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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ugust 16, 2012

Appendix1 Overview to Korea,Independent ac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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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 조선 개황
[부주(附註) : 본 문역은 짜피헌닝(査理漢寧) 저작의 조선 개황 일문(一文)이다. 원문은 미국 상무부 발행의 ≪국제무역주간≫ 1944년 1월호에 실린 것인데 그중에는 허다한 조선에 관한 재료가 있으며 더우기 경제방면에서 가히 참고가 될 것이어서 특히 번역하여 본서의 부록으로 한다.]
조선의 역사는 듣는 바에 의하면 4천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다만 확실한 근거가 결핍하다.
기원(서력) 전 10세기 이전에 기자(箕子)가 반도를 조선이라 하고 기원전 1세기 중엽에 조선은 3국으로 갈라져 그 뒤 신라가 세력이 강화되어 대동강 이남의 지역을 영유하였고 기원 9백년 이후에 고려가 온 반도를 통일하여 개성을 수도로 하였다. 1392년 이태조가 등극하여 다시 조선이라 하고 서울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 시기 중에 주의할만한 사실은 인쇄 활자와 조선 문자를 응용한 것인데 조선 문자는 약간의 점에 있어서 중국문·일본문과도 모두 구별이 있으며 다만 조선식 발음의 한자(漢字)를 차용한 것이 불소하다. 1938년 경기도 내에서 일본문을 이해하는 한인은 100분의 20에 불과하고 아주 모르는 사람이 매우 많은 실정이었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침입
1592년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으로 침입하여 서울 등지를 공격하였다. 1598년 비록 수길의 죽음으로 인하여 철병은 하였으나 한·일 양 민족은 이로 인하여 원한이 발생하였으며 1627년에는 만주인이 조선을 정복하였으며, 1644년 만주인이 중국에서 황제를 칭한 뒤에 한국과 만주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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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우호적이었다. 이 뒤에 2세기 동안 조선은 외부와 완전히 격절이 되어 소위 은둔국이 되었고 유일한 대외 관계는 중국의 조정 및 부산에 있는 약간의 일본 상인들이었다.
조선이 비록 형식상으로는 중국을 종주국으로 하였으나 세계 각국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였다. 1882년에는 한국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1886년에는 프랑스와, 1889년에는 오스트리아와 역시 유사한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884년 서울 정부는 외인의 거주를 윤허하고 아울러 외국인이 각지를 여행할 수 있도록 윤허하였다.
1894년으로부터 다음해에 이르는 동안 조선 영토에서 일어난 중·일전쟁의 결과는 중국으로 하여금 조선의 종주권을 포기하고 그 독립 국가임을 승인하게 하였다.
중·일전쟁 후 러시아 등은 조선에서 조계를 획득하여 은둔국의 생애를 끝나게 하였다.
그 다음 1905년 9월에 체결된 포오츠머스 조약에서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가 5년이 채 못되어서 일본에게 병탄되었다.
조선의 전략적 지위
조선의 면적은 약 8만 2천 평방 마일인데 캔서스주보다 조금 크다. 전 국토가 모두 산지로서, 반도의 척추가 되는 산은 태백산인데 동해와 원산에 접근하여 있으므로 동해안은 상당히 고립해 있고 상업도 발전이 충분치 못하다. 반도의 상업은, 농업과 교통선이 모두 산맥 서쪽 구역에 집중하였다. 조선은 만주와 소련에 접경하며 화북과 일본 사이에 위치하여 일
본 본토를 상거하기가 최근 거리에서는 1백 20마일에 불과하므로 전략 지위는 비상히 중요하다.
1910년 이전 일본인이 조선을 칭하기를 ‘심장에 예리한 칼을 삽입한 형세이다’라고 하였다. 1931년 이래 또 칭하기를 ‘아시아 대륙을 정복하는 교량이라’고 하였다. 이번 전쟁 중에 조선은 일본을 격파하는 전장으로,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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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에 또한 일본이 재기하여 침략할 것을 방지하는 최전선으로 만들 수가 있다.
인구
1940년 통계에 의하면 조선 인구는 총계 2천 4백 32만 6천 2백 17인인데 그 중 대다수는 조선인이고 인종상에서 일본인과 모두 구별하면 일본인은 100분의 3, 중국인과 기타 국가 교민은 그 수가 극히 적다. 일본인의 다수는 기업가·정부 관리·숙련 노동자와 기사이다. 장래 조선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이들을 능히 교체하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경제 곤란이며, 조선인의 해외 거류가 매우 많아서 일본에 백만이 있고 만주에 1백만이 있는데, 더우기 두만강 대안인 간도구역이 많아서 이 지역 인구의 4분의 3을 점하고 있다. 이밖에 소련의 원동 부분에 약 20만이 있다. 아시아 기타 구역, 더우기 중국에는 약 만이 있다.
농업상의 근본 문제
조선은 원동의 다른 국가와 같이 역시 농업 입국이다. 1938년에 농민은 총 인구의 4분의 3을 점하였고 1940년에 서울에는 1백 만의 인구가 있었으며 이밖에 인구 10만 이상의 도시는 지금 5,6개가 있는데 그 중에 30만을 초과하는 도시는 1개도 없다. 큰 도시 중에는 상공업 중심의 평양·부산·청진 및 부산 북쪽 비옥한 평원 중에 있는 대구를 포함한다.
조선은 농업국임으로 인해서 공업 국가에 비하여 전쟁에 의한 파괴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다른 면에서 전시의 변동은 아마도 그 농업상의 근본을 해결하기 불능한 곤란한 문제이다.
이 한가지 점은 조선의 토지가 퍽 기름지지 못한 탓이며 이러한 토지에 수 세기 동안 경작을 해 왔다. 또 한가지 다른 일면에서 전쟁 때문에 비료와 노동력이 결핍하고 농작물 가격의 저락이며 소작농과 부채의 두루 미치는 것, 고리대와 일본인의 토지 겸병으로 말미암아 증가하는 조선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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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농의 비례와 가중해지는 일본 수요의 농작물 등, 본래 빈곤한 조선 농민의 정황은 더 한층 심각해졌다.
전시 노동력과 비료의 결핍은 조선의 농산물을 날이 갈수록 더욱 감소케 하였다.
1939년 쌀의 산출량은 7천 5백 만 두(斗)로 추산되는데 평균 산출량인 1억 두에 비교하여 백분의 25가 감소되었다. 라디오에 의해서 얻은 소식에 의하면 1942년과 1943년의 산미량도 많지 못하였다. (수확기는 9월 중순에서 11월 초순까지)
일본의 곡창
통상 조선 산출미의 100분의 40은 일본으로 반출된다. 조선과 대만은 일본이 필요로 하는 식미의 5분의 1을 공급한다. 세계 5개 주요한 쌀 수출국 중에 조선과 대만은 제4·5위에 처한다. (버어마·태국·안남이 1·2·3위) 조선·대만 수입미는 일본이 국외로 간주하지 않고 기타 구역의 수입을 칭하는 것인데 다만 조선과 일본미의 수확량은 1940년 이후에 일본으로 하여금 태국·월남과 기타 지구로부터 대량의 식미를 수입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전후 조선미의 수출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보다 많은 쌀을 필요케 하였다. 과거 30년 래 조선 인민의 쌀의 소모는 날로 감소해졌고 동시에 또 한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전후 조선이 무엇을 가지고 그가 필요한 수입 화물·방직물·기계·차량·휘발유·비료와 기타 물품같은 값을 지불하는가? 이 여러가지 물품은 현재 모두 일본으로부터 공급된다.
조선 농촌의 빈궁은 농민으로 하여금 반드시 추수 후에 즉각으로 쌀을 내다 팔지 않으면 아니된다.
일본 정부의 보고에 의하면 조선 농촌의 빈궁은, 일본 본토의 흡사한 농촌에 비하여 더욱 심각하다. 농민은 자기가 수요되는 식용의 양곡도 때로 항상 내다 팔게 된다. 추계에 의하면 조선이 일본으로 수출하는 쌀은 대부분 추수 후 4개월 이내이며 그 가격은 퍽으나 염가이어서 중간의 무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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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판매하는 값의 100분의 35를 획득한다.
보리와 밀은 조선의 중요한 부작물인데 양자를 합친 파종 면적이 대개 쌀 농사짓는 면적과 상등하다. 즉 4백여만 에이커이다. 다수의 조선인은 밀·보리로써 주요 식품을 삼는데 특히 북쪽 지방의 쌀을 생산치 못하는 농민이 그러하다. 다만 남쪽 지방의 인민도 역시 허다한 쌀 수출이 있어서 자기의 식용미는 보다 값이 저렴한 부작물로 한다.
조선의 소작농은 조선 농민의 반수를 점한다. 1938년 조선 농민 중 5분의 1이 스스로 경작할 토지를 소유하였다.
소작농의 부담은 토지·부채·고리대 등 비상하게 짐이 무겁다. 토지는 평균 약 총 수입의 2분의 1을 점하고 다만 경작하고 파종하는 일체 비용은 항상 전부 소작인이 부담한다. 그러므로 실제상 그들의 몫은 100분의 25도 못된다.
4분의 3의 농민은 부채가 너무 무거우며 허다한 차관은 절대 생산에 사용한 것이 아니므로 부채는 더욱 무거워졌다.
북녘 지방 내지의 화전민은 그 경제적 지위가 고용농·소작농에 비하여 더 한층 낮으며 그들의 농작 방법은 산기슭을 택하여 수목과 잡초를 벌목도 하고 혹은 불을 질러서 연후에 씨를 심는 것이었다.
공업화 문제
오래지 않은 과거에 있어서는 조선의 공업화는 아직도 말할 나위가 없었다. 1938년대에 일본의 재벌은, 더우기 삼릉(三菱)과 야구(野口)는 조선에서 비로소 공업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조선의 전력·인력과 토지를 이용하여 공업 산품의 총액은 1932년의 3억 원으로부터 1938년의 10억 원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그 중에도 화학품의 비율이 100분의 10으로부터
100분의 30까지 늘어났으며 철물(금·은·동·철·주석)과 기계는 100분의 2.5로부터 100분의 10까지 늘어났다.
광산과 전력 자원은 대부분이 반도 북부의 산악이 많은 지역에 치우쳐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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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여 동북과 서북에서 공업이 발전한 결과 남부 조선의 과잉 인구는 북으로 향해서 이동이 된다. 1937~1940년간에 서북부의 평양은 이미 남부의 부산을 대신하여 조선 제2의 도시로 되었고 동북 연해 청진의 인구는 3배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서남부 군산의 인구는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조선 금후의 국부 공업화의 중요성을 연구하려면 적어도 4개의 요인을 고려하여야 한다. 즉 전시 공장이 파괴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며 약간의 큰 화학공장·인조연료공장 및 경철공장, 더우기 야구(野口)의 사업의 일본 전시 경제에 대한 중요성 등이다. 그 다음 조선 공업화의 목적은 일본의 화학품·연료·강철 등을 능히 자작 자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이러한 공업은 허다하게 있어서 정부의 대량 보조금을 받아야 되고 전쟁 후방의 이러한 공업의 유지는 역시 정부의 계속되는 보조금 수요와 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정부 대(對) 각 부문의 협조적 수요와 효용 등의 문제이다.
별도로 또 한가지 문제는 이들 공업의 공장주·기사·숙련 노동자 등은 대부분이 일본인이다. 조선인이 비록 기사와 숙련 노동자의 능력을 가졌다 해도 다만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교육과 경험을 얻을 기회가 없다.
최후로 이런 종류의 공업화는 대다수의 조선 인민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소비품의 산출량이 퍽 적어졌으며 개전 이래 더욱 일본은 전시 경제에 대해서 필요한 물품에만 중점을 두었다.
몇가지 특수 기업
1932년 조선공업 산품 총액의 100분의 64는 식량공업의 산품이다. 그 다음은 화학공업과 방직공업인데 각각 100분의 10 내외를 점하였다. 이밖에 철물·기계·도기·목재·목기·인쇄·가스·발전 등도 매우 중요하나 산출량이 많지 못하다. 1931년 이후에는 화학 공업·방직·철물·기계와 발전(發電)에 집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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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 부근은 일본 제국의 최대 화학 공업 중심지의 하나이다. 유안(硫安)·유산(硫酸)과 허다한 기타 화학품을 제조하는 공장이 있고 아울러 알미늄·마그네슘(鎂)을 제조하는 공장이 있다. 이밖에 조선 서북부에도 이러한 종류의 공장이 있다.
서울·인천 구역에, 전쟁 전에는 열 몇 개의 기계 제조 공장이 있었는데 이 지역 중의 영등포는 방직 공업의 중심으로 3개의 큰공장이 있다. 시멘트 공장도 역시 일본인의 소유이다. 조선인은 소규모의 기업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도기·목재·목기와 기타 소모품을 제조하는 공업을 위주로 한다.
조선에서의 공업의 예를 약간 들면 그 발전 과정 중의 특질을 표시할 뿐 아니라 동시에 전쟁 후방의 조선의 약간 중요한 생산품 중에서의 지위를 가히 알 수 있다.
인조석유공장은 조선공업의 요인을 대표하기에 가장 족하다. 이런 종류의 공장은 최초 야구(野口)에 의하여 동북 구역에 건립되어서 정부의 방대한 보조를 받고 동시에 일본인 기사와 숙련 노동자를 고용하였다.
조선에는 석유의 생산이 없어서 순전히 수입한 휘발유와 수입한 원유를 제련하는 큰 연유로(鍊油爐)의 생산품에만 의존한다. 일본이 다른 지역에서 석유의 자원을 획득해서 인조 석유를 만들려는 계획은 전혀 변경이 없으며 현저하게도 일면으로는 선박의 결핍으로 인해서, 다른 일면에서는 일본 본토·만주·조선과 화북에서 전시 경제의 완비체를 기도하고 있었다.
전쟁 전에 약간의 도시 중에서는 이미 방직공장을 성립하였다. 조선은 방직에서도 자급자족이 불능하였다. 1936년에 전체 생산은 수요량의 100분의 40, 즉 4억 5천 2백 만 평방야드 중의 1억 7천 5백 만 평방 야드를 생산하는 데 불과하였다.
전쟁이 박두하자 방직 공장의 확장은 정돈 상태에 빠졌다. 금후에 방직공업을 곧 부흥시키려면 원료가 수요되니 이를 수입하여야 된다. 1934년에 조선미(米)의 일본 시장에서의 경쟁은 일본 농민으로 하여금 악영향을 받게 하므로 조선 총독은 부분적으로 그 산미 증가 계획을 포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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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에서는 면화를 재배하고 북부에서는 양모를 산출한다’는 구호를 걸었다. 그래서 전시 조선은 매년 면화 1억 파운드를 생산하였다.
전력의 풍부
전쟁 후방의 조선 전력의 공급 응용은 말이 아니었다, 대규모가 아닌 전기발전소를 제외하고는 전시에 모두 파괴되었다. 조선공업산품의 총가치는 다만 일본 본토의 20분의 1밖에 아니되며 조선 하류(河流)의 발전량은 일본의 6분의 1에 해당한다. 더우기 그것은 압록강 유역 야구(野口)의 발전소가 그의 공장과 서울·평양 일대의 용전에 공급하는데, 조선수력발전의 전도는 더욱 유망하다.
압록강 상에는 조선과 만주에 공급할 허다한 땜과 발전소를 설계 중에 있다. 전부가 완성되면 세계에서 가장 큰 발전소의 하나가 될 것이 그 중 1개의 땜과 발전소는 1937년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조선·만주와 야구(野口) 회사가 공동 투자하여 건설하였는데 신의주에서 거슬러 올라가 35 내지 40마일 지점에서 현재 이미 완성 단계에 있다. 그 전력은 조선 방면에서 신의주 이남의 도시에 공급하고 만주 방면에서는 심양(봉천)과 기타 도시에 공급하는데 안산(鞍山)의 강철 공장을 포괄하고 또 무순(撫順) 탄광을 포괄한다. 이 압록강 제1 발전소의 발전량은 60만 킬로와트 이상 인데 소련의 베드롭스크 하천의 큰 땜의 발전량은 이전에는 55만 8천 킬로와트였다.
조선 남부에서 쓰는 화력 발전소는 부산·대구·군산 및 그 부근 구역의 수요에 공급한다.
광업
조선 전시의 광업은 몇몇 지방에서는 그의 전시 공업과 비슷하였다. 일본의 대회사가 통제하고 소유하는 광업장은 동시에 대량의 보조금을 받는다. 다만 금광은 예외다. 금광은 1941년 이후 이미 보조금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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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금이 가장 많은 것은 텅스텐과 돌비늘(雲母)이다. 1937년의 산량을 초과한 텅스텐은 매 톤 보조금이 2백 50 내지 3백 원인데 돌비늘은 1천 원 내지 2천 원에 달한다. 이밖에 광로(礦路)와 전선(電線)을 건설하는 데도 보조금이 있다.
조선 광산의 중요성은 그 산량에 있지 않고 그 종류가 많은 데에 있다.
이미 발견된 광산은 금·은·동·철·석탄·납·아연(亞鉛)·텅스텐·마그네슘·흑연(石墨)·돌비늘(雲母) 등이다. 가장 양질의 석탄은 평양 지역에 있는데 연산 6백만 톤이다.
조선은 현재 일본이 수요하는 텅스텐의 2분의 1을 공급하고 동시에 원동에서 바리움(鋇)을 생산하는 주요한 국가이다. 이밖에 조선은 흑연과 돌비늘을 생산하는 유일한 산지이다. 돌비늘의 품질은 상당히 저열하다.
돌비늘의 품질은 미국·실론도(島)와 마다가스칼이 획득하는 산품에 미치지 못하나 다만 조선의 출산은 세계 돌비늘 총산량의 100분의 30이 되어서 그 무역 중의 지위는 비상히 중요하다. 만주는 통상 산철(產鐵)로 일컬어지며 1939년 이래 모산(茅山)의 철광 삼릉 회사와 반관(半官)적인 일본 제철회사와 연합 개발을 거친 결과 그 산량은 연 6백만 톤에 달하여 이미 만주를 초과하나, 그 품질은 좀 떨어진다. 모산의 철사(鐵砂)는 철의 함량이 100분의 35 정도가 되며 일본 본토의 철사는 철의 함량이 100분의 50이 된다. 그리고 일본측이 일컬은 바에 의하면 만주 일부 지역의 철사는 함철량이 더욱 높다.
개전 이래 일본은 이미 금으로써 수입한 화물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으므로 조선의 금광은 모두 작업이 정지되었다. 전쟁 후방에서의 조선의 금은 매우 중요하다. 조선의 산금은 일본 본토보다 많으며 필리핀과 같이 원동에서 주요한 산금 국가이다.
철도(鐵道)
조선 공업의 낙후는 가히 중국과 대조되는데 다만 교통 시설에 대해서 언급하면 중국과는 반대다. 1941년 조선의 면적이 8만 2천여 평방 마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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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 마일의 철로가 있고 중국은 4백만 평방 마일의 면적 중에 단지 8천 마일의 철로가 있을 뿐이다. 조선 철로의 간선은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이르는 만주의 안심(安瀋) 철로와 연결하고 여기서부터 심양·대련·하르빈·북경·천진과 중국 기타 각지에 도달한다. 전쟁 전에는 이 철도망은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되어 유럽과 아시아의 공도가 되었었다.
철로의 간선은 신의주로부터 반도를 종단하여 남으로 부산에 이르고 여기서 7시간 반을 경과하여 바다를 건느면 일본 본주의 하관(下關)에 달한다.
황해 연안의 각 항구 목포·군산·인천·진남포 등은 모두 지선이 있어서 간선과 연결된다. 1941년 이전에는 반도를 횡단한 것은 다만 서울에서 원산에 이르는 1선 뿐이었는데 이 철로는 원산에서 계속 북상하여 만주 변경에 이르고 다시 두만강을 거쳐 웅기·나진에 이른다.
1941년에 별도로 한줄기 횡단철도가 성립되었는데 평양과 원산을 연접함으로써 간선의 부담을 경감하고 아울러 만주 철로와의 연결을 강화하였다.
조선의 철로 간선은 만주와 중국 본토의 철로와 똑같이 4피트 8인치의 표준 궤도로 일본 철로의 3피트 8인치의 궤도와 다르다. 조선의 최초의 철도는 미국인에 의해서 건조되었는데 그는 정부의 허가를 얻어 서울로부터 인천에 이르는 철로를 건설하였다.
일본의 선황(船荒)을 구제
조선 철로의 운수량은 비록 일본에 미치지 못하나 다만 매년 증가 중에 있으며 아울러 일본 선박의 결핍을 상당히 구제하였다. 1940년에서 1941년에 이르는 재정 연도 중에 조선의 철로 총 운수 화물은 2천 5백만 톤, 그 중 정부가 소유한 3천 마일의 철로에 의한 운수는 2천만 톤에 달한다.
조선 철로의 화물 운송량은 다만 일본 본토의 8분의 1이며 그 철로의 길이는 약 일본의 4분의 1이다.
조선의 철로는 완전히 전략상의 수요를 위한 것이다. 전시 조선 철로의 운수는 크게 증가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일본·만주간 또는 일본·중국간 선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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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을 보충케 하였다. 다만 전쟁이 끝날 무렵에 조선의 철로는 잠시 상업상의 수요를 초과하였다.
해항(海港)과 선박
조선에는 적지 않은 해항이 있어서 그 중요한 것은 모두 철로와 연결이 되어 있다.
1936년 각 항구로 드나드는 선박은 총계 1천 6백만톤으로 월남 각 항구에 드나드는 선박에 비해서 총 톤수는 3배나 많았는데 월남과 조선의 인구는 거의 동등하다.
부산은 조선의 주요한 해항인데 1936년의 무역액은 일본 본토의 가장 큰 3개 해항 즉 횡빈(橫濱)·신호(神戶) 및 대판(大阪)과 근소한 차가 있을 뿐이다. 부산과 하관(下關)간에 기선 왕복이 있고 조선 서안의 해항은 그 무역액이 부산에 접근한다. 다만 조수의 고차(高差)가 너무 심하여 퍽으나 영향을 받으며 인천의 조석(潮汐)은 고차가 30피트에 달한다. 인천과 진남포는 서울·평양 양대 도시의 출해구(出海口)이며 군산과 목포는 쌀과 목화의 출항이다. 압록강 입구에 근간 이미 새로 항구가 개설되었는데 이는 공업화한 신의주 구역의 출입구이다.
동북 해안 방면에는 청진·나진·웅기항이 있어서 본구역과 북만의 출입구로 되었다. 청진·나진은 일본의 무학(舞鶴)·신사(新瀉)와 기선으로 왕복이 있고 그 철로는 하르빈과 연접한다.
일본의 조선에서의 무역 상의 지위
조선의 항운(航運)은 일본인에 의해 조종된다. 조선인이 소유한 선박은 작은 어선이 주가 된다. 삼릉(三菱)은 부산에 있는 조선 중공업 회사로 능히 5천 톤급의 선박을 만들 수 있다. 들은즉 최근 인천·군산 등지에서도 이미 소규모의 조선 공장이 성립되었다.
조선의 무역액은 월남에 비해서 크게 몇배나 된다 하니 그 중요성을 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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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있으며 조선의 1939년의 수출 총액은 2억 6천 만원이고 수입 총액은 3억 6천 만원으로 원동의 무역 지구 중 가장 중요한 지위가 되었다.
조선의 수출입하는 무역 중 일본과 만주가 100분의 90 이상을 점하고 만주는 조선의 수입 무역 중 100분의 5를 점하며 대부분이 소맥의 수입이다. 수출 무역은 100분의 10을 점하고 1939년에는 100분의 20에 달하였다.
조선의 만주에 대한 수출 무역이 증가한 원인은, 조선 상품의 수출이외에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이 그 통제 밑에서 만주의 개발을 기도함으로써 대량 물자가 조선을 경유하여 만주로 수줄되기 때문이다.
기타 국가와 조선의 무역은 미미하여 보잘 것이 없다. 중국은 겨우 조선 수입 무역의 100분의 1과 수출 무역의 100분의 2 혹은 3을 점한다. 조선의 미국에 대한 중요 수출품은 물고기 통조림·전구(電球)·흑연(石墨) 등인데 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것은 기계·휘발유·목화 등이다. 1939년 이전에는 담배도 또한 주요한 품목이었다.
[조선 국제 무역표는 생략]
2. 중앙 아시아의 한인
1935~37년 간에 소련 당국은 국방상의 원인에 의해서 연해주 일대의 수십만 한인을 시베리아의 아득한 광야를 경유해서 신강(新彊) 서북 중앙 아시아의 카자크스탄으로 옮겼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역사상 최대의 민족 이동의 하나이다.
조선 민족의 발자취는 역사상에 있어서도 아시아 중부를 밟은 사실은 있었다. 당나라 시절에 대장(大將) 고선지(高仙芝)는 고려인으로 일찌기 1부대의 군대를 영솔하고 신강성 화전(和闐)으로부터 출발하여 세계 최고의 파밀 고원을 거쳐서 오늘의 카시미르·아프카니스탄 일대를 전전(轉戰)하고 대소 뻐리(勃律)를 정복하였다. 고 선지가 파밀 을 경과한 간고한 행군은 일찌기 거세적 군사 전문가의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 다만 아시아 동북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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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민족이 대규모적으로 중앙 아시아에 기거하게 된 것은 이것이 결국 처음 되는 사실이다.
1919년 4월 한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성립될 때 소련의 한인은 대표를 파견하여 참가하였다. 1922년 상해의 한인은 국민 대회를 소집하고 노령의 한족 대표도 참가하였으며 이후로부터 소련의 한인은 외부와 격절되어 날로 더욱 심하여져서 중경의 임시정부는 소련의 한인과도 왕래가 퍽 드물게 되었다. 한인 이충모(李忠模)는 일찌기 소련에 10년 이상 체류하였다. 지난 해 주소(駐蘇) 중국 대사 소역자(邵力子)의 협조를 얻어서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중앙 아시아 신강(新疆)·감숙(甘肅)·섬서(陜西)성 등지를 경유 중경에 도착하였다. 그가 신강을 경유할 무렵에는 퍽 순탄하였으나 다만 감숙 경내에서 구류되어 보계(寶鷄) 부로(俘虜) 수용소에서 1년 여 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최근 중경에 이르러 필자에 대해서 중앙 아시아 한인의 근황을 말하였다. 담화한 한국말은 조선민족혁명당 선전부장 신기언(申基彥)이 번역하였다.
이(李) 씨 담화의 결론은 소련 경내의 한인은 물질 생활이 매우 풍족하고 문화 수준도 상당히 높다. 다만 그들이 정치상 자유가 결핍하여 역시 대일혁명 활동에 종사키 불능하게 된 것이다. 담화에 의하면 1935년 이후에 1차 한인의 이동이 있었고 동시에 한인에 한하지 않고 중국·일본인도 그 중에 포괄되었는데 다만 한인이 많을 따름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1개
정거장으로부터 출발한 한인은 약 30만 인으로 추산된다. 이동 실행 전에 소련 당국은 중앙 아시아에서 농장·주택·가구·생산 도구·문화·교육 시설 등을 적당하게 설치하였다. 1935년부터 한인은 연속 옮겨졌다.
카자크스탄은 역사상 유목민의 무대인데 이번에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조선 농업 민족을 옮겨 들인 것이다. 다만 카자크공화국 중에는 근 10개 민족이 이들 멀리 온 객족(客族)과 서로 사이가 매우 좋다.
중앙 아시아의 조선인은 문화 수준이 퍽으나 고상하다. 그중에는 소학·중학과 대학이 있고 그 중 조선문을 위주로 하고 노문은 부(副)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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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관계로 한교(韓僑)도 대개 러시아 글을 이해한다. 동시에 그들도 한글 서보(書報)·잡지가 있다. 소련 당국의 정책은 각 민족이 그 고유한 문화를 보지케 하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민족원(民族院) 중에 5개 한교의 대표가 있다. 민족원 이하의 각급 민혜 기관 중에 한교 대표의 인원수가 당연히 많으며 이 씨의 담화에 의하면 소련 경내 한교 중 공산당이 많은데 1941년에 허다한 한교가 당적에서 제명되었다. 제명된 원인은 듣건대 한교의 중요한 요망이었다 한다. 이는 조국의 해방을 쟁취하려 함이요, 공산주의가 민족 운동에 대하여서도 전혀 성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혁명을 진행하는 데는 조직이 있어야 하는데 다만 소련 공민은 경제·문화적 단체에는 가입할 수 있으나 정치성을 띤 조직은 불능하다. 소련 붉은 군대 중에는 한적(韓籍) 사병이 약 10만 인이 있어서 대독(對獨) 전쟁 중에서 탁월한 공훈도 세웠다. 붉은 군대 중의 한적군이 방금 장관(將官)의 계급에까지 승급한 사람도 상당히 많다.
1935년 이전에 소련에는 조선 사단이 있었는데 완전히 조선인으로 조직 되었었다. 1935년 이후 조선 사단은 해산되어 사병은 기타 부대 속에 나누어 편입되었다. 한교가 홍군(紅軍) 중에서 기계사(機械師)·탱크 기타 고급 기술을 맡은 인원도 그 수가 적지 않고 또 성적도 양호하다.
소·독 전쟁이 발생한 뒤 소련 경내에서는 폴란드 군단이 성립되었다. 듣건대 소련 경내 한교도 역시 조선 군단을 조직할 것을 요구하여 대일 작전에 참가하려 하였다. 다만 당국이 시기 상조라는 이유로 전혀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방금 소련 한교의 분포는 지난 7월 31일 이 씨의 한국임시정부 주회(週會) 중 보고에 의하면,
‘연해주 일대의 한인 중 중앙 아시아 카자크스탄으로 이주한 자는 그 총수가 약 10만이며 아아배로한(阿亞北魯韓) 해구(海口)에서 고기잡이하는 한인 약 4만 인이 스탈린그라드 전쟁 시에도 중앙 아시아로 이주하였다. 모스크바에는 한인 1천 명이 있고 북빙양 일대에는 약 3만 명이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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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보밴커(布甫卞珂) 부근에는 한적 기술자가 2천 명이 있고 타아컹터(塔亞庚特)를 중심한 지역에 한인 10만이 있으며, 신 시베리아 일대에 한인 10만이 있고 아울러 한인 최고 학부와 문화 기관이 있다.
조선의 혁명 운동 중, 이 씨는 역사적 인물의 하나이다. 1922년 상해에서 한교가 거행한 국민 대회에서 이 씨는 러시아에 있는 한교를 대표하여 참가하였고 회의가 끝난 뒤에는 국내로 돌아왔다가 일본측에 체포되어 일본에서 옥살이 4년 반 만에 만기 석방되고 1930년 만주를 거쳐서 소련에 도착하여 있다가 지난해 또 모스크바로부터 중국으로 온 것이다.
3. 이봉창과 윤봉길[생략]
4. 집단적으로 돌아온 한국 병사
1943년 겨울 일본은 한국에서 소위 특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그 대상자는 한국·일본과 만주의 전문 학교 이상의 한국 학생이다. 제1회의 특별 지원병은 3천여 명인데 지난 해 1월 25일 평양에서 입대하고 이 뒤에 곧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 중 1천 5백 명 내외가 중국으로 왔으며 이밖에 전쟁 전방으로 간 자도 있고 이 밖에 괴뢰 만주국으로 간 자도 있다. 그들 중국으로 온 지원병은 서주(徐州)·양주(揚州)·태원(太原) 남경 등지 각 거점에 도착한 뒤에 산란하게 중경을 향하여 도망하였다. 그 중의 50여 명은 이미 우리의 큰 후방에 안착하였고 또 35명은 1월 31일에 중경에 도달하였다.
1938년부터 일제는 한국에서 소위 지원병 제도를 시행하여 일반 한국 인민을 대상하였으나 아직 고등 지식 분자에게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지난 해 겨울에 소기(小磯)가 조선총독으로 취임할 무렵 일면으로는 일본인의 힘의 부족을 감안하고 다른 일면으로는 한국의 지식 분자가 항상 혁명석 영도 인물이 됨을 감안하여 이를 막아 보려는 시범으로 특별 지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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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를 창설하였으므로 이번 중경으로 온 한국 사병은 완전히 전문 이상의 학생이다. 그들의 학교는 일본의 조도전(早稻田)대학·동경신학대학·제국대학과 한국 서울의 보성전문학교 등을 포괄한다. 20세 전후의 한국청년은 모두 한국이 망한 이후에 생장한 청년들이다. 그들이 국내에서는 먼저 노예화한 교육을 받았고 그 후에는 또 일본으로 가서 학문을 구하였는데, 적 일본은 털끝만큼도 그들의 항일 사상과 민족 관념을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은 중경으로 와서는 역시 한국의 임시정부를 찾게 되고 그들의 담화는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한국이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하여 그 전도는 퍽 밝아졌다.
1위로 온 청년과 필자와의 대담 중에 그가 한국을 떠나기 이전 그의 부모는 그를 중경으로 향해서 탈주하라고 고무하였다. 그들은 원하기를 자기가 여러가지로 위험을 당할지언정 다만 자기의 자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분투하기를 소원하였다. 다른 1위 청년의 담화는 그들이 부대 중에서 일본인 사병과 서로 사귀지 않고 또 때로는 항상 싸움이 잦았었다.
소위 지원병은 실제로는 전혀 불지원이다. 한국의 가정은, 대개 그 자제가 일본의 전문 이상의 학교에서 공부 중에 일본의 헌병·경찰이 그 가족을 강제로 위협하여 그 자제가 귀국해서 입대하도록 한다. 대개 그 명령에 위반하고 항거하는 청년 학생은 곧 체포해서 북해도 등지의 광산·농장으로 보내어 노동을 시킨다. 근년 이래 한국의 연합국에 대한 작전이 더욱 더 중요한데 다만 외계와 광대한 한국 인민의 진상이 비상하게도 격절 되었다. 그러나 이들 청년이 일본으로부터 한국에 돌아왔다가 다시 만주화북을 경유해서 중국으로 올 적에 적지 않은 것 즉, 사람들로 하여금 주의할만한 소식을 가지고 온다. 원래 경응(慶應)대학 예과에서 공부하던 김준엽(金俊燁)의 담화에 의하면 일본 국내의 한교는 약 3백만 명이며 대다수
는 기아 선상에서 노예적 노동자로 끌려 왔는데 그들은 하루 동안 뼈아프게 일해서 한 그릇 밥도 배불리 먹을 수 없고 밤에는 밀봉되어 도망할 수도 없게 되었다. 특별히 장비된 미국 비행기가 동경에서 폭음 소리를 굉장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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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시킬 무렵 한국 노동자가 비행기를 타려는 소동이 일어나 이 때문에 체포된 수도 퍽 많은 숫자가 된다.
듣는 바에 의하면 한국 국내의 지하 운동도 일반적으로 전개된다 한다. 각 학교의 독서회 등도 있어서 이 역시 정치 투쟁의 단체이다. 필자가 한국 국내의 현상이 안정하냐고 물을 적에 그들은 즉각 머리를 흔든다. 또 대답하기를 파업이며 조세 항거 투쟁 등은 그칠 날이 없다고 한다. 담화에 의하면 한국 인민의 생활은 극단으로 고통스러우므로 그들의 애국심
도 이미 발전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들은 때로는 미국으로부터 들려오는 한국 말 라디오에 의해서 대략 전쟁의 대세며 임시정부의 동태 등을 알고 있었다 한다.
한국내 인민의 투쟁하는 실정에 관해서 그들은 몇가지 실례를 생각나는 대로 지적한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소화 16년(1941년) 경 김□□라는 이가 있어서 한국 남부에서 대규모의 스트라이크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여 사전에 무기를 감추어 두고 조직을 진행하다가 불행히도 발각되어 2백여 명이 체포되었다. 다른 한 사람의 설명은 4년 전 서울 휘문중학과 경기중학 학생이 애국성을 띤 비라를 뿌리다가 체포된 수가 퍽 많았다.
중국이 항전을 개시한 후 일본은 한국 인심의 귀추를 위해서 한인의 반항을 방지하려는 견지에서 소위 내·선 일치라는 정책을 실시하려 하였다. 그 근본 목적은 한국 인민의 민족 관념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점점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것이었다. 담화에 의하면 방금 한국의 학교에는 이미 한글이 완전히 없어졌고 영어 교수시간도 매주 6시간이던 것이 2시간 전후로 감해졌고 이밖에는 완전히 일본문을 전용한다. 전국에서 일부 관의 경영인 ≪매일신보≫를 제외하고는 그 나머지 한글 신문은 이미 대개 금지되었다. 한인을 강압하여 일본인 성명을 쓰게 하므로 이번에 돌아온 사병도 모두 일본류의 성명을 붙여서 김준엽의 일본식 성명이 국원상광(國原常廣)이다.
만주 방면에는 한인이 2백 만이 있다 하나 상세한 실정은 그들도 명료하게 알지 못하며 다만 아는 것은 한국과 만주 변경 일대에는 현재 한국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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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대 2만여 명이 있고 때로는 압록·두만 양강을 건너서 한국 경내로 쳐들어오기도 한다는 것 뿐이다.
2월 3일 새벽 필자는 한국임시정부 새 사무소로 가서 이들 돌아온 한국 지식 청년군을 방문하였다. 이번 중경에 온 이는 모두 35인인데 이밖에도 아직 8개의 부녀와 4개의 어린이 그룹이 있다.
그들은 모두 회색 빛의 면포 군복을 입고 짚신을 신었으며 2개월간을 경과한 도보 여행이어서 의복이 매우 남루하여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중에는 포병도 있고 치중병도 있으나 대다수는 보병이다. 몇 사람은 외모가 매우 일본인과 흡사하다.
그들 대다수는 중국에 와 본 일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도무지 중국 말을 이해치 못한다. 다만 중국의 함락된 구역과 유격 지구에서 수개월간 체류한 뒤에는 이미 능히 보통 중국 말을 할 수 있었다.
지난해 3월 29일 밤 서주로부터 도주해 온 김 준엽은 가장 먼저 탈주한 사람인데 그의 중국 말은 비교적 유창하여 필자와의 대담 시간도 가장 길었다. 김준엽의 담화에 의하면 그는 1943년 10월 4일 소집에 응하여 동경을 떠나 동년 12월 22일 특별 지원병이 서울에 집중할 때 신체를 검사하는데 이는 입대 전의 예비 훈련으로 ‘연성(練成)’이라 칭하고, 28일 해산하여 각자가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1월 20일 다시 평양에서 집중 훈련을 받고 동시에 각 사단에 편입하였다. 매 1중대마다 일본사병 백여 명이 있고 한국 사병 5명을 삽입한다. 2월 13일 한국을 떠나 4일 후에 서주에 도착하였다. 서주에 체류한 지 43일만에 유격구(遊擊區)로 도주하여왔다.
그의 말은 도주할 무렵 몸에 수류탄 1개를 품고 있었는데 만일 뜻밖의 사태가 발생될 경우를 고려해서 자살을 준비하였다 한다. 3월 29일 깊은 밤 3시 경 도망할 무렵 일본병에게 발각되어 발포사격을 받았으나 행으로 명중은 되지 않았다. 그가 아는 바 도망할 무렵 희생된 사람은 서주의 2인, 숙현(宿縣)의 1인이었다.
도망한 뒤에 일본인은 즉시 부근 한인 집 도처에서 수색하여 도망한 소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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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으로 퍼졌고 국내에도 전파되었다.
적이 함락한 지구의 한적 사병은 기회만 있으면 곧 중국의 후방으로 향하여 도망하였다. 일본이 지난해 4월에 한국에서 징병을 시작하였는데 제1회의 징병은 이미 13인이 도망하여 노하구(老河口)에 도착하였다.
그 후에 일본인은 김군이 유격구 방면으로 도망한 것을 알고 3차나 유격구 측으로 서한을 보내어 포로가 된 중국 사병 8명으로써 그 한 사람(김준엽)과 교환하자고 요구하였다. 그 중의 서한 한 장은 김군이 몸에 지니고 왔으므로 필자는 그 피봉 및 서신 말미 서명처에 날인하고 ‘대허가경비대장(大許家警備隊長)’이라 한 것을 보았다. 서한은 중국문으로 되었는데 그 중에 언급하기를,
‘우리들의 사병 1명이 본래 항상 교육상의 차질로 인하여 그윽히 도주하여 뒤에 귀부에 수류된 것을 조사하였으며 폐대는 도주병이 명예에 구애됨이 있을까 하와 대단히 느낀 바이오니 선생께서 그 사병을 본대로 돌려보내 주심을 바라오며 그 생명은 염려 없이 보호됩니다. 만일 귀부에서도 유사한 일이 본 부대에 있을 경우 역시 능히 선처할 것입니다. 만일 서한으로 의사가 통달되지 않는다면 청컨대 부근 지점을 지정하시면 인원을 파견하여 상담케 하겠읍니다.’
담화에 의하면 일본 병사는 지금 생활이 심히 곤궁하다. 양식이 부족하여 중국 인민을 노략질하여 보충한다. 재외 작전 7,8년에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매 퍽으나 전쟁에 실증이 났다. 그는 서주에서 일본 사병 2명이 자살하는 것도 보았다고 한다. 한적 사병은 명의상으로는 일본 사병과 대우가 똑 같으나 같은 정도의 일본인이 소위로 임관되는데, 한인은
좀처럼 소위로 임관되지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한국 인민은 모두 자유의 구역으로 향해서 도주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다만 국내의 인민은 고통스럽게도 기회가 없다. 그들은 임의로 만주에도 가기 불능하다. 반드시 경찰서의 허가증을 가져야 하므로 그들이 중국으로 가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도망할 가장 좋은 기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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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이다.’
5. 조선의 지하운동
이평산(李平山)은 조선지하운동의 한 지도자인데 근일 조선으로부터 이리저리 돌아서 중경까지 왔다.
1945년 2월 19일 오후 조선지하운동의 근황을 필자에게 상세하게 말하였다.
담화에 의하면 조선인민이 같은 원수에게 대하여 품은 적개심은 현재 최고조에 달하였다.
지하운동은 이미 일반적으로 전개되고 조직도 날로 엄밀하게 되어 간다. 그의 말은 비밀에 관한 까닭에 그 상세한 것을 발표하기는 불능하다. 가히 말할 수 있는 바는 일단 시기만 온다면 조선에서 적어도 30만의 지하운동 간부가 들고 일어나서 연합국의 작전에 영향을 줄 것이다.
담화에 의하면 조선지하운동 역량의 원천은 3종류로 나눈다. 제1은 적의 산업 기관에 있어서 공장·광산·교통·운수 등 각 부문에서 근무하는 조선 노동자는 일본과 조선 국내에 그 수가 각 2백 50만 씩이 있으므로 총계 5백만이 되며 그 다음에는 군대에서 복무하는 조선인이 합계 70만이다. 또 다음에는 이들 노동자와 사병의 가족수는 가장 많아서 합계 8백 만이나 된다. 이 3종류의 사람들이 모두 침략자의 참혹한 고통과 압박을 몸소 받고 있으므로 혁명 의식은 비상하게 공고하다. 소위 노동자 혹은 정병(征兵) 연령에 달하는 청년이면 노동으로 출정, 즉 병역의 의무를 노동으로 한다고 하여 근본적으로 노동자 임금을 주지 않는다.
또는 인질 방식을 써서 데려다가 하루에 다만 쌀 반근을 주면서 작업은 무제한이다. 정병(征兵)이라면 조선 청년은 당연히 침략자의 작전을 원치 않으므로 대개는 완곡하게 거절하고 피하려 한다. 듣건대 지난 해에 응모되어 입대 복역한 자는 합계 25만 명인데 도망한 수는 7만 명에 달하여 총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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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그 중의 다수는 만주 또는 화북으로 도망하고 아직 도망치 못한 사람도 입대 이후에 역시 기회를 타서 중경으로 도망하려고 결심하고 있다. 이 씨의 담화에 의하면 그가 알고 있는 바로는 조선 사병이 중국 자유 지역으로 도망해 온 수는 이미 5백만이 넘는다고 한다.
필자는 학생과 농민의 혁명 전선 중에서의 지위를 물었다.
그 답변에 의하면 지난해 4월부터 중등 이상 학교로 농·공·기계 등의 과를 제외하고는 이미 완전히 정학되었다. 혹은 사병으로 혹은 노동자로 혹사를 당하게 되었다.
군대 혹은 산업 부문에 가입한 지식 청년은 혁명의 중견 분자이다. 농민에 이르러서는 다수가 가족 일문까지 포괄된다. 농민 생활은 비상하게도 고통스러우므로 암시장은 기형적으로 발전되었다. 농민은 몰래 생산품을 암시장에서 팔아서 수입을 증가시킨다. 암시장은 경제적 의의 외에 또한 정치 활동의 중심적 구실도 한다.
최근 몇해 동안 조선 인민의 대적 반항심은 더욱 더욱 치열해졌다.
그 담화에 의하면 방금 한인이 정치 문제 때문에 투옥된 수는 약 7만 명이고 ‘사상관찰범’이란 죄명을 씌워서 감시, 혹은 강제로 집단 거주 생활을 하게 된 수는 약 4만 명이다. 일찌기 사상 문제로 인해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수는 약 4만 명이다.
중·일 전쟁이 발생된 후조선 인민이 혁명운동의 참가로 인해서 체포된 총계는 20만에 달한다. 듣건대 1942년 서울을 중심으로 발생한 작탄(炸彈)·전단(傳單)·무기 유실 등의 건으로 인해서 검거된 수는 3백 만에 달한다. 동년 조선군총사령부에서 비밀 정보누설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 일본측은 조선 각지에 있는 재봉틀 3천 기를 몰수하여 서울의 화신(和信) 창고에 쌓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모두 태워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8백 명이 체포되었다. 이밖에 1941년 함흥과 부산의 군대 화약고에서 발생한 폭발 사건도 있다.
중·일전쟁 발생 후에 일본은 조선에서 회유 정책을 썼다. 지난 날에는 한인이 대의사가 되는 것을 허락치 않다가 내·선 일치를 내건 뒤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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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도 대의사가 될 수 있다 하여 현재 조선인 대의사 1명과 후보 대의사 3명이 있다. 조선 총독부 중의 과장·참의 등 직도 지난 날에는 한인이 담임하는 것을 허락치 않다가 현재는 원칙상으로는 허락이 되었다. 이 밖에 군사 회의 중에도 약간의 한인이 있다.
중경 방면에서 한번 말이 퍼지기를 ‘일구(日冦)는 현재 일본에 있는 영친왕 이은(李垠)을 이용하여 조선에서 괴뢰 만주국과 비슷한 조직을 성립한다’고 한다.
이 씨 담화에 의하면 그는 전혀 이러한 말을 들은 바 없으며 또 불가능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가 일례를 들어 말하기를, 어느 때인가 일본 수상 동조(東條)가 국회에서 발표한 연설 중에 ‘동방 각 민족은, 인도·버어마·필리핀·태국·만주 등은 각자가 응당 정부를 건립할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조선의 자치파는 조선도 그 가운데에 포괄될 줄로 인정한다는 특별 전문으로 동조를 치하하였는데 그 결과 전문을 보낸 사람은 체포가 되고 동조는 동시에 이를 위해서 특별 성명을 발표하였다. 언급하기를 ‘조선은 일본과 같은 종족이므로 여기 포괄되지 않는다’ 하였다.
이 씨는 서울 출신으로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서 교육도 못 받고 1926년 6·10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다음해 2월 중국 무창(武昌)·한구(漢口) 지방에 이르러 무관 학교 포병과 기사로 임관되어 오패부(吳佩孚) 토벌 전에 참여하였다. 그 뒤 구강(九江)·광동 등지를 경유하여 상해에 도착하고, 1928년 상해를 떠나 동경으로 갔었다. 조선 의열단의 중요한 간부의 자격으로 민중 조직의 책임을 지고 폭동을 일으켰다.
일본에 있을 때에는 조선노동자동맹을 성립시켰다. 1929년 국내에서 신간회(新幹會) 해산 사건으로 인해서 체포되어 1930년부터 10년 징역의 판결을 받고 옥고를 겪다가 1940년에 석방되어 동년 국내 각 지하 조직의 대표로 통일된 ‘독립협회’를 성립하였는데 이는 방금 조선에서 최대의 지하 조직이다.
이 씨는 그 협회의 중요한 책임자의 하나이다. 그 해에 이 씨는 북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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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동지와 연락하고 1941년 또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1943년 비로소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온 것이다. 이 씨가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10년 동안 옥중 생활한 담화에 의하면 매 1인에 방 1간씩 독방인데 매일 하는 일은 60매의 봉투를 만드는 일이다. 이는 태업의 결과이다. 가장 많이 만드는 날에는 2천 개 이상이 된다. 옥중에서는 영양 부족과 노동의 과도로 죽는 자가 퍽 많고 자살자도 적지 않다.
옥중의 식품은 일종 콩 4할, 소미 4할과 안남미 2할을 혼합하여 만든 물건인데 범인은 9등급으로 나누었다. 범죄가 가볍고 혹 체력이 노동할만 한 자는 1등에 속하고, 이렇게 차례로 등급을 정하여 이 씨는 제9등에 속한다. 그러므로 매일 식사 때면 겨우 앞서 말한 혼식인 주먹밥 한 덩이와 반찬 대신 소금국 한 그릇이 고작이었다.
1934년 옥중 수인 4천여 명은 기아를 견디다 못하여 폭동을 일으켜 충돌한 결과 수인 30여 명이 죽고 간수병의 사상자도 많았었다. 이후 사정은 조금 개선이 되었다.
6. 미국 한교(韓僑)의 혁명 운동
미국 한교의 수는 많지 않아서 총 1만 명이 못 된다. 그 중의 7천 명 내외가 하와이에 집중해 있고 별도로 1천 8백 명은 미국 대륙에 있다. 그들의 수는 비록 많지 않으나 다만 그 경제 능력과 지식 수준은 기타 각 지의 조선 인민보다 더 한층 유력하고 우수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혁명에 대한 공헌, 더우기 그 재정과 문화 선전 면에서 실로 경시할 수 없는 존
재이다.
미국에 있는 한국 단체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가 가장 오랜 것은 조선혁명의 원로인 안창호가 1905년에 창립한 ‘한국국민회’를 들 수 있다. 그 회가 창립될 무렵의 원명은 ‘독립협회’로, 1910년에 이르러 ‘조선민족협회’로 개칭하였다가 후에 다시 명칭을 고쳤다. 안 씨는 1932년 상해에서 윤봉길 의사의 거사로 일제가 발광적으로 한인을 체포할 무렵 체포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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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으로 압송되어 1938년 옥사하였다. ‘국민회’의 다음은 1921년 이승만 박사가 창립한 ‘동지회’인데 총본부는 지금 로스앤젤레스에 있다.
‘한국국민회’와 ‘동지회’ 외에 미국 한교의 혁명 혹은 학술 단체의 수는 많으며 비교적 중요한 것은 뉴우요오크의 ‘조선구제협회’·‘조선기독교학생회’, 워싱턴의 ‘조선학회’·‘중·한인민동맹’ (1942년에 이미 해산)과 한국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회’, 로스앤젤레스의 ‘한국국민회’·‘조선연구협회’·‘조선학생연맹회’ 등이다. 이 밖에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은 미국에도 모두 지부를 두었다.
이상의 각 단체의 대다수는 동시에 간행물을 발행하여 조선의 실정이며 혁명의 활동 상황 등을 소개하였다.
예를 들면 조선경제협회에는 ≪조선경제월보≫가 있고 조선학회에는 ≪조선호성(朝鮮呼聲)≫이란 격주간 간행물이 있으며, 주미외교위원회에는 한글로 된 ≪회무통신주보≫, 한국국민회에는 영문과 한글로 된 ≪신조선≫이란 주간이 있으며, 조선민족혁명당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영문과 한글로 된 ≪독립조선≫이란 주보가 있고, 조선연구협회는 ≪조선연구≫ 계간, 조선학생연맹은 부정기적인 ≪자유조선≫, 한국연합회는 영문과 한글로 된 ≪신조선≫이란 주보를 발간한다.
세계 대전이 발발한 뒤에 미국의 한교는 역량을 집중하고 복국을 추진하기 위해서 각 한교 단체의 통일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1941년 4월 10일로부터 29일까지에 국민회와 동지회 양 단체의 수령이 호놀룰루에서 개회하여 통일의 구체적 방법을 협상 토의하였다. 개회의 결과 각 한교 단체로부터 대표를 파견하여 한족연합희를 공동으로 조직하고 총본부를 로
스앤젤레스와 호놀룰루우 양지에 치(置)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 목적은
(1) 당시 미국의 국방 계획과 방금 연합 국가의 작전 노력을 옹호한다.
(2) 중경의 한국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재정적 원조를 급여한다.
(3) 선전기구를 성립하고 아울러 대표단을 파견하여 워싱턴에 주재케하고 세계에 대하여 조선의 실정을 보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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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력과 재력으로 원동에 있는 조선의 군사 활동을 원조한다.
미주 한교의 내력은 한족연합회 설계 연구소 출판인 ≪한국의 실정≫ 중에 실린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50세 이상의 한교 : 생각컨대 1900년 이전에 미국 경내에는 외교 대표와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한교는 전혀 없었다. 20세기 초에 조선 노동자 4,5천 명이 멕시코·쿠바·하와이 등지로 이주하여 노동에 종사하였다.
그들의 대다수는 농촌으로 오고 극히 적은 수가 번역과 교사를 담임하였다. 당시 조선 인민과 외계와의 접촉에는 선교사가 중요한 매개체이다. 그러므로 이들 노동자 중에 기독교도가 적지 않다. 이들 한교 다수는 농장에서 노동을 하고 상업을 경영하기도 한다. 보석업·여관업·가구업 등이다. 하와이 군도의 한교는 하와이에 집결하여 산다. 미국 대륙의 한교의 대다수는 태평양 연안에 있는데 로스앤젤레스에는 한교가 7백 명이나 있어서 이는 미국 대륙에서 한인이 가장 많은 지방이다.
그들의 수는 비록 날로 줄어드나 다만 다른 데와 비교한다면 아직도 인원수가 가장 많은 집단이다. 그들은 조선의 실황을 소개한다. 그리고 젊은 세대를 교육하여 혁명 정신을 지속케 하며 모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40세 내지 55세의 한교 : 이들 중에는 1924년 이민법이 반포되기 전에 미국 유학으로 간 학생이 많이 있으며 한인의 선배들이 하와이로 데리고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상륙한 자녀들도 많이 있다. 그 중에는 조선 국내와 미국에서 모두 학교를 거쳐서 동시에 학위를 획득한 사람도 상당수 있고 또는 미국과 동양을 왕복하면서 상업 경영, 혹은 학교·회사·교회 중에서 직무를 담임하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25세 내지 40세의 한교 : 이들 중에는 다수가 1924년 이민법 반포후에 학문을 탐구하려고 미국으로 간 학생들이며 별도로 소수의 한인은 재미 제2세의 중년층으로 그 중의 국내 혹은 일본의 학교를 졸업한 자도 적지 않은데 동양 언문, 특히 일문에 정통하므로 방금 미국 전시 공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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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한 사람이 퍽으나 많아서 번역·교육 등을 담임하여 일하고 있다.
30세 이하의 한교 : 대다수는 미국에서 성장한 한인으로 미국 본토에 1백 60개의 조국(祖國) 국적인 조선적 미국인으로 군대 복무도 하고 있는데 하와이에는 그 수가 더욱 많다.
미국과 조선은 근대사에서 퍽으나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조선 인민은 금일 기독교 혹은 천주교를 신봉하는 수가 50만에 달하는데 주요한 것은 미국 선교사의 노력의 결과이다. 종교를 제한 외에 아울러 교육에 노력하여 전쟁 전에 조선 국내의 대학은 영·미 계통이 소관한 바 많았었다.
외교 방면에서 미국은 조선과 2개의 통상 우호 조약을 체결한 국가이다. 1876년 일본이 먼저 조선과 통상우호조약을 체결하였고 1882년 5월 22일에는 미국이 조선과 유사한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의 우호 호조적 관계를 규정하였다. 그래서 1905년 10월, 일·한보호조약이 성립되기 1개월 전에 한국 황제는 정세가 긴장하여짐을 감안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전문을 보내 언급하기를 ‘우리나라가 위급한 이때 우리에게 효과있는 원조를 주소서’라고 하였다.
진주만(Pearl Harbor) 사건 발생 이후 미국 방면에서 조선 문제에 대하여 더욱 관심이 절실해졌으며 교민측에서는 적지 않은 우호 단체를 성립시켰다. ‘한·미협회’와 ‘한국친우회’ 등이 그것이다. 정부측에서는 한인은 전혀 적국 인민이 아니라고 선포하고 또 조선적인 기념우표를 발행하여 위에 조선의 태극국기를 인쇄하여 기념하게 하고, 이밖에도 각 대학 중에 조선어문과를 창설하는 등 날로 볼만한 것이 많이 늘어났다.
전쟁이 점점 일본 본토에 박두하여질수록 한·미의 관계는 더욱더욱 밀접하여졌다. 일례를 들면 미군이 오래지 않아서 사이판(Saipan)섬을 수복할 것인데 여기 있는 한교는 1천 5백 명이며, 테니안(Tenian)섬의 2천 2백 명과 이밖에 미군 중의 한국적 포로가 있어서 그 수는 날로 눈에 띠게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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