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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ugust 12, 2012

the strongest curse pile by Emperor Japan 日帝呪いの杭


1 名前:蚯蚓φ ★[sage] 投稿日:2012/08/12(日) 19:08:59.97 ID:???



「鉄杭がびくともせずハンマーの柄が折れてあきらめました。」

12日午前、日帝が民族の精気を切ろうと打ち込んだと見られる全南(チョンナム)海南郡(ヘナムグン)凰山面(ファンサンミョン)玉埋山の頂上の鉄杭除去作業現場。

来る15日、光復節の鉄杭除去行事の準備作業をした‘海南玉埋山鉄杭抜き推進委員会’は舌を巻いた。どれほど強固に固定したのか、二日の作業にもかかわらず鉄杭が全く動かないためだ。
行事の時、すぐに抜けるように前日から準備作業をした推進委員らは手作業をあきらめた。

タガネで鉄杭周辺を20センチ掘ったがびくともせず、作業過程でハンマーの柄5つが折れた。鉄杭を引き上げるために三脚台に縛ったワイヤーも切れてしまった。鉄杭の下まで石灰で固く固定され作業が不可能な状態と推進委は説明した。ヘリコプターを動員して小型掘削機を頂上に運んで柄作業するしかないとため息をついている。

行事は近づくのに鉄杭を抜けず推進委は戦々恐々としている。推進委は15日、山の頂上で山神祭、厄払い、気払いに続き固有祭、鉄杭抜きと復元儀礼、記念碑建立、平安祈願祭などを行う計画だ。

この鉄杭は去る6月、住民の情報提供で木浦(モクポ)大図書文化研究員ピョン・ナムジュ、イ・ユンソン教授が発見した。玉埋山北側頂上(海抜173m)で直径2.7センチの大きさの八角柱だ。

玉埋山は朝鮮時代に玉を生産して全羅右水営の官衙や軍艦を作るのに必要な木材を供給する国家封山だった。鳴梁大捷の勝利地として良く知られた鳴梁海峽の入口にあって外敵の進入を監視しカンガンスレをしたという説話が伝えられる所だ。

/聯合ニュース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n01262&logNo=160025386


http://matiere.at.webry.info/200703/article_9.html

2004年8月に見た映画「キング・アーサー」にまつわる話です。
映画「キング・アーサー」は、イギリスに伝わる伝説「アーサー王と円卓の騎士」を描くアクション作品です。




主な出演
クライヴ・オーウェン Clive Owen アーサー
キーラ・ナイトレイ Keira Knightley グウィネヴィア

http://titose.hamazo.tv/e1589371.html






http://mokuseineko.blog32.fc2.com/blog-entry-452.html



http://www.goodsmile.info/product/ja/2304/%E3%82%BB%E3%82%A4%E3%83%90%E3%83%BC+%E3%83%AA%E3%83%AA%E3%82%A3+%E5%85%A8%E3%81%A6%E9%81%A0%E3%81%8D%E7%90%86%E6%83%B3%E9%83%B7+%E3%82%A2%E3%83%B4%E3%82%A1%E3%83%AD%E3%83%B3.html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n01262&logNo=160025386





[11] 일제 쇠말뚝에 대한 왜곡 역사 포맷
2012/06/16 17:17
http://blog.naver.com/hn01262/160025386

일제가 박았다고 주장하는 쇠말뚝 (http://cafe.naver.com/ptc1997/1096)

여러분 혹시 일제가 쇠말뚝 박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나요?

일제가 우리민족의 정기(???)를 없애기 위해 풍수지리에 따라 민족정기가 살아숨쉬는(???) 수맥에다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요^^

근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상당히 웃긴 것이 조선총독부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할 짓없이 미신같은 풍수지리에 맞춰서 쇠말뚝 박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반일감정에 흽쓸려 조금만 이성을 되찾으면 말이 안된다는 걸 금방 눈치 챌 수 있는 것도 철썩같이 믿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생각의 다른방향으로 전환이 필요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무리 일본이 싫다고 할지라도 일제시대에 대한 사실왜곡을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또한 왜곡을 파헤쳐내는 것을 민족주의라던가 반일이념으로 비난하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그것이야 말로 배타적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왜곡을 하면서까지 타민족을 경계하려는 이른바 쇼비니즘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제 우리 하나하나 파헤쳐 봅시다.

쇠말뚝 이야기는 언제부터 생겨난 이야길까요??

당연히 순진한사람들이라면 일제시대라고 말할 것입니다.

정답은 80년대 후반입니다^^

오잉?? 그러면 80년대 후반 이전에는 일제가 쇠말뚝 박았다는 말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나오지도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믿겨지지 않으시면 http://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hn에서 키워드검색으로 쇠말뚝을 쳐보시면 됩니다.^^

즉 이러한 떡밥은 30년도 안된 신선한 떡밥이었다는 것이지요.

제가 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해 검색한 결과 1989년에 처음으로 일제 쇠말뚝 이야기가 신문에 나오게 됩니다.

이 신문내용은 당시 일본관리부인으로 온 교포 한국인인 강신자씨의 기고문입니다.
(스크랩을 통해 전재하고 싶었으나 무단전재와 재배포에다 스크랩까지 엄격히 금지(ㅎㄷㄷ)되어 있기에 해당기사의 년월일과 신문기사만 인용하겠습니다.)
(1989년 8월 8일 화요일 경향신문 총 16면 중 15면)
(아이러니하게도 일제 쇠말뚝을 찾아본 결과 처음으로 기고한 신문내용조차 일제 쇠말뚝 드립에 대해 회의감을 품는 내용이군요 ㅎㅎㅎ)

그 기고문의 내용을 조금 줄여서 말하자면 재일교포 강신자씨가 한국에 오면서 여러가지 느낀점과 동시에 충청남도도청에 박혀있는 수많은 조선총독부마크(확실한 것이 아닌 추측에 불과)와 독립기념관에서 본 쇠말뚝을 보고 이러한 것에 대한 의문점과 회의감이 들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재일교포의 입장에서 상당히 객관적으로 일제 쇠말뚝을 평가했다는 점에서 좋은 기고문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80년대 후반에 쇠말뚝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일부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예를 들어 강신자씨)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지금까지 이 떡밥이 살아 숨쉰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신기할 따름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내용에서 조선총독부마크와 쇠말뚝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 부분만을 간략히 줄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충청남도 도청 외벽에 조선 총독부의 마크를 남겨 조선인들에게 식민지 굴욕역사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남겼다고 하였지만 이러한 마크를 지나치게 많이 남겨놓은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2. 또한 일제시대를 알고 있는 나이 많은 분들에게 여쭈어보니 이 마크가 조선총독부 마크라는 확증은 없다고 말하였다.

3. 일본이 풍수사상을 바탕으로 한국의 민족정기가 흐르는 수맥에다 쇠말뚝을 박았다고 하지만 일본은 중국 한국과 달리 풍수사상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고 단순히 토지의 미신으로 여겼던 일본이 엄청난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한국의 사상인 풍수사상을 본받아 쇠말뚝을 박을 필요가 있었을까하며 회의감을 품었다.

4. 또한 이러한 말뚝은 독립 후에 되서 발견되었고 그 연유도 밝혀지지 않았다. 조사하다가 총독부의 한국문화조사를 통한 수많은 서적 중 하나인 "조선의 풍수"라는 책이 있다는 걸 알았다.

5. 조선시대 당시에도 조선인들끼리 다투면서 산에 말뚝 박은 이야기도 있고 임신전역때, 명나라 장수가 조선을 시샘하여 쇠못을 박았다는 기록도 발견했다.

여기서 당시 강신자씨의 말을 참고한다면 그 쇠말뚝을 독립기념관에서 보았다고 한다면 실제 쇠말뚝이 화제가 된 시점은 1989년보다 이전이 될 것이고 나의 추측으로는 80년대 중후반쯤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줄을 친 부분은 일제 쇠말뚝 드립에 대한 강신자씨의 평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조선의 풍수"라는 책은 조선총독부가 무라카미(村上智順)라는 관리를 시켜 조선의 풍수를 세밀히 조사해 1931년에 간행된 책으로써 조선의 민족신앙 억제와 풍수설에 따른 묘지가 산림을 훼손한다는 내용의 책입니다.

즉,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한국의 풍수지리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강신자씨의 발언을 신빙성을 더할 수 있는 자료를 제가 인용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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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46권, 21년(1797 정사 / 청 가경(嘉慶) 2년) 6월 24일(계사) 1번째기사
우리 나라에 인재가 없는 것이 산천에 쇠말뚝을 박은 것 때문임을 논하다
차대를 하였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이르기를,
“요즈음 인재가 점점 옛날만 못해지고 있다. 명(明)나라 초기에 도사(道士) 서사호(徐師昊)가 우리 나라에 와서 유람하면서 산천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단천(端川)의 현덕산(懸德山)에 이르러 천자(天子)의 기운이 있다고 여겨 다섯 개의 쇠말뚝을 박고 떠났었으니 북관(北關)에 인재가 없는 것은 실로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서울에 내려온 맥(脈)은 삼각산(三角山)이 주장이 되는데, 들으니 수십 년 전에 북한산성(北漢山城) 아래에다 소금을 쌓고 그 위를 덮어서 태워 마침내 염산(鹽山)이 되어 내려온 맥을 진주(鎭住)시켰으니 현재 서울에 인재가 없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이 비록 상도(常道)에는 어긋난 듯하지만 이치로 보아 더러 있음직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에 이르러 헐어버리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이것 또한 천지의 도를 도와주는 하나의 단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일찍이 총융사(摠戎使)를 거친 조심태(趙心泰) 등에게 묻기를,
“염산(鹽山)은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심태 등이 모두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으므로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7책 26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왕실-경연(經筵) / *수산업(水産業) / *역사-고사(故事)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id=wva_12106024_001&pId=wva_12106024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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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전문은 명나라 도사가 조선의 인재를 막기 위해 5개의 쇠말뚝을 박았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통해 단순히 쇠말뚝 하나로 일제가 박았다는 맹목적 전제를 펴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말할 수가 있겠군요.

그러면 우리 이제 화제를 돌려봅시다. 도대체 누가 이러한 일제가 쇠말뚝 박았다는 드립을 하고 돌아다닐까요?

그러한 것은 꽤나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인터넷 기사 중 쇠말뚝 관련기사 3개의 링크를 걸도록 하겠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019121
http://news.nate.com/View/20100207n04119&mid=n0809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0020800090719347&linkid=42&newssetid=495&from=rank
(네이트와 야후의 댓글이 참 가관입니다^^ 이 포스트 글을 다 읽으신 후에 다시 저 댓글들을 보십시오. 웃음만 나올것입니다. 저 무지몽매한 사람들^^)

두 링크에서 동시에 등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소윤하 민족정기선양회장이라는 사람이지요.

이 사람이 바로 쇠말뚝 드립을 하고 다니는 대표인물이지요.

이 인물에 대해 탐구하기 전에 먼저 저 위의 세 기사의 문제점부터 지적하자면 세 기사는 소 회장의 주장을 근거없이 맹목적으로 인용하여 기사를 써서 많은 독자들을 현혹시키게 만들면서 일제 쇠말뚝이라는 헛소문을 한국인들 뇌리속에 깊숙히 박아놓은 데 혁혁한 공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참, 요즘 기사들의 왜곡수준은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라는 말이 사실이군요 ㅎㅎㅎ

먼저 소윤하 민족정기선양회장의 말을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인용은 『월간 말』지의 「이성을 마비시킨 집단최면의 주술, 쇠말뚝」(2005.12)를 발췌요약하여 소개한 포스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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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사령관이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처형당하기 전에 조선 땅 전역에 모두 365군데의 혈침을 박았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그(야마시타 도모유키)의 통역관으로 일했던 신세우라는 사람이 직접 들었다는군요. 이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쇠말뚝을 뽑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신세우씨의 아들인 신동식이라는 사람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생략)
"영어가 유창했던 신세우씨는 전범재판 때 야마시타 등 일본군 장성들의 변론을 맡기도 했다. 재판 2심에서 야마시타는 세우씨의 변론 덕에 총살형에서 교수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체나마 깨끗이 보존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 선고 며칠 뒤 야마시타는 감옥에서 죽기 직전 은인인 세우씨에게 놀라운 비밀을 고백했다고 한다. 한반도 산 곳곳에 혈침을 박아놓았다는 것과 수탈한 보물들의 행방에 관한 것 등이었다."
(1999년『신동아』8월 호에 「일제의 '쇠말뚝 풍수침략' 은 고도의 심리전이었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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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월간 『군사세계』의 김능화 논설위원이 전범재판기록 등 역사적 사료를 분석해 작성한 「야마시타 육군대장의 최후」라는 글에 따르면 위의 소 회장의 말에는 몇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1. 야마시타의 통역관은 '신세우'가 아니라 '하마모토' 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일본인이었다.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부터 날조 ㅋㅋㅋㅋ)

2. 당시 전범재판의 변호인단은 승전국인 미군 장교들이 맡았다. 조선인 통역관이 변호인단에 있을 수가 없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듯 하나의 날조를 발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 후 소 회장은 쇠말뚝이 일제가 박았다는 증거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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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절벽에 매달려 26개의 쇠말뚝을 뽑았지요. 28개를 찾았는데 두 개는 무인등대의 물탱크 안에 박혀 있어 아직도 뽑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도에서 뽑은 쇠말뚝은 서울대에 연대측정을 의뢰했는데, 일제 시대 것이 맞았습니다."
(생략)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결과, 탄소의 연대가 3만 년으로 나왔어요. 3만 년이라는 것은 석탄이라는 이야기거든요. 일제시대에 우리 측은 숯을 사용해 쇠를 제련한 반면, 일본은 석탄을 사용해 쇠를 제련했습니다. 결국 일본에서 제련한 쇠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박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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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소 회장은 일본이 을미사변을 도모하기 위해 가토마루 소장을 시켜 남해안의 무인도인 백도에 박아놓은 쇠말뚝을 1984년에 뽑았다고 주장하며 근거로 연대측정을 제시하면서 위와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일까요?

일제시대 당시 조선은 숯을 이용해 쇠를 제련한 반면 일본은 석탄을 이용해 쇠를 제련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때려치우고 다른 부분에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소 회장은 서울대의 연대측정결과부터 날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소 회장이 연대측정을 의뢰한 서울대 AMS 연구실 윤민영 박사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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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쯤에 그런 의뢰를 받은 적이 있는데 연대측정을 할 수 없었습니다. 탄소를 추출해 연대를 측정하려고 했는데, 당시의 쇠말뚝은 연철로 탄소량이 극히 적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최근 공업적으로 제강된 철, 즉 화석연료를 통해 만들어진 철은 탄소연대 측정이 거의 불가능하지요. 가령 조선 전기 이전에 숯 등으로 제련된 철일 경우 거기에 함유된 탄소를 통해 연대 측정이 가능하지만, 용광로에서 녹여 만든 철일 경우 연대측정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략)
"현재까지 알려진 방법으로 쇠말뚝이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지 구별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희박합니다"
(생략)
"굳이 연대를 측정하려면 쇠말뚝에 포함된 다른 불순물을 분석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마저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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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윤 박사의 의견은 연대측정불과였습니다. 즉 이 쇠말뚝은 일제시대 이후일 것이다가 최종적인 연대측정결과였다는 것이지요.

즉 소 회장은 자신의 사이비 주장의 근거로 유명대학의 박사의 말을 교묘히 날조하여 자신의 논거로 쓰고 있었다는 것을 발각하였습니다.

애초에 소 회장의 논거가 맞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일제시대 때 박은 쇠말뚝이라는 것만 입증하는 논거가 되지 일제가 대대적으로 쇠말뚝을 박았다는 만행을 입증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 쇠말뚝의 연대측정은 다른 연구소에서도 불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은 문화재연구소 연대 측정실 이현주 연구원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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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쇠말뚝과 관련해 문화재청이나 관련 단체에서 문의전화가 와서 몇 차례 답변한 적이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 연대 측정을 해본 사례는 없습니다. 다만 쇠말뚝의 연대를 측정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연구소의 장비로는 불가능합니다. 서울대 AMS 연구소라면 가능할지 모르겠는데요. 물론 쇠말뚝 하나만 가지고 곧바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구요. 사학자나 고고학자 등과 공동연구를 해야 가능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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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일제시대 쇠말뚝 이야기는 결국 과학적입증이 없는 단순 기억과 증언으로만 점철되어있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검증이 없는 이야기는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되는 이야기이며 이것을 반일이념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매우 불순한 의도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쇠말뚝은 누가 박았냐?? 언제 박았냐??

쇠말뚝이 박힌 원인으로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아직 확정된 설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정적인 것은 무속인이 쇠말뚝을 몰래 박은 가능성도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소 회장이 뽑은 쇠말뚝의 일부는 무속인의 소행으로 밝혀져버렸지요.

또한 무속인들의 소행으로 밝혀진 것은 한 두개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산 정약용의 묘에서 길이 40cm 가량의 철침 10개가 발견됐을 때 많은 언론신문 등에서 일제의 소행이라고 아무런 근거없이
단정지었지만 정작 정씨 종친회에서는 “묘 단장을 한지 얼마 안 되었다”며 “무속인의 짓인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비슷하게 1999년 충무공 이순신의 묘에도 이상한 무속인이 칼을 꽂았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힌 사례도 있었습니다.
(참조하면 좋은 뉴스기사 :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21037000/2005/05/021037000200505110559044.html)
(위의 뉴스기사에서 밑에 달려있던 북한산을 삼각산으로!라는 내용의 글은 잘못된 내용이 담겨있는 것이 있으므로 주의해서 보셔야 합니다.)

또한 소 회장이 겪은 사례 중 하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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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리산 옥녀봉 근처에서 무게가 80kg이나 나가는 청동제 쇠말뚝을 발견하고 이를 제거한 적이 있어요. 일제의 소행인 줄 알았고, 언론에서도 그렇게 보도했는데 알고 봤더니 도꾼(무속인) 3명이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일제가 쇠말뚝을 박아서 민족정기가 흐려졌기 때문에 동으로 만든 쇠말뚝을 박아 그것을 막으려고 했다’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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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소회장이 뽑은 속리산 문장대에서 발견된 쇠말뚝 8개 중 6개는 1960년대 문장대 인근에서 학생 2명이 실족사한 사건 이후 인근 상인들이 쇠말뚝을 박은 것으로 들어났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일제가 쇠말뚝을 박아 민족정기를 훼손했다는 이야기는 이것말고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증언해주는 것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소 회장이 남한산성 인근에 발견된 수많은 쇠말뚝이 일제가 박았다는 증언으로 그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그 증언을 한 사람은 단 한사람으로써 남한산성 북문 인근에서 마트를 운영하고 있는 김병갑씨입니다.

그의 증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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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나이가 쉰한 살인데, 30년도 훨씬 더된 이야기에요. 당시 동네 어르신들이 일제시대에 맥을 끊기 위해 일본사람들이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단지 그렇게 들은 내용을 (KBS 측에서) 말해 달라고 해서 이야기해 줬을 뿐이에요.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는 아니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몇몇 분들만 알고 있는 이야기지요. 구체적으로 누가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고, 동네 어르신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얼핏 들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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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김병갑씨의 증언은 직접적인 증언이 아닌 간접적으로 청취하여 말한 증언으로써 신빙성 부분에서 떨어지는 면이 사실입니다.

결국 오로지 근거는 직접적으로 봤을 때 30년전에 어느 동네 어르신이 일제 쇠말뚝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다는 것을 들었고 그것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소회장의 쇠말뚝 뽑기를 돕기위해 장비와 인력을 지원한 하남시청 관계자조차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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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 모양의 쇠말뚝이 규칙적으로 박혀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의 소행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이 중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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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일제의 쇠말뚝 주장은 어이가 없는 주장임을 밝혔습니다.

그러면 독립기념관에 있는 쇠말뚝은 뭐냐고 물어보시는 사람이 계실 것입니다.

독립기념관의 한 연구원에 따르면 "독립기념관이 기증받은 쇠말뚝은 일제시대의 것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논거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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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 전문가들이 풍수학적으로 봤을 때 쇠말뚝이 박혀 있었던 자리가 기가 모이는 자리라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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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독립기념관의 한 연구원조차 반일선동에 세뇌되어 기가 모이는 자리에 박혀있는 것이 왜 일제가 박은 것이 되는지 앞뒤가 안맞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당시 일제는 풍수 등과 같은 조선의 미신들을 금지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도 강신자씨의 증언을 토대로 풍수지리가 뒤늦게 일본에 전파되었다는 점에서도 풍수가 일본의 주류나 유행이 된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점에서도 일제가 미쳤다고 자신들이 미신이라 생각하는 풍수에 따라 쇠말뚝을 박는지 이해가 안된다면 당신은 이성을 갖춘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 한가지 덧붙이자면 쇠말뚝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625전쟁 당시에 군인들 막사를 위해 박은 것이다 혹은 측량용이다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은 상당히 근거가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한국에서 발견된 쇠말뚝의 일부 사진입니다. 저 쇠말뚝을 일제가 박았다고 한다면 왜 저렇게 둥근 모양으로 박았을까요?? 저런 모양은 막사를 만들 때 쓰는 것과 모양이 비슷합니다.

또한 밑의 사진도 일제의 만행이 아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진입니다.



"의천"이라는 한글이 보이십니까? 당시 일제가 쇠말뚝을 박고 다녔으면 왜 쇠말뚝에 한글을 썼을까요? 이성을 갖춘 자라면 일제 쇠말뚝 드립이 진실 여부를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쇠말뚝들은 서로 다른 제각기 이유에 의해서 박혀져 있었던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쇠말뚝 드립이 심해지자 일본에서까지 번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어이상실을 느낀 일본은 위키피디아에 일제풍수모략설이라는 항목을 만들게 됩니다.
(http://ja.wikipedia.org/wiki/%E6%97%A5%E5%B8%9D%E9%A2%A8%E6%B0%B4%E8%AC%80%E7%95%A5%E8%AA%AC)

이 얼마나 부끄러운 추태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가 역사왜곡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을 일본에게 그리고 다른 제3국에게 널리 알리는 꼴이라는 것이죠.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냈던 이이화 박사는 지난 1999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 『역사풍속기행』을 통해 “쇠말뚝과 관련된 일제의 문헌자
료가 전무하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또한 당시 메이지 3년(1870년) 서구화를 위해 음양료를 폐지하고 국가적으로 음양도와 풍수를 대대적으로 금지하여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면 일본은 일본의 주요 요직에 있는 관료와 군인들은 풍수와 음양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의 풍수관련 서적들에는 풍수에 관한 원론적인 글 이외의 양기, 음혈, 집과 무덤에 관한 풍수에 대한 글들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일제시대 당시 일본인이 생각하는 조선의 풍수의 인식은 1923년 일본인 호소이(細井肇)가 남긴 말을 통해 풍수설을 미신으로 몰아붙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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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설은 내지(일본)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다. 바람을 막고 양지를 향한 명당에 묘지를 쓰면 백골이 편안해질 뿐만 아니라 그 음택이 자손에 미치고 한 가문이 반드시 현달해서 행복과 영화를 마음대로 누린다고 믿었다. 문자를 아는 양반 유생들일지라도 이런 미신을 믿었다. 그 때에 다른 사람의 묘지를 침범해서 늑장, 암장이 행해졌으며 따라서 묘지에 관련된 소송이 자못 번거롭게 쏟아졌다."
(1923년 "정감록의 검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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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제시대 당시 일본 육군의 지도제작을 위해 한반도에 수준점 쇠말뚝을 박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측량용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 있어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측량 말고도 여러가지 설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으로써 일제가 박았다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일제가 주도를 하였더라면 왜 쇠말뚝의 크기가 장소마다 제각각일까요?

여하튼 이러한 일제 쇠말뚝 드립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김영삼 정부였습니다. 당시 김영삼 정부 국정 5년 자료집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전국 명산에 박혀 있는 쇠말뚝 제거를 범국민 운동으로 추진하면서 1995년 2월부터 전국 규모의 실태조사를 실시, 180개의 쇠말뚝을 확인하고 제거 작업을 추진하였고 그와 동시에 조선총독부철거도 시행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일제 쇠말뚝 드립을 믿고 싶어하시는 분들에게 한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럼 박정희 시대 당시 국토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도로를 만들기 위해 산을 깎고 부수고 폭파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본다면 일제보다 더욱더 심하게 훼손하였는데 이것도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민족정기 훼손의 일환으로 보셔야 합니까??

그럼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박정희대통령이 한 것은 우리민족을 위해서이고 일제가 한것은 우리민족을 위해서 한게 아니지 않습니까라고요 ㅎㅎ

그럼 애초에 당신의 판단의 척도는 풍수지리와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군요. 혹은 민족을 위해서라면 풍수따윈 상관없다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애초에 일제가 쇠말뚝을 박을지라도 민족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 풍수지리를 언급하면서 큰일 난 것 마냥 풍수에 빠진 사람 마냥 까시는지 궁금하군요^^

즉 풍수지리가 당신 판단의 척도에서 중요한 척도가 되지 않는다면 일제가 쇠말뚝을 박을지라도 모독할 수 있는 근거가 적어지겠군요.

또한 이런 멍청이들도 있습니다.

가령 일제 쇠말뚝 떡밥이 구라였다는 것을 알리면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멍청이...

1. "일제가 민족정기를 훼손하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음!!"라고 주장함.
2. 이 포스트를 보여줌.
3. 일제가 해방직전에 모든 자료를 불태웠다는 맹목적 전제를 깜.
4.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냐고 주장할 수 있냐고 말함. 혹은 어떻게 저 전제를 깔 수가 있냐고 함.
5. 3~4을 반복함. (4번의 후자를 질문하면 당연한것 아닌가라는 논리결여와 같은 이상한 반응을 보임 ㅋㅋ)
6. 떡밥에 허우적대는 자가 마지막으로 친일파매국노쪽바리방사능원숭이 드립을 적절하게 쳐주고 도망^^

저런 맹목적 전제를 까는 것을 "상식"이라 생각하는 작자들의 추태는 언론과 교육이 만들어낸 폐해의 산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한국역사교육의 또다른 문제점을 지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과는 관련은 없으나 한국인들이 자칫 잘못하면 일반적으로 전제하는 잘못된 맹목적인 역사전제의 뿌리 중 하나가 "일본은 무조건 나쁘다. 일본을 까면 애국자이다."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민족이 최고다"라던가 "우리민족은 잘못한 것이 단 하나도 없다"라던가..)

이러한 전제로 논리가 결여된 주장조차 합당화하고 정당화하는 자들은 이성을 잃어버린 짐승과도 같다고 봅니다.

저는 한 마디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엉터리 상식과 맹목적인 전제는 교육과 언론매체의 일방적인 세뇌에 의해 만들어졌는 것들이다."

Bonus.


북한산을 비롯한 한민족의 정기가 모인 주요한 지점에 쇠말뚝을 박은 일본제국주의는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백두산 천지에 까지 쇠말뚝을 박았으며, 일본 천황의 조상신이라는 아마테라스 아미가미(天照大神)을 위해 그 앞에서 제를 지냈습니다.(1943년)
일제의 천인공노할 갖가지 만행의 원조라고 할 이 사진도 합성된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이 오늘의 일본인들입니다.
저들의 간특함을 강력하게 규탄합시다!

이 사진은 주간조선에 게재된 것임.
(http://cafe.naver.com/han88min/421)








-> 이 사진은 일본인들이 고산숭배사상으로서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사진입니다. 저기에 나와있는 길다란 모양은 쇠말뚝이 아니라 제단이지요. 저 왼쪽에도 일본인 때문에 가려져있지만 제단이 하나 더 있어 의식을 행할 때 쓰는 받침대로 쓰였습니다. 즉 2개의 받침대가 작은 탁자형식처럼 구성되어 있지요. 애초에 저 사진을 자세히 보더라도 쇠말뚝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뜬금없이 사진하나 잡아서 날조해석을 달아놓지맙시다.

[수정]
1차 수정 2012.6.23

[결론]
1. 일제 쇠말뚝 드립은 80년대 후반에 등장하였다.
2. 뉴스 라이브러리를 통해 찾아본 결과 가장 처음에 일제 쇠말뚝에 관한 이야기가 신문에 기고된 것은 1989년 재일교포 강신자씨의 기고문이다.
3. 강신자씨의 기고문과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참고한다면 쇠말뚝을 명나라 사람도 박았다는 기록이 있다.
4. 일본에서는 풍수지리가 뿌리깊게 박혀있지 않았고 일제시대 기록에서도 풍수를 통한 쇠말뚝에 관련된 기록은 전무하다. 또한 일제시대 당시 총독부는 풍수를 미신처럼 업신여기고 미신을 믿는 것을 금지시켰다.
5. 일제 쇠말뚝 드립을 치고 다니는 소윤하 민족정기선양회장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고 거짓말로 점철되어있다.
6. 쇠말뚝을 박은 원인으로는 무속인의 소행,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상인들의 조치, 625전쟁당시 국군의 측량용 혹은 막사설치용, 일제의 측량용 등이 있고 각 원인들은 신빙성이 있다. 쇠말뚝은 서로 제각기 다른 이유에 의해서 박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일본에서도 이러한 드립을 인식하고 일본 위키피디아에 "일제풍수모략설"이라는 항목을 만들었으며 이러한 드립이 대대적으로 김영삼정부 이후에 커지기 시작했다.
8. 많은 연구가들 사이에서도 일제 쇠말뚝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고 있다.

[출처] [11] 일제 쇠말뚝에 대한 왜곡|작성자 mat






[참고출처]
http://socio1818.egloos.com/3578733
http://veritasest.egloos.com/1593545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2&docId=49348535&qb=QU1TIOyXsOq1rOyLpA==&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9ynsU5Y7uZssaZDPV0ssc--484058&sid=T9x9cIpL3E8AADgqND4
http://blog.naver.com/sunho1007/50105201396



>>1
「こ、これはエクスカリバーだニダ! 選ばれし者だけが抜けるニダ!」

54 名前:ぬこめ~わく ◆NUKOOSsJck [sage] 投稿日:2012/08/12(日) 19:21:54.18 ID:u7Gyz9yH [1/8]
>>35
抜けなかったら押してみると言う、古イングランド地方の教訓すら知らない訳が無いんですけどねえ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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