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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ugust 28, 2013

"why did you kill them?" Vietnam children who hostile to korea,Korean army massacre in Vietnam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15

아이들이 외쳤다 “싫어요, 한국사람이잖아요”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언젠가는 매듭지어야 할 문제다. 구수정 박사는 사회적 기업 ‘아맙’을 설립해 학살 피해 지역에 대한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해당 지역의 농산품을 한국에 판매한다.
고재열 기자 |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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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호] 승인 2012.09.20 01: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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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아이는 막대사탕을 받지 않았다. “이젠 괜찮아. 어서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라고 옆에 있던 마을 어른이 거들었다. 그래도 아이는 “싫어요! 한국 사람이잖아요!”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소리친다. 베트남 전쟁 민간인학살 위령비 옆에서 나무 막대기를 들고 놀던 이웃 마을 아이들도 한국인에게 적대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 죽였어!”라고 큰 아이가 소리치자 작은 아이가 “왜 죽였어?”라고 물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파헤쳤던 구수정 박사가 올여름 베트남 꽝아이성 빈호아 마을에서 겪은 일이다. 이곳은 10여 년 전 구 박사가 직접 조사했던 곳이다. 당시는 조사를 위해 왔지만 이번에는 베트남 공정여행 참가자들과 함께 온 것이었다. 10년여의 세월이 지났지만 한국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감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재갑 제공
민간인학살 희생자 위령비를 가리키는 베트남 아이들(맨 위). 위령비에 헌화하는 구수정 박사(위 오른쪽). 마을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서 있었다. 증오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이 학살에서 희생된 자의 수가 총 430명이며, 그중 268명은 여성, 109명은 50세에서 80세까지 노인, 82명은 어린이, 7명은 임신부였다. 2명은 산 채로 불에 던져졌으며, 1명은 목이 잘렸고, 1명은 배가 갈라졌으며, 2명은 강간을 당했다. 2가구는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했다.”

10년 넘게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을 하면서 구 박사는 다양한 압력과 협박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를 돕는 사람들과 단체도 나타나 피해 마을에 대한 지원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이번에 다시 가보니 지원 활동을 한 곳과 안 한 곳이 확실하게 차이가 났다. 지원한 곳은 공정여행 방문자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여전히 반감을 드러냈다. 새롭게 증오비를 세운 곳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지원한 곳과 안 한 곳, 너무 달라

한국 정부의 사과와 지원은 김대중 정부 시절 가장 활발했다. 1998년 베트남 방문 당시 “양국 간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라고 사과했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2년 한국을 방문한 베트남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다시 사과했다. 피해 지역에 교실 580개를 지어주기도 했다.

한국-베트남 수교 20주년이 되는 시점에 민간인 학살 문제는 미래의 동반자 관계를 위해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다. 구 박사는 “한국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투자를 받고 있는 베트남 정부의 경우 민간인 학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미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5000여 명에 이른다는 1차 조사를 해놓은 상태다. 언젠가는 매듭을 지어야 할 문제다”라고 말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미래지향적 해결 방식을 고민하던 구 박사는 2010년 사회적 기업 아맙(A-MAP)을 설립했다. 아맙은 민간인학살 피해 지역에 대한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피해 지역에서 생산한 캐슈너트(cashew nut)를 구매해 한국에 판매하는 공정무역을 수행하고 있다. 여러 단체가 피해 지역을 방문하고 있고, 이미 5톤의 캐슈너트가 국내에 수입되었다.(홈페이지 http://cafe.daum.net/doanhnhanxahoi 연락처 070-7554-5670)


【越韓】 「なんで殺したの?」韓国に敵対的なベトナムの子供〜韓国軍民間人虐殺、いつか解決すべき問題★[09/20]
1: 蚯蚓φ ★ 2012/09/23(日) 19:18:43.35 ID:???


民間人虐殺犠牲者慰霊碑を示すベトナムの子供たち(上)。慰霊碑に献花するク・スジョン博士(下)。

ベトナムの子供はキャンディーを受けとらなかった。「今は大丈夫。はやく‘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と受けとって」とそばの大人が助け舟を出した。それでも子供は「いやだ!韓国人じゃないか!」と首を左右に振って大声を張り上げる。

ベトナム戦争民間人虐殺慰霊碑のそばで木の棒を持って遊んでいた子供たちも韓国人に敵対的なのは同じだった。「みんな殺したよ!」と大きな子供が大声を張り上げるとすぐに小さい子供が
「なんで殺したの?」と訊ねた。

ベトナム戦争当時、韓国軍の民間人虐殺を暴いたク・スジョン博士が今年の夏、ベトナムのクァンアイソン、ビンホア村で体験したことだ。そこは10年余り前、ク博士が直接調査した場所だ。当時は調査のためにきたが今回はベトナム公正旅行(?)参加者と一緒に来た。10年余りの歳月が流れたが、韓国人に対する村の人々の反感は全く弱まっていなかった。

村には‘韓国軍憎悪碑’が立っていた。憎悪碑には次のように刻まれている。「天をつく罪悪、万代に記憶するだろう!この虐殺で犠牲になった者の数は合計430人、そのうち268人は女性、109人は50才から80才まで老人、82人は子供、7人は妊婦だった。2人は生きたまま火に投げこまれ、1人は首を切られ、1人は腹を割かれ、2人は強姦された。2世帯は一人残らず抹殺された。」

10年以上、韓国軍の民間人虐殺に対する真相究明活動をしながらク博士は多様な圧力と脅迫を受けた。だが、彼を助ける人々と団体も現れ被害の村に対する支援活動を継続できた。彼は「今回、また行ってみると支援活動をしたところとしないところがはっきりと違いができた。支援したところは公正旅行訪問者らを暖かく迎えてくれたがそうではないところは相変らず反感を表わした。
新しく憎悪碑をたてた所もあった」と話した。

韓国政府の謝罪と支援は金大中(キム・デジュン)政権の時期に最も活発だった。1998年、ベトナム訪問当時「両国間の不幸だった過去について遺憾に思う」と謝った故キム・デジュン元大統領は2002年、韓国を訪問したベトナム国家元首に「不幸な戦争に参加し本意と違ってベトナム国民に苦痛を与えたことについて申し訳なく、慰労の言葉を申し上げる」と再び謝った。

被害地域に教室580を建てることもした。韓国-ベトナム修交20周年を迎え、民間人虐殺問題は未来のパートナー関係のために解かなければならない重要な課題だ。ク博士は「韓国企業から莫大な投資を受けているベトナム政府の場合、民間人虐殺問題を積極的に提起しはしない。しかし、すでに韓国軍による民間人虐殺被害者が5000人余りに達するという1次調査をした状態だ。いつかは決着をつけなければならない問題だ」と話した。

韓国軍の民間人虐殺問題に対する未来指向的解決方式に悩んだク博士は2010年、社会的企業アマプ(A-MAP)を設立した。アマプは民間人虐殺被害地域に対する公正旅行を行い、被害地域で生産したカシューナッツ(cashew nut)を購入して韓国に販売する公正貿易を遂行している。様々な団体が被害地域を訪問していて、すでに5トンのカシューナッツが国内に輸入された。

ソース:時事in(韓国語) 子供たちが叫んだ「いやだ、韓国の人でしょう」

ベトナム戦争当時、韓国軍総司令官だった蔡命新は、
先の『ニューズウィーク』でのインタビューで「誰に対しても償う必要はない。あれは戦争だった」と明言している。

2009年に韓国の国家報勲庁が国家報勲制度の改定作業を行い国会に法案改正の趣旨説明文書を提出した
この文書でベトナム戦争参戦者を「世界平和の維持に貢献したベトナム戦争参戦勇士」と表現したことにベトナムが
「我々は被害者。ベトナム戦争の目的がなぜ世界平和の維持なのか」と猛反発し予定された李明博大統領のベトナム訪問も拒否する方針を伝えた
韓国側は柳明桓外交通商相をベトナムに派遣し外相会談で「世界平和の維持に貢献」の文言を削除することを約束し大統領のベトナム訪問を実現させた

★一連の外交交渉でベトナム政府は「韓国は未来志向といった言葉を使いたがり、過去を忘れようとする」と批判した

韓国の歴史教科書には、ベトナム戦争についてほとんど記述はされていない。
中学生向けの国定教科書に記されているのは「そして、共産侵略を受けているベトナムを支援するために国軍を派兵した」の約1行のみだ。

http://iyaninarukan.doorblog.jp/archives/17806391.html


149: <丶`∀´>(´・ω・`)(`ハ´  )さん:2012/09/23(日) 00:43:33.57 ID:/8UQO9Ul

>>1

銃を撃って、刀で突いて、毒薬食べさせて、
1時間に 3800人殺戮した韓国軍

[企画レポート] ベトナム民間である虐殺現場,香西村に行く 
金孝誠 記者

1966年2月26日朝、平和なベトナムのある村に砲弾が飛んで入った。
幾多のヘリが村の空をいっぱい埋め、緑の戦闘服を着た韓国軍が村で押し寄せて来た。
彼らは村人々を皆呼び起こして残忍に殺害した。
3800人余りを殺すには 1時間しかかからなかった。
ベトナムで‘香西虐殺’と呼ばれるこの事件は、
ベトナム戦当時起きた幾多の民間虐殺事件の中一件に過ぎない。
切ない真実は長年の時間そっぽを向かれていた。
1990年代後半で言論はベトナム民間虐殺を扱い始めた。

‘侵略受ける民族’と自ら思って来た韓国の人々に民間である虐殺の真実は衝撃そのものだった。
(以下略)

ソース:Oh My News 2007-05-22 <韓国語>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11109
165: <丶`∀´>(´・ω・`)(`ハ´  )さん:2012/09/23(日) 00:45:22.37 ID:/8UQO9Ul

>>1

ベトナム戦での韓国軍 良民虐殺’問題がまたさく烈した。
しかも、この記事は、ベトナムの有力言論である<トゥオイジェ>と <日曜トゥオイジェ>が‘受けて大きく報道し始めた。
一ケ月も経たないうちに、ホーチミンのベトナム人の中でこの問題を知らない人がいない程になってしまったのである。
“30年も過ぎた過去のことをいまさらのように暴くのが、果してだれの助けになるのか、鬱陶しい”
と、 ホーチミンで事業をしている朴某(38)さん話す。


“30年も過ぎた過去のことをいまさらのように暴くのが、果してだれの助けになるのか、鬱陶しい”
“30年も過ぎた過去のことをいまさらのように暴くのが、果してだれの助けになるのか、鬱陶しい”
“30年も過ぎた過去のことをいまさらのように暴くのが、果してだれの助けになるのか、鬱陶しい”

ttp://www.altasia.org/hangyore/hangyore99287.htm






3: <丶`∀´>(´・ω・`)(`ハ´  )さん:2012/09/23(日) 00:20:39.06 ID:u7gbEYyr

豪州軍戦車部隊は戦闘力でベトコンに恐れられた

韓国軍は虐殺力で民間人に恐れられた
47: エアロボット ◆VYWZ60AjThTP:2012/09/23(日) 00:26:25.77 ID:jSXQcC6g

>>13

戦車部隊は持っていかなかったと思う。
オーストラリアで恐れられたのはSASじゃなかったかな。米軍よりも怖がられたそうな。
76: <丶`∀´>(´・ω・`)(`ハ´  )さん:2012/09/23(日) 00:30:52.51 ID:u7gbEYyr

>>47

センチュリオン戦車を持ち込んでる
頑丈な上に雑具箱や予備転輪を積んでRPG対策してた
キャニスター弾で北ベトナム軍の夜襲を粉砕したこともあって北軍やベトコンに怖がられた


145: <丶`∀´>(´・ω・`)(`ハ´  )さん:2012/09/23(日) 00:42:44.84 ID:2fRBHEGd


392: <丶`∀´>(´・ω・`)(`ハ´  )さん:2012/09/23(日) 01:12:22.26 ID:mEuXrt6F

両胸をえぐり取られた上に銃撃を加えられて瀕死の21歳の女。
写真撮影後に病院に徹送されたが「お母さん、お母さん…」
と母を呼びながら妹達の前で息絶えた[1](J・ボーンアメリカ海兵隊伍長撮影)


A dying 21-year-old woman with her breasts cut out and left shot by ROK marines.[4] US Marines transported her to the hospital, but she died soon.[4] Photo by Corporal J. Vaughn, Delta-2 Platoon, U.S. Marine.[4][5]


the Phong Nhị and Phong Nhất massacre [1](Korean: 퐁니·퐁넛 양민학살 사건, Vietnamese: Thảm sát Phong Nhất và Phong Nhị) was a massacre conducted by the 2nd Marine Brigade of the South Korean Marines on 12 February 1968 of unarmed citizens in Phong Nhi and Phong Nhat village, Dien Ban District of Quang Nam Province in South Vietnam.[6][7]
フォンニィ・フォンニャットの虐殺

Thảm sát Phong Nhất và Phong Nhị
Bách khoa toàn thư mở Wikipedia
Thảm sát Phong Nhất và Phong Nhị
Địa điểm Làng Phong Nhị, Quảng Nam, miền nam Việt Nam
Ngày 12 tháng 2 năm 1968
Loại tấn công Thảm sát, tội ác chiến tranh
Tử vong dân thường bị giết
Thủ phạm Quân đội Hàn Quốc
Thảm sát Phong Nhất và Phong Nhị là một tội ác chiến tranh của Quân đội Hàn Quốc gây ra trong thời gian Chiến tranh Việt Nam. Vào ngày 12 tháng 2 năm 1968 tại khu vực làng Phong Nhất và Phong Nhị, tỉnh Quảng Nam, các đơn vị quân đội Hàn Quốc đã thảm sát hàng loạt dân thường không có vũ khí, trong đó phần lớn là phụ nữ và trẻ em.[1][2]

퐁니・퐁넛 학살 사건(베트남어: Thảm sát Phong Nhất và Phong Nhị, 영어: 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 성 디엔반 현 퐁니, 퐁넛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에 의해 학살당하여 70여 명(69 ~ 79명 추정)이 죽은 전쟁범죄이다.[1] 이 사건은 2000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가 진상조사를 벌이면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게 되었다.[2] 2004년 6월, 대한민국의 시민단체는 성금을 모아 관련 희생자에 대한 추모비를 세웠다.[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23943

여기 한 충격적인 보고서가 있다
미국이 기록한 한국군의 베트남 학살 보고서 발견
00.11.14 18:49l최종 업데이트 00.12.15 20:23l이병한(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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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마을의 처참한 모습. 미 해병 연합행동소대 본 상병은 한국 해병 2여단 1대대 1중대가 작전을 수행했던 마을에 들어가 현장의 사진을 찍었다. 본 상병은 위 사진의 설명을 이렇게 적었다. "총에 맞은채 연못에서 발견된 두 젊은 여자. 사진 가운데 임신한 여자는 가까운 거리에서 머리에 총을 맞았다. (머리 앞쪽이 날아감)"

여기 충격적인 보고서가 있다. 미국 사료관 문서관리소(NARA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RG(Record Group) 472에서 30년간 보관돼오다가 2000년 6월 1일자로 기밀해제된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조사보고서. 500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의 이 보고서에는 주월 한국 해병대 2여단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내용이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수록돼 있다. 이는 그동안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는 국방부의 공식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주월미군사령부의 조사보고서에 담긴 세 가지 사건


▲본 상병의 사진에 찍힌 피해자는 주로 어린이와 여자였다. 처참하게 살해당한 아이의 모습.
지난 10월 중순 문제의 보고서를 처음 입수한 베트남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상임대표 이해구, 강정구)와 박정희기념관 반대 국민연대(상임공동대표 곽태영 외)는 11월 14일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에는 세 가지 '의미심장한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가 담겨 있다.

1. 1968년 2월 12일 사건
장소 : 쿠앙남(Quang Nam)성 디엔반(Dien Ban)현 퐁니(Phong Nhi)·퐁넛(Phong Nut) 마을
작전부대 : 한국 해병 2여단 1대대 1중대(일명 괴룡1호 작전)
희생과 손실 : 6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음. 한국해병 1명 부상


▲근처 연못에서 익사한 아이의 주검.
2. 1968년 10월 22일 사건
장소 : 쿠앙남성 쑤옌 짜(Xuyen Tra) 호앙쩌우(Hoang Chau) 마을
작전부대 : 한국 해병 2여단 2대대 7중대 3소대(일명 승룡3호 작전)
희생과 손실 : 베트남 민간인 22명 사망(8명의 어린이와 12명의 성인-합계 불일치-필자주), 베트남 민간인 16명 부상(5명의 어린이와 11명의 성인), 13마리의 물소 사살, 95채의 주택이 100% 파괴, 1000개의 저장고 파괴. 초기 작전중 한국 해병대 대원 일부 사망

3. 1969년 4월 15일 사건
장소 : 쿠앙남성 지 쑤옌(Di Xuyen)현 푹미(Phouc My) 사
작전부대 : 한국 해병 2여단 2대대 6중대 1소대(일명 승룡10호 작전)
희생과 손실 : 베트남 민간인 4명 사망, 12명 부상, 7명 구타. 대규모 재산피해. 지뢰폭발로 한국해병 1명 사망, 4명 부상, 미 해병 1명 부상


▲본 상병의 30년 전 사진과 설명은 2000년을 살아가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본 상병은 위 사진에 대해 "가슴이 도려진 채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라고 증언했다.


특히 첫 번째 사건인 '퐁니·퐁넛 마을 사건'의 경우 미 해병 연합행동소대 Delta-2 소속 본(J. Vaughn) 상병의 증언과 사진이 첨부돼 있다. 한국군이 마을의 작전을 수행한 후 민간인 부상자를 도와주기 위해 마을에 들어갔다는 본 상병은 사진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때 찍은 사진 하나하나에 설명을 달았다. 그가 찍고 증언한 사진에는 거의 대부분 여자와 어린이만 찍혀있고 심지어 "가슴이 도려진 채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한국군이 지나간 직후, 퐁니 마을에서 미군들이 볏짚에 가려진 채 도랑에 버려진 여자와 아이들의 주검을 찾았다.
68년 2월 12일 퐁니·퐁넛 마을 사건에 대한 미군측의 조사 후 68년 4월 29일 웨스트모어랜드(W. C. Westmoreland) 주월미군사령관은 관련자료를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에 보내며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한달 후인 68년 6월 4일 채 사령관은 웨스트모어랜드에게 한국 측 조사자료와 함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서 채 사령관은 퐁니·퐁넛 마을 사건이 한국군 복장을 한 베트콩의 술책이라고 밝혔다.

베트남 민간인 4명이 사망했던 '쑤옌현 푹미 마을 사건'의 경우 미군 뿐 아니라 한국군과 월남군이 공동으로 조사했다. 미군의 체이스(Harold W. Chase) 대령, 월남군의 카오 칵 낫(Cao Khac Nhat) 중령, 한국군의 이영주 소령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공식 조사보고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본 상병의 사진설명은 매정하리만큼 건조하다. "재더미에 묻힌 채 죽어있는 마을주민"


"지뢰와 수류탄 폭발로 인해 지뢰제거팀에 희생자가 발생했고 저격으로 인한 고통을 당한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나, 마을의 남쪽 끝에서 한국해병이 광분상태에서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 보고서는 왜 작성됐는가


▲'30년만의 공개' 미국 사료관 문서관리소(NARA)에서 보관돼오다 올해 6월 1일 기밀해제된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조사보고서. 미국군에 비친 한군군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객관적인가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우리의 모습'은 너무 충격적이다.
'미라이 학살사건' 폭로로 한창 시끄럽던 1969년 12월 12일, 미국 국무부는 주월 미대사관에 메시지를 발송했다. '한국군, 특히 해병대에 의해 베트남 민간인에게 자행되는 비인도적인 행동에 관한 가능한 모든 정보를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국무부가 주월 한국군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던 이유는 일명 '랜드보고서'와 '사이밍턴 청문회' 때문이다. 랜드보고서는 랜드 재단에서 미 국방부의 용역을 받아 1968년 7월 작성한 '베트콩의 정치 스타일'이라는 비밀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현지인의 증언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사이밍턴 청문회는 1970년 2월 24일부터 26일까지 개최된 청문회로서 미국의 재정지원하에 베트남전에 참전한 동맹군의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국무부는 랜드보고서를 보고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관한 논란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여 주월대사관에 메시지를 띄운 것이다.


▲미군 비밀보고서는 68년 2월 12일 퐁니·퐁넛 마을에서 6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가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고 적고 있다.
국무부의 지시를 받은 주월 미대사관은 이를 주월 미군사령부에 전했고 주월 미군사령부 감찰부는 즉각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자료를 수집,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군사령부는 조사보고서를 주월미대사관, 미군 태평양사령관, 미군 합동참모본부 등에 제출했다.

보고서에는 랜드보고서에 언급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의혹이 대부분 소문에 의한 것으로 근거가 빈약하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랜드보고서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민간인 학살 사건을 별도로 보고했다. 그것이 바로 위 세가지 사건이다.

민간단체 "이제 정부가 나서라"

30년 만에 공개된 이번 주월 미군의 보고서는 정부와 민간단체 사이에 오가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논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국방부와 정부는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없었고 공식적인 자료도 없다고 밝혀왔다. 하지만 공개된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군 중령이 사건조사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1970년 1월 주한 미대사 포터(Porter)가 박정희 대통령과 정일권 국무총리, 김정렴 비서실장, 최규하 외무장관 등 정부 고위급 관계자들과 긴밀히 협의했다.

관련기사
<권부에 보대는 대안> 김정길 법무장관님, 31년 전을 기억하십니까


▲퐁니마을에서 살아남은 베트남 처녀를 미군이 치료해주고 있다. 자신의 눈으로 2월 12일 퐁니마을의 상황을 똑똑히 지켜봤을 이 처녀에게 한국이란 대체 어떤 존재로 남았을까. 이 치료는 미군이 아닌 우리가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보고서를 공개한 국제민주연대 변연식 공동대표는 "이는 우리 민족의 부끄러운 잘못과 독재와 전쟁으로 왜곡된 과거를 세상에 드러내는 고백성사"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책임지려는 이러한 노력이 궁극적으로 우리 민족의 도덕성과 양심이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전세계인들의 머리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정의로운 발걸음이라 확신한다. 이제 이 시점에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한국 정부의 결단이다."


English: A child of Phong Nhi village killed by South Korean Marines, the Blue Dragons in Phong Nhi village, Quang Nam Province, Vietnam on February 12, 1968. Photo by Corporal J. Vaughn, Delta-2 Platoon, U.S. Marine.[1][2][3]
Date 12 February 1968

http://takaojisan.blog13.fc2.com/blog-entry-403.html

「被害者史観」韓国を揺るがすベトナム民間人虐殺の「加害責任」

《「日本ばかり責めていられない」の声も

ジャーナリスト 佐藤和

戦争といえばまず「被害者」だった韓国が、いま揺れている。ベトナム戦争時に従軍した韓国人兵士の「民間人大量虐殺」が報道され、長年のタブーだった「歴史の恥部」の解釈を巡って激しい議論が起きているのだ。

それは虐殺か戦争か。謝罪はするべきか不要か。どこかで聞いたような議論は、しかしベトナムが謝罪も補償も求めていないことで、むしろ国内の政治問題となる可能性もでてきた。ことの経緯と一般韓国人の認識をレポートする。

「SAPIO」2001.9.26号
特集【韓国「反日症候群」の正体】より

「償いの必要はない」といった元司令官

ベトナム戦争が終わり、南北ベトナムが統一して既に四半世紀が通ぎた。そして韓国ではここ数年、あの戦争をめぐり長らくタブーとされてきた過去について、かつてない議論が進められている。その過去とは、ベトナム戦争に参戦した韓国軍によるベトナム民間人の虐殺問題だ。

最初にタブーを破ったのは、韓国のハンギョレ新聞社が発行する週刊誌『ハンギョレ21』だった。同誌は99年、韓国軍がべトナム戦当時に起こした虐殺事件について記事を掲載したのだ(5月6日号/韓国の民主化の中で生まれたハンギョレ新聞社は88年創業、現在新聞発行部数は韓国第4位)。

この記事を書いたのは、韓国人歴史研究者のク・スジョン。彼女はベトナム戦争の韓国軍の残虐行為が記されたベトナム側の資科を入手し、韓国の市民団体の一行とともにベトナム現地で検証を始めたのだ。ある地域で、猛虎部隊(韓国軍部隊)等による1か月間の作戦で1200名もの住民が虐殺されたという66年当時のベトナム側の報告を紹介しながら、同時に生存者たちの証言に基づき虐殺の様子を具体的に描いている。

例えば、生存者の証言からは韓国軍による民間人虐殺の方法にいくつか共通した類型があったようだと、同記事には記されている。以下、その部分を略して引用すると??大部分が女性や老人、子供たちである住民を一か所に集め、機関銃を乱射。子供の頭を割ったり首をはね、脚を切ったりして火に放り込む。女性を強姦してから殺害。妊産婦の腹を、胎児が破れ出るまで軍靴で踏み潰す。トンネルに追い詰めた村人を毒ガスで殺す??等々だ。

日本の戦争責任を追及してきた韓国の人々にとって、自国軍も虐殺をしていたのだという告発は、苦いものであったに違いない。

続いて同誌の2000年4月27日号には、住民虐殺を行なったという元軍人による加害証言が掲載された。戦争当時、一般住民とゲリラを区別するのは難しく、我が身を守るためには仕方なかったのだとその元軍人は述壊した。しかし同時に、今やその行為に罪悪感を感じ、韓国政府がベトナムに謝罪し被害者に補償することを望むという彼の声も、同誌では伝えられた。

これと前後して米誌『ニューズウィーク』が「暴かれた英雄の犯罪」と題してベトナム戦争での韓国軍の虐殺問題を取り上げた(2000年4月21日号)。ク・スジョンらの調査を紹介しつつ、「8000人以上の民間人を殺した韓国軍の虐殺行為の数々」が明らかにされつつあると、7ぺージにわたり大々的に報じたのだ。

タブーであった虐殺事件についてのこれらの報道に対し、韓国国内では激しい反撃が起きた。同年6月27日には、ベトナム戦に従軍した退役軍人ら2000人余りがハンギョレ新聞社に乱入しコンピュータなどを破壊した。彼らは「大韓民国枯葉剤後遺症戦友会」のメンバーで、国のために闘った戦友を冒涜(ぼうとく)されたと激しく抗議したのだ。

ベトナムへの韓国人派兵は64年に始まり、延べで30万人以上の兵士を送り込んだ。米国に次ぐ大派兵であった。この戦争で約5000人の韓国人が死んだ。ハンギョレ新聞社に乱入した元兵士たち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アメリカ軍が散布した枯れ葉剤の被害に苦しむ元兵士らが、今も韓国には多い。

ベトナム戦争当時、韓国軍総司令官だった蔡命新は、先の『ニューズウィーク』でのインタビューで「誰に対しても償う必要はない。あれは戦争だった」と明言している。

アメリカ軍によるソンミ事件などの虐殺行為がベトナム戦争当時から国際的に批判を受け議論の的となったのとは対照的に、韓国軍による虐殺行為については、こと韓国国内では長く沈黙が保たれてきた。

冷戦時代、反共産主義が優先された韓国では、自国の恥部となり得る問題は隠されてきた。それどころか自国民が被害者となったケースでも、問題は隠されてきた。例えば朝鮮戦争下での米軍による韓国避難民大量虐殺の事実でさえ、韓国メディアで報道されたのは金泳三政権になってからの94年である。

また全斗煥・盧泰愚両大統領がベトナム戦争で武勲を挙げた軍人であったという政治事情もあり、ベトナム戦での過去は、韓国では幾重にもタブーであり続けた。

しかし、冷戦終結と韓国の民主化により、このタブーは破られた。では韓国のごく一般の市民はこの問題をどう受けとめているのだろう。

「世代によって、受けとめ方はかなり違うでしょうね。若い世代であれぱ、さほど反発もなくふつうに考えられるでしょうが」

そういうのは、米国の大学に留学中の韓国人男性(28)だ。

「自分たちの世代にとって、ベトナム戦争といえば、まず韓国が高度成長を遂げた時代という、明るいイメージとセットになっている。そもそもベトナム戦争について学校で習ったり、語り合ったりした記憶もない。よく『忘れられた戦争』などといういわれ方もされましたが、本当にそのとおりでしたから」

実際に、韓国の歴史教科書には、ベトナム戦争についてほとんど記述はされていない。中学生向けの国定教科書に記されているのは「そして、共産侵略を受けているベトナムを支援するために国軍を派兵した」の約1行のみだ(『入門 韓国の歴史?国定韓国中学校国史教科書』明石書店より)。

そして、教科書以外での「認識」としては、やはり「経済成長」の方が先にくるというのも一般的な認識のようだ。

ベトナム戦争時、韓国からベトナムへは兵士のみではなく、多くの労働者や技術者、ビジネスマンなどが渡っていった。兵士らにアメリカから支給された手当や労働者らの賃金、韓国企業の得た利益などは約10億ドルにものぼり、それらは本国に送金されて韓国経済を潤した。かつて日本が朝鮮戦争の特需を契機に高度経済成長したように、韓国がこの「ベトナム特需」を契機に「漢江の奇跡」と呼ばれる驚異的な経済発展を遂げたことは、広く知られるところだ。

ソウル在住の会社員(35・男性)は、こう語る。

「虐殺のことはメディアに取り上げられて知りました。でも詳しく読んだわけでもないし、どこまでが事実なのかわからない。ベトナムと韓国はいい関係にあり、日韓関係とは違うと思う。問題化しないかぎり、このままそっとしておきたい気特ちです。ベトナム戦争では被害にあった韓国人兵士も多く、自分の家族に戦争での負傷者がいれば、複雑な気持ちだと思いますよ」

「日本人の友人の微妙な表情がわかった」

そして「虐殺」と「責任」となると、どうしても「日本」が出てきてしまうところも、この議論を複雑にしている。ソウル在住の大学生(24・男性)は「徴妙な気持ち」と語った。

「自分としては(虐殺の報道は)ショックでした。ベトナムは観光ブームになったときに行きたいな、と思っていたけど、現地の若者と話すときにどういう態度を取ったらいいか迷いますね。同じ世代の日本人と会ったとき、彼らが徴妙な顔付きをしていたのが、わかったような気もする。教科書や靖国で激しい日本批判があるけれど、自分たちだって同じようなことをやったじゃないか、日本だけを責められるのか、という気持ちにもなる。もっとも、それを日本からいわれれば、やっぱりムカつくけれど」

(これこそ、反日教育のたまものというものだ:ブログ主注)

ソウル在住の会社員(24・女性)も「日本を非難するなら、韓国ももっとベトナムに謝罪するべき。きっぱりした態度をとらないと、逆に日本につけこまれる恐れ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と、日本を意識した発言をした。

(同上)

ちなみに、ベトナム政府はこれまで謝罪や補償は一切求めていない。(一方、朝鮮半島は日本の罪をねつ造し、一貫して補償と謝罪を求め続け、まだ足りないというのが口癖になっている。:ブログ主注)98年、韓国大統領として初めてベトナム訪問をした金大中は「遺憾の意」を表明。韓国外交省も「謝罪ではない」とコメントしていた。しかし、この8月24日、ソウルで行なわれた首脳会談で、ベトナム大統領として初めて訪韓したルオン大統領に対し、金大中大統領は「我々が不幸な戦争に参加し、不本意ながらベトナム国民に苦痛を与えたことを申し訳なく思う」と、「謝罪」に一歩踏み込んだ発言をした。

「うまいやり方ですね。意図はともかく、これで日本から『韓国は謝ってさえいないじゃないか』と突っ込まれるスキをなくしたわけだから」

と、韓国政治に詳しい韓国人ジャーナリストはいう。

「だが、これで韓国人全体が『自分たちも加害者だった』と認識したと考えない方がいい。むしろ、この謝罪は日本に向けた外交力ードとみた方がいいでしょう」

歴史認識が世界中で「外交ツール」となってしまった時代に、しかもベトナムだけでなく、そこに「日本」も絡んでくるだけに、この問題、韓国内では難しい議論となりそう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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