도 전체는 하루아침에 남의 땅이 되었다. 2,300만 전 국민은 부모 잃은 고아처럼 불쌍하고 가련한 신세가 되어 생지옥같은 일제 식민통치하에 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4천 년 역사에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숱한 전쟁을 겪었으나, 외적이 이처럼 우리나라의 백성을 토막치고 강토를 짓밟으며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은 일은 처음이었다. 이것은 삼천리 금수강산을 삼키기 위해, 일제가 15년 동안 진행시켜 왔던 것이고 잔악한 일제의 침략 야욕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실로 1910년 8월 29일은 한일합병에 의해 국토와 국권이 완전히 박탈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국치(國恥)의 날이다. 나라의 국맥이 36년 동안 끊어지게 된 날이요, 왜적의 비참한 식민지 종살이로 굴러 떨어진 날이다. 이날 온 겨레는 찬란한 문화와 미덕의 나라가 사라져 가는 모습에 비탄에 젖어 통곡했다.

36년간 국권을 상실하면서 한꺼번에 몰아닥친 것은, 자유 박탈, 인권의 유린, 국혼의 상실, 말과 글과 이름의 상실 등 이렇게 우리나라는 너무도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일을 당했다. 실로 이 나라 백성과 땅은 한 세대가 넘도록 암흑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죽을 만큼 고생스러운 쓰디쓴 아픔을 이를 악물고 참아야만 했다. 36년은 너무나 길고 오랜 세월이었다. 궁궐은 폐허가 되어 잡초만이 무성했고, 망명한 백성들은 객지에서 온갖 고생과 푸대접 속에 방황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야만 했다. 국내에서는 빼앗긴 나라를 언제 다시 찾는다는 기약도 없이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 통치에 짓눌려, 억울하고 서러워도 대항 한 번 못 해보고 망국의 한과 설움을 톡톡히 겪어야 했다.










http://iqn.me/xe/m_history/2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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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회의 참석도 무산되고,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는 1907년 7/19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황태자 순종을 즉위시켰다. 그리고 5일 후인 7/24 일본인 관리를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으로 임명하고, 통감부가 내정을 직접 지배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둘러 한국을 완전히 빼앗을 목적으로 7/22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통감부에 이양하게 하였다. 7/24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신문지법을, 7/27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제정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무방비 상태에 두기 위해 7/31 대한제국 군부를 폐지하고, 8/1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일제의 완전병탄정책이 강행되던 1904년 여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항일의병무장투쟁은 1907년 8/1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급격히 고양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의병운동이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급속히 퍼지자 일제의 한국병탄정책은 심대한 타격을 받고 이에 대응하느라 일정이 지연되었다.

1909년 일제는 완전병탄정책을 다시 강화하기로 하고 이용구·송병준 등이 속한 일진회로 하여금 한일합방론을 제창토록 교사하였다. 초대 통감인 이토는 그 해 4/10 일본 내각총리 가쓰라, 외무대신 고무라 등과 함께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합의하였다. 1909년 6월 이토가 통감직을 부통감 소네에게 인계한 뒤 귀국하여 추밀원 의장직을 맡은 직후인 7/6, 일본 내각회의는 비밀리에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의결하고 즉시 일본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은 그 해 9월부터 2개월간 이른바 남한대토벌을 실시, 한국 의병들의 항전을 종결시킨 뒤 병탄을 마감 지으려고 획책하였다. 그러나 두 개의 큰 사건이 일어나 일제의 계획은 다시 차질을 빚게 되었다. 1909년 10/26 한국 병탄에 대한 러시아의 양해를 얻고 만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극동을 여행 중이던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와 회담을 하려고 만주 하얼빈에 갔던 이토가 한국인 의병대장 안중근에 의해 저격을 당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뒤이어 그 해 12/2 한국의 친일파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애국청년 이재명의 습격으로 중상을 당해 집무불능 상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제순이 임시내각총리대신서리를 맡았으나 친일내각 구성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일제는 그 해 12/4 동경에서 낭인단체인 고쿠류회(흑룡회)가 수상의 지시를 받고 초안을 작성, 수상 가쓰라의 검열을 받은 ‘한일합병에 관한 상주문’과 청원서·성명서를 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한 일진회 간부에게 주어 서울에서 발표하게 하는 등 한일합병 여론을 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애국계몽운동파가 총궐기하여 일진회 일당을 격렬하게 성토하고 일제의 의도를 규탄하여 일제의 한국병탄 기도는 다음해로 넘어가게 되었다.

1910년 3/26 일제는 안중근지사를 서둘러 처형하여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 사건을 종결지은 다음 서둘러 한국병탄을 강행하였다. 1910년 5/30 병약한 소네를 통감에서 퇴임시키고 현역 육군대장으로 육군대신인 데라우치를 통감으로 겸직하게 하였다. 또한, 6월 24일 박제순 내각에 강요하여 한국 경찰사무를 완전히 위탁하는 협정을 체결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경찰관제는 폐지되고, 통감부가 경무총감부를 설치하여 일반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하였다. 통감부는 헌병경찰제를 채택, 헌병사령관이 경무총장을 겸임하고, 지방의 헌병대장이 각도의 경찰부장을 겸임하게 하며, 헌병경찰수를 대폭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정부에 고용되어 있던 한국인 경찰관 약 3,200명, 일본인 경찰관 약 2,000명, 일본인 헌병 약 2,000명, 한국인 헌병보조원 약 4,000명, 일본군인 2개 사단 등의 무력을 전국 각지에 거미줄같이 배치, 한국인의 어떠한 반항도 탄압할 수 있는 무단 체제를 갖추었다.

7/23 서울에 온 제3대 통감 데라우치는 일본 수상으로부터 합병조약 초안의 대강은 물론, 합병 후의 대한 통치방침까지 내명받고, 한국에 온 즉시 한국인의 저항 발언을 봉쇄하기 위해 ‘대한민보’ 발행을 정지시키고, ‘대한매일신보’를 판매금지 시켰다. 이어서 7/29 부상에서 회복된 이완용을 다시 총리대신으로, 박제순은 내부대신으로 하여 이완용 내각을 구성하였다. 8/16 데라우치는 이완용과 조중응(농상공부대신)을 통감관저로 불러 이른바 합병조약의 초안을 보여 주고는 수락을 얻어서 비밀리에 의논한 뒤, 8/18 이완용 내각의 내각회의에서 합의를 보게 하였다. 드디어 1910년 8/22 서울거리에 15간 (약 27미터) 마다 일본 헌병들을 배치해 놓고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개최, 이른바 한일합병이란 안건을 이완용 내각이 결의하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 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조약체결을 숨긴 채,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29 이를 반포하였다.

한일합병조약의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일본국 황제폐하는 통감 자작 데라우치를,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의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전권위원은 합동협의하고 다음의 제조를 협정하였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황태자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 대하여 영작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줄 것이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을 담당하고 같은 뜻의 취지로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 주며, 또 그들의 전체의 복리증진을 도모할 것이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로써 충실하게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을 가진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국 관리로 등용할 것이다.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양국 전권위원은 본조에 기명 조인한다.”

한일합병조약은 처음부터 불법이며, 원래부터 무효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첫째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5조약이 황제의 승인과 비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 일제의 통감 및 통감부가 주체가 된 정책과 조약은 모두 효력을 상실하는 게 마땅하다. 둘째 이 한일합병조약이 한국측과 한국 황제 및 정부의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강제하에서 강요되어 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한일합병조약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체결 때 그 제2조에서 ‘1910년 8/22 또는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 무효임을 재확인하였다.

고종의 암살
93년 전 3·1 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고종 황제의 죽음이 일본 측의 지시에 의한 독살 이었다는 정보를 기록한 당시 일본 고위 관료의 문서가 처음으로 발굴됐다. 이 문서는 1919년 당시 일본 궁내성의 제실 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1853~1948)가 쓴 일기로, ▲고종 독살의 배후에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와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가 있었으며 ▲독살의 이유는 고종이 독립운동에 관련됐기 때문이라는 궁내성 내의 정보를 기록했다. 고종 독살의 개연성을 언급한 국내 자료는 많았지만 일본 정부의 수뇌부가 개입했다는 구체적 정황과 실명을 기록한 일본측의 문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국회 헌정자료실이 소장하고 있는 '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의 해당 부분 사본을 입수하고 이 사실을 27일 본지에 공개했다. 이 교수는 일본 교토대 나가이 가즈 교수의 홈페이지를 통해 문서의 내용을 알게 됐으며 이에 대한 연구 성과를 오는 4월 23일 미국 하와이대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서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말을 듣지 않아… 은폐하려 죽였다"
구라토미는 다이쇼(大正) 8년(1919) 10월 26일의 일기에서 도쿄 오오이마치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히로구니의 집을 방문한 뒤 돌아오는 기차에서 송병준을 만났다고 적었다.

송병준은 '민병석과 윤덕영의 (작위) 사직에 대해서 두 사람 모두 분노하고 있다'고 구라토미에게 말했다. 송병준·민병석·윤덕영은 모두 한일강제병합 뒤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파였다.

4일 뒤인 30일, 구라토미는 궁내성의 한 부서인 종질료에 갔다. 종질료란 황족과 왕족, 작위, 조선 귀족 등에 대한 일들을 다루는 곳으로 조선의 종친부와 비슷한 관청이었다. 그는 종질료의 고위 관료 센고쿠 마사유키를 만나 민병석·윤덕영의 사직과 관련해 이런 질문을 했다.

"(전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뜻을 전해,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李太王·고종)에게 설명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寺內正毅ヨリ長谷川好道ニ意ヲ傳ヘ長谷川ヲシテ李太王ニ說カシメタルコトアルモ太王ガ之ヲ諾セサリシ故其事ヲ秘スル爲メ尹德榮閔丙奭等ノ太王ヲ毒殺シタリトノ風說アリトノ話ヲ聞キタル)" 구라토미는 "데라우치가 얘기했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는 "당신은 이를 들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초대 조선총독(1910~1916)이자 일본 총리대신(1916~1918)을 지낸 데라우치와 고종 승하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가 독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정보가 언급된 것이다.

◆"고종, 파리 회의에 독립 청원 시도"
독살 건에 대한 구라토미의 문의는 집요했다. 10월 30일 센고쿠로부터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하자 11월 1일 다시 종질료 관리 이시하라 겐조를 만나 "조선에서는 데라우치가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에게 얘기하게 한 것이 있었는데 태왕이 승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입을 막는 수단으로서 태왕을 독살한 것으로 얘기가 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독살을 지시한 것이 데라우치였음이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시하라는 이에 대해 "그런 풍설이 있다고 한다"며 정보를 알고 있음을 시인했다.

이틀 뒤인 3일 구라토미는 종질료의 다른 관리인 다나카 우쓰루에게 또다시 고종 독살 건에 대해 질문했다. 다나카는 여기서 더욱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했다. "어떤 사람이 이태왕이 서명 날인한 문서를 얻어서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도모하려고 해, 민병석·윤덕영·송병준 등이 태왕으로 하여금 서명 날인하지 못하게 했지만 아주 독립이 될 듯하면 민병석·윤덕영·송병준 등이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풍설이 있다고 한다"고 말한 것이다.

◆"독살 진상 실토한 사람은 송병준"
이태진 교수는 "구라토미는 고종 독살의 정보를 송병준 으로부터 들은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민병석·윤덕영의 사직'이야기가 일기에서 처음 등장한 곳이 송병준을 만난 부분이며 다른 사람과 그 이야기를 나눴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구라토미 등은 이 정보를 '풍문'이나 '풍설'인 것으로 언급하지만, 이것은 '뜬소문'이 아니라 상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 정보로 봐야 한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송병준이 구라토미에게 전한 사실은 일본 국가 최고 수뇌부의 인물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근거없이 쉽게 거론될 수 없는 사항"이라는 것이다. 지시자인 데라우치와 전달자인 하세가와, 하수인 역할을 한 민병석·윤덕영과 이들의 전달자인 송병준 외에는 전혀 알 수 없는 극비사항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라토미가 궁내성의 상급자로서 종질료 관리들에게 거듭 이 문제를 캐물었고, 복수의 관원들로부터 구체적인 답변을 얻은 것도 이것이 '풍문' 수준을 뛰어넘는 정보였음을 시사한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일본인들은 상당히 근거 있는 정보라 해도 자신에게 책임이 올 것을 우려해, 단정적인 표현을 피하려고 우회적으로 '풍문이 있다'는 식의 표현을 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송병준은 왜 구라토미에게 그런 중요한 정보를 전했던 것일까? 법제국 장관(1913~1916)을 지낸 구라토미는 궁내대신 하타노 다카나오와 가까운 정계의 실력자였다. 송병준은 작위를 잃게 된 민·윤 두 사람을 구제하려는 목적에서 그에게 독살의 진상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이태진 교수는 말했다. 구라토미는 군부를 배경으로 한 데라우치 등 당시 총리들의 노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독살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 민족자결주의 후폭풍 우려"
▲ 고종 독살의 구체적 정보를 언급한‘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 의 1919년 10/30 부분의 이태진 교수의 글을 인용하면, 만약 구라토미가 기록한 정보가 정확한 것이라면, 일본은 왜 한국을 병합한 지 9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고종을 독살한 것일까? 이태진 교수는 기록에 등장한 '고종이 파리 강화회의에 문서를 보내려 했다'는 부분을 주목한다.

고종 승하 직전에 열리기 시작한 파리 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청산을 위한 국제회의로, 1917년부터 제창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가 대책을 세우던 중, 고종 황제가 독립을 호소하려 하는 것을 알고 협박 끝에 독살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국권 침탈의 두 주역인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독살의 주역으로 언급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미 총리대신에서 물러난 데라우치는 1919년 4월 12일 민족자결주의를 걱정하면서 3·1 운동에 대한 상세한 대책을 설파한 서신을 하세가와에게 보내기도 했다.

◆"시신의 팔다리가 붓고 혀가 닳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한 직후 전국에 번졌던 '독살설'은 3·1 운동 발발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독살설을 적은 벽보가 나붙었고, 이를 믿은 국민들은 황제의 장례(3월 3일)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어 시위를 벌였다. 이왕직 장시국장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 윤덕영 등이 혐의자로 거론되었다.

고종 독살에 대한 당시 국내 기록으로는 윤치호의 일기가 구체적인데, 이것은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에게 한 말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 윤치호는 ▲건강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고 ▲시신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크게 부어올라 황제의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으며 ▲이가 모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30㎝ 정도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고 ▲승하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했다고 적었다.

고종의 독살이 '해외 망명 기도'와 관련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독립운동가 선우훈은 광복 이후에 쓴 '사외비사'에서 이지용의 증언을 전했다. 고종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려던 황실 소유의 금괴 85만 냥을 12개의 항아리에 나눠 비밀 장소에 매장했고, 장소가 그려진 보물지도를 신하에게 맡기고 탈출하기 직전에 정보가 샌 탓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한상학과 이완용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내용이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AGGL&articleno=17955750&categoryId=213128&regdt=20100829145904#ajax_history_home


http://japanese.joins.com/article/512/132512.html

【その時の今日】永遠に癒やされない傷、庚戌国辱
2010年08月27日17時05分
[ⓒ 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comment0mixihaten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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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年、景福宮(キョンボックン)勤政殿(クンジョンジョン)の前に建てられた日帝侵略の象徴、朝鮮総督府。

1910年8月29日。 徳川幕府末期にすでに芽生えていた征韓論が物語っているように、明治維新(1867年)以後に近代帝国主義国家に生まれ変わる前から、この地をのみ込もうした侵略者は宿願を果たした。 半面、私たちは35年後の8月15日、光復(解放)のその日が来るまで、有史以来初めて国土と民族が、従来一枚下だと見下げていた文化的劣等者に踏みにじられる痛恨の歴史を刻んでしまった。

「合併後の日本の朝鮮統治政策を見ると、合併時の宣言に反して、吾族の幸福と利益を無視し、征服者が被征服者に対する古代の非人道的政策を襲用し、吾族に参政権、集会結社の自由、言論・出版の自由などを許さなかった。 さらに信教の自由、志業の自由までも少なからず拘束し、行政・司法・警察などの諸機関が朝鮮民族の私権までも侵害し、吾族には永遠に国家生活に必要な知能と経験を得る機会を与えず、吾人は決してこうした武断専制と不正・不公平な政治下で生存と発展を享有できない」。1919年、自らを「2000万の民族の代表」とした東京留学生たちの「独立宣言書」は、日帝が私たちから何を奪っていったのかを一つひとつ語っている。

当時、植民地朝鮮の政治が近代的に発展したように宣伝したが、ある程度の基本人権と参政権を保障した明治憲法ではなく、総督の制令を適用し、言論・結社・集会・出版の自由を完全に踏みにじったのがこの地の実像だった。 3・1運動後、「文化政治」を掲げた日帝が一抹の基本権を許したが、出版や集会がある度に義務化された事前検閲と警察臨検が示しているように、これは政治ショーにすぎなかった。 1925年に治安維持法が施行されると、この制限された自由までが蜃気楼になってしまう。

この地の人々が民族を単位とした国民国家の主人になることを熱望したその時。 日帝は私たちの政治的権利と自由をはく奪し、自主的民主政治に必要な経験を積むことを防いだ。 それだけでなく、今日の私たち市民社会の慢性病である亀裂の二分法も、指導者と民衆の間の相互不信と反目を助長した日帝分裂支配(divide and rule)政策の遺産であり、南北分断も、日帝が背負うべき侵略戦争の罪を私たちが代わりに抱えているのだ。 一度かすめて通り過ぎる痛みではなく、今でも私たちを苦しめている、癒やされない傷を残した強制併合100年を迎える今日。 不幸な過去の歴史を越えて、韓日両国の人々が共存の道に進んでいくための最初の踏み石となる、日本人の心からの謝罪と省察を、私たちの市民社会は今も渇望している。

許東賢(ホ・ドンヒョン)慶煕(キョンヒ)大学学部大学長・韓国近現代史



http://japanese.joins.com/article/079/133079.html


【庚戌国恥100年企画】亡国の根を探して<植民統治に反対した日本人>(2)
2010年09月15日16時43分
[ⓒ 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comment0mixihaten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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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杉並区の大円寺にある横山安武の墓。  

日本は1905年の日露戦争で勝利した後、朝鮮と乙巳勒約(乙巳条約)を強制的に結んで外交権を強奪するなど、朝鮮植民地化を具体化した。 日本社会はお祭りムードに染まっていたが、一部の社会主義者は帝国主義反対理念を根拠に朝鮮侵略に反対した。

言論人・弁護士として活動した木下尚江(1869-1937)は乙巳勒約締結の直前、新聞に「朝鮮は結局、独立国になれないまま、ただ地理の本でのみ存在することになった」という文を載せて日本の侵略を批判した。 社会主義者だった幸徳秋水(1871-1911)も1907年、新聞に「朝鮮人民の自由独立を認めろ」という声明を発表した。 内村鑑三(1861-1930)らキリスト教関係者の間でも朝鮮侵略に反対する動きが起きた。 内村は1910年、「自国の領土を拡張し、全世界を自分のものにしても、霊魂を失えば何の意味もない」と書いた。

強制併合後、日本政府の弾圧と日本人の朝鮮搾取はさらに激しくなった。 社会主義性向の弁護士、布施辰治(1880-1953)は1910年代、「韓国の独立運動に敬意を表す」と述べ、検察の調査を受けた。 布施は日帝時代に朝鮮人の人権と独立運動家を弁論した代表的な弁護士だった。 2004年に日本人では初めて韓国政府から建国勲章を受けた布施辰治の一代記を描いた映画が、今年、日本で制作され、東京で上映中だ。 明治天皇が死去した後、大正(1912-26)の時代が開かれ、日本社会に民本主義の風が吹くと、東京大学教授だった吉野作造(1878-1933)のように、日本の過酷な朝鮮同化主義政策を批判して朝鮮の独立運動に共感する学者らが現れた。

政治家の石橋湛山(1884-1973)は政治的な観点で「大日本主義」を批判しながら、他国と協力して発展する「小日本主義」を強調した。 石橋は1921年、東洋経済新報社に「朝鮮と台湾に自由を与えろ。 東洋と世界の弱小国全体をわれわれの支持者にすればどれほど大きな利益か」と書いた。

こうした人たちは少数にすぎず、1930年代に入って軍国主義勢力が執権して委縮したものの、日本社会の良心的な砦だった。 特に木下尚江が強制併合の直後、日本が帝国主義という大洪水に巻き込まれて取り返しがつかない結果を生むはずだと警告したように、日帝時代の予言者でもあった。 彼らの精神は今でも市民運動などを通して受け継がれている。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pol&arcid=0003599749&code=11121200

[경술국치 100년] 드라마 ‘아이리스’의 그 호수엔 숨져간 조선인 恨이 흐르고 있었다


2010.04.13 23:12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③ 아키타현 대표 징용 기업 도와홀딩스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지 다자와(田澤)호는 거대했다. 일본 아키타(秋田)현 센보쿠(仙北)시에 있는 이 호수를 한 바퀴 돌려면 시속 20㎞로 달리는 차에 한 시간을 앉아 있어야 한다. 호수는 최대 수심 423.4m로 일본에서 가장 깊다.

우리나라 관광객이 지난해 말부터 이곳에 몰려들고 있다. 드라마의 위력이다. 지난 1월 29일 눈 덮인 호숫가 관광객 20여명은 죄다 한국 사람이었다. 50대로 보이는 남녀는 황금색 여인상(女人像·다쓰코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충북 청주에서 왔다는 박모(57·여)씨는 근처 조선인 강제징용 현장을 아느냐는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가이드가 아무 말 않던데.”

1930년대 후반 들어 일제는 심각한 전력난을 겪는다. 군수물자 생산에 전기는 필수다. 도처에서 발전소 건설 공사가 시작됐다. 다자와호 주변은 수력 발전이 채택됐다. 상류 강줄기를 호수로 연결한 뒤 호수에서 다시 하류로 물을 내보내 낙차를 이용한다는 아이디어였다. 강과 호수를 잇는 도수로 공사에 조선인 약 2000명이 동원됐다. 공사 기간은 1938년 2월부터 1940년 1월까지. 이렇게 만든 ‘오보나이 발전소’는 현재까지 가동 중이다.

여러 기록과 현지 일본인 증언에 따르면 전체 길이가 약 8.5㎞인 도수로는 주로 사람 손으로 만들어졌다. 노무자들은 곡괭이와 삽으로 흙을 파냈다. 자재를 나를 때도 마차나 뗏목 등 원시적 수단을 썼다. 일제는 겨울에도 쉬지 않고 공사를 진행했다. 암벽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는 일은 조선인에게 돌아갔다. 많은 조선인이 공사 중 숨졌다고 한다. 추위와 굶주림도 삶을 앗아갔다.

다쓰코상에서 호숫가를 따라 약 6㎞ 떨어진 곳에 ‘히메관음상(姬觀音像)’이 서 있다. 공사로 숨진 물고기를 위로한다는 글이 관음상 앞에 적혀 있다. 산성인 강물이 호수로 유입되자 토종 물고기가 괴사했던 것이다. 관음상은 1939년 11월 건립됐다.

그런데 1990년, 도수로 공사에서 숨진 희생자를 위로하는 게 관음상 건립의 더 큰 목적이었음이 밝혀졌다. 인근 사찰 덴타쿠지(田澤寺)에서 ‘히메관음상 건립 취의서(趣意書)’가 발견된 것이다. 다자와호 주변 마을 사람들은 1991년 9월 22일 히메관음상 앞에서 처음으로 위령제를 열었다. 조선인 희생자를 위로하는 행사였다. 위령제는 그 뒤 해마다 치러진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연구가들에게 현지 강제동원 현장을 소개해 온 차타니 주로쿠(69) 전 민족예술연구소 소장은 “이곳이 양국 우호·친선의 상징적 장소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다자와호에서 아키타 내륙선 열차를 약 1시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간 뒤 다시 자동차로 40여분을 가면 옛 하나오카 광산의 흔적이 나온다. 비철금속 분야 대기업인 도와홀딩스㈜의 전신 ‘후지타구미(藤田組)’가 소유했던 곳이다.

갱도 입구는 유별나게도 약 40m 높이 야산 위에 있다. 산을 종단으로 뚫는, 이른바 수직갱이다. 다른 광산은 오래 전 폐광됐고 수직갱만 남았다. 옛 조선인 숙소 터에는 눈이 1m나 쌓여 있었다. 일본 후생성 명부 등에 따르면 하나오카 광산으로 조선인 2700명 이상이 강제 동원됐다. 일부 생존자는 약 4000명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야산 정상 수직갱에서 조선인은 지하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 광석을 캤다. 배고픔과 학대는 물론 중력에 맞서야 하는 고통이 더해졌다.

1944년 5월 29일 하나오카 광산 나나쓰 다테 갱도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갱이 붕괴돼 지하수가 쏟아져 나왔다. 수몰된 갱 안에 있던 조선인 11명과 일본인 11명이 숨졌다. 이른바 ‘나나쓰 다테’ 사건. 희생자 22명은 아직도 광산 근처에 묻혀 있다. 종전(終戰) 후 사고 현장이 노천 채굴터로 개발되면서 유골 발굴은 불가능해졌다.

현장에 세워졌던 추모비는 노천 채굴터 개발 당시 근처 사찰 신쇼지(信正寺)로 옮겨졌다. 추모비 뒷면에는 숨진 조선인 이름이 창씨(創氏)로 적혀 있다. ‘山田魯元(朴魯元)’ ‘江川龍伊(韓龍伊)’ ‘星山段載(全段載)’ 식이다. 죽어서도 식민지 국민이다. 11명 가운데 3명(崔泰植 林炳山 吳重甲)만 우리 이름이다. 2명은 아직 이름조차 찾지 못했다.

신쇼지에서 자동차로 동쪽 방향 20여분 거리에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거대한 광산이 있다. 도와홀딩스 고사카 광산이다. 광산이 한눈에 보이는 뒷산에 올라서자 화학약품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10여분 동안 뒷산에 서 있는데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냄새는 광석이 금속으로 제련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현지인들은 1940년대 악취가 더 심했다고 진술했다. “이곳은 메이지유신(1868년) 때부터 100년 동안 민둥산이었습니다. 유해물질을 배출하기 위해 굴뚝을 만들었는데 유해물질이 담긴 연기가 퍼져나가 나무가 다 죽었죠. 지금 나무가 많은 것은 1970년대 이후 녹화사업 때문입니다.”

지난달 11일 기자와 만난 고사카 광산 징용자 김경용(83·대구 매호동)씨는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사람이다. 열일곱 살 때 끌려가 1년 남짓 노역에 종사했다. 김씨는 늘 배가 고팠다고 했다. 광산 측이 목욕물을 데워줘도 탈진이 두려워 물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동료 징용자는 스물다섯 살 안팎의 형들이었다. “일본말 못 알아듣는다고 두들겨맞기도 했지만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더 많이 때렸습니다. 이유를 몰랐는데 어느 날 일본인 화차 운전수가 그러더군요. ‘가네모토(김씨의 일본 성), 너는 좀 있으면 군대 간다. 군인 한 사람 양성하려면 20년 걸려. 다치면 안돼’라고.”

김씨는 이 말에서 일본이 온통 전쟁에 미쳐있었음을 실감했다. “참 무서운 얘기 아닙니까.”

인천발 아키타행 비행기는 요즘도 만석이다. 관광객 가운데 선조의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통과 차별의 현장은 드라마의 낭만을 추억하는 장소가 됐다. 이건 다만 세월이 가져다준 역설일 뿐일까.


http://cafe451.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832I&fldid=RGAl&contentval=0003dzzzzzzzzzzzzzzzzzzzzzzzzz&nenc=&fenc=&q=&nil_profile=cafetop&nil_menu=sch_updw








【日韓】庚戌国恥100年~ドラマ「アイリス」のその湖には亡くなっていった朝鮮人の恨(ハン)が流れていた[04/13]
1 : ピアノを弾く大酋長φ ★ : 2010/04/13(火) 22:33:16 ID:???
[庚戌国恥100年]ドラマ‘アイリス’のその湖には亡くなっていった朝鮮人の恨が流れていた

http://image.kukinews.com/online_image/2010/0413/100413_08_1.jpg
▲ドラマ「アイリス」で有名になった黄金色の女性像(左側)の田沢湖周辺は日本秋田県で代表的な強制徴
用地だった。1938年から2年間発電所建設のための導水路工事に朝鮮人2000人が動員された。1944年、
秋田県大館市の花岡鉱山で坑道崩壊事故で犠牲になった朝鮮人と日本人たちを褒め称える追悼碑が近
隣の寺にある(下の写真)
▲秋田県田沢湖畔にある姫観音像を現地住民が去る1月訪れた。田沢湖周辺の村人たちはこの場所の
発電所工事で亡くなった犠牲者を慰める心で観音像を建立した。
▲大企業DOWAホールディングスの前身である藤田組が運用した花岡鉱業所に強制動員された朝鮮人
名簿。全て官斡旋方式で20~30代で動員された。現在生きていたら90歳前後だ。本籍は慶北・慶山郡が
多く、特定地域から集中動員されたことが見て取れる。大部分「坑内運搬夫」として仕事をした。茶谷十六・
前民族芸術研究所長提供

庚戌国恥100年企画忘れられた蛮行…日本戦犯企業を追跡する

第2部見慣れない企業、隠れた加害者

(3)秋田県の代表徴用企業、DOWAホールディングス

ドラマ「アイリス」の撮影地、田沢湖は巨大だった。日本秋田県仙北市にあるこの湖をひと回り回ろうとする
なら時速20kmで走る車に一時間座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湖は最大水深423.4mで日本で最も深い。

我が国の観光客が昨年末からこの場所に押し寄せている。ドラマの威力だ。去る1月29日、雪に覆われた
湖畔の観光客20人余りはみな韓国の人だった。50代と見える男女は黄金色の女性像(たつこ像)を背景に
写真を撮った。忠北(チュンブク)・清州(チョンジュ)からきたというパク某(57・女)さんは近所の朝鮮人強
制徴用現場を知っているかとの質問に目をまるく開いた。

「そのようなことがあったんですか。ガイドは何も言わなかったのに。」

1930年代後半に入って日帝は深刻な電力難を経験する。軍需物資の生産に電気は必須だ。随所で発電
所建設工事が始まった。田沢湖周辺は水力発電が採択された。上流の川を湖に連結した後、湖からまた
下流へ水を送りだして落差を利用するというアイディアであった。川と湖をつなぐ導水路工事に朝鮮人約
2000人が動員された。工事期間は1938年2月から1940年1月まで。このように作った「生保内(おぼない)発
電所」は現在まで稼動中だ。

色々な記録と現地の日本人の証言によれば全体の長さが約8.5kmの導水路は主に人手で作られた。労務
者らはツルハシとシャベルで土を掘りおこした。資材を運ぶ時も馬車やイカダなど原始的手段を使った。日
帝は冬も休まず工事を進行した。岩壁にダイナマイトを設置する仕事は朝鮮人に割り当てられた。多くの
朝鮮人が工事中亡くなったという。寒さと飢えも人生を奪い取った。

たつこ像から湖畔に沿って約6km離れた場所に「姫観音像」が立っている。工事で死んだ魚を慰めるという
文が観音像の前に記されている。酸性である川の水が湖に流入するや土地産の魚が怪死したのだ。観音
像は1938年11月建立された。
(>>2以降につづく)

ソース:国民日報クッキーニュース(韓国語) [2010.04.13 17:52]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pol&arcid=0003599749&code=11121200

関連スレ
【日韓】庚戌国恥100年~「国恥100年は韓国でなく日本が恥じなければ」[04/06]
http://yutori7.2ch.net/test/read.cgi/news4plus/1270570014/



2 : ピアノを弾く大酋長φ ★ : 2010/04/13(火) 22:33:40 ID:???
(>>1のつづき)
ところで1990年、導水路工事で亡くなった犠牲者を慰めるのが観音像建設のより大きな目的であっ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近隣の寺である田沢寺(でんたくじ)で「姫観音像建立趣意書」が発見されたのだ。田沢湖周辺の村人たちは1991年9月22日姫観音像前で初めて慰霊祭を開いた。朝鮮人犠牲者を慰める行事であった。慰霊祭はその後毎年行われる。我が国と日本の研究者らに現地強制動員現場を紹介してきた茶谷十六(ちゃたに・じゅうろく、69)前民族芸術研究所所長は「この場所が両国の友好・親善の象徴的な場所になることを希望する」と話した。

田沢湖から秋田内陸線列車に約1時間乗って北に上がった後、また自動車で40分余りを行けば過去の花岡鉱山の跡が出てくる。非鉄金属分野の大企業であるDOWAホールディングス(株)の前身「藤田組」が所有した場所だ。

坑道入口は風変わりにも約40mの高さの山の上にある。山を縦断して突き抜ける、いわゆる垂直坑だ。他の鉱山は遠い昔に廃鉱されて垂直坑だけ残った。過去の朝鮮人宿舎の場所には雪が1mも積もっていた。
日本厚生省の名簿などによれば花岡鉱山で朝鮮人2700人以上が強制動員された。一部生存者は約4000人がいたと証言した。山頂の垂直坑で朝鮮人は地下奥深いところに降りて行って鉱石を採った。腹がへるということと虐待はもちろん重力に対抗しなければならない苦痛がより増した。

1944年5月29日花岡鉱山の七ツ館(ななつだて)坑道でむごたらしい事が起きた。坑が崩壊して地下水があふれ出た。水没した坑内にいた朝鮮人11人と日本人11人が亡くなった。いわゆる「七ツ館」事件である。犠牲者22人はまだ鉱山近所に埋まっている。終戦後、事故現場が露天採掘地として開発されて遺骨発掘は不可能になった。

現場にたてられた追悼碑は露天採掘地の開発当時、近所の寺の信正寺に移された。追悼碑の裏面には亡くなった朝鮮人の名前が創氏で記されている。「山田魯元(朴魯元)」、「江川龍伊(韓龍伊)」、「星山段載(全段載)」という方式だ。死んでも植民地の国民だ。11人の中で3人(崔泰植、林炳山、呉重甲)だけ私たちの名前だ。2人はまだ名前さえ探せなかった。

信正寺から自動車で東方向へ20分あまりの距離に白い煙が立ちのぼる巨大な鉱山がある。DOWAホールディングス小坂鉱山だ。鉱山がひと目で見える後方の山にのぼるや化学薬品のにおいがむずむずと上がってきた。10分余りの間後方の山に立っているのに頭が痛い状況だった。

においは鉱石が金属へ製錬される過程で出るということだった。現地人らは1940年代は悪臭がもっと深刻だったと述べた。「こちらは明治維新(1868年)時から100年の間禿山でした。有害物質を排出するために煙突を作ったが有害物質が入った煙が広がって木が皆死にましたよ。今、木が多いのは1970年代以後の緑化事業のためです。」

小坂鉱山徴用者キム・ギョンヨン(83・大邱(テグ)・梅湖洞(メホドン))氏は数少ない生存者のひとりだ。
十七才の時引っ張られて行って1年余り労役に従事した。キム氏はいつもお腹がすいていたといった。鉱山側が風呂の湯を温めても脱力が恐ろしくて水に入る意欲がわかなかったと打ち明けた。

同僚の徴用者は二十五才内外の兄らだった。「日本語が聞き取れないと殴られたりもしたが、私より年上の人をさらに多く殴りました。理由は分からなかったが、ある日、日本人貨車運転手がそう言いました。『金本(キム氏の日本姓)、君は少しいれば軍隊へ行く。軍人ひとり養成しようとすると20年かかる。ケガをしてはならない』と。」

キム氏はこの言葉で日本が一様に戦争に狂っていたことを実感した。「本当に恐ろしい話ではないですか。」

仁川(インチョン)発秋田行の飛行機はこの頃も満席だ。観光客の中で先祖の痛みを記憶する人は殆どいない。苦痛と差別の現場はドラマのロマンを追憶する場所になった。これは単に年月がもたらした逆説であるだけであろうか。
(おわり)

仙北・鹿角(秋田県)、大邱=特別企画チーム

特別企画チーム=文・写真キム・ホギョン、クォン・ギソク、ウ・ソンギュ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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