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를 지켜온 동래권번
[조인스 블로그] 입력 2013-01-03
전통문화를 지켜온 동래권번
동래온천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909년 부산진~ 동래 남문간에 경편철도가 놓인 후라고 봐야한다. 1909년 12월 18일 동래남문~온천장 입구사이에 노선 연장공사가 준공되어 12월 19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이어 1915년 10월에는 부산진과 동래온천장간의 경편철도 대신에 전차가 운행되기 시작하면서 대중교통 시대열었다. 아울러 온천장 일대에 전등이 가설된 것도 한몫하였다.
벚꽃이 활짝핀 동래온천의 수려한 풍경
전차편으로 부산역전에서 동래온천까지는 40~50분 걸렸는데, 1916년께 부산우편국 앞에선 만원이라 전차를 탈 수 없었다. 그래서 부평정 종점까지 걸어가서 탔는데 여기도 벌써 30~40명이 줄을 서 있었단다. 부산~온천장 왕복할인권도 나왔고, 목욕탕 입욕권을 끼운 전차표도 나왔다. 1930년 부산부민(釜山府民)이 13만 명인데 1년간 온천이용객은 16만 명을 헤아렸다. 동래선 이후 범일정선 대청정선 장수통선 대신정선 목도선 등 여러 노선이 생겨 부산은 전차의 도시가 된다. 1920년대 중반에는 부산 인구의 25%가 매일 전차를 타고 다닐 정도였다.
그 만큼 전차는 부산의 대중교통의 중심역활을 하였다.
부산역전에서 온천장까지 운행하였던 당시의 전차
이에따라 온천장을 찾는 욕객들은 더욱 늘어나고 일본인들의 진출은 본격화 되었다. 일본인의 여관 요정 상점들이 50여호로 크게 늘어났다. 1920년대를 전후하여 동래온천에 자리잡은 이름난 일본식 여관으로는 봉래관(蓬萊館 : 지금의 농심호텔)을 비롯하여 동래관(東萊館 : 지금의 스파쇼핑 자리), 명호관(鳴戶館), 횡정관(橫井館), 황정관(慌井館 : 지금의 금호장), 정인실(靜乃室), 송엽실(松葉室), 탕내본여관(湯乃本旅館) 등이 있었다. 모두가 '봉래관'을 축으로 온천장의 요지를 차지하고 중심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수 없이 밀려드는 일본인들의 침탈로 동래온천이 그들의 전유물처럼 변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내국인들이 경영하는 여관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침천관(枕泉館), 김천관(金泉館), 계산관(桂山館), 일신관(日新館), 명월관(明月館) 등이 그것이었다. 이어 지금까지 당시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내성관(萊城館)과 동운여관(東雲旅館 : 내성관 옆의 도일호텔), 이향원(二香園), 벽초관(壁初館), 산해관(山海館) 등이 더 세워졌다. 대부분이 중심가를 벗어난 중소규모의 여관이었으나 동래지방을 비롯한 인근 김해·창원·양산·경주 등지의 우리나라 토호들과 한량들이 출입하며 풍류와 낭만을 즐겼던 곳이었다. 그때의 여관이란 지금과는 달리 목욕업과 숙박업·요리집을 겸한 복합적 기능을 지닌 종합 휴식처 같은 곳이었다.
지난날 유명했던 동래별장 정면 모습.
옛날에는 유명한 기생이 공연하는 특급 요정으로 부산의 정계, 재계 거물급 인사들이 드나들던 특별한 시설이었지만 지금은 회갑연, 돌잔치, 가족 모임 등 연회를 주로하는 행사장으로 변하였다. 이곳은 1920년대 초 일본인 하사마 후사타로 (迫間房太郞)에 의해 지어져 하사마별장(迫間別莊) 으로 불렀는데 해방 후 하사마 별장은 부산에 진주한 경상남도 제3지구 미군정청(美軍政廳) 사무실로 한때 사용되었으며, 6 25전쟁으로 수도가 부산으로 옮겨졌을 때는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의 관저(官邸)로 사용되고 하다가 오늘의 "동래별장"으로 변하기에 이르렀다. 온천장에서 당시 원형을 보존하고있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동래풍류악단
각종 음식점과 요리점의 영업이 활발해지면서 일제강점기 때 관기제도의 폐지로 인해 자유로운 몸이된 동래부 관기 출신들이 자치적으로 동래기생조합(1910년)을 만들었다. 이 기생조합 기생들은 동기들에게 가무(歌舞)를 가르치고, 자기 자신들이 닦은 가무를 연희자리에서 베푸는 일이었다. 1912년에 동래예기조합(東萊藝妓組合)으로 이름을 바꿔 동래읍 교동(지금의 명륜동 부산지방기상청 부근)에 자리잡고 있었다. 동래예기조합 소속 기생들은 주활동 무대가 동래온천장의 고급 요리집이 주무대였다. 동래온천장으로 진출하면서 독특한 기방문화가 이때부터 움트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동래온천의 기방문화는 우리나라의 오랜 기방문화의 역사와 함께 민속예술의 전통과 맥을 이어준 특수한 생활문화의 한 부분을 이루기도 했다. 1920년에는 일본식 ‘권번(券番)’으로 이름을 바뀌게 된다.
가야금 수업시간
동래온천에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게이샤(일본 기생)도 진출하였다. 게이샤는 우리나라 기생과 비슷하게 일본 요정의 술자리를 전통 현악기인 샤미샌(三味線)을 튕기며, 노래를 부르거나 봉오도리란 춤을 추어 여흥을 돋구기도 하고 시중을 들기도 하는 일본 전래의 기녀들이었다. 따라서 온천장에서 게이샤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 동래부(東萊府)에 관기(官妓)를 둔 것은 다른 지방의 관기와는 달리 외교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동래부의 관기는 일본에서 오는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해서였다. 사신이나 사신을 맞아들이 측이 대화의 경색과 분위기 변화를 위하여 풍류와 춤들이 곁들여 졌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임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을 따라 순절한 애첩 김섬의 절개에서 보듯 조선 때 동래 기생은 왜국에도 유명했고, 그만큼 콧대가 높았다.
유금선: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 동래학춤 보유자
동래권번 출신의 마지막 예기, 구음 소리꾼
동래관광호텔에서 발행한 「동래온천소지」에 동래지역의 기생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송상현 부사의 애첩 금섬부터 시작해서 동래 출신 과학자 장영실의 어머니가 동래 관기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동래권번의 약사이다. 기록에 의하면 1898년 일본 영사가 조선의 궁내부에 동래온천 임차계약을 요구하는데 이때 일본 기생들을 공동관리하는 "오끼야권번"이 생기고 게이샤(藝者를 일본식으로 발음)들의 조직인 권번을 본 따 1910년 "동래기생조합"을 결성했는데 사무실은 동래세무서 옆 중앙의원 자리였다. 1896년 공사노비철폐제도가 시행되어 관기가 없어진 이후 14년 만이다. 동래구 명륜동에 있는 영보단은 노비와 기생의 호적을 소멸시킨 은총을 영원토록 기념하는 비석으로 세운 것이다.
1912년 "동래예기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는데 게이샤가 예자(藝者)를 뜻하므로 조선기생들도 예기(藝妓)로 표현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1920년 명칭을 "동래권번"으로 바꾼다. 권번은 교방(敎坊)의 일본식 발음이라 한다. 1940년대 사무실을 온천동으로 옮긴다. 1945년 해방을 맞은 동래권번은 또 다른 고객인 미군들과 함께 어울리며 서양 사교춤과 팝송과 재즈, 그리고 대중가요의 물결 속에 휩싸인다. 1961년 군사구데타와 함께 권번은 활동의 제재를 받으며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1962년에 "동래국악원"으로 명칭을 개칭했다. 1968년에 온천동 210번지, 부산시 소유 낡은 일본식 목조건물을 불하받아 사무실을 이전하고 "동래국악진흥회"라는 법인체로 변신한다. 현재는 "동래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살풀이춤
한일 합방 이후 교방이 폐지되고 일제의 민족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우리의
예술은 점점 쇄락하고 급기야는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인 상황에 부딪쳐 우리의 예술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권번이라는 특수한 곳에서 예술은 어렵게 그 맥을 이어갔다. 그 당시 부산의 예술도 마찬가지로 권번 기생들의 학습에 의하여 명맥을 이어 왔다. '한국춤의한 경지와 맥'이 동래권번에 있었던 것이다.
동래고무(鼓舞)
1929년 동래권번이 총파업을 했다. 몸 파는 창기(娼妓)들이 받는 신체검사를 받아라는 일제당국의 방침에 대한 항의였다. 동래권번은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하고, 동래제2보통학교 증축에 큰돈을 기부하기도 했다.
동래 기방의 행수기생 출신으로 기생조합 창설의 주인공이 되었던 한동년은 아름답고 기품이 넘치고 가무에 일가를 이룰 정도여서 영남지역의 풍류객이나 한량들 사이에는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목사 김만일(金萬一)의 설득에 감동 받아 용호동 나환자촌을 따라갔다가 고아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다. 이후 권번생활을 청산하고 전 재산을 고아원에 기부하고 고아를 돌보는 보모가 되었다. 이후 김만일 목사와 결혼하여 서울로 자리를 옮겨 여러 가지 사회사업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여생을 보람 있고 가치 있게 마쳤다. 한동년은 그 후 동래온천의 많은 기생들에게 가장 추앙받고 존경받는 대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0년대 남도창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후일 ‘호산장’이란 요정을 경영하기도 했던 이연숙(李蓮淑)도 한동년의 맥을 이어 사회사업으로 여생을 보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동명목재 강석진 사장 등과 더불어 부산에서 BBS운동을 가장 먼저 일으켜 청소년 선도운동에 앞장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연숙은 여자로서는 드물게 부산시 자문위원까지 지냈으며 그 밖에도 각종 불우시설 지원에 애쓰며 만년을 보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때 동래권번의 와해를 꾀하면서 아편을 뿌리기도 했다. 부산지역에는 1915년 봉래권번, 1940년 부산권번이 생겼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없어졌다. 어려운 세월속에서나마 동래권번은 동래국악원, 동래국악진흥회라는 이름으로 계속 명맥을 이었다. 그 속에는 학춤 살풀이 굿거리(입춤) 고무(鼓舞) 등의 값진 무형문화재가 지켜져 오고있으니 가치가 한결 돋보인다고 할 수있다.
** 동래학춤 영상
구음: 유금순, 무용: 동래학춤 예능보유자및 전승자
부산국악방송 개국 기념공연"부산, 국악을 품다" - 동래학춤
http://members.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8342
권번
券番
일제시대 기생들의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
검번(檢番) 또는 권반(券班)이라고도 했는데, 조선시대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妓生廳)의 후신이라 할 수 있다. 조선에는 원래 관기제도 외에는 공창제도라는 것이 없었으나, 한일합병 후 일본인이 들여온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의 유곽제도를 1916년 3월 데라우치[寺內] 총독이 공창제도로 공포했다. 그 일환으로 기생도 허가제가 되어 권번에 기적을 두고 세금을 내게 했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정 출입을 지휘하고 화대를 받아주는 중간역할을 담당했다. 서울에는 한성권번·대동권번·한남권번·조선권번이, 평양에는 기성권번 등이 있었고, 그밖에 부산·대구·함흥·진주 등에도 각각 권번이 있었다. 권번의 필수과목에는 조선음악ㆍ무도ㆍ조선예법 외에 일본어도 들어 있었다. 권번은 해방 후 1947년 10월 14일자 과도정부 법률 제7호로 공창제도가 폐지됨으로써 철폐되었다.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3&cp_code=cp0428&index_id=cp04280006&content_id=cp042800060001&search_left_menu=
조선권번
한성기생조합이 기부(妓夫) 있는 기생을 대상으로 한 유부기(有夫妓) 조합이었다면, 이에 대항하여 기부 없는 기생을 대상으로 조직한 조합이 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이다. 이 조합의 구성원은 주로 평양 중심의 서도 출신의 기생으로 구성되었는데, 이후 1919년(대정 8년)에 대정권번(大正券番)으로 개칭하며, 대정권번에서 분리되어 평양기생들로만 조직된 대동권번(大同券番)이 이로부터 분리된다. 조선권번은 1923년에 하규일을 중심으로 대정권번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초창기로부터 1936년까지 조선권번에서 교육시킨 기생만도 3,000여 명을 헤아렸다고 할 만큼 조선권번은 서울의 대표적인 권번이었다.
「삼천리」8권 6호에 실린 <명기영화사(名妓榮華史) 조선권번>에는 조선권번이 배출해낸 여러 명기들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다. 원산홍(元花紅), 오소홍(吳小紅), 김산호주(金珊瑚珠) 등은 모두 하규일씨의 손아래에서 자라난 기생들로 大正 元年경에 활동한 대선배격의 기생들이다. 이들이 물러간 뒤에는 현매홍(玄梅紅)과 김월산(金月仙)이 또한 당대의 한다하는 이름을 날리던 기생들이었다고 한다. 열너덧 살에 기생이 된 이들은 경성잡가(京城雜歌)와 서도잡가(西道雜歌)에 뛰어났는데, 매홍은 또한 김상순(金相淳)에게 배운 양금 연주가 걸출했다. 이들은 후에 돈 있는 남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14세에 기생에 나선 주산월(朱山月)은 얼굴은 비록 예쁘지 않았으나 기예가 뛰어나고 마음씨가 곱고 태도가 아련해서 인기가 많던 기생이었는데,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절친한 사이어서 그가 죽었을 때에는 뜨거운 피눈물을 그의 무덤 위에 몇 번이고 뿌렸다고 한다. 이후 주산월은 기생일을 접고 천도교의 돈으로 동경에 건너가 여자 영어숙(英語塾)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천도교 여자부의 총무로서 독신으로 지내었다. 대정 8년부터 기생이 된 이난향(李蘭香)과 김산호주(徐刪瑚珠)는 평양 태생으로 춤, 노래, 양금을 잘 하여 매우 인기가 있었고, 그들의 뒤를 이어서는 백운선(白雲仙)과 김수정(金水晶)이 있었다.
많은 명기를 배출해 낸 조선권번은 1936년 4월 30일 하규일에 의해 경성부 다옥정 45번지에 자본금 8천원의 주식회사로 바뀌었다. 1939년에는 대표가 이종완으로 변하였고, 1942년에는 다시 일본인으로 대표가 바뀌었다가 1942년 8월 17일 삼화권번으로 통합되었다.
다음은 「삼천리」8권 6호에 실린 <명기영화사 조선권번>의 전문이다.
名妓榮華史 朝鮮券番
浪浪公子
서울장안에 기생권번(妓生券番)이 몇이던가?
조선권번(朝鮮券番)이 있고
한양권번(漢陽券番)이 있고
종로권번(鍾路券番)이 있다.
이 세 개의 기생권번에는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기생들이 있는가?
한 권번에 근 오백(五百)명, 세 권번이면 천오백 명(千五百名)의 기생들이 있다.
기생권번이란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생」을 만들어내는 기생학교이다. 이들 권번에서는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양금이면 양금, 모두가 제각기 선생이 앉아 있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웃으며 욕해가며 기생들을 기르는 데가 여기다.
그러면 조선에 기생이 언제부터 있어 왔던가하면 그야 역사가들의 알 바로서 아마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시대부터 있어왔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고려 때에야 비로소 완전한 기생이 있었다고 하나 이런 것은 우리들의 알 바가 아니라, 다만 조선은 자고(自古)로 기생이 하도 유명하여 왔던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요, 누구나 아는 일이다.
궁안에 무슨 연회(宴會)가 있을 때도 기생. 고관대작이나 돈푼 있는 풍류객들에게도 거저 기생.
이러한 기생들도 그 옛날엔 다만 「기생서방」이 있어 기껏해야 한집에 사오명(四五名)이 아니면 오륙명(五六名)이 모이면 대작이고 돈푼이나 발겨먹자는 야비한 수단을 모르는 깨끗한 「기생」도의 품성을 기르기에만 힘을 쓰는 한 개의 예술가들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이 세 권번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유명한 기생을 많이 이 강산(江山)에 내보낸 「조선권번」을 먼저 찾아, 한 때에 그 이름이 휘날리던 유명한 기생들의 영화사(榮華史)를 다시금 한번 더듬어 볼까한다.
그러면 「조선권번」의 연혁(沿革)은 어떠한 길을 밟아 왔나부터 간단히 적어 본다.
개명 이후 모든 제도가 일신하고 새로워지는 통에 이 기생에 대한 제도도 새로 생겨났던 것이다.
그전에 기생들은 기생서방에게 매달려서 일생을 기생으로 그 서방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쳐 오던 지난날의 서방제도를 없이 하고 새롭게 기생권번을 만들었던 것이니 이것이 명치사십삼년(明治四十三年), 하규일(河奎一)씨와 그밖에 몇몇 분이 널리 전선으로 기생을 모집하여 소위 기생조합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때에 모여온 기생들이란 대부분이 평양기생들이었다. 이것이 대정팔년(大正八年)에 와서 비로소 「대정권번(大正券番)」이란 이름으로 오늘의 조선권번의 전신(前身)이 되었던 것이다. 명치사십삼년(明治四十三年)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조선권번」은 오로지 하규일(河奎一)씨의 공로이요 꾸준한 지도가 있었다한다. 또한 이 권번의 초창기로 오늘날까지 하규일(河奎一)씨의 손 밑에서 자라난 기생이 수삼천명(數三千名)을 헤아린다고 하니 실로 조선기생권번사의 첫 페이지를 이루는 하규일(河奎一)씨의 존재는 뚜렷한 바가 있다 할 것이다. 지금에 하규일(河奎一)씨는 「조선권번」을 움직이는 한 주인으로 되었다.
조선의 정악(正樂)은 물론이지만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하규일씨의 손아래에서 하나에서 수천을 헤아리는 수많은 기생(妓生)들 가운데서도 얼굴 잘 나고 재주가 용하고 춤 잘추고 노래 잘 불러서 장안의 호걸과 풍류객들이 너도나도 하며 단 침을 삼키며 연연사모하던 기생들이 하나 둘이 아니려니 이제 이들의 지난날의 성망(聲望)과 그들의 자취도 알아보자. 원화홍(元花紅)이 그러하고 오소홍(吳小紅)이 또한 그러하다.
그밖에는 김산호주(金珊瑚珠) 또한 빠질 수 없는 한다하는 명기(名妓)였다. 이들은 모다 하규일(河奎一)씨의 손아래에서 노래를 배우고 춤을 배운 유명한 기생들이었다.
고향은 본래가 모다 평양이었으나 서울에 올라와 한동안 수많은 남자의 흠모와 사랑을 무던히 받아오던 기생들이다. 그중에도 더구나 김산호주(金珊瑚珠)같은 기생은 「일문십지(一聞十知)」하는 재주를 구비한데다가 평양에서부터 이름있는 어여쁜 얼굴을 가진 기생이다. 「패성」의 풍류객도 풍류객이려니와 그 당시 서울장안의 기생방을 드나드는 고관대작의 아들까지 사랑을 아끼지 않던 일대명기였다. 그 때가 바로 대정원년(大正元年)경이어서 아직 예적도 없이 지나던 때의 일이다. 지금의 이들은 모다 어느 돈 많은 남자들을 얻어가서 곱다랗게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지! 그렇지 못하면 일찍이 세상을 떠나갔는지? 그들의 소식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들이 한번 기생의 자리를 물러간 뒤에는 현매홍(玄梅紅)과 김월선(金月仙)이 또한 당대의 한다하는 이름을 이 강산(江山)에 날리던 명기(名妓)들이다. 현매홍(玄梅紅)의 본명(本名)은 달순(達順)이요, 김월선(金月仙)의 본명(本名)은 복순(卜順)이라. 둘이 모두 지금에는 사십(四十)을 가까이 바라다보는 이들로서 매홍(梅紅)은 열 넷에 월선(月仙)은 열다섯에 똑같이 기생이 되어서 하선생(河先生)의 귀여움을 받아가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춤추고 노래 부르게 되었으니 둘이 모두 경성잡가(京城雜歌)와 서도잡가(西道雜歌)를 잘하는 명창(名唱)들이었다. 더구나 매홍(梅紅)은 김상순(金相淳)씨에게서 양금(洋琴)까지 배워서 양금 잘 타기로도 당대에 그 이름이 자자하였던 기생이다. 모다 십오년(十五年)동안이나 기생으로 있으면서 십여년전(十餘年前)까지도 이름있는 명기(名妓)로 치던 기생들이다. 지금에는 모두 현모양처가 되여 돈 있는 남자의 가정으로 들어갔다한다
그런데 이들과 거의같이 나와서 몇 해 앞서 기적(妓籍)에서 물러간 이로는 김명옥(金明玉)이 있다. 명옥(明玉)이 역시 지금은 오십(五十)의 고개를 바라게 되는 몸이나 한 이십년(二十年)전까지는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기로 (더욱이 서도잡가(西道雜歌))는 빼어 놓을 수 없는 명기(名妓)의 하나였다. 지금엔 이 기생도 전라도 어떤 부호와 짝을 지어 평온한 가정을 이루어 여생을 보낸다고 한다. 그 다음에 나타난 명기(名妓)가운데는주산월(朱山月)이 있다. 본명(本名)은 주○경(朱○京)이다. 일찍이 「천○교의×대교주 손×희」의 뜨거운 총애를 받아 오던 주산월(朱山月)이는 어려서 십사세(十四歲)에 기생으로 나섰던 것이다.
얼골은 비록 잘 나지 못한 편이나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더구나 마음씨가 곱고 태도가 아련해서 장안의 수많은 남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손○희씨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비록 기생의 몸으로 있으나마 침식을 잊어가면서 극진한 간호를 하였던 것이며 그가 돌아감에 뜨거운 피눈물을 그의 무덤 위에 몇 번이고 뿌렸다고 한다. 그가 기적을 떠나 천○교의 돈으로 동경에 건너가 여자 영어숙(英語塾)학교에까지 졸업하고 돌아와 오늘날까지 내내 독신으로 지내면서 지금엔 천○교의 여자부의 총무로서 50의 고개가 넘도록 피로를 모르고 부지런히 일을 하여 가고 있다.
그가 간 후에는 또한.
이난향(李蘭香)과 서산호주(徐刪瑚珠)를 손꼽을 것이다.
이난향의 본 이름은 仙?요 서산호주의 본 이름은 순봉(順鳳)이다. 둘이 다 대정 8년부터 기생으로 나섰으니 난향이 나이 19요 산호주는 15였다.
평양이 역시 이들의 고향이었고 똑같이 춤 잘추고 노래 잘하고 양금 잘 타기로 그 당시 장안의 남자들은 어누 누구 모르는 이가 없었다.
더욱이 이난향은 얼굴 잘나고 거동 곱고 말소리가 맑을 뿐더러 하나 물으면 열을 아는 재주덩어리였으니 그것은 난향의 맑은 두 눈동자와 넓죽한 이마에 그 재주가 들었다고나 할 것이다. 글 잘하는 사람들도 「난향」이요 돈 잘 쓰는 궐자들도 「난향」이었다. 그러더니 난향이나 산호주나 기적에 몸을 둔 지 15년째 되는 소화 8년 봄, 꽃피고 새 지저귀던 때 이들의 나이도 모두 30년의 고개를 넘게 되니 이들에게는 머지않아 닥쳐올 얼굴의 주름살을 막을 길 바이없음을 느꼈던지 난향은 영남의 어떤 부호의 사랑과 짝을 지어 화류계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지금에는 아들 딸 많이 낳고 무심한 세월만을 손꼽고 있으리라.
그러면 난향이와 산호주가 간 뒤의 조선권번에는 어떤 명기가 오늘날까지 있어오는가?
백운선(白雲仙)이가 그 이름이요, 김수정(金水晶)이 또한 그러하다.
백운선의 본 이름은 순향이요 명치 33년 3월 17일이 그의 생일이다. 인제 나이는 먹을 만치 먹어 대정 8년에서 오늘날까지 내려오니 실로 기적에 몸을 던진 지 20년을 헤아리게 되었다. 기생으로 더구나 한다하는 명기로 이렇듯이 오랜 동안을 계속해서 오는 이는 오직 백운선이 하나뿐일 것이요 30의 고개를 넘으나 그 노래 그 춤은 조금도 변할 줄 몰라 그의 인기는 도무지 사라질 줄 모르니 이를 가리켜 만년 명기라고나 할 것이다. 모두가 하규일씨의 손에 길러지면서 귀여움을 많이 받은 명기가 그 누구랴마는 유독히 「백운선」은 그중에서도 가장 귀여움을 받아오고 아껴오는 기생이다.
김수정(金水晶)은 아직 활짝 피지 못한 한 떨기 백장미화, 그의 나이 24다. 일찍이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졸업하던 즉시 열다섯에 기적에 몸을 두어 오늘에 이르렀다. 경기잡가, 서도잡가가 기막히지마는 양금도 신간이 녹고 춤도 탄복할만하니 그의 재주가 어느 명기에 뒤지지 않는다. 요사이 장안에서 백운선이를 아는 자 또한 김수정을 알게 되었다. 한 가지 풍편에 들리는 바는 수정은 오래지 않아 기적에서 정든 남자를 따라 가정으로 들어간다니 수정이 간 뒤에는 과연 누가 또한 나설 것인가.
「조선권번」이 있어온 지 이제 25여 년 그 동안 얼굴 잘난 명기 이밖에도 많았었고 소리 잘하고 춤 잘 추던 기생 또한 허다하며 어떤 기생은 비관하고 목숨을 끊은 이도 있고 어떤 기생, 해외의 손님과 정을 드려 머나먼 외지로 가서 소식조차 없는 이가 하도 많으니 이것을 모조리 적을 수도 없는 일이요 그것을 다 추려낼 시간의 여유를 못 가졌음을 한할 뿐이다.
[참고] 하규일 : 1863(철종 14)∼1937. 자는 성소, 호는 금하(琴下), 본관은 진주, 서울출신. 6세부터 집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19세에 음악수업에 들어가니 스승은 최수보이다. 선생의 집안은 전통적으로 가곡을 잘하여 하순일(河順一), 숙부 하준권 등이 당대의 선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당대에 이름 높던 박효관에게도 배웠다. 31세 때 관계에 진출하여 한성소윤 겸 한성재판소 판사와 내장원 문교정리위원 겸 전남 독쇄관, 진안 군수 등의 벼슬을 지냈고, 국치(國恥) 후에는 관직을 버리고 다시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그 뒤 선생은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 학감에 취임하여 조선음악뿐만 아니라 서양 음악의 수용과 그 보급에도 공헌하였다. 조선정악전습소는 가요부와 음악부 두 부를 두고, 여기에 이수과·교수과 둘로 나누어, 이수과는 이미 수학한 이로 더욱 연수케 하는 과정이요, 교수과는 일반 초보자의 초급반이었다. 선생은 학감의 직분이었으나 중부 상다동(上茶洞)에 자리한 여악분교실장을 겸하니, 이것이 그 뒤 기생조합과 관련을 가져 여악의 보존과 신장에 큰 기여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규일 선생이 이왕직아악부 촉탁으로 임명되어 아악부 젊은 연주직과 아악생에게 가곡 전수를 책임지고 출강한 것이 1926년 4월의 일이었다. 아악부에서 가곡, 가사, 시조 등 우리나라의 정가를 전승함으로써 귀중한 전통 가악의 절멸을 막고, 굳건히 뿌리내려 길이 보존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선생의 공로이다. 선생이 한 평생 심혈을 기울여 길러낸 제자는 매우 많아, 남창으로 일러도 아악부원 양성소 출신만도 거의 60명을 육박하고 있고, 그 여창으로 말하면 정악전습소 다동 여악분교실로 시작하여 다동조합, 대동권번, 조선권번에 이르기까지 근 1세대에 걸쳐 배출한 여제자는 실로 무수하다. 가집(歌集)으로 1931년에 펴낸 '가인필휴(歌人必携)'가 있다.
http://www.shinmoongo.net/sub_read.html?uid=30592
권번출신 군산의 마지막 기생 '팁은...'
[인터뷰] 김난주 할머니 "기생질 하고 싶어서 두번씩이나 도망쳤지"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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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회갑연에 초대되어 헌수를 도와주는 김난주(좌) 45세 때 모습. 윤기 흐르는 머리가 시선을 끈다.(1971년) © 조종안
칼바람이 볼을 때리던 지난 2011년 12월 15일. 군산의 마지막 권번(가무를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곳) 출신 기생(妓生) 김난주(85) 할머니를 찾았다. 60년 가까이 이웃으로 살아온 김 할머니 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 끝 집이었다.
좁고 짧았지만, 6~7가구가 오무래 오무래 살던 골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김 할머니네 한 집만 남아 고요가 흐르는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금방 갈아놓은 먹물처럼 번들번들하던 기와지붕이 세월의 풍상에 시달리다 깨지고 탈색되어 마음을 짠하게 했다.
대문을 여는 순간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생'을 천시하던 시절 김 할머니 댁은 동네에서 조카 이름을 딴 '정선이 고모네 집'으로 통했다.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는 어른들은 '난주네 집'이라 불렀으며, 아이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금단의 구역으로 '기생네 집'이라고도 했다. 누가 들을까 봐 쉬쉬하면서.
"안녕하셨어요?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랑가···. 그랴 맞어, 나는 누군가 했제.(웃음) 추운 날 어쩐 일이당가. 어여 안으로 들어와. 우리 집을 다 찾아오고, 참말로 별일이네!"
꼬부랑 할머니가 된 김 할머니는 처음엔 "누구랑가?"하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3초도 지나지 않아 알아보고는 반가워하며 안방으로 잡아끌었다. 김 할머니는 예상대로 홀로 외롭게 살고 있었다. 옛날에는 친정어머니와 장애인 남동생, 조카 둘, 해서 다섯 식구였다.
"그전에는 마당에 장독대랑 샘이랑 있었는데 모두 사라졌네요."
"그~라제 조카사위가 고쳐줬어. 그나저나 웬 날이 이렇게 추워, 다리 밑에 거지들 모다 안 얼어 죽었는지 모르겠네. 그쪽은 차니께 이리~이리 아랫목으로 내려오라고. 커피 타줄까? 여그 귤도 하나 먹어보고. 참, 점심은 먹었능가?"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목소리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해학과 풍자가 깔려있고, 끌리듯 당기듯 튕기듯 하면서도 애틋함이 묻어났다. 약간의 수다스러움은 판소리 춘향가에서 월매가 야밤에 찾아온 이몽룡을 반기는 대목을 떠오르게 했다. 평생을 소리(唱)와 함께 살아왔으니 그 여운이 어찌 남아있지 않으랴.
"가시네 때 '바람피던' 생각만 나고 못 살겠드라고"
▲ 일본어 교육을 받는 일제강점기 권번 기생들.(김중규의 <군산역사 이야기> 스캔) © 조종안
김난주(金蘭珠)는 본명으로 1927년 전북 순창 산골에서 태어났다. 예능에 기질을 타고난 그는 어려서부터 기생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스무 살까지 '바람'을 피웠단다. 이곳저곳으로 가무를 배우러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강권으로 결혼식을 올려야 했다.
"남원의 안(安)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디, 남편은 집에서 글이나 읽는 학자였어. 그리도 어떻게 혀. 그럭저럭 살다 보니께 애기를 하나 낳았는디 어렸을 때 죽어 버렸어. 가시네 때 바람피던(가무 배우던) 생각만 나고 못 살겠드라고. 기생질 허고 싶어서 도망쳤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 김난주 20대 모습. 우리 소리가 좋아서 기생이 되려고 했다고. © 조종안
스스로 생과부를 택한 김난주는 스물두 살 되던 해 군산으로 이사한다. 변두리에 방 두 개를 얻어 친정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곧바로 소화권번에 입소하여 이기권, 김준섭 등에게 판소리와 장구를 배웠다. 그때 만난 장금도(84, 민살풀이 전승자)와는 60년 넘게 친구로 지내오고 있다.
김난주는 동료들에게 '타고났다!'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구음(口音) 구사를 잘했다. 춤을 추거나 악기를 배울 때 입으로 "나니나~ 나~나니~ 나리룻···" 하며 장단을 맞추다가 그 자체가 음악이 된 구음은 춤판이나 잔치판 등의 흥을 돋워주는 최고의 반주가 되었다.
스물네 살부터는 명월관, 근화각, 동해루, 쌍성루 등 큰 요릿집은 물론, 잔칫집으로 '밤 마실'을 나가기도 했다. 권번의 원칙은 4년을 마치고 시험을 거쳐 허가증을 받아야 하지만 워낙 목(소리)이 좋고 장구 솜씨가 뛰어나 권번에서 눈감아주었다.
김난주 인기는 대단했다. 집에서 곱게 화장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권번소속 예기 양성소에서 보낸 인력거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명월관 방마다 영화배우 닮은 김난주를 찾는 손님이 넘쳐났고, 마루에서 '뽀이'(boy)들이 서로 당기는 바람에 저고리가 찢어지기도 했다.
"팁은 한 시간에 기본 2원이었제.(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6원) 그러나 두 시간 놀고도 50시간 100시간으로 달아주는 고마운 손님도 있었어. 이런 얘기는 쪼까 거시기 헌디, 손님이 연애를 걸어오기도 혔는디, 마음에 들믄 잠자리를 하기도 했제. (웃음) 하룻밤 사랑이 10년, 30년, 평생을 가는 경우도 있었응께. 그란디 지금은 다 흘러간 꿈이 돼야 뿌렀어!"
다섯 식구 '가장'으로 살아온 인생... 상갓집에서 초대 받기도
▲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인 20대 후반 김난주의 모습. © 조종안
김난주는 동네에서도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인기 영화배우였던 이경희와 빼닮은 미인으로 알려졌었기 때문. 동료 기생들은 물론 요릿집 손님들은 영화배우 이경희 언니가 행차했다고 반기며 서로 옆에 앉히려고 다툼이 일기도 했다.
20대에 가장이 된 김난주는 열심히 노력했다. 인기 '짱'이었던 그는 1년 남짓 모은 돈으로 'ㄱ'자 기와집도 장만하고. 몸이 불편한 남동생도 장가를 들였다. 친정어머니 수발도 극진히 했다. 조카를 둘이나 보면서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다. 올케가 남편(동생)과 젖먹이 딸 둘을 놔두고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친정어머니가 있다고 하지만, 직장과 집, 양쪽으로 시달려야 했다. 올케가 없는 빈자리를 메워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조카들 엄마 노릇을 하면서 애처롭게 살아왔다. 그래도 결혼해서 50대 중반이 된 조카들이 엄마처럼 대한단다.
▲ 충청도 광천 부잣집 환갑잔치 마당에서 장구로 흥을 돋우는 김난주.(1973년) © 조종안
1960~1980년대 김난주는 주로 환갑이나 잔칫집에서 초청을 받고 외출을 나갔다. 동료 기생 2~3명이 함께 가서 자식들이 차례로 부모에게 술잔을 올릴 때 옆에서 도와주며 유창한 선율로 "받으시오, 받으시오, 이 술~ 한~잔을 받으시오"로 시작하는 권주가를 불렀다.
부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헌수(獻壽)가 끝나면 차일이 쳐진 마당에서 놀이판이 한바탕 벌어졌다. 놀이판에서는 장구, 북, 창, 구음 등으로 분위기를 잡아주었고, 손님들과 환갑을 맞은 본인이 소반에 팁을 놓아주며 흥을 돋우었다.
군산뿐 아니라 김제, 부안, 전주, 이리(익산), 충청도 등지에서도 초청을 받았다. 1박을 해야 하는 충남 대천이나 광천, 부여 등에는 친구이자 민살풀이 일인자인 장금도와 함께 다녔는데, 군산에서 왔다는 기생들을 보려고 몰려든 구경꾼이 잔칫집 마당을 가득 메웠다.
상가(喪家)에서 초대를 받기도 했다. 일반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내지만, 망자가 생전에 벼슬을 했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출상하는 날 기생을 불렀다. 애절한 소리로 저승으로 향하는 망자의 친구도 되어주고 길잡이도 돼주기 때문이었다.
기생이 요령잡이를 한다는 소문이 초상마당에 돌면 서로 상두꾼을 하려고 모여들었다. 머리에 흰 끈을 질끈 동여맨 기생이 상여에 올라 요령을 흔들면서 청아한 목소리로 만가를 선창하며 이끄는 꽃상여는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였으며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 옛날 나비들도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어!"
▲ 1960년대 중반 여름 피서지에서 동료들과 함께. 맨 앞이 장금도. © 조종안
세월의 변화는 물의 흐름과 같아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법. 40대 후반부터는 외출(잔칫집 행사)이 잦아졌다. 미제 깡통문화에 길들여진 한량들로 세대교체 되면서 우리의 전통 창(唱)에서 벗어나 신식가요를 즐기는 손님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구음 구사가 뛰어나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악기 다루는 솜씨가 능숙해지고 창법도 원숙해지면서 50~60대에는 학원을 개설해서 후배를 가르치기도 하고, 선후배 기생들과 모임을 만들어 내장산, 속리산 등으로 야유회를 다니며 덧없는 세월에 허전해진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호호백발이 된 김난주 할머니가 기억하는 기생 동료는 민살풀이 일인자 장금도를 비롯해서 금선이, 옥주, 채선이, 혜영이, 난영이, 도심이 등. 그러나 대부분 죽거나 타지로 나가 살고, 장금도만 군산에 살면서 전화로 소식도 전하고 사는 얘기도 나눈단다.
권번에 발을 늦게 들여놓아 기생 경력이 짧지만, 애틋한 사랑을 주고받았던 남자도 몇 된다고 털어놓는 김난주 할머니. 그러나 "지금은 시든 꽃이 돼 뿌렸고, 그 옛날 날아들던 나비들도 모두 저 세상 사람 되었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c510&logNo=40056344483
권번[券番]출신 妓生 列傳
권번[券番]
조선시대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 또는 교방[敎坊]청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권번[券番]은
검번[檢番] 또는 권반[券班]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조선말 을사조약으로 나라에서 관리를 했던
교방이 없어지면서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자연스럽게 생겨났으며
교방에서 관장하던 전통 예술의 전승 통로 역활을 하게 되었다.
권번의 학습은 '교양학습' '일본어학습' '기예학습'을 주로 받았다.
'교양학습'은 처음에 걸음걸이로부터 시작하여 인사하는 법, 앉는 법, 말하는 법, 옷 입는 법 등
기초적인 예의 범절에 대해 배우는 필수과목이었다.
'기예학습'은 악(樂), 무(舞), 기(器)로 나누어 몇명씩 조별로 나누어 학습을 했으며
소리는 시조, 단가, 진양조, 판소리의 단계를 배우고
판소리 단계에 와서는 개별적으로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기생조합은 서울의 광교조합[廣橋組合]이었다.
광교조합은 남편이 있는 기생 즉 유부기[有夫妓]들로 조직된 조합이였는데
뒤에 한성권번[漢城券番]으로 개칭을 하였다.
이들 기생조합이 '권번[券番]'이라고 하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뀐 것은 1914년 때였다.
당시 서울에는 한성권번[漢城券番] ·대동권번[大東券番] ·한남권번[漢南券番] ·조선권번[朝鮮券番],평양에는 기성권번[箕城券番] 등이 있었고,
그 밖에 부산 ·대구 ·광주 ·남원 ·개성 ·함흥 ·진주 등에도 각각 권번이 있었다.
1. 현매홍, 2. 김옥엽
평양 기성권번 출신의 현매홍과 김옥엽은 서울 상경 후
한성권번과 조선권번에 적을 두며 많은 활동을 했다.
현매홍은 가곡, 가사, 시조에 능통했으며
김옥엽은 초창기에는 궁중무용과 서도잡가와 경기잡가 그리고 30년대 중반부터는
가곡, 가사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특히 김옥엽의 '수심가'는 워낙 뛰어나 당시 장안 최고의 인기를 누린 연예인중 한명이었으며
문학가 김동환과의 로맨스는 인구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현매홍은 기생조합 최초의 잡지인 '장한' 편집인중 한명으로 활동했으며
일동축음기레코드 등에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온다.
김옥엽 역시 빅타, 콜럼비아, 태평 레코드 등에 수십장의 음반을 취입했다.
3. 오산월
산월이란 이름은 기생중에 가장 흔한 이름중 하나였다.
손병희 선생의 후처가 명월관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그 유명한 평양기생 주산월이며
1920, 30년대 배따라기로 일세를 풍미한 소리꾼이 서도기생 김산월이었다.
특히 김산월은 배따라기 같은 민요, 장한몽 같은 가요곡 외에도
도월색과 '이풍진 세상을(희망가')을 음반으로 녹음하기도 했다.
오산월은 이들 두 산월만큼 유명한 기생은 아니었으나
외모로 볼때 상당히 유명한 기생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4. 김영월
서도소리로 일세를 풍미하며 많은 일화를 남긴 장학선 등과 함께
대표적인 평양기생으로 평양의 기성권번에서 학습을 한 김여월은 소리에도 능통했으나
연기쪽에 일찍부터 소질을 보여 많은 활동을 한 기생이었다.
1927년 개봉한 영화 '낙양의 길'의 주인공이었다.
5. 윤채선
요즘 활동하고 있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킬 정도로 현대적인 마스크를 가지며
많은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윤채선은 대정권번 소속의 예기로
특히 조선무용에 능통했다.
활동시기가 짧아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6. 이옥란
소박하면서도 애수가 넘치는 목소리를 지닌 이옥란은
한성권번에 적을 두고 있었으며 국악과 양악 양쪽을 오가며 활동했다.
특히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한 가요곡 기생수첩, 눈물의시집,
꽃같은 순정 등의 노래는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7. 장연홍
최근 일제시대 최고의 얼짱이라고 평가받으며 붐을 일으키기도 했던 장연홍은
평양기생으로예능계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의식기생,
사상기생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유학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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