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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September 5, 2012

Korean traditional kitchen,cookware and caste

http://www.seoul.go.kr/life/life/culture/history_book/picture_seoul1/9/1203159_3009.html

부엌과 조리기구들

먹고 사는 문제도 신분적·경제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생활이 비교적 풍족했던 양반들은 각 계절에 맞게 음식을 만들어 먹고 다양한 주방기구도 마련되어 있었다. 반면 서민들은 환경에 걸맞게 소박한 상차림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형편이었다. 서민가정의 부엌에는 사기그릇과 간단한 주방기구가 있었다. 그러나 양반 가정의 부엌은 놋그릇과 신선로판·소줏소리 등의 다양한 주방기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부엌 밖에는 장독대와 김치광 등이 있었다.

부엌은 음식을 만들고 불을 때는 여성만의 공간이다. 남성들은 부엌을 드나드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부엌일을 한 것은 아니다. 양반집 마나님들이야 관리직이었지 실제 음식 만드는 일은 찬비(饌婢)인 식모나 찬모가 했다. 물론 특별한 행사가 있거나 바깥나리가 특별히 즐기는 가전(家傳) 음식이 있을 경우, 며느리건 대부인이건 손수 음식을 장만하기도 했다. 그런데 구한말 대갓집에서는 찬모만이 꼭 전라도 여성을 썼다고 한다. 전라도 음식이 그만큼 맛나고 정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엌




부엌의 조리기구들




김치광




장 담그기




장독대

곡식의 마련
당시 일반 서민들은 곡식껍질을 벗기거나 아니면 곡식을 가루로 만들 때, 절구에 곡식을 넣고 방아를 찧었다. 방아찧기도 힘든 부녀노동의 하나였다. 부녀자들은 방아를 찧으면서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이에 많은 방아노래가 남아 있으며, 특히 경기민요를 방아타령이 유명하다. 절구는 돌이나 나무토막을 우묵하게 판 것인데,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사용된 것이다.



방아찧기




절구와 절굿공이

한양의 먹거리, 북병남주
서울의 전통 음식이란 대개 궁중과 양반가의 음식이 먼저 손꼽힌다. 특히 신선로와 설렁탕은 서울의 대표적 음식의 하나로 꼽힌다. 신선로는 열구자탕이라 하는데 왕실과 양반가문에서 즐겨먹던 음식이며, 설렁탕은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낸 후 소머리국을 설렁설렁 끓여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은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서울 사대부의 경우, 하나의 가풍으로 집집마다 손님 접대 또는 제사용으로 한 두 가지 비전(秘傳)의 음식이 있었다. 이를테면 장동 김대감댁의 송절주(松節酒) 같은 것이었다. 또 ·북병남주(北餠南酒)·라고 해 북촌 일대는 떡을 잘 만들고, 남촌 일대는 술을 잘 빚었다고 한다. 북촌은 권문세가들이 거주하는 곳인지라 손님 접대도 많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있었으니, 자연 음식 만들 일이 잦았고 그 솜씨 또한 날로 빛을 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촌의 무반들은 호탕한 기질이 술이 맞았을 것이요, 몰락한·남산 딸깍발이·들은 이런 저런 울화 속에 별 안주 없이 술을 마시다 보니 자연 남촌은 술로 유명하게 된 것 아닐까 한다.

한양의 자연적인 먹거리라고 하면 동소문 밖 앵두, 창의문 밖 능금, 남대문 밖 신봉숭아, 먹골의 배가 내놓을만한 자연산 먹거리였다. 그 외에 이태원의 역귀와 왕십리의 무·배추·미나리, 훈련원과 방아다리의 배추 등도 한양의 명물이었다.

개항 이후 서구의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1882년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커피를 마셨다고 하여, 이후 미국 공사 일행이 서울에 부임함으로써 서양 음식도 소개되었다. 대한제국시기에 한성판윤(오늘날 서울시장)이었던 이채연(李采淵)은 서양인 요리사를 고용하여 외국인들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한다. 또한 개항 이후 서울에는 서양음식 뿐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중국음식과 일본음식도 들어왔다.



설렁탕




신선로




구절판

물긷기와 얼음뜨기
서울은 산과 하천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물은 항상 풍부하였다. 서울 사람들의 식수는 주로 우물물을 이용하였다. 그래서 서울에는 우물이 발달되어 있었다. 그 외에 계곡이나 한강에서 물을 길어다 파는 물장수의 물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개항 이후에는 서울에 수도가 도입되었다.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위크가 특허를 받아 상수도시설을 갖추고 급수하기 시작한 것이 1908년 8월이었다.
냉장고가 없었던 시절에는 한강의 얼음을 보관하였다가 여름에 이용하였다. 지구온난화 현상이 없었던 당시에는 거의 매년 한강이 꽁꽁 얼어붙었다. 한강의 얼음을 톱으로 잘라 소달구지로 운반하여 보관하였다. 그 중 일부는 강변에 있는 동빙고와 서빙고에 보관하였다가 여름철에 왕실과 양반층에서 사용하였다.



한강에서의 얼음뜨기




우물가




우물가(단원 김흥도 그림)

남녀노소가 즐긴 담배
담배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직후로 알려져 있다. 담배는 담바고·남초·연초라고도 불렀다. 처음에는 담배를 약초로 여겼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담배의 효능을·가래가 목에 걸려 떨어지지 않을 때, 비위가 거슬려 침이 흐를 때, 소화가 되지 않아 눕기가 불편 할 때, 가슴에 먹은 것이 걸려 신물이 토할 때·이롭다고 하였다. 또한 냄새가 나쁘다는 점과 재물을 소모하는 것, 할 일이 많은 데도 상하노소가 시간을 허비하는 것 등을 그 폐해로 지적하였다.

담배는 사회 전반에 퍼져 나갔으며, 17세기 조선에 살았던 하멜의 표류기에 의하면·어린아이들이 4~5세 때 이미 배우기 시작하여, 남녀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고 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장기를 두거나 책을 보면서도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니, 일상 생활에서 담배가 습관화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애용하게 되면서·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말도 나오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담배가 대중화되자 이른바·흡연문화·가 생기게 되었다. 상놈은 양반 앞에서, 아이는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였다. 또 담뱃대의 길이가 곧 신분을 상징하게 되어, 양반들은 긴 담뱃대를 지니고 있었으며, 상놈들은 곰방대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연소답청의 그림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여인네들도 담뱃대를 이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담뱃대걸이




담뱃대를 물고 책을 보는 사람




담뱃대를 몰고 있는 남자와 아이 업은 여인




연소답청(年少踏靑, 혜원 신육복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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