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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o Gyun,허균(許筠)
호민론(豪民論) -허균(許筠)
주저리 주저리 : 2007/05/14 22:42
天下之所可畏者 唯民而已 民之可畏 有甚於水火虎豹 在上者方且狎馴而虐使之 抑獨何哉
천하지소가외자 유민이이 민지가외 유심어수화호표 재상자방차압순이학사지 억독하재
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을 두려워해야 함은 홍수나 화재
또는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심함이 있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다니 도대체 어째서 다만 그러한가?
夫可與樂成而拘於所常 循循然奉法役於上者 恒民也 恒民不足畏也
부가여악성이구어소상 순순연봉법역어상자 항민야 항민불족외야
이미 이루어진 것을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고, 늘 보아 오던 것에 익숙하여
그냥 순순하게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항민(恒民)이다.
이러한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厲取之而剝膚椎髓 竭其廬入地出 以供无窮之求 愁嘆咄嗟 咎其上者 怨民也 怨民不必畏也
려취지이박부추수 갈기려입지출 이공무궁지구 수탄돌차 구기상자 원민야 원민불필외야
모질게 착취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면서도,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산출되는
것을 다 바쳐서 . 한없는 요구에 이바지하느라,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윗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원민(怨民)이다 이러한 원민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潛蹤屠販之中 陰蓄異心 僻倪天地間 幸時之有故 欲售其願者 豪民也
잠종도판지중 음축이심 벽예천지간 행시지유고 욕수기원자 호민야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세상을 흘겨보다가
혹시 그 때에 어떤 큰일이라도 일어나면 자기의 소원을 실행해 보려는 사람들은
호민(豪民)이다.
夫豪民者 大可畏也 豪民 伺國之釁 覘事機之可乘 奮臂一呼於壟畝之上
부호민자 대가외야 호민 사국지흔 첨사기지가승 분비일호어롱무지상
則彼怨民者聞聲而集 不謀而同唱 彼恒民者 亦求其所以生 不得不鋤耰棘矜往從之 以誅无道也
칙피원민자문성이집 불모이동창 피항민자 역구기소이생 불득불서우극긍왕종지 이주무도야
이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호민이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편을
이용할 만한때를 노리다가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번 소리를 지르게 되면, 원민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서도 소리를 지르고, 저들 항민도 또한 제 살 방법을
찾느라 부득불 호미, 고무레, 창, 창자루를 가지고 쫓아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인다.
秦之亡也 以勝廣 而漢氏之亂 亦因黃巾 唐之衰而王仙芝黃巢乘之 卒以此亡人國而後已
진지망야 이승광 이한씨지란 역인황건 당지쇠이왕선지황소승지 졸이차망인국이후이
是皆厲民自養之咎 而豪民得以乘其隙也 夫天之立司牧 爲養民也 非欲使一人恣睢於上
시개려민자양지구 이호민득이승기극야 부천지립사목 위양민야 비욕사일인자휴어상
以逞溪壑之慾矣 彼秦漢以下之禍 宜矣 非不幸也
이령계학지욕의 피진한이하지화 의의 비불행야
진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과 오광 때문이었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또한 황건적
때문이었다. 당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와 황소가 그 틈을 타고 일어나 마침내 백성과
나라를 망하게 한 뒤에야 그쳤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백성들에게 모질게 굴면서 저만
잘 살려고 한 허물이며, 호민들이 그러한 틈을 잘 이용한 것이다. 하늘이 벼슬아치를
세운 것은 백성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지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서
계곡같이 커다란 욕심을 부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진나라, 한나라 이후의 화란은
당연한 결과였지,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今我國不然 地陿阨而人山 民且呰寙齷齪 无奇節俠氣
금아국불연 지협액이인산 민차자유악착 무기절협기
故平居雖无鉅人雋才出爲世 而臨亂亦无有豪民悍卒倡亂首爲國患者
고평거수무거인준재출위세 이림란역무유호민한졸창란수위국환자
其亦幸也 雖然 今之時與王氏 前朝賦於民有限 而山澤之利 與民共之
기역행야 수연 금지시여왕씨 시불동야 전조부어민유한 이산택지리 여민공지
通商而惠工 又能量入爲出 使國有餘儲 卒有大兵大表 不加其賦 及其季也 猶患其三空焉
통상이혜공 우능량입위출 사국유여저 졸유대병대표 불가기부 급기계야 유환기삼공언
조선은 중국과는 다르다. 땅이 비좁고 험하여 사람도 적고, 백성 또한 약하고 게으르며
잘아서, 뛰어난 절개나 넓고 큰 기상이 없다.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 위대한 인물이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나와서 세상에 쓰여지는 일도 없었지만, 난리를 당해도
또한 호민이나 사나운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앞장서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던 적도
없었으니 그 또한 다행이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 함께해보면,
고려 때에는 백성들에게 조세를 부과함에 한계가 있었고,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했었다. .장사할 사람에게 그 길을 열어 주고,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또 수입을 잘 헤아려 지출을 하였기 나라에는 여분의
저축이 있어 갑작스럽게 커다란 병화나 상사(喪事)가 있어도 조세를 추가로 징수하지는
않았다. 그러고도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세가지가 비게 됨을 걱정할 정도였다
我則不然 以區區之民 其事神奉上之節 與中國等 而民之出賦五分 則利歸公家者纔一分
아칙불연 이구구지민 기사신봉상지절 여중국등 이민지출부오분 칙리귀공가자재일분
其餘狼戾於姦私焉 且府無餘儲 有事則一年或再賦 而守宰之憑以箕斂 亦罔有紀極
기여랑려어간사언 차부무여저 유사칙일년혹재부 이수재지빙이기렴 역망유기극
故民之愁怨 有甚王氏之季 上之人恬不知畏 以我國無豪民也
고민지수원 유심왕씨지계 상지인념불지외 이아국무호민야
우리 조정은 그렇지 아니하여 구구한 백성이면서도 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을
중국과 대등하게 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내는 조세가 다섯 푼이라면 조정에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한 푼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한 자들에게 어지럽게 흩어져 버린다.
또 관청에서는 여분의 저축이 없어 일만 있으면 한 해에도 두 번씩이나 조세를 부과하는데,
지방의 수령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칼질하듯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것 또한 끝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보다 더 심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윗사람들이
태평스레 두려워할 줄 모르니 우리 나라에는 호민이 없기 때문이다.
不幸而如甄萱弓裔者出 奮其白挺 則愁怨之民 安保其不往從而祈梁六合之 可跼足須也
불행이여견훤궁예자출 분기백정 칙수원지민 안보기불왕종이기량륙합지변 가국족수야
불행하게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백성을 빼앗아 일어난다면 근심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증하겠는가?
기주·양주에서와 같은 천지를 뒤엎는 변란은 발을 구부리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爲民牧者 灼知可畏之形 與更其弦轍 則猶可及已
위민목자 작지가외지형 여경기현철 칙유가급이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만한 형세를 명확하게 알아서
시위와 바퀴를 고친다면, 여전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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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돌
豪民论
蛟山许筠
天下之所可畏者。唯民而已。民之可畏。有甚於水火虎豹。在上者方且狎馴而虐使之。抑獨何哉。夫可與樂成而拘於所常見者。循循然奉法役於上者。恒民也。恒民不足畏也。厲取之而剝膚椎髓。竭其廬入地出。以供无窮之求。愁嘆咄嗟。咎其上者。怨民也。怨民不必畏也。潛蹤屠販之中。陰蓄異心。僻倪天地間。幸時之有故。欲售其願者。豪民也。夫豪民者。大可畏也。豪民。伺國之釁。覘事機之可乘。奮臂一呼於壟畝之上。則彼怨民者聞聲而集。不謀而同唱。彼恒民者。亦求其所以生。不得不鋤耰棘矜往從之。以誅无道也。秦之亡也。以勝,廣。而漢氏之亂。亦因黃巾。唐之衰而王仙芝,黃巢乘之。卒以此亡人國而後已。是皆厲民自養之咎。而豪民得以乘其隙也。夫天之立司牧。爲養民也。非欲使一人恣睢於上。以逞溪壑之慾矣。彼秦漢以下之禍。宜矣。非不幸也。今我國不然。地陿阨而人少。民且呰寙齷齪。无奇節俠氣。故平居雖无鉅人雋才出爲世用。而臨亂亦无有豪民悍卒。倡亂首爲國患者。其亦幸也。雖然。今之時與王氏時不同也。前朝賦於民有限。而山澤之利。與民共之。通商而惠工。又能量入爲出。使國有餘儲。卒有大兵大表。不加其賦。及其季也。猶患其三空焉。我則不然。以區區之民。其事神奉上之節。與中國等。而民之出賦五分。則利歸公家者纔一分。其餘狼戾於姦私焉。且府無餘儲。有事則一年或再賦。而守宰之憑以箕斂。亦罔有紀極。故民之愁怨。有甚王氏之季。上之人恬不知畏。以我國無豪民也。不幸而如甄萱,弓裔者出。奮其白挺。則愁怨之民。安保其不往從而祈,梁,六合之變。可跼足須也。爲民牧者。灼知可畏之形。與更其弦轍。則猶可及已。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대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란 항민(恒民)이다. 항민이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란 원민(怨民)이다. 원민도 결코 두렵지 않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란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이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호민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세가 편승할 만한가를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밭두렁 위에서 한 차례 소리 지르면, 저들 원민이란 자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도 함께 외쳐대기 마련이다. 저들 항민이란 자들도 역시 살아갈 길을 찾느라 호미ㆍ고무래ㆍ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들을 쳐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秦) 나라의 멸망은 진승(陳勝)ㆍ오광(吳廣) 때문이었고, 한(漢) 나라가 어지러워진 것도 역시 황건적(黃巾賊)이 원인이었다. 당(唐) 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가 틈을 타고 일어섰는데, 마침내 그것 때문에 인민과 나라가 멸망하고야 말았다. 이런 것은 모두 백성을 괴롭혀서 자기 배만 채우던 죄과이며, 호민들이 그러한 틈을 편승할 수 있어서였다.
대저 하늘이 사목(司牧 임금)을 세운 것은 양민(養民)하기 위함이고,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메워도 차지 않는 구렁 같은 욕심을 채우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저들 진(秦)ㆍ한(漢) 이래의 화란은 당연한 결과이지 불행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땅이 좁고 험준하여 인민도 적고, 백성은 또 나약하고 좀 착하여 기절(奇節)이나 협기(俠氣)가 없다.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도 큰 인물이나 뛰어나게 재능 있는 사람이 나와서 세상에 쓰여지는 수도 없었지만, 난리를 당해도 호민ㆍ한졸(悍卒)들이 창란(倡亂)하여, 앞장서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게 하던 자들도 역시 없었으니 그런 것은 다행이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는 같지 않다. 고려 시대는 백성에게 부세(賦稅)하는 것이 한정되어 있었고,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가졌다. 상업은 자유롭게 통행되었고, 공인(工人)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또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나라에는 여분을 저축해 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갑작스런 큰 병화(兵禍)와 상사(喪事)가 있더라도 그 부세(賦稅)를 증가하지 않았었다. 고려는 말기에 와서까지도 삼공(三空)을 오히려 걱정해 주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변변치 못한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만은 중국과 동등하게 하고 있다. 백성들이 내는 세금이 5푼(分)이라면 공가(公家 관청)로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1푼(分)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스런 사인(私人)에게 어지럽게 흩어져버린다. 또 고을의 관청에는 남은 저축이 없어 일만 있으면 1년에 더러는 두 번 부과하고, 수령(守令)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마구 거두어 들임은 또한 극도에 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엽보다 훨씬 심하다. 그러나 위에 있는 사람은 태평스러운 듯 두려워할 줄을 모르니 우리나라에는 호민(豪民)이 없기 때문이다. 불행스럽게 견훤(甄萱)ㆍ궁예(弓裔) 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며, 기주(蘄州)ㆍ양주(梁州)ㆍ6합(合)의 변란은 발을 제겨 딛고서 기다릴 수 있으리라. 백성 다스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두려워할 만한 형세를 명확히 알아서 전철(前轍)을 고친다면 그런 대로 유지할 수 있으리라.
http://japanese.joins.com/article/874/129874.html
【噴水台】民心を読み取る
2010年06月08日12時48分
[ⓒ 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comment0mixihatena0
類例のない旱魃に地がからからに乾いた。王も業を煮やした。朝鮮朝、成宗(ソンジョン)12年のことだ。「農事の季節なのに雨が降らず、稲を植えることができずに畑作物さえ枯れた。その原因は全て私にあるようだ」成宗は極甚な日照りが自分の実情のせいだと思った。反省の意味で派手な宮廷ではなく素朴な所で働き、素朴な食べ物を食べると約束した。「中央と地方官僚はもちろん山里と漁村の民たちも誤った政務を指摘する文を書くように」とも指示した。
世論調査も選挙もなかった時代、天災地変は民心のバロメーターとして通じた。王が国を誤って治めれば民の恨みが空に届き、災害をもたらすと信じた。日照りを恐ろしく思った成宗が、自省モードに突入して民心に聞き入るとした理由だ。それでも翌年までどうにもならないと、成宗は今一度国政全般に民の批判を受け入れることを確かめる教書を発表した。ここに三政丞も「官職を交代して徳のある人に代わる」と連帯責任を負うと明らかにした。支配層が心ひとつにして民心をなだめ、危機を突破しようと労力したのだ。
手酷く打たれる前にあらかじめ民心を読もうとした王も多かった。絶えず対民接触を試みた「疎通のリーダー」英祖(ヨンジョ)が代表的だ。在位28年目になった年には昌徳宮宣化門(チャンドックン・ソンファムン)の前に市廛商人たちを呼び「君たちが感じる病弊と苦痛を言いなさい」と命じた。軍営と不法商人が結託して大変だというなどいろいろな訴えが飛んだ。傾聴した英祖は官僚たちに直ちに処理を指示した。商人の一部を国事に特採するまでした。九重宮闕に閉じこめられて民心の流れを逃す過ちを犯さないために、ことさら努力し、また努力したのだ。
6・2地方選挙結果をめぐり、青瓦台と与党圏が「民心が分からないとしても、分からなさすぎた」と痛恨の自省をしているという。勝利感に酔った野党圏でも「民心がいつ変わるか分からない」と警戒している。「天下で最も恐るべきものは民だ。洪水や火事、トラやヒョウよりずっと恐ろしい存在だ。「かつて許筠(ホ・ギュン)が『豪民論』で、民を見下す為政者たちに投げかけた警告だ。今になってでも政界が国民を恐ろしいとは悟ったのは幸いだ。しかし果たしてその意をまともに読んでいるかは疑問だ。自分たちの利益を追って民心を誤解し、ごり押しすれば、本当に酷い目に遭うのが分かっているのか。
シン・イェリ論説委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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