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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August 13, 2012

the history of Cheonggyecheon river 청계천길

http://www.ateliernamoo.com/openprojects/op2-ckc/op-ckc07.htm

Cheonggyecheon river 청계천길


은 창에 뜨는 깨알 같은 글을 읽으면서 조선시대부터 지금 시점까지 청계천에 대한 개략적인 역사를 살펴볼 수 있으리라. 이 단편적인 사실들로부터 청계천을 온전히 재구성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청계천은 청계천의 본 모습은 아니다. 어쩌면 복개이후로 조선 초기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하천을 지금의 우리가 보이지 않는 청계천을 생각하며 상상을 키워왔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반문해본다. 그녀가 떠나고 난 후에 나는 그녀가 내게 주었던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을 그리려 했왔고, 어느새인가 내가 그리는 그녀는 그녀가 아니었다. 알면서 그리한줄 알면서 나는 자꾸 내안의 그녀만이 바로 그녀의 전부라고 되뇐다. <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女子), 그 한 잎의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 여자(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女子), 눈물 같은 여자(女子), 슬픔 같은 여자(女子), 병신(病身) 같은 여자(女子), 시집(詩集) 같은 여자(女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女子) ....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女子). 오규원, 왕자가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사, 1978 >


개천의 필요성
제1차 개천공사
제2차 개천공사
개천이라는 이름
개천관리 및 유지관리의 소관
개천의 오염방지책
준천의 필요성
영조대의 준천과 준천사
영조조 이후의 준천
가산
서울의 하수도 기원
한일합병 당시의 상수도
하수도개수계획의 수립 시행
하수배제방식과 설계기준
청계천 복구






서울, 20세기 - 100년의 사진기록



서울시정개발연구원과 서울학연구소에 펴낸 '서울, 20세기 - 100년의 사진기록' 이라는 책있다. 거기서 청계천에 관련된 사진과 간단한 설명을 추스렸다. 책에 실린 단락의 제목도 함께 달아놓는다. 서울육백년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청계천과는 또 다른 모습의 청계천이리라.
사진을 보면서 어느 시기에는 청계천 사진이 실리지 않는 시기도 있었다. 곰곰히 따져보면 청계천이 서울에서 주연인적은 없었다. 언제나 서울의 이면이었으며, 배후에 있었다. 그래서 어느 시대든지 청계천에는 이 사회의 이면에 놓여진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의 삶이 거기서 일구어졌다. 무장적 상경해서 정착하는, 잦은 침수와 악취를 참아가면 살아가고, 재개발의 명목으로 쫓겨나고, 다시 모여들어 모질게도 살아가는 곳. 변변한 대접한번 받아보지 못한 서러운 삶이 거기에 베어있고, 청계천은 그들이 지켜내었던게 아닌가. 바로 그러한 이유로 청계천은 가장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편한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조선시대가 그랬고, 군사정권이 그랬고, 이십일세기 벽두의 선거공약이 그러하다.





1. 근대도시건설의 꿈과 좌절 1897-1910



16-17쪽 개천과 수표교, 1900년경, 내사산에서 흘러든 물이 개천을 이루어 도성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며 흘렀다. 개천(청계천)은 도성 아낙들의 빨래터요 아이들의 놀이터였으며, 하수도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이래 하상이 높아져 2-3년 마다 한번씩 대대적으로 준설을 하였는데, 수표교에는 준설의 기준점이 표시되어 있었다. 서울 도성 안에만 개천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가 50개 이상이었으며, 광통교, 수표교는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조형성이 뛰었났다.





32쪽, 청계천변의 세마장貰馬場, 1890년대 중반, 조선 초기부터 청계천변에는 우마牛馬를 거래하는 장이 섰다. 전차가 등장하면서 세마꾼들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40쪽, 표백공장, 1890년대 말, 서구 상품의 침입은 국내 산업에 재편을 강요했다. 대한제국가에는 정부의 식산흥업 정책에 힘입어 수공업 기술을 토대로 곳곳에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개천開川 상류의 표백공장.





5. 혼돈의 시대 : 1945 - 1953



171쪽, 청계천변, 1950년경, 판자집은 약간의 빈터만 있어도 바로 파고 들어왔다. 큰 비만 오면 물에 잠겨 주거지로는 쓸 수 없었던 청계천변에도 숱한 판자집들이 늘어섰다. 멀리 동대문을 배경으로 오합지졸이 사열이라도 하듯 누추한 판자집들이 늘어서 있다.





6. 폐허 속에서 : 1953 - 1966



201쪽, 청계천과 종로, 1954, 청계천의 합류지점인 삼각동을 중심으로 작은 한옥들이 밀집해 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가 보인다. 광통교와 수표교의 북쪽 (사진의 오른쪽) 종로 큰길가에는 상대적으로 넓은 필지와 규모가 큰 건물이 늘어서 있어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202-203쪽, 종묘주변 - 아래쪽에 청계천과 쳔변을 따라 판자집이 길게 늘섰다, 1954, 전후 가장 심각한 도시문제로 떠오른 것은 주택문제였다. 전후 복구사업과 함께 부흥주택, 재건주택, 희망주택, 난민주택, 시범주택, 개량주택, 시험주택, 상가주택등 공공주택이 적지 않게 지어졌지만, 급증하는 서울 인구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무허가 판자집을 지었고, 그에 따라 곳곳에 '무허가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특히 식민지 말기에 소개공지대로 지정되어던 종묘 입구에서 대한극장에 이르는 구간은 도심부의 대표적 판자촌이자 사창가로서 속칭 '종삼'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204쪽, 청계천 복개공사, 1959.





204쪽, 청계천 복개공사, 1965, 서울의 하수도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요 부녀자들의 빨래터였던 청계천은 도시화,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도시의 '암종癌腫'으로 변모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2-3년마다 한번씩 준설해야 할 정도로 토사와 쓰레기가 퇴적되던 청계천은 식민지 시기 서울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급속히 오염되었다. 식민 당국도 청계천을 복개하여 토로로 사용함으로써 도시 환경, 위생문제와 교통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구상한 바 있었다. 1930년대말, 식민당국은 청계천을 전면 복개하고 그 위에 고가도로를 놓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그러나 전쟁말기의 물자난과 기술인력난 속에서 이러한 구상이 실현될 수는 없었다. 식민 당국의 구상은 해방과 전쟁을 겪은 뒤 우리 정부에 의해 실현되었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4차에 걸쳐 광교에서 오간수문에 이르는 도심부의 청계천을 완전히 복개하고, 시 외곽 구역도 순차적으로 복개하여 청계천로를 만들었으며, 그 위에 청계고가도로(3.1고가도로)를 부설하였다. 청계6가-마장동 구간의 복개공사 장면.





205쪽, 청계천변 판자집, 1965, 한국전쟁이 끝난 뒤, 청계천 하류쪽 천변에는 판자집이 하나 둘씩 늘어서기 시작했다. 청계천 바닥에 말뚝을 박고 널찍한 판자를 올려 놓은 뒤에, 나무판으로 얼기설기 엮은 '집 아닌 집'들이 나란히 늘어섰다. 청계천변 판자집은 살림집인 동시에 점포였다.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온 잡동사니가 판자 위에 널렸고, 사람들은 천변을 배회하다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구입했다. 거대한 청계천 상가의 원형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7. 돌격건설 : 1966 - 1970



236쪽, 청계천 고가도로 건설, 복개되기 전, 1967, 거대한 교각군이 들어서고 있지만 천변에는 여전히 판자집이 즐비하다.




237쪽, 청계천 고가도로 건설, 복개된 후, 1967,
건설중인 청계고가도로. 교각이 늘어서 있고 세운상가를 연결하는 '보행자 데크'가 그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청계천을 복개하고 그 위에 건설된 청계천 고가도로는 진입로 옆의 3.1빌딩과 함께 오랫동안 서울 근대화의 상징 경관으로 자리 잡았다.





244쪽, 대한극장 앞, 1967, 식민지 말기, 공습에 대비하여 종묘입구에서 대한극장 앞에 이르는 구간의 건물들을 철거하고 만들어 놓은 '소개공지대'는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서울 도심의 대표적인 판자집 밀집지대요 사창가가 되어 있었다. 1968년 9월 26일, 군사작전을 연상케하는 '나비작전'이라는 이름의 대대적인 철거 작업으로 이 일대 판자집과 사창가는 일소되었고, 뒤이어 세운상가 건설이 시작되었다. 철거 직전의 대한극장 앞.





245쪽, 세운상가, 1967, 세운상가는 종로에서 청계천을 거쳐 퇴계로에 이르는 남북축선 위에 거대한 건물군으로 자리잡았다. 이곳은 서울 근대화의 성과를 과시하는 장소로서 한 때 서울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상업, 주거시설로 꼽혔지만 서울의 남북을 통합한다는 애초의 의도를 달성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서울을 동서로 양분시키고 자신은 슬럼화되어 도시 정비의 심각한 장애물로 남았다. 오른쪽 쭉 뻗은 도로가 종로, 가운데 넓은 길이 복개된 청계천로이다.





245쪽, 세운상가 건설공사, 1967.





245쪽, 세운상가, 1967, 세운상가 나동 개관, 김현옥 시장은 새로 지은 대규모 상가에 '세계로 뻗어나가라'는 의미에서 '세운상가世運商街'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로부터 이 거대한 건물군은 세운상가라는 이름으로 통칭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운상가 나동, 현대상가, 풍천상가, 진양상가, 신성상가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8. 개발의 무지개 : 1970 - 1979



263쪽, 3.1고가도로와 3.1빌딩, 1976, 1969년 3.1고가도로, 1970년 3.1빌딩이 준공되면서 옛 청계천변에 새로운 랜드마크가 생겼다. 3.1빌딩과 3.1고가도로는 오랫동안 한국의 급속한 근대화를 상징하는 주요 경관 요소로 자리 잡았다.





290쪽, 청계천 판자촌 화재, 1973,
60-70년대에는 유난히도 판자촌 화재가 잦았다. 화재는 대개 겨울철에 발생했기 때문에 이재민들의 고통은 더 심했다. 그러나 때로는 '철거'라는 당국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270쪽, 무교로, 1976, 도심부 재개발과 주요간선도로도 확장되었다. 멀리 삼일빌딩과 고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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