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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ugust 2, 2012

Heo Gyun, author of Honggildongjeon

Heo Gyun ホ・ギュン 허균
Honggildongjeon 洪吉童-ホン・ギルトン(홍길동 洪吉童伝


許筠(きょ・いん、ホ・ギュン、허균、1569年 - 1618年)は、李氏朝鮮時代の文人、政治家、思想家、小説家。本貫は陽川。字は端甫。号は蛟山(こうさん、キョサン、교산)、惺所(せいしょ、ソンソ、성소)、白月居士(はくげつこじ、ペクウォルキョサ、백월거사)。ハングルで書かれた最古の小説『洪吉童伝』の作者。韓国のルソー



Honggildongjeon
English: Honggildong jeon
한국어: 홍길동전
Date 17th centry






http://cafe.daum.net/yeohwicenter/4B9G/1570?docid=BfRN4B9G157020070628154429




"조선시대 最高 시선집 ‘국조시산’ 원본 찾았다 "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을 남긴 허균이 편찬한 조선 시대 최고(最高)의 시선집으로 꼽히는 ‘국조시산(國朝詩刪)’ 원본이 처음 발견됐다. 이 원본은 허균이 조선 전기의 한시를 골라 당대 최고의 궁중 사자관(寫字官)들에게 필사를 맡겼으며 본인이 직접 시에 대한 비(批)와 평(評)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허균의 소장인(印)과 수정한 흔적, 필사자인 사자관들의 이름이 남아 있다. 허균이 소장했던 실물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사자관이 필사본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

특히 이번 발견으로 지금껏 학계에서 ‘국조시산’의 정본(正本)으로 생각돼 온 ‘목판본’에 비평(批評)과 작자명 등이 잘못 실려 있으며, 시의 편집 체제 역시 원본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국조시산’ 연구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목판본은 허균이 죽은 지 80여 년 뒤인 1697년 조선의 문신
박태순이 간행한 것을 가리킨다.

고문헌연구가인 박철상 씨는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해제(解題) 사업 자문위원으로 도서관 수장고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허균이 소장했음을 증명하는 인장과 직접 수정한 흔적이 남아 있는 9권 3책의 ‘국조시산’ 수정고본(手定稿本)을 발견했다”고 26일 밝혔다. 그는 이 같은 내용의 연구 결과를 30일경 발간되는 ‘한국문화연구’ 12집에서 발표한다.

이번에 발견된 수정고본은 허균이 1609년 이전에 펴낸 것으로 추정되는 최종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자관들을 동원해 필사한 원본 중 하나다. 각 책의 첫 장에 허균의 호인 교산(蛟山)을 수로전(垂露篆·세로획의 끝을 붓을 눌러 그치는 방법)으로 새긴 도장이 찍혀 있다. 허균은 대단한 장서가였지만 역모를 꾀한 죄로 광해군에게 참형을 당해 소장인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허균이 자신의 저작에 직접 소장인을 날인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수정고본에 이름을 남긴 필사자 6명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할 정도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한 사자관들. 이 중 이해룡은 글씨를 잘 써서 한석봉에 필적한 이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은 것은 ‘국조시산’이 단지 허균 개인의 취향으로 편찬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임진왜란 직후 붕괴된 조선의 출판시스템을 회복하기 위해 공적 목적으로 편찬됐다는 의미다.

수정고본 첫 줄에는 ‘양천허균단보비선(陽川許筠端甫批選)’이라고 명시돼 있다. 목판본엔 없는 문장이다. 양천은 허균의 본관, 단보는 허균의 자. 허균이 비평하고 뽑았다는 뜻이다.

이번 발견으로 그동안 목판본 비평 부분의 오류도 확인됐다. 박 씨가 분석한 결과 수정고본에는 시구에 대한 평(評)이 해당 시구의 옆에, 시 전체에 대한 감상평인 비(批)가 시 맨 끝에 표기돼 있으나 목판본은 비평 자체가 누락되거나 전혀 다른 구절에 평이 실린 곳들이 있었다. 작자명이 다른 경우도 있었다.

수정고본을 확인한 안대회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허균 당대의 필사본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는 “목판본은 허균이 편찬한 원본을 구하지 못해 오류가 많았다”며 “당대 최고의 글씨를 통해 비평가로서 허균의 위상을 새롭게 조명하는 발견”이라고 말했다. 정민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국조시산은 최고의 앤솔로지”라며 “연구자들에게 통용되는 목판본과 다른 오리지널의 등장은 시 비평사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화보]조선시대 최고 시선집 ‘국조시산’ 원본사진

:국조시산(國朝詩刪):

조선 초 정도전부터 허균 당대의 인물인 권필에 이르기까지 35명의 당대 최고의 한시 889수를 뽑아 엮은 시선집. 명실상부 조선 최고의 시선집으로 많은 이의 호평을 받았다. 허균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뒤 1697년 문인 박태순이 ‘용감하게도’ 이 책을 간행한 것은 그만큼 이 시선집의 가치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사자관(寫字官):

규장각에서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은 벼슬.

:수정고본(手定稿本):

소장인이 있는 수택본이자 ‘산삭(刪削·필요 없는 글자나 글귀를 지워 버림)’ 표시가 있는 고본을 가리킨다.

http://koreas.tistory.com/167




http://www.segye.com/Articles/News/Article.asp?aid=20120330022297&cid=



published in 1935 Korea,colonized by japan era.
banned hangul.....?


김유정 미확인 소설 '홍길동전' 공개되자<세계일보>입력 2012.03.30 19:13:01, 수정 2012.03.30 23:48:58글자
[이슈]주부 절반은 운동해도 살 안빠져...[화제] 1,230만원 대명리조트 분양찬스!!고문서 수집가 김현식씨 발굴
원전과 달리 율도국 내용 없어
소제목 서술형 표기 시도 눈길

한국 현대 단편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소설가 김유정 선생이 발표한 소설 ‘홍길동전(사진)’이 새롭게 발굴돼 눈길을 끌고 있다.

29일 김유정 선생 제75주기 추모제에서 전상국 김유정기념사업회 이사장이 공개한 이 작품은 1935년 10월 아동잡지인 신아동(新兒童) 제2호에 발표된 14쪽 분량의 ‘홍길동전’으로, 작품의 실체가 알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작품은 고문서 수집가이자 서지 연구가인 김현식 대일광업 전무이사가 전 이사장에게 알리면서 빛을 보게 됐다. 이로써 김유정 선생이 남긴 소설은 31편에서 32편으로 늘어나게 됐다.

김유정 선생의 홍길동전은 당시 가장 유명한 삽화가인 이승만씨가 그림을 그렸으며, 허균의 원전과 달리 홍길동이 율도국을 건설한다는 내용 대신, 홍길동이 이조판서 자리를 수락하고 입궁하다 자객을 만난 뒤 조선을 떠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 이사장은 “모두 9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소제목을 서술형으로 표기해 당대 그 어떤 작가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시도를 선보였다”며 “단문 형식과 김유정 소설 문장의 특징인 의성·의태어 활용이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다”고 말했다.

춘천=박연직 기자 repo21@segye.com




http://ask.nate.com/qna/view.html?n=6411079
tell me the prot of Honggildongjeon



대표적 고전문학 홍길동전의 내용은?
goodare | 08.01.30 14:19
답변 1
조회 378

네티즌공감
우리나라 대표적 문학인 홍길동전에 대해서 알고싶어요!!
홍길동전은 누가 처음 지으셨고.. 어떤 내용이였는지...
원본에 대해서 궁금하네요~~~ ^^
홍길동.. 실제 인물 이였나요??
태그홍길동전 홍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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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swl465 님의 답변
08.01.3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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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홍길동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 실존인물이었다고 하네요.
홍길동은 연산군 시절의 도둑으로 매우 흉악했다고 합니다.
선조 시대의 실록에도 홍길동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 시대에는 홍길동이란 이름이 욕을 할 때 쓰던 이름으로 사람들 입이 오르내렸다고 하네요.

"홍길동전"의 줄거리는 아래 본문을 참고해주세요 ^^




<"홍길동전"의 줄거리>
홍길동은 조선조 세종 때 서울에 사는 홍판서의 시비 춘섬의 소생인 서자다. 홍판서가 용꿈을 꾸어 길몽이기에 본부인을 가까이하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춘섬과관계를 하여 길동을 낳았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고 장차 훌륭하게 될 기상을 보였으나, 천생인 탓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품는다.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이 될까 두려워하여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려 한다. 길동은 위기에서 벗어나 집을 나와서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러다가 도적의 소굴에 들어가 힘을 겨루어 두목이 된다. 먼저 기이한 계책으로 해인사의 보물을 탈취하고 활빈당이라 자처하며 기계와 도술로써 팔도지방 수령들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다치지 않는다. 길동은 함경도 감영의 불의의 재물을 탈취하면서 '아무 날 전곡을 도적한 자는 활빈당 행수 홍길동'이라는 방을 붙여둔다. 함경감사가 도적을 잡는 데 실패하자 조정에 징계를 올려 좌우 포청으로 하여금 홍길동이라는 대적을 잡으라고 한다. 팔도가 다같이 장계를 올리는데 도적의 이름이 홍길동이요, 도적당한 날짜가 한날 한시였다. 국왕이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명령을 전국에 내렸으나 길동의 도술을 당해낼 수 없어서 홍판서를 회유하고 길동의 형 인형도 가세하여 길동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병조판서를 제수, 회유하기로 한다. 길동은 서울에 올라와 병조판서가 된다. 그 뒤 길동은 고국을 떠나 남경으로 가다가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 요괴를 퇴치하여 볼모로 잡혔던 미녀를 구하고 율도국 왕이 된다. 마침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와 삼년상을 치른뒤 율도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잘 다스린다.

<홍길동은 실존인물이었다>
홍길동은 소설 속의 가상인물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입니다.
홍길동은 연산군 시절의 도둑으로 연산군 일기 연산군 6년 10월에 강도 홍길동이 잡혔는데, "한이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기록되었을 정도로 흉악한 도둑이었다고 합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살던 선조 시대의 실록에도 홍길동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 시대에는 홍길동이란 이름이 욕을 할 때 쓰던 이름으로 사람들 입이 오르내렸다고 하네요^^;;
그러다 이 후 150년 정도가 지난 영조 때에는 또 이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장사꾼들이 맹세할 때 쓰던 이름이었답니다.
이게 당시의 부패한 사회상이나 허균이 도적 홍길동을 의적으로 근사하게 쓰면서부터 욕에서 맹세를 하는 이름으로 바뀟 것 같다 추측됩니다.
즉, 백성들 사이에 오래 전부터 전해져오던 홍길동의 이야기를 허균이 근사하게 의적으로 그린거고,
이 홍길동이라는 주제는 허균외의 작가들로 소설로 썼을만큼 유명한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출처-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t06OD7/IJtEs5Te5aw6kmr3P5/aD5apS&qb=yKux5rW/IL3HwbjAzrmw)

답변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

図們大作
foodie book


http://blog.ohmynews.com/leerberg/175440









[책] 허균은 맛있는 음식에 집착, 정약용은 ‘개고기 애호가’
책 2012/02/06 10:04 분수령
허균은 맛있는 음식에 집착 정약용은 ‘개고기 애호가’
밀도살 감시꾼 ‘소파라치’ 등 음식문화로 시대·인물 읽기
조선의 탐식가들/김정호 지음/따비ㆍ1만5000원

조선 최고의 ‘스타 선비’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는 정치적 상황 탓에 오랜 세월 귀양을 가야 했다. 위대한 지성과 숭고한 예술혼의 소유자로 알려진 추사였지만, 그가 귀양지에서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음식 타령’이 상당하다. 곶감을 보내라, 인절미를 보내라, 약식, 조기젓…, 그리고 그 비싸다는 민어와 어란까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그야말로 ‘음식에 환장한’ 이였다. 친구였던 명필 석봉 한호, 그러니까 한석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스스로를 “평생 입과 배(口腹)만을 위한 사람”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허균은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려고 당시 이조판서에게 남원으로 보내달라 로비를 했는데, 그 이유가 남원 음식이 맛있어서였다. 다른 고장을 제안받자 그는 거부하면서 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으로 보내달라 떼를 썼다. 게와 생선의 고장이어서였다. 경쟁에서 밀려 결국 ‘게가 없는’ 공주 목사로 발령을 받자 허균은 인사권자였던 로비 대상 이조판서에게 비꼬는 투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작자 미상의 조선시대 그림 <야연>. 털방석에 모자를 쓴 모습으로 보아 초겨울인 음력 시월 초하루 고기를 먹는 ‘난로회’ 풍속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는 지금보다 더 쇠고기에 집착했고, 소 밀도살이 성행했다. 나라에서는 농사일을 돕는 소를 잡아먹지 못하도록 우금령을 내렸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따비 제공

저술가 김정호씨의 새 책 <조선의 탐식가들>은 음식 문화로 조선 시대와 조선의 위인들을 바라본 책이다. 교과서에서 만나는 이름들이었던 당대의 학자들과 거물들의 내면과 진면목이 그들이 즐겨 먹은 음식과 식사 철학을 통해 생생하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오해하거나 몰랐던 조선의 식생활상을 흥미롭게 들려주면서 익히 아는 조선 음식문화에 담긴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조선 역사는 ‘쇠고기와의 전쟁’?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며 일어난 커다란 변화 중 하나가 음식이었다. 불교 국가여서 살생을 꺼렸던 고려와 달리 새 왕조 조선은 ‘육식 금지’를 철폐했다. 농사짓는 가장 중요한 동반자인 소를 잡아먹을 수 없었던 대다수 농민들에겐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살판이 났던 모양이다. 쇠고기 광풍이 불었고, 지도층의 탐식과 사치를 우려한 조선은 황급히 ‘소 도살 금령’(우금령)을 내려 쇠고기 열풍을 막았다. 그리고 검소함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밥상론’을 들고나와 왕은 12첩반상, 양반은 7첩반상, 중인 이하는 5첩이나 3첩반상으로 강제 규정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쇠고기에 맛을 들인 양반은 전혀 규정을 지키지 않았고, 백성들도 고기맛에 반했다.

그래서 세종은 소 밀도살을 감시, 처벌하는 ‘금살도감’을 설치하고, 밀도살을 신고하면 도살범 재산을 보상금으로 주는 ‘소파라치’ 제도까지 도입했다. 하지만 정작 세종 자신은 고기반찬 없이는 밥을 못 먹었던 ‘쇠고기 마니아’였다. 사대부들은 유교의 스타인 중국 왕희지가 먹었다는 소 내장구이 ‘우심적’이나 ‘설야멱’ 등의 고기 요리를 즐겨 먹으며 우금령을 비웃었다. 지배층이 지키지 않는 규정이 조선 내내 잘 지켜질 리가 없었다. 요즘의 ‘삼겹살데이’를 연상시키는 ‘고기 먹는 날’도 있었다. 음력 시월 초하루에 고기 요리를 먹는 ‘난로회’ 풍습이다.

모범생 vs 삐딱이-내가 먹는 것이 곧 나다 위대한 인물들은 음식에서도 원칙이 분명했다. 율곡 이이는 평생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으며 우금령을 따랐다. 가장 모범적인 조선 선비의 식생활을 보여주는 이는 다산 정약용. 그는 유배생활 내내 채소를 직접 가꿔 먹었고,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려고 애써서는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보는 일에 정력을 소비할 뿐”이라고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는 공복감을 달래기 위해 음식을 크게 만들어 먹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반면 조선 최고의 반항아이자 괴짜였던 허균은 이런 성리학적 음식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성리학에선 식욕과 성욕을 인격수양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식욕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라고 맞받아치며 ‘조선 최고의 탐식가’로 악명이 높았다. 평생 주류 질서와 반목했던 그는 조선 팔도의 별미를 소개하는 책 <도문대작>을 써서 조선 최초의 ‘음식칼럼니스트’로 기록되기도 했다. ‘도문대작’은 ‘푸줏간 앞에서 입을 크게 벌려 고기 씹는 시늉을 해본다’는 뜻.

개고기, 왕실 잔칫상에도 올랐다 고려 때도 먹기는 했지만 육식 기피 때문에 널리 퍼지진 않았던 개고기를 서민들이 단백질 공급원으로 즐겨 먹게 된 것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였다. 양반들 역시 개고기를 즐겼다는 기록이 <음식디미방> 같은 유명한 음식책에 자주 나온다. 정조가 화성 행차를 하면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올린 음식에도 개고기찜이 들어가 있다. 실록에 왕이 개고기를 먹었다는 내용은 없지만 왕실에서도 개고기를 금기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뜻밖의 ‘개고기 애호가’가 다산 정약용이다. 귀양지에서 마땅한 음식이 없었던 탓으로 추정된다. 흑산도에 유배중이던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섬 안에 산개가 백 마리 아니라 천마리도 넘을 텐데, 제가 거기에 있다면 5일에 한 마리씩 삶는 것을 결코 빠뜨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선배 실학자 박제가에게 개고기 조리법을 배운 다산은 형에게 “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라고 덧붙였다. 진정한 개고기 마니아는 온갖 권세를 휘둘렀고 정치 공작에 능했던 조선 전기의 정치가 김안로였다. 그는 개 요리를 접대한 이에게 벼슬자리를 준 적이 여러 번이었을 만큼 개를 즐겼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다 똑같다. 권세가들의 탐식도, 소들이 고생하는 것도.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기사출처 한겨레 등록 : 2012.02.03 20:41 수정 : 2012.02.03 20:41


http://www.provin.gangwon.kr/executive/page/sub03/sub03_03_06_07.asp


교산 허균(1569~1618)

조선중기 강릉출신의 문신, 개혁사상가로 호는 교산이며 본관은 양천이다.

아버지는 삼척부사를 지낸 허엽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인 예조판서 김광철의 딸이다. 임진왜난 직전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과 허봉이 이복형이고, 허균과 허난설헌이 동복형제다.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였다. 이후 황해도 도사, 형조정랑, 공주목사, 예조 호조참의 등의 관직을 지냈다.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나인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주어서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617년 좌참찬이 되었고, 이듬해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에 연루되면서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사형당하였다.

그의 소설 홍길동전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한글소설이다.
특히 허균은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로,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문집으로 성소복부고가 남아 있다.

문화관광부에서는 2001년 9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허균과 그의 누나인 허난설헌을 함께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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